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2. Humanities/22_한국역사

매국노 이완용

忍齋 黃薔 李相遠 2016. 2. 2. 1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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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의 매국노 이완용(李完用)은 1858년 6월 7일 경기도 광주군 낙생면 백현리에서 우봉 이씨 이호석(李鎬奭)의 아들로 태어나 당시 권세가였던 이호준에게 양자로 입적했습니다. 고종 19년인 1882년 11월 2일 증광별시 문과에 병과 18등인 전체 28등의 성적에 합격하고 정계 진출 9년 만에 38세의 나이로 학부대신에 올랐습니다. 또 독립협회장으로 독립문을 건립하고 주미참사로 외교관이 되기도 했습니다. 평소 "시류에 따라 마땅한 것을 따를 뿐 달리 길이 없다"는 신념으로 권력과 부를 쫓아 변절을 거듭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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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8월 28일에 데라우치 총독과 양국 병합의 조약을 맺었습니다. 개보다 못한 인생을 살다 1926년 2월 12일에 죽어 마치 국장을 치루 듯하였습니다. 전북 익산군 낭산면 내산동 내장마을에 묻혔다가 증손 이석형이 화장해서 흔적을 없애버렸습니다. 황현선생의 매천야록에 의하면 1907년 6월 고종이 헤이그 특사 사건이 발생하자 총리대신 이완용 황제를 향해 칼을 빼 들고 "폐하께서는 지금이 어떤 세상이라고 생각하고 계십니까"라고 고함을 질렀고 고종은 묵묵히 듣기만 했다고 합니다. 고종황제의 퇴위가 예견된 순간이지요.



이 사진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향동동 원수골에 있는 이완용의 장남 이승구와 며느리 임걸귀의 묘비입니다. 황현선생의 매천야록에 의하면 며느리 임걸귀는 절세미인이었는데 시아버지 이완용과 불륜을 저질러 이를 알게 된 장남 이승구는 자결하였는데 그 사실을 숨기려고 이완용이 이승구를 호적에서 삭제하였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가 설사 소문에 불과하더라도 매국노 이완용을 역사가 어찌 각인시키는지를 여실하게 보여주는 실례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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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윗을 통해 "코선이 @kosungchan" 이라는 분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 저에게 공개적으로 "자랑스럽지는 않지만 국가를 생각하는 마음은 당신보다 훨 낫다^^**"고 하셔서 다른 분들도 그리 생각하는지 궁금합니다. 나름대로 살인마 전두환에게 저항했던 제 젊음이 뇌물이나 받고 불나방처럼 권세와 부귀영화 만을 평생 쫓아가는 자들보다 못하다고 이야기를 하니 개인적으로 하는 이야기보다 공개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참 많이 쓰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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