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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Humanities/22_한국역사

6·25전쟁 여군 참전사 - 첩보부대에서 간호부대까지

忍齋 黃薔 李相遠 2016. 1. 24. 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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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여군으로서 그 위대한 활약 ⑯ 여성 유격대원들의 참전활동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  http://www.imhc.mil.kr




▲ 유격대 여성대원의 보고 장면 ⓒ 대한민국 국방부 자료 캡쳐


6.25전쟁 기간 유격대의 활동


‘유격대’ 는 군인이 아닌 일반 주민들로 이루어진 비정규부대이며 적에게 기습, 매복 등 게릴라전을 수행한다.

한편 북한군의 기습적인 불법 남침으로 국군은 계속 후퇴를 할 수밖에 없었다. 북한군이 남한지역을 점령했을 당시 모든 민간인들이 피란을 간 것은 아니었다. 일부는 자원해 국군에 입대하거나 유격대를 결성하여 계급과 군번 없이 곳곳에서 북한군에 맞서 싸웠다.


유격대는 정규군 출신, 반공주의자 청년, 국군 낙오병, 피란민 등 다양한 경력을 가진 인원으로 구성되었고 나이가 어린 학생들도 있었다.


민간 유격대는 대부분 지역단위로 활동했다. 당시 가장 활발히 활동한 지역은 38도선과 근접한 경기도와 강원도다. 이곳 주민들은 전쟁이 일어나기 전부터 북한군의 잦은 도발을 겪었기 때문에 국군이 후퇴한 후에도 북한군에 맞서 투쟁을 벌였다.


유격대는 정보수집, 적정파악, 북한 내무서와 북한군 부대 습격, 악질 공산주의자 색출 및 처단, 피란민 구출, 무기 노획, 그리고 국군 및 유엔군과 연합 작전을 전개하여 많은 전공을 세웠다.


그러나 이들은 열악한 무기와 탄약, 보급제한, 부대의 지휘통솔, 훈련, 전술적 운용의 미흡 등으로 많은 희생을 감내해야 했다.


그러므로 군에 모든 장비를 반납하고 입대하거나 정훈국 선무공작요원으로 편입되는 유격대원들이 많았고 나머지는 방위군으로 입대해 노무사단으로 간 경우도 있었다.


여성 유격대원


유격대는 남자들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여자들도 있었다.


여성유격대원들은 각 유격대에 소속되었고 주로 수행한 임무는 간호활동 및 보급품 지원이었다. 또한 피란민과 도서 주민의 자녀들을 대상으로 학과공부, 체조, 무용 등을 가르치기도 했다.


여성유격대원들의 활약은 아래 각 유격대에서 볼 수 있다.


▲ 개마고원 유격대 기념탑 ⓒ 누리꾼 블로그 캡쳐

개마고원 유격대


광복 이후 북한 전역에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서자 반공인사와 애국청년들이 개마고원지역에서 반공활동을 전개했다.


그러다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한 후 그동안 북한군을 피하여 지하에 잠적해 있던 애국청년 200여 명이 합세하여 ‘개마고원 유격대’를 결성했다.


이들은 북한 내무서를 기습하여 무기를 탈취했다. 또한 교량 및 도로를 파괴하여 북한군의 퇴로를 차단하여 북한군의 이동을 방해했다.


국군과 유엔군에 의해 개마고원 지역이 수복되었을 때는 남은 공산주의자들을 색출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그러나 중공군의 참전으로 전선이 밀리자 이들도 미군과 함께 흥남에서 배를 타고 철수했다.


한편 개마고원 유격대는 인민학교 선생이었던 김근산, 김옥단, 황옥순, 김목단, 고금단 등 10여 명의 여성들이 소속되어 활동했다. 이들은 주류 유격대원들을 보조하는 등 태극기 제작, 정보연락 그리고 적의 정보를 수집하는 임무를 맡았다.


▲ 구월산 유격대 김종벽 대장과 이정숙 보좌관 ⓒ 대한민국 국방부 자료 캡쳐

구월산 유격대(동키 제2부대)


구월산 유격대는 38도선을 돌파하고 북진을 계속한 국군과 유엔군이 황해도 은율 지역에 입성하자 반공주의자 청ㆍ장년들이 무장대를 조직했다. 이어 무장대원들은 치안유지와 빨치산 토벌에 나섰지만 중공군의 참전으로 전세는 다시 역전되었다.


또한 중공군의 계속된 공격으로 육군본부 정보국 소속 청보장교 대위 김종벽은 자신의 부대를 모두 잃었다. 김종벽은 고향인 은율군 장련면으로 돌아와, 연풍부대를 창설했다.


연풍부대는 안악, 신천, 재령, 장련, 송화군 일대에서 예하부대로 2개 대대를 편성하여 빨치산부대와 전투를 전개했다.


이후 연풍부대는 다른 유격부대들과 연합하여 ‘구월부대’ 로 확대 개편했다.


1951년 3월에는 백령도 레오파드 기지사령부와 접촉해 ‘동키 제2부대’ 로 불리었고 대략 2,500명의 대원들이 있었다.


이처럼 구월산 유격대는 구월산에서 활동하던 북한군 패잔병 및 빨치산 부대와 전투를 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다.


한편 구월산 유격대는 수십 명의 여성대원을 보유하고 있었다. 여성대원들은 정보수집, 간호 및 통신, 보급 교육, 공연 등을 담당했다.


특히 여성대원들은 작전지역에서 자유로이 활동할 수 있다는 여성의 이점을 활용하여 적극적인 정보 수집활동을 전개했다. 또한 세탁한 옷을 너는 방법으로 아군에게 신호를 보내기도 했으며, 유격대원들의 생활에 전반적으로 필요한 물건을 제공해주는 역할도 했다.


또한 여성대원들은 창작극, 음악, 무용 등 순회공연을 실시하여 유격대원 및 피란민들에게 위로를 주었다.


구월산 유격 대원중 가장 활약이 컸던 여성은 이정숙 대장이었다. 그녀는 함경남도 함흥 출신으로 부모와 남편이 ‘반동분자’ 로 옥사하고, 본인은 탈출하여 서하무장대를 조직했다.


그녀는 서하무장대 대원 70여 명과 농민군을 지휘하여 연풍부대와 함께 참전하여 많은 전공을 세웠다.


그녀는 고립된 재령부대를 구출하기 위해 촌부로 가장하고 밤새 100여 리를 걸어 89명을 구출하는 등 많은 공을 세워 ‘구월산의 여장군’ 으로 불렸다.


이러한 공로로 육군 총참모장에게 표창장을 수여받았다.



▲ KLO 첩보대원들이 파견대장의 훈시를 듣고 있다. 좌측 2줄이 여성대원들이다. ⓒ 대한민국 국방부 자료 캡쳐

첩보부대(KLO) 여성대원의 활동 

전쟁 이전부터 국군은 물론 청년단체에서도 대북첩보수집 활동은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정부수립 후 육군 정보국에서 38도선 접경지역과 전국 각처에 파견대를 보내 방첩과 첩보활동을 전개했다.
 
전쟁이 발발하자 초기에는 첩보조직이 붕괴되었다가 곧 육군이 육군첩보대(H. I. D)를 창설하여 각 군단과 사단에 지대를 파견함으로써 대북첩보활동은 재개되었다.
 
한편 미군도 방첩대를 조직하여 대북 첩보활동을 수행했다. 정부 수립 이후 미군은 1949년 6월 1일, 국동군사령부 정보참모부에서 한국인 대원을 모집했다. 또한 주한연락처(KLO, Korea Liaison Office)를 창설하여 대북정부수집활동에 나섰다.
 
한편 6.25가 발발하자 KLO는 조직을 확대 개편했다. 신속한 보고체계를 유지하기 위해 서해안과 동해안 도서지역에 파견대를 설치했다. 1950년 말을 전후하여 일명 ‘래빗(Rabbits)' 으로 불렸던 여성청보대원들을 투입시켰다.
 
각 파견대별로 심영애, 박정숙 등 20여 명의 여성대원들이 활동했으며 대부분 황해도 이북이나 연백출신들로 현지 실정에 밝았다.
 
KLO는 인천상륙작전 성공 이후에도 북한의 후방으로 많은 첩보원들을 파견하여 북한의 병력, 장비규모, 보급현황, 이동사항, 군의 사기, 지역 민심 등을 파악하여 유엔군 측에 제공했다.
 
또한 기밀문서탈취, 항공폭격 유도, 귀순공작 등 고난이도의 임무도 수행했다.
 
한편 극동군사령부 연락단도 6.25가 발발하자 TLO(Tactical Liaison Office)를 조직했다. 이들은 전선의 미 보병사단, 영국군 여단 그리고 국군 군단에 파견되어 첩보 및 수집활동을 돕게 했다.
 
TLO팀은 한국인 대원 20~30명 정도로 구성되었는데 3~4명의 여성들이 함께 있었다. 여성대원의 이름은 김병직, 김보현, 강영자 등이었다.
 
이로써 여성들은 유격대 뿐만 아니라 첩보부대에서 활약하여 남성들 못지않게 국가를 위해 헌신했다.
 
여성들의 이러한 행동들은 국가수호에 성별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며 우리는 후손으로써 이러한 선배들의 정신을 본 받아야할 것이다.

<출처 : 6·25전쟁 여군 참전사>


래빗(Rabbits)
6.25당시 미군 첩보부대(KLO)의 후원을 받아 구성된 한국군 여성 첩보부대소속 첩보원들의 암호명이다. 인천상륙작전 직전에 비밀리에 침투하여 버선발로 인천에서 서울까지 걸어서 침투했다. 나이는 대부분이 10대 소녀들이었다. 서울까지 걸어서 침투한뒤 인민군의 눈을 피해 정찰활동임무를 수행했다. 대부분이 희생당했으며 전쟁이 끝날때까지 적진 한복판에서 처절한 임무를 수행했다. 2000년대 들어서 국방부가 심영애,박정숙등 20명의 대원을 인정하여 전사에 기록하게 되었다.

프란체스카 비밀부대
6.25당시 영부인이었던 프란체스카 여사가 당시 널리 친분있던 문화계 인사들과의 자리를 만들어 비밀리에 조직을 만들었다. 당대의 미모를 자랑하던 배우와 일반인 여성들을 선별하여 특수훈련을 받게한 뒤 적진으로 침투하였다. 생존할 가능성은 없는 임무였기에 철저히 비밀리에 접촉하여 요원을 선발하였다. 특수침투와 중국어를 훈련받은 여성 대원들은 중국군이 점령한 곳에 낙하산으로 공중침투했다. 미모를 무기로 중국군 각부대 수뇌부의 "첩"이 되어 정보를 빼내는 것이 공작 임무였다. 임무가 실패하는경우 당연히 죽어야 했고 성공하더라도 아군의 집중공격으로 적군과 함께 죽어야 했다. 생존율이 0%이기에 살아남은 대원이 없어 자세한 것은 전해지지 않는다. 그 덕에 아직도 그 존재가 불투명하고 비밀 정보 공작 담당 미국요원들의 완성되지 않는 간단한 메모에서만 기록이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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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여군으로서 그 위대한 활약 ⑰ 여군의 6.25전쟁 참전 의의와 발전



▲ 논개의 초상화,임진왜란 당시 왜군 장수를 껴안고 장렬히 전사했다. ⓒ 누리꾼 블로그 캡쳐


여성의 호국 및 애국정신 계승


대한민국의 5천년 역사상 외침을 받았을 때 여성들의 애국 및 호국활동은 적지 않았다. 대표적으로 임진왜란 당시 행주산성전투, 논개와 계월향의 의기(義氣, 의로운 기생), 일본강점기 당시 윤희순의 의병단 조직, 유관순 열사의 3.1운동 주도 등이 있다.


6.25전쟁 당시에는 여성의 호국활동은 더욱 적극적이었고 직접 참전하기도 했다. 6.25전쟁에 참전하거나 지원한 여군 및 여성들은 목숨을 걸고 나라를 구하는데 전력을 쏟았다.


이들은 국가가 가장 어려운 시기에 홀연히 육ㆍ해ㆍ공군 및 해병대에 자원입대하여 활동했다. 또한 총탄이 난무하는 전선, 병원, 대북방송 현장, 총기를 만드는 총포공장, 타이프가 있는 사무실 그리고 험준한 산악지형 등 여러 위험한 현장에서 활약했다.


비록 군대에 입대하지는 못했지만 민간여성들도 국가와 국군을 위해 나섰다. 이들은 간호활동, 식품 제공, 빨래 및 청소 등으로 국군을 도왔다.


이는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여성들도 나라를 위해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사례다. 우리민족의 최대 비극인 6.25전쟁 당시 여성들의 위대한 활약은 후손들이 본받아야할 점이다.


▲ 대한민국 최초 여군 '여자의용군', 사진은 여자의용군 군악대. ⓒ 누리꾼 블로그 캡쳐


여군 발전과 그 계기


대한민국 여군은 1953년 휴전 이후 법적, 제도적 정비과정을 거쳐, 오늘날까지 지속적으로 발전해왔다.


육군은 6.25전쟁 중 배속장교와 여자의용군으로 참전하여 활동하다가 1953년 휴전 이후 여자의용군이 정규군으로 발전하면서 여군병과로 정착되었다.


1955년에는 독자적으로 여군훈련소가 창설되었다. 1970년 12월에는 육군본부 직할부대로 여군단이 창설되었다.


4년 뒤에는 ‘여군 병’ 제도를 폐지하고 초임 계급을 ‘하사’ 로 전환하여 입대 자원의 질적 향상을 도모했다.


또한 전신타자, 전산요원, 항공, 심리전 방송요원 그리고 여군 헌병대 등 여군의 활동영역은 더욱 확대되었다.

1990년 1월이 되자 육군은 여군 단일병과를 해체하고 보병, 정보 등 7개 병과로 전환하여 근무하도록 지시했다. 1998년에는 육군사관학교에서 최초로 여자생도를 모집하기 시작했고 2011년에는 숙명여대를 시작으로 여군 ROTC도 모집하기 시작했다.


해군(해병대 포함)의 경우 1950년 8월 31일 제주에서 126명의 여자해병이 탄생했다. 그러나 1955년 이순덕 중위가 전역함으로써 여자해군의 역사는 오랫동안 단절되었다.


하지만 1999년 해군사관학교에서 여자생도를 입교시킴으로써 여자해군의 역사는 다시 시작되었다.


2001년에 사관후보생 출신 여군 장교 20명이 임관하여 함정과 해병대 등에 배치되었다. 2003년에는 해군사관학교 23명이 해군 및 해병대 소위로 임관했다. 또한 같은 해, 해군 및 해병대 부사관이 최초로 임관하기도 했다.


이로써 해군 및 해병대에서도 여군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오늘날 해군 및 해병대 여군들은 전투함, 대잠 헬기 조종사, 전투부대 지휘관 등 다양한 분야에서 남군들과 함께 활약하고 있다.


공군의 경우 1949년 2월 여자항공대가 창설되어 여자항공병이 배출됨으로써 시작되었으나 1954년 10월 김경오 대위가 전역하면서 단절되었다.


▲ 40여년만에 재탄생한 공군 여군 ⓒ 누리꾼 블로그 캡쳐


그러나 1997년 공군사관학교 역시 여생도가 입교함으로써 다시 시작되었다. 2001년 1월에는 공군 최초로 사관후보생 출신 여군 장교 22명이 임관했다.


이어 3월에는 공군사관학교 여생도 18명이 임관했고 두 달 뒤인 5월에는 공군 최초로 여자 부사관 31명이 임관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2002년 9월에는 공군 최초로 여군조종사 5명이 탄생했다. 이로써 6.25전쟁 이전에 조종사의 꿈을 안고 여자항공대에 입교한 선배 항공대원들의 숙원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간호장교는 1948년에 국군이 창설하고 의료 인력이 필요함에 따라 간호장교를 모집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국군의 의료지원과 간호를 담당했다.


한편 6.25전쟁이 발발하자 간호장교들은 나이팅게일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바탕으로 수많은 군인과 민간인들의 간호를 위해 잠을 자지 못하고 식사까지 걸렀다.


그러나 휴전협정 이후 사회가 안정되었다. 이에 간호장교 지원자가 줄어들어 간호사관학교가 1957년 제10기생을 끝으로 폐지되었다. 국군은 민간 간호학교에 위탁교육을 시켜 간호장교를 양성하는 등 간호장교 운용에 어려움이 많았다.


그러나 10년이 지난 1967년 8월 15일, 육군병원 부설 3년제 육군간호장교가 창설되었고 1981년 1월 5일부로 4년제 정규대학과정으로 승격되면서 ‘국군간호사관학교’ 로 개편되었다.


한편 국군 간호장교는 해외에도 많이 파견되었다. 1964년 베트남전쟁에 500명이 파병되었고 걸프존, 서사부사하라, 아프가니스탄 전쟁, 이라크 전쟁 등에도 세계평화유지군의 일원으로 파병되어 간호임무를 수행했다.

2001년 1월 1일부로 여군 최초로 여군 최초, 간호병과 출신 장군이 탄생되었고 2012년까지 6명의 간호장교 장성을 배출했다.


2013년 올해 휴전협정이 맺은지 정확히 60년이 지났다. 전쟁이 발발하여 나라가 위급한 상황에서 여성의 몸으로 육ㆍ해(해병대)ㆍ공군을 입대하여 나라를 지키던 여군들의 희생과 헌신이 여군발전에 밑거름이 되었다.


▲ 오늘날의 여군들의 모습 ⓒ 대한민국 국방부 자료 캡쳐

여군의 역사는 대한민국 역사의 일부이자 국군의 역사이기도 한다. 여군들은 6.25전쟁을 거치며 국가 및 군에 크게 기여를 했다.


남존여비 사상이 잔존하던 당시, 여성의 몸으로 군인이 된다는 것은 쉽지 않는 선택이었다. 그러나 당당히 여군에 지원함으로써 유교적 사회제도와 가부장적 가족제도를 탈피했고 여군이 성장 및 발전을 가져오는 계기가 되었다.


오늘날에도 여군들은 첨단화되고 발전된 각 군 곳곳에서 국가를 위해 활약하고 있다. 이것은 60여 년 전, 선배 여군 및 여성들이 전쟁터와 근무현장을 누리며 활약한 조국에 대한 희생과 헌신이 오늘날 발전된 여군이 존재하는 크나큰 믿거름이 된 것이다.

<출처 : 6·25전쟁 여군 참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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