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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일보 오피니언 살며 생각하며] 피는 꽃만이 아름다우랴 / 2015년 04월 03일(金)

忍齋 黃薔 李相遠 2015. 4. 5. 0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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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일보 오피니언 살며 생각하며] 피는 꽃만이 아름다우랴 / 2015년 04월 03일(金)


은미희 / 소설가


세상이 봄기운으로 화사하다. 일 년 사시사철, 아름답지 않은 때가 있을까마는 이맘때, 딱 이맘때, 생명의 기운들로 넘쳐나는 지금이 가장 처연하면서도 아름답다. 알록달록한 꽃들의 향연이 주는 설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혹독한 겨울을 이겨내고 돋아난 그 생명들이 대견하고 장하기에 더 아름답다. 한겨울 추위 속에서 그것들은 얼마나 애면글면 숨줄을 붙들고 있었을까. 잎들을 털어낸 채 가장 가벼운 몸으로 겨울을 지내온 그것들에게서 삶의 지혜를 배운다.




그간 나는 너무도 무거웠다. 그러니 이제부터라도 남은 삶을 가볍게, 가뿐하게 살고 싶다. 하지만 안다, 삶의 고수가 아닌 이상 그것만큼 또 어려운 일도 없다는 사실을. 나는 고수가 아니다. 금방 상처받고 잔정에 매몰차지 못하다. 그래서 삶이 더 힘들 수밖에. 새롭게 생명을 틔우는 그것들을 보면서 한 번쯤 내 삶을 차분하게 돌아보고 정리하고 싶었다. 주변을 치우고, 삶을 조금 더 단출하게 살아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나를 짓누르고 있는 짐부터 치우기로 작정했다. 봄이니까, 생명의 환희로 넘쳐나는 새봄이니까.


사실 짐 정리는 오래전부터 해야겠다고 별러 온 일이었다. 그러나 짐이 하도 많아 엄두가 나지 않았고, 그래서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미뤄오던 참이었다. 하지만 더는 미룰 수 없었다. 게다가 겨울 설거지와 봄맞이 준비도 해야 했다. 그렇게 집 안 구석구석 쌓여 있던 짐들을 꺼내놓고 보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어떻게 이 많은 짐이 쟁여져 있었을까. 저장강박증 환자처럼 물건을 곳곳에 쌓아 놓고선 아무렇지 않게 살고 있었다. 그 물건들 가운데는 사놓은 채 까맣게 잊고 있던 물건도 있었고, 생각은 났지만 어디에 박혀 있는지 몰라 못 쓴 물건도 있었다. 너무 많아 나에게 어떤 물건이 있는지도 모를 정도였다. 하긴 버리지 못하고 끌어안고만 살아왔으니 오죽했을까. 이제까지 그렇듯 내 삶이 몽땅 끌려 나와 적나라하게 드러난 적은 없었다. 살면서 무어 그리 많은 것이 필요했을까. 동산을 이룬 짐 더미 사이에서 멋쩍었고, 사나운 욕심을 보는 것 같아 사뭇 부끄럽기까지 했다.


내가 물건들을 버리지 못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이상하게 물건을 버리고 나면 꼭 사용할 데가 생겼고, 그렇게 함부로 버리는 것은 낭비라 여겼다. 게다가 손때가 묻은 그것들을 내다 버리는 것이 왠지 망설여졌다. 효용가치가 다됐다는 이유로 냉큼 갖다버리기에는 뭔가 찜찜했다. 그러다 보니 그 좁은 공간에 사람보다 물건이 더 많을 수밖에. 이건 숫제 주객이 전도된 모양새였다. 이 짐 더미들 사이에서 숨을 쉬고, 잠을 자고, 밥을 먹었던가. 그리고 꿈을 꾸었던가. 이 짐들의 무게가 내 삶의 무게가 되는 것처럼 가슴이 답답했다. 짐이 많으면 많은 대로 그만큼 걱정이나 고민도 많았을 텐데 나는 어쩌자고 이렇듯 많은 짐을 이고 살았을까. 늘 깨어 있는 의식으로 세상을 겸허히 살아가자고 마음먹으면서도 문행일치, 언행일치를 이루지 못했다.


이번에는 꼭 필요한 것들만 남겨두고 모조리 내다 버렸다. 한 번도 손을 타지 않은 새것은 혹시 필요한 사람이 가져갈 수 있도록 잘 보이는 곳에다 놓아두었다. 진작에 삶은 치장한다고 해서 치장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치장해서 얻어지는 아름다움보다는 치열하고 정직하게 사는 삶이 더 아름답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 짐들을 보는 순간 참으로 이중적인 삶을 살았구나 싶어 반성이 들었다.


어쨌거나 묵은 짐들을 꺼내 버리는 동안 지나온 내 삶과 나를 목도할 수 있었다. 내가 이랬던가? 스스로도 놀라웠고, 또 다른 나를 보는 것만 같아 쑥스럽기도 했다. 사실 그 물건들을 정리한 가장 내밀한 속마음은 다른 데 있었을 것이다. 이 봄에, 이 화창한 봄에, 이 생명의 기운으로 넘치는 봄에 죽음을 앞둔 시한부 환자의 심정으로 삶을 중간 정리하고 싶었다.


벌써 여러 사람을 떠나보냈다. 그것도 봄에 소중한 사람들을 떠나보냈다. 아버지가 목련꽃 피던 시기에 유명을 달리하신 것처럼, 언니 역시 이 봄에 세상을 떠났다. 병원에 검사를 받으러 갔다가 병이 재발한 것이 확인돼 그 길로 입원을 했는데, 끝내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언니는 다시 돌아올 줄 알고 여느 때처럼 잠옷을 벗어 식탁 의자에 걸쳐놓고 집을 나섰다. 모든 것은 언니가 병원에 가기 위해 집을 나서던 그때 그대로였다. 그 물건들을 정리하면서 언니의 번다한 삶을 확인할 수 있었다. 미구에 닥쳐올 죽음도 눈치채지 못하고 하루하루를 아등바등 살아냈던 언니의 고단한 일상이 아프기만 했다.


어쩌면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주변을 정리하면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 그게 살아온 날들이 살아갈 날보다 더 많은 지천명의 지혜가 아니겠는가. 욕심을 줄이는 것. 그리고 삶을 가볍게 운용하는 것. 쌓여 있는 물건들에서 만족감을 얻기보다는 하루하루를 가볍게, 그리고 행복하게 지내는 것이 잘사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다지 행복해할 일이 없어도 스스로 행복하다고 최면을 걸며 살자고 다짐했다. 일체유심조. 나를 속이다 보면 정말, 행복해질지도 모를 일 아닌가. 주어진 시간을 그저 헛것 같은 부귀공명을 잡으려 애면글면 살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니 앞으로는 더 이상 짐을 늘리지 않고, 있는 짐도 조금씩 줄여가면서 살 작정이다. 가볍게, 그리고 가뿐하게 살아가야지. 이 봄, 이 화창한 봄날에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이 아름답다.


문득 임동확 시인의 시 한 구절이 떠오른다.


'어찌 피는 꽃만이 아름다웠으랴


어찌 지는 꽃이 슬프기만 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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