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1. Dr. Sam Lee/17_20세기100선

056.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 – To Have or to Be? by Erich Fromm, 1976

忍齋 黃薔 李相遠 2024. 8. 16. 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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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QcIBwZNbQ04

 

 

056.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 – To Have or to Be? by Erich Fromm, 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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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에리히 프롬은 “To Have or to Be? – 소유냐 존재냐?”를 통해 소유에만 급급한 현대사회의 물질만능주의를 지적했습니다. 인류는 산업 시대를 통해 무한한 생산과 무한한 소비가 있을 것이고 그 물질을 통해 무한한 행복, 자유, 풍요, 자연을 지배 할것이라 믿었습니다. 인간은 지구의 신이 되기를 열망했습니다. 그러나 그 열망은 사람들의 이기심과 탐욕 그리고 극도의 급진적 쾌락주의로 인해 실패했습니다. 산업시대에 이 경제 시스템의 발전은 더 이상 인간에게 좋은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발전이 아니라 이 시스템 성장에 좋은 것이 무엇인지에 몰두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의 "소유"에 대한 물질적 본성은 "존재"보다 더 발전했습니다. 현대 산업화는 그들의 이익을 충족시키고 소유물을 늘리기 위해 발전되었습니다. 모든 삶의 방식에서 사람들은 "소유양식"이 아닌 "존재양식"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해서 내면의 자아를 잃었습니다. 에리히 프롬은 이책에서 소유물을 소유하는 것은 죽으면 쓸모없게 될 것이니 “존재”를 사유하는 ‘새로운 인간’으로 거듭나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자고 역설했습니다. 자 그러면 이제부터 ‘에리히 프롬’과 그의 저서 ‘소유냐 존재냐?’ 속으로 빠져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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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히 프롬의 생애 – Life of Erich From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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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으로 유명한 유태인 독일계 미국인 사회심리학자이면서 정신분석학자, 인본주의 철학자, 민주 사회주의자였던 에리히 셀리그만 프롬(Erich Seligmann Fromm, 1900년 3월 23일 ~ 1980년 3월 18일)은 1900년 3월 23일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에서 유대교 정통파 부모인 로자 크라우제와 나프탈리 프롬의 외동아들로 태어났습니다. 1918년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대학교 법철학과에 입학하였으나, 2학기만에 1919년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으로 옮겨 유명한 정치경제학자인 막스 베버의 동생인 알프레드 베버와 정신과 의사이자 철학자인 카를 야스퍼스, 하인리히 리케르트의 지도를 받으며 사회학을 배웠습니다. 1922년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에서 "유대교 법에 관하여"라는 논문으로 사회학을 전공으로 철학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당시 프롬은 종교적 시오니스트 랍비인 네헤미아 안톤 노벨(Nehemia Anton Nobel)의 영향을 받아 시오니스트 에 강력히 관여했습니다. 그는 유대인 형제회(Jew Studentenverbindungen)와 다른 시오니스트 조직에서 매우 활동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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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는 곧 시오니스트에서 돌아서서 그것이 "보편주의 메시아주의와 인본주의"라는 자신의 이상과 충돌한다고 말했습니다. 졸업 후 하이델베르크에 있던 프리다 라이히만(Frieda Fromm-Reichmann)의 정신분석 치료소에서 정신분석학을 연구하여 1927년 자신의 진료실을 열게되었습니다. 에리히 프롬은 1926년에 결혼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헤어지고 1942년에 이혼했습니다. 1930년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본산인 프랑크푸르트 사회연구소에 들어가 자신의 정신분석학 이론의 정립을 마쳤습니다. 나치가 독일을 장악하게 되자 유태인이었던 프롬은 나치 정권을 피해 제네바로 옮겼으며, 1934년 미국 뉴욕의 컬럼비아 대학교로 자리를 옮겨 미국으로 귀화했습니다. 컬럼비아 대학교 재직 동안 프롬은 카렌 호니(Karen Horney)와 해리 스택 설리번과 공동으로 신프로이트 자기 정신분석에 대해 연구하였습니다. 1930년대 후반까지 호니와 프롬은 각자 상대방의 사상에 현저한 영향을 미쳤는데, 호니는 프롬에게 정신분석의 몇 가지 측면을 밝혀주었고, 프롬은 호니에게 사회학을 설명해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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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럼비아 대학교 이후 에리히 프롬은 1943년부터 워싱턴 정신분석 대학교의 뉴욕분교 설립에 공헌했고, 1946년부터는 윌리엄 앨런슨 화이트 정신의학, 정신분석 및 심리학 연구소의 창립자 중 한 명으로 심리학자이자 정신분석학자, 정신과 의사로서 재직하였습니다. 1941년부터 1949년까지 베닝턴 대학 의 교수로 재직했고, 1941년부터 1959년까지 뉴욕의 뉴 스쿨 포 소셜 리서치 대학에서 강의를 했습니다. 또, 1950년 멕시코 국립자치대학교 의과대학에 정신분석학과를 만들어 교수로 재직하였으며 1965년 이 대학교에서 은퇴하였습니다. 이 기간동안 1957년부터 1961년까지는 미시간 주립대학교에서 1962년에는 뉴욕 대학교에서 심리학 교수직을 겸임하기도 하였습니다. 1974년까지 멕시코 정신분석학회(SMP)에서 가르쳤습니다. 1974년 스위스 무랄토(Muralto)로 이주했으며 80번째 생일을 5일 앞둔 1980년 3월 18일 자택에서 별세하였습니다. 80평생 프롬은 자신의 임상 실무를 유지했고 일련의 책을 출판했습니다. 프롬은 무신론자로 자신을 "무신론적 신비주의"로 묘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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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히 프롬의 사상 – Thought of Erich From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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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히 프롬 사상의 특징은, 프로이트 이후의 정신 분석 이론을 사회 정세 전반에 적응한 것에 있습니다. 그의 대표작인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는 파시즘의 심리학적 기원을 밝혀, 민주주의 사회가 나아갈 방향을 밝히고 있습니다. 프롬에 따르면 인간은 자신의 생물학적 성장이나 자아 실현이 방해될 때에, 일종의 위기 상태에 빠진다고 합니다. 이러한 위기는 인간에 대한 공격성이나 사디즘, 마조히즘 및 권위에 대한 복종 또는 자신의 자유를 부정하는 권위주의로 빠지게 됩니다. 이런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프롬은 자아를 실현하는 생활이 그 수단이 될 수 있다고 합니다. 프롬은 스피노자처럼 ‘행복은 덕의 증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즉 생산적인 생활과 인간의 행복이나 성장을 바라는 인도주의적 윤리를 신봉할 때에 사람은 행복하게 될 수 있다고 합니다. 신경증이나 권위주의, 사디즘, 마조히즘 등은 인간성이 개화되지 않을 때에 일어나고 이것을 프롬은 인간적인 파탄이라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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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에 출간한 ‘자유로부터의 도피’는 정치심리학의 선구적인 저서로 알려져있습니다. 1947년에는 윤리에 대한 심리학적 고찰인 ‘인간 상실과 인간 회복’을 저술하였으며 1956년에는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된 ‘사랑의 기술’을 출판했습니다. 1976년에는 바로 이 ‘소유냐 존재냐?’를 저술하였고,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반대자들과 지지자들의 잘못된 지식들을 바로잡기 위해 ‘에리히 프롬, 마르크스를 말하다’를 저술하기도 했습니다. 에리히 프롬을 비판한 허버트 마르쿠제는 ‘에로스와 문명’에서 처음에 에리히 프롬은 급진적인 이론가였지만 나중에는 순응으로 돌아섰다고 아쉬워했습니다. 마르쿠제는 또한 프롬과 그의 가까운 동료인 설리반과 카렌 호니가 프로이트의 리비도 이론과 다른 급진적인 개념을 제거하여 정신분석을 현상 유지만을 수용하는 관념주의 윤리의 집합으로 축소했다고 비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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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비판에 대해서 에리히 프롬은 ‘건전한 사회(The Sane Society)’와 ‘인간의 파괴성의 해부학(The Anatomy of Human Destructiveness)’에서 프로이트가 무의식의 중심적 중요성을 인식한데 대해 상당한 공로를 인정받을 만하지만, 최소한의 의지나 변동성을 가진 본능과 사회적 통제의 수동적 결과로 자아를 묘사한 자신의 개념을 구체화하는 경향이 있었다고 대응했습니다. 에리히 프롬은 ‘마르쿠제와 같은 후기 학자들이 자신을 교조주의로 받아들이만 사회 심리학은 보다 역동적인 이론적이고 경험적 접근 방식을 요구한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대중 지식인으로서 프롬의 좌파적 정치 활동에 대해 노암 촘스키는 "나는 프롬의 태도를 좋아했지만 그의 작업이 매우 피상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라고 그의 꼰대스러움에 아쉬움을 나태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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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냐 존재냐의 내용 – Content of To Have or to Be? 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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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원래 ‘루스 난다 안센’이 ‘하퍼 앤 로우’출판사를 위해 편집한 ‘세계적 관점’ 책 시리즈에 실렸습니다. 이 책에서 인간 실존 양식 중 가장 크게 분류할 수 있는 ‘소유 양식(having mode)’과 ‘존재 양식(being mode)’을 급진적 인도주의에 바탕을 둔 정신분석학자인 에리히 프롬이 깔끔한 필체로 사회적, 경험적, 심리학적 분석을 통해 독자들을 이해하게 만듭니다. 이 책은 세 편으로 나누어 각 편마다 세 장씩 총 9장으로 구성됩니다. 1편은 두 가지 실존 양식의 이해를 구합니다. 용어의 기원 및 철학적 개념 소개와 일상생활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설명하고, 성경 말씀과 선인들의 말을 인용하여 논리를 펴나갑니다. 2편은 두 가지 실존 양식의 차이점을 분명하게 대면서 ‘새로운 사회’의 필요성을 유도하고, 3편에 본격적으로 ‘새로운 개인’과 ‘사회’가 되기 위한 대안을 제시합니다. 소비는 풍요한 산업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소유’형태입니다. 불안하지 않고 남에게 우월감을 가지려면 더 많은 소비를 해야 합니다. 나의 존재를 ‘소비’하는 능력으로 삼으니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프롬은 이처럼 우리 일상생활에서 경험할 수 있는 ‘소유양식’과 ‘존재양식’을 상세히 설명합니다. ‘소유’와 ‘존재’의 비교는 명사와 동사로도 가장 잘 나타낼 수 있습니다. 2~300여년 간 많은 언어에서 명사의 사용빈도가 높아진 것은, 사유재산의 발달로 인해 ‘소유양식’의 개념이 더욱 강화된 결과라고 프롬은 주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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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를 향한 열정은 계급 관계를 형성하여 국가 내 국민 간의 갈등, 더 나아가 범세계적인 갈등을 야기합니다. 이는 아마도 경제적 행동이 윤리 및 인간적 가치관과 유리되고 경제의 발전이 인간의 고유한 가치를 점점 잠식해 들어가기 때문일 겁니다. 또한 유사 이래 인간은 끊임없이 자연을 파괴하여 도구화하려는 기획을 중단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에 더해 정치지도자들의 끝없는 회담과 결의안 등을 통한 다양한 제스처가 마치 사람들을 위한 매우 유용한 정치 행위인 것처럼 인식되고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원칙을 지키는 사람이 피해를 보는 것은 물론이고 공익보다는 개인적 부의 축적과 성공에 더 높은 가치를 부여함으로써 사회적 책임을 가볍게 여기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이렇게 보았을 때 소유 지향적인 삶은 단순히 개인적 차원의 문제에 그치지 않고 사회 전반 더 나아가 세계적인 갈등 관계를 유발한다는 점에서 생산적이기보다는 소모적이고 파괴적이라는 생각마저 듭니다. ‘소유’ 지상주의가 정치와 결합할 때 얼마나 무참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지 우리는 수많은 정치 현실을 통해 뼈저리게 경험했습니다. 정치지도자를 뽑는 과정에서 경제적인 성장과 안정을 가져다줄 인물이라고 판단되면 도덕성의 결여쯤은 묵인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한 국가를 이끌 정치 수반으로서의 도덕적인 자질에 심대한 결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자신들이 추구하는 이익에 부합된다는 이유만으로 두 눈을 질끈 감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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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무책임하고 위험천만한 짓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한 선택은 역사의 수레바퀴를 뒷걸음질 치게 만듦으로써 인류 정치사에 큰 오점을 남겨왔습니다. 물론 에리히 프롬은 살아가는 데 필수적인 것들을 ‘소유’하는 것까지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이러한 생존에 필수적인 유형의 소유를 ‘생존적 소유’라고 불렀으며, 이러한 유형의 소유는 ‘존재양식’과 갈등을 일으키지는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가 문제 삼는 ‘소유유형’은 ‘성격논리적 소유’입니다. 에리히 프롬은 ‘성격논리적 소유’는 반드시 ‘존재’와 갈등을 일으킨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유형의 ‘소유양식’은 일단 ‘소유’하고 나면 그 대상들을 유지하거나 생산적으로 사용하려는 노력 등을 포함한 모든 것들을 제거시킵니다. 그리고 ‘나’의 주체의식을 내가 어떤 것을 소유한다는 사실에 의존시킴으로써, 나와 그 대상 사이의 관계를 죽은 것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재산에 중점을 두는 생존의 ‘소유양식’은, 필연적으로 권력에 대한 욕망을 만들어 냅니다. 재산, 이윤 등은 나뿐만 아니라 타인도 원하는 것이므로 그것을 지키는 데에는 권력이 필요한 겁니다. 그래서 ‘소유양식’ 안에서의 사람의 행복은 다른 사람들에 대한 우월성, 힘 그리고 정복하고 빼앗고 죽이는 능력에 달려 있습니다. 이러한 행복은 소수 특권층에게만 허락되는 것이며 그것이 진정한 행복이라 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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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지식의 ‘소유’는 유용한 지식을 점유하는 것이며, 앎은 기능적인 것으로서 생산적인 사고 과정에서 하나의 수단적 역할을 수행합니다. 그리고 소유양식에 있어서 ‘앎’은 ‘더 많은 지식을 소유하는 것’입니다. 삶의 의미나 행복이 단순히 지식을 축적하는 것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환상에서 벗어나 현실을 보는 것, 인간 이성의 ‘자기 확인의 과정’으로서의 앎과 지식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소유물들은 단지 경험할 뿐이라는 것을 확실히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사랑을 소유하지 않고 다만 경험합니다. 사랑이란 말은 사랑이라는 행위의 추상화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랑을 소유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면 그것과 소외되면서 있는 그대로 경험하지 못합니다. 소유하지 못한 사랑은 내 것이 아니라는 생각은 파멸을 부릅니다. 모든 것을 소유할 수 있느냐 없느냐로 보는 ‘소유 양식’은 그래서 극심한 소외 현상을 만연하게 합니다. 아무튼, 인간은 시대가 흐를수록 ‘소유’에 열광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아무리 많이 가져도 만족이란 없습니다. 우월감만 있을 뿐입니다. 안정된 것처럼 보이지만 잃을까 봐 항상 두려움을 느낍니다. 소유물은 인간을 약하게 하고 병들게 하여 파멸로 이끕니다. 쓰면 감소하기 때문에 그보다 더 모아야 합니다. 쾌락은 있지만 기쁨은 없습니다. 에리히 프롬은 산업시대를 환상의 종말로 표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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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약속의 영광, 산업시대의 놀라운 물질적 · 지적 성취를 마음에 그려봄으로써 비로소 그 실현의 실패에 대한 인식이 오늘날 일으키고 있는 충격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산업시대는 결국 이 위대한 약속을 이행하는 데 실패했고, 점점 많은 사람들이 다음과 같은 4가지 사실을 깨달아 가고 있다고 했습니다.”
“1. 모든 욕망의 무한정한 충족은 복리를 가져다주지 않았으며, 그것은 또한 행복에 이르는 길도 아니고 최대의 쾌락에 이르는 길도 아닙니다.
2. 자기 자신이 독립된 주인이 된다는 꿈은 우리의 사상 · 감정 · 취미가 정부와 산업, 그리고 이들이 지배하는 매스커뮤니케이션에 의해 조종되며, 우리는 모두 관료적 기계장치 속의 톱니바퀴가 되었다는 사실에 우리의 눈이 뜨이기 시작하면서 끝나버렸습니다.
3. 경제적 발전은 여전히 몇몇 선진부국에 국한되어, 풍요한 국민과 가난한 국민들 사이의 간격은 계속 넓어져 왔습니다.
4. 기술적 발전은 생태학적 위기와 핵전쟁의 위험을 만들어냈으며, 이중 어느 하나, 혹은 이 둘이 합세하여 모든 문명, 그리고 어쩌면 모든 생명에 종말을 가져올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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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롬은 심리학적 전제에 의해 첫째는 인생의 목적은 사람이 느끼는 어떤 욕망이나 주관적 욕구의 충족으로서 정의 된 행복, 즉 최대한의 쾌락에 있습니다. 둘째는 자기중심주의, 이기주의, 그리고 탐욕의 체제가 조화와 평화를 깨트렸다고 봅니다. 프롬은 홉스에게 있어 행복은 하나의 탐욕에서 다른 탐욕으로 끊임없이 이어졌고, 라 메트리는 적어도 행복의 환상을 주는 것이라는 이유로 환각제로 비유했습니다. 또 공리주의는 쾌락주의였다고 비판하고 오히려 칸트, 마르크스, 소로, 슈바이처는 반쾌락주의자였다고 평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쾌락주의는 극에 달해 텔레비전 ․ 자동차 ․ 섹스로 이 모순적 조합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이러한 쾌락주의는 행복을 가져올 수 없다는 것을 데이터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이로 인해 사회는 고독하고, 불안하고, 기가 죽고, 파괴적이며, 의타적인 사람들, 그렇게 아끼려고 애쓰는 시간을 한쪽에서는 마구 허송하며 기뻐하는 사람들로 변했습니다. 개인적인 이기주의가 조화와 평화, 모든 사람의 복리증대를 가져다준다는 산업시대의 제2의 심리적 전제 역시 이론적 근거에서 오류이며 실패를 가져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프롬은 인간들 속에 선천적으로 이기주의, 자기중심주의, 탐욕 등이 본성에 내재되어 있다고 봅니다. 이러한 것들은 자연을 적대적으로 보게 되고 결국 인간은 ‘자연의 변종’으로 변했습니다. 이로써 정복과 적대감이 맹목적이 된 우리는 천연자원이 유한하다는 사실, 그리고 자연이 인간의 탐욕에 대해 반격을 가해 오리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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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히 프롬은 ‘소유양식’의 대안으로서 ‘존재양식’을 제시합니다. ‘존재양식’은 탐욕 내지 배타성으로 점철된 ‘소유양식’과 달리 공유와 연대, 조화와 배려, 희생정신을 근간으로 더불어 사는 삶을 지향합니다. 게다가 ‘소유양식’이 가진 것으로 자신을 규정해야 했기 때문에 더 많은 것을 소유하는 데 분투하느라 소중한 가치를 저버렸다면 ‘존재양식’은 독립, 자유, 비판적 이성을 바탕으로 한 내면정신과 경험으로 자신을 규정합니다. ‘존재 양식’은 존재 그 자체로 만족하며 나눠주고 희생을 경험하는 것을 즐깁니다. 남보다 조금이라도 더 갖기 위해 애쓰지 않고, 남보다 덜 가졌다 해서 열등감을 느끼지 않습니다. 무엇을 소유하거나 소유하려고 갈망하지 않으면서도 즐겁습니다. 그런 삶은 걱정과 불안이 없습니다. 자기의 능력을 생산적으로 사용하며 세상과 하나가 되려 노력합니다. 참된 기쁨이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합니다. 집착하거나 속박당하지 않고 어떤 변화에도 두려움 없이 능동적으로 인간의 생명을 유지하며 계속 성장하게 합니다. ‘존재 양식’이 갖고 있는 이러한 ‘능동성’이라는 성질은 단순한 분주함과는 구별됩니다. 능동성을 띄는 ‘나’는 소외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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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나’는 외부적, 또는 내부적 힘에 의해 움직여질 뿐인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창조’하고, 그럼으로써 창조된 것과 나와의 관계는 밀접합니다. 에리히 프롬에 따르면 이러한 ‘존재양식’의 능동성 또한 인간 본성에 내재된 것이므로, ‘소유양식’을 포기하고 ‘존재양식’을 지향으로 삼는 일은 절대 불가능하지 않습니다. 과학기술은 엄청난 속도로 발전하여 생활을 윤택하고 편리한 환경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사회적 법규나 민주적 절차 등은 계속 진화하여 어느 정도 자유와 평등이 보장된 사회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삶의 질은 왜 나아지지 않고 상대적이거나 절대적 빈곤, 인종이나 종교적 차별, 전쟁의 두려움, 정신적 불안과 잠재적 공포 등은 늘어만 가는 것일까요? 인류 역사상 위대한 스승들은 ‘소유’와 ‘존재’양식 사이의 선택을 중심사상으로 여기고 욕심에 의한 소유를 절대적으로 경계해야 한다고 가르쳐왔습니다. 인간이 살아가는 데 있어 가장 중대한 문제로 '인간이냐, 물건이냐'라는 이분법에서 어떤 것을 중심으로 하느냐에 따라 삶의 질은 완전히 다름을 간파한 것입니다. 개인의 성격과 온갖 사회적 성격의 차이가 결정을 좌우합니다. ‘소유 양식’은 죽음에 대한 사랑이며 ‘존재양식’은 생명에 대한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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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양식’은 취득적 개념입니다. ‘무언가를 가지다'의 상태를 의미하기 때문에, 나 외의 다른 모든 것이 목적인 객체가 됩니다. 따라서 힘의 우위와 열위가 생기고, 이것은 필연적으로 사회적 반작용을 불러일으킵니다. 반면 ‘존재양식’은 능동적 개념입니다. ‘내가 있다'의 상태를 의미하기 때문에, 나는 주어인 주체가 됩니다. 따라서 나의 의지가 가장 중요합니다. 이 책에서 ‘의지'는 일종의 욕구, 욕심의 의미로도 쓰입니다. 다만 주고 나누고 기꺼이 내 몫을 줄이려는 태도를 나타내는 의지라면, ‘존재양식’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이기도 합니다. 수동적이거나 능동적이고 창의적인 ‘학습’, 기계적이거나 생산적인 ‘기억’, 고집스럽거나 교환과 창조의 ‘대화’, 일방적이거나 저자와의 대화인 ‘독서’, 힘이거나 능력인 ‘권위’, 소유량이거나 깊은 이해의 ‘지식’, 맹목적이고 몰상식적인 경험이거나 자기 창조적인 ‘신념’, 소유와 구속이거나 경험을 공유하는 ‘사랑’의 용어를 두 가지 양식의 대조로 명쾌히 설명합니다. 성경속의 우상이 아닌 본받아야 하는 대상으로 ‘예수’, 불경속의 무소유를 실천하는 ‘불처’, 사치도 가난도 악덕이라는 ‘마르크스’, 신을 아는 것이라는 ‘에크하르트’, 자유로운 개인의 사고를 가진 ‘슈바이처’ 등의 인물들이 전하는 말에 담긴 주석은 충분한 논리적 설득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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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된 종교의 교리가 어떻게 진실과는 다르게 변질되어 사람들을 바보로 만들고 폭력을 불러일으키는지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소유 양식’에서의 행복은 타인에 대한 자기의 우월성 속에, 자기의 힘 속에, 궁극적으로 정복하고 빼앗고 죽이는 능력 속에 있습니다. ‘존재양식’의 행복은 경험으로써의 사랑과 나눔과 베푸는 행위 속에 있습니다. 특히, 기독교에 대한 대목은 통렬한 지적이 따릅니다. 오늘날 종교는 규율과 사회적 결합력을 위해 단순한 이데올로기로 전락했습니다. 예수의 존재적 행위는 사라지고 힘과 부를 등에 업은 정복과 착취가 예수의 이름으로 행해지고 있습니다. 인간의 탐욕스러운 태도에 쉽게 굴복하고 오히려 예수 이름이 구실이 되는 이유입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자기들을 대신하여 사랑해주는 인물 정도로 예수의 위치를 격하시킵니다. 자기 자신의 내적 지향이 아닌 소외된 경험이 되어버린 신앙입니다. 그렇게 해서 예수는 그만 우상이 돼버렸습니다. 믿으면 천국 간다고 하면서 사고와 행동에는 변화가 없습니다. 사랑을 공언함으로 자신에게 전혀 사랑이 없다는 무의식적 죄책감에서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음에 만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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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주된 논제는 ‘소유양식(mode of having)’과 ‘존재양식(mode of being)’에 대한 분석입니다. 이를 통해 ‘새로운 인간’, ‘새로운 사회’의 형성에 대해 양식이 갖는 관련성을 다루고 인간을 나약하게 하는 개인적 불행, 전 세계를 파멸로 이끄는 사회 ․ 경제적 진전에 대한 대안에 대해 언급했습니다. 에리히 프롬의 대안은 ‘소유 형태’를 인간 스스로 포기하는 바람직한 ‘새로운 인간'상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안정감이나 자신감이 생기고 정체성을 자각할 수 있습니다. 철저한 독립과 더불어 사물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나누는 데서 기쁨을 느낍니다. 생명의 모든 현상을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지배 욕구에서 탈출하여 주변과 연대하고, 자기도취를 버리고 인간에 존재하는 비극적 한계를 수용합니다. 이러한 정신적 성장을 인생의 목표로 하는 ‘새로운 인간’들이 만들어갈 ‘새로운 사회’는 사리사욕에 의한 소유의 차등이나 욕구의 미충족이 없는 인간 사회를 뜻합니다. 새로운 인간의 출현을 위해서, 에리히 프롬은 새로운 사회의 등장을 촉구합니다.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 나가기 위하여, 즉 인류가 진정으로 자유로워지고 병적인 소비로 산업화를 부채질하는 것을 그만두기 위해서는 경제체제의 근본적인 철저한 변혁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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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 취해야 할 첫 번 째 단계는, 생산이 ‘건전한 소비’를 위한 방향으로 지향하는 것입니다. 에리히 프롬은 국가가 건전한 소비의 규범을 확립할 필요가 있음을 주장합니다. 그 방법으로, 미국의 식품 의약품협회(FDA)와 같이, 다른 분야에서도 욕구의 본질에 대해 결정할 수 있는 기관이나 단체가 필요하다고 에리히 프롬은 말합니다. 그리고 자유시장 경제하에서는 소비자가 그들이 원하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으므로 ‘선택적’ 생산을 할 필요가 없다는 반론에 대해서 그는 소비자의 욕구가 생산자에 의해 만들어지며, 건전한 소비는 이윤만을 추구하며 생산을 결정하는 대기업의 주주, 경영자의 권리를 철저하게 제어함으로써만 가능하다고 반박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에리히 프롬은 법률에 의한 규제와, 소비자의 힘에 의한 불매 운동을 방법으로서 제시합니다. 특히 그는, 불매 운동을 소비자들에 의한 진정한 민주주의의 발현으로 평가합니다. 그러한 노력을 통해 개개인은 직접 자기의 의견을 나타내고, 능동적인 방식으로 사회 발전의 방향이 변화되도록 노력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에 따르면 존재에 바탕을 둔 사회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모든 사람들이 그들의 경제적 기능에 있어 능동적으로 참여하여야 합니다. 이러한 주장을 그는 ‘산업민주주의’로 일컫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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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대규모 산업조직 혹은 기타 조직의 각 구성원들이 그 조직 내의 생활에서 능동적 역할을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각 구성원은 조직에 대해 충분한 정보를 제공받고 자기의 작업과정, 건강, 안전 조치 등의 수준에 있어서의 의사 결정에 참여하는 것을 시작으로 결국은 기업의 높은 수준의 일반 정책 결정에까지 참여하는 것입니다. 에리히 프롬은 이러한 참여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방법을 제안합니다. 먼저, 수십 개의 면접집단을 만들어, 그들 스스로 경제, 외교, 보건, 교육, 복지 등의 분야에서 기초적인 문제와 관련하여 심의를 하고 의사결정을 하는 상설기관을 구성하도록 합니다. 이들 집단은 적절한 정보를 제공받아야 하며, 이 정보를 가지고 외력에서 벗어나 토론을 하며 문제점에 대해서는 투표를 행사합니다. 그리고 이들의 결정사항이 입법에 큰 영향을 미치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제도는 타당한 정보의 혜택이나 자신이 결정의 영향력에 대한 자각, 비판적인 심사숙고와 토론이 만든 ‘진정한 신념’이 입법에 반영되도록 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에리히 프롬에 따르면 정치생활에의 능동적인 참여는 산업과 정치의 전반에 걸친 최대한의 분권화를 필요로 합니다. 현 자본주의에 내재된 논리에 의해 각 기업과 정부는 점차 대규모화되어 마침내는 관료주의적 기구를 통해 수직적이고 중앙집권적으로 집행되는 거인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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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되면 대중이 비판력을 잃어버린 수동적인 양이 되고, 이 거대한 거인은 누가 정점에 앉아 있든 상관없이 움직이게 되므로 필연적으로 파시즘이 출연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에리히 프롬은 국가의 통치기능은 사람들이 서로를 알고 판단할 수 있으며 따라서 그들 자신의 공동체의 행정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비교적 규모가 작은 지역 자치단체에 위임되어야 하며, 거인이 된 대기업 또한 소집단에 더 강대한 권력을 부여함으로써 소집단으로 해체시켜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나아가 관료주의적 행정을 인간을 마치 물건처럼 다루고, 이 다룸의 방법에 있어서도 질적인 면보다는 양적인 면을 중심으로 다룸으로 관료주의적 행정을 인본주의적 행정으로 대체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밖에도 에리히 프롬은 존재적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여러 방법들을 제시합니다. 기업광고와 정치적 광고에 있어서 모든 세뇌적인 방법을 금지시키는 것, 부국과 빈국의 격차를 좁히는 것, 연간 수입을 보장하는 것, 여성을 가부장제로부터 해방시키는 것, 정부. 정치가, 시민들에게 지식을 필요로 하는 모든 문제에 대해 조언을 해줄 책임을 지고 있는 ‘최고문화협의회’를 설립하는 것 등이 그것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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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히 프롬은 이러한 새로운 세계가 아무리 실현이 어렵게 보인다 하더라도, 현재 인류가 처해 있는 위험이 생과 사에 관련된 문제 이므로 ‘적당한 기회’를 ‘현실적 가능성’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생명이란 확률의 게임이 아니며, 기업정책이 아니라 어떻게든 구제의 가능성을 찾아내야 하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과학기술의 파시즘, 환상에 지나지 않는 완전한 자유 시장 경제를 버리고 우리에게 꼭 필요한 선택적 성장을 지향해야 합니다. 정신적으로 만족할 수 있는 노동 조건과 풍조를 만들며, 건전한 소비가 권장되고 정치 경제적 사안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합니다. 중앙집권화보다는 대규모의 분권화를 이루고, 관료주의적인 행정을 휴머니즘적인 것으로 변화시켜야 합니다. 한정된 국가 예산으로 적절한 복지가 가능한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인권은 보장될 수 있는 사회 구조적 시스템을 만들어야 안정적이고 편안한 사회가 될 겁니다. 5천년 존재역사가 무색할 한국처럼 어떤 사안마다 양쪽의 의견 갈등이 심한 사회일수록 그렇습니다. ‘새로운 인간’이 오늘보다 내일 더 나아지기 위해 ‘지금의 나'를 돌아보고 새로운 사회를 위해 무엇을 준비해야 할지를 정해, 그에 맞는 길을 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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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안타깝게도 새로운 인간에의 변혁 과정 역시 ‘소유’ 추구적 양식에 물들어버렸습니다. ‘존재’ 지향적 양식을 위해서는 가지고 있는 물건들을 버리고, 터전에서 떠나, 심적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그렇다고 인위적인 ‘안 가짐'은 해답이 아닙니다. 자유라는 것은 신경쓰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지지 않기 위해 ‘애쓰고' ‘노력하는' 것은 결국 무소유라는 개념을 ‘소유’하려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과연 더 많이 소유하는 것이 더 그럴 듯한 존재를 보장하는가 하는 의문을 제기하여 잘 경험하며 살아가는게 중요하다고 결론을 내립니다. 그 결론 속에서 프롬은 제발 좀 '가지지만 말고' 잘 '살아가라'고 냉철하고 통열하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노암 촘스키가 프롬이 매우 피상적이라고 비판했듯이 갈 길은 멀기만 합니다. 애석하게도 인간 개인의 다양한 성격 차와 사회적 성격의 여러 가지 유형간의 차이에 따라 ‘소유양식’을 택할 것인가, ‘존재양식’을 택할 것인가는 인간 개개인에게 달려있지 에리히 프롬같은 꼰대가 인간들에게 ‘새로운 인간’이 되어 ‘새로운 사회’를 만들라고 하면 과연 ‘새로운 인간’이 되고 ‘새로운 사회’가 만들어질까? 의문만 싸이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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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히 프롬(Erich Fromm)의 ‘소유냐 존재냐? (To Have or to Be?)’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인류에게는 ‘소유’의 정치학이 빚어낸 불행한 역사가 빈번하지만 ‘존재’의 의식 있는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일구어낸 값진 역사도 엄연히 존재합니다. 한국에서만 해도 3.1운동, 4.19의거, 5.18항쟁, 6월민주항쟁, 10.28촛불집회 등이 세계사적으로 가장 생동하는 민주주의의 모습을 보여준 쾌거가 아닐 수 없다는 걸 알수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어떠한 삶의 양식을 취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생각과 행동은 달라질 수 있고 그 선택이 삶과 직결되어 우리가 몸담고 있는 사회와 국가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걸 알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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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에 발간된 우수하고 의미있는 책 100선 중 56번째 책 인문학 부문 26번째 책 에리히 프롬(Erich Fromm)가1976년에 출간한 ‘소유냐 삶이냐? (To Have or to Be?)’를 마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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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rich-fromm-to-have-or-to-be-1976.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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