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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여군으로서 그 위대한 활약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 http://www.imhc.mil.kr
바다 위의 나이팅게일 6.25전쟁에 뛰어들다
▲ 간호장교후보 제3기생 기념촬영 - 대한민국 국방부 여군 참전사 자료 캡쳐
전쟁 발발과 해군 간호장교들의 움직임
6.25전쟁이 발발하자 각 해군병원에서 근무하던 간호장교들은 전장에서 수없이 쏟아져 나온 해군 및 해병대 부상자들을 진료하는 등 힘든 나날을 보냈다.
간호 인력이 모자라자 1950년 10월, 진해 해군신병교육대를 수료한 여자해병 중 장교로 임관한 2명이 간호 및 위생장교로 배치되었다. 함께 여자해병으로 지원했던 어린 여성들은 간호보조역할 부여받아 부족한 간호 인력을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51년 7월경부터 고지쟁탈전이 벌어져 부상당한 장병들이 늘어나자 간호 인력은 다시 부족해졌다.
이에 간호장교후보 제3기생을 모집했고 11월 1일자로 임관했다. 그러나 부상자는 늘어가기만 했다.
1952년 6월 6일 늘어나는 부상자를 효율적으로 수용하기 위해 신병교육대가 사용하던 막사를 인수했다. 병원 용도로 알맞게 개조한 후 제5, 6, 7, 8병동으로 사용했다. 동년 12월 22일에는 11병동을 신축하여 환자들을 계속 수용했다.
후방에서 해군 간호장교들의 활약
휴전선 부근의 간호장교들의 간호가 치열했듯이 후방도 바쁘긴 마찬가지였다.
전쟁 전 인천해군병원에 배치되었던 간호장교들은 6.25전쟁이 발발하자 목포로 철수하여 1950년 7월 27일에 개설된 목포도립병원에서 간호임무를 수행했고 인천해군병원의 일부 의료진들은 제주에 위치한 해병대사령부에 야전병원을 창설했다.
이에 인천해군병원에서 근무했던 일부 간호장교들은 제주야전병원으로 파견되어 해병대 장병들을 대상으로 진료 및 간호임무를 수행했다.
또한 1950년 8월 17일 해병대 김성은 부대가 통영상륙작전을 실시할 때 제주야전병원 소속 군의관 1명과 간호장교 1기생 이광희 소위와 2기생 김주만 소위가 전투부대에 배속되어 부상당한 해병대 장병들을 돌보았고 부상당한 북한군 포로도 진료했다.
▲ 해군 간호장교들의 활약은 중공군의 개입으로 철수시에도 계속되었다. 사진은 흥남철수 당시 사진 ⓒ 다음 누리꾼 블로그 캡쳐
북한점령지역에서 해군 간호장교
해군 간호장교들의 활약은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여 북진한 후 북한점령지역에서도 계속 되었다.
해군본부 작전명령에 의해 원산도립병원을 인수했다. 인천해군병원을 해체하고 소속되었던 의무인력은 원산도립병원으로 이속시켰다. 원산도립병원의 이름을 원산해군병원으로 바꾸고 제3해군병원으로 지정했다.
1950년 10월 26일 제1해병대대가 원산에 상륙한 후 원산, 고성, 함흥지구전투를 수행하는 동안 군의관 2명과 해군 간호장교 1기생 이광희 소위, 유순덕 소위, 조성일 소위, 배소제 소위 등 4명이 배속되었다.
중공군의 참전으로 12월 15일 철수할 때까지 이들은 약 2개월간 북한지역에서 전방전투부대의 위생담당관들에게 약품과 의료자재를 지급하고 구급환자들의 후송과 처지 등 업무를 수행하느라 교대도 없이 바쁜 나날을 보냈다.
당시 북진하던 전선 상황은 ‘해군 일화집 제5집’ 에 실린 증언을 통해 알 수 있다.
“해병대가 북진할 때 군의관 2명과 간호장교 4명(이광희, 유순덕, 조성일, 배소제 소위)이 배속되었다. 약 2개월간의 북한지역 작전 중 해병대와 함께 수많은 전설을 누비며 역경 속에서도 헌신적으로 임무를 완수했던 군의관과 간호장교들은 “내 다리를 내놔! 내 눈을 찾아줘!” 하며 소리치며 울부짖던 전우들, 그리고 해군묘지에 하얗게 칠해진 나무 십자가들이 빽빽하게 있던 그 영상을 이따금 기억 속에 떠올리며 전우들의 명복을 빌곤 했다.
▲ 고지쟁탈전당시 간호장교들의 활약은 매우 컸다. ⓒ 백봉 story 다음 카페 캡쳐
고지쟁탈전 시기
한편 전선은 공군의 개입으로 국군은 38도선 부근까지 다시 밀려났다. 전선은 38도선으로 고착된 가운데 1952년 장단·사천강 지구 전투가 벌여지고 있었다. 휴전회담이 결려되자 전투는 더욱 치열해졌다. 한 고지라도 점령하고 전선에 유리하게 양상 시키려는 의지였다.
이로 인해 부상자는 더욱 늘어갔다. 이에 간호장교후보 제4기생을 모집하여 12명을 임관시켜 부족한 간호 인력을 보충했다.
그러나 간호 인력은 여전히 부족했다. 이에 해군본부는 11월 1일부로 서울 답십리에 제5해군병원을 신축했다. 제5해군병원의 임무는 전방지역에서 후송된 부상자들을 1차 진료 후 장기입원환자들을 후방 진해해군병원으로 후송하는 것이었다.
제5해군병원에 이속된 간호장교는 제1기생 조성일 중위, 제2기생 설문수 중위, 제3기생 유기순, 유영하 소위, 제4기생 김용이 소위 등이 배치되어 입원실과 병동에서 부상자를 진료하며 수술지원 및 의무행정 등의 임무를 수행했다.
▲ 병원선에서 해군 간호장교들 ⓒ 국방부 여군 참전사 자료 캡쳐
병원선
1951년 2월 15일 원산항 부근에서 대파된 520톤 FS 영등포호에 의료장비를 설치하여 병원선으로 개조했다. 당시 병원선은 이 함선 한 대 뿐이었지만 이 병원선에서 해군 간호장교들의 활약이 컸다.
이 병원선에는 해군 간호장교 제1기생 편남분 중위, 이완숙 중위가 근무했으나 1951년 10월 10일 제3기생이 임관한 후 고금례 소위, 김창열 소위, 박정실 소위 등 3명이 추가로 배치되었다.
이 병원선은 전선에서 진해해군병원으로 후송되어 오는 환자들을 중간에 치료해 주는 역할을 담당했다.
특히 해병대 장병들이 고지쟁탈전을 수행하다 부상당해 온 경우가 많았는데 간호장교들은 이들을 정성스레 치료하고 간호하여 감동을 받은 장병들이 퇴원할 때 눈물을 흘리는 경우가 많았다.
병원선에 상황은 당시 참전 해군간호장교 1기생의 증언을 통해 알 수 있다.
“해군 최초이자 마지막 병원선이었던 영등포호에서도 간호장교의 활약은 계속되었다. 함내에 들어서면 외래환자 접수처 다음이 조제실이고 함내 이곳저곳 구석구석을 오밀조밀하게 손바닥만한 공간이라도 최대한 도로 활용하고 있었다. (중략) 수용되는 상이장병은 대체로 당시 중동부 전선에서 귀신 잡는 해병이라는 별명으로 용맹을 떨치던 해병들로서 치료를 받고 퇴원할 때에는 정이 들어 눈에 눈물이 어리는 것이 상례였다. 입원환자는 간호장교 편남분 중위와 이완숙 중위가 책임을 지고 간호하였으며, 매주 월요일에는 어린이 음악대 혹은 정훈 음악대에서 위문 연주를 해주었고, 해군 부인회 혹은 사회단체로부터의 위문이 그칠 날이 없었다”
바다 위의 나이팅게일, 해군간호장교
▲ 해방병단 창설식, 반명함 사진은 해군 창시를 이끈 손원일 제독 ⓒ 네이버 누리꾼 블로그 캡쳐
해군의 의무부대 창설
1945년 11월 11일, 해군은 미 군정청(광복 후 남한에 설치되었던 미국 육군사령부 군정(USAMGLK)의 승인을 얻어 진해에서 ‘해방병단(海防兵端)을 발족했다. 해방병단의 임무는 해안 및 도서순찰임무를 맡았다.
해방병단이 임무를 수행하기 시작한 이후 소속 장병들에 대한 의무지원의 필요성이 제기되자 동년 12월 15일, 해방병단 본부 옆 건물에 의무실을 설치했다. 이 해방병단 의무실이 바로 우리나라 해군 의무시설의 효시다.
그러던 1946년 2월 21일, 해방병단 의무실은 진해병원으로 승격되어 일본 해군이 사용했던 공제병원(경남 진해시)으로 이전되었고, 초대 진해병원장에 홍필훈 중위가 임명되었다.
1946년 6월 15일 국방부가 통위부로 개칭되고 해방병단도 조선해안경비대로 새롭게 발족했다. 진해병원 또한 동년 4월 30일 해방병단병원으로 바뀌었다가 6월 30일 조선해안경비대병원으로 개칭되어 해군장병의 치료를 담당했다.
정부수립 직후인 1948년 9월 조선해안경비대병원은 대한민국 해군병원으로 개칭되었으나 11월 11일에 다시 진해해군병원으로 바뀌어 해군 및 해병대 전 장병에 대한 의료를 담당하는 병원으로 발전했다.
해군 간호장교, 바다 위의 나이팅게일 양성
해군은 1945년 11월 11일 해방병단이 창설된 이후 동년 12월 15일 해방병단 본부 옆 건물에 의무실을 설치했다.
약 3년이 지난 1948년 7월 15일, 해안경비대의 임무 확장으로 총사령부의 기구개편과 아울러 의무인력이 필요함에 따라 총사령부에 의무처가 편성되었다. 또한 주요 해군기지에 병원 및 의무실이 신설됨에 따라 환자관리와 보호 등을 위해 간호장교 모집을 시작했다.
이에 해군은 1949년 2월 7일부로 진해 위생학교(군의학교 전신)에 간호장교 교육대를 창설하고 해군 간호장교후보생을 모집하기 시작했다.
자격요건은 간호학교를 졸업하고 간호자격증을 취득한 자였다. 수많은 여자들이 지원한 가운데 서울 해군본부(現 극동빌딩자리)에서 간호사자격증 취득여부 확인 및 면접을 통해 21명의 해군 간호후보 제1기생을 선발했다.
해군 간호후보 제1기생은 해군통제부가 위치한 진해 위생학교 간호장교 교육대에서 2개월간 정신교육, 제식훈련, 구보, 사격 그리고 각개전투 등 군사교육을 받은 후 4월 9일부로 수료와 동시에 탈락자 1명을 제외한 20명이 소위로 임관했다. 1기생 명단은 다음과 같다.
▲ 해군 간호장교후보 제1기생 명단
한편 해군 간호장교후보 제2기생은 제1기생과 같은 방법으로 1949년 8월경 모집이 공고되었다.
선발과정 1기생과 마찬가지로 간호자격증 취득여부, 면접 그리고 신원조회를 통해 8명을 선발했다. 자격 미달자 2명을 탈락시키고 1949년 11월 1일 해군 간호장교 교육대에 6명을 입교시켰다.
간호장교후보 제2기생 훈련과정부터는 보다 더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간호장교 양성을 위해 기존 위생학교에서 해군종합학교로 간호장교교육대를 예속시키고 교육기간을 3개월로 연장했다.
해군 간호장교후보 제2기생은 다음과 같다.
▲ 해군 간호장교후보생 제2기 명단
▲ 여군협의회 해군간호장교 1기 멤버였던 김병녀씨(맨 아래의 중앙)도 있다. - 데일리안 캡쳐, 6·25 참전유공자 여군협의회 제공
나긴 고지전(高地戰)과 휴전회담시기의 간호장교들의 활약
▲ 고지쟁탈전이 치열했던 1951년 7월 부터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 조인시기까지 ⓒ 영화 '고지전' 캡쳐
중공군의 개입으로 국군과 UN군의 후퇴와 고지전(高地戰) 개시
국군과 UN군은 인천상륙작전 후 반격을 개시하여 한만국경(韓滿國境)까지 진격함으로써 통일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수많은 사상자를 내면서 철수하여 1951년 1월 4일 수도 서울을 내어주고 8일에는 수원-여주-강릉 전선에서 대치하게 되었다.
다행이 중공군의 공격역량이 한계점에 다른 것을 간파한 국군과 UN군이 반격을 개시하여 3월 15일, 서울을 재탈환하고 3월 말에는 38도선까지 탈환했다.
한편 1951년 7월부터 휴전회담이 개시되면서 휴전회담의 주도권 장악과 한 치의 영토라도 더 확보하기 위한 ‘고지전’ 형태의 전투가 벌어졌다.
▲ 고지에서 치열한 전투, 미군이 북한군을 바라보고 있다. ⓒ 국방부 60주년 사업단 블로그 캡쳐
치열한 고지전, 그러나 간호장교들의 용감한 활약
치열한 고지전 상황에서도 육군병원 창설은 계속되었다. 1951년 12월 5일 대전에서 제63병원이 창설되었고 12월 1일 광주에서 제77병원이, 이듬해 6월 9일 제주에서 제98병원이 생기고 휴전 1달 전인 1953년 6월 20일에는 온양에서 제109병원이 개설되었다.
한편 1951년 3월 20일을 기점으로 기존 5개 외과치료반이 이동외과병원으로 발전되어 제1, 2, 3, 5, 6 이동외과병원으로 개편되었다. 추후 7, 8, 9, 11 병원도 속속 창설하여 전상자들을 치료했다.
병원의 창설과 환자의 급증으로 간호장교들도 새로 모집하기 시작했다.
1951년 2월 6일 부산 경남상고에 위치한 여자의용군훈련소에서 간호장교후보 제10기생 35명을 입교시켜 20일간의 기초 군사훈련을 실시 후 소위로 임관시켰다.
9월 2일에는 간호장교 제11기생 11명을 선발하여 1개월간 기초 군사훈련 후 임관시켜 육군병원으로 배치시켰다.
또한 계속되는 고지쟁탈전으로 많은 부상자가 발생하자 여자의용군훈련소에서 훈련을 받고 있던 간호장교 후보생 303명을 군의학교에 설치된 간호사관학교에 입교시켜 간호장교 양성에 박차를 가했다.
이들은 전선에서 부상자가 급증하여 후방병원으로 밀려오자 곧 바로 사관생도 교육을 받지 못하고 부산의 제3, 제5육군병원과 마산의 제2육군병원 및 수도육군병원으로 배치되어 간호보조임무를 수행했다.
이들 가운데 244명은 1개월간 간호 실습 및 환자들의 간호를 돕다 입교했고 나머지 29명도 두 달 뒤 입교했다.
간호장교들의 열악한 상황에서도 늘어나는 환자들을 돌보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았다. 이러한 바쁜 나날은 휴전 이후에도 한동안 계속 되었다.
▲ 당시 수십만명의 환자를 돌보았던 간호장교 중 한 사람 박영자 중위, 사진은 1956년에 촬영한 것으로 서울대병원에 간호사로 재직 당시에 촬영 ⓒ 조선닷컴 블로그 캡쳐
고지전 시기의 환자 현황
1.4 후퇴가 시작된 1951년 1월 초부터 그해 말까지 전상 또는 질병으로 입원한 인원은 민간인 종군자를 포함해 무려 10만 5,061명이었다, 이는 무려 7개 사단병력에 달하는 인원이 군 의료기관에 입원하여 진료를 받은 것이다.
1952년에도 전년도 이월환자를 포함해 누적 입원환자가 11만 1,671명이나 되었다. 아울러 휴전회담의 진척이 보여 전선이 소강상태였던 1953년 입원환자 수는 전년도 이월환자를 포함해 8만 7,233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를 진료를 한 병원의 유형별로 분류하면 전 이동외과병원에 전체 환자의 63%인 5만 4,521명이, 육군병원에는 2만 4,771명이 입원했다. 나머지 7,901명은 치료중대에서 치료를 받고 있었다.
총 전쟁기간 3년 1개월 간 전체입원환자는 무려 39만 7,519명에 달했다. 국군 전체 현역장병의 절반이 넘는 수가 군 의료기관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고 있었다.
이와 같은 통계를 통해 당시 군의관과 간호장교 등 군 의료진들의 헌신과 노력이 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국군의 북한점령 지역에서 육군간호장교들의 활약
▲ 6.25전쟁 당시 국군의 북한점령지역 ⓒ 네이버 누리꾼 블로그 캡쳐
국군의 북진
1950년 9월 15일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이 대성공을 이룬 후 28일 서울까지 탈환했다. 이어 10월 2일에는 38도선을 돌파하고 북진하여 10월 10일에는 원산을, 10월 19일에는 평양을 점령했다.
한편 10월 26일에는 서부 청천강 북부와 압록강의 초산에 이르렀고, 중부는 장진호를, 동부는 압록강 혜산진까지 진격했다. 11월에는 두만강 일대까지 국군이 점령했다.
북한점령지역에서 간호장교들의 활약
전쟁이 발발하자 군의관 및 간호장교, 의무병 등도 쉴 새 없이 바빠졌고 병원에도 환자가 늘어났다. 개전 이틀 동안은 국군부상자가 대다수였지만 3일째부터는 북한군 부상자도 실려 왔다. 같은 병원에 국군과 북한 괴뢰군 부상자, 그리고 일반인 환자가 동시에 수용되는 기이한 현상도 일어났다.
이러한 불편한 동거로 급기야 병실 내에서 국군과 북한 괴뢰군 간의 총격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북한 괴뢰군은 우선적으로 자신들에 대한 치료를 요구했고, 이로 인해 우선순위가 밀린 민간 환자들의 불평과 국군환자의 동조로 충돌했던 것이다.
동시에 국군환자와 민간인환자들의 철수작전도 전개되었다. 걸을 수 있는 경환자들은 각자 퇴원해서 피란길에 올랐고 중환자들은 병원차량과 열차편으로 이동되었다.
간호장교들은 북한 괴뢰군 감시병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환자들에게 수술복이나 의료진의 가운을 입혀 탈출시키기도 했다.
▲ 6.25 전쟁 당시 맹활약했던 6사단, 압록강에 최초로 닿았다. 사진은 6사단 소속 간호장교들 ⓒ 연합뉴스
한편 북한 괴뢰군이 병원을 접수한 시간에 근무 중이었던 사람들은 이들에게 억류당했다. 이들 중 일부는 9.28 서울 수복당시 북으로 끌려갔지만 국군이 평양, 함흥, 원산 점령시 구출되었다. 하지만 사망하거나 실종된 사람들도 있었다.
이동하는 병원열차에서도 간호업무는 계속 되었다. 급하게 철수 했지만 행선지가 정해지지 않아 열차는 1주일씩 남행했다. 낮에는 북한 괴뢰군의 폭격을 피해 산골짜기 안전지대에 멈추어 섰다가 밤에만 이동했다. 보급이 끊겨 주먹밥으로 해결하거나 철로 가에서 임시로 취사했다.
북괴의 계속된 남진에 따라 대규모 민간병원이 모두 북괴의 수중에 들어가자 시설이 크게 모자라게 되었다. 국군 당국은 군의학교를 임시 폐교시키고 ‘야전의무단’ 으로 바꾸어 전상자를 수용했다.
그러나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자 전세가 역전되었다. 이에 국군은 제15육군병원의 창설을 시작으로 제 18병원과 제23, 제27, 제31, 제36, 제59 육군병원을 창설했다.
동년 12월에는 군 의료시설의 수용규모가 2만 5천여 병상으로 증가되었다.
▲ 1950년 10월 19일 평양탈환 당시 이승만 대통령과 국군을 환영하는 평양시민들 ⓒ 국방부 6.25 전쟁 제60주년 사업단 블로그 캡쳐
한편 10월 1일 38도선을 돌파하여 북한으로 진격하기 시작할 때 간호장교들도 장병들을 따라가지 않을 수 없었다. 전진할 때 같이 전진하고, 후퇴할 때도 같이 후퇴하면서 환자를 돌보는 것이 이들의 사명이었다.
10월 26일 제15육군병원은 북진하는 국군을 따라 함경남도 원산에 상륙했다. 원산에서 현지 병원시설을 점령해 병원을 운영하다가, 계속 북으로 진격하는 부대를 따라 11월 17일에는 함경남도 도청소재지인 함흥까지 이동했다. 이후 제15육군병원은 함흥도립병원을 접수했다.
개원 당시에는 환자가 많지 않았지만 미 해병대가 장진호 방면으로 진격하고, 국군이 함경북도 청진으로 진격하면서 전투가 가열되자 전상자들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실려 왔다. 간호장교 10명, 간호보조원 5명으로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환자들이 많았다. 이에 육군은 현지 간호사를 모집해 부족한 인력을 보충했다.
11월의 함경도는 이미 한겨울이고 기온은 영하 20도에 달했다. 수도관이 얼어 물을 얻기가 어려웠고, 난방시설이 없어 환자들도 추위에 시달렸다. 게다가 보급도 원활하지 못해, 의료품과 식료품 등 생활필수품의 조달에 어려움이 많았다.
제15육군병원의 선임간호장교 장경희 중위(간호후보생 제1기 출신)가 미군부대를 찾아가 미군 전투식량인 레이션 박스를 겨우 조달해 기근을 면했다.
▲ 한반도로 진격하는 중공군 ⓒ 다음 누리꾼 블로그 캡쳐
중공군이 참전하자 상황은 더 악화되었다. 중공군의 참전으로 국군과 유엔군이 후퇴하기 시작하자 간호장교들도 따라 움직였다. 1,000명의 환자를 안전하게 이동시키는 일부터, 철수선 안에서 그들의 상태를 돌보는 일까지 고통의 연속이었다.
흥남부두에는 국군과 유엔군뿐만 아니라 민간인들도 가득 메워 아수라장이 되었다. 철수선이 붐벼 경환자들은 앉을 공간도 부족했다.
함흥에 비해 평양은 사정이 조금 나았다. 교통 환경이 함경도보다 나은 곳이고 이승만 대통령이 평양탈환 행사에 참석하게 되어 보급사정이 함흥과 같이 열악하지는 않았다.
제27육군병원은 11월 1일 평양으로 이동하여 평양시 신양리 기독병원에 병원본부를 두고 환자 1,500명을 진료했다. 환자가 늘어나자 평양에 소재한 광성초등학교, 천운초등학교 등 인근지역 5~6개 학교를 징발하여 분원을 두고 전상자를 치료했다.
그러나 유엔군의 폭격으로 상수도시설이 파괴되어 물을 구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군속(現 군무원)을 동원하여 우물물을 직접 길어 끓인 뒤 메스와 위생기기를 소독해 사용했다.
11월 14일 여러 곳에서 분산된 병원기능을 통합하기 위해 김일성대학부속병원으로 병원을 옮겼다. 王자로 구성된 이 병원은 대형 규모로 분원을 둘 필요가 없었다. 이 병원은 병실 복도까지 차량이 다닐 수 있게 되어 있어 환자수송이 매우 편리했다.
▲ 6.25 당시 민간 간호원들도 부상자들을 치료하는데 앞장 섰다. ⓒ 연합뉴스
한편 평양탈환 기념행사에 이승만 대통령이 참석한 뒤로는 “국군을 돕자” 는 북한 동포들의 정성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평양시민들은 많은 양의 된장, 간장 같은 식품과 담요 같은 침구류를 보내어 병원살림에 보탰을 뿐만 아니라 복구 작업에도 나섰다. 여자들의 경우 자진해서 병원을 찾아와 빨래 및 청소를 도왔고 민간 간호사들은 간호를 도왔다.
그러나 중공군이 참전하자 부상자들은 더욱 늘어났다. 김일성대학 병원 등 평양시내 주요병원에 임시로 수용된 환자는 2,500명을 넘어섰다.
더 큰 문제는 철수였다. 병원개설 후 얼마 되지 않아 철수명령이 떨어지자 혼란이 일어났다. 많은 환자들을 데리고 시급히 철수하는 것은 마치 다급한 군사작전과 같았다. 그러나 이마저 쉽지 않았다. 중공군이 8km까지 포위망을 좁혀왔기 때문이다.
응급수술이 필요한 부상자들을 싣고 남쪽으로 떠난 병원열차 승리호, 무궁화호 그리고 10여 대의 앰뷸런스는 되돌아오지 못했다.
▲ 미군철수선(LST)에 타기 위해 몰려든 북한주민들 ⓒ 국립중앙박물관 자료 캡쳐
이처럼 급한 상황에서 제27육군병원 관계자들은 민간인들의 협조로 중환자 300여 명만을 들것에 누인 채 트럭으로 진남포로 이동시켜 미군 철수선(LST)에 태웠다. 나머지 환자들은 알아서 철수하라는 방침으로 각자 뿔뿔이 흩어졌다.
마지막 순간까지 환자들을 돌보아야 하는 간호장교들은 중공군에게 붙잡히게 될 상황에 대비하여 수면제를 30알씩 휴대하고 다녔다. 그런 일이 벌어지면 한꺼번에 복용함으로써 자결할 결심이었다.
한편 중환자들과 함께 LST에 승선한 간호장교들은 선내에서도 전염과 2차 감염을 막기 위해 페니실린 주사를 놓고 환자들을 돌보았다.
다행스럽게 LST에 승선한 환자들은 젊은 사람들이 대다수였고 날씨 역시 겨울이었던 관계로 무사히 부산항에 도착했다. 이들은 제3, 제5 육군병원으로 이송되었다.
전투 현장에 뛰어든 육지의 나이팅게일
▲ 여순 폭동 당시 건립되던 제3육군병원, 사진은 제3육군병원장의 취임식 ⓒ 봉생사회복지회 中, 봉생 50년사 자료 캡쳐
여수·순천 폭동에 투입된 간호장교
간호장교후보 제1기생 중 일부인원은 제1육군병원에 배치되었고, 대다수는 충남 유성(現 대전광역시 유성구)에 제2육군병원으로 전속되었다.
그러던 중 1948년 10월 여수·순천 폭동이 일어나자 정부는 처음으로 진압군 부상자를 치료하기 위해 19일 광주 근교에 급히 임시 야전병원을 설치하고 간호후보생 제1기생 출신, 김순봉, 김재명, 이종화 소위가 파견되어 환자들을 돌보았다. 광주 근교에 설치된 임시 야전병원이 바로 제3육군병원의 모태가 되었다.
임시 야전병원의 시설은 열악했다. 모든 시설이 퀸셋건물(광복 후 우리나라에 주둔한 미군이 급하게 지은 양철지붕으로 된 임시건물)이었다. 시설이 모자라 들것에 누운 채 복도에서 치료 받는 환자도 많았다.
의료장비와 약이 부족해 군의관이 처방하는 대로 투약을 할 수도 없었다. 알코올 같은 소독제, 거즈 붕대를 다시 삶을 정도로 기본적인 물품이 턱없이 부족했다.
한편 10월 말, 전북 남원에 지리산지구전투사령부가 창설되었다. 본격적으로 토벌이 시작된 후 전상자의 적시적인 치료를 위해 초등학교를 빌려 임시 야전병원을 개설했다.
이 병원에서는 간호장교들도 ‘전투지역의 야전병원 근무수칙’ 에 따라 철모와 군화를 착용하고 근무했다.
수술이 급한 중환자들은 광주나 대전의 육군병원으로 보내고, 가벼운 총상이나 자상환자(칼, 송곳 등 날카로운 곳에 찔려 상처 입은 환자)들만 돌보았다.
당시 현장에 있었던 간호장교들은 "너무 바빠서 철모가 무거운지도 몰랐고, 군화가 불펴한 줄도 몰랐다." 며 당시 상황을 회고했다.
한편 총상과 자상을 입고도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하여 파상풍으로 진행된 환자들도 간호장교들의 손길이 닿는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큰 위안을 얻었다.
지린산지구사령부 야전병원에서 근무한 간호장교들의 증언을 들어보면 그 절박한 상황을 엿볼 수 있다.
“물, 물! 목말라 죽겠어요.” 총상을 입고 막 실려 온 환자들은 얼마나 탈수증이 심했던지,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물을 찾았다. 애원의 눈빛으로 우리를 바라보던 그들의 표정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얼마나 피를 많이 흘렸으면 그렇게 탈수증이 심할까. 우리보다 나이 어린 병사들을 대할 때는 고향에 있는 동생이 떠올랐다. 그러면 걸음이 빨라지다 못하여 뛰었다. 종종걸음으로 물그릇을 들고 가면 눈을 뜬 채로 죽어 있는 사람도 있었다. 단숨에 물 한 그릇을 다 비우고 “한 그릇 더 주세요" 라고 요청하는 사람들은 부지기수였고, 물 한 그릇을 다 먹지도 못하고 죽은 병사도 있었다. (중략) 반란군을 어떻게 대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별 다른 지침이 없었다. 그러나 군의관에게서나 간호장교에게나, 그들은 똑같은 환자일 수밖에 없었다. 치료가 필요한 모든 사람을 똑같이 대하는 것이 히포크라테스나 나이팅게일 정신이다. 치료가 끝나면 포로들은 호송에 따라 어디론가 끌려갔다. 어떤 이는 조사기관으로 가고, 어떤 이는 감옥으로 되돌아갔다고 했다. 더러는 총살형장으로 끌려가는 모양이었다. 그런 사람들이 끌려가면서 “간호장교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해 달라” 는 말을 남기고 갔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 여순 폭동 및 6.25전쟁 등 산전수전을 다 겪은 간호장교 1기 ⓒ 다음 누리꾼 블로그 캡쳐
6.25 전쟁 발발과 간호장교의 참전활동
6.25 개전 초 국군의 모든 분야가 열악하긴 마찬가지였지만 군진의료분야는 상황이 더욱 좋지 않았다. 개전 초기 육군 의료기관은 5개 육군병원과 1개 요양소가 있었을 뿐이었다. 의무인력도 군의관과 간호장교 108명을 합쳐 250명, 위생병과 위생부사관 등 병 1,401명이 전부였다.
수많은 전상자를 수용하고 진료하는데 있어 애로사항을 극복하기 위해 민간시설을 징발했다. 천에 천막을 치고 환자를 수용하여 급히 육군병원, 이동외과병원을 증설했다.
그러나 여전히 간호 인력이 모자라 사회의 저명인사들까지 군의관으로 징집하여 각 육군병원과 이동외과병원으로 배치하고 부상자들을 치료하도록 했다.
전쟁터에서 계속 나오는 전상자들을 감당하기 위해서 민간병원 간호사들을 '현지임관' 형식으로 간호장교로 선발했다. 그것으로도 부족하여 급히 군의학교에 간호사관생도 과정을 개설해 고등학교를 졸업한 여성들을 뽑아 체계적인 교육을 시작했다.
한편 전방지역에서는 간호장교들이 더욱 부족했다. 따라서 부대장 직권으로 민간간호사들을 소집했다. 이들을 간단한 제식훈련만 받게 한 뒤 간호장교로 임관시켜 부상병들의 응급처지를 맡게 했다.
이렇듯 계속된 군병원 창설 및 증편과 간호인력 확충노력으로 1953년에는 598명까지 늘어났다. 전쟁기간 중 참전한 간호장교의 총인원은 1,257명이었고 이들이 하루 평균 22,800명의 입원환자를 간호했으며 40만 명이 넘는 전상자를 간호했다.
▲ 6.25 당시 임관한 간호장교들 ⓒ 월간조선 캡쳐
6. 25전쟁 중 간호장교 양성
6.25 전쟁 발발 이전에 배출된 간호장교후보생 출신의 간호장교는 5개기를 다 합쳐도 120명에 불과했다.
그러나 전쟁의 발발로 환자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병원 또한 새롭게 창설되어 간호 인력의 수요가 늘어나자 ‘현지임관’ 이라는 임기응변식의 간호장교 확보대책이 강구되었다.
간호장교의 지원 자격과 선발 방법을 완화했다. 지원 자격을 기존 19세 이상 30세 미만에서 20세 이상 40세 미만의 각 도립병원 간호사와 민간병원 현역 간호사 및 간호학교 졸업반 학생들을 대상으로 확대하여 모집했다.
간호장교후보생들의 교육훈련 기간도 짧게는 10일, 길면 20일 간의 기초 군사훈련을 받고 바로 간호장교로 임관하여 육군병원으로 배치되었다.
간호장교후보 6기부터 8기까지는 각 지방 종합병원 소속 간호사들과 육군병원에서 실습 또는 의료봉사 활동을 하던 간호학교 졸업반 학생들이 주축 되어 구성되었다.
1950년 9월 5일부터 11월 1일까지 간호장교후보 제6기생 64명과 제7기생 7명, 제8기생 중 23명을 현지 임관시켰다. 나머지 제8기생 중 35명을 제1육군병원에서 보름간의 속성 교육과정을 거쳐 임관시켰다.
전시에서 간호 인력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심지어 11월 18일에는 간호원 2명을 따로 임관시킨 사례도 있었다.
이런 식으로 간호장교 131명을 배출한 뒤, 육군의 여자의용군훈련소가 간호장교 양성훈련을 주관하여 실시했다.
한편 1950년 9월 28일 서울을 수복하자 10월 14일 서울 퇴계로 일신초등학교(現 극동빌딩)로 옮겨 훈련을 계속했다. 그러나 중공군 참전으로 다시 부산으로 옮겨 대신동 경남상업고등학교에서 문을 열었다.
이처럼 전황의 급작스런 변동으로 간호장교 양성교육도 서울과 부산을 오가면서 계속되었다.
육군의 나이팅게일, 육군간호장교
▲ 대한민국 국군의 최초 군병원인 제1육군병원 ⓒ 해병대 네이버 블로그 캡쳐
대한민국 최초의 의무부대 탄생
우리나라는 일본에게 해방되고 난 뒤, 약 3년 동안 미군정의 통치를 받았다. 이 기간 동안 미군은 ‘뱀부 계획(Bamboo Plan)’ 을 통해 1946년 1월 9일, 경비대를 지역별로 창설 했다. 경비대는 국군의 모태가 되었다.
5월 1일, 경비대는 남조선국방경비대로 확대 되었다. 그 예하에 우리나라 최초의 의무부서 ‘의무국’ 이 탄생했다.
의무국은 1947년 5월 1일에 ‘의무처’ 로 변경했고, 이때부터 산하 의무부대 창설이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당시에는 군병원이 없었다. 따라서 일제강점기시절 일본군 의료시설로 활용했던 적십자병원 지하에 100병상 규모의 임시 의료시설을 만들어 민간의료진들에게 위탁진료를 받았다.
1948년 5월 1일, 통위부(現 국방부) 직할 최초의 군병원이 ‘제1육군병원’ 이라는 이름으로 서울 영등포구 대방동에 창설되었다.
첫 부대장은 통위부 의무국을 창설하고 초대 국장을 지냈던 신학진 대위가 중령으로 진급해 부임했다. 인원은 장교 8명, 병 23명이 전부였다. 시설규모는 일반 환자용 50병상, 폐결핵 등 전염병 환자용 30병상으로 총 80병상에 불과했다. 간호장교는 아직 모집하기 전이었다.
동년 9월 28일, 여러 군병원을 총괄한 제1의무단이 창설되자 제1육군병원은 제1의무단에 예속되어 인원과 시설이 크게 확충되었다. 병상은 250병상으로 늘어났고 인력도 늘었다.
10월 1일에는 충남 유성(現 대전광역시)에 제2유군병원, 11월 20일에는 전남 광주에 제3육군병원이 생겼다. 1949년 2월 2일에는 부산에 제5육군병원, 7월 1일에는 서울 대방동에 수도육군병원이 창설되었고 1950년 5월 15일에는 전남 여수에 육군요양원이 창설되었다.
그러나 이때까지 병원을 운영해 나갈 의료요원을 양성할 수 있는 시스템이 갖춰지지 못했다. 임기응변식으로 그때그때 필요할 때마다 충당하는 시스템이었다.
이에 조선경비사관학교에서 군의후보생과 의정후보생을 양성하기 시작했으며, 육군병원과 의무단본부에서는 위생병을 양성했다.
이어 1949년 8월 9일부로 발령된 육군본부 일반명령 제39호에 따라 경기도 부평(現 인천광역시 부평구)에 장교 12명, 병97명으로 구성된 육군군의학교가 창설되었다.
▲ 간호장교 제1기생 ⓒ 해병대 네이버 블로그 캡쳐
간호장교가 탄생과 양성
육군병원은 창설 당시부터 병원 운영이 어려웠다. 전문 간호 인력이 없어 중환자 간호와 수술은 제한되었다. 때문에 환자들은 무디고 불친절하며 비전문적인 위생병의 손길을 기피했다. 게다가 병실관리와 약품, 비품을 효과적으로 관리하는 전문 인력이 없어 병원 운영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이에 제1육군병원장 신학진 중령과 제2대 의무국장 박동균 참령(現 소령)은 간호장교를 체계적으로 양성할 필요성을 절감하고 간호장교 양성 제도를 추진했다. 이어 미 군정청 간호원 출신인 주한 미 경제협조처(ECA) 노동국 사회부장 미스 바로디와 스코트 부인을 찾아가 육군 간호장교 창설에 협조를 부탁했다.
두 사람의 요청에 두 미국 여성은 수락하고 미군청정에 한국 간호장교들이 착용할 피복, 훈련 및 교육에 필요한 시설과 교관요원까지 지원해 줄 것을 요청했다. 주한미군사고문단(KMAG)도 육군 간호장교단 창설을 도왔다.
미국의 지원약속을 받아낸 신학진과 박동균은 즉시 간호장교후보생을 모집하기 시작했다. 우선 간호사 면허를 소지한 미혼여성들을 모아 단기간 실무교육과 기초 군사훈련을 시켜 각 병원에 배치하기로 결정했다.
이어 신학진과 박동균은 1948년 8월 26일부터 교육에 들어갈 간호장교 제1기 후보생 모집을 위해 각 민간병원에 홍보를 부탁했다.
이러한 노력 끝에 150여 명이 간호장교 제1기 모집에 지원했다. 그리고 한국인 여의사를 심사관으로 임명해, 신체검사와 면접을 통해 31명을 최종적으로 선발했다.
간호장교 제1기생들의 임관식은 1948년 8월 26일 오전, 경복궁 경회루에서 거행되었다. 이 임관식에는 많은 인사들이 참여했는데 이범석 초대 국무총리 겸 국방부장관이 간호장교의 사명을 강조하면서 훈시를 했다.
임관식을 마친 간호장교 후보생들은 그날 오후, 남산에 위치한 조선경비대사령부를 찾아가 송호성 총사령관에게 임관신고를 함으로써 임관절차는 완료되었다.
▲ 간호장교후보 제1기생 임관을 축하하는 송호성 총사령관 ⓒ 국방부 자료 캡쳐
다음날 간호장교후보 제1기생들은 경기도 부평(現 인천광역시 부평구)에 있는 미군 836부대에서 교육훈련을 받았다.
우선 보급품이 지급되었는데 모두 미군의 것이었다. 국방색 원피스, 검정색 단화, ‘할로모자’ 라고 불리는 작업모 등 직업복이 지급되었다.
간호장교후보생들은 오전에는 미군 군의관과 미군 간호장교들을 도와 근무를 하면서 실무교육을 받았고 오후에는 육군에 파견 나온 경비대사관학교(現 육군사관학교) 출신 장교들에게 기초 군사훈련을 받았다. 기초 군사훈련 과목으로 제식훈련, 독도법, 사격훈련 등을 받았으며 체력단련도 자주 받았다.
간호장교후보 제1기생이었던 조귀례씨는 당시 상황을 이와 같이 증언했다.
“귀관들! 장교가 무엇인지 아느냐?” 꽥! 하는 고함소리와 함께 커널 대령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경기도 부평 미 836부대 간호장교 교육대에서 우리의 훈련을 책임졌던 미군 여성장교 완스타인은 우리의 걸음걸이와 복장에 제일 신경을 썼다. 우리는 무엇이 잘못 되었는지도 몰랐다. 번갈아 얼굴을 바라보면서 잘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으면 완스타인은 자기 모자를 벗어 다시 써 보였다. 할로모자라고 불리던 미군 평상모는 콧날과 모자선이 일직선이 되게 쓰도록 되어 있다. 모자 앞부분 맨 아래 끝선이 미간 바로 위에 놓여야 하는데, 우리는 이마 한가운데 빼또롬하게 쓰고 다녔다. 이어 커널 대령은 “장교는 국제신사다. 자세부터 장교다워야 한다.” 국제신사라는 말을 우리는 이해할 수 없었다. 도대체 국제란 말의 기준을 가늠할 수 없는 우리에게는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어떤 때는 걸음걸이와 앉는 자세까지 말썽이었다. 그녀는 말끝마다 “그런 자세로는 장교가 될 수 없다.” 고 잔소리를 퍼부었다. (중략) 군인으로서의 기본은 제식훈련과 사격훈련으로 다져졌다. 국방경비대사관학교 출신 김 소위에게서 인정사정없는 훈련을 받고부터는, 우리도 조금씩 스스로가 군인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게 되었다. 특히 사격술 훈련은 우리도 총을 쏠 수 있다는 자신감과 함께 위기상황을 맞아도 자신을 지킬 수 있겠다는 안도감을 느끼게 해주었다. 늦더위가 한창이던 8월 27일에 시작된 교육은 11월 27일에야 끝났다.”
▲ 간호장교 2기 출신 김명희 씨 ⓒ 동아일보 기사 캡쳐
한편 간호장교후보생 제1기 수료 이후 교육체계가 바뀌었다. 1948년 12월 25일부터 교육훈련이 시작된 간호장교후보생 제2기와 제3기는 교육주체가 미군에서 제1의무단으로 조정되었고, 제 4, 5기는 육군 군의학교가 주체가 되어 교육훈련을 담당했다.
홍보 방법도 더욱 적극적이었다. 신문에 광고도 냈다. 지원 자격도 엄격해졌는데 ‘여중 졸업자 또는 동등 이상의 학력을 가진 사람으로서 간호사 면허 소지자’ 로 명시되었고 연령제한도 30세 이하로 낮아졌다. 시험과목은 제1기생 시험과목이었던 신체검사와 면접시험을 포함해 해부학, 간호학, 생리학 필기시험과 임상시험도 추가되었다.
간호장교후보 제2기생은 제1기생이 수료하고 육군병원에 배치된 다음날인 1948년 12월 25일, 서울 영등포구 대방동에 위치한 제1의무단에 입교하여 교육 받았다.
구대장으로 간호장교후보 제1기생이었던 최보배 소위가 보직되어 실무교육을 보조하고 내무생활과 정신무장에 이르기까지 보살펴주었다. 간호장교후보 제1기생은 1기생과 달리 15일간의 군사훈련을 이수한 뒤 각 병원에 배치되어 근무하다가 1949년 2월 5일 수료와 동시에 임관했다.
이는 여순 폭동으로 부상자들이 많아 간호장교후보생들의 교육훈련보다 간호근무가 시급했던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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