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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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韓山李氏/09_遲耘(金錣洙) 50

지운 할아버지의 지폐 – 지운 서화 (遲耘 書畵)

https://youtu.be/LmCSRVkAV3c BETTER https://youtu.be/3eZRzYTUPC8 지운(芝雲) 김철수(金綴洙, 1893~1986) 선생님 1/25 . 위키백과에 의하면, "김철수(金綴洙, 1893년 ~ 1986년 3월 16일)는 한국의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이다. 조선공산당 3차 집행부 책임비서로 활동했으며, 줄곧 반(反)박헌영 계열에서 활동했었다. 호는 지운(芝雲 혹은 遲耘)이다. . 지운 김철수는 전북 부안 백산에서 태어난 뒤 1912년 젊은이들의 유학을 독려하는 독립지사 성우 이명직 선생이 돌린 사발통문을 보고 감화되어 일본 와세다대학 정치학과에 유학하였고 1915년 9월 7일 이명직 선생이 일제에 독살 당한 소식을 듣고 독립운동에 투신 1915년 '열지동맹(裂指同..

117. 울릉도에는 진달래가 없습니다! Ulleungdo has no Rhododendron Mucronulatum!

https://youtu.be/bCx_-uYfPkU Ulleungdo has no Rhododendron Mucronulatum! 울릉도 진달래 프로젝트 실패 - 울릉도에는 진달래가 없습니다! . 1970년대초 독립지사 지운 김철수 선생은 진달래 묘목과 종달새 3쌍을 들고 울릉도로 향했습니다. 실제 함께할 지인들을 꾸려 도전은 그 이전에 3차례가 있었으나 기것 포항에 도착하였더니 기상이 좋치않아 울릉도행이 무산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4번째 도전만에 포항에서 무사히 울릉도행 배를 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포항에 다다르기 전에 종다리 한쌍이 죽었고 또 포항에서 울릉도 가는 배안에서 나머지 두쌍이 죽어서 결국 지운 선생의 종다리는 울릉도 땅을 밟아보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결국 요란한 종다리 사육 덕에 우리에..

장덕수 구타 사건

미국으로 돌아오던 기내에서 박열이라는 영화를 보았다. 영화 초반 박열이 속한 '불령사' 단원들에게 한 남성이 무자비하게 폭행당하는 장면이 잠깐 나온다. 불령사는 일본 권력자들이 '못되다, 불쾌한 놈'이라며 조선인들을 조롱하며 쓰던 단어로 박열 등 아나키스트들은 오히려 이걸 자신들을 대표하는 단체 이름으로 내걸었다. . 1923년 4월 불령사를 설립한 박열은 같은 해 미국 유학을 앞두고 잠시 도쿄에 머물던 ‘동아일보’ 주필 설산 장덕수를 동료 5명과 함께 간다(神田)의 보정(寶亭)에서 구타했다. 구타 이유는 장덕수가 레닌의 코민테른 공산혁명자금 을 유용했다는 백범 김구와 김사국의 모함을 박열이 고지곧대로 믿었기 때문이다. 이 일로 이들은 구류를 살고 당시 교도소에서 간수와 난투극을 벌이기도 했다. 영화엔 ..

021. 이동휘횡삭부시 - 李東輝橫槊賦詩

https://youtu.be/rAcg737TCok 이동휘 횡삭부시(李東輝 橫槊賦詩) 지운(芝雲) 김철수(金綴洙, 1893~1986) 선생 '橫槊賦詩(횡삭부시)' 작품 . 조맹덕횡삭부시(曹孟德橫槊賦詩) . 삼국지(三國志)에서 ⾚壁⼤戰(적벽대전)이 일어나기 수일 전, 보름달이 휘영청 뜨고 하늘은 청명하고 양쯔강은 달빛을 받아 긴 비단을 펼쳐놓은 듯했습니다. 조조(曹魏, 155~220)는 흥이 일어 배 위에 큰 잔치를 준비시켰습니다. 문무백관을 불러 모은 자리에서 조조는 창을 가로 들고 시를 지었습니다. 조맹덕횡삭부시(曹孟德橫槊賦詩) 조조가 창을 비껴들고 시를 읊는다)는 이 장면을 바로 '橫槊賦詩'(횡삭부시)라고 합니다. '횡(橫)'은 '가로 들다'라는 동사이고, '삭(槊)'은 길이가 긴 창이며, '부(賦)..

020. 국공합작(國共合作)의 원조(元祖) 성재(誠齋) 대자유(大自由) 이동휘(李東輝) 선생님

https://youtu.be/qVfp1QEiP6g 국공합작(國共合作)의 원조(元祖) 성재(誠齋) 대자유(大自由) 이동휘(李東輝, 1873년 6월 20일~1935년 1월 31일) 선생님 .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의 죄악 .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은 고려인들이 코민테른의 혁명자금만 노리는 분파와 분열만 획책하는 혁명화 대상의 적성 민족으로 각인시키는 비극의 실마리 제공한 과정도 살펴보겠습니다. 러시아 조선인들은 레닌을 도와 1917년 러시아혁명을 성공했습니다. 1918년에 이동휘 선생님은 러시아 한인사회당을 만들고 코민테른에 국제당 승인을 받기위해 1919년에 레닌의 측근으로 레닌을 도와 혁명을 성공한 박진순(朴鎭淳, 1898~1938) 선생님을 코민테른에 파견했습니다. 하지만 코민테른은 한인사회당..

[신간안내: 남한에 남은 사회주의 항일혁명가 김철수]

미국시간 지난 1월 24일 저녁에 외국어대 사학과 명예교수인 역사학자 반병률 선생님께서 내가 올렸던 지운 김철수 선생에 관한 . 01. 지운 김철수 - 스탈린은 왜? 20만 고려인을 강제이주 했을까? https://youtu.be/dwI4WVvi1ok 02. 성우 이명직 대감과 지운 김철수 선생 https://youtu.be/YtVKffR2v0Q 03. 조선공산당 창립원로 지운 김철수가 북으로 가지 않은 이유는? https://youtu.be/Y366xjpGJe0 . 유튜브를 보고 작년 말에 항일운동을 중심으로 한 지운 선생의 대중용 전기를 출간하셨다고 보내주시겠다는 이메일을 보내주셨습니다. . 오늘 미국시간 2022..

03. 阿彌陀佛非聾漢 念念彌陀奈爾何

https://youtu.be/Y366xjpGJe0 지운 김철수 선생님이 88세 되던해인 신유년 1981년 봄에 휘호 하신 “아미타불비롱한(阿彌陀佛非聾漢) 염염미타내이하(念念彌陀奈爾何)”를 접하다보니, 신아동맹당(新亞同盟黨)을 결성했고, 사회혁명당을 만들었으며, 상해파 고려공산당을 창당하여 코민테른 국제당으로 중국공산당과 일본공산당 창당을 지도하고 자금을 집행했으며, 2차 후반기와 3차 조선공산당 책임비서를 지내며 스탈린을 독대하여 조선공산당을 추인받았으며, 조선공산당 재건설 위원회 대표자대회를 개최했던, 지운 김철수 선생님이 북한으로 가지 않고 남한의 농촌 시골에서 촌로로 살다간 이유는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 원주 치악산(雉岳山) 자락에 있는 1500년전 무착도사(無着祖師)가 창건한 사찰 국형사(國亨..

02. 성우 이명직 대감이 이성구 선생의 조부였으며 방원 이성찬 선생의 증조부였는지 모른체 다들 작고하셨습니다.

https://youtu.be/YtVKffR2v0Q 언제나 패권쟁취에 골몰한 백범 김구의 임시정부나 김사국의 서울파나 화요파나 엠엘파나 김재봉 박헌영의 일츠크파에 '지는 것'을 택했던 상해파 호남아(好男兒)들 - 앞줄 좌로부터 읍민(揖民) 현정건(玄鼎健, 1887년 6월 29일~1932년 12월 30일, 소설가 현진건의 형) 선생, 고려공산당대표 겸 임시정부 국무총리 성재(誠齋) 이동휘(李東輝, 1873년 6월 20일~1935년 1월 31일) 선생, 레닌의 혁명동지이자 외교주역 박진순(朴鎭淳, 1898~1938) 선생, 자금담당 중앙위원 일세(一洗) 김립(金立, 본명 金翼容, 가명 楊春山 1880년~1922년 2월 6일) 선생, 뒷줄 좌 고려공산당 자금당당 중앙위원 지운(遲耘) 김철수(金綴洙, ..

01. 지운 김철수 선생의 서찰을 통해 본 - 스탈린은 왜? 20만 고려인을 강제이주 했을까?

https://youtu.be/dwI4WVvi1ok [스탈린은 왜? 20만 고려인을 강제이주 했을까?] . 러시아 내 20만 고려인에 대한 스탈린의 강제이주의 이유 - 자유시 참사까지 유발하며 패권 쟁탈에만 골몰하는 종파 분자에 미국과 일본의 첩자가 많은 혁명화 대상 민족 . 백낙천 시에 '식분지족(識分知足) 외무구언(外無求焉)'이라고 '자기 분수를 알고 만족할 줄 알면 밖에서 또 뭘 구하리요'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불교도인 동정(東庭) 박세림(朴世霖·1925~1975) 선생은 부처님의 심오한 가르침을 '식분(識分)'이라는 휘호로 내 부친인 방원(芳園) 이성찬(李盛粲·1927~2018) 선생의 중년 시절 호인 방산(芳山)을 위해 남기셨습니다. 미천한 입장에서 그 심오한 뜻은 뒤로하고 '자기 분수를 알라'..

지운(芝雲) 김철수(金綴洙, 1893~1986) 선생 해방이후 서찰 1/2

지운(芝雲) 김철수(金綴洙, 1893~1986) 선생이 해방이후 방원(芳園) 이성찬(李盛粲, 1927~2018)선생에게 보낸 서찰 1/2 1945~1955 서울 종로구 종로1가 신신백화점 화원 1956~1965 서울 용산구 한남동 544번지 식물원 1966~1973 경기도 부천군 소사읍 조종리 199-2번지 방산식물원 1974~1977 경기도 부천시 원미동 199-2번지 방원식물원 이어서 지운(芝雲) 김철수(金綴洙, 1893~1986) 선생이 해방이후 방원(芳園) 이성찬(李盛粲, 1927~2018)선생에게 보낸 서찰 2/2 로

[질투(嫉妬)가 지배하는 파멸(破滅)로 가는 소인배(小人輩)의 나라]

https://youtu.be/dwI4WVvi1ok 러시아 내 20만 고려인에 대한 스탈린의 강제이주의 이유 - 자유시 참사까지 유발하며 패권 쟁탈에만 골몰하는 종파 분자에 미국과 일본의 첩자가 많은 혁명화 대상 민족 . 지운(芝雲) 김철수(金綴洙, 1893~1986) 선생의 서찰 등을 일별하면서 느낀 점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한국은 '질투(嫉妬)가 지배하는 파멸(破滅)로 가는 소인배(小人輩)의 나라'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이런 분열(分裂)과 자멸(自滅)을 막는 길은 수신(修身)일 겁니다. 바로 '배고픈 건 참아도 배 아픈 건 못 참는 한국인의 인식을 바꿔야'만 한다는 거지요. . 1917년 박진순 선생, 김 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 스탄케비치 선생 등이 레닌과 함께 볼셰비키 혁명을 성공한 민족적 ..

1956년 박헌영과 함께 숙청된 미국간첩 현앨리스

미국과 체코를 거쳐 북한을 오가며 박헌영에게 미국 CIA의 지령을 전달하던 이중간첩 현엘리스, 현엘리스는 미국 CIA가 200% 만족할 정도로 그 임무를 수행했다. 1956년 박헌영과 함께 숙청된 현앨리스도 거창한 조선여성이었다. . 사진 1: 지운 선생이 상해고려공산당에서 코민테른의 공산혁명자금을 집행하던 1921년의 상해는 공산사회주의를 배우고자 동양권의 젊은 학도들이 몰려들던 사회주의 르네상스였다. 조선의 젊은이들도 그 사회주의 르네상스에 동참했다. 1921년 겨울 상하이에서 중국에 유학온 한국학생들 사진 - 앞줄 오른쪽에서 세 번째가 박헌영, 둘째줄 오른쪽 끝 여인이 박헌영의 아내 주세죽, 그 왼쪽이 현앨리스이다. 현앨리스의 동생 현피터는 맨앞줄 오른쪽 끝에 앉아있다. . 사진 2: 현앨리스가 1..

[지운 선생의 서찰을 판독해 주는 고마운 선생 - 오체자류(五體字類)]

부친 방원 선생의 유품 중 백제왕족 아직기와 왕인박사의 일본진출 연구의 권위자인 동경고등사범 선생이었던 아스카 히노쿠마(Ōtsuki Fumihiko, 大槻文彦, 1847∼1928) 박사의 오체자류(五體字類)가 있다. 지운 선생과 방원 선생이 1945년 부터 지운 선생이 작고하기 직전 1986년까지 두달에 한번 꼴로 나누던 서찰의 세필글씨를 판독하는데 이 오체자류는 으뜸의 선생노릇을 하고 있다. 이 오체자류가 없었다면 지운 선생의 서찰은 판독이 불가능 했을 것이고 내가 연재해가는 지운 선생 이야기는 그저 '뻥(?)'으로 그칠 수 있었을 것이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지운 선생의 서찰 판독이 완료되면 한국의 근 현대사를 바로 잡을 수도 있을것 같다. 내 부친 방원 선생도 지운 선생의 서찰을 받을 때마다 ..

지운 선생과 노구조리 그리고 울릉도 '고고고고(古枯孤高)'

어린시절 부친 방원 선생의 화훼원예농장 한편에는 카나리아를 비롯한 가지가지 새들을 키우는 장소가 있었다. 방원 선생이 꽃을 좋아하니 아름다운 새도 좋아하셨겠지만 새를 키우게 된 이유가 있다. 젊은시절부터 오랜세월 춤을 전공하신 김백봉 선생과 동갑으로 오랜세월 친분을 나눠오셨는데, 바로 김백봉 선생이 새를 좋아하여 집에 많은 새를 키우셨다. 그런데 가족들이 새 알러지에 건강에 문제가 생기니 결국 화훼원예농장으로 그 새들을 몽땅 가져오셨다. 그덕에 어린시절 여러해동안 카나리아의 울음소리를 벗하며 지내야 했다. 새 알러지로 눈비비고 따끔거리면서 모이를 주고 물도 주고 냄새나는 똥도 치워주면서 ... . 1972년 어느날, 부안 백산에서 지운 선생이 종다리 여러쌍을 들고 오셨다. 지운 선생 말씀이 몇년전 신문에..

[지운 선생이 보낸 서찰의 주소를 통해 본 나의 주소지]

내 부친 방원 이성찬 선생 유품 중 지운 김철수(遲耘 金錣洙) 선생과 내 부친 방원 이성찬 선생 간에 오간 세필 명필의 서찰들이 1945년부터 지운 김철수 선생이 작고하던 1986년 2월까지 166통이 고스란하게 모여 있다. 그 봉투를 시절별로 살펴본다. . 1. 서울 종로 신신백화점 - 꽃집 2. 서울 용산 한남동 544 - 한남식물원 3. 경기 부천군 소사읍 조종리 199-2 - 방산식물원 4. 경기 부천시 원미동 199-2 - 방원식물원 5. 서울 용산 청파동 3가 107-36 . +++

진정한 사회주의자 김철수 선생 vs. 2020년 자칭 운동권 한국의 사회주의자

지운 김철수 . 1912년 와세다 대학 정치실과에 유학후 조선의 해방과 새로운 조선은 사회주의에 있다고 판단 하였습니다. 그리고 평생을 사회주의 사상을 간직한체 살다 가셨습니다. 미주 독립자금 횡령과 조직원 살해미수죄로 김구주석으로부터 살해명령을 받은 이승만의 목숨구명을 위해 횡령자금을 코민테른 공산혁명자금으로 대납하여 이승만의 목숨을 구해주기도 했습니다. 해방초기 이승만의 집권을 위해 정적을 빨갱이로 몰아 몽땅 죽일때, 김철수 선생은 '사상은 간직하되 시골 고향에 돌아가 정치를 접고 농사지며 조용히 살아간다'는 내용을 일간지에 광고하는 조건으로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로서는 유일하게 이승만에게 죽임을 당하지 않은 분입니다. . 사회주의 사상을 버리고 이승만에 협조했다면 남한사회에서 떵떵거리며 살다 자식과 자..

[단독 발굴]서찰을 통해 본 사회주의 혁명가 지운 김철수 독립지사

1916년 일본에서 신아동맹당(新亞同盟黨)과 1920년 조선에서 사회혁명당을 만들었고 1921년 성재 이동휘 선생과 함께 상해 고려공산당 창당의 주역이며 1926년 6월 2차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3000명 이상의 조직원이 일경에 체포되어 조선공산당이 해체된후 2차 후반기 조선공산당과 1926년 9월 3차 조선공산당 책임비서로 1927년 스탈린을 독대하여 코민테른에 조선공산당을 추인받고 특별혁명군자금을 수령했던 사회주의 혁명가 지운(遲耘) 김철수(金錣洙) 선생, 그는 무슨 이유로 북조선의 건국과정에 참여하지 못하고 남한의 시골에 칩거하며 여생을 마처야 했을까요? 2018년 4월 한국에서 허겁지겁 급작스레 작고하신 내 부친 방원(芳園) 이성찬(李盛粲) 선생의 상을 치르고 돌아왔습니다. 그리곤 10월에 휴가를..

지운 김철수 선생이 북으로 가지 못한 이유 ...

[비사] . 초기 조선공산당 창설의 주역 지운 김철수 독립지사는 러시아육군사관학교 출신으로 스탈린이 아끼던 러시아 비행 장교 이봉섭 선생의 주선으로 스탈린을 독대하여 코민테른의 공산혁명 자금을 수령하여 공산혁명 대신 조선독립운동자금으로 전용하였습니다. . 그 자금 중에 가장 많은 자금을 지원받은 분은 의열단을 조직하여 무장 독립투쟁을 전개하던 김원봉 선생이었습니다. 또 일부는 미국에서 임시정부에 보내야 할 독립자금을 횡령하고 독립군 조직원을 암살하려 한 이승만에게 살해 명령이 떨어진 것을 풀어주기 위해 이승만의 횡령자금을 대납하는 데도 사용되었습니다. . 지운 김철수 선생은 공산혁명 자금을 독립운동자금으로 전용한 이유로 북으로도 갈 수 없었습니다. 이승만이 사회주의 계열 독립지사들을 빨갱이로 몰아 살육할..

지운 김철수 선생과 의재 허백련 화백 그리고 우장춘 박사의 영원한 우정

[독립지사 지운 김철수 선생을 중심으로] . 부안이 배출한 독립지사 지운 김철수 선생은 성우 이명직 대감님이 돌린 망해가는 나라를 살리는 길은 선진국 유학이라는 사발통문을 보고 1912년 일본 와세다 대학 정치학과 실과로 유학을 갔다. 그리고 성우 이명직 대감님이 일제에 독살되던 1915년부터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1) . 1915년에는 죽어 귀신이 되어서도 나라의 독립을 위해 울자며 ‘귀곡단’과 ‘열지동맹’을 결성했다. 그리고 1916년에는 한국 대만 중국 유학생을 모아 ‘신아동맹단’을 결성하여 독립지사의 길에 들어섰다. 지운 김철수 선생님은 해방되어 감옥에서 나올 때까지 14년을 옥살이했다. (2) . 초기 조선공산당 3차 전당대회 전반기 책임비서로 러시아의 코민테른에 참가하여 거액의 군자금을 받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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