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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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韓山李氏/04_李命稙大監 22

욕석집사(褥席執事) 이명직(李命稙) 임명

고종실록 1900년 광무4년 고종27년 7월 24일자의 내 고조부님의 내용을 살피다 보니 욕석집사(褥席執事)에 이명직(李命稙)을 임명한다고 나옵니다. 욕석(褥席)은 요와 자리를 말하는데, 임금이 외부 행사를 치룰 때 장막을 치고 이를 깔았다고 합니다. . 실록에 의하면 "(忠扈衛設幄於魂殿西階上, 東向; 奉常寺官設牀及褥席於幄內。) 충호위(忠扈衛)에서 장막[幄]을 혼전(魂殿)의 서계(西階) 위에 동향하여 설치하고, 봉상시(奉常寺)의 관원(官員)은 평상(平牀)과 욕석(褥席)을 장막 안에 설치한다."고 나옵니다. . 욕석(褥席)은 봉상시나 액정서(掖庭署) 등에서 설치하였으며, 자주(紫紬)나 홍릉(紅綾) 등으로 요(縟)를 만들고 남초선(藍綃縇) 등으로 자리를 만들어 썼는데, 이를 담당하는 욕석집사(褥席執事)가 따..

[석농(石農) 홍일선(洪一善) 시인]

어제 컴퓨터를 켜니 "노작 홍사용 문학 기념사업회 이사장 홍일선입니다."라는 이메일이 한 통 도착해 있었습니다. 몇 해 전 올렸던 '노작 홍사용과 성우 이명직 어른'에 대한 게시글을 보고 '농부 시인 홍일선(洪一善)' 선생님이 보내오신 이메일입니다. 외롭게 조상의 흔적을 찾아 정리한 보람이라고 생각하니 바쁜 일과였지만 즐거운 하루였습니다. . 인터넷 서치를 해보니 석농(石農) 홍일선(洪一善) 시인은 1950년 경기도 화성 동탄면 석우리 돌모루에서 태어나 1980년 계간 『창작과비평』 여름호에 「쑥꽃」 외 5편으로 등단한 중견 작가입니다. 홍일선 시인의 아버님이 노작 홍사용 선생님의 6촌 형제이니 홍일선 시인은 노작 홍사용 선생님의 7촌 조카로 민법상 8촌 이내에 해당하니 일가친척입니다. . 오래전 한국을..

'눈물의 왕' 노작(露雀) 홍사용(洪思容)과 노작의 외숙부 성우(性祐) 이명직(李命稙) 선생

나는 왕이로소이다. 어머니의 가장 어여쁜 아들, 나는 왕이로소이다. (중략) 나는 왕이로소이다. 어머니의 외아들 나는 이렇게 왕이로소이다. 그러나 그러나 눈물의 왕! 이 세상 어느 곳에든지 설움있는 땅은 모두 왕의 나라로소이다. 에서 노작(露雀) 홍사용(洪思容) 문예지 《백조》를 창간하고 ‘토월회’와 신극 운동에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바쳐가며 사그라져 가는 민족정신을 일깨우고자 했던 민족시인 노작(露雀) 홍사용(洪思容)은 1900년 5월 17일 경기도 용인군 기흥면 농서리 용수골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남양(南陽). 호는 노작(露雀)·소아(笑啞)·백우(白牛)였다. 아버지는 대한제국 통정대부 육군헌병 부위를 지낸 홍철유(洪哲裕)이며, 어머니는 능성구씨(綾城具氏)이다. 홍사용은 생후 100일 만에 서울 ..

성우 이명직 대감의 사진 관복의 흉배를 통한 품계 고찰

몇 주 전 한산이씨 일가 되는 분이 밴드 게시글을 통해 성우 이명직 대감이 1894년 갑오년 진사시에 입격하였는데 과거에도 급제하지 않았고 족보에도 진사입격과 주사 관직으로 기재되어 있는데 당상관의 직위에 있다고 설명하는 것이 온당치 못하다고 주장하였고 밝을 명자를 사용하는 ..

1906년 9月 18日(火) 從二品 李命稙을 奎章閣直學士에 임명하다.

고종시대사 6집 > 光武 10年 9月 18日 > 從二品 李命稙을 奎章閣直學士 기사제목 從二品 李命稙을 奎章閣直學士 연월일 光武 10年, 丙午(1906년, 淸 德宗 光緖 32年, 日本 明治 39年) 9月 18日(火) 從二品 李命稙을 奎章閣直學士, 梁起澤을 韓美電氣會社檢察官에 임명하다. 출전 日省錄 光武 10年 8月 1日 承政院日記 光武 10年 8月 1日 官報 光武 10年 9月 21日

(25世) 한산이(韓山李)씨 24代孫 (목은19세, 牧隱18代孫)

[조선조 마지막 진사시에 입격하여 탁지부 주사에 들어서 과거를 볼수 없었다 하여도 족보상 진사시 입격과 주사를 지냈고 성함에 목숨명자만 보이는 족보기록 이외에 다른 관직과 밝을 명자 사용에 대한 고증이 없으므로 다른 관직을 기재하거나 높은 직급의 호칭과 밝을 명자 사용을 삼가라는 일가분의 인터넷상 지적이 타당하나 정확한 사료적 고증 없이 직계 후손들에 의해 보완되지 못한 족보에만 의존하여 직계 후손들이 심혈을 기울여 발굴하고 파악하는 새로운 사실들을 시대적인 변천 사항을 고려하지 않은 체 과거제가 왕성하게 시행되던 시절에 대비하여 과거제가 폐지된 이후에 관직에조차 과거에 급제하지 못한 진사 입격자가 당상관에 오르지 못할 것이란 단정함에 문제가 있고 당상관이 사용하는 쌍학의 흉배의 관복을 입고 사진을 찍은..

(1899~1905) 구한말 사료에 등장하는 성우 이명직 선생이 내직에 들기전 외직에서 이룬 업적

0. 고종시대사 6집 > 光武 10年 9月 18日 > 從二品 李命稙을 奎章閣直學士 기사제목 從二品 李命稙을 奎章閣直學士 연월일 光武 10年, 丙午(1906년, 淸 德宗 光緖 32年, 日本 明治 39年) 9月 18日(火) 從二品 李命稙을 奎章閣直學士, 梁起澤을 韓美電氣會社檢察官에 임명하다. 출전 日省錄 光武 10年 8月 1日 承政院日記 光武 10年 8月 1日 官報 光武 10年 9月 21日 1. 영양군수 이범철의 방면에 대한 보고 원문서명 報告書 第一百三十三號 발신자 平理院檢事 李根洪 발신일 光武九年八月三十一日 ( 1905년 08월 31일 ) 수신자 法部大臣 朴容大 閣下 접수 接受 光武九年九月一日 第九百七十五號 참조 및 결재 大臣 協辦 報告書 第一百三十三號 英陽郡守 李範喆을 因 李命稙 告訴야 墓石掘賣事審査..

(1895~98) 구한말 사료에 등장하는 성우 이명직 선생이 내직에 들기전 외직에서 이룬 업적

31. 밀양군수가 사판위원 여비 처리문제 등에 대해 농상공부에 보고 원문서명 報告書 발신자 慶尙南道密陽郡守 李命稙 발신일 光武二年十二月二十九日 ( 1898년 12월 29일 ) 수신자 配附 驛遞所 農商工部大臣 閤下 접수 接受 光武三年一月十四日 第 號 報告書 本郡丙申條驛賭價中乙未冬査辦委員旅費六百二十三兩出給條減下次前已報告矣러니 部指令內節開該員旅費난 本部와 宮內府에 分半劃下난바이니 折半條三百十一兩五戔는 准例扣除이견과 折半條난 該府에 具報劃下라시고 卽到本道觀察府訓令內節開에 各郡丙申條驛賭中人夫料資加下錢劃撥事로 論報于農商工部矣러니 指令內槪各郡驛賭遞料를 業徑指飭이견과 査員旅費난 本部와 宮內府에 分半劃下난바이니 密陽郡丙申驛賭價未收中에 各郡人夫料加下條로 移劃거온 准此反飭事이시다온 同査員旅費折半條三百十一兩五戔를 本部..

가의대부의병대장겸삼남도육군대도독(嘉義大夫義兵隊長兼三南道陸軍大都督) 남삼도대원수군제사목(南三道大元帥軍制事目) 전 12개 조

제 고조부 이명직 대감님이 윤자형(尹滋亨) 장군님에게 전달했던 고종황제의 조칙 문서는 소문으로만 그 존재가 알려져 있었는데 1989년에 후손이 궤짝 밑에 붙여져 있던 걸 발견함에 따라 세상에 빛을 보게 되었고 고종황제의 일제에 대한 무력저항의 증거가 되고 있습니다. 고종 조칙(..

[1. 제 고조부 애국지사 성우 이명직 선생님을 페이스북 친구 여러분께 소개합니다]

.평생 돈 한 푼 집에 벌어온 적 없이 국민학생(초등학생) 아들이 월사금 내려고 애호박 팔아모은 돈도 들고 한량 노릇 하러 다니시던 내 아버님을 무척 미워했습니다. 군사독재의 탄압도 피했지만 능력 없는 부모에게서 탈출도 겸해서 미국으로 연구 조교 자리를 구해 도망을 쳤습니다. ..

일제의 신하들 -정미칠적과 고종의 마지막 신하 - 이명직.이철규 부자

. 위의 사진은 내각총리대신 이완용(맨 왼쪽), 내부대신 임선준, 군부대신 이병무, 농상공부대신 송병준이 나란히 앉아 있습니다. 정미칠적(丁未七賊: 을사조약 체결 2년 후인 1907년 7월에 체결된 한일신협약 -제3차 한일협약 또는 정미7조약 - 조인에 찬성한 내각 대신 일곱 사람을 가리킴)..

[성우(性祐) 이명직 선생과 노작 홍사용]

'눈물의 왕' 홍사용과 화성 “ 나는 왕이로소이다. 어머니의 가장 어여쁜 아들, 나는 왕이로소이다. (중략) 나는 왕이로소이다. 어머니의 외아들 나는 이렇게 왕이로소이다. 그러나 그러나 눈물의 왕! 이 세상 어느 곳에든지 설움있는 땅은 모두 왕의 나라로소이다” 에서 ● 《백조》 창간과 선비정신 ◀ 휘문의숙 시절의 홍사용 일제 식민치하, 나라가 있어도 내 나라가 아니었고 왕은 백성들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했다. 이러한 시국에 올곧은 선비정신으로 지조를 지키고 ‘나는 왕이로소이다’를 고고하게 외치며 민족혼을 일깨우던 시인. 문예지 《백조》를 창간하고 ‘토월회’와 신극운동에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바쳐가며 사그라져 가는 민족정신을 일깨우고자 했던 민족시인 노작(露雀) 홍사용(1900∼1947). 홍사용이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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