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0. 韓山李氏/_082_五.一八

[이세종 열사 사망 사건에 대한 참고인 우편 진술서]

忍齋 黃薔 李相遠 2023. 10. 21. 1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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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진술서는  은미희 소설가의 단편소설 '활착'에서 인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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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미희 신작 단편소설 '활착'] - https://yellowroses.tistory.com/m/15855314

[은미희 신작 단편소설 '활착']

이 단편소설 '활착'은 '문학들 2021.여름 제64호'이라는 문학잡지에 실린 단편소설입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지원하는 우수문학잡지이고, 시, 소설, 동화, 평론 등을 아우르는 종합 문예지

yellowroses.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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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욱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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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청하신 진술서를 간인하고 서명하여 pdf 화일로 만들어 보냅니다. 더 필요하거나 보충할 내용이 있으면 알려주시기를 바랍니다. 최선을 다하여 답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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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기 김차순이 당시 방송부장을 하던 이완배 선배에게 연락했더니 35사단 헌병대에 감금되었을때 기억을 떠올렸습니다. 이완배 선배는 보안대에서 토목공사를 당해 온몸이 시커멋케 멍이 들어 35사단 헌병대에 입창하였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 제가 "우리가 불법으로 감금되었으니 단식투쟁을 하자"고 하여 입창자들이 단식하다 이완배 선배가 선동한줄 알고 헌병대장에게 불려가는 바람에 단식투쟁을 중단했던 기억을 떠올렸습니다. 또 저는 인후공사 보안대로 불려가서 김대중 내란사건에 연결시킬려고 고문을 당했고 또 이세종 선배의 죽음을 언급하는 경우 죽인다 하여 그 이후, 미국으로 유학차 도미할때까지 비겁하게 이세종 선배의 죽음에 침묵했고 까맛케 잊고 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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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라도 진실을 알려 이세종 선배의 원혼을 위로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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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기회를 만들어 주신 행인 김수돈 시인과 양윤신 선생님께 진심으로 감사하는 마음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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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이상원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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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종 열사 사망 사건에 대한 참고인 우편 진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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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 선생님께서는 1980년 5월 18일 당시 전북대학교 농과대학 1학년 학생으로 민주화운동에 참여하셨는데 무슨 이유로 그 날 학생회관 어디에 계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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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 전북대학교 농과대학 농학계열 입학 전, 제가 살던 서울 용산구 청파동 3가는 용산 미군부대 근처였습니다. 용산 미군부대에서 복무하고 있던 미국친구들이 뉴스위크지나 타임지 같은 미국잡지를 가져다 주었습니다. 그게 불행의 시작이었습니다. 전 열지 말아야 할 판도라의 상자를 열고 말았던 거지요. 미국친구들에서 받은 미국 발 잡지에는 놀라운 내용들이 들어 있었습니다. 당시 대통령은 최규하였는데, 실세는 따로 있었습니다. 그 때 한국 사회는 철저한 통제와 검열의 사회로, 우리가 보고 듣는 것이 모두 진실이 아니었습니다. 장막 뒤에 숨어 세상을 움직이는 세력들이 보여주고 들려주는 이야기만 보고 들을 뿐이었습니다. 저는 미국에서 발행된 그 잡지들을 통해 전두환이라는 이름을 처음 알았습니다. 거기에는 1979년 12월 12일, 당시 육군소장이었던 전두환이 쿠데타를 일으킨 일과, 앞으로의 정권찬탈 계획을 비롯해 향후 한국의 정세를 예측하는 기사가 소상히 실려 있었습니다. 이때 노태우도 등장하는데, 그는 전두환과 쿠데타를 모의하고 당시 판문점을 지키는 9 사단 병력을 빼서 서울로 들어왔다고 했습니다. 그런 탓에 판문점은 아무도 지키는 이가 없는 무주공산 상태가 되었지요. 저는 이 사실을 사람들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뜻을 같이 하는 친구들을 모았습니다. 나와 같은 1학년 농학계열 같은 반이었던 김차순 동기와 농대 1년 선배로 농학과 2학년이였던 이세종 선배가 저를 돕겠다고 나섰습니다. 제가 미국잡지에 실린 기사들을 번역하고 우리는 그 번역한 기사를 가지고 학교 학생회관 3층에서 등사를 했습니다. 등사지에 철판으로 번역한 기사를 쓰고, 등사판에 잉크를 붓고 롤러를 미는 방식이었지요. 그렇게 만든 유인물을 우리(이상원, 김차순, 이세종)는 친구들과 시민들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무섭지 않았냐구요? 당시는 무서움보다는 사실을 알려야 한다는 소명의식이 더 컸습니다. 젊은이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다고 생각했으니까요. 우리가 찍어낸 유인물을 읽고 친구들과 시민들은 물었죠. 전두환이 누구냐고. 그래서 저는 1980년 5월 17일과 1980년 5월 18일에 학생서클룸이 몰려있던 학생회관 3층에 학생서클들이 공동으로 함께 사용하는 등사실에서 미국잡지의 최신 정보를 번역하여 만든 유인물을 등사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시간에 학생회관 3층에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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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 1980년 5월 18일 01:30경 전북대학교 학생회관에 7공수부대 계엄군이 출동하여 2층으로 오르는 도중, 2층에서 1층으로 향하는 계단 앞에서 고 이세종과 유광석(이들은 김제 중앙중학교 동창생)이 함께 내려가려다 이들과 마주쳐 고 이세종은 3층으로, 유광석은 2층 화장실로 도피하였고, 이 장면을 2층 농성장 출입문 앞에 있던 양상민(원광보건대학생)이 목격하였다고 합니다. 즉 이세종이 2층에서 3층 계단으로 도피하는 것을 목격한 사람은 유광석, 양상민입니다. 선생님은 그 때 3층 등사실에서 무엇을 하시다가 어느 지점에서 이세종의 어떠한 모습(가령 가쁜 숨을 몰아 쉰다거나 등)부터 어떠한 모습까지를 목격하셨나요? 또 당시 계엄군은 몇 명이 어떠한 모습(휴대한 장비는 무엇이 있나요?)으로 어디에서 무엇을 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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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 운명의 날이었습니다. 1980년 5월 18일 01:30경, 그날도 저는 늘 하던 대로 유인물을 인쇄하고 기숙사로 돌아가려는 참이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밖이 소란스러웠습니다. 그 밤에 말이죠. 모든 것이 고요하고 적막하게 가라앉을 시각에 말입니다. 차가운 시멘트 바닥을 울리는 어지러운 발소리들과 거칠게 문이 열리는 소리, 무언가 바닥에 내동댕이치며 깨지는 소리들, 그 소리들이 뒤섞여 사방을 울렸죠. 순간 2층 농성장에서 3층으로 올라오던 이세종 선배와 내 시선이 부딪쳤습니다. 뭐지? 무슨 소리지? 우리는 불안하게 눈으로 물었습니다. 불안은 이내 공포로 뒤바뀌었습니다. 도망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이세종 선배와 나는 옥상으로 도망치다 3층에서 옥상으로 향하는 계단 앞에서 잡혔습니다. 그들은 검은 베레모를 쓴 장교나 하사관으로 보이는 자들과 철모를 뒤집어 쓴 병사들이 M16총에 대검을 꽂은 채 학생회관으로 쳐들어왔습니다. 그들은 닥치는 대로 일반 곤봉보다 긴 박달나무로 만든 곤봉을 휘둘러댔습니다. 한번 맞으면 두개골이 바스러지는 죽음의 곤봉이죠. 우리는 얼마가지 못해 3명의 공수부대원들에게 잡히고 말았습니다. 당시 그 계엄군 3명은 단독군장에 한명은 착검한 M16총을 들고 있었고 2명은 박달나무로 만든 일반 곤봉보다 긴 곤봉을 들고 있었고 M16은 이깨에 메고 있었습니다. 이세종 선배는 제 눈앞에서 곤봉을 들고 있던 공수부대원과 착검한 M16을 들고있던 2명의 공수부대원에게 한명은 곤봉으로 그리고 또 한명은 M16의 개머리판으로 “퍽” 소리가 나게 머리를 맞고는 비명소리도 없이 그 자리에서 꼭꾸라 졌습니다. 머리가 깨진 선배는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죠. 곤봉을 내리치던 공수부대원은 M16을 메고 있었고 M16의 개머리판으로 내리치던 공수부대원은 곤봉이 없었는지 착검한 M16을 휘둘러대고 있었습니다. 저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다행하게도 다른 한명의 공수부대원은 M16을 메고 있어서 M16이 아니라 곤봉과 무자비한 군홧발로 저를 때리고 차고 하여, 전 다리 인대가 파열되고 피투성이가 된 채 포승줄에 묶여 처음에는 밀패된 군용무기차에 실려있었습니다. 군용무기차...... 그곳은 어두컴컴했고, 공기도 제대로 통하지 않았지요. 마치 무덤 속 같았습니다. 그러다 학생들이 많이 잡히자 경찰버스가 와서 그곳으로 옮겨져서 전주경찰서로 실려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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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 선생님께서 고 이세종이 구타 당하는 장면을 목격한 사실 장면을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십시오? 그리고 느낌을 다시 한 번 구별해서 말씀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가령 몇 명의 계엄군이 이세종을 몇 미터 간격 혹은 몇 초의 시차를 두고 뒤쫒아와 그 중 몇 명이 무슨 말을 했는지? 어디를 무엇으로 어떻게 때리는 장면을 보았다. 그 때의 느낌은 어떠하였다. 등 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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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 이세종 선배와 저는 옥상으로 도망치다 3층에서 옥상으로 향하는 계단 앞에서 계단도 발지 못한체 3명의 공수부대원들에게 잡히고 말았습니다. 그 계엄군 3명은 단독군장에 한명은 착검한 M16총을 들고 있었고 2명은 박달나무로 만든 일반 곤봉보다 긴 곤봉을 들고 있었고 M16은 이깨에 메고 있었습니다. 이세종 선배는 제 눈앞에서 곤봉을 들고 있던 공수부대원과 착검한 M16을 들고있던 2명의 공수부대원에게 한명은 곤봉으로 그리고 또 한명은 M16의 개머리판으로 “퍽” 소리가 나게 머리를 맞고는 비명소리도 없이 그 자리에서 꼭꾸라 졌습니다. 머리가 깨진 선배는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죠. 이세종 선배의 마지막 모습은 제 눈앞에서 2명의 공수부대원에게 한명은 곤봉으로 그리고 또 한명은 M16의 개머리판으로 “퍽” 소리가 나게 머리를 맞고는 비명소리도 없이 그 자리에서 꼭꾸라 지는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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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 선생님이 체포되신 순간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십시오? (가령, 이세종이 매질을 당하고 붙잡혀 있을 때, 어디를 누구로부터 구타 당하고 이세종이 무엇을 할 때 2층 농성장으로 계엄군 몇 명에 의해 연행되었다... 선생님이 이세종을 마지막으로 본 장면은 어디에서 무엇이었다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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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 저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이세종 선배가 봉변을 당하는 거의 같은 순간에, 다행하게도 다른 한명의 공수부대원은 M16을 메고 있어서 M16이 아니라 곤봉과 무자비한 군홧발로 저를 때리고 차고 하여, 전 다리 인대가 파열되고 피투성이가 된 채 포승줄에 묶여 학생회관 앞 잔디밭으로 개처럼 끌려나왔습니다. 처음에는 밀패된 군용무기차에 실려있었습니다. 저도 이세종 선배처럼 죽을 수 있다는 공포감에 머리는 백지장이 되고 말았습니다. 제가 이선종 선배가 즉사했다고 판단한건 제가 포승줄에 묶여 잡혀갈 때 계단아래로 끌려 내려가면서 보니, 이세종 선배는 건딜지도 않고, 이세종 선배를 죽인 공수부대원들이 상관에게 보고하는 것 같았고 어수선하게 베레모를 쓴 장교와 하사관 몇 명이 분주하게 3층에서 옥상으로 오르는 계단 쪽으로 몰려가고 있었습니다. 차후에 이세종 선배를 죽인 공수부대원들의 얼굴을 기억해 보려고 애썼지만 그 얼굴이 그 얼굴이었습니다. 2층 농성장의 사정은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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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 선생님께서 기억하시는 그 날 5월 18일 새벽 체포되시는 시간대에 일어난 특별한 상황(날씨, 기온, 밖에서 계엄군이 작전을 하면서 들렸던 소리 등등)이 있으면 말씀해 주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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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 1980년 5월 17일과 18일 01:30경, 이세종 선배의 죽엄까지 저는 늘 하던 대로 3층 등사실에서 미국잡지 변역과 등사지에 그 내용을 긇어넣고 잉크를 붇고 등사를 했고, 기숙사로 돌아가려는 참이었기 때문에 밖에서의 상황을 파악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때 갑자기 밖이 소란스러웠습니다. 그 밤에 말이죠. 모든 것이 고요하고 적막하게 가라앉을 시각에 말입니다. 차가운 시멘트 바닥을 울리는 어지러운 발소리들과 거칠게 문이 열리는 소리, 무언가 바닥에 내동댕이치며 깨지는 소리들, 그 소리들이 뒤섞여 사방을 울렸죠. 순간 2층 농성장에서 3층으로 올라오던 이세종 선배와 내 시선이 부딪쳤습니다. 또 학교 기숙사에서 생활하고 있었기 때문에 복장도 간편하게 하고 있었지만 구타당하고 잡혀가는 와중에 신발은 분실되어 찾을 길이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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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 1980년 5월 18일부터 현재까지 그 날 출동했던 7공수 계엄군 중 이름을 알고 있거나 누구인지를 알 수 있는 근거가 있으면 말씀해 주십시오? (가령, “학교앞 막둥이네 튀김집 둘째 아들이 계엄군이었다.” 는 등의 근거도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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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 차후에 이세종 선배를 죽인 공수부대원들의 얼굴을 기억해 보려고 애썼지만 그 얼굴이 그 얼굴이었습니다. 알 길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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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 1980년 2학기에 학교에 복학하셔서 고 이세종이 추락했던 곳(학생회관 오른쪽 스쿨버스 승강장 천막 위)를 보신 적이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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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 분명, 내 눈앞에서 옥상으로 도망치다 3층에서 옥상으로 향하는 계단 앞에서 계단도 발지 못한체 2명의 공수부대원에게 한명은 곤봉으로 그리고 또 한명은 M16의 개머리판으로 “퍽” 소리가 나게 머리를 맞고는 비명소리도 없이 그 자리에서 꼭꾸라 졌습니다. 머리가 깨진 선배는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인후공사 보안대에서 풀려나 학교로 돌아왔을 때, 도망치다 옥상에서 떨어져 죽었다고 알려져서 두려웠고, 제가 혹시 진실을 떠들다 또 잡혀가 고문 받을까 겁이 나서 학생회관 쪽으로 갈수가 없었습니다. 비겁하고 용기 없었음을 반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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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 기타 말씀하시고 싶은 사항이 있다면 자유롭게 기재해 주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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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 그 뒤로 어땠냐구요? 어땠을 것 같습니까? 그들이 저를 배려해줬을까요? 먼저 이세종 선배의 이야기부터 해야겠습니다. 그 선배가 5.18의 첫 희생자였습니다. 광주에서 희생자가 나오기 전, 이세종 선배가 죽었죠. 그날 전북대의 난입과 이세종 선배의 죽음은 광주에서 일어난 비극의 전주곡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야차들이었고, 두억시니들이었고, 악마였습니다. 사람이라면 그럴 수 없지요. 눈앞에서 방금까지 눈을 마주치고 온기를 나누던 선배의 죽음은 내 생을 송두리째 흔들었습니다. 죽음이 코앞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는 건 무척이나 두려운 일입니다. 제가 끌려간 곳은 전주경찰서, 인후공사 보안대, 전주 35사단 헌병대 유치장이었습니다. 그곳에서 그들은 나를 협박하고 겁박하고 회유했습니다. 그들은 내게 종이 하나를 들이밀고는 적힌 그대로 외우고 자복하라고 강요했습니다. 그들이 작성한 조서였지요. 내용은 이랬습니다. 내가 김대중에게 50만원을 받고 학원소요를 일으키기 위해 서울에서 일부러 전라도 소재의 학교 에 위장입학 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세상에 김대중에게 50만원을 받았다니요. 나는 한 번 도 김대중을 만난 적이 없었고 당연히 돈도 받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또 이세종 선배의 죽음을 입 밖에 내지 말라고 강요했습니다. 아예 기억자체를 지우라고 협박했습니다. 꽁트였죠. 하지도 않은 일을 했다고 시키고, 본 것을 보지 못했다고 하라니요. 하지만 전 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하지 못했습니다. 어떻게 제가 하지 않은 것을 했다고하고 본 것을 보지 못했다고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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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정의가 존재할까요? 제 삶을 그렇게 내놓았는데, 이세종 선배는 목숨을 바쳤는데, 제가 정의를 이야기하고, 그 날의 진실을 이야기하면 사람들은 지겨워합니다. 또야? 또 시작이야? 그만해. 제발 그만하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셨지요. 그 피로 세상의 의를 이루시려했습니다. 그래서 세상에 의와 선은 구현되었을까요? 이세종 선배가 목숨을 바쳤는데, 저 역시 피를 흘렸는데, 세상이 달라졌을까요? 제 삶은 이렇듯 송두리째 뽑히고 위태롭게 흔들리는데, 가해자는 죽을때까지 사과를 하지 않았습니다. 진정으로 사과하면 받아줄 용의가 있는데, 그 사람은 끝내 우리를 조롱했습니다. 용서의 성립은 가해자가 용서를 구했을 때만 성립이 됩니다. 그 악마들이 언제쯤이나 진정으로 제 잘못을 뉘우치고 용서를 구해올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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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은 제가 임의로 진술한 틀림없는 사실임을 확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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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최초 사망자는 1980년 5월 18일, 새벽 0시 전라북도 전주 전북대 학생회관에서 금마7공수 부대원에게 무참히 살해된 전북대 농대 농학과 2학년 이세종 열사입니다. 제가 그 과정을 바로 눈앞에서 생생하게 지켜본 산 증인입니다. 진실을 왜곡하는자 천벌을 받을 겁니다.
5.18 The first fatality was Lee Se-jong, a sophomore agriculture major at Chonbuk National University, who was killed in cold blood by members of the 7th Airborne Division at the student union of Chonbuk National University in Jeonju, North Jeolla Province, on May 18, 1980, at 0:00 am. I am a living witness who saw it happen right in front of my eyes. Those who distort the truth will be punish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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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상에서 5.18의 진실을 왜곡하며 첫 희생자가 5월 20일 밤에 사망한 경찰이라고 주장하는 글을 보았습니다. 아닙니다. 1980년 5월 18일, 새벽 0시 5.18의 첫 희생자는 금마7공수 부대원에게 전라북도 전주 전북대 학생회관에서 살해된 이세종 열사입니다.
I've seen articles online that distort the truth of 5.18, claiming that the first victim was a police officer who died on the night of May 20. No, the first victim of 5.18 was Lee Se-jong, who was killed at 0:00 a.m. on May 18, 1980, in the student union of Jeonbuk National University in Jeonju, South Korea, by members of the Kumma 7th Airborne Divi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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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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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마‬ ‪#‎전두환‬ 을 처형(處刑)하라! 한 손엔 몽둥이 한 손엔 짱돌을 움켜쥐고 연희동(延禧洞)으로 몰려가 살인마(殺人魔) 전두환(全斗煥)을 주살(誅殺)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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