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2. Humanities/22_한국역사

충남 강경 상시장

忍齋 黃薔 李相遠 2016. 3. 23. 0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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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도시 강경


| 이기욱 | 충남발전연구원 위촉위원, 목원대 건축학과 박사과정 |


2대포구 3대시장의 신화를 간직한채 잠들어 있는 강경은 근대사의 흔적을 가장 많이 간직한 도시중의 하나이다. 현재는 퇴락된 모습이지만 그 속에 감추어진 수많은 시간의 축적으로 강경이 가지는 역사성을 가늠할 수 있다. 강경을 ‘역사도시’로 호칭하며 보존하고, 활성화시키려는 이유는 강경만이 가질수 있었던 독특한 역사의 흔적과 그 무한한 가치를 남기고자 하는 마음에서다.



강경의 지리적 위치

금강곡류부 우안에 위치한 강경은 구릉 및 범람원상에 자리잡고 있으며, 북쪽의 옥녀봉(玉女峰)과 동쪽 4㎞지점에 위치한 채운산(彩雲山) 등의 구릉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20m 이하의 논산평야와 강경평야로 이루어진 평야지대다.

행정구역상 충청남도 논산시에 속하며, 동쪽은 논산시 채운동, 서쪽은 부여군 세도면(世道面), 남쪽은 전라북도 익산군 망성면(望城面), 북쪽은 논산시 성동면(城東面)과 접해 있다.

강경을 통과하는 금강은 과거 서해안의 간만조(干滿潮)를 이용한 내륙의 수로로서 군산, 강경, 부여, 공주를 연결하던 뱃길이었다. 그 중심에 강경이 있어서 일찍부터 금강 수운교통의 요지 역할을 하였다.



금강수운

금강 내륙수로는 백제시대에는 일본과의 중요한 교통로였고, 고려조에서는 수납된 세곡을 운반하는데 이용되었다.

조선초기에는 여산창(礪山倉), 군산창(群山倉), 성당창(聖塘倉)의 세미를 서울로 운반하는데 이용되었고. 조선중기에는 제주에서 미역과 고구마, 좁쌀을 실은 배들이 드나들었다. 또한 중기부터는 중국의 무역선들이 비단과 소금을 싣고와 거래를 시작했다.

인근 지역간 소규모 이용에 불과하던 금강의 수운교통은 1899년 군산 개항을 계기로 본격적인 근대적 내륙수로로 이용되게 된다. 즉 군산개항은 강경을 중심으로 하구부 군산, 상류부 부여, 공주, 부강 등을 하나로 이어서 결절지역관계를 성립시켰다.

금강의 내륙수로는 3구간으로 구분되는데, 상류부는 부강 이상, 중류부는 부강-강경, 하류부는 강경-군산으로 나누어진다. 그중 금강 하류부는 군산과 중류부 공주와는 수륙양면으로 결합되어 있고 남쪽의 전주와 동쪽의 대전과도 육로로 연결되어, 충청, 전라 양도의 수부(首府)와 유역의 곡창을 장악함으로써 해안지방과 내륙지방의 산물을 한점에다 결합시켜 주고 있다. 강경은 바로 여기 중하류부의 중심을 이루고 있어 화물이 모이는 물류 집산지로서의 기능을 담당하게 되며, 중계하항으로서의 상업적 번영을 누리게된다.



강경포구, 강경장

강경이 대시장으로 크게 부각된 것은 19세기 말에 들어와서이다. 17세기 말엽에 열린 강경천 주변의 하시장에 이어 1870년에 옥녀봉 동쪽 기슭에 상시장이 설시되면서 2대포구, 3대시장으로 발전하였다. 조선후기 2대포구는 원산, 강경, 3대시장으로는 대구와 평양, 강경을 꼽고 있다. 그 당시 강경의 최대 인구는 3만여명에 달했으며 상인 등 유동인구까지 합하면 10만명에 이를 정도였다.

하시장은 수산물, 상시장은 곡물 등의 농산물이 주로 거래되었다. 수산물과 농산물의 거래규모는 당시 호남지방에서 가장 큰 규모였다. 이때 강경에서는 지방상인은 물론 국제 상인들의 상행위도 이루어지고 있었다. 조선의 항구가 1870년 부산, 1874년 원산, 1877년 인천의 순으로 개항한 것에 비하면, 강경포구는 내륙부 기항지로 주요 항구의 개방보다도 앞서서 국제 무역지 역할을 하였다.

일제 초기부터 반세기동안 성어기인 3~6월 어획기 강경의 선착장에는 100여 척의 어선이 정박했고, 충남을 비롯 충북, 전북, 경기의 이름 있는 상인들이 하루에 2∼3만명씩 생선을 사기 위해 몰려들어 여관마다 초만원을 이루었다. 또한 북옥동 선창가 양편의 색주가(色酒家)도 역시 불야성을 이루었다. 각종 수산물이 강경으로 집산되자 거래되고 남은 물량은 오래 보관하기 위해 염장법과 수산가공법도 따라서 발달했고, 새우젓 등 젓갈류은 국내 최대 공급시장으로 번성했다.

강경의 상권은 충청도와 전라도의 22개군에 달했다. 1911년 강경시장의 개시일에는 점포수가 평균 900개, 출시인원은 평균 7,000명이었으며 가장 성황을 이룰때는 추석전과 설초로 15,000명 이상이 모여들었다. 시장액(市場額)만도 1년간 200만원에 달하는 전국적인 규모였다.1) 거래품목은 수산물, 곡물류 이외에도 각종 식료품, 면포, 면방직, 도기 철기류 기타 일상생활 필수품 등이었다.



강경 객주의 활동과 세력

강경의 객주는 1840년대부터 1940년대까지 1백여년동안 상권을 좌지우지했는데 당시 강경에는 배를 10여 척씩 부리는 객주들이 20여 명이나 있었다고 한다. 객주들은 한사람이 수십명의 수산물 도매상인들을 마음대로 움직이고 뱃사람들까지 부리니 자연히 수산물 시장은 객주중심으로 발전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객주들은 노동조합으로 결속되어 있었고, 고깃배들의 하역작업과 관리가 노동조합을 통해 이루어졌기 때문에, 대부분의 상인, 노무자들이 조합에 가입되어서 활동하였다.

1920년대 내륙지방으로의 수산물 유통은 대부분 강경포구를 통해 전국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노동조합의 규모나 세력은 대단하였다. 조합원은 1조당 60∼80명으로 총 10개조, 780여 명이 있었다고 한다.2)

1924년 북옥리에 갑문 시설이 완성된 후부터 일본상인들이 어업활동을 시작했고, 1935년 어업보호취체규칙(漁業保護取締規則)을 만들어 객주들을 정면으로 탄압했다. 이 규칙의 골자는 ‘어획물은 한곳에서만 판매토록 하고 해상에서 고기를 다른 배로 옮겨 싣지 못한다는 것’으로 강경과 마산에서만 적용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어업조합을 만들어 기존 객주체계를 바꾸려고 하였다. 어획물을 위판장에서만 거래토록 한 것은 객주들로 하여금 어업조합에 소속되거나 어협의 허가를 얻도록 해서 그들의 기능을 약화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이같은 일제의 조치는 조합에 가입된 객주들의 거센 반발을 일으켜 이 규칙을 걸어 행정소송을 하고 강경의 객주들과 연결된 전국의 수산물 도매업자들에게 어업조합에서 고기를 사가지 않도록 하는 등 일제와 맞섰다.

당시 어부들과 도매상인들은 객주들의 지시를 따랐고 결국 행정소송에서도 승소하여 일본인들은 강경 객주들의 위력을 빼앗지는 못했다.3) 객주들이 노동조합으로 단결된 결과였다.

그후 70년대 초까지 10여명의 객주가 활동하면서 그런대로 명맥은 유지하였으나, 급속도로 사양길로 접어들어 78년을 마지막으로 강경의 객주업은 막을 내렸다.



철도에 의한 강경의 쇠퇴

1905년 5월 경부선의 개통은 강경의 쇠락을 예고하는 전주곡이었다. 경부선이 금강의 소항 종점인 부강을 지남에 따라 군산과 강경을 경유하여 부강으로 공급되었던 수산물과 일용 잡화는 부산과 인천을 경유하는 철도가 수송함으로써 금강수운의 역할은 자연히 감퇴 할 수밖에 없었다. 경부선이 상류의 공주와 청주지역을 강경의 상권에서 분리시킴으로써 금강수운과 하안취락은 큰 변혁을 겪게 되었다.

1911년 호남선의 부설은 금강수운의 쇠퇴와 강경의 침체를 더욱 가속화시켰다. 그해 7월 11일 호남선 구간중의 대전∼강경간이 먼저 개통됨으로써 강경은 번영과 침체의 길을 함께 걷게 된다. 강경역이 세워지고 도심지에 많은 근대건축물이 들어섰지만, 기존 시장의 역할은 서서히 줄어들게 되었다.

1912년 강경∼이리∼군산간의 개통, 1914년 1월 11일 이리∼목포 구간의 개통으로 호남선이 완성됨으로써 금강수운은 호남선과의 경합관계로 바뀌게 되었다. 초기에는 금강수로와 철도의 양면에서 군산항과 더욱 밀접하게 결합될 수 있었기 때문에 강경은 얼마 동안 기존 시장세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철도와 수운은 처음부터 경쟁상대가 되질 못하였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금강수운은 급격하게 위축되었다.

더욱이 1911년 공주 논산을 경유하는 경성∼전주∼목포간 도로가 개통되면서 철도에 빼앗기던 수운의 역할은 도로교통에 의해서도 상당부분 흡수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금강수운은 공주에서 강경 방면으로 출하하던 소량의 곡물의 수송에만 이용될 만큼 약세에 놓였다.

철도는 수운에 의한 동서간 상품이동을 경부선에 의한 남북간 이동체계로 바뀌어 놓았다. 강경에서 수운에 의해 내륙지방으로 운송되던 상품이 철도수송으로 바뀌면서, 강경 및 부강을 중심으로 모이던 물류가 철도 교차점인 대전이나 조치원으로 옮겨지고 있었다. 즉 수운이 점차 쇠퇴하고 철도교통이 부각됨에 따라 대전과 같은 새로운 철도교통 도시와 군산과 같은 새로운 하항(河港)도시가 발달하여 강경은 점차 위축되기 시작했다. 게다가 1914년 논산에 1921년 대전에 각각 기존의 행정권과 은행권을 빼앗겨 강경의 위상과 상권은 더욱 위축되었다. 그렇지만 그 가운데서도 1930년 4월 1일, 강경면에서 읍으로 승격되었다. 이는 논산이 1938년 10월 10일 논산읍으로 승격된 것을 보면 훨씬 더 빨랐던 것을 알 수 있다.



일본의 수탈기지화

1920년대 초 강경은 금강수운에 의한 내륙으로의 상품이동은 거의 중단된 상태였고, 강경장도 퇴락해갔지만, 포구는 일본의 농어물 수탈 전진기지로 바뀌어 계속 이용되었다. 충청도와 내륙지방의 쌀과 면화는 뱃길과 철길을 통해서 빠르게 일본으로 실려나갔다.

일본인들은 강경시내 5곳에 대형 도정공장을 세우고 충청도와 내륙지방에서 수확한 쌀을 집하해서 도정한 후 일본으로 보냈다. 강제착취라는 인상을 피하기 위해 강경에서 1차 도정한 후 선편으로 군산으로 보내 다시 대형화물선으로 옮겨 싣는 수법을 썼다.

1926년 당시 조선의 쌀 생산량은 총 1,497만섬이었는데 일제는 그 중 36.3%인 544만섬을 자기 나라로 수탈해 갔다. 544만섬 가운데 25.2%에 해당하는 137만 3천여섬이 금강수로의 강경을 통해 군산에서 선적하여 일본으로 수송되었다.4)

일제는 강경을 농어물 수탈지로서 육성하기 위해 집중적으로 개발했다. 이미 1915년 2월 현미와 콩을 검사하는 곡물검사소를 설치하였고, 1924년 5월 총공사비 365,000원을 들여 상수도 공사를 완성하는 등 각종 시가지 확충사업을 추진하였다.



도시의 변천

18세기 강경은 옥녀봉의 동남면에 중심 시가지가 형성되어 있었고, 시가지 깊숙이 곡류하는 강경천을 이용한 수운교역이 활발하였다. 인구의 증가와 시장의 활성화에 따른 취락의 확장은 옥녀봉 동쪽 습지를 매립하여 이루어 졌다. 당시에는 주요 교통, 운송수단이 주로 수운에 의해 이루어졌으므로 도로의 개설을 미비하였다. 도로망은 현재의 서창동에서 홍양동 사이에 1간 폭의 도로가 있었다.

시가지 중앙을 곡류하는 강경천은 수운교통의 이점도 있었지만 여름철에는 홍수로 인한 범람으로 가옥피해도 컸다.

19세기 말에는 수운교통의 발달에 따라 배가 접안하기 쉬운 옥녀봉 기슭 강경천 연변으로 시가지 중심이 이동했다. 옥녀봉아래 외항과 강경천 하안의 내항이 있어 수륙간의 상품거래를 맡아했고, 두항을 연결하는 강경천변으로는 소금창고, 곡물상 등이 있어 무역항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또한 옥녀봉에 인접한 동쪽에는 상(上)시장이 그 남쪽으로 얼마간 떨어져서 하(下)시장이 있었다.

1910년 강경은 3개의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첫번째는 옥녀봉에서 남동 방향으로 강경천을 따라 발달되어 있는 중심부이고, 두번째는 금강 하류부 남방의 황산벌 하항이고, 세번째는 도심 중심부의 남방에 위치한 상강경이다. 이때까지도 여름철이 되면 하천은 자주 범람했으며, 집중호우일 경우 취락은 3개의 섬을 이루었다.

1915년경에는 도심부가 발달되면서 강경은 크게 두부분으로 나뉘는데, 상시장과 하시장을 연결하는 도심과 황산의 취락이다. 두 시가 사이는 모두 밭이었고, 중간위치인 강경역 부근에는 취락이 없었다. 옥녀봉 동쪽 서창동, 중앙동 일대가 강경의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내항의 연변부인 서창동, 염천동 일대에는 공산품을 수용하는 대형창고를 가진 일본인들이 대부분 거주하고 있었으며 수산물만 거래하는 한국인도 다수 있었다. 또한 홍교동 중앙동에는 소매를 겸한 도매상의 일본인들이 주로 거주했고 한국인도 있었으나 대부분 영세적이었다.5)

1920년경에 그동안 1907년부터 꾸준히 실시된 도로 개수사업으로 현재와 비슷한 도로망을 구비하게 되었다.

또한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강경천에 대규모 제방을 쌓고 강경역 부근의 저습지를 매립하여 개발해 갔으며, 그 부근에 전기회사, 부강사, 공회당 등이 들어서서 논산으로 연결되는 도로 주변이 시가지로 확장되었다. 이러한 시가지 정비사업으로 현재와 거의 비슷한 강경의 모습이 완비되었다.

강경천 제방공사는 1922년 5월 착공하여 1924년 11월에 완공을 보았으며 공사비는 총 133,525원이 소비되었다.6) 일본은 1910년부터 1945년까지 강경지역에 총 45개소의 수리시설과 제방을 쌓았다.



근대건축의 유입과 변천

강경의 근대건축물은 190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강경천의 호안공사가 완료되면서 세워지기 시작했다. 시가지에는 상업도시 구조에 적합한 각종 상점, 금융건물 그리고 점포병용 주택들이 세워졌는데, 일본인에 의한 것이 대부분이었다.7)

즉 강경의 상권은 1910년 이전부터 일본인들이 잡고 있었는데, 1899년 일본상인 오카쥬사쿠(岡壽作)은 수산물 도매상을 개설한 것을 필두로 강경에 몰려들어 1905년에는 일본인 자녀들을 위한 심상고등소학교를 상(上)강경에 세우는 등 그들만을 위한 근대건축물을 1900년대부터 세우기 시작했다.

강경은 문화시설 보급도 빨라 1920년대 도내에서 처음으로 전기가 들어왔고, 강경읍만의 전기공급을 위한 화력발전소가 대흥리(현 동광상회)에 1백평 규모로 세워졌다. 상하수도도 이때 놓여졌고, 호남지방 최초로 강경극장도 세워졌다.

주요 관공서도 일찍부터 강경에 자리잡았다. 1902년 5월 강경우체국이 충청남도에서 최초로 설립되어 우체국 고유번호가 충남 1번으로 강경 우편수취소로 출발하였다. 1909년 지방법원 지원, 1914년 강경면사무소, 1920년 강경상업학교 1921년 전매서, 1922년 경찰서, 1932년 한전지점 등 대부분이 20년대를 전후해서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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