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드워드 핼릿 카(Edward Hallett Carr)는 영국의 역사가, 외교관, 언론인 및 국제 관계 이론가로 역사학 에서 경험주의에 반대했습니다. E.H. 카는 1917년부터 1929년까지 14권으로 구성된 소비에트 연방의 역사인 A History of Soviet Russia 와 국제관계, 특히 '위기의 20년(The Twenty Years' Crisis)'에 대한 글과 여기서 살펴 볼 ‘역사란 무엇인가? (What Is History?)’를 통해 전통적인 역사적 방법과 관행을 거부하는 역사 기술 원칙을 제시했습니다. 카는 1916년 외교관을 시작으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가 시작되는 격동의 국제사회의 중심에서 ‘파리강화회의’ 에 참석했으며 히틀러와 스탈린의 파쇼와 소통했고 소명을 가지고 양대 블록의 소통자 역활을 자임했습니다. 세계 양차대전과 냉전시대를 관통한 그의 삶을 살펴보면 카가 ‘역사는 무엇인가’를 통해 우리에게 전하는 그 역사라는 의미에 공감하지 않을수 없습니다. 자 그럼 지금부터 ‘E.H. 카의 생애’와 그가 전하는 ‘역사란 무엇인가?’ 속으로 여러분을 안내하겠습니다.
.
에드워드 헬렛 카의 생애 – Life of Edward Hallett Carr
.
영국의 정치학자·역사가인 에드워드 핼릿 카(Edward Hallett Carr, CBE, 1892년 6월 28일~1982년 11월 3일)는 1892년 6월 28일, 잉글랜드 북부출신으로 1450년에 뉴캐슬 의 보안관으로 일했던 조오지 카(George Carr)의 후손으로 영국의 중산층 집에서 프랜시스 파커(Francis Parker)와 제시 니 할레 카(Jesse (née Hallet) Carr)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부모님은 영국 보수당을 지지했으나, 카 11세때인 1903년 자유무역을 더 지지하는 영국 자유당 쪽으로 정치성향을 변경했습니다. 런던의 머천트 테일러스 스쿨(Merchant Taylors' School)을 나왔는데, 학생들 대부분이 정통 보수파였고 진보주의자는 경멸받는 극소수였다고 합니다. 부모로부터 카는 '역사는 진보한다'는 세계 문제에서 진보는 멈출수 없다는 강한 믿음을 물려받았고, 카의 생각에서 반복되는 주제는 세상이 점진적으로 더 나은 곳이 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카는 19세때인 1911년에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트리니티 칼리지를 크레이븐 장학금(Craven Scholarship)을 받고 입학했습니다.
.
카는 한 역사학 수업에서 "페르시아 전쟁의 집필이 헤로도토스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가"라는 색다른 시선에 감명을 받고, 역사철학에 대한 고민을 시작했습니다. 1961년의 명저 “역사란 무엇인가?”에 영향을 미친 역사서술이 주관적이라는 걸 발견하고 고전학 학위를 받으며 1916년 졸업하였습니다. 카는 제1차 세계 대전 시기 체력미달로 병역면제가 되었고 1916년부터 1936년까지, 영국 외무부에서 20년간 외교관으로 활약하였습니다. 1916년, 독일을 해상봉쇄하는 업무에 배정되었습니다. 그는 처음 1916년에 독일을 해상봉쇄하려는 밀수방지부서에 배정되었고, 그 후 1917년에는 러시아 내전 동향을 파악하는 북부 부서에 배정되었습니다. 카는 외무 장관 핼리팩스 경(Lord Halifax)으로부터 "건전한 학습과 정치적 이해뿐만 아니라 행정 능력에서도 두각을 나타내는" 외교관이라는 칭찬을 받았습니다. 처음에 카는 볼셰비키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
그는 나중에 "레닌과 트로츠키의 혁명적 견해에 대한 모호한 인상"을 가졌으나 마르크스주의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다고 1919 년까지 카는 볼셰비키가 러시아 내전에서 승리할 운명 이라고 확신하고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수상이 전쟁 장관 윈스턴 처칠의 반볼셰비키 사상에 반대하는 것을 지지했습니다. 1919 년에 카는 파리평화회의에서 영국 대표단의 일원으로 국제연맹과 관련된 베르사유 조약의 초안 작성에 참여했습니다. 회의 중에 카는 연합군, 특히 프랑스가 독일에 과하게 배상금을 물리는 것에 비판했고, 독일-폴란드 국경설정에 있어서 독일편을 들었습니다. 그로인해 아담 자모이스키 (Adam Zamoyski)는 카가 "동유럽의 모든 국가에서 가장 특별한 인종적 오만에 대한 견해를 가졌다"고 비난했습니다. 카의 전기를 쓴 조나단 하슬림(Jonathan Haslam)은 카가 독일 문화를 높이 평가하는 곳에서 자랐으며, 이는 항상 독일에 대한 그의 우호적 편견을 생산했다고 분석했습니다.
.
파리평화회의 후 카는 1921년까지 파리의 영국 대사관에 근무했습니다. 처음에 카는 국제연맹이 또 다른 세계 대전을 막고 더 나은 전후 세계를 보장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1925년에 카는 앤 워드 하우(Anne Ward Howe)와 결혼하여 한 아들을 낳았습니다. 당시에는 상당한 러시아 이민자 커뮤니티가 있던 리가에 있는 연애-결혼-출산-육아기 동안 카는 점점 더 러시아 문학과 문화에 매료되어 '자유주의적 견해를 재고'하게 되었고 러시아 생활의 다양한 측면에 대한 여러 작품을 저술했습니다. 카는 리가에서 근무하는 동안 러시아어를 배웠고 러시아 작가드의 작품을 읽었습니다. 1927 년 카는 모스크바를 처음 방문했습니다. 그는 나중에 알렉산더 헤르젠(Alexander Herzen), 표도르 도그토옙스키(Fyodor Dostoyevsky) 및 기타 19세기 러시아 지식인의 작품을 읽음으로써 자신의 자유주의적 견해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고 술회했습니다.
.
1929년부터 1936년까지 카는 여러 영국 문학 저널과 런던도서리뷰(London Review of Books)에서 러시아와 소련의 모든 것과 국제 관계에 관한 책을 검토하기 시작하여 1929년에 표트르 브란겔 전기, 1931년에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전기, 1934년에 카를 마르크스 전기, 1936년에 미하일 바쿠닌 전기를 작성했습니다. 특히 카는 1930년대 초 타임즈문학보교재(Times Literary Supplement)의 소비에트 전문가로 떠올라 1982 년 사망할때까지 그 자리를 유지했습니다. 1936년까지 외교관의 신분때문에 1929년부터 1936년까지의 기간 동안 카의 리뷰 대부분은 익명이나 존 할렛(John Hallett)이라는 가명으로 발표되었습니다. 1929 년 여름, 카는 표도르 도스토옙스키(Fyodor Dostoyevsky)의 전기 작업을 시작했고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의 생애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카는 프린스(Prince)와 친구가 되었습니다. 1929년에 표트르 랑겔 남작(Baron Pyotr Wrangel)의 회고록을 리뷰하면서 카는 소비에트 연방에 대한 존경심이 커지기 시작하였습니다.
.
1930년대에 카는 유화책의 주요 지지자였습니다. 영국신문에 실린 국제 문제에 관한 글에서 카는 체코슬로바키아 대통령 에드바르트 베네시가 체코슬로바키아의 운명이 독일의 영향권에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망각하고 프랑스와의 동맹에 집착한다고 비판했습니다. 1930년, 미국이 대공황에 스무트-홀리 관세법을 세우고 고립주의 및 경제블록화를 한 것이 독일의 호전성을 불러 왔다고 비판했습니다. 특히, 1930년 4월 26일 구경꾼(Spectator)에 게재된 "이성의 시대"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카는 프랑스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를 비난하면서 서양에 너무 비관주의 문화가 지배한다고 분석했습니다. 1931년 1월 제네바 에서 열린 국제연맹 총회에서 스위스, 특히 유고슬라비아 외무장관 보이슬라프 마린코비치와 영국 외무장관 아서 헨더슨 사이의 자유 무역의 장점에 대한 자유주의를 대체할 이데올로기에 대한 토론을 듣고, 카는 대공황이 거의 1차 세계 대전만큼이나 충격적이라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
1931년, 국제연맹 총회에서 대공황을 다시 비난하며 소련을 지지하는 발언을 했습니다. 1932년 랜슬롯 로턴(Lancelot Lawton)의 소련 경제사에 대한 서평에서 카는 소련 경제가 실패했다는 로톤의 주장을 일축하고 영국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 모리스 돕(Maurice Dobb)의 소련의 계획경제에 대한 극도로 호의적인 평가를 칭찬했습니다. 1933년, 나치 독일에 대해 영연방, 프랑스권 등이 인권을 운운하는 것은 위선이라 비판했습니다. 아돌프 히틀러가 집권한 이유가 베르사유 조약이 가혹하기 때문이라고 나치 독일이 베르사유 조약을 파기하는 것을 지지하고 나치 독일이 동유럽과 발칸반도에서 경제블록을 가지는 것을 지지했습니다. 스페인 내전에 대한 국제사회의 불간섭을 촉구하고 프랑스-독일-소련의 기갑부대 강화를 집단안보를 위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전쟁을 위한 것이냐며 비난했습니다. 카의 초기 정치적 견해는 반마르크스주의적이고 자유주의적이었습니다.
.
1934년 카는 마르크스 전기에서 마르크스를 매우 지능적인 사람이자 재능 있다고 했지만 그의 재능을 파괴하는데 바쳐졌고 그 동기도 무분별한 계급 증오라고 비난했습니다. 카는 변증법적 유물론을 횡설수설로 분류하고 노동 가치 이론을 교리적이고 파생적인 것으로 분류했습니다. 카는 ‘칼 마르크스: 광신주의연구(Karl Marx: A Study in Fanaticism)’에서 마르크스가 개인보다 집단의 중요성을 강조한것은 칭찬했지만, 마르크스가 매우 부끄럽다고 비판하고 책의 재발행을 거부했습니다. 카는 나중에 그것을 그의 최악 의 책이라고 불렀고, 그의 출판사가 그가 쓰고 있는 바쿠닌(Bakunin)의 전기를 출판하기 위한 전제 조건으로 마르크스 전기를 만들었기 때문에 그것을 썼다고 불평했습니다. 1930 년대 중반에 카는 특히 바쿠닌의 삶과 사상에 몰두했습니다. 이 기간 동안 카는 영국 부르주아 사회의 가식과 위선을 폭로하는 소설을 쓰기 시작했지만 완성 되거나 출판되지 않았습니다.
.
1930년대 외교관으로서 카는 1930년 미국의 스무트-홀리법 으로 인해 세계가 경쟁적인 무역 블록으로 크게 분열된 것이 독일이 이제 완제품을 수출할 수 없게 됨에 따라 외교 정책에서 독일이 호전적인 태도를 보이는 주요 원인이라는 견해를 가졌습니다. 카의 견해에 따르면 영국제국의 선호경제구역, 미주지역의 미국달러구역, 프랑스 금블록구역, 일본경제구역과 비교할 수 있는 독일의 동유럽 지배경제 구역을 제공받을 수 있다면 세계의 평화가 보장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1936년 5월 구경꾼 (Spectator)이라는 잡지에 카는 "해외 영국 민족주의자"라는 컬럼에서 ‘영국 사람들이 나치 정권의 인권 기록을 비판하는 것은 위선적’이고 ‘베르사유 조약(Treaty of Versailles)은 독일에 부당’하며 ‘1936년 라인란트의 재군사화와 같은 움직임을 통해 베르사유 조약을 파괴하려는 나치 정권의 노력을 지지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카는 국제 관계가 경제적으로 특권을 가진 "가진" 세력과 경제적으로 불리한 "가지지 않은" 세력 사이의 끊임없는 투쟁이라고 주장했습니다.
.
국제 관계에 대한 이러한 경제적 이해에서 미국, 영국, 프랑스와 같은 "가진" 세력은 만족스러운 지위 때문에 전쟁을 피하는 경향이 있는 반면, 독일, 이탈리아, 일본과 같은 "가지지 않은" 세력은 잃을 것이 없었기에 전쟁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또, 1939년 7월 1919년과 1939년 사이의 국제 관계를 다룬 그의 저서 '위기의 20년(The Twenty Years' Crisis)'에서 "1938년 뮌헨협정은 베르사유 조약에 의해 독일에 행해진 큰 잘못을 되돌리는 정당하고 도덕적인 시도”라며 친 독일 유화정책 주장을 이어가며 윈스턴 처칠을 자신의 권력에만 관심이 있는 단순한 기회주의자로 묘사했습니다. 그러나 후일 전쟁이 터지자 이런 견해에 대해 카는 "의심할 바 없이 나는 눈이 멀었었다”고 반성하며 주장을 철회했습니다. 아무튼, 국제연맹이 미국 우드로 윌슨의 이상주의에 비효율적이고 사당화되는 것을 비난해서 외무부 내에서 갈등을 시작된데다, 아돌프 히틀러 유화책에 대한 카의 견해는 상임 차관인 로버트 밴시타트 경(Sir Robert Vansittart)과 많은 긴장을 불러일으켰고, 1936년 후반에 카의 외교관 사임의 결정적 이유가 되었습니다.
.
이후1936년부터 영국 애버리스트위스 (Aberystwyth)에 있는 웨일스대학교(University College of Wales) 우드로 윌슨(Woodrow Wilson)국제정치학 석좌교수직을 외교부 서기일과 1940년까지 병행했고 석좌교수직은 1939년 세계대전부터 강의를 등안시하는 바람에 데이비스 경(Lord Davies)을 중심으로 1943년부터 교수직을 박탈하자는 주장이 일었지만 카의 국제관계이론에 대한 공헌과 영향력이 커서 1947년에 스스로 물러날때까지 급료를 받으며 교수직을 유지했습니다. 1936년부터 1939년까지는 영국왕립국제문제연구소(Royal Institute of International Affairs)인 채텀하우스에 참여하여 민족주의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했습니다. 1937년에 카는 두 번째로 소련을 방문했고 대공황 동안 자본주의 실패에 반해 소련의 5 개년 계획의 성과에 큰 감명을 받아 소련에 더욱 동정적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
하지만, 카는 레닌그라드 (Leningrad,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거리에서 그의 오랜 친구 DS 미르스키 (Mirsky) 왕자를 우연히 만났고 미르스키 왕자가 그를 모른척하려는데도 불구하고 카는 너무 반가워서 미르스키 왕자에게 함께 점심을 먹자고 졸랐습니다. 스탈린의 대숙청인 예조브시나(Yezhovshchina)가 절정에 이르렀고 외국인과 허가 없이 접촉한 소련 시민은 누구나 스파이로 간주괴었기 때문에 소련비밀경찰NKVD 는 미르스키 왕자를 영국 스파이로 체포했습니다. 미르스키 왕자는 2 년 후 마가단 근처의 굴라크 수용소에서 사망했습니다. 결국 카 덕분에 미르스키 왕자는 죽었습니다. 1937년 소련을 방문한 후 독일을 방문했습니다. 1937년 10월 12일 채텀 하우스에서 이 두 나라에 대한 인상을 요약한 연설에서 카는 독일이 "거의 자유로운 나라"라고 말했습니다. 미르스키 왕자의 운명을 알지 못한 카는 우연히 만난 친한 친구 미르키스 왕자가 살고자 자신을 억지로 모르는 척한 "이상한 행동"에 대해서도 천연덕스럽게 말했습니다.
.
외교관으로서 카의 마지막 조언은 영국이 발칸 반도를 독일의 배타적 영향력 지역으로 받아들이도록 촉구하는 메모였습니다. 1939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발생하자, 카는 전쟁전 나치 독일에 대한 옹호가 다소 잘못되었다며 급격히 소련 옹호 좌파로 입지를 바꿨습니다. 이는 영국 정보부에서 뮌헨 협정에 삐친 소련을 독소 불가침조약을 파기하고 다시 연합군으로 끌어들이는 데에 러시아 전문가로서 활동한 것입니다. 카는 영국이 독일을 이길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1939년 9월 3 일 독일에 대한 선전포고는 그를 매우 우울하게 만들었습니다. 1940년 3월에 더 타임스 논설위원이 되는 것을 핑계로 외무부 일은 완전히 그만두었습니다. 1940년 여름에 '소련의 발트 3국 합병을 지지'하는 논설을 싣었는데, 너무 급진적 친소련 경향을 보였습니다. 1940년 12월 5일 두가지 재앙(The Two Scourges)이라는 제목의 논설에서 카는 실업의 "재난"을 제거해야만 전쟁의 "재난"도 제거할 수 있다고 썼습니다.
.
1940년 12월에 팜플렛으로 발간된 "두가지 재앙(The Two Scourges)"의 인기는 10,000부의 초판이 완전히 매진될 정도였습니다. 카가 너무 좌익 성향의 글만 쓴다는 편집장 제프리 도슨(Geoffrey Dawson)의 지적에 외교정책 관련 글만 쓰도록 제한받게 됩니다. 하지만 편집장이 축출되고 로버트 매링톤-워드(Robert McGowan Barrington-Ward)으로 바뀌자 1941년부터 1946년까지 부편집장 직위로 다시 자유롭게 글을 쓸 수 있게 됩니다. 카의 논설들은 국제연맹의 통제 하에 있는 사회주의 유럽 경제를 옹호하고 전후 국제 질서의 기초로서 영-소 동맹이라는 아이디어를 지지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전쟁 당시 영국의 다른 논객들과는 달리 카는 독일과의 평화에 반대했으며 사회주의 노선에 따라 전후 독일 재건을 주장했습니다. 외교 문제에 관한 그의 논설에서 카는 1941년 이후에 전쟁이 끝나면 동유럽의 운명은 소련의 영향권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
1941년에 세계대전은 결국 연합군이 이기겠지만 전후 유럽은 사회주의 식으로 경제를 재건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1942년에서 1945년 사이에 카는 영국-소련 관계와 관련된 영국왕립국제문제 연구소인 채텀하우스의 연구 그룹 의장역할도 역임하는데, 여기에서도 전후 체제를 사회주의 유럽연합으로 구상하였습니다. 카는 스탈린이 러시아 민족주의를 위해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를 버렸고, 소련 경제는 전쟁 후 더 높은 생활 수준을 제공할 것이며, 영국이 그 역활을 수행하는 것이 가능하고 바람직하다고 결론지었습니다. 그가 여태 말해왔듯 '결함 있는 시장경제가 전쟁을 불러왔고, 국가주도 계획경제가 평화를 가져온다'고 주장했습니다. 1942년 저서 ‘평화의 조건(Conditions of Peace)’에서 카는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것은 결함이 있는 경제 시스템이며 또 다른 세계 대전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서구 열강이 사회주의를 채택하는 것이고 전후 열강들이 식민지를 모두 독립시켜야 한다고 주장해 비난을 받기도 했습니다.
.
‘평화의 조건’에 대한 아이디어의 주요 출처 중 하나는 아메리칸 로렌스 데니스(American Lawrence Dennis)의 1940년 책 전쟁과 혁명의 역학(Dynamics of War and Revolution)이었습니다. ‘평화의 조건’에 대한 리뷰에서 영국 작가 레베카 웨스트(Rebecca West)는 카가 데니스를 출처로 사용한 것에 대해 "진지한 영국 작가가 오스왈드 모슬리 경(Sir Oswald Mosley)을 인용하는 것은 이상”하다며 비판했습니다. 1942년 6월 2일 상원의원 엘리뱅크 자작(House of Lords, Viscount Elibank)도 독일과의 관대 한 평화에 대한 ‘평화의 조건’에 대한 그의 견해와 영국이 전쟁 후 모든 식민지를 국제위원회에 넘길 것을 제안한 것에 대해 카를 매우 위험하다고 비난했습니다. 1943년 4월 28일 "러시아와 폴란드"라는 제목의 논설에서 카는 소련의 비밀경찰 NKVD 가 폴란드에서 자행한 카틴(Katyn) 대학살을 비난하고 적십자에 조사를 요청했습니다.
.
1944년에 그리스 내전에서 영국군이 그리스 공산주의조직 EAM/ELAS에게 공격을 받았음에도 "거의 도전할 수 없는 권위를 행사하는 것으로 보이는 그리스에서 가장 큰 조직화된 정당 또는 정당 그룹"으로 영국은 EAM를 합법적인 그리스 정부로 인정해야 한다고 옹호해 윈스턴 처칠까지 하원 연설에서 카를 비난했습니다. 반면에 같은해 논설에서 영국이 후원하는 런던 폴란드 임시정부를 불인정하고, 소련이 후원하는 루블린 폴란드 임시정부를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1944년 말에 카는 소련이 독일의 침략에 어떻게 저항했는지 설명하기 위해 사회, 정치, 경제 역사의 모든 측면을 포함하는 1917년부터 소비에트 러시아의 완전한 역사를 쓰기로 결정했습니다. 그 결과물인 그의 14권으로 된 소비에트 러시아 역사 (14권, 1950–78)는 1929년까지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1945년 5월에는 ‘민족주의(Nationalism)와 그 이후(After)’를 출판하여 전후 세계는 영미의 "특별한 관계"가 평화의 주요 보루가 될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을 분노하게 만들었습니다.
.
카는 그의 저서와 타임지 논설을 통해 미국에 대항하여 소련과 동조할 영국-독일 파트너십에 기반을 둔 사회주의 유럽 연합의 창설을 촉구했습니다. 1946년에 책으로 출판된 ‘서구 세계에 대한 소련의 영향(The Soviet Impact on the Western World)’이라는 제목의 1945 년 강의 시리즈에서 카는 "개인주의에서 벗어나 전체주의로 향하는 추세는 모든 곳에서 틀림없이 일어난다"고 주장했습니다. 카는 서구 세계의 민주주의를 자본주의 지배계급이 다수를 착취하도록 허용하는 가짜라고 불렀고 소련이 진정한 민주주의를 제공한다고 칭찬했습니다. 1946년에 카는 1964 년까지 사실혼 아내로 남아 있을 조이스 매리언 스톡 포드(Joyce Marion Stock Forde)와 함께 살기 시작했습니다. 1940년대 후반에 카는 점점 더 마르크스주의의 영향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1946년부터 1952년까지 카는 소속이나 직함없이 외교관련 활동과 발언을 이어 갔습니다.
.
1946년에 출판한 저서 '소련이 서구에 준 충격'에서 카는 "개인주의에서 전체주의로의 추세는 어디에서나 명백하며, 마르크스주의는 성공적인 유형"이고 "서구 민주주의는 자본주의 지배계급이 착취하기 위한 도구로 소련의 민주주의가 진짜"라고 재차 주장했습니다. 또한 "전쟁에서 스탈린은 월슨의 역할을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대신하여 다시 한번 민주주의를 연합군의 전쟁목표로 강화하였다"고 했습니다. 1946년, 영국이 미국의 차관을 받아들이는 것을 두고 '영국 패권의 종말'이라고 비난했습니다. 1948년 카는 영국이 미국과 친해지기보단 냉전의 중립국이 되길 바랬고,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평화가 영국 정책의 기초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소련으로부터 유고슬라비아가 독립하는 것을 본받자고 했습니다. 1948년 카는 UN(국제연합) '세계 인권 선언'의 기초위원회 위원장을 맡았습니다. 카의 이름은 조지 오웰이 1949년 3월 노동당 정부가 외무부 정보조사부 (IRD)의 요주의 인물 목록인 오웰의 목록에 있었습니다.
.
오웰은 이 사람들이 친공산주의적 성향을 가지고 있으므로 언론에 글을 쓰기에 부적절하다고 생각했습니다. 1951년 5~6월에 카는 영국 라디오에서 대중민주주의, 평등주의, 뉴딜정책과 마셜플랜과 같은 계획경제를 옹호하는 ‘새로운 사회(The New Society)’라는 제목의 연설을 했습니다. 공산주의 주제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카는 연구 분야로서의 국제 관계를 거의 포기 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1953년부터 1955년까지 카는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 베일리올 컬리지(Balliol College) 강사 겸 펠로우를 역임했습니다. 1955년부터 1982년 11월 3일 사망할때까지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 트리니티 컬리지(Trinity College) 펠로우를 역임했습니다. 1956년 카는 소련의 헝가리 봉기 진압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제2차 수에즈 중동전쟁을 비난하는 성명을 냈습니다. 1961년에 카는 친구 AJP테일러의 논쟁적인 책 '제2차 세계대전의 기원(The Origins of the Second World War)'에 호의적인 추천사를 남겨 논란이 되었습니다.
.
1966년에 카는 사실혼 아내 조이스 매리언 스톡 포드(Joyce Marion Stock Forde)를 떠나 역사가 베티 베렌스(Betty Behrens)와 결혼했습니다. 같은 해에 카는 에세이에서 "자유주의가 공언되고 실천되는 인도에서는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굶어 죽고, 자유주의가 거부되는 중국에서는 사람들이 어떻게든 먹고 살 수 있다.”고 논평했는데, 비평가 중 한 명인 영국 역사가 로버트 콘퀘스트(Robert Conquest)는 카가 대약진운동같은 최근 중국 역사에 익숙하지 않은 것 같다고 비평했습니다. 카는 1967 년 미국철학학회(American Philosophical Society) 회원에 선출되었습니다. 1968년 카는 영국에서 사회주의 혁명을 가져올 수 있기를 바랐던 신좌파 학생들의 68운동에 대해 지지하고 호평한 몇 안 되는 영국 교수 중 한 명이었습니다. 1978년 신우파리뷰(New Left Review)와의 인터뷰에서 카는 '서구 경제는 미친 것이며 장기적으로 멸망할 것'이라고 논평했습니다.
.
같은 해 중국이 마오주의를 포기한 것을 '퇴행적 발전'이라 명명하고, 중국과의 무역이 늘 것을 예측하여 그의 주식 중개인에게 "일본인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중국과의 무역 개방으로 이익을 얻을 것”이라며 투자 아이디어를 주었습니다. 1979년 카는 논문으로 "소련의 상황에서 스탈린은 선의의 힘이였다."라고 주장했습니다. 1980년 친구 타마라 도이처(Tamara Deutscher)에게 보낸 편지에서 카는 마카렛 대처(Margaret Thatcher)정부가 영국의 "사회주의 세력"을 "완전한 후퇴"로 몰아넣었다고 썼습니다. 도이처에게 보낸 같은 편지에서 카는 "사회주의는 개량주의를 통해서, 즉 부르주아 민주주의 기구를 통해서는 달성될 수 없다"고도 썼습니다. 카는 계속 해서 좌파의 분열을 비난했습니다.
.
에드워드 헬렛 카에 대한 평가 – Evaluation of Edward Hallett Carr
.
에드워드 카는 혁명적인 역사 진보의 개념을 확립하였습니다. 카는 국제관계이론 분야에서 고전적 현실주의의 기초에 기여했습니다. 그는 역사란 현재와 과거 간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묘사한 바 있습니다. 이 말은 과거와 현재가 서로 연관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1920년 CBE훈장을 받았습니다. 카 저작의 주요 주제 중 일부는 변화와 사회의 관념적 힘과 물질적 힘 사이의 관계였습니다. 그는 사회적 힘으로서의 이성의 성장을 역사의 주요 주제로 보았습니다. 그는 모든 주요한 사회 변화가 혁명이나 전쟁에 의해 야기되었으며, 혁명이나 전쟁이 사회 변화를 달성하는 데 필요하지만 불쾌한 수단으로 간주했습니다. 카는 소비에트 연구 및 국제 관계 분야에서 광범위한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
카가 반유대주의자였는지에 대한 논란은 아직도 있습니다. 제프리 엘튼 경(Sir Geoffrey Elton, 1921~1994), 레너드 샤피로(Leonard Schapiro), 칼 포퍼 경(Sir Karl Popper), 버트람 울프(Bertram Wolfe)와 같은 대부분의 카의 비평가들은 그가 반유대주의 독재자인 히틀러와 스탈린의 옹호자로, 이스라엘에 대한 그의 반대자로 카를 평가합니다. 조나단 하슬람(Jonathan Haslam)과 같은 카의 옹호자들은 반유대주의 혐의에 반대하며 카에게 베를린과 나미어와 같은 많은 유대인 친구가 있었고 그의 마지막 아내 베티 베렌스가 유대인이며 그가 지원했던 1930년대 나치 독일과 1940, 1950년대 소련은 반유대주의가 없었다고 옹호했습니다. 카는 1950년대에 소련을 노골적으로 찬사하는 사람으로 잘 알려져 있었습니다.
.
그의 이름을 떨친 저작은 역사철학에 관한 서적인 "역사란 무엇인가"와 현실주의 국제정치학의 명저 "20년의 위기"지만, 정작 그가 평생을 바친 연구대상은 역사철학이나 국제정치학이 아니라 소련사였습니다. 소련에 대한 수정주의 시각을 대두시킨 것으로 유명합니다. 소련 편향적으로 역사를 서술한다고 비판도 많이 받았습니다. 카는 현실주의와 이상주의를 병치합니다. 동료 현실주의자인 한스 모겐소(Hans Morgenthau)는 카의 작업에 대해 "특히 국제문제에 관한 서구세계의 현대 정치 사상의 결점을 가장 명쾌하고 훌륭하게 폭로했다”고 평가했습니다. 그의 친구이자 가까운 동료인 영국 역사가 RW 데이비스는 카가 소련을 세계의 주요 진보세력으로 간주하는 반 냉전 역사학파에 속했으며, 소련에 대한 미국의 침략 사례로 카의 소련 역사 책은 엇갈린 평가를 받았습니다. 이로 인해 군사독재 시절의 한국에서는 그의 책이 불온서적 취급을 받기도 했습니다.
.
에드워드 헬렛 카의 사상 – Thought of Edward Hallett Carr
.
카의 '역사는 진보한다'는 말은 그의 사상을 가장 잘 설명합니다. 그의 저서를 보면 여기서 말하는 '진보'는 사전적 의미의 진보가 아니라 지금도 흔히 주변에서 쓰이는 '정치, 경제, 역사에 관한 마르크스적 진보'에 가깝습니다. 실제로 역사적 유물론을 아는지 모르는지에 따라 '역사는 진보한다'는 말과 카의 저서들에 대한 이해도가 천차만별입니다. 마르크스는 헤겔의 역사관 위에서 경제발전에 의한 역사의 진보를 주장했습니다. 즉 원시공동체사회, 농경사회, 봉건주의사회, 산업사회, 자본주의사회 순의 사회발전순서의 분류방식은 마르크스의 방식을 답습했고, 그렇다면 그 다음 사회는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공산주의를 주장하며 이를 정당화 하는 것으로 마르크스의 저서 자본론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습니다.
.
그렇다고 카가 공산주의자인가를 생각하면 고개가 까우둥해집니다. 당시 마르크스 사관이 지식인들에게 과학적이라 인기를 끌었지만 카의 저서에서는 미국의 보수주의자를 언급하거나 공격한 적이 없으며 새뮤얼 모리슨과 칼 포퍼를 마지막 부분에 옹호하는 글을 쓰는 등의 모습을 보면 그가 공산주의자라고 단정지을 수 없습니다. 거기다 마르크스 본인이 영국에서 활동했었으며 아직도 영국 내에서도 공산주의는 아니지만 마르크스에 관한 서적들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많은데 카도 그 영향을 받은 한 학자라고 볼수 있습니다. 또한, 마지막 남긴 말을 보면 그도 사회적 변화인 진보가 어쩔 수 없이 일어나면서 미래가 밝게 되기를 바란다고 한 것을 볼 때 카는 마르크스의 사회발전순서에 공감한 학자였음이 분명합니다.
.
역사란 무엇인가?의 내용 – Content of What is History?, 1961
.
‘역사란 무엇인가?(What Is History?)’는 역사학에 관한 E.H.카의 저서로 역사, 사실, 역사가의 편견, 과학, 도덕, 개인과 사회, 역사 속의 도덕적 판단에 대해 논의합니다. 1961년 1월부터 3월까지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G.M.트리벨리언(Trevelyan) 강좌'에서 카가 강의한 부분의 원고를 바탕으로 쓰였습니다. 강의는 역사 이론의 주제에 대한 광범위한 소개를 목적으로 했으며 강의 접근성으로 인해 역사란 무엇인가? 역사학 분야의 핵심 텍스트 중 하나였습니다. 초판은 1961년 출간되었고 같은 해에 1쇄, 1962년에 2쇄, 1969년에 3쇄, 1972년에 4쇄, 1977년 5쇄 그리고 1982년에 6쇄가 인쇄되었습니다. 두번째판은 카의 생전에 준비되어 그의 사후인 1987년 개정되었고 2001년에 RJ 에반스(Evans)의 비평 소개를 첨부하여 재인쇄 되었습니다.
.
이 책은 (1장) 역사가와 그의 사실(The Historian and His Facts)로 시작하여 (2장) 사회와 개인 (Society and the Individual), (3장) 역사, 과학 그리고 도덕 (History, Science and Morality), (4장) 역사에서의 인과관계 (Causation in History) 및 (5장) 진보로서의 역사 (History as Progress)로 이어져 (6장) 지평선의 확대 (The Widening Horizon)으로 마무리됩니다. 2001년 판에는 리차드 에반스(Richard J. Evans)의 ‘역사 란 무엇인가?’가 1960년대 영국 역사학에 혁명을 일으켰다고 평가한 서문과 RW 데이비스(Davies)의 서론, 카 자신의 개정판 서문, 'EH 카의 파일메모' 등 데이비스의 개정판 자료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
(1장) 역사가와 그의 사실(The Historian and His Facts) - 역사란 결코 지나간 일을 있는 그대로 밝히는 작업이 아니라 오히려 해석을 통해 과거 사실을 편집하고 의미를 다시 꾸리는 일입니다. 카는 “정확성은 의무이지 미덕은 아니라”라며 “정확하게 사실을 밝혔다는 이유로 역사가를 칭찬한다면, 이는 좋은 목재와 잘 섞인 콘크리트를 썼다고 건축가를 추켜세우는 것과 같다. 건축가의 진짜 능력은 집을 짓는 데서 드러난다. 사학자도 마찬가지다. 역사의 의미와 가치를 제대로 살려낼 때 역사가의 능력을 빛을 발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장에서 작가는 영국의 정치학자 마이클 오크쇼트(Michael Oakeshott, 1901-1990)의 말을 인용하며 우리가 간과하고 있는 부분에 대한 몇 가지 진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
오크쇼트는 “역사란 역사가의 경험이다. 역사는 역사가가 아닌 사람들에 의해서는 만들어지지 않는다. 역사를 서술하는 것만이 역사를 만드는 유일한 길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카가 말하고자 하는 몇 가지 진리는 (첫째) 역사의 사실들은 순수한 형태로 존재하지 않으며 또한 존재할 수도 없기 때문에 우리에게 결코 ‘순수한’것으로 다가서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둘째)는 역사가는 자신이 다루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 그들의 행위의 배후에 있는 생각을 상상적으로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역사가에게는 ‘상상적이해 (imaginative understanding)'이 중요합니다. 사료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 뒷면을 생각하며 의미를 찾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역사가는 사실의 잠정적인 선택과 그 선택을 이끌어준 잠정적인 해석에서 출발합니다.
.
역사가가 연구하는 동안 사실의 해석 그리고 사실의 선택 및 정돈 그 두 가지는 이러저러한 상호작용을 통해서 미묘한 그리고 아마도 얼마간 의식되지 못하는 변화들을 겪습니다. 그리고 이 상호작용에는 현재와 과거 사이의 상호관계도 역시 포함되는데, 왜냐하면 역사가는 현재의 일부이며 사실의 과거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카의 대답은, 역사란 역사가와 그의 사실들의 지속적인 상호작용의 과정,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 (a continuous process of interaction between the historian and his facts, an unending dialogue between the present and past)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
(2장) 사회와 개인 (Society and the Individual) - 사회가 먼저인가 개인이 먼저인가 하는 문제는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하는 문제와 같습니다. 그것을 논리적인 문제로 논하든, 아니면 역사적인 문제로 논하든 간에, 그것에 대해서 언급을 하게 되면 이렇게 든 저렇게 든 반대되면서 똑같이 일방적인 언급에 의해 수정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회와 개인은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이것들은 서로 필요하고 상호 보완하는 것이지 반대되는 것이 아닙니다. 영국의 시인 존 던(John Donne, 1572-1631)은 ‘어느 누구도 그 자체만으로 전체를 이루는 섬이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진리의 일면이라고 카는 말합니다. 역사의 모든 단계 또는 선사시대에서도 모든 인간은 사회 속으로 태어나고 또 아주 어린 나이에서부터 사회에 의해 틀이 만들어집니다.
.
그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는 개인적 유산이 아니라 그가 성장한 집단에서 얻은 사회적 획득물입니다. 언어와 환경이 그 인간의 생각과 내용을 결정하게 됩니다. 그 인간의 아주 어릴 적 생각은 다른 사람에게서 온 것입니다. 이미 잘 언급되었듯이 사회에서 동떨어진 개인은 말이 없고 생각이 없습니다. 미개인은 문명인에 비하여 덜 개인적인 반면, 더욱더 완벽하게 사회에 의해서 만들어진다고 인류학자들이 흔히 말합니다. 이것은 일리가 있습니다. 단순한 사회는 더 획일적인데, 복잡하고 발전되 사회보다 개인의 기술이나 직업의 다양성을 덜 필요로 하고 그런 기회도 적다는 의미로 볼 때, 더 획일적인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증대되는 개인화 현상은 현대의 발전된 사회에 필수적인 결과이며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사회의 모든 행동에 스며져 있습니다. 그러나 이 개인화의 과정과 사회의 증가하는 힘과 결합력 사이에 대립관계를 설정하는 것은 중대한 잘못이라고 카는 말합니다.
.
사회의 발전과 개인의 발전은 병행하는 것이며 서로 조정하는 것입니다. 정말로 복잡하거나 또는 발전된 사회란, 개인간의 상호의존이 발전되고 복잡한 양상을 띠는 사회입니다. 따라서 상식적인 역사관은 역사란 개인이 개인에 대하여 쓴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이론은 본질적으로 틀린 것은 아니지만 너무 단순화되고 적당치 못한 것 같아서 좀더 깊이 탐구해 볼 필요가 있다고 카는 말합니다. 역사가의 지식은 그 자신만의 가지고 있는 개인적 소유물이 아닙니다. 아마도 수많은 세대의, 그리고 다른 많은 나라의 사람들이 그 지식을 축적시켜 왔습니다. 역사가의 연구 대상이 되는 사람들은 진공에서 활약한 고립된 개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지나간 사회의 상황과 충동 속에서 행동하였습니다. 역사가는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인간입니다. 다른 개인과 마찬가지로 그도 또한 사회적 현상이며 그가 속해 있는 사회의 산물로서 의식을 하든 않든 간에 그 사회의 대변인입니다.
.
이러한 자격으로 그는 역사적 과거의 사실에 접근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역사의 과정은 ‘움직이는 행렬’이라고 말합니다. 이 비유는 매우 적절하나, 역사가를 외로운 암벽에서 그 행렬을 내려다보는 독수리라거나 또는 사열대 위의 사령관이라고 생각하게끔 유혹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역사가는 그 행렬의 한 부분에서 뚜벅뚜벅 걷고 있는 하나의 희미한 존재이며 역사가 또한 역사의 일부입니다. 그 행렬이 굽이쳐서 혹은 오른쪽으로 혹은 왼쪽으로 돌고 때때로 거꾸로 되돌아와서 그 행렬의 다른 부분들이 상대적으로 위치가 상항 바뀝니다. 그래서 예를 들면 오늘날의 우리가 1세기전의 선조들보다 더 가까이 중세에 접하고, 또는 시저의 시대가 단테의 시대보다 더 우리들 가까이에 와 있다고 말하는 것이 사리에 맞는지도 모릅니다.
.
이 장에서 카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위인을 역사적 과정의 산물이자 대리인이면서 이와 동시에 세계의 모습과 인간의 사유를 변화시키는 사회적 힘의 대변자이자 창조자인 탁월한 개인으로 인식하는 일입니다. 그렇기에 역사는 이 말의 두 가지 의미에서 하나의 사회적인 과정이며, 개인은 그 과정에서 사회적인 존재로서 참여합니다. 역사가와 그의 사실 사이의 상호작용의 과정, 즉 과거와 현재의 대화는 추상적이고 고립적인 개인들 사이의 대화가 아니라 오늘의 사회와 어제의 사회의 대화입니다. 과거는 현재에 비추어질 때에만 이해될 수 있습니다. 또한 현재도 과거에 비추어질 때에만 완전히 이해될 수 있습니다. 인간이 과거의 사회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 그리고 현재의 사회에 대한 인간의 지배력을 증대시키는 것, 이것이 역사의 이중적인 기능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
(3장) 역사, 과학 그리고 도덕 (History, Science and Morality) - 이 장에서 카는 역사를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논의들을 고찰하고 있습니다. 그것들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됩니다: (1)역사는 오로지 특수한 것만을 다루며, 과학은 일반적인 것을 다룬다. (2)역사는 교훈을 가르치지 않는다. (3)역사는 예견할 수 없다. (4)역사는 인간이 인간 자신을 관찰하는 것이므로 필연적으로 주관적이다. (5)역사는 과학과는 달리 종교와 도덕의 문제를 포함한다. 이 논의에 대해서 카는 역사가는 언어의 사용 그 자체에 의해서 과학자들처럼 일반화에 관여한다고 설명합니다. 역사가는 항상 자신의 증거를 검증하기 위해서 일반화를 이용합니다. 일반화가 역사와는 관계없다고 하는 것은 몰상식한 말입니다. 역사는 일반화 위에서 번성하는 것입니다.
.
영국의 역사가 제프리 엘튼 경(Sir Geoffrey Elton, 1921~1994)이 케임브리지 근대사 신판의 어느 한 권에서 산뜻하게 지적하듯이, 역사가를 역사적 사실의 수집가와 구별해주는 것은 일반화입니다. 그는 자연 과학자를 박물학자가 표본수집가와 구별해주는 것도 바로 그 일반화라도 덧붙여도 좋았을 것입니다. 역사는 특수한 것과 일반적인 것의 관계를 다룹니다. 역사가라면, 사실과 해석을 분리시킬 수 없듯이, 그 두 가지를 분리시키거나 어느 하나를 다른 하나보다 우월한 것으로 취급할 수는 없습니다. 역사가에게 있어서 일반화의 진정한 핵심은 우리가 그것을 통해서 역사로부터 가르침을 얻고자 한다는 것, 즉 어떤 일련의 사건들에서 이끌어낸 교훈을 다른 일련의 사건들에 적용하고자 하는 것에 있습니다. 예를 들어 유럽의 지도를 다시 만들 때 민족자결의 원칙을 무시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교훈이었습니다.
.
카는 역사에서의 예언의 역할에 대해서도 지적했는데, 역사가는 일반화를 하지 않을 수 없으며 그리고 그렇게 하면서 역사가는, 비록 특정한 예언은 아니더라도, 미래의 행동에 대한 타당하고도 유용한 일반적인 지침은 준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가는 특정한 사건을 예언할 수는 없는데 이는 특정한 것은 유일하기 때문이며 또한 거기에 우연이라는 요소가 개입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예를 들어 역사들이 어느 정도는 루리타니아 사회에 관한 특정한 지식에서 어느 정도는 역사연구에서 이끌어내려고 노력하게 될 결론은 루리타니아는 누군가 촉발시키기라도 한다면 혹은 정부 쪽에서 손을 써서 막아내지 못한다면 가까운 장래에 혁명이 발생할 것 같은 그런 상태에 있다는 식의 결론입니다. 네 번째 논제에 대해서는 역사가의 관점은 그가 행하는 모든 관찰에 불가피하게 개입하며, 그래서 역사는 그야말로 상대성으로 가득 차 있다고 설명합니다.
.
카를 만하임(Karl Mannheim, 1893~1947)의 말을 인용하여 경험을 포괄하고 수집하고 정리하는 범주마저도 관찰자의 사회적 위치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마지막으로 역사가 종교와 도덕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논의에 대해서는 역사가는 어떤 초역사적인 힘(deus ex machina)에 의해 전혀 의존하지 않고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야만 한다는 것을, 역사란 말하자면 조커 카드가 없는 트럼프 게임과 같다는 것을 전제하며 설명합니다. 예를 들어 파스퇴르나 아인슈타인은 사생활에서는 성스럽다고까지 할 만큼 모범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불성실한 남편, 잔혹한 아버지, 파렴치한 동료였다고 가정한들, 그들의 역사적 업적이 조금이라도 폄하될 것인가? 그러므로 역사가가 우선적으로 관심을 두어야 하는 것은 종교나 도덕적인 성격의 것이 아니라 그들의 업적이라고 설명합니다. 즉 역사가는 자신의 책에 등장하는 개인의 사생활에 대하여 도덕적인 판단을 내리기 위해서 옆길로 새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
(4장) 역사에서의 인과관계 (Causation in History) - 역사의 연구는 원인에 관한 연구입니다. 따라서 역사가는 끊임없이 ‘왜?’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위대한 역사가란 새로운 것들에 관해서 또는 새로운 맥락 속에서 ‘왜?’라는 질문을 제기하는 사람이라고 카는 말합니다. 과거에는 역사는 과거의 사건을 원인과 결과의 질서정연한 전후관계 속에 배열함으로써 성립한다는 것이 공인된 교리였습니다. 최근에는 이 의미가 조금 달라졌습니다. 이제는 역사에서 ‘법칙’이라는 용어는 사라졌고 ‘원인’이라는 말마저 유행에서 사라졌는데, 이러한 것들로 인해 역사에서의 ‘원인’이라하고 하지 않고 ‘설명(explanation)'이나 '해석(interpretation)', '상황논리(logic of the situation)' 나 ‘사건의 내적논리(inner logic of events)'라는 용어를 사용하거나, 아니면 왜 그것이 발생했는가라는 인과적 연구방법에 반대하면서 그것이 어떻게 발생했는가하는 기능주의적 연구방법에 찬성하고 있습니다.
.
비록 기능주의적 연구방법은 필연적으로 그것이 어떻게 발생했기에 이르렀는가라는 질문을 포함하는 것 같고, 따라서 우리들은 '왜?’라는 질문으로 되돌아가도록 이끌고 있는 것입니다. 진정한 역사가라면 자신이 수집한 원인들의 목록을 앞에다 놓고서는 그것을 정리해야 한다든가, 그들간의 상호관계를 고정시키게 될 원인들의 일정한 위계질서를 수립해야 한다든가, 아니면 어떤 원인이나 어떤 범주의 원인들이 ‘결국에 가서는’ 또는 ‘최종적인 분석에 따라서’ 궁극적인 원인, 즉 모든 원인들의 원인으로 간주되어야 하는지를 결정해야 한다는 직업적인 강박감을 느낄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곧 연구주제에 대한 역사가의 해석입니다. 과학자의 세계와 마찬가지로 역사가의 세계도 사진을 찍어놓은 것과 같은 현실세계의 복사판이 아니라,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역사가가 효과적으로 현실세계를 이해하고 지배할 수 있게 하는 일종의 작업 모델입니다.
.
역사가는 과거의 경험에서, 즉 그가 입수할 수 있을 만큼의 과거의 경험에서 합리적인 설명과 해석을 가할 수 있다고 인정되는 부분들을 추려내어, 그것으로부터 연구의 지침으로 기여할 수 있는 결론을 이끌어내는 것입니다. 결국 역사란 역사적 중요성이라는 측면에서 이루어지는 선택의 과정입니다. 탤컷 파슨스(Talcott Parsons, 1902~1979)의 말을 빌리면 역사는 실체에 대한 인식적 지향의 ‘선택체계(selective system)’일 뿐만 아니라 인과적 지향의 ‘선택체계’입니다. 역사가는, 끝없는 사실의 바다에서 자신의 목적에 중요한 것을 선택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무수한 인과적 전후관계 중에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것을, 오직 그런 것만을 추출해냅니다. 그리고 그 역사적 중요성을 가르는 기준이 되는 것은 그 전후관계를 자신의 합리적인 설명과 해석의 모형에 짜 맞추는 역사가의 능력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
(5장) 진보로서의 역사 (History as Progress) – 여기서 카는 진보(progress)와 진화(evolution)에 관한 혼란스러운 생각을 제거하고 싶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헤겔(Hegel)은 역사는 진보하는 것이고 자연은 진보하지 않는 것이라고 뚜렷이 구분하였고 다윈의 혁명은 진화와 진보를 동일시함으로써 모든 혼란을 제거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진화의 원천인 생물학적인 유전을 역사에서의 진보의 원천인 사회적인 획득과 혼동함으로써 훨씬 더 심각한 오해에 이를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습니다. 이 둘은 다음과 같이 간단하게 구분됩니다. 어떤 유럽의 아이를 중국인 가족에게 맡기면 그 아이는 피부는 희지만 중국말을 하는 사람으로 성장할 것입니다.
.
피부색의 형성은 생물학적인 유전이며, 언어는 인간의 두뇌를 매개로 하여 전승되는 사회적 획득물입니다. 역사가 쓰여진 이래 인간에게 중요한 생물학적 변화는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았지만 현대인은 그동안의 여러 세대의 경험을 습득하여 그것을 자신의 경험에 합체시킴으로써 사고의 유효성을 몇 배나 증가시켜왔습니다. 역사란 획득된 기술이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전승되는 것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진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역사에서의 진보는 자연에서의 진화와는 달리 획득된 자산의 전승에 의존한다는 것은 역사의 한 전제입니다.
.
(6장) 지평선의 확대 (The Widening Horizon) – 지금까지 카는 역사를 끊임없이 움직이는 과정으로 제시했고 역사가도 그 과정 안에서 움직여나간다고 말했는데, 이러한 생각은 이 책의 마지막 장에서 이 시대의 역사와 역사가의 위치에 대해서 말하게끔 합니다. 카는 먼저 역사과정에서 눈에 띄는 모든 발명, 혁신, 새로운 기술에는 그 긍정적 측면뿐만 아니라 부정적 측면도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항상 누군가는 희생을 당하는 법입니다. 인쇄술이 발명되고 난 후 그것 때문에 잘못된 견해의 확산이 용이하게 되었다는 비평가들의 지적이 시작되기까지 얼마나 시간이 걸렸는지 나로서는 알 수 없습니다. 오늘날에도 교통사고 사망자 명부를 만들어 낸 것은 자동차의 출현이라고 한탄하는 일은 흔히 있습니다. 그리고 심지어 일부 과학자들은 원자력이 파멸적으로 이용될 수 있고 또한 그렇게 이용되어왔다는 이유 때문에 자신들이 원자력 이용의 방법과 수단을 발견했다는 사실을 개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한 진짜 해답은 이성이 수행할 수 있는 역할을 점점 더 철두철미하게 의식해야 한다는 데에 있다고 카는 말합니다.
.
두 번째로 세계의 모습이 변한 것에 대해 언급합니다. 15세기와 16세기의 그 위대한 시대를 특징지었던 것은 신대륙의 발견과 지중해 연안에서 대서양 연안으로의 세계중심의 이동이었습니다. 그리고 16세기로부터 약 400여 년이 지난 후, 세계의 중심은 완전히 서유럽을 떠났습니다. 세계의 중심이 현재 서유럽이라는 부족건물이 딸린 영어사용권 세계에 머무르고 있는지, 또는 오랫동안 계속 거기에 머무를 것인지는 결코 분명치 않습니다. 오늘날 세계의 문제를 조율하는 것은 동유럽과, 아시아, 그리고 아프리카에까지 뻗어 있는 거대한 땅덩어리라고 생각됩니다. ‘변하지 않는 동방’이라는 말은 오늘날에는 대단히 낡아빠진 상투어에 불과하다고 설명합니다. 마지막으로 카는 모리슨(Morison) 교수가 역사는 건전한 보수적인 정신으로 쓰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 격동하는 세계, 진통하는 세계를 내다보고 나서 진부하기조차 한 어느 위대한 과학자의 말을 빌려서 이렇게 대답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 그것은 움직인다(And yet – it moves)."
.
‘역사란 무엇인가?’에 대한 평가 – Evaluation of ‘What is History?’
.
과거의 경험적 관점의 실증사관의 실증주의 역사학에서는 역사가의 일이란 과거의 사료를 수집하여 그저 모아서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을 통해 사견이 들어가지 않은 순수한 역사기록으로서의 역사학을 추구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역사가는 물리적 한계로 모든 사료를 수집해 나열할 수 없으므로 사료를 취사선택해야 하고, 그 안에서도 서술 순서나 묶음, 분량 등을 통해 역사가 개인의 견해를 첨가할 수밖에 없습니다. 카는 '역사란 단순한 사실의 나열이 아니다'라는 문제의식을 제시하며 실증주의 역사학과 R. G. 콜링우드 (Collingwood)식의 주관적 이상주의 역사관을 모두 비판하며, 역사는 사실 자체에만 함몰되는 것도, 역사가의 주관 속에만 존재하는 것도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카에 따르면 "역사란 역사가와 사실들의 지속적 상호작용의 과정이자,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입니다.
.
흔히 역사란 완벽한 객관성을 추구해야 한다는 인식이 있으나, 그것은 가능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올바르지도 않다고 이 책은 주장합니다. 일단 사료를 기반으로 사실을 추론해야 하는 것은 맞지만, 사료는 그 사건의 일부만을 반영하기 때문에 사료를 통한 재구성으로 그 사건을 완벽히 되살려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어떤 사건의 목격자, 증인도 사건 속의 입장에 따라 다른 인식을 갖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상입니다. 교통사고만 해도 누가 가해자이고 누가 피해자인지, 당사자는 물론이고 목격자들마저 평가가 갈리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그렇다면 역사학자는, 역사학은 무엇을 위해 존재해야 하는가? 즉, 역사란 무엇인가? 이 물음에 대해 이 책은 사료를 바탕으로 한 역사가 개인의 합리적인 추론을 통해 역사적 사실로부터얻을 수 있는 진리를 찾고, 학설의 끊임없는 재검토와 사료의 분석을 통한 새로운 사실의 발견으로 그것을 발전시키거나 반박해 나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역사학은 과거의 수동적인 "기록기계"의 역할에서 더 나아가 적극적인 역사적 사실에 대한 비판과 진리를 추구하는 태도를 보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
카는 사실을 두 가지 범주로 나누었습니다. "과거의 사실", 즉 역사가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역사적 정보와 "역사적 사실"은 역사가가 중요하다고 판단한 정보입니다. 카는 역사가들이 그들 자신의 편견과 의제에 따라 "과거의 사실" 중 어느 것을 "역사적 사실"로 바꿀지 임의로 결정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역사란 무엇인가?(What Is History?)’에서 상대주의와 역사적 분석의 중요한 요소로서의 우발성을 거부하는 역사 작업의 본질에 대한 카의 견해는 논쟁적이었습니다. 1967년 제프리 엘튼 경(Sir Geoffrey Elton)은 그의 저서 ‘역사의 실천(The Practice of History)’에서 카가 “역사적 사실”과 “과거의 사실”을 “변덕스럽게” 구분하는 것에 대해 비판하면서 “과거와 과거에 대한 매우 오만한 태도를 반영한다”고 비판했습니다. 영국의 역사가 휴 트레버-로퍼(Hugh Trevor-Roper)는 카가 "역사의 가능성"을 일축한 것은 역사적 인과관계를 조사하는 데 근본적인 관심이 부족함을 반영한다고 말했습니다. 트레버-로퍼는 역사의 가능한 대안적 결과를 검토하는 것은 "팔러 게임"이 아니라 역사가 작업의 필수적인 부분이라고 말했습니다.
.
트레버-로퍼는 역사가들이 가능한 모든 결과와 모든 측면을 살펴봄으로써만 연구 기간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오직 역사의 승자를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특정 사건의 결과를 가능한 유일한 결과로 취급하는 카의 관점을 채택한 역사가는 트레버-로퍼에게는 "나쁜 역사가"였습니다. 1963년 역사잡지 히스토리셰 차이즈크리프트(Historische Zeitschrift)의 리뷰에서 안드레아스 힐그루버(Andreas Hillgruber)는 보수, 자유, 실증주의 역사가에 대한 카의 위트와 아이러니컬 한 비판에 대해 호의적으로 썼습니다. 영국 철학자 WH 월시(Walsh)는 1963년 리뷰에서 그가 그날 아침 식사로 건배를 한 것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월시는 역사가가 역사 위에 서지 않고 대신 자신의 장소와 시간의 산물이며 "과거의 사실"을 "역사의 사실"로 결정한 카의 말이 옳다고 말했습니다.
.
에드워드 헬렛 카(Edward Hallett Carr)의 역사란 무엇인가? (What is History?)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에드워드 헬렛 카(Edward Hallett Carr)는 ‘역사란 무엇인가? (What is History?)’를 통해 역사는 언어라는 인간의 두뇌를 매개로 하여 전승되는 사회적으로 획득된 기술이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전승되는 것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진보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20세기에 발간된 우수하고 의미있는 책 100선 중 48번째 책 인문학 부문 18번째 책 “에드워드 헬렛 카(Edward Hallett Carr)가 1961년에 출간한 된 역사란 무엇인가? (What is History?)”를 마칩니다. 감사합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