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0. 韓山李氏/01_韓山 李氏

이색 (李穡 ; 1328~1396)

忍齋 黃薔 李相遠 2006. 12. 14.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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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색 (李穡 ; 1328~1396)
 
  고려 말의 문신 ·학자로서 본관은 한산(韓山)이며 자는 영숙(潁叔)이다. 호는 목은(牧隱)이며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이제현(李齊賢)의 문하생으로 삼은(三隱)의 한 사람이다. 아버지는 찬성사 곡(穀)이다. 15세에 부음(父陰)으로 별장(別將)의 직을 얻었고 1341년(충혜왕 복위 2) 진사(進士)가 되고, 1348년(충목왕 4) 아버지가 원에서 중서사전부(中瑞司典簿)가 되자 조관(朝官)의 아들로 원나라 국자감의 생원이 되었다.


  1351년(충정왕 3) 부친상(父親喪)으로 귀국, 1352년(공민왕 1) 전제(田制)개혁 ·국방강화 ·교육진흥 ·불교억제 등 당면정책을 왕에게 건의했다. 1353년 향시(鄕試)와 정동행성(征東行省)의 향시에 장원 급제하였고 1354년 서장관(書狀官)으로 원나라에 가서 회시(會試)에 장원, 전시(殿試)에 차석으로 급제, 국사원편수관(國史院編修官) 등을 지내다가 귀국하였다.

 

  이듬해 다시 원나라의 한림원(翰林院)에 등용되었다. 즉, 1355년 공민왕의 개혁정치가 본격화되자 왕의 측근세력으로 활약하면서 〈시정8사 時政八事〉를 올렸는데 그중 하나가 정방(政房)의 혁파였다. 이 일로 이부시랑 겸 병부시랑에 임명되어 문무(文武)의 전선(銓選)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듬해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 때는 3년상(三年喪)을 제도화했다.

 

  신흥유신으로서 현실개혁의 뜻을 가진 이색은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고 반영시키는 가운데 순조롭게 출세의 길로 나아갈 수 있었다. 그런데 이색의 이러한 정치적 성장은 오히려 현실개혁의지를 약화시키고, 자신과 관계를 맺은 부류와 타협하게 되었다. 1357년 전녹생(田祿生)·정추(鄭樞) 등과 더불어 염철별감(鹽鐵別監)의 폐지를 논했다. 새로이 별감을 파견하면 이배(吏輩)들이 농간을 부릴 것이며 별감은 세포(稅布)를 많이 거두어서 왕의 총애를 받으려 하기 때문에, 일반 민은 소금을 받지도 못하고 포만 납부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색은 왕이 재추(宰樞)와 대성관리(臺省官吏)를 모은 가운데 별감 파견의 가부를 물으려 하자 병을 칭하여 피했다. 이는 염제신과 같은 권세가가 별감 파견을 주장한 것에 대한 이색의 타협으로서, 다른 간관(諫官)이 이 일로 좌천된 것과 달리 이색은 중임되었다. 또한 1362년 성균시의 합격자를 뽑던 중 왕이 환관(宦官)을 보내어 벽승(嬖僧)의 사패(賜牌)에 어보(御寶)를 찍으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색은 처음에 신하들과 의논할 일이라 하여 반대했지만 이내 왕의 노여움을 두려워하여 찍었다. 사패는 국왕이 충성의 대가로 공신이나 기타 사원에게 설정해주는 토지의 증빙문서였는데, 당시에는 권세가의 토지확대방법으로 이용되어 토지겸병과 수취체계 중첩화의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었다. 이색은 국왕의 힘에 의해서 자신의 뜻을 계속 관철시키지 못하고 이를 묵인하고 있었던 것이다.

 

  1359년, 1361년 홍건적(紅巾賊)의 침입으로 왕의 남행(南幸)을 호종, l등공신이 된 후 전(田) 100결(結), 노비 20구(口)를 받았다. 또한 아버지에게서 받은 토지·노비와 관직을 통해 얻은 수조지, 그리고 공신전으로 중앙정계에 정치적 지위에 상응하는 경제적 기반도 마련하고 있었다. 그리고 좌승선(左承宣) 등 여러 관직을 지냈다. 1365년 신돈이 등장하고 개혁정치가 본격화되면서 그는 교육·과거 제도 개혁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1367년 성균관이 중영(重營)될 때  대사성(大司成)이 되자 성균관의 학칙을 새로 제정하고 김구용(金九容) ·정몽주(鄭夢周) ·이숭인(李崇仁) 등과 강론, 성리학 발전에 공헌했다.

 

  1373년 한산군(韓山君)에 책봉된 후에는 신병으로 관직을 사퇴했으나 1375년(우왕l) 우왕의 청으로 다시 정당문학(政堂文學) 등을 역임했다. 1377년 추충보절동덕찬화공신(推忠保節同德贊化功臣)의 호를 받고 우왕의 사부(師傅)가 되었다. 이해에 판문하부사 조민수(曺敏修)의 아들이 과거에 합격하지 못했는데 동지공거 염흥방(廉興邦)이 그를 합격시킬 것을 청했으나 거절했다. 그는 1377년 장경(藏經)을 인성(印成)하고, 1387년 서보통탑(西普通塔)의 탑기(塔記)를 짓는 등 주자성리학자이면서도 불교를 선호하며 긍정하고 있었다.

 

  1388년 철령위(鐵嶺衛) 사건에는 화평을 주장하였고 이듬해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으로 우왕이 강화로 유배되자 조민수(曺敏修)와 함께 창(昌)을 즉위시켜 이성계(李成桂)의 세력을 억제하려 하였으나 이성계가 득세하자 장단(長湍) ·함창(咸昌) 등지에 유배되었다. 즉, 1388년 위화도회군이 일어나자 문하시중에 임명되었다. 고려왕조의 존립을 전제로 하는 가운데 개혁정치를 희구한 이색은 1389년(공양왕 1) 도평의사사에서의 사전혁파(私田革罷) 논의 때 이숭인·변안렬(邊安烈) 등과 같이 옛 법은 경솔히 고칠 수 없다고 반대했다. 불법적인 대토지소유에 반대하고 있었지만 사전개혁과 같은 급격한 전제개혁에도 반대하고 있었다. 그는 위화도회군을 군령을 위반하고 왕의 명령을 거역한 행위로 이해했으므로 그 주체세력이나 동조세력에 반감을 갖고 있었다. 위화도회군의 중심인물과 동조세력은 당대의 대유(大儒)인 이색과 같은 반대세력을 제거함으로써 정치권력을 장악하고 개혁을 추진하고자 했다.

 

  1391년(공양왕 3) 석방되어 한산부원군(韓山府院君)에 책봉되었으나 다시 여흥(驪興) 등지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났다. 조선 개국 후 인재를 아낀 태조가 1395년 한산백(韓山伯)에 책봉했으나 사양, 이듬해 여강(驪江)의 신륵사(神勒寺)로 가던 중 죽었다.

 

  이색은 원나라에서의 유학과 이제현을 통하여 이 시기 선진적인 외래사상인 주자 성리학을 수용했고, 이를 바탕으로 고려 말기의 사회혼란에 대처하면서 정치사상을 전개했다. 그는 원의 주자학을 받아들였으므로 그 영향을 강하게 받게 되었다. 이(理)·기(氣)·태극(太極)과 같은 주자학의 핵심개념을 사용하여 만물의 생성과 변화를 설명했고, 주자학의 수양론인 성학론(聖學論)을 전개했다. 그러나 주자학에서 말하는 수양론과 달리 죽음과 인간적 고뇌와 같은 초인간적·종교적 문제는 여전히 불교에 의존했다. 또한 송대의 혈연·의리·도덕·윤리 등을 말하는 도통론(道通論)을 전개한 것이 아니고 원의 형세론적 도통론을 전개했다. 즉 그의 주자성리학의 발원지인 원의 영향과 불교의 영향 속에서 송대의 주자학과 구분되는 정치사상을 전개했다.

 

  문하에 권근(權近) ·김종직(金宗直) ·변계량(卞季良) 등을 배출, 학문과 정치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다. 저서에 《목은시고(牧隱詩藁)》 《목은문고(牧隱文藁)》가 있다. 장단 임강서원(臨江書院), 청주 신항서원(莘巷書院), 한산 문헌서원(文獻書院), 영해 단산서원(丹山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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