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잠자는 나라'의 운명
연재를 시작하면서
8월은 우리 민족사에 뜻 깊은 달이다. 해방과 망국(亡國)이 8월과 함께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해방의 날을 늘 기리고 있다. 그러나 망국의 날은 기억조차 잘 못하고 있다. 지난날의 아픔을 다시 들추어내기 싫어서일까, 아니면 그저 잊어버린 것일까?
서양제국주의의 물결이 동아시아로 밀려오던 19세기 중엽, 일본은 서세동점(西勢東漸)이라는 거역할 수 없는 대세를 재빨리 간파했다. 그리고 이 제국주의의 파도를 타기 위하여 위로부터 체제개혁을 단행하고, 부강개명(富强開明)이라는 국가목표를 향하여 국론을 한 방향으로 모아나갔다. 체제가 안정되면서 메이지(明治) 일본은 서양제국주의를 모방하여 이웃을 향한 팽창을 시작했다. 그 첫 대상이 조선이었다.
당시 조선은 어땠나? 조선을 처음으로 서양에 ‘고요한 아침의 나라’로 소개한 퍼시벌 로웰(Percival Lowell)은 조선을 ‘잠자고 있는 나라’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의 표현을 그대로 빌리면 조선은 “다른 세계 역시 자신들과 같은 환경에서 잠자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그들은 안심하고 깊이 잠들어버렸다.....그곳에서는 변화란 의미 없는 것이며 시간은 정지”해 있었다. 제국주의 대열에 끼어들기 위하여 변화를 추구한 일본, ‘은자의 나라’이기를 고집하며 잠들어있는 조선. 두 나라의 운명이 갈라지는 시발점이다.
지금부터 99년 전인 1910년 8월부터 한민족은 나라를 잃고 일본의 노예로 전락하는 종살이를 36년 동안 해야만 했다.
다시 되돌아보고 싶지 않은 역사이지만 왜 우리는 나라 잃은 망국의 국민으로 전락하게 됐나를 되새겨 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비록 그것이 일그러진 자화상일지라도 정면으로 대하는 것을 주저해서는 안 된다. 망국의 역사를 제대로 깨우치지 못하고서는 해방과 독립의 참 뜻을 이해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연재되는 이 글을 통해서 한편으로는 한국병탄을 위한 일본의 치밀한 계획과 간교한 책략을 추적하면서, 또 다른 한 편으로는 망국으로 갈 수 밖에 없었던 한국의 무력함과 어리석음을 찾아보려고 한다. 이는 어느 한쪽을 비판하고, 어리석음을 탄식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보다는 지난날의 역사를 재조명하고 성찰함으로서 역사적 교훈을 되새기고, 그 위에서 새로운 선린의 한일관계를 모색하기 위해서이다.
<순종실록> 1910년 8월22일 대한제국과 일본제국이 맺은 '병합조약' 전문과 순종황제의 조칙(담화)내용을 기록한 <순종실록>. 위 페이지 오른쪽은 순종의 '담화'내용이고 아래쪽 조약전문 뒤에 당시 내각총리대신 이완용 이름과 일본통감 데라우찌 마사다케 이름이 적혀있다.
‘합방’인가 ‘병합’인가 ‘병탄’인가?
1년 후인 2010년 8월이면 일본이 대한제국의 주권을 찬탈하고 한반도를 일본의 영토로 복속시킨 지 꼭 100년이 된다. 한일 두 나라의 학계나 문화·언론계에서는 ‘이 사건’을 되돌아보고 재조명하기 위한 다양한 형태의 학술 심포지엄이나 특별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100년 전의 ‘이 사건’을 우리가 매일 접하는 언론매체는 물론, 학술논문, 역사책, 역사교과서 등에서 여전히 한일 ‘합방’ 또는 ‘병합(합병)’이라고 표기하고 있다. 이는 당시 일본 정부나 역사가들이 붙여준 이름이다. 100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여전히 남아있는 있는 식민지 사관의 잔재(殘在)가 아닌가 생각된다.
대한제국을 병탄한 일본의 한국주재 통감부는 '한국병합 전말서'를 만들었다.
이희승의 <국어대사전>에 의하면, ‘합방(合邦)’은 “둘 이상의 나라를 병합하여 한 나라를 만드는 일”이고, 병합(倂合)은 “어떤 나라가 다른 나라와 결합하여 한 개의 나라를 구성하는 일(합방)”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그리고 둘 이상을 하나로 만드는 이 ‘일’은 강제나 폭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의와 합의를 바탕으로 한 “계약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1910년 일본이 한국을 복속시킨 것이 ‘합의에 근거한 계약’으로 이루어진 것일까? 그렇지 않다. 강제와 폭력이 동원됐다는 것은 일본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일본은 이를 합의를 바탕으로 한 계약의 역사로 만들고 싶었다.
‘합방’이나 ‘병합’은 그래서 생겨난 것이다.
‘합방’이라는 표현의 사용은 주권찬탈에 앞장섰던 민간 활동가나 또는 그들이 중심이었던 단체들이 주도해서 보편화 시켰다. ‘합방’이라는 단어를 통해서 그들이 의도한 것은 한국과 일본 두 나라가 하나로 합친 것은 일본의 주도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두 나라가 하나로 통합되는 것이 한국이나 일본에 유익하다는 데 의견을 같이한 양국 ‘지사’들의 의기투합의 결과라는 것이다. 강압적이거나 일방적이 아니라 자주적이고 평등한 바탕에서 이루어졌다는 의미다.
순종황제가 마지막 어전회의서 '한일병합'을 선언한 날, 일본천황이 '병합을 승낙'한다고 발표한 조서내용.
8월29일은 일본이 공식발표한 날
일본의 외교문서를 위시한 대부분의 공문서나 또는 학술적 성격의 서적에서는 ‘병합’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 배경에는 한국이 일본에게 ‘병합’을 요구하고, 일본이 이 ‘요구’를 받아 들였다는 의미가 깔려 있다. 물론 이 단어가 시사하고 있는 ‘병합요구’는 한국 정부의 자유의지에 의한 결정이었다. 1910년 8월 29일 일본정부의 공식 발표에 의하면 한국의 최고통치권자는 “한국정부에 관한 일체의 통치권을 완전하고도 영구히 일본국 황제폐하에게 양여”하고, “일본국 황제폐하는 양여를 수락하고 병합을 승낙”한다고 천명하고 있다.
즉 1910년 일본이 한반도에 지배권을 확립한 것은 한국 민중의 복리증진과 공공의 안녕유지, 그리고 동양의 평화를 위해 한국의 최고 통치권자가 일본의 최고통치자에게 ‘적극적’으로 병합을 간청했고, 일본이 ‘수동적’으로 이를 받아들였다는 것을 내비치고 있다. 물론 여기에도 강제성은 없다. 다만 한국의 요구를 일본이 받아들였을 뿐이다.
1905년 이후 일본이 본격적으로 한국을 장악하기 위한 프로젝트를 구상하고 진행하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시한 원칙의 하나는 일본의 한국 ‘병합’은 일본이 주도한 것도 아니고, 강압적인인 것은 더더욱 아닌 것처럼 만드는 것이다. 달리 표현하여 ‘병합’은 어디까지나 ‘한국인의 요구’에 의하여 이루어 진 것으로 ‘위장’하는 것이다. 일본이 일진회를 위시한 친일단체를 동원하여 ‘합방청원서’를 한국과 일본 요로에 제출케 한 것도 그런 연유에서였다. 1910년 이후 일본의 모든 외교문서, 공문서, 역사책 등에 기록한 ‘병합’은 ‘한국인의 요구와 합의에 의한’ 것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리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고, 우리도 그것을 여전히 답습하고 있다.
1910년의 사건은 ‘합방’도 아니고 ‘병합’도 아니다.
그것은 강제적이고 강압적이고 폭력적인 ‘병탄’이었다.
늦은 감이 있지만 주권 상실 100년을 맞이하는 이제라도 식민사관의 산물인 ‘합방’이나 ‘병합’이라는 단어는 ‘병탄’으로 정리돼야 할 것이다.
2. 대한제국(大韓帝國) 마지막 어전회의
1910년 8월22일 오후 1시, 대한제국이 망하는 순간
1910년 8월 22일 오후 1시. 창덕궁 대조전 흥복헌(興福軒)에서 어전(御前)회의가 열렸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어전회의다. 이 회의에는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순종, 이완용 내각의 국무대신, 황족대표, 그리고 문무 원로의 대표자들이 참석했다. 형식적으로는 일본이 제시한 ‘일한합병조약안’을 토의하기 위한 것이지만 실은 이를 최종적으로 승인하기 위한 회의였다.
정장차림의 순종황제.
이 자리에서 순종은 한국과 일본 두 나라를 “통합하여 한 집으로 만드는” 것이 “동양의 평화를 공고”히 하고, “만세(萬世)의 행복을 도모”하는 길이라고 밝혔다. 이어서 그는 “한국 통치를 통틀어” 자신이 “극히 신뢰하는 대일본국 황제 폐하에게 양여할 것을 결정”한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참석한 모든 신하들에게 “짐(朕)의 결단을 체득하여 봉행”할 것을 명하는 조칙(詔勅)을 내렸다. 군주가 나라를 버리는 순간이다.
같은 날 전권을 위임받은 이완용 총리와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통감은 <한일병합조약>에 기명하고 조인했다. 조약의 제1조는 “한국 황제폐하는 한국 정부에 관한 모든 통치권을 완전하고도 영구히 일본국 황제폐하에게 양여”하고, 제2조는 “일본국 황제폐하는 제1조에 게재한 양여를 수락하고 또 전 한국을 일본제국에 병합함을 승낙”한다고 기록했다. 왜란(倭亂)과 호란(胡亂)도 견딘 한국이 망하는 순간이다.
"짐은 한국의 통치권을 믿고 의지하는 대일본 황제폐하께 양여하노라..."
내각총리대신 이완용.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조칙이고 조약이 아닐 수 없다. 제 나라 강토와 백성의 생명과 재산도 보호하지 못하는 군주가 ‘동양의 평화’와 ‘만세의 행복’을 논하고 있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도록 군주를 제대로 보필하지 못한 신하가 앞장서서 주권을 넘겨주고 있다.
군주가 군주가 아니고, 신하가 신하가 아니다.
그로부터 일주일 후인 8월 29일 순종은 한국의 주권을 일본에 넘겨주게 된 이유를 국민들에게 설명하는 현대판 ‘국민 담화’를 발표했다.
그는 사직을 이어가는 어렵고 막중한[艱大] 업무를 이어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과 같이 나라가 어려움에 직면하게 된 것을 먼저 자신의 ‘부덕’의 탓으로 돌렸다. 그러면서도 그는 그동안 난국을 타개하고 국면을 새롭게 하기 위하여 여러 차례 노력했음을 강변했다. 그러나 원래 허약한 것이 쌓여서 고질이 됐고 피폐가 극도에 이르러 도저히 만회할 시간이 없고 또한 방책을 찾을 수 없음을 탄식했다. 순종의 ‘담화문’은 다음과 같이 끝을 맺고 있다.
“[이런 위기를] 맞아서 사태의 지리멸렬함이 더욱 심해지면 끝내는 수습할 수 없는 데 이를 것이니 차라리 대임(大任)을 남에게 맡겨서 완전하게 할 방법을 찾고 공을 들여 혁신의 효과를 얻게 하는 것만 못하다. 그러므로 짐이 이에 결연히 내성(內省)하고 확연히 스스로 결단을 내려 한국의 통치권을 종전부터 친근하게 믿고 의지하던 이웃 나라 대일본 황제 폐하에게 양여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밖으로 동양의 평화를 공고히 하고 안으로 팔역(八域)의 민생을 보전하게 하려고 한다. 그러므로 그대들 대소 신민들은 국세(國勢)와 시의(時宜)를 깊이 살펴서 번거롭게 소란을 일으키지 말고 각각 그 직업에 안주하여 일본 제국의 문명한 새 정치에 복종하여 행복을 함께 받으라.
오늘 짐의 이 조치는 그대들 민중을 잊음이 아니다. 오히려 그대들 민중을 구원하려고 하는 지극한 뜻에서 나온 것이니 그대들 신민들은 짐의 이 뜻을 능히 헤아리라.“
이렇게 해서 이조 500년의 사직이 무너져 내렸고, 4000년의 민족사가 끝났다.
그리고 한반도는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했고, 한민족은 망국민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1907년 헤이그 밀사사건으로 일본의 압력에 의해 7월19일 순종에게 양위한 고종황제.
젊은 시절의 순종과 윤비.
같은 날 일본 정부도 천황의 이름으로 특별담화가 발표됐다.
일본 천황은 대한제국의 병합에 이르게 된 ‘전말’을 간단히 설명했다. 한국은 동양의 평화와 일본의 안전을 위협하는 ‘화란(禍亂)의 연원(淵源)’이라는 것, 이 화근을 끊어내기 위하여 일본은 한국을 보호하면서(을사강제조약, 1905) 시정의 개선을 주도했다는 것, 4년의 보호기간을 통해서 한국의 사정은 크게 개선됐다는 것, 그러나 지금의 ‘보호체제’만으로는 공공의 안녕을 유지하고 민중의 복리를 증진하기에 불충분하다는 것, 그래서 보다 혁신적인 조치, 즉 병합이 필요한 단계에 이르렀다는 것, 한국이 병합을 원하고 있다는 것 등을 강조했다.
일본천황 "한국 병합은 시세에 응하는 것"
1910년 8월22일 '한일병합'에 서명한 당시 일본 통감부 데라우찌 마사다케(寺內正毅) 통감.
천황의 담화는 다음과 같이 계속된다. “짐은 한국 황제와 함께 이러한 사태에 비추어 한국을 일본제국에 병합함으로써 시세의 요구에 응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고, 이에 영구히 한국을 제국에 병합하게 됐다”라고 병탄을 확실히 했다. 그리고 이어서 한국의 황제와 황실은 병합 후에도 “상당한 대우를 받게” 될 것이고, 한국의 민중은 “직접 짐이 편안하게” 다스린다는 것을 밝혔다.
그리고 별도의 문서를 통해서 고종을 ‘덕수궁 이태왕(李太王)’으로 칭하고, 순종을 ‘창덕궁 이왕(李王)’으로 부를 것을 명시했다.
망국은 수치의 역사다.
자의였든 타의였든 망국의 역사를 주도한 군주와 지배계층이 그 후 오랫동안 일본의 보호 속에서 대우를 받으며 살았다는 사실 또한 망국에 못지않게 부끄러운 역사다.
어전회의, 병탄조약, 순종의 대국민 담화, 일본천황의 담화, 그 어느 곳에도 ‘강제’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한국의 황제가 동양의 평화와 한국인의 안녕을 위해서 일본에게 병합을 ‘당부’했고, 일본의 천황이 이를 ‘승낙’했다. 일본이 강압적으로 한국을 ‘병탄’한 것이 아니라, 한국이 임의적(任意的)으로 ‘병합’을 원했기 때문에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여기에 일본의 간교함과 치밀함이 배어있고, 한국의 허약과 무능함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3. 정한론: ‘병탄’ 프로젝트의 출발점
일본은 1910년 한국병탄을 완결한다.
그러나 이를 위한 구체적 정책논의는 메이지(明治) 유신과 함께 시작된다.
1873년의 정한론(征韓論)이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 후 40년 가까이 일본은 ‘병탄’ 프로젝트를 치밀하게 계획하고 준비하여 한국을 식민지화하는 데 성공한다.
‘한국병탄’이라는 이 ‘역사적 사건’은 일본의 관(官)과 군(軍), 그리고 민(民)이 합동으로 일구어 낸 업적이다. 그러나 실은 일본의 한국병탄은 그들이 ‘지사’ 또는 ‘대륙낭인’이라 일컫는 민간인이 병탄 프로젝트를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한국병탄의 ‘첨병’이라 할 수 있는 민간 또는 민간집단의 원류는 정한론에서부터 시작한다.
‘서양의 충격’과 체제변혁
위기감 <일본인 눈에 비친 중국의 위기>
1853년 페리의 ‘흑선(黑船)’ 내항으로 상징되는 서양의 위력은 국가적 위기의식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에도(江戶)의 한 백성이 표현하고 있는 것과 같이 “검은 연기를 품으며 바다 한가운데 떠 있는 쇳덩어리” 배에서 나온 “한발의 포성은 일본인을 250여년의 긴 꿈에서 깨어나게”하는 순간이었다. 이러한 위기의식은 위기극복을 위한 대처 방안을 모색케 했다. ‘쇄국’과 ‘개국’의 물결이 소용돌이치는 역사적 상황에서 일본은 ‘개국’과 ‘개혁’의 길을 택하고, 이를 위한 메이지유신(1868)이라는 체제변혁을 단행했다. 270년 동안 지속된 도쿠가와 막부(德川幕府)라는 봉건체제가 무너지고 메이지라는 중앙집권체제가 출범했다.
모든 정치적 대 변혁은 사회적 혼란을 몰고 온다는 것이 역사의 법칙이다. 그 혼란을 어떻게 수습하느냐에 따라 변혁의 성사가 결정되게 마련이다. 메이지 유신 이후의 일본도 예외는 아니다.
270년 동안 지속된 도쿠가와가 무너지고 새로 들어선 ‘메이지’라는 체제가 정착하기까지는 상당한 혼란과 진통이 뒤 따랐다. 메이지유신이 비록 무혈혁명이라 할지라도 정상적인 정권교체가 아니었다. 물론 준비된 체제도 아니었다. 오랜 평화 속에서의 사회적 변동과 19세기의 서세동점(西勢東漸)이 몰고 온 ‘서양의 충격’이라는 국제적 상황이 정치적 대변혁을 촉발 시켰을 뿐이다.
유신의 주체세력 또한 일사분란하게 통합된 것도 아니었다. 메이지 정부는 경쟁적 관계에 있는 사츠마(薩摩), 조슈(長州), 도자(土佐), 히젠(肥前) 네 번(藩)의 연합으로 이루어 졌다. 주체 세력들 사이에도 주도권 장악을 위한 권력투쟁이 물밑에서 끊임없이 진행됐다. 혁명 후 반혁명이 나타나듯이 반(反)유신 세력도 등장했다. 더하여 서양의 세력이 밀려오고 있었다. 혼란이 뒤 따른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유신주체세력의 한사람이었던 고토 쇼지로(後藤象二郞)가 일본은 “하나로 통합된 국가가 아니라, 3백 개의 작은 독립국으로 되어있는 것과 같은 상태다. (메이지)정부는 오합(烏合)의 정부로 조령모개, 일정한 방침도 없는 마치 사상누각과 같은 상태다”라고 할 정도로 새로 들어선 메이지 체제는 혼란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메이지 지배체제가 제일 먼저 맞부딪쳐야 했던 가장 심각한 문제의 하나는 밖으로부터의 위협과 안으로부터의 혼란 속에서 어떻게 하면 국민적 통합을 이루고 민족적 독립을 지키느냐 하는 것이었다. 이 문제가 정책적 선택이라는 구체적 과제로 나타난 것이 일본이 한국을 정벌하기 위한 원정군을 파견할 것인가를 논의한 1873년의 정한논쟁(征韓論爭)이다. 이 사건은 새로 들어선 메이지 체제를 무너뜨리기 위한 무력항쟁의 빗장을 열었을 뿐만 아니라, ‘부국강병’을 꿈꾸며 등장한 메이지 체제가 품고 있는 한국인식의 근본시각과 정책의 기조를 보여주는 중대한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정한논쟁의 정치적 역학
오쿠보 도시미치 ⓒ 뉴데일리
정한논쟁의 발단은 이렇다.
1868년 12월 메이지 정부는 이제까지와 같이 대마번(對馬藩)의 사자를 통하여 일본에 정권교체가 있었음을 한국정부에 통고하고 수교의 갱신과 계속을 요구했다. 그러나 한국 측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이유는 한국에 보내는 외교문서에 ‘황(皇)’, ‘칙(勅)’의 문자를 사용한 문서의 형식을 내세웠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대원군의 쇄국정책과 일본의 한국침략 의도, 그동안 친선관계를 유지해 온 도쿠가와 막부를 힘으로 무너뜨린 메이지 정권에 대한 불신 등이 복합돼 있었다.
한국정부는 일본에서의 정치적 변화를 승인하지 않았고, 또한 일본이 시도하는 교역과 외교관계의 복원을 승낙치 않았다.
메이지 정부는 이를 ‘모욕’이라고 규정하고 한국에 문책원정을 보내야 한다는 논의가 제기됐다.
그러나 정한문제가 정책의제로 각의에서 논의된 것은 1873년 여름이었다.
각의에서 메이지 정부의 실권자인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는 한국과 교섭을 위한 전권대사로 자신을 파견해 줄 것을 요구했다.
전권대사로 파견되어 한국의 개국을 촉구하면, 한국은 전권대사인 자신을 ‘살해[爆殺]’하는 일이 벌어지게 될 것이고, 그러면 일본은 한국에 군대를 파견할 명분이 확보되어 한국을 정복할 수 있다는 논리를 전개했다. 찬반의 논의가 있었으나 각의는 사이고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각의의 결정은 천황도 원칙적으로 승낙했다. 다만 최종적 결정은 미국과 유럽순방 중에 있는 메이지의 최고행정관인 이와쿠라 도모미(岩倉具視) 일행의 귀국 후라는 단서를 달았다.
사이고 다카모리 ⓒ 뉴데일리
이와쿠라 일행이 귀국한 후인 1873년 가을 정한문제가 다시 정면으로 대두했다. 사이고 다카모리를 위시한정한론자들은 이미 각의에서 결정된 사절파견의 실천을 요구했다. 이에 반하여 미국과 유럽의 여러 나라를 시찰하고 돌아온 이와쿠라 도모미, 기도 다카요시(木戸孝允),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 등은 사절파견을 반대했다. 특히 오쿠보 도시미치는 사절파견은 전쟁과 직결된다는 것, 이는 재정적으로나 대외정책상 문제가 많다는 것, 불평등조약 개정에 차질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 필요한 것은 국내안정과 국력배양이라는 것 등의 ‘정한론반대 7개조’를 내세워 사절파견의 연기를 주장했다.
정한론자와 반정한론자 사이의 갈등과 타협과 음모라는 복잡한 정치과정을 통해서 이미 결정되었던 사절파견은 무기한으로 연기됐다.
반(反)정한론자의 승리로 끝났다. 전쟁을 유도한다는 특사파견은 연기됐고, 정한론은 폐기됐다.
정한론이 폐기되자 사이고 다카모리를 위시한 정한론자들은 신정부의 요직에서 물러났다. 이로써 도쿠가와 체제를 무너뜨리는 데 일치했던 유신세력은 분열의 위기를 맞았다. 이 후 지속된 정한파와 반정한파의 대립은 결국 1877년 서남전쟁(西南戰爭)으로 이어졌고, 사이고를 중심으로 한 정한파가 전쟁에서 패배하면서 정국은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이와 함께 정한론은 더 이상 정책문제로 논의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정한’의 의지가 소멸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심층에서 더 강하게 내연하고 있었다.
정한론의 실체
메이지 정부의 진로 설정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정한논쟁은 대외정책보다는 오히려 국내정치의 한 부분으로 보려는 시각이 있다. 달리 표현하여 정한논쟁은 한국을 정복하기 위한 군대를 파견할 것이냐를 중심으로 한 의견대립이 아니라, 국내문제가 정한론이라는 구실로 나타났다는 주장이다. 사절(사이고)파견→한국의 거부(사절폭살)→원정군파견으로 알려진 사이고의 정한론은 한국을 정복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복합적인 국내정치문제가 정한론이라는 형태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기도 다카요시 ⓒ 뉴데일리
이 주장의 요체는 다음과 같다.
사이고의 대사파견 주장이 ‘사절폭살-전쟁’의 가능성을 상정하고 있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그 본질은 평화적인 교섭을 통한 수교를 목표하고 있었다. 반정한파는 위축되는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대외정책을 활용했다. 즉 이와쿠라를 대표로 하는 미국과 유럽 사절단의 외교는 결국 실패했다. 이로 인해 흔들리는 정치적 위상을 극복하기 위하여 오쿠보가 반대파, 즉 정한파를 추방하는 ‘쿠데타’였다. 또한 조슈파의 상당수가 연루된 부패사건을 수습하기 위하여 기도 다카요시와 이토히 로부미(伊藤博文)가 이를 ‘구실’로 삼아 문제를 일으킨 정치적 사건이었다. 결국 정한논쟁이라는 것은 정권초기의 혼란과 모순을 슬기롭게 처리하지 못하고, 또한 미묘하고 복잡하게 얽힌 인간관계의 상호작용이 당사자의 예측범위를 넘어 정부의 대분열까지 가게 됐다는 것이다. 즉 권력투쟁의 틀과 기준이 성숙되지 않은 초창기 “정부를 덮친 불행한 사건”이라는 것이다.
한국을 정복하기 위하여 군대를 파견할 의도는 처음부터 없었다는 것이 정한논쟁의 실체라는 주장이다.
무릇 국내정치나 체제 안팎의 권력 갈등과 무관한 대외정책은 있을 수 없다.
모든 대외정책은 국내정치나 권력의 함수와 직간접으로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게 마련이다.
‘정한정책’ 또한 예외일 수 없다.
유신체제 내의 권력투쟁, 정비되지 않은 정부의 정책결정, 대응의 미성숙, 복잡한 인간관계 등과 같은 요인들이 정한논쟁에 작용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기도 다카시의 표현과 같이 정한논쟁(서남전쟁)의 원인은 “몇 사람(3-5인)의 사사로운 감정[私怨]으로 생긴 것”으로서 “실로 끝없이 어리석고, 수치스러운” 일이라는 측면이 있다. 또한 유신 직후부터 조슈의 핵심인물들이 연루된 부정부패사건을 해결하기 위하여 정략적으로 활용된 흔적도 있다. 그러나 정한론의 본질은 한국지배와 혼란한 시국수습에 있었다.
유신지도체제를 분열시키고 결국 내전으로까지 발전시킨 정한론은 두 개의 중요한 요소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첫째는 한반도를 교두보로 삼아 일본이 그 세력을 대륙으로 진출한다는 ‘대륙웅비’의 이념이다. 즉 한국을 지배해야한다는 논리다.
일본이 한국을 지배해야 한다는 ‘정한론’이 정책이라는 측면에서 나타난 것은 메이지 정권이 출범하면서이지만, 그 발상은 도쿠가와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도쿠가와 시대의 대표적 학자의 한 사람이었던 하야시 시헤이(林子平, 1738-1793)는 일찍이 한국은 일본의 국방과 밀접한 관계가 있을 뿐만 아니라, 일본이 대륙으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한반도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하며 한국연구의 긴급성을 강조했다(<海國兵談>). 하야시에 의해 싹트기 시작된 한국지배의 논리는 사토 노부아키(佐藤信淵), 요시다 쇼인(吉田松陰), 하시모토 사나이(橋本佐內), 히라노 구니오미(平野國臣) 등과 같은 막부말기의 지식인들로 이어지면서 ‘한국공략론’으로 발전했다.
이들의 일관된 논리는 서세동점이라는 당시의 국제추세 속에서 일본이 독립을 보전하기 위해서는 결국 그 세력을 대륙으로 진출하는 길 밖에 없고, 한국은 그 진출을 위하여 절대적으로 필요한 존재라는 것이다. 따라서 ‘한국병탄’은 일본이 수행해야 할 1차적 과제였다. 이러한 정한론은 막말의 지식인과 지배계층 사이에 상당히 보편화돼 있었다. 그러나 국내적 통합과 체제개혁에 실패했던 당시의 상황에서 정한론을 정책으로까지 발전시킬 수는 없었다.
메이지 체제가 들어서고, 한국이 메이지와의 외교관계 요구를 거부하면서 정한론은 하나의 논리가 아니라 구체적 실천과제로 등장했다. 메이지 정부가 군대를 파견해야만 한다는 중요한 논거는, 메이지 초기 외교를 담당했던 야나기바라 사키미츠(柳原前光)가 이와쿠라 도모미에게 제출한 의견서에 잘 나타나 있다. 야나기바라는 일본이 열강에 앞서 한국을 지배해야만 하는 중요한 이유는 “한국은 북만주로 연결되고 대륙에 접한 곳으로서 이곳을 지배하면 실로 황국보존의 기초가 되고 후일 만국경략진취의 기본”이기 때문이었다. 정한론이 나타나기 시작할 당시(1870) 유신체제의 실력자의 한사람으로서 외상이었던 소에지마 다네오미(副島種臣)도 같은 의견이었다. 그는 약육강식의 국제질서 속에서 일본이 “만세독립을 보전하기 위해서는 결국 대륙을 지배해야 하고, 이를 위한 가장 기초적 단계는 한반도 지배”에 있음을 강조했다. 뿐만 아니라 1868년 이후 한국을 내왕하면서 교섭을 직접 담당했던 실무자들도 한국정벌을 정부에 건의하면서 “한국은 허약하기 때문에 30대대의 군대를 파견하면 50일 이내에 정복”할 수 있다고 보고했다. 이들이 가지고 있던 한국관은 “진구(神功)황후가 정벌했던 땅”이고, 또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여광(餘光)이 있는 땅”이었다. 한반도는 일본이 지배해야 할 땅이고 대륙진출의 디딤돌이었다.
정한론을 둘러싼 메이지 정부의 논쟁 현장 ⓒ 뉴데일리
정책으로서 ‘정한’이 담고 있는 또 하나의 중요한 의미는 국내 불만을 해소하기 위한 정략적 요소이다.
메이지유신 후 진행된 급격한 체제변화와 사회변동은 많은 정치·사회적 불안과 불만을 조장했다. 특히 폐번치현(廢蕃置縣), 개병제(皆兵制) 실시, 신분제 철폐 등과 같은 내정개혁으로 인한 사회적 특권을 상실한 사족(士族) 계급과 경제적 기반을 상실한 하급무사의 불만과 불평이 사회에 팽배했다.
이는 ‘내란’의 원인으로 작용했다. 실제로 메이지 초기 메이지 체제를 힘으로 무너뜨리기 위한 내란이 전국 도처에서 일어났다.
‘정한’의 주장은 이러한 국내적 불만을 대외전쟁을 통하여 해소하려는 정략적 발상이다.
정한파의 수령이었던 사이고의 표현을 빌리면 정한론은 “내란을 바라고 있는 마음을 외국으로 이전시켜 국가의 발전을 꾀하는 원략(遠略)”이었다. 이는 사이고만의 의견이 아니라 정한논쟁 당시 정한론에 반대했던 기도 다카요시도 같은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기도도 1870년에는 자신을 특사로 파견하는 정한론을 주장했다. 그도 한국이 일본의 요구를 거절하면, 무력을 발동하여 한국의 무례를 응징할 것이고, 이는 한국정벌과 동시에 급격한 체제 변화로 인한 국내의 모순, 특히 하급무사의 불만과 불평을 밖으로 돌리기 위한 방책이라는 것을 명확히했다.
정책결정자뿐만 아니라 실무자도 같은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
한국과의 교섭을 위하여 왕래했던 외무성의 관리(小錄) 모리야마 시게루(森山茂)도 정한론은 유신체제에 불만을 품고 내란을 일으키려고 하고 있는 불평사족(不平士族)을 한반도에 이식(移植)시킴으로써 내란의 열기를 밖으로 돌려 국내안정을 이룰 수 있음과 동시에 대륙진출의 거점을 확보할 수 있는 일거양득의 정책이라고 강조하며 군사를 급파할 것을 건의 했다.
결국 한국은 일본 안에서 일어나는 불평과 불만의 전출지(轉出地)였다.
‘대륙웅비’의 거점으로서, 내부 불만과 불평의 ‘전출지’로서 한반도를 지배한다는 정한논은 1877년의 서남전쟁을 계기로 정책으로서는 ‘당분간’ 그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나 완전히 소멸된 것은 아니다. 보다 확실하고 안전한 ‘정한’과 ‘대륙경영’을 위하여 물밑에서 준비하는 시간을 가졌다.
4. 병탄의 첨병(A)
"국내의 패배를 대륙 웅비로 풀자"
A. 대륙낭인(大陸浪人)과 한국
정한론을 지지하는 많은 사람들은 서남전쟁(1877)에 참여했으나 패배했다.
그러나 그 패배가 그들이 품고 있는 한반도 지배와 대륙웅비의 꿈까지 빼앗아 가지는 못했다.
오히려 그들은 국내에서 받은 패배와 실의를 대륙에 투영하여 그곳에서 ‘웅비의 천지’를 만들어가는 꿈을 키웠다.
그들은 수동적으로 꿈을 키우는데 안주하지 않았다.
오히려 꿈을 현실화하기 위하여 실천적 행동으로 대륙을 찾았다. 한반도를 거쳐 만주, 중국, 시베리아, 몽고, 필리핀, 인도까지 흘러들어갔다. 그들은 그곳에 거점을 만들고, 정치·사회 변화와 그곳의 삶의 양태를 주시했다.
일본 역사는 이들을 가리켜, ‘대륙낭인’이라 부른다.
권력과 금력과 영달을 초개처럼 여기고, 오직 국가의 독립보존과 번영이라는 사명감을 가지고 일본의 대륙진출이라는 목표를 위하여 대륙에서 활동한 민간지사라는 의미다.
대륙을 오가며 그들은 한반도의 중요성을 더욱 절감했다.
한반도라는 ‘문’을 통하지 않고서는 일본이 대륙으로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몸으로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깨달음은 그들로 하여금 대륙진출을 위한 한반도 선점이 무엇보다 먼저 필요하다는 ‘정한’의 의지를 더욱 불타게 했다.
이를 위한 첫 작업은 ‘한국의 실상’을 파악하고, 보다 효과적인 활동을 위하여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을 조직화하는 일이었다.
서양제국주의를 모방한 일본은 ‘함포’를 앞세우고 한국의 개국을 요구했다. 힘에 밀린 한국은 1876년 일본에 굴복했다. 한국과 일본 두 나라 사이에 불평등 조약이 체결되면서 대륙낭인의 활동은 국가적 보호 속에서 더욱 활발해졌다.
이들은 먼저 한국의 구석구석을 여행하고 정찰하면서 정치, 군사, 경제, 사회상을 면밀히 조사하고 기록했다.
물론 그 기록들 가운데는 한국의 문명수준을 의도적으로 ‘야만’으로 만들거나 또는 허무맹랑한 거짓 정보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보고 들은 한국의 실상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혼란스럽고, 국기(國基)는 허약했고, 독립의지는 희박했다.
‘정한’의 실현이 멀리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후쿠자와 유키치의 가르침 "조선을 일본 세력안에 넣어라"
이노우에 가쿠고로(井上角五郞)와 <서울에 남은 꿈[漢城之殘夢]>
메이지 초기의 기록으로서 한국의 실정을 가장 소상하고도 비교적 정확하게 남긴 기록은 아마도 <한성지잔몽>이 아닐까 생각된다. 저자 이노우에 가쿠고로(1860~1938)는 1883년부터 4년 동안 오늘의 서울인 한성에 체류하면서 한국 최초의 신문이라 할 수 있는 <한성순보> 발행을 실질적으로 주도한 인물이다. <한성지잔몽>은 그가 4년 동안 한국에 살면서 보고, 듣고, 경험한 것들을 기록한 것이다.
그는 당시 한국정부의 지배계층, 특히 개화파 인물들과 긴밀한 관계를 가졌고, 권력층 내에 친일파를 형성하는데도 배후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노우에가 한국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근대 일본의 대표적 지식인이며 문명론자라 할 수 있는 후쿠자와 유기치(福澤諭吉)의 교육을 받으면서부터이다. 히로시마(廣島)출신인 이노우에는 게이오(慶應)대학에서 후쿠자와를 만났다. 이노우에의 투철한 국가관[大和魂]을 인정한 후쿠자와는 그를 수제자의 한 사람으로 발탁하여 자신의 집에서 함께 기거하면서 특별한 관심과 배려를 베풀었다.
두 사람의 사제관계는 마치 ‘군신수어(君臣水魚)’와 같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후쿠자와 유기치는 자유주의적 개인주의를 강조했지만, 국권확장론자였다. 그는 “정부의 형태나 실체 모두가 아무리 전제적이라 해도 나라를 강하게 만들 만큼 강력하기만 하다면 나는 만족할 것이다”라고 할 정도로 국권확장을 지지했던 인물이다.
문명개화와 부국강병을 주장한 후쿠자와 밑에서 가르침을 받은 이노우에가 국권확장에 매료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그리고 대륙웅비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한국지배가 필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한 것 또한 자연스러운 귀결이었다.
1882년 게이오 대학을 졸업한 이노우에는 후쿠자와의 지시에 따라 12월에 한국으로 떠나게 된다. 그의 나의 23세였다.
한국으로 떠나는 이노우에게 후쿠자와는 “‘이노우에 가쿠고로는 일본인이다’라는 것을 어떠한 상황에서도 잊어서는 안 된다”는 훈시와 함께 그의 역할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나는 한국이 완전히 독립하기를 바라고 있다. 그러나 지금의 상황을 미루어 볼 때 어려울 것으로 판단된다. [한국의 독립이 어렵지만] 일본 이외에 어떤 나라도 한국에 손을 뻗치는 것을 용납해서는 안 된다. 한국을 계도(啓導)하는 것은 오직 일본의 권리이며 또한 의무이다....최근 중국이 서양 열강에 의하여 분열될 것이라는 논의를 듣고 있다. 결국 중국은 사분오열되어 서양 세력에 빠지게 되고 말 것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작은 섬나라인 우리나라를 지킬 수 있는 길이 무엇이겠는가? 우리가 대륙에 발판을 구축하고 서양세력을 몰아내지 않는다면 우리나라의 독립은 위태로울지 모른다. 그 발판 구축의 첫 걸음이 한국을 우리의 세력범위 안에 놓는 일이다." (近藤吉雄, <井上角五郞先生傳>(1943), pp. 35~36)
이노우에의 사명은 한국을 ‘일본의 세력범위’에 넣고, ‘대륙진출의 가교’를 놓는 것이다.
박영효-김옥균과 함께 조선으로...한성순보 발행
1883년 23살의 나이에 조선에 와서 '한성순보' 발행을 뒤에서 주도했던 이노우에 가쿠고로가 남긴 서울 체류기 '한성지잔몽'의 표지
이노우에가 한국에 가게 된 직접적 동기는 한국에서의 신문발행이다. 임오군란(1882)의 뒷마무리를 수습하기 위하여 일본을 방문한 박영효와 김옥균에게 후쿠자와는 한국에서 신문 발행을 권유했다. 게이오 대학과 더불어 <시사신보(時事新報)>를 창간하여 운영하고 있던 후쿠자와는 ‘백성의 개명’과 ‘국론통합’을 위해서는 신문이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했다. 일본에서 자금을 마련한 박영효와 김옥균은 신문발행의 실무자로 후쿠자와가 추천한 이노우에 가쿠고로를 대동하고 귀국했다. 그리고 통리아문(統理衙門) 동문학(同文學) 산하에 박문국(博文局)을 두고 1883년 10월 30일부터 한성순보(漢城旬報)를 발간하였다. 한국 최초의 신문은 이렇게 해서 태어났다.
김옥균과 박영효가 추천사를 쓴 <한성지잔몽>은 자신이 한국으로 가게 된 연유, 1883년 당시 한국에서 중국과 일본의 지위, <한성순보>를 발행하기까지의 과정, 갑신정변과 그 후 한국정국의 변화, <한성순보>의 중단과 <한성주보>의 발행, 한국과의 이별 등을 기록하고 있다.
<한성지잔몽>의 많은 부분이 우리의 관심을 자극하고 있지만, 특별히 눈길이 가는 곳은 그가 본 한국의 지배계급과 그들을 둘러싼 정치현상이다. 그는 대원군, 민비, 양반을 중심으로 한 정권투쟁과 지배계층의 부패현상을 깊숙이 관찰했다. 이노우에의 표현을 그대로 옮기면, “왕족(대원군파)은 척족(민비파)을 꺾으려하고, 반대로 척족은 왕족을 능가하려고 하는 서로의 알력 때문에 정국이 평탄할 날이 없었다. 그런데도 양반들은 각각 당파를 만들어 왕족이나 척족과 더불어 세도잡기에 여념이 없다.” 세도가들은 나라와 국민을 염려하기보다 “왕궁을 출입하며 제각기 가문의 이익을 도모”하고 있었다. 정부가 전환국, 화약국, 목축장, 제중원, 영어학교, 광무국 등을 신설할 때도 세도가들은 “이를 핑계 삼아 아무런 근거도 없이 멋대로 국고를 낭비”하고 있었다.
이노우에가 정리하고 있는 한국 사회의 모습은 부패와 부조리 그 자체였다. 국민 모두의 삶은 끝없이 피폐해지고 빈곤 속에서 허덕이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금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무겁게 늘어났고, 지방 관리의 횡포는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인구는 감소하고 있었고 고유한 풍속이 점차 파괴되고 있었다. 더하여 교통이 정리되지 않아 천연적 부와 농산물이 유통되지 않고 있었다.
나라가 이러한 지경에 이르렀어도 “나라의 자주와 독립, 그리고 백성의 삶을 걱정하는 뜻있는 사람이 없어지고 있고, 오히려 청국이나 러시아 또는 그 밖의 외국인에게 아부하여 자기의 지위를 확고히 하려는 무리”만 늘어나고 있었다. 이러한 한국의 운명이 어떻게 될 것인가는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이노우에 눈에도 일본의 한국지배는 멀리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회생 불능의 나라 조선..."30대대 군대면 50일안에 먹을 수 있다"
한국의 지배계층과 사회상에 대한 이노우에의 이와 같은 평가는 다른 기록에서도 확인 할 수 있다.
한국을 돌아본 일본인이 쓴 '이면의 한국' 책 표지.
이노우에보다 조금 뒤에 한국을 돌아본 여수거사(如囚居士)라는 일본인에 의하면 한국의 군대는, “무뢰한의 무리”로서 “국가를 보호한다는 의지가 없는 집단”이었다. 그들은 전쟁이 일어나면 “철포를 버리고 민간인 복장으로 바꾸어 입고 도망”치고, 돈이 없으면 돈을 빌리기 위하여 “철포를 전당포에 잡히는 것을 조금도 괴이하지 않게 여기는 무리”였다.
일본인의 눈에 비친 한국은 회생의 가능성이 희박했다.
병탄의 이념적 무기...감명받은 이용구, 아들이름도 '大東國男'으로 지어
다루이 도키치(樽井藤吉)와 <대동합방론(大東合邦論)>
이노우에 가쿠고로의 <한성지잔몽>이 한국의 실상을 알리기 위한 것이었다면, 다루이 도키치(樽井藤吉)의 대동합방론(大東合邦論)은 한국병탄의 방법론을 제시한 것이다. 한 일본 역사가의 지적처럼 이 책은 “한국병탄의 이념적 무기”였다.
1893년에 출간된 '대동합방론. 한국합방의 방법론을 제시한 다루이 도키치의 이 책은 당시 한국과 중국 지식인들을 세뇌시킨 이념의 무기가 되었다.
서양으로부터의 위기와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으로서 한중일의 ‘대등한 연대’를 강조하고 있는 이 책은 당시 한국이나 중국의 지식인들의 지적 관심을 자극했다. 출판 직후 중국의 개혁론자 량치차오(梁啓超)는 자신의 서문을 추가하여 <대동합방신의(大東合邦新義)>라는 이름으로 상하이(上海)에서 출판했다. 또한 일본의 한국병탄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나섰던 일진회(一進會) 회장 이용구(李容九)는 자기 아들의 이름을 ‘대동국의 사내’[大東國男, 오히가시 구니오]라고 지을 정도로 이 책에서 커다란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1850년 나라(奈良)에서 태어난 다루이 도키치는 열렬한 정한론자였다. 평소부터 사이고 다카모리를 흠모해 온 다루이는 1877년 서남전쟁이 일어나자 사이고를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그는 사이고를 지원하기 위하여 내륙에서 군사를 일으킬 것을 시도하기도 했다. 결국 군사적 봉기는 실패했지만, 그의 ‘정한’ 의지는 더욱 강렬해졌다.
부산과 목포 일대를 몇 차례 내왕한 그는 ‘국면 타개책’으로 한국 근해의 무인도 수색을 착수했다. “나는 평소부터 일본이 무엇보다 먼저 한국을 지배하지 않는다면 우리나라 발전의 실마리가 열리지 않는다고 생각해왔다”고 자신의 소신을 밝히고 있는 다루이에 의하면 무인도 탐험의 목적은 “정한책(征韓策)의 근거지”를 확보하는 데 있었다.
3년 동안의 무인도 탐험도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 후 그는 정당을 만들어 정치활동을 하는 한편, 대륙낭인의 대부라 할 수 있는 도야마 미츠루(頭山滿)와 함께 상하이에 동양학관 설립을 주도했다. 또한 갑신정변 실패 후 일본에 망명한 김옥균과 두터운 친교를 맺으면서, 그의 재기를 위한 자금 조달과 후원의 중심적 역할을 했다. 그러나 그의 모든 활동은 오직 일본의 ‘대륙진출’과 ‘정한’의 실현에 귀착했다. 그의 <대동합방론>도 이를 위함이었다.
"일본+한국=대동국 건설"...한-중 지식인들 겨냥, 한문으로 저술
<대동합방론>의 초고가 완성된 것은 1885년이지만, 출판된 것은 1893년이다. 8년이라는 공백은 다루이가 두 차례에 걸친 감옥생활을 하는 동안 초고를 분실했기 때문이다. 1893년에 출판된 <대동합방론>의 특색은 초고와 달리 일본어가 아니라 한문으로 써졌다는 점이다. 그가 한문을 택한 것은 처음부터 <대동합방론>의 독자를 일본인보다는 한국인이나 중국인으로 상정했기 때문이다.
<대동합방론>은 서양세력의 아시아 진출이라는 뚜렷한 국제현상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아시아의 단합이 필요하다는 것을 대전제로 삼고 있다. 아시아의 단결과 통합을 위하여 다루이는 구체적으로 세 단계의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첫 단계는 한국과 일본이 ‘대등한’ 입장에서 합방하여 ‘대동국(大東國)’이라는 나라를 세우는 것이다. 둘째 단계는 대동국이 중국과 긴밀한 동맹관계를 수립하는 것이다. 셋째 단계는 대동국, 중국, 그리고 동남아시아의 여러 섬을 포함한 ‘대아시아연방’을 실현하는 것이었다. 오늘날의 표현으로 바꾼다면 ‘동아시아 공동체’를 구축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루이의 주요관심과 <대동합방론>의 핵심 주제는 첫 단계인 대동국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대동합방론>의 상당부분은 서양세력의 동양진출로 인한 ‘위기’를 강조하고 있다. 또한 쇠잔해 가고 있는 중국의 사정과 호전적인 러시아를 포함한 주변정세를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정치적으로 혼란하고 사회적으로 피폐한 한국의 현상을 그렸다. 다루이에 의하면 한국은 “이름만 자주국일 뿐 오래전에 자립을 상실”했고, “나라를 부흥시킬 방책을 가지고 있지 못한” 나라가 아닌 나라였다.
주변사정을 볼 때 그동안 한국이 의존해온 중국은 “한국을 후원할 실력을 이미 상실”했다.
그렇다고 해서 한국이 한번 러시아에 의존하게 되면 “두 번 다시 나라를 일으키기 어렵고 동양의 폴란드로 전락”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내외적 상황에서 한국이 택할 길은 일본과 통합하는 이외의 다른 길이 없었다.
동종동문(同種同文)의 형제와 같은 일본의 보호와 지도를 받을 때 한국은 비로소 자주성을 확립하고 문명의 혜택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이 택해야 할 길은 명확해졌다. 다루이에 의하면 한국과 일본의 ‘합방’은 대단히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이었다.
물론 그도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한국 침략으로 한국 내에 반일감정이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과 일본은 “한 가족과 같아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었다.
그의 표현을 그대로 빌리면, “우리 일본과 한국 두 나라의 지형은 입술과 이와 같고, 그 세력은 수레바퀴의 두 바퀴의 관계이고, 그 정은 형제와 같으며, 그 의리는 벗의 관계와 같다”는 것이다. 그리고 합방국의 국호를 ‘대동’이라고 함은 ‘동(東)’이라는 글자가 예로부터 한국과 일본이 함께 사용한 또 다른 국호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다루이는 이처럼 친근하고 대등한 합방을 논하는 듯하다.
그러나 그의 주장에는 일본이 대륙으로 진출하기 위한 길목의 한국, 합방국의 주권자로서의 일본의 입장을 밝히는 것을 잊지 않았다.
다루이가 살펴 본 세계정세에 의하면 강대국들은 “속국(屬國)을 본토 면적의 몇 십 배 소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은 “단 하나의 속국도 거느리지 못하고”있었다. 구미의 여러 나라와 대등한 강대국으로 발돋움하기 위해서는 일본도 그 영토를 확장하고 국력을 키워야만 했다.
결국 일본이 진출해야 할 곳은 ‘대륙’이고, 대륙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한반도가 필요했다. 다루이는 “일한합동이 이루어진다면 일본은 한반도를 통해서 중국이나 러시아를 포함한 대륙으로 뻗어나갈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1870년대 정한론자의 논리와 다를 바 없었다.
결국 한반도는 일본이 대륙으로 나가기 위한 ‘징검다리’이고, 대등한 ‘합방’이라는 명분은 이를 구체화하기 위한 ‘방책’이었다.
일본이 이 후 진행한 대륙정책은 <대동합방론>의 코스를 밟았다. 그런 의미에서 <대동합방론>은 한국병탄의 ‘교본’이었고, 대륙정책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다.
5. 병탄의 첨병 (B)
일본낭인들 "동학봉기는 절호의 기회" 외무대신에 청일전쟁 촉구
'외세배척이 외세 불러'...흑룡회, 부산에 지부 설치 유격대 결성
B. 조직
좌절된 ‘정한’의 꿈을 실현하고, 일본에서의 실의(失意)를 대륙에서 보상 받으려는 대륙낭인들은 현지의 사정을 알게 되면서 행동을 위한 조직체를 만들었다. 흥아회(興亞會), 동아동문회(東亞同文會), 락선당(樂善堂) 등 많은 조직들이 태어났다. 그들은 정부보다 한 걸음 앞서 대륙진출의 길을 닦았고, 일본과 한국에서 한국병탄의 첨병으로 활동했다.
정한론의 열사들 단결 "천황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
겐요샤(玄洋社)
일본 최초의 극단적 국가주의(ultra-nationalism) 단체라 할 수 있는 겐요샤는 1881년 조직된다. 주체세력은 후쿠오카 출신의 하급무사들이다. 그들은 막부말기에는 ‘천황을 받들고 서양 오랑캐를 몰아낸다’는 존왕양이(尊王攘夷)운동에 참여했고, 메이지유신 후에는 사이고 다카모리의 정한론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그리고 1877년 서남전쟁에 참여했다. 전쟁에서 패배한 후 규슈 일대에서 일어나는 반정부운동에 가담하면서 개인적으로 대륙웅비의 길을 모색했던 사람들이다.
겐요샤 결성의 중심인물은 세 사람이다. 광산업에서 성공한 규슈 제1의 부호인 히라오카 고타로(平岡浩太郞), 일본 우익사의 대부이며 대아시아주의의 챔피언인 도야마 미츠루(頭山滿), 서남전쟁과 하기(萩)의 난(1876)에 깊이 관여했던 하코다 로쿠스케(箱田六輔) 등이었다.
하나같이 막말의 격동기를 살아오고 정한론을 열렬히 지지했던 그들의 목표는 명확했다. 일본의 부강과 함께 대륙으로 그 영토를 넓혀나가는 것이다. 발기문에 나타나는 다음과 같은 결성의 동기와 지향하는 목표는 이 조직의 성격을 잘 말해주고 있다.
“겐요샤는 우국지사의 단결이고, 애국지사의 단결이다. 그리고 천황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충신의 단결이고 군국주의자의 단결이다. 천금을 가볍게 아는 의기(義氣), 천하를 짊어질 기상, 비분강개의 뜨거운 피, 이 모든 것이 하나로 모여 겐요샤가 태어났다.”
겐요샤 3걸(傑)과 최초의 본부
동학봉기에 개입, 청일전쟁을 유도하는 특수활동
겐요샤는 전국적 조직이라기보다는 규슈에 국한한 단체였다. 또한 뒤에서 볼 수 있는 고쿠류카이(黑龍會)처럼 조직적으로 움직이거나 또는 해외웅비의 실현을 위해 일선에서 직접 활동하는데 주력을 기울인 단체는 아니다. 그 보다는 정부 내에서 대륙으로의 국권확장 지지 세력을 확대해 나가면서, 관계와 군부의 보수 세력과 유대를 긴밀히 하는데 더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렇다고 해서 겐요샤가 대륙팽창을 소홀히 했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보다 효과적인 대륙팽창을 위하여 국내적 기반을 강화하는 데 힘썼을 뿐이다. 필요하다고 판단될 때는 적극적으로 행동했다. 한국에서 동학봉기가 격화될 때 청일전쟁을 유도하기 위한 특수조직을 만들어 한국에 파견하여 실상을 정탐하면서 활동케 하기도 했다. 물론 한국병탄 과정에도 깊숙이 관여했다. 또한 중국대륙에서 혁명의 기운이 소용돌이 칠 때 캉유웨이(康有爲), 량치차오(梁啓超), 쑨원(孫文) 등과 같은 개혁파나 혁명파를 도와 대륙에 일본세력의 뿌리를 내리기 위하여 멸청흥한(滅淸興漢) 운동에 동참하기도 했다.
'국권론(國權論)의 기둥' 도야마 미츠루, 김옥균등 각국 망명객들 지원
겐요샤는 많은 국권론자, 그들의 표현을 빌리면 ‘국사(國士)’를 배출했다. 그리고 근대 일본 우익활동의 원류로서 일본의 정치·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특히 겐요샤 출범이후 끝까지 멤버로 활동해온 도야마 미츠루(頭山滿)는 오늘에 이르기 까지 국권론의 정신적 지주로, 그리고 ‘민간 지사’의 대표적 인물로, 우익의 영원한 대표자로 추앙받고 있다. 한 번도 관직을 가지지 않았으나 ‘무관의 제왕’으로 권력 안과 밖에 많은 지지 세력을 확보하고 있었다. 아시아의 혁명아들도 고국을 등지고 일본으로 망명할 때는 그의 지원을 받았다. 갑신정변 후의 김옥균, ‘멸청흥한’을 꿈꾸었던 쑨원과 황싱, 인도의 스브하스 찬드라 보스(Subhas Chandra Bose), 필리핀의 에밀리오 아귀날도(Emilio Aguinaldo) 등 모두가 일본에 있는 동안 도야마의 지원을 받았다.
1931년 일본을 방문한 인도 시성 타고르(Rabindranath Tagore)와 도야마 미츠루.
겐요샤는 한국문제에 높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병탄과정에도 깊숙이 관여했다. 특히 메이지 정부의 실력자들과 밀접한 관계를 지속해 온 겐요샤의 상층부는 때때로 병탄의 방향을 제시하고 정부의 병탄정책을 독촉하기도 했다.
조선진출의 찬스 '동학봉기'...일본 정부에 청일전쟁 건의
덴유쿄(天佑俠)
덴유쿄는 겐요샤가 한시적으로 조직·운영한 행동단체였다.
목적은 동학봉기로 혼란한 한국의 상황을 이용하여 일본이 대륙으로 진출할 수 있는 결정적인 계기와 명분을 만들어 내는 것이었다.
김옥균의 갑신정변 실패 후 한국에서 일본의 정치적 영향력은 점차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고, 반대로 중국의 영향력이 다시 강화됐다. 그러나 일본에게 다시 기회가 왔다. 1894년 한국의 전라도에서 일어나기 시작한 동학이라는 대규모의 민중봉기는 일본으로 하여금 열세에 몰리고 있는 상황을 반전할 수 있는 기회였다.
‘반외세’의 깃발을 내걸었던 동학운동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외세를 불러들이는 빌미를 제공했다.
이는 청일전쟁의 불씨가 되었고, 동아시아의 새로운 세력관계 형성의 실마리가 되었다. 동시에 정한론 이래 한국에 진출할 틈을 엿보아 왔던 병탄론자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좋은 기회였다.
겐요샤의 지도자들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일찍부터 부산의 오자키(大崎正吉) 법률사무소를 거점으로 활동하고 있던 대륙낭인과 겐요샤의 요원들은 동학봉기와 이로 인한 혼란이 한국으로 진출할 수 있는 적시라고 판단했다. 그들에 의하면 한국에서의 민중봉기를 계기로 “반일 망국의 한국정부와 오랫동안 한국을 지배해 온 청나라의 세력에 철퇴를 가하고” 한국반도에 “친일정부를 세울 적절한 시기가 도래했다”는 것이다.
이을 실천하기 위하여 겐요샤의 지도자들이 움직였다. 도야마 미츠루, 히라오카 고타로, 마토노 한스케(的野半介)는 외무대신을 찾아가 한국을 지배하기 위한 청나라와의 전쟁을 주장했다. 그리고 이어서 육군참모차장인 가와카미 소로쿠(川上操六)를 예방하고 조기개전론을 폈다. “전적으로 동감”의 뜻을 표시한 가와카미는 겐요샤의 역할을 다음과 같이 주문했다.
외무대신 "일단 불을 붙이시오, 불 끄기는 내가 맡겠소"
"원래 겐요샤는 많은 인재를 포용하고 있는 대륙진출의 근원이라고 알고 있습니다...지금의 시국을 급속도로 진전시키고 해결하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바다를 건너가 불을 지르는 것이 필요합니다. 겐요샤 사람 가운데 그 일을 맡아 해낼 만한 사람이 없을까요? 일단 불만 붙여 놓는다면 그 다음 ‘소화작업’은 나의 임무이니, 그것은 내가 기꺼이 이행하겠소."(藤本尙則, <巨人頭山滿翁>(1922), p.340)
가와카미가 요청하는 ‘불 지르기[放火]’가 무엇을 부추기고 있는지 잘 알 수 있다.
단체의 조직을 실질적으로 주도한 도야마 미츠루에 의하면, 덴유쿄는 “한국의 동학당을 고무하여 한국에서 풍운을 일으켜 급기야는 일청전쟁의 대결전을 꾀할 수 있는 계기를 잡자는, 이른바 가와카미 장군의 ‘방화의 역할’을 하기 위한 ‘조직체’였다
덴류쿄를 해체하면서 활동을 정리하여 발표한 <덴류쿄 보고서>.
덴유쿄는 15명으로 구성된 유격대 형태의 작은 단체였다. 뒷날 고쿠류카이를 조직하여 한국병탄에 주도적 역할을 한 우치다 료헤이(內田良平)를 위시한 겐요샤의 젊은 세력과 이미 한국에서 활동하고 있던 대륙낭인으로 구성됐다.
그들은 1894년 6월 하순에 부산에 도착한다. 그 후 그들은 일본군의 호위를 받으면서 3개월 동안 전국 각지를 다니면서 사태의 흐름을 정탐하고, 소요를 일으키고, 폭력을 감행하는 게릴라식 활동을 전개했다. 그들의 활동이 청일전쟁 발발에 직접적으로 어떻게 또 얼마나 작용했는지 정확하게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과장된 기록이기는 하지만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청일전쟁의 “불 지피는 역할을 충실히 이행”했다. 청일전쟁이 일어나면서 덴유쿄는 해체했으나 대부분의 조직원들은 일본군대의 정보원으로 한국에 남아서 활동을 계속했다. 그리고 그들은 러일전쟁 후 다시 모여 한국병탄의 완성을 위하여 활동하게 된다.
대륙경영-한국병탄의 최전선 부대
고쿠류카이(黑龍會)
근현대 일본사에서 대표적 국권주의 단체로서 고쿠류카이를 내세우는 데 아무도 이론을 제기하지 않는다. 이 단체는 대륙을 향한 일본의 국력확장을 구체적으로 실현하기 위해서 나라 안팎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한국병탄을 위해서도 최전선에서 길을 열어나갔다.
고쿠류카이는 1901년 결성됐다.
주도자는 덴유쿄에 직접 참여했던 우치다 료헤이(內田良平).
그는 죽을 때까지 회두(會頭)로서 이 단체를 이끌면서 우익진영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고쿠류카이’라는 이름은 흑룡강(Amur River)에서 유래한다. 시베리아와 만주 사이를 흐르고 있는 흑룡강을 중심으로 대륙경영의 대업을 이룬다는 뜻을 나타내고 있다. 즉 일본의 국력을 대륙으로 팽창하여 흑룡강까지 지배의 영역을 넓혀가야 한다는 희망과 각오의 뜻을 담고 있다.
창립취지문은 이 단체의 성격과 목적을 잘 말해주고 있다. 취지문에 의하면 동아시아는 서양의 아시아 잠식이라는 “세계 역사상 미증유의 중대한 비상시국”을 맞이하고 있었다. 이 비상시국을 타개하고 아시아를 이끌어야만 할 능력과 사명을 가지고 있는 것은 일본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아시아의 실정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동안 아시아의 오지를 누비고 다니면서 그곳의 세태를 수집하고 분석한 대륙낭인들이 한데 모여 대륙의 사정을 널리 알려 “모든 사람의 각성”을 촉구할 필요가 있었다. 고쿠류카이 결성의 일차적 목적은 ‘대륙문제’에 대한 국민계몽이었다. 그럼으로써 “황국의 백년대계의 틀을 튼튼히 하고 만리웅비의 길을 넓힐 수 있다”는 것이다.
"장백산의 바람으로 저녁 지어먹고...요동의 들판 장막에서 밤을 지새우며..."
고쿠류가이는 겐요샤처럼 특정 지역에 국한되지도 않았고, 또한 덴유쿄처럼 한시적인 단체도 아니었다. 물론 그 뿌리는 겐요샤라고 할 수 있지만 조직의 지도층이나 일반회원 모두가 전국에서 모여들었다. 또한 취지에 동조하는 회원들을 꾸준히 영입했다. 그러한 의미에서 고쿠류카이는 전국적이고 대중적이며, 또한 일반에게 공개된 조직이었다.
고쿠류카이가 활동은 다양했다. 결성하면서부터 <흑룡(黑龍)>이라는 월간지를 발행하여 ‘대륙의 사정’을 일반인들에게 전달했다.
물론 시기에 따라 관심부분이 달라지기는 했지만, 동아시아 전반의 실태를 알리는 한편, 초기에는 러시아와 시베리아의 발전, 그리고 러시아의 남하정책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1905년 고쿠류카이가 한국병탄 프로젝트에 직접으로 뛰어들기 전까지는 러시아, 중국, 만주, 몽고, 한국의 사정을 일본사회에 전하는 데 주력했다. 그들의 표현을 그대로 빌리면, “흑룡강변에서 노숙하고, 장백산의 바람으로 저녁을 지어먹고, 요동의 들판에 세운 장막 속에서 밤을 지새우며 얻은 그 지역의 풍속과 인정”을 알리는 것이었다.
이와 함께 만주, 시베리아, 러시아 등의 지도를 발행하여 그 지역의 길잡이 역할을 했다. 또한 간다(神田)에 흑룡어학교(黑龍語學校)를 열고 중국어와 러시아어를 배우려는 사람들은 누구나 무료로 수강할 수 있도록 했다.
이렇듯 활발한 활동을 전개한 고쿠류카이는 1902년 후쿠오카와 교토에 지부를 설치하고 전국적으로 조직을 확대해 나갔다.
뿐만 아니라 그 활동범위를 해외, 특히 한국으로 넓히는데 주력했다.
한국의 사정을 체계적으로 조사하고 인력을 양성하기 위하여 대구에 비룡상회(飛龍商行)라는 사무실을 열어 거점을 만들었다.
그리고 1903년에는 고쿠류카이의 해외본부를 부산에 설립하고 많은 회원들이 상주하면서 활동을 전개했다.
월간지의 발행소도 도쿄에서 부산으로 이전했다.
이 조직은 1905년부터 1910년 까지 한국병탄과정에 깊숙이 관여하여 한국의 지배계층과 일본의 정책결정자들을 넘나들며 병탄성사에 결정적으로 기여한다.
6. 병탄의 첨병(C)주역들
일본정부 고관, 외교관, 군부등 총출동
C. 인물
일본의 한국병탄에는 많은 인물들이 관여했다. 이토 히로부미와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를 위시한 관리, 무츠 무네미츠(陸奧光宗)와 고무라 쥬타로(小村壽太郞)를 포함한 외교관, 야마가타 아리토모나 가츠라 타로(桂太郞)가 이끄는 군부, 시부사와 에이이치(涉澤榮一)로 대표되는 재계 등 각계각층의 지도급 인물들이 ‘병탄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그러나 ‘음모와 조작의 명수’로 알려진 한국주둔헌병사령관 아카시 모토지로(明石本次郞)가 확언하고 있는 것과 같이 “민간 지사의 헌신적 활동”이 없었다면 병탄 프로젝트는 실패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상당히 지연됐을 것이다. 아카시가 지적하고 있는 ‘민간 지사’는 스기야마 시게마루(杉山茂丸), 다케다 한시(武田範之), 그리고 우치다 료헤이(內田良平)를 의미하고 있다.
거무줄을 팔방으로 친 막후의 거대한 그림자
스기야마 시게마루(杉山茂丸): 병탄의 막후 조종자
‘정계상층부를 자유롭게 드나든 저명한 정치낭인’, ‘정계를 유영(遊泳)하는 책사’, ‘정보의 집결소’, ‘흑막의 인물’, ‘지사’ 등으로 알려진 스기야마 시게마루는 정계의 막후 인물로서 역사적 계기마다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일본의 한 외교사학자는 스기야마를 가리켜 “얼굴을 숨기고 도쿄[帝都] 중앙에 뿌리를 내려 때로는 거미처럼 지하로 잠적하고, 때로는 토굴을 나와 거미줄을 팔방으로 넓히고, 천하대사가 있을 때마다 항상 무대 뒤에 숨어서 능숙하게 많은 것을 조종하고 해결”하는 인물이라고 평했다. 그리고 대부분의 세상 사람들은 “일청전쟁에서 시작하여, 러시아의 대전을 거쳐, 한국병합을 만들어 내기까지 최근 20년의 역사에서 오직 무대 전면에서 활동하는 사람들만 보았지, 배후에서 이들을 움직이는 거대한 검은 그림자는 보지 못하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거대한 검은 그림자’가 바로 스기야마 시게마루다.
그는 “공명이 안중에 없고, 허영의 질곡에 초연”하며, 제국 건설을 보지 못하고 “한을 품고 세상을 하직한 지사”들을 위로하고 나라의 부강만을 탐하는 철저한 국권확장론자였다.
그는 일본이 대륙으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한반도를 지배해야하고, 이를 위해서 민관군은 힘을 합쳐 “최대의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는 확실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신념에 따라 행동했다.
스기야마는 유학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후쿠오카의 집에 학교[家塾]를 열고 젊은이들을 가르친 그의 아버지는 미도(水戶)학파의 유학자로서 철저한 근황파(勤皇派)에 속했다. 시게마루는 아버지 밑에서 한학과 국학을 공부했으나, 근대적 교육을 받은 흔적은 없다. 1880년부터 도쿄와 후쿠오카를 오가며 “사방의 지사들과 교류”하면서 정치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1883년부터는 한국의 부산, 인천, 한성을 내왕하고, 김옥균, 송병준 등과도 교류했다. 그리고 대부분의 대륙낭인과는 달리 그는 ‘서양’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고 자주 돌아보았다. 그는 여행을 통해서 견문을 넓혔을 뿐만 아니라, 학교에서 배울 수 없는 ‘살아 있는 지식’을 몸으로 터득했다.
독학-여행...세계를 누빈 거구의 '해결사'
일본인으로서는 보기 드문 거대한 체구(키-6척, 몸무게-82kg)를 지닌 스기야마는 천성적으로 사람을 끄는 매력을 지닌 인물이었다. 대부분의 대륙낭인이 국내적 지지 기반이 약한 것과 달리, 그는 각 계의 중요 인물들과 긴밀한 인맥을 형성하고 있었다. 당대의 최대의 권력자인 이토 히로부미나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물론, 정계, 관계, 재계, 군부의 거물들과도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근대적 교육은 받지 않았으나 독학과 여행을 통하여 살아 있는 지식을 가지고 있었고, 또 영어도 ‘비교적’ 자유로웠다. 1888년 이후 일 년에도 몇 차례씩 홍콩을 오가며 영국의 재정운영에 많은 관심을 가졌고, 1897년 이후에는 미국도 자주 내왕했다. 또한 빠른 판단력과 추진력을 가진 그는 ‘해결사’로서의 천부적 자질을 갖추었다. 이토 히로부미가 1900년 처음으로 정당(정우회) 내각을 꾸리면서 스기야마에게 경시총감의 자리를 권유할 정도로 그의 능력을 평가하고 신뢰했다. 물론 스기야마는 고사했다.
스기야마는 대륙낭인의 대부인 도야마 미츠루로부터 많은 영양을 받았다. 그와 함께, 또는 그의 지시를 받아서 크고 작은 많은 사건을 막후에서 조종했다. 그는 도야마가 가장 사랑하고 신뢰하는 후배였고, 두 사람의 관계는 ‘물과 고기’와 같았다.
도야마 미츠루와 스기야마 시게마루(왼쪽)
스기야마도 겐요샤의 중요한 회원이었다. 그러나 그는 조직에 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활동했고, 명분이 있는 일이라면 재계나 정부의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한국, 만주, 대만, 홍콩, 미국을 자유롭게 넘나들고, 공식 직함 없이 일본흥업은행 창립, 대만은행설립, 경부철도회사 설립, 만철 설립과 운영, 철도국유화 등과 같은 문제에 깊숙이 관여했다. 또한 러일전쟁 당시에는 가츠라 다로(桂太郞)수상의 요청을 받아 루즈벨트 대통령과 동문수학한 가네코 겐타로와 함께 미국을 방문하여 모건회사(J.P. Morgan)회사로부터 차관을 얻어 전쟁에 필요한 군수물자를 구입하는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러일전쟁 후 일본은 본격적인 한국병탄을 위하여 한국에 통감부를 설치하고, 일본 최대의 실력자인 이토 히로부미를 초대 통감으로 임명했다. 스기야마는 때를 놓치지 않고 고쿠류카이의 우치다 료헤이를 이토의 막료로 추천했다. 그리하여 스기야마는 도쿄에서, 우치다는 한양에서 병탄 프로젝트를 본격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계기를 열었다. 그 후 1910년 병탄이 완성되기까지 그는 한편으로는 정부의 원로와 중신, 그리고 군부를 움직이는 역할을 담당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친일단체인 일진회의 고문으로서 병탄프로젝트에 깊숙이 관여했다.
한국병탄 후 그는 죽을 때까지 만주와 시베리아로 국력확장을 위하여 진력했다.
평생을 한일병탄에 바친 '정한론의 괴승'
다케다 한시(武田之範): 일진회 조종자
일진회는 일본의 한국병탄을 앞장 나서서 주장한 당시 가장 큰 한국인 민간단체였고, 이용구(李容九)가 그 회장이었다. 일진회로 하여금 ‘합방’을 주도하도록 나서게 한 배후에는 승려 다케다 한시가 있었다. ‘괴승’, ‘걸식방주’, ‘대화상’으로도 불리는 다케다는 그의 생애 최대의 사업이라고도 할 수 있는 한국병탄의 큰 몫을 담당했다.
어려서부터 한학을 공부한 다케다는 불교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나가오카(長岡)의 조동종(曹洞宗) 전문학교에서 불교를 학문적으로 연구했다. 뒷날 그는 조동종의 명찰이고 호쿠리쿠(北陸) 지방에서 가장 큰 현성사(顯聖寺)의 31대 주직(住職)을 맡았다. 다케다가 10년 동안 사찰을 운영하는 동안 사세는 크게 성장했다.
일진회 조종자 승려 다케다 한시
다케다는 1863년 구류미(久留米)의 하급무사 사와시 고(澤之高)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메이지 초기 그의 아버지가 반정부운동에 연류 되면서 집안이 몰락했다. 그래서 그의 나이 10살에 아버지의 친구이면서 의사인 다케다(武田貞祐) 집안에 양자로 들어가면서 ‘다케다’의 성을 취했다.
불우한 그의 소년시절은 그로 하여금 10여 년 동안 방랑생활을 하게 만든다. 1881년 고향을 등지고 정처 없이 방랑의 길을 떠난 다케다는 일본 전역을 유랑하면서 사찰을 전전했다. 1883년 현성사에 정착하여 출가하면서 불교 수업에 힘을 쏟았다. 동시에 다케다가 아시아 문제, 특히 한국에 대하여 눈을 뜨기 시작했다. 다케다가 이웃 나라에 관심을 가지게 된 직접적 연유가 무엇인지는 명확치 않다. 다만 ‘방랑시대의 친구’인 세키 쇼기치(關常吉)가 여러 차례 한국의 실상을 설명하면서 ‘정한론의 실현’을 위해 노력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다케다에게 설명했다. 다케다와 같은 나이의 고향친구인 세키는 뒷날 고쿠류카이의 회원으로 한국병탄을 위하여 적극적으로 활동하게 된다.
1892년 현성사에서 하산한 다케다는 그 후 상당기간 포교활동보다 사업에 몰두했다. 규슈, 대마도, 부산을 넘나들면서 산림, 개간, 어업 등과 같은 사업을 통하여 ‘일획천금’을 꿈꾸었다. 다케다가 당시 전라남도 순천 앞에 있는 금오도(金鰲島)에서 개간사업을 일으키고 있었던 이주회(李周會: 을미사변당시 명성황후 시해의 한국 측 주범)와 연결되면서 일본측 자본과 어부를 끌어 들여 대대적인 어로사업을 벌렸다.
목적은 보다 활발하고 튼튼한 ‘활동 근거지’를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사업은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이를 계기로 한국의 실정을 몸으로 배웠고 또한 이주회 등을 비롯하여 많은 한국인들과 인맥을 형성할 수 있었다.
명성황후 시해 시나리오에 깊이 개입
다케다가 한국에 머무르기 시작한 1892년 이후 한국의 상황은 급변하고 있었다. 동학운동, 청일전쟁, 삼국간섭, 민비시해, 아관파천 등의 사건이 계속됐다. 이 격동의 시대에 다케다는 한국에서 활동했다.
사업에 실패한 다케다는 일본으로 돌아가기보다 ‘조선낭인’으로 한국에 머물렀다. 부산의 오자키(大崎正吉) 법률사무소를 근거지로 하고, ‘채권을 확보’한다는 명목으로 경성, 경상도, 전라도 등을 여행했다. 전라도에서의 동학운동이 일어나자 겐요샤가 청나라와의 전쟁을 유도하기 위한 ‘방화역’으로 조직한 덴유쿄의 일원으로 행동에 참가했다. 그 후 덴유쿄가 해체되면서 다케다도 귀국하여 다시 현성사로 돌아갔다. 그러나 산사의 생활은 오래 계속되지 못했다.
삼국간섭은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희망에 부풀었던 일본의 꿈을 산산조각으로 만들었다. 동시에 한국반도에서 일본의 주도권이 러시아로 넘어갔다. 일본도 ‘비상대책’을 강구했다. 그 ‘비상대책’은 한국의 정국을 주도하고 있는 민비를 제거하는 것이었다. 일본 정부는 비상대책을 실행할 인물로 미우가 고로(三浦梧櫻)를 선정하고 새 공사로 임명했다. 다케다는 1895년 가을 미우라의 고문격인 정치 소설가이면서 중의원 의원인 시바 시로(柴四朗)의 요청을 받고 현성사에서 내려와 미우라를 동행하여 다시 경성으로 향했다.
경성에 도착한 다케다는 당시 군부협판의 자리에 있던 이주회와 협력하면서 민비를 제거하기 위한 계획에서부터 행동에 이르기까지 깊숙이 관여했다. 민비시해 후 미우라, 시바 등과 함께 히로시마(廣島) 감옥에 잠시 구속되지만,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났고, 그 후 정식재판에서도 무죄로 풀려났다.
다케다가 민비시해 사건에 관여함으로서 대륙진출론자나 조선낭인들 사이에서 그의 명성과 지위가 크게 올라갔다.
특히 미우라 고로, 시바 시로, 다케다 한시 세 사람의 관계는 상당히 가까워졌다.
더욱이 불교에 심취돼 있는 미우라는 다케다에게 특별한 관심을 보였다.
1896년 현성사로 돌아온 다케다는 현성사의 말사(末寺) 동림사(東林寺)의 주지로 자리를 잡았다. 동림사를 운영하면서도 다케다는 미우라 고로의 요청에 따라 민비사건에 연루된 한국 훈련대의 우범선, 이두황, 구연수, 황철 등에게 망명처를 제공하고 그들의 신변 보호에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동림사 주지로 있으면서 다케다는 현성사 사세확장에 크게 기여했다. 다케다는 미우라와 시바의 지위를 활용하는 등 “권력밀착의 특기를 발휘”하여, 현성사 주변의 국유림을 정부로부터 불하받아 관할 영역을 확장했고, 본당을 중축하고, 포교를 확대하는 등 교세를 넓혔다.
점차 교단 내에서 다케다의 지위와 발언권이 강화됐다. 1901년에는 드디어 현성사 31대의 주지의 자리에 올랐다. 그의 나이 38세였다. 이처럼 젊은 나이에 현성사와 같은 대찰의 주지의 지위에 오르는 것은 대단히 드문 일이었다.
이용구 상대역...우치다와 2인3각
우치다 료헤이가 고쿠류카이를 결성할 당시 다케다도 그 취지에 적극적으로 동조했다. 결성 당시 축시도 전했고, 그 후 기관지에 여러 편의 글을 기고했다. 그러나 직접 활동에 참가하지는 않았다.
다케다 한시가 우치다 료헤이와 함께 ‘한국문제’에 직접 관여하기 시작한 것은 우치다와 함께 1906년 9월 다시 한국을 찾으면서 부터다. 이토 히로부미의 ‘요청’에 의하여 통감부의‘촉탁’이라는 직함을 가지고 경성에 부임한 우치다의 역할은 일본의 한국병탄을 “한국인에 의한 합방”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었다. 한국의 사정을 조사한 우치다는 일진회가 이 역할을 담당하기에 가장 적절한 단체라고 판단했다. 또한 ‘동학’이라는 종교적 배경을 가진 일진회 회장 이용구의 상대역으로 다케다 한시가 적격이라고 판단했다. 우치다와 다케다는 ‘한국병탄’이라는 문제를 놓고 다시 의기투합했다. 다케다는 현성사의 주지 자격으로 한국을 넘나들면서 조동종을 포교하면서 병탄 프로젝트에 직접 참여했다. 특히 그는 이용구를 설득하여 한국병탄에 앞장서도록 하는 역할을 성공적으로 해 냈다.
냉철하고도 치밀한 리얼리스트...20세부터 6년간 준비
우치다 료헤이(內田良平): 병탄 프로젝트의 총지휘관
우치다 료헤이는 대륙낭인 2세대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그는 메이지 초기 일본 사회에 충만해 있던 ‘해외웅비의 꿈’을 체계적인 팽창주의 이론으로 발전시켰을 뿐만 아니라, 그 이론의 구체적 실천을 위하여 일본 제국주의의 최전선에서 강력하고도 조직적인 활동을 이끌었다. 그에게서는 초기 대륙낭인의 세계에서 볼 수 있었던 감상주의나 낭만주의의 색채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그는 실용주의와 현실주의를 바탕으로 일본의 대륙팽창을 위한 계획을 세웠고, 냉철하고도 치밀한 계산 아래 조직적으로 활동함으로써 일본의 세력을 대륙으로 팽창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그는 대륙웅비의 시발점이라 할 수 있는 한국병탄의 일등공신이다.
우치다는 후쿠오카의 한 하급무사 가정에서 태어났다. 후쿠오카 일대에서 이름난 검객이었던 아버지는 메이지 유신을 지지하여 이의 성공을 위하여 전쟁(戊辰戰爭, 1867)에 참여했다. 정한론을 열렬히 지지했던 그는 정한파가 주도한 사가(佐賀)의 난과 서남전쟁에 직접 참여했다. 메이지 체제가 안정된 후에도 겐요샤 결성에 앞장서는 등 ‘정한’의 뜻을 실현하기 위한 우익활동에 동참했다.
한일병탄의 총 지휘관 우치다 료헤이
그러나 우치다 료헤이는 어려서부터 숙부인 히라오카 고타로(平岡浩太郞) 밑에서 성장했다. 광산업으로 성공한 규슈 제1의 부호이기도 한 히라오카는 자신의 부를 일본의 대륙확장을 위하여 투자하는 데 인색하지 않았다. 중국대륙과 한국으로 들어가 활동하는 많은 대륙낭인들을 지원했고, 겐요샤가 결성되면서 초대 회장직을 맡아 이끌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중의원으로 정치권에 진출하여 의회 내에서 겐요샤와 같은 노선을 지향하는 단체나 정치인에게도 재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히라오카의 직접적 지원을 받는 동안 우치다는 글과 칼을 함께 배웠다. 숙부의 지도에 따라 그는 날마다 겐요샤의 체육관에서 검술과 유도를 익혔다. 또한 가정교사를 통하여 중국의 고전, 일본외사, 18사략 등을 공부했다. 그러면서 히라오카 곁에서 밤늦도록 흔들거리는 촛불 밑에서 논의하는 국권론자들의 대륙웅비의 경륜을 듣기도 했다. 우치다의 표현을 빌리면 히라오카의 집을 드나드는 사람들은 “칼로 4백여주의 중국대륙을 석권하려는 기개를 가진 지사들이었기 때문에 그들과의 사귐은 나에게 대륙을 향한 웅지”를 심어주었다.
우치다의 나이 20세가 되면서 히라오카의 직접적 후견에서부터 자립하게 된다. 그는 독자적으로 활동 노선과 방향을 정했고, 대륙낭인의 세계에서 점차 명성을 축적해 나갔다.
첫 해외에서의 활동은 청일전쟁의 ‘방화’역이었던 덴유쿄에서의 행동이었다.
청일전쟁과 삼국간섭 후 그는 히라오카의 재정적 지원을 받아 블라디보스토크에 유도도장을 열고 활동의 거점을 마련했다. 3년 동안 그곳에서 생활하면서 간도를 위시한 그 일대를 조사하고 정보를 수집했다. 그의 도장은 대륙낭인과 군 첩보원들의 활동 본거지가 됐다.
우치다는 블라디보스토크의 생활을 통해서 러시아의 ‘실체’가 아시아가 아니라 유럽에 있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그는 보다 정확한 러시아의 실상을 알기 위하여 1897년 시베리아를 횡단하여 수도 페테르부르크에 이르는 긴 ‘조사여행’을 단행했다. 1년 가까이 걸린 이 여행의 결과로 우치다는 그 당시 일본사회에서 러시아 문제에 가장 정통한 인물로 부상했다.
6년에 걸친 한국, 간도, 만주, 시베리아, 러시아 등의 해외활동을 통해서 쌓아 올린 그의 업적으로 우치다로 하여금 국권주의자로서의 위상과 대륙낭인 세계에서의 지위를 확립할 수 있었다. 그는 보다 구체적 활동을 위한 기반으로서 고쿠류카이(黑龍會)를 결성하게 이르렀다.
이토 히로부미의 '촉탁'...민간파트 총사령관
러일전쟁이 종식되면서부터 우치다는 한국병탄이라는 과업수행을 위해서 적극적으로 활동한다.
통감 이토 히로부미의 촉탁으로 한국에 머무르면서 스기야마 시게마루를 통해서 일본 내 병탄 강경파인 야마가타 아리토모를 위시한 군부의 지원을 얻기 위하여 총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다케다 한시로 하여금 일진회가 일본의 ‘합방’을 지지하는 활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도록 조정했다. 우치다는 일본의 한국병탄이라는 프로젝트의 한 가운데서 기획하고 조정한 중심인물이었다. 우치다 료헤이가 없었다면 병탄이 상당히 지연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아카시 모토지로의 회고담은 결코 의미 없는 말이 아니었다.
7. "러시아 품속의 한국을 빼앗자" 인천 러함대 기습
일, 외교 총력전...영일동맹,태프트-가츠라 밀약,러일전쟁 강화
루즈벨트 "일본의 한국지배권 당연"...영-러도 잇달아 승인해줘
7. 절반의 병탄: 을사강제조약(상)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20세기를 전후한 동아시아의 정세는 긴박하게 돌아갔다.
이 소용돌이의 중심에 한반도가 놓여 있었다. 한반도의 주도권 장악을 놓고 일본, 중국, 러시아 사이에 불꽃 튀는 각축전이 벌어졌다. 19세기를 마감하는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했다. 세계의 중심국가라는 ‘중국’의 위상을 무너뜨리고, 일본은 아시아 지배를 향한 첫 걸음을 내디뎠다. 그리고 대륙으로 뻗어 나갈 ‘징검다리’인 한반도를 누가 지배할 것인가를 놓고 일본은 다시 러시아와 힘을 겨루었다. 20세기의 첫 날인 1900년 1월 1일의 <지지신보(時事新報)>는 중국대륙에서의 세력 부식과 한반도 지배의 의지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중국을 개방시키고 조선을 개척해야할 사명"
"일청전쟁의 결과 다음으로 조약개정을 완수하여, 우리나라도 드디어 세계강국의 대열에 참여할 수 있게 됐다...지난 겨울이후 안과 밖에서 일로개전(日露開戰)의 소문이 들려오고 있다. 그 원인을 알 수 없으나 결코 이를 일소(一笑)에 붙일 일은 아니다....더욱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중국의 형세를 살펴볼 때, 세계문명제국의 방침은 중국의 전토(全土)를 개방하여 각자 스스로의 상공업상 이익을 거둘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일본은 다행스럽게도 중국의 동쪽에 가깝게 접하고 있어 개방의 이익을 취하기에 가장 유리한 지위에 있다. 일본은 중국 개방의 솔선자로서 보다 커다란 이익을 취하려는 각오가 무엇보다 필요하다. 역사적으로나 지리적으로 조선이 우리와 밀접한 관계에 있고, 동시에 우리 상공업의 이해와 크고 깊은 관계에 있다는 것은 모든 열강도 인정하고 있다. 그럼으로 우리 일본인은 정상의 범위 안에서 조선을 유도하고 개척하는 데 게을리 해서는 안 될 책임을 지니고 있다. 우리는 결코 이 사명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明治三十三年を迎ふ”)
일본은 중국에서 ‘보다 큰 이익’을 취해야 하고, 한국을 ‘유도하고 개척’하여 지배의 토대를 굳혀야 했다.
한반도(COREE)를 지배하기 위한 3국경쟁, 일본 중국 러시아의 각축을 상징하는 만화 '낚시놀이' (TOBAE, 1887.02.15)
와신상담 10년...영일동맹부터 맺어
청일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일본은 동아시아의 패자로 등장하는 듯 했다. 시모노세키(下關) 조약의 결과로 중국은 한국의 “완전무결한 독립”을 인정했다. 오랜 종주국의 지위를 포기한 것이다. 그리고 일본은 랴오둥(遼東) 반도와 타이완(臺灣), 펑후(澎湖) 열도를 전리품으로 취하고, 2억량의 전쟁배상금을 받아냈다. 총리대신으로 전쟁을 이끌고 또한 시모노세끼조약을 주도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표현에 의하면 전쟁에서의 승리는 “국운이 뻗고 나라의 위광을 드러내는 역사상 가장 명예로운 사건”이었다. 그러나 그 환희의 순간은 너무 짧았다. 남진정책의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던 러시아가 독일과 프랑스를 등에 업고 일본이 대륙진출의 거점으로 확보한 랴오둥반도를 다시 중국에 돌려줄 것을 요구했다. 일본은 목구멍으로 넘어갔던 랴오둥반도를 토해 내야만 했다. 이른바 1895년의 삼국간섭이다.
청일전쟁후 중국이 한국을 포기한 시모노세키(下關)조약의 현장인 슌판로(春帆樓), 협상당사자인 일본의 무츠 무네미츠(陸上宗光, 오른쪽위)와 중국의 리홍장(李鴻章)
민비시해-아관파천..."다 잡은 한국을 잃었다"
러시아는 일본이 전쟁을 통해서 획득한 한국에서의 우월권도 위협했다.
특히 ‘국가적 범죄(national crime)’라고 할 수 있는 명성황후 시해(1895)와 이어서 전개된 고종황제의 러시아 공사관 피신(俄館播遷, 1896)은 일본이 그동안 가까스로 확보했던 한국에서의 우월권을 하루아침에 무너뜨렸다. 이탈리아 외교관 카를로 로제티(Carlo Rossetti)의 표현을 빌리면 이 사건을 계기로 “절대적인 패권으로 조선을 휘어잡은 지 2년 만에 일본은 평소 두려워 해 온 라이벌인 러시아의 벌려진 품속으로 조선의 국왕을 던져버린 꼴이 되고 만 것”이다.
아관파천을 계기로, 러시아는 한국 조정에서 친일파를 몰아내고 친러파를 등장시켜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러시아의 세력 확대는 한국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삼국간섭 후 만주에서도 그 세력을 크게 확대해 나갔다. 일본의 전리품이었던 랴오둥반도의 뤼순(旅順)과 다렌(大連)을 오히려 러시아가 청나라로부터 25년 간 조차하여 이곳을 극동팽창의 전진기지로 개발했다. 숙원의 부동항을 확보한 것이다. 러시아의 세력이 확대되면 될수록 일본은 불안했다.
한반도에서 러시아를 몰아내기 위하여 일본은 10년 동안 ‘와신상담’하면서 전쟁을 준비했다. 군사력을 보강하는 한편, 외교를 통한 국제적 지지 세력을 확대해 나갔다. 특히 1902년의 영일동맹은 일본의 국제적 위상을 크게 강화했다. 이 동맹은 러시아와의 전쟁을 전제하고 체결됐다. 동맹 완성의 주역 하야시 다다스(林董)에 의하면 “일영동맹이 없었다면 러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는 결코 이루어 질 수 없을 것”이라고 할 정도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한반도의 러일전쟁...만주 점령후 '무적의 발틱함대' 완파
선전포고 이틀 전인 1904년 2월 8일 밤 일본의 연합함대가 인천과 뤼순 외항에 정박 중인 러시아 함대를 기습공격하면서 전쟁은 시작됐다.
전황은 일본이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유리하게 전개됐다. 1904년 5월에는 제1군이 압록강을 넘어 쥬렌청(九連城)을 점령하고, 제2군이 랴오둥반도에 상륙을 개시했다. 6월에는 만주군총사령부를 설치하고, 9월에 랴오양(遼陽)을, 그 다음해 1월에는 뤼순, 3월에는 펑텐(奉天)을 점령했다. 그리고 5월에는 쓰시마 해협에서 무적의 발틱 함대를 수장시켰다. 승리의 기선을 잡은 것이다.
포츠머스 조약의 주역들--왼쪽부터 위테, 로젠 러시아대표, 루즈벨트 미국대통령, 고무라, 다카이하라 일본대표
그러나 전쟁이 장기화하면서 일본은 점차 어려운 국면으로 빠져 들었다. 전쟁초기 러시아가 수세에 몰렸던 것은, 타임스(The Times) 기자가 “러시아는 저녁을 위해 싸웠고, 일본은 생명을 걸고 싸운 것”이라고 비유해서 설명했듯이, 총력을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전황이 불리해지자 러시아는 혼잡한 내정문제를 뒤로 미루고, 시베리아횡단철도를 이용하여 병력과 전쟁 물자를 전선으로 수송하면서 전력을 계속 증강해 나갔다. 그러나 일본은 시간이 흐르면서 전투에 필요한 병력과 군수물자를 전선으로 보급하는 데 점차 한계를 드러냈다. 전쟁이 길어질수록 전황은 일본에게 불리하게 전개됐다. 만주군총사령관 고다마 겐타로(兒玉源太郞)가 민간복으로 변장하고 비밀리에 도쿄를 찾아와 전선의 어려움을 설명하면서 “불을 붙였으면 끌 시기 또한 알아야 하는 것 아니냐”며 정책결정자들을 몰아붙였다. 도쿄 정부, 대본영, 전선의 전쟁 지휘관 모두가 조기강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했다.
"제3국의 간섭 막아라" 청일전쟁 교훈 살린 외교전 승리
외교전쟁
러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는 전장(戰場)에서의 승리이기도 하지만, 외교에서의 승리가 더욱 돋보인다. 삼국간섭의 쓰라림을 맛본 메이지의 지도자들은 러시아와의 전쟁과 강화조약에 강대국의 승인이 필요하다는 것을 일찍부터 알고 있었다. 이는 랴오둥반도의 반환이라는 값비싼 대가를 치루고 터득한 국제정치의 교훈이었다. 국민사학자로 인정받는 도쿠토미 소호(德富蘇峰)가 지적하고 있는 것과 같이 “앞 차(시모노세키조약)의 뒤집힘이 뒤차(포츠머스조약)에 훈계”가 됐다.
일본은 러시아와의 전쟁을 준비하면서부터 미국과 영국의 지원을 탐색했다. 그리고 전쟁 터지면서 강화를 준비했고, 러시아를 지지하는 세력이 전쟁에 끼어들지 못하도록 입체적 외교 노력을 폈다. 1902년 영국과의 동맹을 통해서 일본은 제3국이 전쟁에 개입할 수 있는 길을 차단했다. 어전회의에서 전쟁을 결정한 바로 그날 일본은 하버드 대학을 졸업한 가네코 겐타로(金子堅太郞)를 미국으로,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공부한 스에마츠 겐쵸(末松謙澄)를 영국으로, 일본은행 부총재 다카하시 고레키요(高橋是淸)를 미국과 영국으로 파견했다. 전쟁 내내 미국과 영국에 체류한 그들의 역할은 두 나라 국민들에게 러시아의 침략성과 일본의 정당성을 부각시키고, 전쟁자금을 조달하는 것이었다. 특히 하버드에서 루즈벨트 대통령과 동문수학한 가네코는 “미국에 부임한 이래 시종 루즈벨트 대통령과 가까운 거리”에 있으면서 ‘적절한’ 시기에 중재를 당부했고, 루즈벨트로부터 “일본을 위해 적절한 시기에 최선을 다해 주선의 역할에 나서겠다”는 확약을 받았다.
일본으로부터 ‘거중조종’을 요청 받은 루즈벨트 대통령은 1905년 6월 9일 일본과 러시아 두 나라에게 강화조약을 위한 협상을 권고했다. 그리고 8월 10일부터 포츠머스에서 회담이 시작됐다. 회담이 진행되는 동안 일본은 전쟁의 근본원인이고 오랜 숙원사업인 한반도 지배권 확보를 위하여 외교적 노력을 일층 강화했다.
3대강국 승인아래 공개적 한국병탄 작업 박차
일본의 반도 지배권 승인은 미국으로부터 시작됐다. 1905년 여름 루즈벨트 대통령의 특사로 일본을 방문한 태프트(William Taft) 육군 장관은 가츠라(桂太郞) 수상과 한반도 지배권에 관한 밀약을 맺었다. 7월 29일 작성된 이 비밀각서에 의하면 미국은 “일본이 한국에 대하여 종주권을 확립하는 것은 러일전쟁의 논리적 결과”라고 승인했다. 일본의 한국지배를 사실상 인정한 것이다.
1905년 8월 12일 런던에서 개정된 제2차 영일동맹에서 영국은 일본이 한국에서 “정치,군사 및 경제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우월한 이익”을 가지고 있고, 이 이익을 “옹호 증진하기 위하여 일본은 필요한 지도, 감리 및 보호 조치”를 취할 수 있음을 인정했다. 영국이 일본의 한국지배를 승인한 것이다. 그리고 9월 5일 조인된 포츠머스 강화조약에서, 러시아는 일본이 한국에서, “정치, 군사 및 경제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우월한 이익을 가지고 있음을 승인”하고, “일본정부가 한국에서 필요한 지도, 보호 및 감리의 조치를 취하는 것을 방해하거나 간섭하지 않을 것을 약속”했다. 러시아도 한국 지배권이 일본에게 있음을 인정했다.
태프트-가츠라 비밀협약, 제2차 영일동맹, 포츠머스 조약을 통해서 일본은 한국 지배권을 미국, 영국, 러시아로부터 인정받았다. 이제 일본은 강대국의 승인 아래서 한국병탄을 공개적이고도 강압적으로 추진할 수 있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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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절반의 병탄: 을사강제조약(하)
군사협력 의무화 <한일의정서> 강요
강대국으로부터 한국지배권을 인정받은 일본에게 남은 과제는 한국을 요리하는 것이었다.
미국이나 영국에 대한 저자세 외교적 노력과 달리, 한국에 대하여 일본이 취한 행위는 군사력을 앞세운 억압과 위협이었다.
전쟁을 시작하면서 하야시 곤스케(林勤助) 특명전권공사는 한국의 ‘군사적 협력’을 의무화하는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를 강요했다. ‘군사적 제압’ 아래서 이루어진 이 <의정서>에 의하면 일본은 한국 내 어디서든지 “군략상 필요한 지점을 점유”할 수 있게 됐다.
조약체결 직후인 3월에는 이토 히로부미가 한국위문특파대사라는 직함으로 천황의 친서를 가지고 한국을 방문했다. 전쟁 중 나타날 수도 있는 한국의 독자적 행동을 통제하기 위함이다. 명목은 친선이지만 실제로는 위협이었다.
이토는 세 번 고종을 알현했다. 3월 20일 두 번째 알현에서 그는 한국이 “일본과 존망을 함께해 동양의 평화를 유지하는 데 협력한다면 일본은 최대한의 동정을 표명해 영구히 한국의 산과 강이 횡포한 열강의 손아귀에 떨어지지 않도록, 즉 일본 자신의 존망과 마찬가지의 아픔으로 순치보거의 관계로 함께 대처”하겠다고 했다. 한국의 보호국화를 시사하고 있는 대목이다.
'보호국' 방침 공식화...외교-재정권 박탈
일본 정부는 원로회의와 내각회의를 거쳐 5월 31일 <대한(對韓)방침에 관한 결정>을 확정했다. “제국은 한국에 대해 정치·군사상 보호의 실권을 장악하고, 경제적으로 가일층 일본의 이익을 도모한다.”라고 시작하는 이 <결정>은 한국에서 일본이 취할 군사, 외교, 교통, 통신, 척식의 기본정책을 확정하고 있다. 한국을 일본의 보호국으로 만든다는 정부의 방침을 공식화한 것이다. 이 <결정>에 기초하여 8월 22일 한국은 일본이 추천하는 일본인 재정고문과 외국인 외교고문을 받아들이도록 강제한 <한일협약>에 도장을 찍었다. 외교와 재정권을 빼앗긴 한국은 이미 주권을 상실한 것이나 다름없다.
1905년 4월 8일 일본 내각은 “한국에 대한 보호권을 확립하고, 한국의 대외관계를 장악”하기 위한 “보호조약 체결이 필요하다”는 것을 재확인하고, 10일 천황의 재가를 받았다. 그리고 포츠머스 조약이 체결된 직후인 10월 27일 내각은 보호권확립과 실행을 위한 구체적 방법과 절차를 확정했다. 즉 외교권 박탈,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에 사전 통고, 11월초 실행, 조약교섭의 전권을 하야시 공사에게 위임,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 한국주둔군사령관에게 협력명령, 일본군대의 서울집결, 한국이 끝까지 동의하지 않으면 일방적으로 보호권 설정을 한국에 통고한다는 단계적 수순과 구체적 방침을 확정했다.
고종황제 "한국이 아프리카 열등국이란 말이오?"
치밀한 모든 준비는 완료됐다.
집행만이 남았다.
일본 정부는 협상대표는 하야시 곤스케 공사로 하지만, 한국 황제를 설득하고 압력을 가하기에는 함량미달이었다.
보다 거물급 인물이 필요했다. 이미 고종을 몇 차례 알현했고, 일본 정계의 최대 실력자인 이토 히로부미가 또다시 특파대사로 임명했다.
이토 히로부미는 11월 9일 한성에 도착했다. 10일 경운궁의 수옥헌(漱玉軒)에서 고종을 알현하고 천황의 친서를 전달했다. 그리고 15일 다시 하야시 공사를 대동하고 고종을 알현하여 외교권 위임을 핵심으로 하는 협약 초안을 제시했다. 이토가 귀국하여 천황에게 제출한 복명서(<韓國特派大使伊藤博文復命書>)에는 고종황제와의 대화록 (伊藤特派大使內謁見始末)이 들어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고종은 먼저 그동안 자신은 “나의 신료들에게 의존”한 것 이상으로 이토를 신뢰하고 의존했다는 뜻을 전하면서, 초안의 부당성을 지적했다.
“(경이 제시한) 이번 사명의 기초, 소위 외교위임과 같은 것은 (한국이) 형식조차 남아있지 않는 것으로서, 필경 이는 헝가리와 오스트리아의 관계와 같은 것이오? 아니, (한국이) 최열등국, 예컨대 열강이 아프리카를 대하는 것과 같은 지위에 떨어지게 되는 것이 아니오?”
이토는 고종이 협약의 참 뜻을 오해하고 있고, 협약의 본뜻은 한국을 돕기 위한 것이라고 다시 설명했다.
“히로부미(博文)는 폐하의 특별한 대우에 늘 황공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 역시 폐하의 황실과 나라를 위해서 제안하는 것입니다. 폐하를 속이고 일본의 이익만을 취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헝가리에는 황제가 존재하지 않고, 오스트리아가 통치하고 있습니다. 일본과 한국 두 나라에는 각각 군주가 있고 독립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또한 아프리카에 이르러서는 독립국이 하나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를 일한관계에 인용하고 비교하는 것은 지극히 온당치 않습니다. 다만 동양화란(東洋禍亂)의 뿌리를 제거하기 위하여 일본은 한국의 위임을 받아 외교를 담당할 뿐이고, 그 외의 모든 국정은 지금과 같이 한국 스스로가 이끌어 가게 될 것입니다.”
고종 "형식만이라도 권한 남겨주오" 애원 되풀이
고종은 비록 그것이 형식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 할지라도 한국의 독립을 유지하고 싶었다.
이토에게 다시 청했다.
“그 내용의 관계는 어떻게 규정하더라도 거절하지 않겠지만, 다만 형식적으로라도 한국에 권한을 남겨주기 바라오. 이를 위해 경의 알선과 진력을 기대하오. 짐의 이러한 절실한 희망에 경의 충분한 고려를 더하여 귀국의 황실과 정부에 전달한다면 다소 변경을 이룰 수 있지 않겠소?”
복명서는 “이와 같은 폐하의 애소적(哀訴的) 정실담(情實談)이 여러 차례 반복”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토의 대답은 간단하고 명료했다.
“이 결정은 일본정부가 모든 것을 고려하여 내린 것입니다. 추호도 변경할 여지가 없는 확정안입니다...폐하의 결정만 남았습니다. 이를 수락하든 거부하든 이는 폐하의 뜻입니다. 만일 폐하가 거부해도 그대로 시행하기로 한 것이 일본의 결정입니다. 거부할 경우 한국의 지위가 대단히 어려워 질 것입니다. 한층 더 불리한 결과를 각오해야 할 것입니다.”
사태의 심각성과 더 이상 이토와의 대화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고종은 최종결정을 신하와 국민의 뜻에 미루었다.
“짐도 이처럼 중대한 일을 지금 이 자리에서 결정할 수는 없소. 짐이 정부신료에게 자문[諮詢]을 구하고 또한 일반인의 의향을 살펴보아야 할 것이오.”
이토 "국민선동하여 반항하면 안됩니다"
이토는 냉담한 태도로 답했다.
“폐하가 정부 대신들의 자문을 받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고, 저 역시 오늘 폐하의 결정을 요구하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일반인민의 의향을 살핀다는 것은 이상하기 짝이 없는[奇怪千萬]일입니다. 왜냐하면 한국은 헌법정치가 아닌 모든 것을 폐하가 결정하는 군주전제국이 아닙니까? 인민의향 운운 하지만 실은 인민을 선동하여 일본의 제안에 반항하려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는 결코 용이한 일이 아니고, 그 책임이 폐하에게 돌아가지 않을까 염려됩니다....이미 그런 움직임이 있다는 것을 일본 군대가 탐지하고 있습니다.”
고종을 협박하고 있는 것이다.
새벽 2시반 조인..."대궐은 총칼의 숲이었다"
조약은 18일 새벽 2시 반에 조인됐다. 그때까지 이토 대사, 하야시 공사, 하세가와 사령관은 각각 정부의 대신들을 개별적으로 또는 집단적으로 회동하고 협박, 위협, 회유 등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 특히 17일 이토가 하세가와 사령관을 대동하고 입궐하여 대신들을 하나씩 불러 개별적으로 면담할 때 일본 군대가 궁중의 안팎을 포위하여 긴장감을 고조시켰다.『매천야록(梅泉野錄)』은 당시의 분위기를 “일본군들이 대궐에 들어와 철통같이 수옥헌을 포위하고 총칼을 수풀처럼 늘어세웠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영국의 <데일리 메일(Daily Mail)> 동아시아 특파원으로 현장을 지켜본 멕켄지(F.A. McKenzie)에 의하면 “하루 종일 일본군 총검의 덜거덕거리는 소리만 귀에 쟁쟁했다”고 한다. 한 나라의 특사가 군대를 이끌고 궁중까지 들어와 국왕과 대신을 위협하면서 조약에 서명할 것을 강요할 지경에 이르렀으니 나라의 생명이 다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토, 300만원 가져와 뿌려..."을사오적은 갑자기 부자 되다"
일본에 포섭된 이지용(李址鎔), 이근택(李根澤), 박제순(朴齊純), 이완용(李完用), 권중현(權重顯) 등 다섯 대신이 조약체결에 찬성했다.
그들은 한국역사에 을사오적(乙巳五賊)으로 기록되고 있다. 『매천야록』은 그들의 ‘매국’을 다음과 같이 계속하고 있다.
박문(博文)이 이번에 올 때에 금 삼백만원을 가지고 와서 정부에 두루 뇌물을 돌리며 조약을 성립시키려했다. 여러 역적 가운데 조금 약은 자는 그 금으로 농장을 넓게 마련하고 시골에 돌아가서 편히 쉬었으니, 권중현 같은 자가 그렇게 하였다. 근택과 제순 등도 또한 이 금으로 인해서 갑자기 부자가 되었다.
껍질만 남은 나라 "대한제국은 이날로 멸망하였다"
조약의 실체
“한국의 부강지실(富强之實)이 인정될 때까지” 조약이 유효하다는 소위 ‘을사보호조약’(한일협약, 또는 제2차한일협약)은 5개 조문으로 구성돼 있다. 한국의 외교사무 일체를 일본이 감리지휘 한다는 것, 한명의 통감이 황제 직속으로 서울에 주재한다는 것, 그리고 한국 황제의 안녕과 존엄을 보증한다는 것이 그 내용이다. 이는 다만 외교권의 박탈이 아니었다. 장지연(張志淵)이 “오 슬프고 분하다. 우리 2천만 노예동포여 살았는가, 죽었는가. 단기 이래 4천년, 국민정신이 하룻밤 사이에 갑작스럽게 멸망으로 끝나는 것인가. 아 슬프고 슬프도다. 동포여, 동포여”(是日也放聲大哭)라고 곡을 하고 있는 것과 같이 이 조약은 민족사의 종식을 의미하고 있었다.
'국책 2000년 숙원 달성" 일본천황은 이토를 치하
조약체결이 완료됐다는 소식이 도쿄정부에 전달되자 외무대신을 겸하고 있는 수상 가츠라 다로(桂太郞)는 19일 이토에게 “각하의 진력으로 협약이 속히 체결된 것을 경하 드리며 [정부는] 이에 깊이 감사”드린다는 전문을 보냈다. 다음날에는 “짐은 경의 깊은 노고에 크게 치하[嘉賞]”한다는 천황의 ‘칙어(勅語)’가 전달됐다. 이어서 20일 일본정부는 미국과 영국을 위시한 모든 나라에게 조약사실을 통보하고, 한국과 관련된 일체의 외무업무를 일본이 담당한다는 것을 알렸다. 이로써 일본은 하야시 공사가 말하고 있는 것과 같이 “그동안 고심해 온 대한국책 2000년의 현안을 완성”했다.
고종 "통감으로 다시 와주기 바라오" 이토에게 당부
업무를 완수한 이토는 29일 귀국길에 오른다. 그 전날 귀국인사차 궁중을 찾아온 이토에게 고종은 “경의 머리를 보니 흰 머리칼과 검은 머리칼이 반반씩이구려. 백발은 그동안 일본황제폐하를 보필함에, 한 몸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충성을 다한 징표이겠지요. 나머지 검은 머리칼이 희어질 때까지 짐을 위하여 마음을 열고 성심성의껏 힘을 다해주기 바라오[啓沃의 勞]”라고 정담을 보냈다. 그러면서 고종은 “짐은 경이 통감으로 다시 서울에 오기를 간절히 바라오.”라고 당부했다. 을사강제조약 조인 과정에서 협박과 수모를 당한지 열흘 후다. 고종의 의도가 무엇인지 가름 할 수 없다. 고종의 당부가 외교적 발언일까? 모르는 사람이 통감으로 오는 것보다는 그래도 이토가 낫다는 판단에서일까? 아니면 마음 한 구속에 이토에 대한 어떤 친근한 정이 있어서일까? 그러나, 뒤에서 볼 수 있듯이, 고종은 이토에게 ‘啓沃의 勞’를 당부한지 16개월 만에 그의 강압에 밀려 결국 황제의 자리에서 쫓겨나는 수모를 감내해야만 했다.
1905년 11월 을사조약 성공을 기념하며, 이토 히로부미(오른쪽)와 하야시 공사
"병탄 완결할 사람은 이토뿐" 한국통감으로 부임
일본정부는 12월 20일 통감부의 관제를 발표하고 21일 이토 히로부미를 통감으로 임명했다.
한국은 물론 서양제국을 상대하면서 ‘병탄’이라는 막중한 통감의 임무를 수행해낼 수 있는 인물은 경력이나 능력으로 이토를 따를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데 이론이 없었다. 이토는 한국에 주둔하는 일본군의 지휘권 장악을 조건으로 통감직을 수락했다. 통감직을 수행함에 있어서 군부의 간섭이나 관여를 차단하겠다는 뜻이다.
일본군은 천황 직속으로 다른 문민은 지휘할 수 없는 특수한 영역에 존재했다.
실질적 통수 책임자인 참모총장이 천황의 칙명을 받아 지휘하게 돼있다.
일본군이 군부의 영역을 벋어나 문민의 지휘를 받게 된 것은 전무후무한 일이다.
이토에게 이처럼 막강한 권한을 부여한 것은 한편으로는 한국병탄의 과업이 그만큼 중대했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이토의 위세가 당당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9. '통감' 이토 히로부미
한국 왕래 22차례...통감직 3년반
1906년 2월 1일 한국통감부가 문을 열었다.
이토 히로부미는 2월 20일 도쿄를 출발하여 이세(伊勢)신궁을 참배하고, 28일 시모노세키에서 군함[和泉]을 타고 현해탄을 건넜다. 3월 1일 부산에 도착하여 다음날 통감부에 모습을 드러냈고, 9일 고종황제를 알현하고 부임인사를 올렸다. 3년 반의 통감 업무를 시작한 것이다.
메이지 지도자 가운데 이토 히로부미 만큼 한국과 인연이 깊었던, 그리고 한국에 오래 체류한 사람도 찾아보기 쉽지 않다. 1873년 ‘정한’문제가 중요한 정책 이슈로 등장했을 때 이토는 반(反)정한 편에 섰다. 그리고 기도 다카요시(木戶考允)와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를 도와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의 정한론을 무산시키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인물이다. 그러나 러일전쟁 후, 그가 30년 전 반대했던 ‘정한’ 프로젝트를 직접 담당하면서 총지휘하는 위치에 이르렀다.
이토 히로부미는 그의 생애에 22차례나 현해탄을 넘나들었다. 그가 한국 땅에 첫 발을 밟은 것은 1888년이다. 사이고 츠쿠미치(西鄕從道)와 함께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를 시찰하러 가는 길에 부산, 원산 등 동해안의 항구를 거쳐 갔다. 그러나 당시 서울에 머물렀던 흔적은 없다. 두 번째 한국방문은 1889년 한국과 만주를 유람하는 개인 여행이었다. 처음으로 서울을 보고, 고종황제를 알현했다. 비록 관광객으로서의 여행이었지만 수상과 추밀원 의장을 역임한 이토에 대한 대접은 융숭했다. 세 번째는 러일전쟁 발발 직 후 한국을 통제하기 위하여, 네 번째는 을사강제조약을 총지휘하기 위한 천황의 특별대사로, 그리고 다섯 번째 이후는 통감으로 현해탄을 오갔다. 이토는 1905년 말 이후 약 3년 반 가까이 막강한 권력을 가진 통감으로 한국에 머무르면서 ‘정한’의 길을 닦았다. 그러나 이는 또한 하얼빈 역에서 자신의 삶의 종막을 준비하는 기간이기도 했다.
성도 없는 빈농의 아들, 혁명운동에 몸을 던지다
입신
이토 히로부미는 1841년 10월 22일(음력 9월 2일) 조슈(長州, 오늘의 야마구치(山口)현)의 츠가리무라(束荷村)라는 빈촌(貧村)의 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의 이름은 리스케(利助). 히로부미(博文)라는 이름은 메이지 유신 후 그가 정부의 고위직을 맡으면서 쓰기 시작했다.
그의 부친의 이름은 쥬조(十藏). 성(性)씨는 오치(越智)라는 설도 있고 하야시(林)라는 이야기도 있으나 어느 것도 확실치 않다. 무사가 아니면 성이 없었던 당시로서는 그리 이상한 것도 아니지만, 성씨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 없을 정도로 보잘것없는 가문이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한 정보도 안 되는 농지를 일구면서 살아야 하는 쥬조의 집안은 생계가 어려울 정도로 찢어지게 가난했다.
리스케가 6살 때 아버지 쥬조가 홀로 출향(出鄕)하여 조슈의 수도라고 할 수 있는 하기(萩)로 흘러들었다. 온갖 궂은일을 하지 않으면 생활을 영위할 수 없는 고달픈 삶이었다. 그러나 그가 번(藩)의 창고 관리인인 이토 나우에몬(伊藤直右衛門)의 눈에 들어 그의 머슴살이를 하면서 최저의 생활이지만 그런대로 안착할 수 있게 됐다. 처와 아들을 하기로 불러와 다시 가정을 꾸렸다. 리스케가 9살 때였다. 후사가 없었던 이토 나우에몬은 충실한 종복인 쥬조 부자를 1854년 양자로 삼았다. 비록 야우에몬이 무사계급의 최하위인 아시가루(足輕-武家에서 평시에는 잡역에 종사하다가 전시에는 병졸이 됨)에 불과했지만, 그의 양자가 되면서 쥬자 부자도 무사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다. 리스케도 이름을 이토 슌스케(伊藤俊輔)로 바꾸었다. 비록 그것이 최하위의 계급이지만 평민 하야시 리스케가 무사 이토 슌스케로 신분상승한 것이다.
메이지유신의 정신적 지주이자 이토히로부미를 비롯한 조슈의 많은 인재를 키워낸 松下村塾의 요시다 쇼인(吉田松陰)
메이지 유신의 스승 요시다 쇼인
그러나 그가 일본의 중요한 인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막말 최대의 사상가라고 할 수 있는 요시다 쇼인(吉田松陰)과 유신3걸(維新三傑)의 한 사람인 기도 다카요시(木戶考允)와의 만남에서부터 시작된다. 이토는 요시다 쇼인의 쇼카손주쿠(松下村塾)에서 존왕양이(尊王攘夷)의 사상을 배우고, 기도 다카요시의 ‘종자(從者)’로서 막말(幕末)의 ‘지사’활동에 참여하면서 유신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1863년 남보다 한 걸음 앞서 영국에 유학할 수 있는 기회를 거머쥠으로서 출세의 기반을 닦았다.
영국체류가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서양의 위력은 상상을 초월한 것이었다. 서양의 위압 속에서 일본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서양을 배척[攘夷]하는 것이 아니라, 막부를 무너뜨리고[倒幕] 새로운 체제를 세우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일본의 정국이 존왕(尊王), 양이(攘夷), 좌막(佐幕), 도막(倒幕)의 소용돌이 속에서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을 때, 유학을 중단하고 귀국한다. 그리고 그의 주인인 기도 다카요시를 도와 도쿠가와 막부를 무너뜨리고 메이지 유신을 이룩하는 데 기여한다.
바쿠후(幕府)정부의 허락없이 영국으로 유학(1863)을 떠난 5명. 뒷날 이들을 가리켜 '죠슈Five'라고 불렀다. 왼쪽에서 시계방향으로, 이오우에 가오루(井上馨), 엔도 킨스케(遠藤謹助), 이노우에 마사루(井上勝),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야마오 요조(山尾庸三)
총리 4차례...헌법 만들고 청일-러일전쟁 주도
유신운동에 참여한 경력과 서양의 경험을 가진 이토는 메이지 정권 수립 후 ‘순풍에 돛단 듯’ 출세의 길을 갈 수 있게 됐다. 특히 유신 3걸이라는 사이고 다카모리, 기도 다카요시, 오쿠보 도시미치가 모두가 죽게 되는 1878년 이후, 이토는 메이지 정권 안에서 확고부동한 지위에 오르게 된다. 그는 정부조직을 제도화하고 법규화 함으로써 행정부와 관료의 기틀을 마련했다. 헌법을 조사·연구하기 위하여 스스로 독일에 유학(1882)하여 장기간 체류하면서 유럽의 헌법을 공부한다. 그리고 메이지 헌법을 기초하고 천황제 국가체제를 확립했다. 그는 1885년 내각제가 실시된 이래 네 차례 총리대신을 역임하며 내각을 이끌었고, 세 차례 추밀원(樞密院) 의장, 귀족원 의장, 원로(元老)의 일원으로 메이지 일본의 중심에 서 있었다. 물론 청일전쟁, 러일전쟁과 이어진 강화조약을 직접 또는 배후에서 주도했다. 뿐만 아니라 1900년 보수정당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세이유카이(政友會)를 창당하여 정당정치의 길을 열기도 했다.
이토는 통감으로 부임하는 1906년 이전, 네 번의 총리대신을 위시하여 일본에서 중요하다는 모든 직책을 두루 거친 인물이다. 그가 메이지 국가건설의 일등 공신이라는 데 그 누구도 이의를 달지 않았다. 이토는 당시 국내에서 가장 유능한 정치인이면서 외교가로 인정받았을 뿐만 아니라, 서양에서도 “동양에서 가장 위대한 경륜가(statesman)"라고 평가받고 있었다. 천황으로부터 절대적 신임을 받고 있고, 동양에서 가장 능력 있는 정치가로 평가 받는, 그리고 일본 최대의 실력자인 이토를 한국의 통감으로 임명한 까닭이 무엇일까? 한국병탄은 일본 최대의 국가목표임을 뜻하고 있고, 또한 병탄 프로젝트가 본격적으로 가동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항상 대안을 가지고 있는 사람
성품
격동의 시기에 이토가 이처럼 중요한 위치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우연이나 시대의 산물만은 아니었다. 그의 스승인 요시다 쇼인이 “대단한 주선가”가 될 자질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했던 것처럼, 이토는 사람들에게 호감을 주는 성품을 가지고 태어난 것 같다. 그는 어려서부터 남의 미움을 사는 일이 별로 없었고, 또한 항상 윗사람 눈에 들게 행동했다. 이토는 “선배로부터 사랑받고 그들이 쓰기에 편리한”인물이었다.
요시다 쇼인의 보살핌, 기도 다카요시의 보호, 오쿠보 도시미치의 후원, 이와쿠라 도모미의 지지를 얻을 수 없었다면, 같은 시대를 살았던 도쿠토미 소호가 평가하고 있는 것과 같이, “메이지시대의 태산교악(泰山喬嶽)”과 같은 존재로 성장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토가 스스로 노력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다. 그는 동시대 인물 가운데 누구보다도 지위 상승을 위한 노력가였다. 출신이 미천했기 때문에 더욱 그랬는지도 모른다. 그가 더 오를 수 없는 지위까지 오른 것은 끊임없는 노력의 결과이기도 했다. 이토는 스스로 출세의 비결 이렇게 말하고 있다. 출세를 하려면 “지위 높은 선배가 의존하지 않을 수 없는 존재가 되어야한다....(그러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노력과 철저한 준비가 있어야 한다. 내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오쿠보 도시미치 내각의 참의경보로 임명됐을 때 내가 내각에서 제일 어렸다. 이미 고인이 됐으나 그 때 산조 (사내토미)나 이와쿠라 (도모미), 또는 기도 (다카요시)나 오쿠보 등이 필요로 하는 문제의 해답을 사전에 치밀하게 조사하여 준비해두었다가 그들이 필요로 할 때 적시에 제시하고는 했다. 이런 일이 두 번 세 번 반복되다 보니 드디어 크고 작은 정치의 중요한 정무에 참여하게 됐다. 비결이라면 이런 것이다.” 즉 항상 대안을 만들어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훈장 차고 칼 차기를 좋아한 명예욕
동시대 인물들의 이토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다. 그러나 그가 공명심과 명예욕이 강했고, 대단히 관료적이었다는데 모두가 일치하고 있다. 능력은 평가받았지만, 존경의 대상은 아니었다. 출신이 미천했기 때문에 자신의 외양을 더욱 권위적으로 치장했는지 모른다. 이토와 동시대의 한 정치평론가에 의하면 “훈장을 만든 것도 이토 공(公)이고 귀족을 만든 것도 이토 공이다. 이토 공은 명예를 표창하는 기구(器具)를 많이 만들었다. 그리고 자신이 가장 많이 취했다”라고 할 정도로 권위를 갖추는 외양을 좋아했다. 그는 사람들의 존경을 기대하고 늘 훈장을 많이 단 제복입기를 즐겨했고, 무관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공식석상에는 항상 대검(帶劍)을 즐겨했다.
많은 훈장과 칼을 찬 이토. 공식석상에는 늘 이처럼 훈장과 칼을 꼭 찼다.
그는 또한 호사스러운 생활을 즐겼다. 그의 주인이기도 했던 기도 다카요시가 옛날을 회상하면서, 이토는 “에도 번의 저택에서 나의 수발을 들 때 나를 찾아오는 무사들을 위해 내놓은 술안주용 두부 값이 한 달에 한량 세 푼이나 된다고 말하곤 했는데,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한 갑에 여덟 량이나 하는 담배를 닷새 만에 다 피워버리고, 열다섯 량이나 하는 모자를 쓸 정도로 사치한 생활을 하고 있다.”라고 이토의 사치스러움을 은근히 탓했다.
그러나 이토는 국내정치를 지배하기 위하여 파벌을 키운다거나, 또는 권력을 이용한 축재와는 거리가 멀었다. 이토는 그의 생애의 최대의 동지면서 정적이었던 야마가타 아리토모와 자주 비교된다. 조슈의 미천한 집안에서 태어나 함께 유신운동에 뛰어 들었던 두 사람 모두 요시다 쇼인 밑에서 동문수학했다. 유신 후 이토가 관료제를 다듬으며 정치인으로 성장해 나갈 때, 야마가타는 육군을 건설했다. 야마가타는 군을 배경으로 거대한 파벌 망(網)을 궁중, 정계, 관료의 세계로 넓혀나가면서 국내정치의 향방을 좌우했다. 그러나 이토는 파벌에 초연했다. 그리고 국내정치보다 대외정책에 더 많은 관심을 가졌다.
메이지 초기 야마가타를 위시하여 많은 정치인들은 너나할 것 없이 권력형 부정축재에 관여됐고, 또한 권력자의 이러한 행태가 어느 정도 사회적으로 인정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토는 이상할 정도로 부에 집착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동시대의 대부분의 권력자들처럼 골동품, 분재, 다도, 별장 등에도 관심이 없었다. 야마가타의 별장[無隣庵]에 비하면 이토의 별장[滄浪閣]은 초라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이토가 노년에 검(劍)에 흥미를 가지고 수집하기는 했으나 별다른 취미가 없었다. 독서 이외의 취미가 있었다면 ‘여색(女色) 즐기기’였다. 메이지 천황도 인정했던 그의 ‘여성편력’은 비밀도 아니었고 숨기려하지도 않았다.
"明治好色一代男, 食道樂, 大勳位伊藤侯爵." 이토를 식도락가에 비유하여 '여자 식도락가'로 풍자한 만화. 그중에는 여승(女僧)도 보인다.(滑稽新聞, 1903.9.5)
그는 스스로가 “나는 본래부터 욕심이 많지 않다. 저축 같은 것에는 털끝만큼도 관심이 없다....나는 크고 좋은 집에서 산다는 것도 별로 생각해 본 일이 없고 축재를 바라지 않는다. 다만 국사를 돌보며 틈틈이 시간이 있을 때마다 여자[藝妓]를 상대하는 것이 제일 좋다”라고 자신의 ‘여색취미’를 거리낌 없이 밝히기도 했다. 이토는 겨우 160cm(5.3尺)에 이르는 단구(短軀)의 체격을 가졌다. 그러나 그는 “강장자(强壯者)의 표본”이라고 할 정도로 정력이 강한 건강을 지니고 있었다. 같은 시대의 정치인이었던 오자기 유키오(尾崎行雄)에 의하면 이토의 “최대의 결점은 그의 호색성”이었다. 이토는 “늙은 기생, 어린 기생 가리지 않는다. 그러나 일단 싫증나면 곧 잊어버리고, 자신이 관계했던 여자들을 사람들에게 기탄없이 이야기”하는 괴팍한 ‘여색습관’을 지닌 호색한이었다.
이토가 정부의 중책을 맡고 권력의 상층부로 올라가면서 매사에 신중한 태도를 취했다. 그러나 젊은 시절에는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과격한 성품의 소유자였다. 양이운동이 한참일 때 외국영사관을 앞장서서 방화하거나, 필요하다면 살인도 서슴지 않았다. 총리의 지위에 오른 인물로서 전전과 전후를 통틀어 전쟁터에서 적군을 죽인 것이 아닌 ‘암살’을 자행한 인물은 이토가 유일한 존재이다.
그는 늘 실리적 점진주의를 바탕으로 국가정책을 다루었으나, 적절한 시기에 이르렀다고 판단하면 자신의 결정을 과감하게 밀어붙이는 결단력과 과단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가 을사강제조약 당시 고종을 위협하기를 주저하지 않거나, 또는 헤이그 사건 이후 고종을 황제의 자리에서 몰아낼 때 보여 준 태도가 그의 이러한 성품의 한 면을 잘 설명해주고 있다. 그는 포용력이나 남을 배려하는 따뜻한 인간미는 부족했고, 약자에게 강하고, 강자에게 약한 성격을 지녔던 인물이다.
일본 근현대사의 대가로 알려진 오카 요시다케(岡義武)는 이토의 한국병탄정책과 하얼빈에서의 그의 죽음을 일본 외교의 특성과 이토의 성품과 연결하여 설명하고 있다. 오카에 의하면 메이지 대외정책의 특성은 “[구미의] 여러 나라에 대한 관계는 대단히 신중하여 일반적으로 종속적 색채”가 짙었으나, 한국이나 중국에 대해서는 “대단히 공세적 태세”였다. 그리고 이와 같은 일본 외교의 특성을 한 개인에 비유해서 본다면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이토라는 사람을 닮았다. 통감 취임전후 이토가 한국에서 연출한 역할을 되돌아본다면 그는 우리나라의 ‘대한국책’을 집행하는 데 썩 잘 어울리는 대표자였다”라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오카는 “이토는 이 ‘국책’을 전적으로 자신의 성격대로 수행했다. 한국에 있어서 그는 정말로...‘전투적 인사’ 였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흉변(兇變)을 자초했다”고 결론짓고 있다. 즉 강한데 약하고, 약한데 강한 이토의 성품과 일본의 외교노선이 결국 그로 하여금 하얼빈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했다는 것이다.
하얼빈 10.26...안중근 의사 손에 쓰러진지 100년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 역에 쓰러진 것이 1909년 10월 26일이니 꼭 100년을 맞이하고 있다. 지난 100년 동안 국제정세, 동아시아의 형세, 한국과 일본의 관계 모두가 엄청난 변화를 맞이하고 있다. 세계사는 제국주의와 냉전의 시대를 마감하고 세계화와 지역화가 국제적 흐름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아시아에는 동아시아 공동체 논의가 다시 등장하고 있는 가운데, 굴욕의 19세기와 20세기를 보낸 중국이 G-2로 부상하면서 일본의 위협적 존재로 다가오고 있다. 메이지의 영광에서 주권상실로 전락했던 일본은 패전의 잿더미를 딛고 다시 세계 제2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했으나 21세기를 향한 국가진로 모색에 혼미를 거듭하고 있다. 식민지 시대를 마감했으나 한국은 그 시대의 후유증으로 남과 북으로 분단됐고, 북쪽의 절반은 아직 일본과 식민지 시대의 연속선상에 위치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이토가 그의 인생의 마감 길에 남긴 아래의 시구는 한일관계에 어떤 의미를 시사하고 있는 것일까?
乾坤不變(천지는 변하지 않고)
古今相通(어제와 오늘이 서로 통하고 있다)
魚躍淵水(물고기는 깊은 물에서 뛰어 오르고)
鳶飛太空(솔개는 큰 하늘을 나르고 있다)
10. 이토의 '한국 지배' 전술
언론 활용한 홍보의 귀재...주필들 협조 약속
한국으로 부임하기 직전인 1906년 1월 30일 저녁, 이토는 주요일간지의 주필들을 레이난사카의 관저로 초청했다. 메이지시대를 통틀어 이토만큼 언론의 중요성을 일찍이 터득하고, 언론과 공존했던 정치인도 그리 흔치 않다. 그는 언론과 친밀한 관계를 지속하기 위하여 언론계 출신인 후루야 히사츠나(古谷久綱)를 1900년 이후 비서관으로 채용할 정도로 언론의 역할을 중요시했다. 그는 필요할 때마다 언론을 적절히 활용하여 자신의 정책노선과 입장을 밝힘으로서 정치적 입지를 강화했고, 또한 여론의 지지를 받으려고 했다. 통감으로 재임하는 동안에도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이토는 국내외기자들에게 상황을 설명하면서 통감정치의 정당성을 홍보하곤 했다. 통감으로 부임하기 전 주요언론사의 주필을 초청한 것도 언론을 통해 통감의 시정방침을 밝히고 언론의 지지를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주필들과의 간담회에서 이토는 통감으로서 자신이 구상하고 있는 시정방침을 밝히고 언론의 협조를 당부했다. 그는 먼저 그동안 언론에서 비판해 온 을사강제조약의 ‘추상성’에 대해서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그에 의하면 5개조로 된 협약이 비록 간단하고 추상적이기는 하지만, “운영의 묘”를 살리면 “협약의 정신을 충분히 관철”시킬 수 있다는 것이었다. ‘협약의 정신’이 무엇인지 명시적으로 밝히지는 않았으나, 그가 제시하는 ‘시정방침’에 미루어 짐작하기 그리 어렵지 않다.
한국 내정 장악, 주둔군 증강, 일본인 이민 장려...
이토는 “조선보호의 요점”은 “외교, 국방, 시정개선 세 분야”에 있다는 것을 밝히면서, 특히 “시정개선”을 강조했다. 즉 통감부의 업무가 한국의 대외관계를 전담하는 것은 물론, 이와 함께 ‘시정개선’이라는 이름으로 한국의 내정과 국방도 담당한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일본의 인구가 증가하고 있는 것을 고려하여 일본인의 한국이주를 본격적으로 검토해야 한다는 것도 자신이 구상하고 있는 방안의 하나라고 밝혔다. 한국의 내정관여, 주둔군 증강, 이민 장려 등 이 모든 것은 협약에 명시한 ‘대외관계’의 범위를 벗어나는 것이다. 이토가 말하고 있는 ‘협약의 정신’이 무엇인지 잘 드러내고 있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이토는 이와 같은 자신의 구상을 실현함에 있어서 언론에게 두 가지 협조를 당부했다. 하나는 조급한 결과를 기대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한국사회에 만연돼 있는 “부패와 비리는 뿌리가 깊고 고질화”돼 있기 때문에 ‘점진적’ 개선이 필요했다. 짧은 시간 안에 눈에 보이는 결과를 취하려고 하면 예기치 못했던 부작용과 보다 더 큰 어려움에 직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소위 이토의 ‘실리주의적 점진주의’다.
또 다른 당부는 한국에서 활동하거나 또는 한국을 내왕하는 일본인들이 보다 도덕적으로 행동할 수 있도록 언론이 선도해 달라는 것이다. 이토에 의하면 그동안 일본인이 한국에서 취한 “비도(非道)의 거동(擧動)”은 많은 문제를 일으키고 있어 한국인이 “밖으로는 굴종을 치장하고, 안으로는 원한의 정을 키우게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앞으로 한국으로 이주할 일본인들을 잘 선별하고, 정부당국도 이에 세심한 배려가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다이쇼(大正) 데모크라시 시대 자유주의 정치인으로 정당정치 발전에 기여한 당시 <마이니치(每日)신문>의 시마다 사부로(島田三郞) 주필은 참석한 언론인 모두를 대표하여 이토의 방침을 “전적으로 지지”하면서 지원을 약속했다. 아울러 “도저히 일본인이라고 할 수 없는 인물을 신영토에 관리로 채용하는 경우가 그동안 적지 않았는데, 통감의 효과적인 통치를 위해 그와 같은 정폐(情弊)를 단절”할 것을 당부했다.
을사조약에 없는 '총체적 지배' 구상...낭인들 의견 수렴
을사강제조약 완성 후 통감으로 부임하기까지 3개월 동안 이토 히로부미는 한국사정에 밝은 외무관리, 언론인, 학자 등은 물론 대륙낭인을 포함한 재야인사들을 만나 ‘보호정치’에 대하여 다양한 의견을 수렴했다. 주도면밀한 이토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한국 통치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자신의 구상을 다듬어 나갔다. 그는 통감으로 부임하면서 이미 통치를 위한 청사진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청사진이 구체적으로 문서화 된 것은 없다. 그러나 이토가 부임하면서 신속히 취한 초기의 조치들을 종합해 보면, 그의 통치구상과 전략이 무엇인지 미루어 짐작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한국 통감 제복을 입은 이토 히로부미
‘운영의 묘’를 살리기 위한 이토의 통치전략은 ‘실리적 점진주의’를 그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한국의 외교권은 물론 ‘내정’의 실권을 서서히 잠식하는 것이었다. 그는 통감으로 부임하면서부터 고종은 물론 한국 내각에 통감부가 내정에 관여한다는 뜻을 거듭 밝혔다. 이토에 의하면 ‘동양화란(東洋禍亂)의 근원’인 한국을 바로 세우기 위해서는 전반적인 국정개량이 필요했다. 동전의 양면과 같은 외교와 내정을 분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토가 고종에게 통감 부임인사를 하는 자리에서 “한국이 오늘의 쇠운을 만회하고 독립부강의 영역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국정의 개량이 가장 시급한 과제입니다.”라고 강조했다. 그리고 그가 강조하는 ‘국정의 개량’이라는 것은 “황실의 존엄과 강령 유지, 외교 관리, 시정개선, 국토방위”라는 것을 명확히 했다. 이는 외교만이 아니라, ‘총체적 지배’를 의미하고 있었다.
한국 내각 유지 "신분 보장 할테니 안심하시오"
이토는 ‘총체적 지배’를 위한 ‘운영의 묘’를 크게 세 방향으로 구상하고 있었다.
첫째는, 신문사 주필들과의 간담회에서도 밝히고 있는바와 같이, 그는 과격한 변화보다는 먼저 안정을 유지하면서 점진적 개선과 변화를 모색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그는 통감의 수족이 되어 실질적으로 정책을 집행할 한국정부의 내각과 정치권의 안정을 중요시 했다. 내각의 편제와 구성원을 바꾸지 않고 그대로 유지함으로써, 지배계층의 동요를 사전에 차단하려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신분을 확실히 보장해 줌으로써 더욱 친일의 성향을 배양하려고 했다.
을사강제조약이 조인된 직후 이토가 주최한 간담회에서 그는 한국정부의 각료들에게 다음과 같이 신분보장을 약속했다.
“시정개선을 해 나감에 있어서 필요한 것은 일반인심을 안정시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통감부는) 지금의 내각대신을 교체하지 않고 어디까지나 현재의 내각으로 일치협동하여 국정을 이끌어 나가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폐하께서도 현상유지를 원하고 있고 또한 대신들을 신뢰하고 있습니다....본인도 폐하와 같은 뜻으로서 현재의 각 대신을 변경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대신 여러분도 안심하고 국리민부(國利民富)를 위해 진력해주실 것을 당부합니다.”[伊藤大使 對話錄, 1905.11.29]
한국 각료들과 가진 최초의 공식회의에서도 이토는 “현재의 각 대신은 결정적인 과실을 저지르지 않는 이상 본인은 충분히 지원할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모두 안심하고 각자의 위치에서 직무에 충실해 줄 것을 당부합니다.”라고 약속했다. 대신들의 신분보장을 통감으로서 다시 확약한 것이다
실제로 이토는 1907년 5월 박제순 내각을 이완용 내각으로 교체할 때까지 약 16개월 동안 기존의 내각을 그대로 이끌고 가면서 통감통치의 체제를 굳혀나갔다.
강대국 간섭 피하려 "한국내각이 관장" 외형 갖춰
‘운영의 묘’를 위한 이토의 둘째 구상은 ‘보호통치’에 적합한 통치 메커니즘을 구축하는 것이었다.
메이지 국가를 건설하면서 통치를 제도화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던 이토로서는 새 영역에 대한 지배의 틀과 형식을 구상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토가 보다 더 심각하게 이 문제를 검토한 것은 강대국을 의식했기 때문이다. 1905년의 을사강제조약은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만을 장악하는 것으로서, ‘내정’과는 무관한 것이었다.
조약 자체는 물론, 이토 또한 ‘내정’은 종전과 같이 한국인이 관장한다는 것을 여러 차례 내외에 공개적으로 발언했다.
그러나 일본 정부나 이토가 의도하고 있었던 것은 한국의 외교권만을 장악하는 것이 아니라, ‘총체적 지배’였다.
즉 내정의 실권도 장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
그러나 강대국을 늘 의식해 온 이토로서는 통감부가 한국 내정을 직접적이고도 공개적으로 관장할 경우 한국내의 반발을 격화시킬 뿐만 아니라, 이는 국제적 문제로 비화할 수 있다는 점을 우려했다. 일본이 비록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승리함으로서 강대국 대열에 들어섰고, 미국, 영국, 러시아를 위시한 서양강대국들이 한반도에서 일본의 ‘탁절한’ 지위를 인정했다 하더라도, 통감부 지배를 시작할 1906년 일본은 여전히 불평등 조약 속에 있었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이토의 염려가 결코 지나친 기우라고만 할 수 없다. 더욱이 삼국간섭을 체험한 이토로서는 당연한 염려였다.
이러한 판단 속에서 만들어낸 것이 이토 특유의 통치 메커니즘이다.
즉 외관상 또는 형식적으로는 한국의 황제와 정부가 내정을 통치하지만, 실질적으로는 통감과 일본이 지배하는 체제를 구축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서 이토는 두 개의 통로를 마련했다.
하나는 전반적인 통치의 기저를 논의하기 위한 황제와의 협의를 정례화 하는 것이었다. 통감정치를 협의하기 위해 ‘알현’이라는 절차를 거처 이토는 먼저 자신이 구상하고 있는 개략적인 시정 방안과 방향을 고종에게 ‘보고’하고 협의한다는 것이다. 대외적 명칭은 ‘알현’이고, 형태는 ‘협의와 보고와 재가’이지만, 실은 자신의 정책을 고종에게 ‘통보’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다만 외형상 한국의 최고지배권자인 황제와 협의해서 통치한다는 것을 보이기 위한 형식에 불과한 것이다. 물론 이토가 제시한 방향에 대한 황제의 거부는 통하지 않았다. 이는 처음부터 드러났다.
고종의 거부에 단호 "누구도 이의 제기할수 없소"
1906년 3월 9일 통감으로 부임한 후 최초의 ‘알현’에서 이토는 시정개선 대상으로 금융, 교육, 군사제도, 궁중내부의 문제, 궁중의 재정문제 등 다섯 가지를 제시했다. 그리고 시정개선을 ‘즉시’ 착수하고, 한국 황실과 정부가 어려움을 감내할 일, 입법과 행정 개량, 차관 도입, 보통교육 실시, 경찰력 확장 등 여섯 가지의 방안을 제시했다. 개선의 대상이나 방법 모두 외교와는 무관한 국내통치에 관한 사항이었다.
고종황제는 이토의 방안을 그대로 수락하지 않았다.
“시정개선에 관한 것은 짐이 적절하게 정부대신과 충분히 협의하도록 하겠소. 그리고 정부대신들이 그 결과를 보고할 때마다 짐이 세밀히 검토하고 재가하여 시행토록 할 방침이오.” 이는 고종과 대신이 국내통치를 담당하겠다는 뜻을 밝힌 것이다.
그러나 이토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토는 고종에게, “통감의 임무가 귀국에 대한 지도경영을 담당한다는 데 강대국정부가 모두 동의했습니다.....그렇기 때문에 히로부미는 앞으로 귀국의 진운에 필요한 충언과 행동에 그 누구로부터도 이이를 제기할 수 없고 또한 방해를 받지 않을 것입니다. 폐하께서도 이를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라고 답했다.
모든 ‘시정개선’은 자신의 뜻대로 처리한다는 것을 명확히 하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실행했다.
이는 이토가 을사강제조약 당시 “내정, 즉 자치의 요건은 의연히 폐하의 친재 아래서 폐하의 정부가 이를 행하는 것은 종전과 조금도 다름이 없습니다.”라고 고종에게 한 약속과는 크게 다른 것이다. 실제로 그 후 모든 정책은 이토의 뜻대로 진행됐다. 대한제국의 통치권은 이미 이토의 수중에 있었다.
이토의 지배기구 '협의회' 구성...고종 알현서 사전통보후 내각에 '명령'
통치 메커니즘의 또 다른 통로는 구체적 정책 입안과 집행을 막후에서 조종하기 위한 협의체 구성이다.
‘한국시정개선에 관한 협의회’가 바로 그것이다. 통감 관사에서 이토가 주재하는 이 협의회에는 한국정부의 내각 전원과 필요에 따라 일본인 재정고문 및 통감부 고위관리들이 참석했다. 이토는 통감으로 부임하면서 신속하게 이 협의회를 가동했다. 2일 서울에 도착하여 9일 ‘알현’을 통해 고종에게 시정방침을 통지하고, 13일 협의회를 열고 전반적인 시정개혁을 논의했다는 것은 이토가 한국통치를 위해 얼마나 사전에 주도면밀하게 구상했나를 잘 보여주고 있다.
고종을 알현한 직후인 9월 13일 개최된 1차 협의회에서 이토는 먼저 고종에게 제시한 시정개선의 방향을 대신들에게 설명하고 황제도 이에 동의했다는 뜻을 전했다. 또한 앞으로 모든 국정에 관한 논의는 ‘협의회’가 담당한다는 것도 밝혔다. 그리고 협의회가 역점을 두어야 할 시정개선으로서 농업개량, 교육제도 개선, 금융기관 확장, 경찰의 쇄신, 도로, 수도, 및 배수공사, 관개 및 식목 등을 제시했다. 그리고 보다 구체적으로 차관도입과 경찰력 증강에 관하여 논의했다.
통감 부임후 한복을 입고 사진 찍은 이토. 왼쪽부터 이토의 딸, 내무대신 이지용과 그의 처, 이토 히로부미와 처,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낸 박의병과 처
통치자금 1천만엔 조달...한국 대신들 놀라
이토는 통감으로 부임하면서 시정개선에 필요한 기업(起業)자금으로 일천만 엔을 조달했다.
그는 한국정부의 재정고문으로 있는 메가다 다네타로(目賀田種太郞)에게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대신들에게 설명할 것을 지시했다. 메가다의 보고에 의하면 이토는 한국의 관세수입을 담보로 일본흥업은행(日本興業銀行)으로부터 일천만 엔의 차관을 성사시키고, “오백만 엔은 3월중 일시에 입수가 확실”하고, 나머지는 “필요에 따라 사용이 가능”하다는 것을 밝혔다.
모든 대신들은 신속한 자금조달에 놀라면서 동의했다.
이토는 우선적으로 실행해야 할 사업의 내용과 예상되는 비용을 검토할 것을 메가다에게 지시했다.
그리고 이지용(李址鎔) 내무대신에게 경찰력 증강에 관한 문제를 검토하여 다음 협의회에서 보고할 것을 지시했다. 끝으로 모든 대신들에게 다시 한 번 그들의 신분을 보장하면서, “중요한 것은 어떻게 국가를 위하여 진력할 것인가, 그리고 생명을 건다면 어떤 일이라도 이루어 낼 수 있다는 각오”로 업무에 임해줄 것을 당부했다.
國魂 없는 대신들 "일신 배려에 감사"...이토의 신하로 전락
이에 박재순(朴齋純) 참정대신은 “대단히 유익한 협의회를 만들어 준 것에 대하여 깊이 감사”했다. 또한 법무대신 이하영(李夏榮)은 “사람의 앞날을 미리 예측할 할 수는 없지만 대신들은 일치하여 열심히 업무에 임할 것을 결심했습니다. 우리들의 일신을 이처럼 염려해 주시는 (통감의) 뜻에 각 대신을 대표하여 깊이 감사드립니다.”라고 했다.
한국의 대신들은 이미 국혼(國魂)을 상실했고, 고종의 신하가 아니라, 이토의 신하였다.
실질적으로 내정을 운영한 ‘한국시정개선에 관한 협의회’는 1906년 3월 13일에 시작해서 한국의 병탄이 완성되는 1909년 12월 28일까지 97회 계속된다. 이토 히로부미는 이 협의회를 77회 주재하면서 그가 구상하고 있는 모든 정책의 결정과 집행을 이 기구를 통해서 실행했다.
메이지의 관료 제도를 확립하고 네 차례 총리대신을 역임하면서 내각을 이끌었던 이토의 ‘협의회’운영은 탁상공론에 치우쳤던 한국정부의 내각을 압도하기에 충분했다. 제1차 협의회에서 지시받은 메가다는 21일에 열린 2차 회의에서 교육, 수도공사, 도로공사, 농공업은행보조 등을 시급하게 시정해야 할 분야로 선정하고, 이에 필요한 예산 내용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설명했다. 중요한 정책을 제시하고, 논의하고, 결정하여 집행을 지시하고, 그리고 그 결과를 확인하는 근대적 행정기법은 능률적이고 효과적이었다. 협의회가 거듭할수록 한국의 내정은 통감부에 예속될 수밖에 없었다.
통감부 직원은 75명뿐...대한제국을 한손으로 요리하다
이 협의체를 구성한 이토의 의도는 일본의 뜻대로 정책을 추진해 나가지만, 모든 정책은 한국 내각의 승인을 거쳐서 결정되고, 그리고 한국 정부에 의해서 집행하는 모양새를 가추기 위함이었다. 실질적인 정책의 입안과 집행의 방향은 통감부 내의 총무부, 농상공부, 경무국에서 정하고, 이를 협의회에서 승인을 거처 한국 내각이 집행하는 형태를 갖추었을 뿐이다.
일본정부가 확정한 관제(官制)에 의하면 통감부의 인원은 위로 통감인 이토 히로부미에서 말단의 경비원을 포함하여 모두 75인에 불과했다. 그러나 메이지 국가를 건설한 행정능력과 통치경험은, 아직도 구습에 젖어있는 대한제국을 요리하기에 충분했다. 이토는 이 ‘협의회’를 통해서 병탄의 기초가 될 수 있는 법과 제도를 하나씩 만들어 나가면서 지배 세력을 확대해 나갔다. ‘실질적 점진주의’의 실천이었다.
이토 히로부미가 통감으로 부임하면서 가지고 온 세 번째 구상은 한국내의 친일세력을 배양하고 집단화하는 것이었다. 이 작업을 위하여 이토는 대륙낭인의 대표적 인물로 고쿠류카이(黑龍會)를 이끌고 있는 우치다 료헤이(內田良平)를 대동했다.
11. 우치다 료헤이(內田良平)의 포석
일본정부-한국통감부-대륙낭인의 "병탄 합동작전"
일본의 한국병탄은 야마가타 아리토모-가츠라 다로-데라우치 마사다케-고무라 쥬타로를 중심으로 한 일본정부, 이토 히로부미-하야시 곤스케-하세가와 요시미치가 이끄는 한국의 통감부와 주둔군, 그리고 우치다 료헤이-스기야마 시게마루-다케다 한시를 핵심으로 한 대륙낭인들의 합작품이다.
그러나 최전선에서 병탄의 길을 열어 간 무리는 우치다 료헤이와 그를 중심으로 한 대륙낭인 세력이었다.
이토 히로부미가 통감으로 임명된 직후인 1905년 말, 스기야마 시게마루(杉山茂丸, (6)‘병탄의 첨병(C) 주역들’ 참조)는 이토의 초청을 받고 레이난사카(靈南坂)에 자리 잡고 있는 관저로 찾아갔다. 통감으로 해야 할 일을 구상하면서 이토는 스기야마의 식견과 견해를 듣고 싶었다. ‘정보의 집결지’이면서 ‘해결사’의 능력을 지닌 스기야마를 이토는 높이 평가하고 때때로 그를 개인적으로 불러 정국의 동향과 의견을 경청하곤 했다. 1895년 이후 가까운 관계를 유지해 온 스기야마는 이토에게도 여러모로 ‘도움이 되는’ 인물이었다. 특히 세이유카이(政友會)를 창당하는 과정에서 이토는 스기야마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았다. 이토가 1900년 제4차 이토내각을 꾸밀 때 스기야마에게 경시총감의 직책을 권유할 정도로 그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주인 못 만난 名馬 한 필을 부리시지요"
저녁과 반주를 겸한 두 사람의 대화는 오랫동안 계속됐다. 대화의 주제는 일본정치에서 동아시아 정세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했다. 두 사람의 대화가 한반도의 중요성과 통감의 막중한 사명에 이르자, 스기야마는 고쿠류카이(黑龍會)의 회두(會頭) 우치다 료헤이를 통감의 개인보좌관으로 삼아 활용할 것을 다음과 같이 천거했다.
“지금 일본에는 비길 데 없는 명마가 한 필 있습니다만 불행하게도 그 말을 부릴 수 있는 인물이 없는 것 같습니다. 각하께서 그 말에 재갈을 물리고 한 번 부려 봄이 어떻겠습니까?”
“그 말이 누군가?” 이토가 물었다.
“우치다 료헤이입니다.” 스기야마가 답했다.
“우치다 료헤이라! 불굴의 사나이라고 알고 있는데 한번 시승(試乘)해보도록 할까!” 이토가 화답했다. 스기야마의 천거를 받아들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관직 없이 자유롭게 사명을 수행하련다"
며칠 후, 후쿠오카(福岡) 출신으로 우치다 료헤이의 선배이면서 외교관인 구리노 신이치로(栗野慎一郞)는 이토 히로부미의 심부름으로 우치다를 찾았다. 그는 우치다에게 이토의 개인 참모로 통감부에 참여할 것을 다음과 같이 권했다. “군(君)이 이토 후작을 수행하여 한국으로 가서 그의 한국 경륜을 도울 뜻은 없는가? 후작은 군이 (통감부의) 관리가 되기를 희망하면 관리로, 그렇지 않으면 자유로운 신분으로 필요한 임무를 담당하기를 바라고 있네. 국가를 위해서 분발하는 것이 어떤가?” 이에 우치다는 ‘자유로운 신분’으로 활동한다는 것을 조건으로 이토의 초청을 받아들였다.
우치다의 역할은 이토의 세 번째 통치구상, 즉 한국 내 친일세력을 양성하고 조종하여 합방운동을 한국인이 주도하는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우치다는 이토의 기대 이상으로 병탄 실현에 중대한 역할을 담당했다.
통감으로 부임하는 길에 대마도 嚴島신사에서 기념 촬영한 사진, 중앙 화살표가 이토 히로부미, 왼쪽에서 세번째 화살표가 우치다 료헤이
동학운동에 불 지른 땅...우치다의 한국인觀
이토가 ‘한국시정개선에 관한 협의회’를 통해 통감지배를 한국화하고, 제도를 통해 실질적 지배권을 조금씩 잠식해 나가는 동안, 통감의 막빈(幕賓)으로 이토를 수행하여 서울에 함께 온 우치다 료헤이는 남산 밑 필동에 위치한 관사에 짐을 풀었다. 그리고 자신이 해야 할 역할과 방향을 모색했다. 그의 거처는 ‘정한(征韓)’의 뜻을 펼치려는 대륙낭인의 거점이 됐고, 시간이 갈수록 이곳을 찾아드는 친일 한국인의 수가 늘어갔다.
한국 땅은 우치다에게 결코 낯선 곳은 아니었다. 1894년 동학봉기 당시 청일전쟁을 위한 ‘방화의 역할’을 담당했던 덴유쿄(天佑俠) 활동 이후 이미 여러 차례 오갔기 때문에 상당히 친숙한 곳이었다. 그러나 이번 기회는 과거의 경우와 달랐다. 우치다는 ‘정한’이라는 뚜렸한 목적을 실현하기 위하여 통감의 참모라는 신분으로 한국에 온 것이다. 통감부의 공식적인 관리 신분은 아니었지만, 통감 이토 히로부미의 개인 참모라는 지위는 우치다에게 과거와 달리 확실한 신분 보장과 충분한 재정 지원을 받으면서 활동할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이로써 그는 병탄의 길을 열어가는 데 결정적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한국의 내정 조사 특명...각계 인맥 만들기
통감부 업무에 구속되지 않는 우치다는 자유롭게 활동했다. 그는 이토 통감으로부터 ‘한국의 내정조사’라는 특명을 받고, 반년동안 여러 정치, 사회, 종교단체의 성격과 구성원들을 살펴보고, 지방의 여러 곳을 여행하고, 각계 각 계층의 사람들을 만났다. 한국정계의 복잡한 세력관계와 인맥에 관한 지식을 축적하면서, 한국 내 친일과 배일단체의 성격과 현상을 조사했다. 또한 다케다 한시(武田範之, (6)‘병탄의 첨병(C) 주역들’ 참조))를 위시하여 뜻을 함께 하는 고쿠류카이 회원과 대륙낭인들을 한국으로 불러들여 앞으로 해 나갈 일들을 의논했다. 여유로운 듯 한 우치다의 이러한 행각은 한국의 정치 현상과 사회 실태를 살펴보면서 ‘정한’을 위한 큰 방향과 전략 수립을 위한 사전 준비였다.
현해탄을 넘나들며 한국 병탄의 중심에 섰던 대륙낭인 그룹 흑룡회 주역들, 왼쪽부터 우치다 료헤이, 이노우에 도사부로(井上藤三郞), 다케다 한시, 요시쿠라 오세이(吉倉汪聖), 구주 요시히사(葛生能久).
준비기간을 거친 우치다는 한국을 병탄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과제가 아니라는 확고한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반년 후 그가 얻은 결론은 가능한 한 빠른 시일 안에 “보호정치를 폐기하고, 한국 황제를 폐위시키고, 일한연방(日韓聯邦)을 성취”함으로써 일본의 완전한 지배권을 확립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지금과 같은 점진주의를 바탕으로 한 보호 통치는 결국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더 많은 자원을 낭비하게 되고, 오히려 한국 내 반일 세력을 양성하는 결과를 가져온다고 판단했다.
"점진책은 낭비, 즉각 장악을"
우치다가 이토 통감에게 제출한 보고서[滿韓開務鄙見]에 의하면 필요한 것은 일본 정부와 통감부가 한국을 일본의 일부로 귀속시킨다는 확고한 의지와 뚜렷한 방향 설정이고, 이를 한국인의 자발적 운동으로 만들어가는 전략이었다. 그는 중국의 혼란과 포츠머스 조약의 여세를 몰아 “먼저 한국을 발본(拔本)하여 미리 기초를 다지고”, “정권을 장악하여 위압(威壓)”할 것을 건의했다. ‘보호’통치가 아니라 직접통치에 의한 강력한 지배, 즉 ‘급진적 병탄’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병탄’을 한국인의 운동으로 만들어 나가기 위하여 ‘한국인의 특성’을 활용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우치다가 활용한다는 ‘한국인의 특성’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한국인 습성 활용하자"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것이 일반적인 한국인의 습성이며, 그들은 이리의 잔인하고 혹독한 본성을 아첨과 가식의 양가죽 속에다 감추고 있다. 불쌍해서 친절을 베풀면 버릇이 없이 굴고, 안아 주면 업어 달라고 매달리고, 실질적인 독립심은 없으면서도 겉으로의 독립만 추구하는 것이 한국인들이다. 김춘추의 외교 정책(동족인 고구려를 멸망시키기 위하여 외국인 당나라 군대를 불러 들인 것을 뜻함--필자주)은 세월이 흐르는 동안 한국인의 성격, 습성으로 변하여 그들 속에 깊이 뿌리박고 있다. 이제부터 이러한 특성을 가진 한국인들을 조종하여 일본에 유리하게 해야 할 것이다."<日韓合邦秘史>
한국인의 자발적 합방운동 유도...일진회 선택
우치다가 ‘일본에 유리하게’한다는 것은 한국인들을 조종하여 병탄을 ‘순수한 한국인의 애국운동’으로 이끈다는 것을 뜻하고 있었다.
일본의 한국 병탄은 일본이 주도한 것이 아니라, 한국인의 간절한 희망과 전적으로 자발적 의지에 의하여 성립된 역사적 사실로 객관화 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동안 한국의 정세와 정치·사회단체의 현황을 면밀히 검토한 우치다는 이 역할을 담당할 ‘주구(走狗)’로 일진회(一進會)를 선택했다.
우치다는 도쿄의 스기야마에게도 같은 내용의 서신을 보내면서, 일진회의 친일적 성향, 어려움에 처해 있는 현재의 상태, 활용할 가치가 있다는 것 등을 자세히 전달했다. 그리고 도쿄 정부의 실권자인 야마가타 아리토모, 가츠라 다로, 데라우치 마사타케 등에게도 한국의 현실을 설명하고, 일진회를 도울 수 있는 방안을 검토해 달라고 당부했다.
12. 병탄의 주구 '일진회'
절반의 책임: 일진회의 두 인물
한국병탄은 일본의 숙원사업이었다.
일본이 이 숙원사업을 성취할 수 있었던 것은 물론 그들의 주도면밀한 계획과 행동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진회와 같이 병탄을 앞장서서 지지하는 한국인 동조세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했거나 또는 상당한 대가를 치렀어야만 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병탄의 절반의 책임은 우리의 몫이다.
일그러진 과거의 현재 속에서 역사적 교훈을 배워야 할 것이다.
일진회는 일본의 한국병탄을 ‘한국인의 운동’으로 위장하는 데 앞장선 “매국의 앞잡이” 집단이었다.
이 단체는 러일전쟁 발발 직 후인 1904년 8월에 결성됐다. 유학주(兪鶴柱), 홍긍섭(洪肯燮) 등 독립협회 관계자와 한때 만민공동회의 회장이었던 윤시병(尹始炳)등이 참여했으나 실질적인 실력자는 이 단체의 결성을 주도한 송병준(宋秉畯)과 이용구(李容九)였다.
기생의 아들 송병준, 임오군란 전부터 '친일파'
송병준(1858-1925)은 함경남도 장진출신인 것으로 알려졌으나 정확한 출생과 성장 배경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기생의 몸에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구박과 천대 속에서 성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분명치 않은 과정을 거쳐 민영환의 눈에 띠어 그의 식객으로 있다가 1871년 무과에 급제하여 수문장, 훈련원 판관, 오위도총부 서사, 사헌부 감찰을 지냈다.
1876년 강화도 조약 당시 송병준은 접견사의 수행원으로 참여했고, 이 기회에 그는 처음으로 일본인과 접촉을 가지게 됐다. 특히 거물급 군납업자 오쿠라 기하치로(大倉喜八郞)와 밀착되면서 친일의 길로 들어서기 시작했다.
일본의 백작 작위를 받은 송병준
점포도 집도 습격받아 불타
송병준은 오쿠라의 지원을 받아 부산에 상관(商館)을 열고 운영하면서 상당한 재산을 축적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고조된 반일분위기 속에서 부산 주민의 습격을 받아 그의 상관도 불타버렸다. 1882년 임오군란 당시 서울의 그의 집이 소실됐고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 도피한 것을 보면, 당시에 이미 친일파로 널리 알려졌던 것 같다. 1884년 갑신정변 후에는 망명중인 김옥균을 암살하려고 일본으로 건너갔으나 오히려 그의 감화를 받고 추종자가 됐다. 1886년 귀국 후 김옥균과 통모한 혐의로 투옥되었으나 민영환의 도움으로 출옥한 이래 흥해 군수, 양지 현감 등을 지냈다. 그러나 정부의 체포령이 다시 내려지자 일본으로 도망하여 노다 헤이지로(野田平次郞)라는 일본 이름으로 개명하고 10년 가까이 일본을 전전하면서 살았다.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일본군 제12사단 병참감인 오타니 기쿠죠(大谷喜久藏) 소장의 통역관으로 일본군과 함께 만주까지 종군했다. 그 후 서울에 돌아와 정치 활동에 끼어들었다. 일진회 일지(日誌)에 의하면 송병준은 8월 18일 유신회(維新會)를 조직했고, 이틀 후인 20일 이를 다시 일진회로 그 이름을 바꾸었다.
동학 참여했던 이용구, 일본서 '대동합방론'에 심취
일진회 회장으로 ‘병합청원’을 간청한 이용구(1868-1912)는 항일의병장에서 병탄 첨병의 주구로 전락한 인물이다.
그는 경상북도 상주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생활이 어려워 충청도 직산, 경기도 안성 등을 전전했다. 이용구는 13살 때 부친을 잃고, 모친을 도와 농사에 종사했으나 겨우 생활을 유지할 정도였다. 가난에 찌든 생활을 해온 이용구는 23살 때 동학에 입교했다. 그는 손병희와 더불어 교주 최시형의 ‘고제(高弟)’로 주목을 받았다. 동학봉기 당시 전봉준을 도와 투쟁에 가담했다가, 1894년 정부군에 체포되었고 사형은 면했으나 견디기 어려운 형벌을 받았다.
최시형을 이은 3대 교주 손병희와 함께 일본으로 외유할 당시 이용구는 처음으로 다루이 도키치의 <대동합방론>을 접할 수 있었다. 이용구의 아들 오히가시 구니오(大東國男)는 자신의 아버지는 “이 책으로부터 결정적 영향을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러일전쟁의 분위기가 무르익어 갈 때, 이용구는 손병희와 별도로 홀로 귀국하여 진보회(進步會)라는 정치단체를 조직하여 활동했다.
진보회가 비록 정치단체이기는 하지만 이용구가 동학적 배경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광범위한 지방조직을 쉽게 구축할 수 있었다.
송병준, 이용구 설득 전국조직을 통합
송병준의 유신회는 대중적 기반이나 지방조직에서 대단히 취약했다. 이러한 취약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송병준은 동학의 조직배경을 가지고 있고 친일 색채를 드러내기 시작한 진보회(進步會)와의 통합을 모색했다. 송병준은 진보회의 책임자인 이용구(李容九)를 설득했다. 동학 봉기 당시 처절한 고통을 직접 체험했고, 정부의 끈질긴 탄압을 받고 있던 이 용구는 송병준의 유혹을 물리칠 수 있을 만큼 강인하지 못했다. 이용구는 1904년 말 진보회의 취지와 목적이 일진회와 동일하므로 일진회와 통합한다는 것을 각 지방 조직에 알리고 통합 성명을 발표했다. 이용구가 회장에 추대됐다. 일진회는 비로써 광범위한 지방조직을 가진 대중조직체로 등장하게 되었다.
일진회 "외교권을 일본에 맡기는 것이 독립의 길"
일진회 회장 이용구
실제로 일진회는 러일전쟁 당시 이용구와 송병준의 지휘 아래 한국과 만주에 있던 일본군에게 여러 가지로 협력했다.
뿐만 아니라 1905년 을사강제조약이 민족의 절박한 문제로 대두하여 국론이 분분할 때, 일진회는 “한국의 외교권을 일본정부에 위임하는 것이 국가의 독립을 유지할 수 있고 영원히 복을 누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지지하며, 한국정부가 조약 조인에 응할 것을 촉구하기도 했다.
"파산상태의 일진회를 살려 활용 합시다"
우치다의 일진회 조종
통감의 특명에 따라 한국내의 친일, 배일 단체의 성격과 구성원, 그리고 현상을 면밀히 조사해 온 우치다는 일진회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
그는 일진회의 친일적 성격, 이용구와 송병준의 성향과 과거의 편력, 일진회가 직면하고 있는 정치적·재정적 어려움 등을 면밀히 조사하여 통감에게 보고했다. 그리고 조종과 활용을 “심각하게 고려”할 가치가 있다는 것을 건의했다. 그는 같은 내용을 도쿄의 스기야마 시게무라에게도 전했다.
우치다의 조사에 의하면 일진회는 1906년 8월에 이르러 상당히 어려운 국면에 빠져있었다. 먼저 이용구와 함께 실질적으로 일진회를 이끌어가고 있는 송병준이 옥새(玉璽)를 위조하여 이권을 일본에 넘겨준 이일식(李逸植) 은닉죄로 경무청에 구속되었다. 거의 같은 시기에 이용구가 동학의 교주인 손병희로부터 동학에서 출교(黜敎) 처분을 당하게 되면서 동학을 근거로 한 지방조직이 붕괴되어 많은 타격을 받게 되었다.
거기에 더하여 하야시 곤스케(林權助) 공사가 공사관의 업무를 통감부에 보고하면서 “일진회는 무뢰한의 집회 단체이므로 장래의 불상사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적당한 시기에 해산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평가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으로 인하여 1906년 9월에 이르러 일진회는 해산 직전의 위기까지 몰리게 되었다.
"영원한 친일단체 만들 절호의 기회"
그러나 우치다는 한국 유일의 가장 큰 친일 단체인 일진회를 해산시킬 것이 아니라, 오히려 송병준을 석방시켜 보다 적극적인 친일단체로 육성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판단했다. 통감 이토에게 제출한 <송병준 수감의 전말과 일진회의 현황에 관한 조사 보고서>에서, 우치다는 일진회가 자칭 ‘일백만 회원’을 갖고 있는 한국에서 가장 큰 정치 단체라는 점, 한국에서 활동하는 가장 적극적인 친일 단체라는 점, 재정적으로는 대단히 어려운 상태에 있다는 것을 등을 지적했다.
그리고 송병준의 구속은 “일진회의 머리에 떨어진 큰 철퇴와 같은 것”으로서 사실상 와해의 위기에 직면해 있다는 점을 보고했다.
또한 송병준과 이용구의 관계는, “송의 단점은 이의 장점이고, 이의 단점은 송의 장점”으로서 “두 사람이지만 한사람”인 ‘한 쌍’이기 때문에, 송병준이 없는 일진회는 일본에게 쓸모없는 ‘무용지물’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송병준의 석방과 일진회에 대한 재정적 지원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결론적으로 그는 “내우외환의 어려움” 속에 있는 일진회를 소생시키는 것이 이를 “영원한 친일단체”로 만들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이 기회를 놓치지 말고 충분히 활용할 것을 강력히 건의했다.
우치다, 이용구에 '일한연방' 타진하자 "나의 뜻"
이토에게 보고서를 제출한 우치다는 일진회를 이끌고 있는 이용구의 의지와 결의를 직접 타진했다. 우치다는 이용구를 자신의 관사로 초대하여 송병준이 수감됨으로써 일진회가 받고 있는 어려움에 대하여 동정의 뜻을 표시한 후, 이용구의 심중을 다음과 같이 떠보았다.
“만일 일진회가 지향하는 노선이 본인의 소견과 일치한다면 송병준 군을 석방시키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이 말을 들은 이 용구는 몹시 기뻤다. 우치다에게 반문했다.
“백 만인이 넘는 일진회의 회원은 송군과 나를 신뢰하고 있어 무엇이든지 명령하는 대로 복종합니다. 그러므로 송군과 나의 의견은 곧 일진회의 의견이고, 일진회의 행동은 곧 송군과 나의 행동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귀하가 추구하는 방향이란 어떤 것입니까?”
우치다가 자신의 복안을 밝혔다.
“일진회의 목적이 4대 강령에 있다고 하겠으나 천하의 형세는 변화무쌍하여 반드시 이러한 원칙과 일치하지는 않습니다. 언젠가 일한연방(日韓聯邦)을 만드는 날이 오면 귀하는 회원들과 함께 이에 위배되는 행동을 하지 않겠다고 보증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평소부터 품어 온 뜻도 역시 단방(丹邦-大東合邦論의 저자인 다루이 도키치의 호)의 대동합방(大東合邦)에 있습니다.”
이는 일진회가 우치다의 뜻에 따르겠다는 뜻이다. 그 징표로 “일진회는 총무원회의 결의에 따라 귀하를 본회의 고문으로 추대한다”는 내용을 문서로 통지했다. 일진회는 우치다의 손아귀에 들어오고 있었다.
다케다 한시, 일진회를 만취시키다
우치다 료헤이, 다케다 한시, 이용구(왼쪽부터)
송병준이 석방되면서 일진회가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우치다는 일진회를 조정하기 위하여 동학봉기 당시 텐유쿄(天佑俠) 회원으로 한국에서 함께 활동했고, 또한 명성황후 시해에도 깊숙이 가담했던 현성사(顯聖寺) 주지 다케다 한시를 이용구의 상대역으로 선택했다.
우치다가 다케다 한시를 염두에 둔 것은 두 사람 다 종교적 배경을 가지고 있어 대화가 쉽게 될 수 있고, 또한 두 사람 모두 ‘두주불사’의 주량으로 쉽게 가까워 질 수 있다는 계산에서였다. 다케다는 우치다의 당부를 쾌히 승낙하고, 12월 말 다시 산을 내려와 한국으로 향했다.
일진회는 다케다 한시를 ‘사빈(師賓)’으로 맞이했다. 다케다의 표현대로 그는 “인생 최대의 사업”이라 할 수 있는 “일한합방운동”에 뛰어 들었다. “급속도로 가까워 진” 두 사람의 관계는, 이용구의 아들 오히가시 구니오의 표현을 그대로 인용하면 “쇠붙이도 끊을 정도의 굳은[斷金] 관계를 맺고, 일한합방을 이끌어가는 중심세력”으로 자리 잡았다. 그 후 우치다의 보고서나 건의서와 같은 모든 문건은 문필가이기도 했던 다케다의 손을 거쳤다. 그리고 일진회가 한국 황제와 일본의 요로에 제출한 ‘일한합방상주문’도 그에 의하여 작성되었다.
송병준 석방...매달 2천엔 지원
재정적 지원과 일진회의 입각
송병준을 석방시킨 후 우치다는 일진회의 재건을 위해 재정문제에 적극적으로 관여했다.
또한 재정적 어려움을 해결해 줌으로써 일진회에 대한 우치다의 영향력은 더욱 굳어졌다.
이토에게 보고한 것과 같이 1905년 말부터 어려움이 겹치기 시작한 일진회의 재정적 상황은 1906년 여름에 이르러서는 도저히 수습할 수 없는 상태로 악화되었다. 이러한 재정적 어려움을 잘 알고 있었던 우치다는 통감 이토에게 일진회를 활성화시키기 위한 재정적 지원의 필요성을 설명하고 당부했다. 그 결과 일진회는 통감부로부터 1907년 1월부터 매달 2,000엔(円)의 보조금을 반년동안 지원받을 수 있게 됐다.
일본정부 수뇌 방문...친일 다짐
이와 같은 통감부의 보조금이 일진회의 재정에 도움을 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충분치는 않았다. 일진회의 보다 근본적인 재정적 안정책을 강구하기 위하여 우치다는 1907년 2월 송병준을 대동하고 도쿄로 갔다. 스기야마의 주선으로 우치다와 송병준은 일본의 정계와 군부의 중심인물인 야마카타 아리토모, 카츠라 다로, 데라우치 마사다타 등을 만날 수 있었다. 우치다와 송병준은 그들에게 차례로 일진회의 성격, 목적, 경력, 일본의 한국정책을 적극 지지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현재 당면하고 있는 재정난을 자세히 설명하고 협조를 간청했다. 테라우치는 “만일 내가 도울 것이 있다면 기꺼이 돕겠다”고 송병준에게 약속했고, 야마카타는 “백만의 회원을 움직일 때의 그 어려움이 어떻다는 것은 가히 짐작할 수 있으니, 인내와 노력으로써 성과를 거두기 바란다”고 격려했다.
일본 육군성, 일진회에 10만엔 전달
일본정계의 중심인물들을 차례로 방문한 후, 우치다는 창립 이래 일진회의 수입과 지출의 내역을 상세히 기록한 <일진회재정전말서(一進會財政顚末書)>를 작성하여 이토 통감과, 도쿄의 야마카타, 카츠라, 테라우치에게 보고하면서 보다 지속적인 재정적 지원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리고 스기야마 시게마루에게 도쿄에서의 역할을 당부했다. 그 결과 5월에 육군성은 하세가와 요시미치 사령관을 통하여 ‘기밀비’라는 명목으로 10만 엔의 보조금이 일진회에 일시에 전달됐다.
일진회를 보조하는 ‘기밀비’가 왜 통감부를 통하지 않고 군부를 거쳐 전달되었는지는 명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우치다의 일진회 활용론에 일본의 정권과 군부를 실질적으로 장악하고 있는 야마카타, 카츠라, 테라우치 등이 승인하고 있음을 뜻하고 있다. 그들은 그 후 한국에서 우치다와 일진회의 활동을 직간접으로 후원한 사실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선악 구별없이 일본에 복종하는 일진회...만사 해결"
‘거금’을 확보한 이용구와 송병준의 태도는 보다 적극적인 친일 성향을 나타냈다.
이제 우치다는 일진회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절대적 지위에 이르렀다. 재정문제를 해결한 직후 우치다가 스기야마에게 보낸 편지에서 일진회는 “일의 시비와 선악과 관계없이 일본에 복종할 수밖에 없는 형편에 빠지게 됐다”고 설명하고, 앞으로 “일진회를 조종하여 만사를 해결하도록 하겠다”는 자신의 계획을 밝혔다. 일진회가 완전히 자신의 수중에 있음을 확신하고 있었다.
우치다, 송병준 입각시키는데 성공
통감부와 군부를 통하여 일진회의 재원을 확보한 뒤 우치다가 시도한 것은 일진회를 한국정부의 내각에 직접 참여시키는 것이었다.
이토는 박제순 내각으로 하여금 일진회와 연립 내각을 구성하게 한다는 우치다의 방안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박제순 내각이 총사직하고 이완용 내각이 등장할 때 이용구나 송병준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을 내각에 입각시키는 것이 바람직스럽다는 우치다의 제안은 수용했다. 5월 22일 새로 구성된 이완용 내각에 송병준이 농상공부 대신으로 입각했다.
이토가 일진회의 송병준을 내각에 입각시킨 것은 한편으로는 송병준으로 하여금 이완용을 견제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친일’을 위한 두 사람의 충성 경쟁을 이끌어 내기 위함이었다.
일진회의 실권을 막후에서 완전히 장악하고 그 단체를 통하여 내각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모든 작업을 끝낸 우치다는 ‘정한’ 프로젝트의 핵심인 ‘한국인에 의한 합방운동’을 본격적으로 실행하기 시작했다.
그 첫 작업이 고종황제의 폐위였다.
13. 병탄의 건널목 (1) 고종의 양위
일본 강경론자들, 이토의 점진정책 비판
을사강제조약이 병탄을 위한 구체적 행동의 첫 단계였다면, 고종의 양위와 이어서 강제로 조인된 정미7조약은 병탄의 기반을 완수한 단계라 할 수 있다.
이토는 통감으로 부임한 이후 ‘실리주의적 점진주의’를 바탕으로 통감부를 이끌었다.
원략(遠略)으로 법과 제도를 뜯어 고치며 한국의 주권 잠식의 틀을 만들어 나갔고, 집권세력에 대한 유화정책으로 정국의 안정을 유지하려고 했다. 그러나 한국지배정책의 급진적 변화를 기대하는 강경론자들은 통감지배 1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보호정치’의 한계를 넘지 못하고 있음에 대한 비판이 일본과 한국 통감부 안에서 일어 나타나기 시작했다. 특히 일본의 강경론자인 야마가타 계의 비판의 소리가 높아졌다.
이용구-송병준 "황제 폐하고 연방부터..." 건의
보다 혁신적인 통감통치를 위해서 우치다는 통감에게 일진회가 제안하고 있는 “한황폐위의 계책”을 건의했다.
이용구와 송병준은 “일진회 내각을 구성하고 통감부의 뜻에 따라 개혁정책을 집행해 나가는 것이 상책이지만, 고종이 황제의 직위에 있는 한 결코 혁신의 효과를 거둘 수 없다는 것은 불을 보듯이 확실”하기 때문에, “우선 지금의 황제를 폐하고, 일한연방을 이루고, 그러고 나서 한국의 근본 개혁을 단행”하는 것이 가장 적절한 방책이라는 의견을 밝혔다. 그러나 이토는 우치다의 강경책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다만 1907년 5월 이완용 내각이 출범할 때 송병준을 농상무 대신으로 임명하여 일진회가 내각의 정책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다. 이토는 송병준을 내각으로 끌어 들임으로써 이완용과 송병준 사이의 친일 충성 경쟁을 기대했고, 그의 기대는 적중했다.
우치다 "즉각 합방 못하면 통감 바꿔야"
우치다는 도쿄의 스기야마 시게마루에게 여러 차례 자신이 관찰해 온 한국의 사정, 통감의 점진주의 정책의 문제점, 고종을 폐위시키려는 일진회의 제안, 병탄의 필요성 등을 소상하게 전했다. 그리고 통감부의 보호정치가 전혀 진전하지 못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원인은 “모든 불안의 근원”인 고종의 저항을 적절히 처리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강조했다. 그러면서 스기야마에게 “청컨대 원로대신에게 이러한 사정을 전하여 통감각하로 하여금 이 중대한 일[병탄]을 단행하도록 권유해 주십시오. 만일 통감각하가 이를 허락하지 않는다면 원로 가운데 한분이 반드시 연방성립의 중임을 맡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우치다는 통감의 점진주의를 비판하는 데 그치지 않고, 경질의 필요성까지도 논하고 있는 것이다.
1907년 6월 고종이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파견한 3인의 밀사. 왼쪽부터 이준, 이상설, 이위종. |
때를 기다리는 이토 "고종은 면종복배"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안팎에서 통감정치에 대한 비판이 높아지고 있음을 이토도 잘 알고 있었다. 또한 고종 이 통감정치에 대한 저항의 진원지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이토의 표현을 그대로 빌리면 “한황은 면종복배의 태도를 조금도 고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아직 고종의 폐위를 논할 시기가 아니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노회한 이토는 서두루지 않고 ‘적절한’ 때를 기다렸다.
그 ‘적절한’ 시기가 도래했다.
1907년 6월에 발생한 이른바 ‘헤이그 밀사사건’이 그것이다. 1907년 6월부터 10월까지 제2회 만국평화회의가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개최됐다. 26개국의 대표가 참석하는 이 회의의 제창자는 러시아의 니콜라이 2세(Nikolai II)였다.
고종 밀사 파견...열강은 '외교권 없는 나라' 외면
고종 황제는 을사강제조약의 부당성과 통감정치의 실상을 국제사회에 알리기 위하여 전 의정부 참찬(參贊) 이상설(李相卨)과 전 평리원 검사(平理院 檢事) 이준을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로 파견했다. 황제의 신임장을 지참한 두 사람은 비밀리에 블라디보스토크∼시베리아를 거쳐 러시아의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레닌그라드)에 도착하여, 전주러시아 공사 이범진(李範晉)을 통하여 만국평화회의의 제창자인 러시아 황제에게 고종의 친서를 제출하였다. 그리고 전 러시아공사관 참사관 이위종(李瑋鍾)과 함께 6월 24일 헤이그에 도착하였다. 세 사람의 밀사는 만국평화회의의 의장인 러시아 대표 넬리도프(Nelidof) 백작을 위시하여, 미국,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대표를 차례로 방문하여 고종의 신임장을 제시하고, 한국의 전권위원으로 회의에 참석할 것을 요구했다. 또한 일본의 협박 때문에 체결된 1905년의 을사강제조약은 마땅히 무효화되어야 한다는 것을 호소했다.
그러나 의장과 주관국은 한국 정부는 이미 ‘자주적 외교권을 상실’했다는 이유로 대표의 참석과 발언이 거부당했다.
다만 네덜란드의 신문인 스테드(William Stead)의 주선으로 한국대표는 평화회의를 계기로 개최된 국제협회에서 호소할 기회를 얻었다.
러시아어·프랑스어·영어에 능통한 젊은 이위종이 세계의 언론인에게 조국의 비통한 실정을 설명하면서 주권회복의 후원을 청하는 “한국을 위한 호소(A Plea for Korea)”라는 제목의 연설의 전문(全文)이 세계 각국에 보도되어 주목을 끌었다. 그러나 구체적 성과는 거두지 못하였다. 이에 밀사 중 한 사람인 이준은 울분한 나머지 그곳에서 분사(憤死)하였다.
밀사 음모 접한 이토 "호기회...호기회..."
이토와 통감부
맥켄지가 정확하게 관찰한 것과 같이 ‘밀사사건’은 “일본이 행동을 위해 오랫동안 기다려 온 명분”을 제공했다.
이토가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던 ‘적절한 시기’가 온 것이다. 그는 마치 고양이가 쥐를 덮치듯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일본 외무성으로부터 밀사사건의 전말을 보고받은 이토는 7월 3일 하야시 다다오(林董)에게 보낸 전문에서 “지금이 일본정부가 한국에 대해 국면일변(局面一變)을 위한 조치를 취할 좋은 기회[好機會]라고 믿음. 밀사파견 음모가 사실로 드러난 이상, 조세권, 병권, 재판권을 거두어 들일 좋은 기회[好機會]라고 인정함”이라고 하면서 대안 검토를 당부했다.
짧은 전문에서 이토가 “호기회(好機會)”를 두 번이나 반복할 정도로 이 시기를 기다려 왔다.
4일 후인 7월 7일 이토는 다시 총리대신 사이온지 긴모치(西園寺公望)에게 ‘특별기밀’ 전문을 보냈다. 그 전문에서 이토는 자신이 고종을 만나 일본이 한국에 ‘선전(宣戰)의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경고했다는 것, 고종은 밀사사건과 무관하다고 변명하고 있다는 것, 이 문제로 궁중이 ‘심각하게 번민’하고 있다는 것, 내각에서 양위문제가 논의되고 있다는 것 등의 소식을 전했다. 전문은 다음과 같이 계속하고 있다.
허둥대는 한국조정 "이완용 총리대신이 황제양위 거론함"
“어제 총리대신이 본관을 찾아와 선후책을 논하면서 한국정부도 사태의 중대성을 잘 알고 있다함. 그가 은밀히 본관에게 고하는 것에 의하면 사태가 여기까지 이르렀으니 국가와 국민을 보호하기 위하여 황제의 신상까지 고려하고 있다고 허둥대면서, 양위를 의미하는 것과 같은 뜻을 밝혀 본관은 항상 신중히 생각하여 결정해야 한다고 대답했음. 이 기회에 우리정부가 취할 수단방법(예컨대 한 걸음 더 나간 조약을 체결하여 우리에게 내정 상의 권리를 양여하게 하는 것)을 묘의(廟議)에서 논의하여 훈시해 줄 것을 희망함. 양위와 같은 문제는 본관이 깊이 주의하고 있고, (양위문제는) 한인의 경거망동에 지날 뿐 그 책임이 일본에 돌아오는 것과 같은 사태는 절대로 용납지 않을 것임(日本外交文書)”
즉 이토는 황제폐위계획은 한국의 자발적 의사에 의하여 결정된 형태로 기정사실화하여 일본과 무관하다는 것을 만들어 내야 한다는 뜻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전문은 끝으로 “고민에 빠진 한국 황제는 일본에 밀정을 파견하여 각 방면에서 정보를 수집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으니 충분한 주의가 필요”하다는 것을 당부했다.
"황제가 보호조약 무시하면 일본은 선전포고 할 것이오"
이토는 통감부의 막료들에게도 “강력한 조치”를 강구할 것을 지시하는 한편, 고종을 압박했다.
7월 3일 이토는 궁내부의 예식과장 고의경(高義敬)을 통감부로 불러 도쿄의 외무성으로부터 보고된 ‘밀사사건’의 전문을 황제에게 전달토록 했다. 그리고 이어서 고종을 알현하고 “밀사파견과 같이 음험한 수단으로 일본의 보호권을 거부하려 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일본에 대하여 버젓이 선전(宣戰)을 포고하는 것이 첩경이 될 것”이라고 위협했다.
이완용에게는 “황제가 그동안 여러 차례 보호조약을 무시하고 배반을 꾀했다”는 것을 지적하고, 고종이 “음모를 계속한다면 일본은 한국에 직접 전쟁의 길을 택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리고 수상으로서 책임을 가지고 “황제에게 해결의 길을 찾을 것을 권고”했다.
한국 정부는 수습을 위한 해결책을 찾기에 부심했다.
고종 "대신들이 수습하라" 대신들 "모든 책임은 폐하에게"
한국정부
한국정부는 헤이그 사건의 대책을 논의하기 위하여 7월 6일 고종황제가 참석한 가운데 어전회의를 열었다. 송병준을 위시한 친일파 대신들은 밀사사건의 전말을 추궁하는 한편 그 책임이 황제에게 있음을 은연중 강조했다. 그러나 고종은 이번 사건과 자신은 아무런 관련도 없으며 헤이그에 있는 사람들이 밀서를 위조한 것이라고 해명하고 대신들에게 사태 수습책을 강구할 것을 지시했다. 그러나 대신들은 사태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이 문제는 대신들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고 황제 스스로가 앞장서서 풀어야 한다는 것을 주장했다.
송병준 "도쿄 가서 천황에게 사죄하십시오" 고종 "경은 누구 신하냐?"
송병준이 나섰다.
그는 밀사사건에 대한 구체적인 사죄방법을 제시했다. 그는 황제가 러일전쟁 이후 여러 차례 일본의 신의를 배반했다고 강조하면서, “헤이그 밀사 사건은 그 책임이 폐하에게 있습니다. 이제 폐하께서 친히 도쿄에 가서 일본의 천황에게 사죄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하세가와 주둔군 사령관을 대한문 앞에 맞아 면박(面縛)의 예를 하십시오. 이 두 가지를 차마 못 한다면 결연히 일본에 선전(宣戰)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일패도지(一敗塗地)하면 국가 존망의 운명이 어떻게 될 것인지는 쉽게 예측할 수 있습니다”라고 협박했다.
고종은 송병준에게 “경은 누구의 신하이냐”라고 책망하고 분연히 일어나 내전으로 들어갔다. 경성(京城) 특파원들이 전하는 한국의 분위기는 문제해결의 길을 찾기에 연일 “어전회의와 내각회의”가 열렸고, “한국 황제는 초조”해 있었고, 한국 조정은 마치 “감옥과 같은” 상태에 놓여있었다
"고종 폐위는 한국인의 요구에 의해 이뤄져야 한다"
일진회
일찍부터 고종의 폐위를 주장해온 우치다 료헤이와 일진회도 이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된 우치다는 통감에게 밀사파견에 대하여 고종에게 그 책임을 추궁하고, 고종의 폐위를 긍정적으로 검토할 것을 강력히 건의했다. 그러나 그는 통감부의 조치만을 기다리고 있지 않았다.
우치다는 이번 계기를 이용하여 ‘반일의 근원’인 고종의 폐위를 성사시킬 뿐만 아니라, 폐위는 반드시 ‘한국인의 요구에 의해서’ 이루어 져야 한다는 그의 지론을 실천하려고 했다. 그는 고종의 퇴위 문제를 이용구와 송병준과 협의하면서, 송병준은 어전회의에서 고종의 퇴위를 주장하는 한편, 이용구로 하여금 일진회를 동원하여 고종의 퇴위를 위한 국민운동을 전개할 것을 제안했다. 두 사람 모두 적극적으로 동조했다. 특히 이용구는 폐위와 같이 중대한 계획을 내각에만 전적으로 의존할 것이 아니라, 일진회가 적극적으로 주도할 것을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일진회, 이완용에게 '고종퇴위' 촉구...전국 유세
“폐위를 성사시키는 것은 대단히 중대한 일이기 때문에 대신들의 처사만 전적으로 믿고 기다릴 수는 없습니다. 만일 내각이 실패할 때에는 일진회의 힘으로라도 반드시 목적을 관철시키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므로 일진회는 내각과 별도로 만일을 대비해서 해결책을 준비할 필요가 있습니다.(日韓合邦秘史)”
일진회는 적극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일진회 일지(日誌)>에 의하면 일진회는 헤이그 사건으로 인하여 야기된 정치적 불안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고종의 ‘조속한’ 양위가 불가피하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양위를 촉구하는 진정서를 총리 이완용에게 제출했다. 통감 이토에게는 한국인이 깨닫지 못하여 헤이그 문제와 같은 사건을 저질렀지만 “각하의 산해지덕(山海之德)과 금석지심(金石之心)으로 용서해 줄 것을 엎드려 빈다”는 사죄의 글을 담은 공식 서한을 전했다. 동시에 일진회는 유세반을 편성하여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의 삼남지역을 돌며 밀사사건의 정치성과 고종퇴위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유세를 벌렸다.
일 언론, 병탄 촉구 "한국 왕을 일본 귀족으로 만들자"
일본의 여론과 정부의 대응
헤이그 사건이 알려지면서 일본 국내에서도 강한 반응을 일으켰다. 일본의 주요 일간지들은 한결같이 고종을 비난하는 한편, 이토의 소극적인 정책을 비판했다. 그들은 더 강력하고 적극적인 한국정책을 수행할 것을 촉구했다. 후쿠자와 유키치가 창간한 <지지(時事)신보>는 “한국의 왕은 마땅히 일본으로 와서 헤이그 사건에 대하여 친히 사죄해야 한다”고 강조했고, <호치(報知)신문>의 사설은 “한반도는 일본제국의 전진기지의 하나로 간주되어 왔으므로 이번 기회에 획기적인 변화를 위한 강력한 대한정책의 수립이 필요하다”라고 병탄을 촉구했다. <대한매일신문>의 보도에 의하면 와세다 대학에서는 “한국의 황제를 일본의 화족”으로 삼자는 주장이 있었고, <니로쿠(二六)신문>은 “한국 황제를 일본으로 옮기고 내각은 일본인으로 귀화한 사람으로 구성”하자고 주장하고 있었다.
일본 정계 총궐기 "병합하라...안되면 양위시켜라"
정치권도 강경한 입장이었다.
7월 14일 정계의 원로격이라 할 수 있는 고노 히로나카(河野廣中), 오가와 헤이키치(小川平吉), 우익의 대부라 할 수 있는 도야마 미츠루(頭山滿) 등 6인은 “조선문제의 근본적 해결”을 위한 “일한병합건의서”를 총리 사이온지 긴모치와 통감 이토 히로부미에게 제출했다. 이 건의서는 “한국 황제의 주권을 일본에 ‘선양(禪讓)’하여 두 나라를 합병”한다는 제1안과, “현황제로 하여금 그 지위를 황태자에게 양위하고 통치권을 일본에 위임”한다는 제2안을 제시했다. 그리고 제1안이 “상책”이지만, 그것이 어렵다면 제2안은 반드시 실현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다.
정우회(政友會)과 헌정당(憲政黨)의 대표들도 총리 사이온지를 예방하고 일본의 여론이 고종의 폐위를 기대하고 있으므로, 정부는 여론에 호응하여 적절한 조치를 취해야 할 것이라고 압력을 넣었다. 또한 야마가타와 가츠라 계의 대동구락부(大同俱樂部)도 정부의 ‘단호한 처분’과 ‘용단’을 촉구했다.
천황 재가 "한국 전권 장악, 통감은 부왕(副王)으로 섭정하라"
총리 사이온지는 이토가 요구한 한국정책의 기본방향을 확정하기 위하여 7월 10일 원로와 관계각료회의를 소집했다.
이 회의에서 “대한처리방침(對韓處理方針)”을 확정하고 12일 천황의 재가를 받아 “극비”로 분류하여 통감 이토 히로부미에게 전달했다.
최종 기본방침의 핵심은 “제국 정부는 오늘의 기회를 놓치지 말고 한국 내정에 관한 전권을 장악할 것을 희망”하고, 그 실행에 관해서는 “현지의 상황을 참조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이를 통감에게 일임”한다는 것이었다.
내각에서 결정된 기본방침은
(1)장래의 화근을 단절하기 위하여 고종황제로 하여금 황태자에게 양위케 할 것,
(2)황제 및 정부의 정무결재에는 통감의 부서(副署)를 필요로 할 것,
(3)통감은 ‘부왕(副王)’ 또는 ‘섭정(攝政)’의 권한을 가질 것,
(4) 주요부서에는 일본이 파견한 관료로 하여금 대신 또는 차관의 직무를 수행케 한다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그리고 “이 문제는 대단히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외무대신이 직접 한국으로 가서 통감에게 설명”한다는 것이다. 7월 15일 외무대신 하야시 다다오가 최종안을 들고 서울로 출발했다.
'해아밀사사건'으로 황위에서 물러나는 고종을 풍자한 일본측 만화. 고종황제는 보따리를 등게 짊어지고 한손에는 인삼, 예금통장, 열쇠, 담뱃대를 들고, 또 한손으로 엄비의 손을 잡고 궁중을 떠나고 있는 모습.<團團珍聞>(1907.7.27) | |
이완용-송병준 "일본이 격분했으니 양위하시오" 연일 고종 독촉
고종의 양위
헤이그 사건에 대한 일본정부와 통감부의 강경노선과 보다 획기적 조치를 요구하는 일본국민의 여론에 직면한 한국정부는 날마다 내각회의를 열어 수습대책을 강구했다. 문제해결을 위하여 일본 외무대신이 직접 한국을 방문한다는 소식을 접한 이완용 7월 16일 다시 내각회의를 개최하고 해결의 방책을 논의 했다.
통감의 의도를 이미 알고 있었던 이완용과 송병준이 주도하는 내각회의의 결론은 황제의 양위였다. 두 사람은 회의 후 입궐하여 헤이그 사건으로 인하여 일본 정부와 국민이 격분하고 있다는 것, 하야시 외상이 한국을 방문하여 강경 조치를 취할 수 있다는 것, 일본의 극단적 조치를 예방하기 위하여 한국정부가 먼저 일본이 납득할만한 조치를 취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설명했다.
그리고 한국이 취할 수 있는 사전적 조치의 하나로서 왕위를 황태자에게 양위할 것을 상신했다. 고종은 양위할 뜻이 없음을 명확히 했다.
그러나 대신들은 다음 날 또 다시 고종에게 양위를 요청했다.
고종 "헤이그에 있는 조선인을 벌하는 것은 어떻겠소?"
대신들의 양위독촉에 시달린 고종은 이토를 불러 자신의 양위가 불가피한 것인지 그의 의사를 타진하려고 했다. <도쿄아사히(東京朝日)신문>(1907.7.21)은 “한국황제양위비록(韓國皇帝讓位秘錄)”이라는 제목으로 고종과 이토의 대화를 아래와 같이 상세히 보도하고 있다.
“고종: 헤이그에 가서 활동하는 사람들에 관해서 나는 하나도 모르는 일이오.
이토: 세계 각 국의 모든 사람이 다 (밀사를) 폐하가 파견했다는 것을 알고 있는 데 유독 폐하만이 모르고 있다는 것을 누가 믿겠습니까?
고종: 헤이그에 있는 조선인을 벌하는 것은 어떻겠소?
이토: 폐하가 화란(和蘭:Netherlands)에 있는 조선인을 벌할 수 없는 것은 일본에 있는 조선인을 벌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고종: 최근 짐으로 하여금 양위할 것을 요구하는 사람이 많은데 통감의 의견을 어떠하오?
이토: 그것은 일본을 대표하는 통감이 전혀 알지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양위는 한 나라 종실의 중대한 문제로서 전적으로 조선황실의 사안입니다.
고종: 양위를 짐에게 권고하고 있는 자들은 통감의 뜻을 받은 것이라고 하는 데 어떻게 된 것이오?
그러자 통감은 정색을 하고 목소리를 가다듬고, “누가 그런 말을 했는지 그자를 이곳에 불러 본인이 직접 심문하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이 말을 들은 고종의 얼굴에는 공포의 빛이 드러났다.”
이토, 일본 언론 활용...양위 기정사실화
이 보도가 얼마나 진실에 가까운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통감부가 이 내용을 언론에 의도적으로 전달했다는 것이다. 고종과 이토 두 사람이 나눈 대와의 내용이 일본 신문에 보도됐다는 것은 통감부의 정보 제공과 승인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내용이 사실보다 미화되었거나 또는 이토의 입지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조작됐을 가능성이 많다. 이토는 이 보도를 통해서 한편으로는 고종의 양위를 기정사실화하려했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일본 국내에서 자신의 점진주의 정책에 대한 비판 여론을 무마하려고 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토는 언론을 활용한 것이다.
궁내에선 날마다 양위 주청...궁밖에선 일진회 '촛불시위'
“장래의 화근을 제거하기 위해 황태자에게 양위시킬 것. 그러나 표면적으로는 일본이 아닌 대한제국정부가 스스로 양위를 결정한 것으로 할 것”이라는 사명을 가지고 서울에 도착한 하야시 곤스케 외무대신 18일 고종을 알현했다. 한국정부는 더욱 긴박하게 돌아갔다. 18일 밤 각료 일동은 거듭하여 고종에게 양위할 것을 주청했다. 고종이 계속 받아들이지 않자, 이완용과 송병준은 다시 앞장서서 황제가 헤이그 사건의 모든 책임을 지고 왕위에서 물러나는 것만이 국가가 직면한 위기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이라고 고종의 양위를 거듭 강권했다.
궁중에서 대신들이 고종에게 양위를 강요하는 그 시간에 일진회는 양위를 요구하는 ‘촛불 시위’를 벌렸다.
일진회 일지에 의하면 부회장 홍긍섭의 지휘아래 “일반회원 300여명이 모여서 15명씩 짝을 지어 촛불을 켜들고 궁궐을 돌면서 양위를 재촉”했다. 그들은 고종의 양위 소식이 전해진 19일 새벽에야 해산했다.
일본정부가 꾸민 '천벌 받을 짓'...파란만장 44년 마감
안팎에서 밀려드는 압력을 견디지 못한 고종황제는 결국 19일 새벽 3시에 “이제 군국의 대사를 황태자로 하여금 대리케 한다”라는 조칙을 내렸다. 고종이 ‘양위’가 아니라 ‘대리’를 택한 것은 뒷날 군권회복의 가능성을 열어 놓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무의미한 노력이었다.
맥켄지의 표현을 그대로 인용하면 고종의 퇴위는 “일본정부가 꾸민 천벌을 받을 짓(the Japanese Government assumed an attitude of silent wrath)"이었다. 고종은 그의 파란만장한 44년의 재위를 이렇게 마감했다.
황제 폐위한 대신들: 이완용, 임선준,조중응,고영희,이병무,이재곤,송병준
1907년 7월 20일 <대한매일신문>은 “일본이 한국에 대하여 황실을 강핍(强逼)하며 대신을 종으로 부리고 백성을 짐승으로 다루는 행동이 이미 극에 달”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그리고 7월 23일의 논설 “황태자 대리하신 사실”에서는 “대한황제의 위(位)를 폐하고 세운다는 말이 일본사람 신문에 낭자하더니, 며칠이 못되어 한국의 내각대신이 일제히 궁에 들어가 황제의 뜻에 반하여 (폐위를) 강박”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한국 대신들이 외국 사람이 시키는 것을 좇아 황제를 협박하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그 사람이 누구인가? 총리대신 이완용, 내부대신 임선준, 법부대신 조중응, 탁지부대신 고영희, 군부대신 이병무, 학부대신 이재곤, 농상대신 송병준이다”라고 지적하고 있다.
논설 "황태자 대리하신 사실"을 게재한 대한매일신문(1907.7.23)
한국선 '대리식'...일본선 '양위식
7월 20일 일본군대의 삼엄한 경계 속에서 고종과 순종 두 사람 모두 참석치 않은 상태에서 황태자의 ‘대리식’이 거행됐다. 그러나 이것은 실질적으로 ‘양위식’이나 다름없었다. 황제가 황태자에게 정무를 ‘대리’케 한다는 조칙을 일본 측에서 황제가 황태자에게 정권을 완전히 ‘양위’하는 것으로 발표했다. 천황은 새 황제의 즉위를 축하하는 전문에서, “짐은 짐이 통감의 보고에 의하여 황제의 양위를 이어 받은 것에 대하여 충심으로 경하”의 뜻을 표한다고 했다. 이로써 ‘대리’는 실질적 ‘양위’로 굳혀졌다.
일본군 1개대대 왕궁 진입, 반대파 체포...고종-순종 거처 분리
통감부는 다음날인 21일 밤 일반 민중의 습격으로부터 궁중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일본군 보병 1개 대대를 왕궁에 진입시켜, 양위를 반대하고 있는 궁내부대신 박영효(朴泳孝)와 시종원경 이도재(李道宰), 전 홍문관 학사 남연철(南延哲) 세 사람을 체포하여 궁중 내의 반대파를 침묵시켰다.
‘신황제’로서 대한제국 최후의 황제인 순종의 즉위식은 약 한달 후인 8월 27일 거행되었다. 그리고 11월에는 ‘태황제’로부터의 영향에서 순종을 차단하기 위하여 순종과 황태자인 영친왕(이은:李垠)을 고종이 거처하고 있는 경운궁에서 창덕궁으로 옮겼다.
고종은 일본 세력 앞에 무기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종은 일본에 대한 한국인 저항의 원동력이었다.
그러나 새로 정권을 이어받은 순종은 그렇지 못했다.
맥켄지의 표현을 빌리면 순종은 “유순하고 지력이 유약(feeble of intellect and docile)”했고, “수치스러운 정부의 이름만의 수반(figurehead of a shame government)”에 지나지 않았다. 고종의 거세는 일본의 한국장악을 더욱 용이하게 만들었다.
14. 병탄의 건널목 (2): 정미7조약
"한국의 배신행위 용서못해" 신속한 새 조약 체결 압박
고종의 양위식 다음 날인 21일부터 23일 사이에 통감부와 일본 외무성은 바삐 움직였다.
한국의 주권을 잠식하는 새로운 협약을 만들기 위한 많은 전문이 오갔다. 이토는 본국정부의 훈령을 근거로 하야시 외상과 협의하여 작성한 새로운 조약의 안을 24일 이완용 총리에게 전달했다.
‘기밀문서’로 보낸 조약안과 함께 이토는 다음과 같이 일본의 입장을 밝혔다.
“일본제국정부는 지난 1905년 11월 일한협약체결이래 더욱 더 양국의 우의를 존중하고 조약상의 의무를 성실히 준수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누누이 배신행위를 감행했다. 이로 인하여 제국의 인심이 격앙되고, 또한 한국의 시정개선에 막대한 어려움을 가져왔다. 그러므로 장래에 이러한 행위의 재연을 확실히 저지하고, 동시에 한국의 부강을 도모하고 한국인의 행복을 증진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별지의 협약을 한국정부에 요구하는 바이다. 본건은 대단히 긴요한 사항이므로 신속한 결정이 필요하다. 본인은 이미 제국정부로부터 언제든지 약정에 조인할 수 있는 권한을 위임 받았으므로 귀하의 신속한 의견을 바라는 바이다.” (日本外交文書)
이토 통감 '대한제국의 면류관없는 제왕 되다'
같은 날 일본이 요구하는 내용대로 새로운 조약이 이루어 졌다.
정미7조약 또는 제3차협약으로 알려진 새로운 조약으로 일본은 한국의 내정권을 완전히 장악했다. 시정개선, 법령제정과 행정처분, 고등 관리의 임면 등 모두 통감의 승인이 필요했다. 또한 한국정부는 통감이 추천하는 일본인을 한국 관리로 임명해야 하고, 통감의 동의 없이는 외국인을 채용할 수 없게 했다. 모든 권한은 실질적으로 통감에게 집중됐다. <대한매일신문>의 표현을 그대로 빌리면 “일본 통감이 이 대한제국 안에서 면류관 없는 왕이 된 것”이다.(1907.7.27)
행정-사법권 장악, 군대 해체까지..."주권 완전 상실"
이것은 다만 공개된 내용일 뿐이다.
통감 이토와 수상 이완용 사이에 조인된 ‘비공개 각서’는 자세한 실행내용이 들어 있다.
즉
(1)대심원, 공소원(控訴院), 지방재판소를 신설하고 주요 직책에 일본인을 임명하는 것,
(2)감옥을 지방재판소 소재지에 신설하고 형무소 소장에 일본인을 임명하는 것,
(3)한국군대를 정리하는 것,
(4)고문 또는 참여관이라는 이름으로 한국정부에 용빙(傭聘)된 모든 사람을 해용(解傭)하는 것,
(5)한국정부의 각 차관과 내무부 경무국장에 일본인을, 또한 각 지방청 관리에 일본인을 임명하는 것 등 내정권을 장악하기 위한 보다 구체적이고 상세한 장치를 만들었다. 사법과 행정권을 직접 행사하는 ‘고등관의 부서’를 완전히 일본인이 독점하고, 군대까지 ‘해체’한다는 것이다. 한국은 이미 사실상의 주권을 상실했다.
일본군에 겁먹은 덕수궁...이완용 "폐하, 망설이면 큰일 납니다"
7월 25일 서울발 <도쿄아사히(東京朝日)신문>은 새로운 조약이 “이처럼 간단하고도 신속히” 처리될 수 있었던 것은 두 가지 이유가 있기 때문이라고 전하고 있다. 하나는 “엄격하고 치밀한 우리 군대배치와 경찰의 행동에 궁중이 몹시 두려워서 떨었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이완용총리의 역할이었다. 즉 이완용은 24일 밤 이미 물러난 상황(고종)을 알현하고 “만일 폐하가 일본의 요구에 이론을 제기하고 망설일 경우 일본의 태도가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없으니 전폭적으로 용인하는 이외의 길이 없다”는 점을 강조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완용은 알현한지 40분 만에 ‘재가(裁可)’를 받아 냈다는 것이다.
결국 국가의 운명을 가름하는 중대한 정미7조약은 일본의 군사적 위협과 친일세력의 영합으로 이루어 졌음을 보요주고 있다.
조약이 알려지자 통감부의 검열로 일부 삭제된 <황성신문>의 논설은 한국인에게 국혼(國魂)을 다짐할 것을 다음과 같이 촉구하고 있다.
"왜 우리만 노예 되었나? 2천만이 '대한국혼' 없기 때문이다"
“못살겠네, 못살겠네, 진실로 살 수가 없구나. 어떻게 하면 득생(得生)할 수 있을까 생각해보니 망망(茫茫)하기만 하다. 세월아 너 가지마라. 네가 가면 우리는 늙어 종 된 나이만[奴齡] 싸여간다.
아, 슬프다. 무정한 세월[光陰]은 빠르기 이를 데 없어 흐르는 물과 같고 달리는 말과 같아 쉬지 않고 재촉하는구나.
광무 9년 11월 18일[을사강제조약을 뜻함]이 벌써 삼년이 흘렀네. 기가 막히고 가슴이 미여지네. 우리 노예의 나이가 벌써 3년이란 말인가.
지금 20세기는 곧 평화의 세기라 남들은 희희낙락하면서 다 잘 사는데 다만 우리는 어찌하여 이렇게 참혹한 처지에 놓여있는가?
땅이 적어서 그런가. 아니다. 화려한 3천리 강토가 모두 백옥과 같다.
인구가 적어서 그런가. 아니다. 2천만이면 충분하고, 더하여 성품이 인자하고 관대하여 황인종가운데 상등(上等)이라 할 수 있다.
토지의 물산이 부족하기 때문인가. 아니다. 금은동철과 오곡백과, 삼포(蔘圃)와 삼림과 어채(魚菜)가 가는 곳마다 흥성하고 심는 곳마다 번성한다.
이처럼 화려한 강토와 상등의 인종과 풍부한 물산을 가지고도 천층(千層) 지하에 떨어져 남의 노예가 된 까닭은 무엇인가. 그 까닭은 다름이 아니라 2천만 동포가 각각 대한국혼(大韓國魂)이 없기 때문이다.
만일 사람이 혼이 없으면 죽는 것과 같이, 국민에게 혼이 없으면 나라가 망하는 것은 정해진 이치다. ....나라 혼[國魂]이 있는 나라에는 자유와 독립이 있고, 나라 혼이 없는 그 나라는 노예와 어육(魚肉)의 신세를 면치 못할 것이다”
'대호국혼(大呼國魂)' 논설을 게재한 <皇城新聞>.(1907.7.31)
'신문지법' '보안법' 공포...외국 특파원들 몰려 들어
이토는 여세를 몰아 27일에는 한국 내 언론을 통제하기 위한 ‘신문지법’을, 그리고 29일에는 집회와 결사를 금지하는 ‘보안법’을 공포했다.
한국인의 여론과 행동을 지배하기 위함이었다.
중요한 조치를 처리한 이토는 29일 저녁 언론인들을 일본인구락부(日本人俱樂部)로 초대했다.
당시 서울에는 헤이그 사태 이후 긴박하게 돌아가는 정세를 취재하기 위한 많은 내외신 기자들이 체류하고 있었다.
총독부의 고위관리들을 배석시킨 이 자리에서 이토는 그동안의 통감부 정책, 헤이그 사건 이후의 상황변화와 ‘신협약’, 그리고 앞으로의 통감통치의 방향에 관하여 설명했다.
"한국은 스스로 독립을 파괴했고, 일본은 한국 독립을 옹호"
그는 먼저 “최초로 한국의 독립을 승인한 나라는 한국인이 아니라 일본”이라는 것을 강조했다. 그러면서 한국은 오히려 “항상 스스로 독립을 파괴”해 왔고, 일본은 한국의 “독립을 옹호”해왔다는 것이다.
이토의 표현을 그대로 빌리면, “수천 년 사대주의 밑에서 벌레처럼 살아 온 한국인의 천성은 아직 구제되지 않았고”, 따라서 한국이 홀로서기 위해서는 “일본의 보호와 지도와 감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토는 다음과 같이 계속하고 있다.
이토 "일본은 한국을 합병할 필요 없습니다" 위장연극
“일본은 한국을 합병할 필요가 없습니다. 합병은 커다란 재앙(厄介)이 될 것입니다. 한국은 자치를 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일본의 지도와 감독이 없이는 건전한 자치를 이를 수 없습니다. 이것이 이번에 신협약을 보게 된 이유입니다......나는 서양인에게도, 한국인에게도, 일본인에게도 공언(公言)합니다. ....일본은 한국에 대하여 아량을 보일 필요가 있습니다. 한국도 역시 병력을 양성할 필요가 있습니다. 재정도 행정도 한국 자신을 위해 필요합니다. 일본은 어디까지나 한국을 돕지 않으면 안 됩니다. 나는 지금까지 이 주의를 유지해 왔거니와 장래에도 유지할 생각입니다.”(伊藤博文秘錄)
그러면서 이토는 한국과 일본이 ‘제휴’하여 “욱일(旭日)의 깃발과 팔괘(八卦)의 깃발이 나란히 휘날리는 것으로 일본은 만족”한다고 강조하여 병탄의 뜻이 없음을 거듭 밝혔다.
그러나 그로부터 이틀 후인 31일 한국군대를 해산함으로써 그의 ‘공언(公言)’은 ‘사언(詐言)’이었음이 밝혀졌다.
일본 정부, 일진회에 "수고했소" 50만엔 지원금
정미7조약이 성립된 직후인 1907년 8월 이토와 가츠라는 일진회에게 50만 엔의 지원금을 지급하기로 결정했다.
이 후원금은 “양위와 신협약 성립을 위한 일진회의 진력에 대한 보상의 뜻이 포함”된 것이다.
이토는 이를 단계적으로 나누어 전달하기로 하고, 일차로 부통감을 통해 이용구와 송병준에게 10만 엔을 교부했다. 이는 앞으로도 필요할 때마다 일진회를 활용하고 그 대가를 적절히 지불하겠다는 일본정부와 통감부의 의도를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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