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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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韓山李氏/_071 서화보따리 45

동양화가 일호(一湖) 이수표(레오) 선생 작품

일호 이수표 선생은 내 부친 방원 선생의 어린 시절 친구로 내가 1988년 12월 미국 유학을 떠나올 때까지 나도 자주 뵙던 분이다. 나는 수표 아저씨라 불렀다. 내 부친 방원 선생을 비롯해 방원 선생의 친구분들은 다들 기골이 장대하고 큰아기들도 눈을 멈추게 만드는 미남에다 멋쟁이들이었다. 수표 아저씨도 그랬다. . 수표 아저씨는 내 어린 시절엔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판매하셨는데 덕분에 우리 집에도 한 질이 구비되어 방원 선생의 친구분 이종익 선생의 신구문화사 아동문학 전집, 한국문학 전집, 세계문학 전집과 더불어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은 내가 심심하면 들추어 보던 책들이었다. . 워낙 기인이셔서 책 팔아서 번 돈을 섬에다 별장을 짓겠다고 배 한 척 없이 인천 앞바다의 어느 섬을 하나 사셨는데 후일담을 들어..

동양의 피카소가 남긴 수묵화

부친 방원 선생의 서화 보따리 속에 畔影(반영)이라는 분의 설경 수묵화가 있다. 작은 강 건너 눈 덮인 초막 마당에 눈을 치우는 사람도 있다. 도무지 반영이라는 분이 누구인지 가늠할 길이 없었다. 그러다 발견한 낡은 노란 종이 쪼가리에서 “東洋のピカソ(동양의 피카소)”를 발견했다. 바로 하반영(河畔影) 김구풍(金俱豊, 1918~2015) 선생의 작품인 것이다. . 반영 선생은 1918년 경북 김천에서 태어나 부친의 직장을 따라 영동, 대전 등지로 옮겨 다니며 살다가 군산에 정착했다. 일곱 살 때 서예와 수묵화를 통해 처음 붓을 잡은 반영 선생은 1931년 철모르는 나이 13세 때 금릉 김영창(1910-1988) 선생의 강력한 추천과 권유로 조선총독부미술전람회에 ‘나팔꽃이 있는 정물’이란 유화 작품을 익명..

[芮春浩 (예춘호 1927~2020) 선생 작품 - 柳宗元(유종원) 江雪(강설)]

방원 선생 유품 중에 1969년 4월 15일 3선개헌에 반대한 4 · 8항명 공화당 국회의원 중에 한분인 목촌(牧邨) 예춘호(芮春浩, 1927년 2월 7일 ~ 2020년 7월 22일) 선생의 쓰신 柳宗元(유종원)의 詩句 江雪 (강설) 서화도 눈에 띈다.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때도 고생을 하신 분으로 부산 동아대 출신 ... . 千山 鳥飛絶 (천산 조비절) 산에는 새 한 마리 날지 않고 萬逕 人蹤滅 (만경 인종멸) 길에는 사람 자취도 끊어졌네 孤舟 簔笠翁 (고주 사립옹) 도롱이에 삿갓차림 늙은이, 한 척 배 띄워놓고 獨釣 寒江雪 (독조 한강설) 눈 내리는 겨울 강에 홀로 낚시를 하고 있네. 柳宗元 詩句 (유종원 시구) 癸未新春 (2003년 계미신춘) 芮春浩 (예춘호) . +++ Kyzbma Yan..

[동정(東庭) 박세림(朴世霖 1925~1975) 선생 작품]

부친 방원 선생 유품 중에 동정 박세림 선생의 작품도 있다. 동정(東庭) 박세림(朴世霖·1925~1975) 선생은 1925년 4월 강화도 내가면 황청리에서 부친 밀양 박씨 동관(東觀) 박헌용(朴憲用) 선생과 어머니 유(柳) 씨 사이에서 3대 독자로 태어났다. . 동정 선생은 6세 때 한문과 궁체에 조예가 깊은 할머니 밀양 변(卞)(1862~1932) 씨로부터 천자문과 동몽선습을 배웠다. 변(卞) 씨 할머니가 동정 선생에게는 첫 스승이었다. 2년 뒤 할머니는 세상을 떠났고 동정 선생은 부친으로부터 직접 서예를 배웠다. . 동정 선생의 부친 동관(東觀) 박헌용(朴憲用) 선생은 독립운동가로 강화도 역사책인 강도지(江都誌)를 간행한 문필가였다. 동정 선생의 서예에 있어 가학(家學)은 가치를 따질 수 없을 만큼 ..

[우경희(禹慶熙, 1924-2000) 선생 작품]

부친 방원 선생의 서화중에 소품들이 제법 있는데 삽화 같은 연하장들이 또 엄청 있다. 그중에 우경희 선생의 삽화가 눈에 띈다. 방원 선생이 창경궁 식물원, 청량리 원예연구소 분소, 경무대 온실, 한남동 식물원, 부천 소사의 식물원 등 꽃 속에서 사셨으니 그림을 그리는 친구분들이 어쩔 수 없이 많을 수밖에는 없었다. . 언제나 식물원 구석구석에는 스케치하는 화가분들이 있었으니 말이다. 그중에 우경희 선생도 있었다. 우경희(禹慶熙, 1924-2000) 선생은 1924년 경기도 개성에서 태어나 경기중과 동경제국미술학교를 졸업한 분이다. 개성에서 중학교 미술 교사를 하다가 개성에 있던 미군 문화원(USIS)에 스카우트되어 선전 선동 포스터를 그리다 한국전쟁이 터져 서울로 피난 나왔다. . 그때 만화가 유용하다는..

[한길 일로(一路) 김종기(金鍾起, 1911~1984) 선생의 작품]

부친 방원 선생의 서화 작품 속에 한길 일로(一路) 김종기(金鍾起, 1911~1984) 선생의 작품들이 있다. 아마도 방원 선생이 남농 허건 선생과 친하게 지내신 인연으로 김일로(金一路) 선생과 교류가 있었던 모양이다. 김일로(金一路) 선생 49세때인 1959년 3월 1일 부터 3월 10일까지 남농(南農) 허건 선생과 김일로(金 一路) 선생의 시화전을 목포 여정다실에서 개최할 정도로 남농 선생과는 절친했다. 당시 동양화의 화제(畵題)를 한글시로 대체한 최초의 한글시 부제시화전(副題詩畵展)의 장을 열었다고 평가되었다. . 생전에 호에 성을 붙여 김일로(金一路)를 사용하셔서 많은 이들이 김일로(金一路)를 성함으로 기억하기도 한다. 김일로(金一路) 선생은 전남 장성에서 1911년에 출생하여 전남과 광주의 아동..

구당(九堂) 이범재(李範載, 1910~1993) 선생 작품

생전 부친 방원 선생과의 친분으로 보아 구당 선생의 작품이 제법 있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의외로 많이 보이지 않는다. 앞으로 부친의 유품 보따리에서 얼마나 더 나올지는 모르겠지만 대충 훌터본바로는 지운 선생 서화가 대부분일듯 하다. 부친이 소장하셨던 작품이 액자나 족자 하다못해 부를 해두셨기에 구당선생의 작품은 나의 두형과 누나 여동생이 잘 챙겨 두었을 것이라 믿어본다. . 구당 선생은 1910년 전남 보성에서 출생하여 어렸을 때 광주로 올라와 살면서 의재(毅齋) 허백련(許百鍊) 선생으로부터 묵화를 사사 받았다. 1938년 연진회 창립회원으로 활동하였고, 1945년 해방이 되자 인민위원회 보성읍위원장에 그리고 4.19혁명 뒤엔 보성읍장에 당선되었으나 1961년 5.16 군사 쿠테타가 일어나자 읍장을 그만두..

[남농(南農) 허건(許楗, 1907~1987) 선생의 서찰]

부친 방원 선생 유품 중 의재(毅齋) 허백련(許百鍊, 1891~1977) 선생이나 남농(南農) 허건(許楗, 1907~1987) 선생 그리고 이당(以堂) 김은호(金殷鎬, 1892~1979) 선생 등 유명하고 작품이 고가를 형성하는 작품들은 액자로 족자로 남겨졌고 이미 두 형과 누나 여동생 잘 보관하고 있기에 화선지로 둘둘 말려 남겨진 보따리에서는 발견할수 없다. 그런데 남농 선생이 부친 방원 선생에게 보냈던 서찰이 한통 보인다. 작품에 대한 소소한 이야기지만 기록을 위해 남겨두고자 한다. . +++

상산(象山) 곽현수(郭炫洙, 1947~) 선생 작품 3

방원 선생 유품 서화보따리에는 생전에 각별했던 친분만큼이나 구당 이범재 선생의 작품도 많다. 구당 선생의 제자분 중에 구당 선생이 아끼던 분이 상산 곽현수 선생이다. 상산(象山) 곽현수(郭炫洙, 1947~) 선생 작품도 보인다. 상산 곽현수 선생은 전라남도 진도에서 1947년에 출생한다. 개인전을 6회에 걸쳐 개최했고, 1983년 한국방송공사, 1984년 한국미술문화대상전 금상, 1985년 한국미술대전 특선과 금상을 수상한 후 이후 대한민국미술대전에서 입선 등 여러차례 수상했다. 1988년 한국미술문화대상전 초대작가상을 수상했다. 상산 곽현수 선생의 8군자 8폭 병풍 2쌍에 이어 소 작품들을 소개한다. . +++

상산(象山) 곽현수(郭炫洙, 1947~) 선생 작품 8군자 병풍 2

방원 선생 유품 서화보따리에는 생전에 각별했던 친분만큼이나 구당 이범재 선생의 작품도 많다. 구당 선생의 제자분 중에 구당 선생이 아끼던 분이 상산 곽현수 선생이다. 상산(象山) 곽현수(郭炫洙, 1947~) 선생 작품도 보인다. 상산 곽현수 선생은 전라남도 진도에서 1947년에 출생한다. 개인전을 6회에 걸쳐 개최했고, 1983년 한국방송공사, 1984년 한국미술문화대상전 금상, 1985년 한국미술대전 특선과 금상을 수상한 후 이후 대한민국미술대전에서 입선 등 여러차례 수상했다. 1988년 한국미술문화대상전 초대작가상을 수상했다. 상산 곽현수 선생의 8군자 8폭 병풍 두번째 작품을 지난번 첫번째 작품에 이어 소개한다. . +++ 2 1 4 3 6 5 8 7

안곡(安谷) 이정(以亭-以丁) 장재운 (張在運 1948~2019) 선생 작품

부친 방원 선생 유품 중에는 역시 안곡.이정 장재운 선생의 작품이 많이 있다. 내가 유학 나오던때는 옥전 선생 밑에서 용맹정진 중이었다. 특히 장미 그림이 아름다워 개인적으로 그림을 받아 부를 하고 족자를 만들어 미국에 들고와서 친한 미국 교수님들에게 선물로 주기도했다. 몽땅 모아서 소개를 하려다 보니 작년에 작고하셨다고 한다. . 안곡 선생은 전남 보성에서 1948년(월간 미술에는 1952년 7월 12일 출생했다고 기록하고 있다)에 출생했다. 작품 활동에 안곡(安谷), 이정(以亭), 이정(以丁), 양지헌인(養知軒人) 등 여러 호를 사용하셔서 그 내용을 잘 모르는 분들은 동일인의 작품이 아닌 줄 알기도 한다. 내가 미국 사는 동안 작가로 성공하셔서 국전 심사위원도 하시더니, 천수를 너무 짧게 누리고 요단..

운암(雲菴) 조용민(趙鏞敏, 1926-2017) 선생 작품

부친 방원 선생 유품보따리에는 행초서의 대가 운암(雲菴) 조용민(趙鏞敏) 선생의 시절엽서와 작품이 보인다. 원래 보따리를 뒤지다보면 큰 작품이 여러개 나오면 그때 소개할까 했는데 기억했던 생각과 사연을 잊어버릴까봐 꺙 소개한다. . 동국진체가 뭔체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른들 말씀이 운암 선생의 필체는 동국진체의 맥을 잇는다고 했다. 운암 선생은 함안조씨의 집성촌인 전남 곡성군 죽곡면 봉정리에서 1926년 9월28일 조선초 생육신의 한 사람인 조려(趙旅)의 후손으로 태어났다. . 운암 선생은 원래 광주에서 가업인 자동차부품 판매업을 하다가 나이 마흔이 넘어 송곡(松谷) 안규동(安圭東) 선생의 문하에 들어가 밤낮으로 서예술을 연마하여 서예대가의 반열에 든 특이한 이력을 가진 분이다. . 운암 선생은 외상값을 다..

석천(石泉) 이경희(李敬熙) 선생의 작품

도자기와 서예를 결합해 일본에서 오히려 잘 알려진 석천(石泉)이경희(李敬熙) 선생 작품 . Kyzbma Yang 曰 - 양금섭 교수님 말씀하시길: 李白 石泉 李敬熙 글도 천하 제일의 문장인데, 내 안목으로는 글씨도 지금까지 검토한 아우님 소장품 중에서는 최고의 명필이구만. 孫過庭의 나 智永 천자문의 草書 수준의 필력이네. 6폭병풍을 만들어 잘 간수하게나. 대졸 직후 70년대 후반에 인사동에서 昭志道人 姜昌元 선생께 붓잡는 법을 익히던 시절이 아스라하네. 곧 미국으로 이민가신 모양인데, 2017년 한국에서 百壽기념 서예전을 가지셨다는 기사가 검색되느만. 40여 년 전에는 書譜도 임서하다 말았는데, 벌써 막 내릴 시간이 다 되었네그려. ㅠㅠ . 아무튼 부친 방원 이성찬 선생의 유품 보따리에서 나온 6폭 대자..

막내 아들의 혼사기념품

나는 1988년 7월 16일 여의도 천주교회 성당에서 혼배성사 겸 혼배미사를 보았다. 내 혼배미사에는 전국성가대회 최우수상에 빛나는 여의도 성당 성가대의 축복 성가가 미사시간 내내 이어졌다. 그 미사에 참석했던 내 친구들 중에는 결혼식을 천주교식으로 하려고 천주교로 개종한 친구들이 여~러명 있다. . 내 각시가 군인이어서 고리타분한 집안어른들의 염려(?)가 많았다. 그래서 난 집안 어른들의 축복을 포기하고 그냥 날을 잡아 혼배미사를 강행했다. 아직도 나와 내 각시는 그때의 상한 기분을 풀지 못한다. 그리고 그해말 미국유학을 떠났다. . 집안 어른들의 결혼 축복을 포기했으니 결혼을 축하하고 기념해줄 걸 기대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내 부친 방원 선생 유품보따리 안에는 내 결혼식 축하 서화며 동양화가 무려 2..

방원(芳園) 이성찬(李盛粲, 1927~2018)선생 작품 7

내 부친 방원(芳園) 이성찬(李盛粲) 선생은 한산이씨 목은 선생의 21대손으로 1927년 종로구 계동 13번지에서 이성구 선생과 순창 조씨 조언례 여사 사이에서 외동아들로 출생한다. 일본강점기에 수원 농림을 나와 만주국 농림국 미곡검사관(滿洲國 農林局 米穀檢査官)을 지내던 부친 이성구 선생을 따라 만주에서 소학교를 다니다 경성의 봉래 고등 소학교로 유학을 나왔다. . 해방이 나던 1945년 3월 방원(芳園) 선생은 경성원예학교를 졸업하며 바로 초대 창경궁 식물원 원장에 취임한다. 그리고는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여 식물원이 전라북도 전주로 옮겨가서 자리를 잡을 때까지 근무를 한다. 그해 후학을 양성할 작정으로 전주 농림에서 원예를 가르치지만 6.25 전쟁으로 백척간두에 선 나라를 지키겠다는 일념..

방원(芳園) 이성찬(李盛粲, 1927~2018)선생 작품 6

내 부친 방원(芳園) 이성찬(李盛粲) 선생은 한산이씨 목은 선생의 21대손으로 1927년 종로구 계동 13번지에서 이성구 선생과 순창 조씨 조언례 여사 사이에서 외동아들로 출생한다. 일본강점기에 수원 농림을 나와 만주국 농림국 미곡검사관(滿洲國 農林局 米穀檢査官)을 지내던 부친 이성구 선생을 따라 만주에서 소학교를 다니다 경성의 봉래 고등 소학교로 유학을 나왔다. . 해방이 나던 1945년 3월 방원(芳園) 선생은 경성원예학교를 졸업하며 바로 초대 창경궁 식물원 원장에 취임한다. 그리고는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여 식물원이 전라북도 전주로 옮겨가서 자리를 잡을 때까지 근무를 한다. 그해 후학을 양성할 작정으로 전주 농림에서 원예를 가르치지만 6.25 전쟁으로 백척간두에 선 나라를 지키겠다는 일념..

상산(象山) 곽현수(郭炫洙, 1947~) 선생 작품 4

방원 선생 유품 서화보따리에는 생전에 각별했던 친분만큼이나 구당 이범재 선생의 작품도 많다. 구당선생의 제자분 중에 구당 선생이 아끼던 분이 상산 곽현수 선생이다. 상산(象山) 곽현수(郭炫洙, 1947~) 선생 작품도 보인다. 상산 곽현수 선생은 전라남도 진도에서 1947년에 출생한다. 개인전을 6회에 걸쳐 개최했고, 1983년 한국방송공사, 1984년 한국미술문화대상전 금상, 1985년 한국미술대전 특선과 금상을 수상한 후 이후 대한민국미술대전에서 입선 등 여러차례 수상했다. 1988년 한국미술문화대상전 초대작가상을 수상했다. 상산 곽현수 선생의 8군자 작품이 또 나왔다. . +++

옥농(沃儂) 김창식(金昌埴, 1938~) 선생 작품

방원 선생 유품보따리에는 옥농 선생 작품도 보인다. 옥농 선생은 1938년 4월 22일 일본 동경에서 출생하여 1961년 영남대학교를 졸업했다. 졸업후 삼화고속에서 줄곧 근무하여 1996년 전무이사를 마치고 은퇴했다. 기존의 전업작가와는 다르게 힘든 직장생활 속에 숨통을 틔우는 취미생활로 한국화가의 길을 걸었지만, 국전심사위원과 미술협회 한국화협회 고문을 지낼정도로 동양화가로서도 성공했다. 1974년 옥산 김옥진 선생 문하에서 시작하여 1981년 곡천 이정신 선생에게서 사사했다. 작품세계는 한국화를 마치 서양유화를 접하는 착각이 들 정도로 시각을 확장시켰다. 더군다나 팔순을 바라보는 2014년에는 여행작가로 또다시 변신을 시작하여 120 인생의 여정을 준비하고 있다. 옥농 선생의 작품을 접할수 있어 행복..

계산(谿山) 장찬홍(張賛洪, 1944~) 선생 작품

방원 선생 유품보따리엔 계산(谿山) 장찬홍(張賛洪) 선생 작품도 눈에 띈다. 계산 선생은 1944년 장흥에서 출생하여 1963년 20세 약관의 나이로 붓을 들기 시작해 이듬해 호남 남화의 거목 의재 허백련 선생 문하에 들어 의재 선생이 1977년 작고 할때까지 평생을 오로지 의재 선생 곁에서 무등산방을 지킨 의리의 사나이 돌쇠다. . 주로 무등산을 비롯한 억불산, 월출산, 한라산 등이 주가 된 산수와 봄꽃 만발한 시절에 맞춰 화사한 봄풍경들, 새봄의 물이 오른 연한 가지들을 늘어뜨린 수양버들과 제비 한쌍, 한가로운 날의 여유를 만끽하는 고양이, 수련과 목련, 엉겅퀴 등 주변의 화훼 소재들까지 다양한 화제들을 보여준다. . 무등산 자락 아래 청계재(淸溪齋)와 소요당(逍遙堂)에서 평생을 지내온 처사 같은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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