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1. Dr. Sam Lee/17_20세기100선

055.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의 앙티 오이디푸스: 자본주의와 정신 분열증 – Anti-Oedipus: Capitalism and Schizophrenia by Gilles Deleuze and Félix Guattari, 1972

忍齋 黃薔 李相遠 2024. 8. 14. 1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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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v02Zqgjp3dw?si=vGNR_iMccLx6hmFw

 

055.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의 앙티 오이디푸스: 자본주의와 정신 분열증 – Anti-Oedipus: Capitalism and Schizophrenia by Gilles Deleuze and Félix Guattari, 1972

‘욕망 기계’, 욕망이 없는 인간은 없습니다. 이런 인간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어떤 욕망의 정신 장애로 고통을 겪고 있을까요? 아마도 그 정신 장애는 인간들과 인간들 간 흐름의 단절일겁니다. 그 흐름이 막히면 병이 됩니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은 모든 정신 질환의 근원을 오이디푸스의 근친 상간에서 찾고 있으며 정신병환자를 오이디푸스 삼각형에 가두어 놓았습니다. 그 후 정신 분석학자들은 환자를 소파에 눕히고 대화를 통하여 병의 원인을 찾으려 하고 모든 것을 성적 충동으로 설명하려 했습니다. 프로이트를 신봉하는 이런 정신분석학자들에 의하면 모든 정신질환은 또 사회로 부터 말미암는다고 합니다.

인간이라는 욕망기계들은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혹은 편집적인 파라노이아인으로서 큰 집단을 조직하여 남을 지배하려 하고 혹은 정신분열자로서 이상한 망상에 사로잡힌다고 합니다. 욕망기계 편집증환자 파라노이아인으로서 깡패같은 큰 집단을 조직하여 남을 지배하려는 파시스트로, 독재로 치닫습니다. 정신분열자로서 이상한 망상에 사로잡힌자는 간혹 예술에서 천재성을 발휘하기도 합니다. 이 앙티오이디프스 책은 독자적인 철학적 견지에서 현대 문명을 비판하면서 유물론적 정신분열자 분석의 길을 제시하고 있다고 평가 됩니다. 자 그럼 이제부터 1972년에 이 앙티 오이디푸스를 집필한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를 살펴보고 이해한후 ‘앙티오이디푸스: 자본주의와 정신 분열증’ 속으로 빠져보도록 하겠습니다.

질 들뢰즈의 생애 – Life of Gilles Deleuze

20세기 후반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사회학자인 질 들뢰즈(Gilles Deleuze, 1925.1.18~1995년 11월 4일)는 1925년 1월 18일 파리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나 생애 대부분을 파리에서 살았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오데트 카마우에르(Odette Camaüer)이고 그의 아버지 루이스 들뢰즈(Louis Deleuze)는 엔지니어였습니다. 그의 초기 학교 교육은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시작되었으며, 그 기간 동안 카르노 리세 고등학교를 다녔습니다. 그는 또한 문학과 인문학을 배우는 2년제 리세 앙리 4세(Lycée Henri IV)의 카네(khâgne) 전문대학을 1년간 다녔습니다. 나치가 프랑스를 점령하는 동안 들뢰즈의 3살 위 형인 조르주(Georges)는 프랑스 레지스탕스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강제 수용소로 이송되던 중 사망했습니다. 1944년에 들뢰즈는 소르본느대학에서 공부했습니다. 그의 스승으로는 조르주 캉기엠(Georges Canguilhem), 장 이폴리트(Jean Hyppolite), 페르디낭 알키에(Ferdinand Alquié) 그리고 모리스 드 간디약(Maurice de Gandillac)과 같은 철학사에서 유명한 전문가가 여러 명 있었습니다.

현대 철학의 표준적 인물에 대한 들뢰즈의 평생 관심은 이러한 스승들 덕분이었습니다. 들뢰즈는 1948년에 소르본대학에서 철학학사학위를 받았습니다. 1957년 파리 대학교에 교수로 자리를 잡을 때까지 ‘아미앵’, ‘오를레앙’, ‘루이 르 그랑’같은 여러 리세고등학교에서 가르쳤습니다. 1953년에 들뢰즈는 데이비드 흄(David Hume)에 관한 그의 첫 번째 논문인 경험주의와 주관성을 출판했는데, 이 논문은 들뢰즈가 1947년에 ‘장 이폴리트’와 ‘조르주 캉기엠’의 지도 하에 발표한 석사학위 논문이었습니다. 1960년부터 1964년까지 그는 ‘국립과학연구센터’에 재직했습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선구적인 저서 인 ‘니체와 철학(Nietzsche and Philosophy , 1962)’을 출판했고 ‘미셸 푸코(Michel Foucault)’와 친구가 되었습니다. 1964년부터 1969년까지 그는 리옹대학교의 교수로 재직했습니다. 1968년 들뢰즈는 5월, 68시위가 진행 중인 가운데 박사학위 논문 두 편을 준비했습니다.

그는 나중에 ‘차이와 반복(Difference and Repetition - Gandillac 지도)’과 ‘철학에서의 표현주의: 스피노자(Expressionism in Philosophy: Spinoza - Alquié 지도)’라는 제목으로 두 편의 논문을 출판했습니다. 1969년에 그는 Vincennes/St. 데니스에 있는 교육개혁을 실천하기 위해 조직된 실험학교인 파리 제8대학교 교수로 임명되었습니다. 이 새로운 대학에는 푸코(들뢰즈의 채용을 제안한 사람)와 정신분석가인 펠릭스 가타리(Félix Guattari)를 포함하여 다수의 유명한 학자들이 참여했습니다. 들뢰즈는 1987년 은퇴할 때까지 이 파리 8대학교에서 가르쳤습니다. 들뢰즈의 인생관은 초월적 사상, '신으로서의 자연' 윤리, 일원론적 경험에 공감했습니다. 그가 옹호하고 영감을 얻은 중요한 아이디어에는 그가 개인적으로 창안한 표현인 다원주의 = 일원론과 존재 및 일의성의 개념이 포함됩니다. 그는 1956년 데니스 폴 '패니' 그랑주안(Denise Paul 'Fanny' Grandjouan)과 결혼하여 두 자녀를 두었습니다.

제임스 밀러(James Miller)에 따르면, 들뢰즈는 강의와 저술에서 그토록 생생하게 불러일으킨 위험한 일들을 실제로 하는 데에 거의 관심이 없는 듯 보였습니다. 결혼해서 두 자녀를 둔 그는 겉으로는 전통적인 프랑스 교수의 삶을 살았습니다. 들뢰즈는 손가락 피부를 보호하는 지문이 없어서 천조각같은걸 만지면 날카로운 통증이 생겨서 손톱을 깎지 못했습니다. 한때 자신의 삶에 대해 이야기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 그는 "학자들의 삶은 별로 흥미롭지 않습니다. … 자신의 특권적인 경험에서 나온 주장은 나쁘고 반동적인 주장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어려서부터 호흡기 질환을 앓았던 들뢰즈는 1968년 결핵에 걸려 폐절제 수술을 받았습니다. 그 후유증으로 글쓰기와 같은 단순한 일에도 힘든 노력이 필요했습니다. 그는 남은 생애 동안 점점 더 심한 호흡기 증상을 겪었습니다. 1987년 퇴임한 후에는 줄곧 좌파를 옹호하며 집필과 방송활동을 했습니다. 구조주의 등 1960년대의 서구 근대이성의 재검토라는 사조 속에서 철학사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배경으로 서구의 2대 지적 전통인 경험론·관념론이라는 사고의 기초형태를 비판적으로 해명하고, 1968년 ‘차이와 반복’에서 이 문제를 극복하는 문제를 전개했습니다.

1960년대 초부터 죽을 때까지, 들뢰즈는 철학, 문학, 영화, 예술 분야에서 영향력 있는 저작들을 썼습니다. 가장 인기를 누린 책들은 펠릭스 가타리(Félix Guattari)와 함께 쓴 바로 이 ‘앙티 오이디푸스: 자본주의와 정신 분열증(L'Anti-Œdipe-Capitalisme et schizophrénie, 1972)’와 ‘천개의 고원(Mille Plateaux - Capitalisme et schizophrénie 2, 1980)’입니다. 1968년에 ‘차이와 반복(Différence et repetition)’을 썼으며, 1969년에는 ‘감각의 논리(Logique du sens)’를 썼습니다. 미셸 푸코는 '아마도 어느날 이 세기는 들뢰즈의 시대라고 불릴 것이다'라고 공언하기도 했습니다. 들뢰즈는 이에 대해 '우리를 좋아하는 사람은 웃게 만들고 그 외의 다른 사람들은 격노하게 만들려는 의도를 지닌 농담'이라고 말했습니다. 1992년 앙티 오이디푸스를 같이 저술한 가타리가 죽자 들뢰즈는 삶의 의지를 상실하고 3년 뒤1995년 11월4일 자신의 아파트 창문에서 몸을 날려 가타리가 기다리는 요단강 너머로 건너갔습니다.

그는 생 레오나르 드 노블라(Saint-Léonard-de-Noblat) 마을의 묘지에 묻혔습니다. 들뢰즈는 죽기 전에 마르크스의 위대함(La Grandeur de Marx)이라는 책을 쓰겠다는 의도를 밝혔고, 앙상블과 다양성(Ensembles and Multiplicities)이라는 제목의 미완성 프로젝트의 두 건을 남겼습니다. 들뢰즈의 모습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뉩니다. 하나는 바루흐 스피노자,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 데이비드 흄, 임마누엘 칸트, 프리드리히 니체, 앙리 베르그송, 미셸 푸코와 같은 철학자들과 마르셀 프루스트, 프란츠 카프카, 프란시스 베이컨 같은 예술가를 재해석하는 '비평적인 철학사가'로서의 들뢰즈이고, 다른 하나는 다방면의 신체, 차이, 감각, 의미, 사건, 정신분열증, 반복, 경제, 영화, 욕망, 철학과 같은 개념들을 따라 구성된 철중주의적이고 분석적인 철학자의 모습입니다. 그의 비평적인 모습과 분석가적인 모습은 종종 겹쳐집니다. 들뢰즈가 과타리와 협업하기 전에 쓴 작품에서 주요 철학적 프로젝트는 동일성과 차이 사이의 전통적인 형이상학적 관계의 반전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차이는 동일성에서 파생된 것으로 여겨집니다.

예를 들어, "X는 Y와 다르다"고 말하는 것은 플라톤의 형태에서처럼 적어도 비교적 안정적인 동일성을 가진 X와 Y를 가정합니다. 반대로 들뢰즈는 모든 동일성이 차이의 효과라고 주장합니다. 들뢰즈는 '같은 속의 사물 사이에 본성의 차이가 존재한다는 점을 감안할 때' 동일성은 논리적으로나 형이상학적으로 차이보다 앞서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즉, 두 가지 사물이 결코 동일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처음에 개인을 식별하는 데 사용되는 범주는 차이에서 파생됩니다. 차이는 끝까지 내려갑니다. 델뢰즈는 현실을 정직하게 대면하기 위해서는 존재가 있는 그대로 정확히 파악되어야 하며, 동일성 개념(형상, 범주, 유사점, 지각의 통일성, 술어 등)은 그가 '자체 내적 차이'라고 부르는 것을 달성하지 못한다고 주장합니다. "철학이 사물과 긍정적이고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면, 그것은 철학이 사물 자체를 파악한다고 주장하는 한에서만 가능하다. 사물이 무엇인지에 따라, 사물이 아닌 모든 것과의 차이에서, 다시 말해 내적 차이 에서 파악한다." 칸트와 마찬가지로 들뢰즈는 공간과 시간에 대한 전통적인 개념을 주체가 부과한 통합된 형태로 간주합니다.

따라서 그는 순수한 차이가 비공간적 시간적이라고 결론 내립니다. 그것은 들뢰즈가 "가상적인 것"이라고 부르는 하나의 관념입니다. (이 신조어는 과거와 현재 모두에서 불변하는 것에 대한 프루스트의 정의, 즉 "실제적이지 않은 실재, 추상적이지 않은 이상적"을 의미합니다.) 들뢰즈의 가상 관념은 표면적으로는 플라톤의 형식과 칸트의 순수 이성 관념과 유사하지만, 그것들은 원본이나 모델이 아니며 가능한 경험을 초월하지도 않습니다. 대신 그것은 실제 경험의 조건, 그 자체의 내적 차이입니다. "그 조건이 형성하는 개념은 대상과 동일합니다." 그러므로 들뢰즈의 관념이나 차이에 대한 아이디어나 개념은 경험된 사물의 유령과 같은 추상화가 아니라 실제 공간, 시간, 감각을 만드는 차등 관계의 실제 시스템입니다. 따라서 들뢰즈는 때때로 칸트를 암시하면서 자신의 철학을 초월적 경험주의 (empirisme transcendantal)라고 지칭합니다. 칸트의 초월적 이상주의에서 경험은 직관(즉, 공간과 시간)과 개념(예: 인과관계)으로 구성될 때만 의미가 있습니다. 칸트에 따르면, 이러한 직관과 개념의내용을 인간의 지각적 접근과 별개로 존재하는 세계의 특성으로 가정하는 것은 매혹적이지만 무의미한 형이상학적 신념을 낳는다.

들뢰즈는 이러한 칸트식 배열을 뒤집습니다. 경험은 새로움을 제시함으로써 인간 개념을 능가하며, 이 차이의 원시 경험은 이전 범주에 얽매이지 않고 새로운 사고 방식의 창안을 강요하는 아이디어를 실현합니다. 동시에 들뢰즈는 존재가 일의성, 즉 존재의 모든 감각이 하나의 목소리로 긍정된다고 주장합니다. 들뢰즈는 중세 철학자 존 던스 스코투스(John Duns Scotus)로부터 존재론적 일의성 교리를 차용했습니다. 신의 본질에 대한 중세의 논쟁에서 많은 저명한 신학자와 철학자(토마스 아퀴나스 등)는 누군가가 "신은 선하다"라고 말할 때, 신의 선함은 인간의 선함과 유사할 뿐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스코투스(Scotus)는 "신은 선하다"라고 말할 때 문제의 선함은 '제인은 선하다'라고 말할 때 의미되는 선함과 정확히 같은 종류의 선함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즉, 신은 인간과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며, 신, 사람, 벼룩을 막론하고 선함, 능력, 이성 등의 속성은 일률적으로 적용됩니다. 들뢰즈는 존재가 일의적으로 차이라고 주장하기 위해 일의성 이론을 적용합니다.

“그러나 일의성에서는 차이가 존재하고 존재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차이를 말한다는 의미에서 차이인 것은 존재입니다. 더욱이 존재하지 않는 존재 안에서 일의적인 것은 우리가 아닙니다. 일의적 존재 안에서 그리고 일의적 존재를 위해 모호하게 남아 있는 것은 바로 우리와 우리의 개체성입니다." 여기에서 들뢰즈는 존재하는 모든 것이 신이나 자연이라는 하나의 실체의 변형이라고 주장한 스피노자를 반향하고 뒤집습니다. 들뢰즈에게는 단일한 실체가 없고 항상 구별되는 과정, 즉 항상 접고 펴고 다시 접히는 종이접기 우주만이 있을 뿐입니다. 들뢰즈는 이 존재론을 '다원주의 = 일원론'이라는 역설적인 공식으로 요약합니다. 차이와 반복(1968)은 들뢰즈가 그러한 형이상학의 세부사항을 해결하려는 가장 지속적이고 체계적인 시도이지만, 그의 다른 작품들도 비슷한 생각을 발전시키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니체와 철학(Nietzsche and Philosophy, 1962)에서 현실은 힘의 연극입니다. 안티 오이디푸스(Anti-Oedipus, 1972)에서는 '기관 없는 신체'입니다. 철학이란 무엇인가? (1991)에서는 '내재성의 평면' 또는 '카오스모스'입니다.

펠리스 가타리의 생애 – Life of Félix Guattari

펠릭스 가타리(Félix Guattari, 1930~1992)는 파리 북서부의 공장 관리자인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났고 고등학교 시절부터 청년사회주의 트로츠키주의 정치 단체에서 활동했습니다. 대학에서는 의약학과 철학을 공부하였으나 졸업을 하지 않은 채 쟝 우리가 주도하던 보르도 병원에서 일하기 시작하여 그곳에서 의사로서 평생을 보냈습니다. 가타리는 1953년 이래 라캉이 주도하던 세미나에 참여했습니다. 1955년부터 1965년까지 카타리는 트로츠키 주의 신문인 공산주의의 길(La Voie Communiste)을 편집하고 기고했습니다. 그는 이탈리아 자율주의자들 뿐만 아니라 반식민주의 투쟁도 지원했습니다. 가타리(Guattari)는 또한 1960년대 초에 많은 정신과의사를 모아 1965년 11월에 기관 심리 치료 협회를 만든 GTPSI에 참여했습니다. 1962년부터 1969년에는 라캉이 결성한 파리 프로이트학파에 참여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정신분석이 지닌 이데올로기적 기능을 감지하면서 라캉에게 비판적이고 적대적인 입장을 취하게 되었습니다. 1967에는 라틴 아메리카 혁명에 대한 연대와 지원을 하는 조직인 젊은 히스패닉 그룹(OSARLA, 1967)의 창립멤버 였습니다.

1968년에 가타리는 다니엘 콘-방디, 장-자크 르벨, 줄리안 베크를 만났습니다. 1969년 프랑스 철학계 주류와 다소 거리를 두고 독자적인 연구 결과를 내놓고 있던 니체주의자 들뢰즈를 만난 이후 가타리는 기존의 프로이트를 중심으로 한 정신분석학과 맑스주의를 벗어나려는 문제의식을 시도하였으며 사회정치적 무의식에 관한 이론을 구성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횡단성 개념과 기계 개념을 가지고 구조주의를 공격해 나갔고 점차 분열분석을 제기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3월 22일 운동 에서 시작된 1968년 5월의 대규모 프랑스 시위 68혁명에 참여했습니다. 68혁명 이후 대중의 다양한 욕망분출에 주목하고 기존의 대표제 정치가 가졌던 억압적 방식을 비판하고 욕망의 미시정치학을 제기하였습니다. 1968년 여파 속에서 가타리는 뱅센대학교 에서 질 들뢰즈를 만났습니다. 그런 다음 그는 미셸 푸코가 책 서문에서 '비파시스트적 삶에 대한 소개'라고 묘사한 안티 오이디푸스 (1972) 의 토대를 마련하기 시작했습니다. 국가장치 장악을 중심으로 사고하는 혁명운동의 방향에 대해서 욕망해방과 기계적 작동의 농축을 통한 분자혁명이라는 상을 제시하며 1972년에 가타리는 들뢰즈와 공저 앙티 오이디푸스를 발간했습니다.

가타리는 들뢰즈와의 공저 앙티 오이디프스로 유명하지만 자신의 독자적인 저서도 냈습니다. 1970년대에는 동지들과 함께 ‘기관 연구 및 연구 그룹 연합(FGERI)’을 결성하고 기관 형성 연구 센터를 설립하여 ‘탐구(연구, Recherche)’라는 잡지를 발간하는데 주도적으로 관여하여 철학, 정신 분석, 민족학, 교육 , 수학 , 건축 등에 대해 연구했습니다. 이 FGERI는 가타리의 여러 정치적, 문화적 참여의 측면을 대표하게 되었습니다. 그 이외에도, 프랑스-중국 우호단체인 인민 공동체 시대, 알제리와 베트남 전쟁에 대한 반대 활동, MNEF 및 UNEF 참여, 심리적 학업 지원 사무소(BAPU) 정책, 대학 실무 그룹(GTU) 조직, 훈련 센터와의 훈련 과정 재조직 정신과 남성 간호사를 위한 교육 활동 방법(CEMEA), 간호사 펠로우십(Amicales d'infirmiers)(1958년) 설립, 건축에 관한 연구 및 '학생 및 젊은 근로자'를 위한 주간 병원 건설 프로젝트 등에 관여하며 활발하데 활동했습니다. 1973년, 가타리는 동성애에 관한 눈문을 ‘탐구(연구, Recherche)’에 기고하여 '공공의 품위에 대한 폭행'을 저질렀다는 이유로 재판을 받고 벌금을 물었습니다. 그는 1980년대 에 '생태 철학'으로 환경 운동 에 합류하기 전에 1977년 '새로운 자유의 공간'을 위한 CINEL을 만들었습니다.

1980년대부터는 가타리는 자본주의 하에서 생산되는 주요 상품을 주체성 그 자체로 보았습니다. 가타리에 따르면, 상품과 경험의 지속적인 구매를 통해 충족될 수 있는 새로운 욕망을 가진 소비 주체를 생산하는 것은 소비 사회를 창조하는 전제 조건입니다. 1987년부터는 들뢰즈와 잡지 ‘괴물(Chimere)’을 내기도 했습니다. 그의 마지막 책인 ‘혼돈(Chaosmosis, 1992)에서 가타리는 주체성의 문제로 돌아갔습니다. '돌연변이된 가치 있는 우주와 호환되도록 하기 위해 주체성을 어떻게 생산하고, 수집하고, 풍부하게 하고, 영구적으로 재창조할 것인가?' 이러한 관심사는 1957년에서 1972년까지의 논문 모음집인 ‘정신분석과 횡단성 (Psychoanalysis and Transversality)’, ‘겨울의 해(Years of Winter, 1980-1986)’, ‘정신분석적 지도학(Schizoanalytic Cartographies, 1989)’를 거쳐 들뢰즈(Deleuze)와의 협업인 ‘철학이란 무엇인가?(What is Philosophy?, 1991)’에 이르기까지 그의 모든 작품에 걸쳐 있습니다. ‘혼돈(Chaosmosis)’에서 가타리는 네 가지 펑터의 관점에서 주체성을 분석합니다.

(1) 물질적, 에너지적, 기호적 흐름; (2) 구체적이고 추상적인 기계적 문 ; (3) 가치 있는 가상적 우주; (4) 유한한 실존적 영역. 이 계획은 가타리가 이해하는 바와 같이 주관성 생산에 관련된 구성요소의 이질성을 파악하려고 시도하는데, 여기에는 의미적 기호학적 구성요소와 '비-의미적 기호학적 차원' 이들이 가질 수 있는 의미 기능과 '병행하여 또는 독립적으로' 작동함)이 모두 포함됩니다. 1992년 8월 29일, 이오르고스 벨초스(Yiorgos Veltsos)가 큐레이터로 나선 그리스 텔레비전 인터뷰 2주 후, 가타리는 심장마비 로 라 보르드(La Borde) 에서 사망했습니다. 1995년, 가타리의 ‘카오스피(Chaosophy)’가 사후에 출간되어 실험적 La Borde 클리닉 의 책임자로서의 가타리의 작업 과 들뢰즈와의 협업에 대한 에세이와 인터뷰가 실렸습니다. 이 컬렉션에는 ‘앙티 오이디푸스’와 ‘천개의 고원(A Thousand Plateaus)’를 공동 집필한 들뢰즈와 함께 공동 서명한 '디자이어링 머신를 위한 대차대조표 프로그램(Balance-Sheet Program for Desiring Machines)'와 '모두가 파시스트가 되고 싶어한다(Everybody Wants To Be a Fascist)'와 같은 에세이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책은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의 정신 분석을 발전시키는 과정이지만 분석에 대한 보다 실험적이고 집단적인 접근 방식을 추구하는 가타리의 '정신분열분석' 이론에 대한 소개를 제공합니다. 1996년에 가타리의 에세이, 강의, 인터뷰를 모은 또 다른 책인 ‘소프트 서브버전(Soft Subversions)’이 출판되었는데, 이 책은 1980년대('겨울')에 걸쳐 그의 사상과 활동의 발전을 추적합니다. 예술, 영화, 청소년 문화, 경제, 권력 형성에 대한 그의 분석은 '미시정치', '정신분열분석', '여성되기'와 같은 개념을 발전시켰는데, 이는 주체성을 해방하고 '포스트미디어 시대'에 글로벌 자본주의의 표준화 및 동질화 과정(그는 이를 '통합 세계 자본주의'라고 부름)에 대한 정치적, 창조적 저항을 위한 새로운 지평을 여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예를 들어, 그는 '미시정치'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사회적 관행(무의식적 경제 , 욕망과 제도의 표현에 어느 정도의 유연성이 있는 곳)에 대한 일정 수준의 관찰을 한정하고, 실질적으로는 분리된 세계 에서 '타인 의 담론 에 관심을 갖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의 개입 분야를 정의했습니다.

앙티 오이디푸스: 자본주의와 정신 분열증의 내용 – Content of Anti-Oedipus: Capitalism and Schizophrenia, 1972

‘앙띠 오이디푸스’는 인간을 ‘욕망 기계’로 정신분열적인 ‘권력의지’을 파헤친 책입니다. 이 책은 자본주의·정신분석학을 비판한 ‘20세기 자본론’으로 1968년 5월 혁명에 대한 응답이며 자발적 예속에 대한 분석입니다. 들뢰즈와 카타리는 혁명적 시민들이 왜 금방 보수화되는지에 대한 질문에 몰두했습니다. “왜 인간들은 자신들의 예속을 위해 싸울까요?” “대중들은 파시즘을 원했습니다. 알아야하는 건 바로 이것입니다.” “그 어떤 해법, 그 어떤 혁명의 길이 있을까요?” 저자 두 사람은 이책에서 자본주의의 함정과 해법을 규명하려 했습니다. 19세기 자본주의 초기를 살았던 마르크스와 달리, 들뢰즈와 카타리는 1960~70년대를 거치며 자본주의의 정점인 신자유주의를 경험했고, 사람들이 이해타산보다 ‘무의식’의 욕망 구조를 따른다는 점에 주의했습니다. 인간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자발적으로 자본주의의 톱니가 돼 복무하는 이유는 자신도 자본주의 정점에 오를수 있다는 ‘욕망’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정신분석이 비판의 대상이 될까요? 태어나자마자 인간들은 이미 ‘사회 기계’의 부품으로 존재하고, 사회와 직접 연결된다는 것이 들뢰즈와 카타리의 통찰입니다. 그러나 정신분석은 ‘핵가족 삼각형’ 속에 부모의 사회적 지위, 혈통, 재산 따위를 삭제하고 핵가족 관계의 문제로 봉합했습니다. 이 책의 부제가 ‘자본주의와 분열증’인 것도 정신분석학 비판과 관련이 있습니다. 자본주의는 ‘분열자’를 배제하고 ‘유순한 주체’만 허용합니다. 분열자는 노동자로서 상품이 될 수 없는, ‘오이디푸스 구조’에서 해방된 무의식이며 따라서 자연의 흐름에 가장 가까이 있는 ‘해방의 주체’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혁명의 길”은 무엇일까요? 도망, 벗어나는 것일겁니다. “이제는 자본에 대한 자발적 예속에서 도주하여 분열증으로서의 우리 자신의 삶을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할 때인겁니다.” 1960년대 니체주의자 들뢰즈와 가타리가 만나 사상을 교류하다 68혁명을 계기로 1972년 ‘안티 오이디푸스’를 함께 저술합니다. 앙띠 오이디푸스(자본주의와 정신 분열증, Capitalism and Schizophrenia: Anti-Oedipus)에서 우선 주요하게 언급되는 개념은 ‘욕망’입니다.

두사람은 이 책에서 프로이트가 정의한 ‘무의식’과 ‘욕망’개념에서 벗어나 니체적 입장에서 그 개념들과 더불어 ‘기계(machine)’, ‘부분대상(object partial)’ 등을 재정의하며 분열-분석을 행했습니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68혁명 과정에서 제기되고 나타난 현상들, 예를 들어 사람들이 그토록 강렬하게 욕망을 분출했는데도 왜 금방 보수화되고 말았는가 등을 성찰하고, 이런 일들이 어떤 조건에서 생겨나는지, 어떻게 해야 이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지 탐색했습니다. 이들은 1972년에 '안티 오이디푸스'를 내놓고 그 후 10년 가까이 지속적으로 ‘자본주의와 분열증’ 문제를 파고드는 과정에서 현실 속의 모든 문제를 종합하여 철학적으로 탐구하였고, 당대의 카프카, 프루스트, 채플린, 터너 등의 다양한 예술 작품들을 논증의 도구로 활용했습니다. 자본주의가 성립하던 시기에 맑스가 했던 일이 자본주의의 정체를 밝히고 그 운동 방향을 모색하는 19세기 자본주의의 지도 제작이 과제였다면, 이 두사람은 이 과업을 발전시켜 자본주의의 최종 양상인 세계 자본주의의 완성이 가까워진 시점에서 현대자본주의의 지도 제작을 행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기술적(記述的)이고 존재론적인 작업이었습니다.

질 들뢰즈(Gilles Deleuze)와 펠릭스 가타리(Félix Guattari)의 ‘앙티 오이디푸스: 자본주의와 정신 분열증 (Anti-Oedipus: Capitalism and Schizophrenia)’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결국 모두가 혐오하는 그 자본주의의 정점에 오르겠다는 인간들의 욕망이 공동의 선과는 반대로 욕망의 인간들에게 최단거리로 보수화시키고 욕망기계 편집증환자 파라노이아인으로서 큰 깡패집단을 조직하여 히틀러나 스탈린, 살인마 전두환 처럼 남을 지배하려는 파시스트 정신병환자가 된다는 사실을 알게 만들었습니다. 

20세기에 발간된 우수하고 의미있는 책 100선 중 55번째 책 인문학 부문 25번째 책 질 들뢰즈(Gilles Deleuze)와 펠릭스 가타리(Félix Guattari)가1972년에 출간한 ‘앙티 오이디푸스: 자본주의와 정신 분열증 (Anti-Oedipus: Capitalism and Schizophrenia)’를 마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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