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뉴스) 임주영 기자 = 32년 만에 법정에서 다시 오른 `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인혁당 재건위) 사건 재심에서 1975년 긴급조치 위반 혐의로 사형이 선고돼 숨진 고(故) 우홍선씨 등 8명에게 무죄가 선고됐다.
이로써 `유신정권'에 반대해 민주화운동을 했다가 위법한 수사ㆍ재판의 희생양이 됐던 8명의 숨진 피고인들은 뒤늦게나마 명예를 회복했고 `사법살인'이라는 비난을 받았던 사법부도 뒤늦게나마 과거의 오점을 바로잡게 됐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3부(문용선 부장판사)는 23일 `인혁당 재건위' 사건에 연루돼 1975년 긴급조치 1호 위반 등의 혐의로 사형이 집행돼 숨진 우홍선씨 등 8명에 대한 재심 선고공판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재심 사유에 해당하지 않는 사안을 제외한 모든 사안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피고인 8명의 대통령 긴급조치 위반, 국가보안법 위반, 내란 예비ㆍ음모, 반공법 위반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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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부는 각 피고인들이 인혁당 재건을 위한 반국가단체를 구성한 혐의를 비롯해 여정남씨의 민청학련 배후조종 혐의와 송상진ㆍ하도원씨가 북한방송을 청취해 반공법을 위반한 혐의에 대해 무죄를 각각 선고했다.
재판부는 반국가단체 구성 혐의와 관련, 수사기관의 피의자 신문조서와 진술서는 원 진술자가 사망한 경우 형사소송법상 증거능력이 인정되려면 특신상태(특별히 신빙할 수 있는 상태)에서 작성됐다는 점이 인정돼야 하는데 당시 피의자들이 조사를 받을 때 자유로운 상태에서 작성했다고 볼 수 없다며 검찰이 제시한 조서 등의 증거능력이 없다고 판단해 증거로 채택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당시 공판조서도 대다수 피고인들의 진술과는 서로 배치되는 부분이 많아 신빙성을 인정하기 어려워 유죄의 증거로 삼을 수 없다고 강조했다.
재판부는 민청학련을 배후조종해 정부 전복을 시도하고 공산주의 정권을 수립하려 시도한 혐의도 당시 피고인들이 국가변란이나 국헌문란을 위한 조직적 활동을 했다는 검찰 주장을 인정할 증거가 없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긴급조치 위반 혐의에 대해서는 긴급조치가 유신정권 이후 효력을 잃었기 때문에 법령의 개폐로 형이 폐지된 상황에 해당한다며 법원이 유ㆍ무죄를 판단하지 않고 소송을 종결하는 면소(免訴) 판결을 내렸다.
다만 여정남씨의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 중 `반독재 구국선언' 혐의 부분은 다른 재판에 병합돼 유죄 판결이 확정됐고 재심 사유에 해당하지 않기 때문에 기존의 사실을 그대로 인정해 징역 10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한편 재판부는 변호인측이 `국민의 청원권과 의사표현의 자유 등을 근본적으로 박탈해 기본권을 심각하게 침해한 옛 유신정권의 긴급조치는 무효이고, 유신헌법 자체도 무효'라는 주장에 대해서는 "긴급조치는 법률적 효력을 갖는데 법원은 법률의 위헌 여부를 심사할 권한이 없고 유신헌법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라며 긴급조치와 유신헌법의 무효 여부에 대해서는 판단을 내리지 않았다.
변호인단과 `인혁당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 대책위'는 선고 직후 "사필귀정이며 사법적 명예회복이 이뤄진 것을 환영한다"고 밝혔다.
zoo@yna.co.kr
<인혁당 사건 주요 일지>
▲1963. 6. 3 `굴욕적 한일회담' 비판 시위 확산되자 비상계엄령 선포
▲1964. 8.14 중앙정보부 제1차 인민혁명당 사건 발표
"관련자 57명 중 41명 구속, 16명 수배"
▲1965. 1.20 1심 판결, 피의자 2명만 2, 3년 징역형, 나머지 11명은 무죄
▲1965. 6.29 2심 판결, 6명 징역 1년, 그 외 징역 1년, 집행유예 3년
▲1965. 9.21 대법원 항소심 판결 그대로 인정
▲1972.10.17 유신 선포
▲1973.10. 2 서울대에서 국내 최초 유신반대 시위 촉발, 전국대학 확산
▲1973.12. 장준하.백기완 선생 중심, 국민개헌청원운동 진행
▲1974. 4. 3 박정희 대통령 특별담화 "민청학련 단체, 불순세력 배후조종으로 인민혁명 수행하려 하고 있다"
▲1974. 4. 긴급조치 4호 발표, 민청학련 범죄단체로 규정
중앙정보부, 민청학련 배후로 제2차 인혁당(인혁당 재건위) 지목
▲1975. 4. 8 대법원 인혁당재건위 판결, 8명 사형.15명 징역 15년∼무기징역
▲1975. 4. 9 사형집행
▲2002. 9.12 의문사진상규명위 "인혁당 사건은 중앙정보부 조작사건"
▲2002.12.10 인혁당사건 재심 청구
▲2003.11.24 재심청구 첫 특별심리
▲2005.12. 7 국정원 진실위 사건조사 결과 발표
▲2005.12.27 법원, 인혁당 재심 결정
▲2006. 3.20 재심 첫 공판
▲2006. 9.11 이철ㆍ유인태씨 증인 출석
▲2006. 9.18 김지하씨 증인 출석
▲2006.11. 2 유족 국가 상대 340억원 소송
▲2006.12.18 검찰, 이례적으로 구형 없는 논고
▲2007. 1.23 무죄 선고
taejong75@yna.co.kr
인혁당 재건위 사건이란
[머니투데이 양영권기자]인민혁명당 재건위 사건 이란 1974년 인혁당 관련자들이 국가 전복을 기도했다는 혐의(국가보안법·대통령긴급조치 위반 등)로 군법회의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대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되자 18시간만에 처형된 사건을 말한다.
'인혁당'은 1964년8월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이 "북괴의 지령을 받고 대규모 지하조직으로 국가 변란을 획책한 인민혁명당을 적발해 일당 57명 가운데 41명을 구속하고 16명을 수배 중이다"라고 밝히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10년 뒤 중앙정보부는 유신 반대 투쟁을 벌인 민청학련을 수사하면서 배후 세력으로 인혁당 재건위를 지목했고, 이를 북한의 지령을 받은 지하조직으로 규정했다.
인혁당 재건위 사건과 민청학련 사건에는 1024명이 연루됐으며 이중 253명이 구속됐다. 그러나 이철, 김지하씨를 비롯한 민청학련 관련자들은 1975년2월 감형 또는 형집행정지로 대부분 석방됐다. 인혁당 재건위 관련자 23명은 석방에서 제외됐고, 대통령긴급조치 제2호에 따라 설치된 비상군법회의에서 수사와 기소, 재판을 받았다.
이 가운데 우홍선 송상진 서도원 하재완 이수병 도예종 여정남 김용원씨가 1975년4월8일 대법원에서 사형 판결을 받고 이튿날 오전 6시 형이 집행됐다. 이후 이 사건은 국내외적으로 '사법살인'이라는 비판을 받게 된다. 스위스에 본부를 둔 국제법학자협회는 인혁당 재건위 사건 관련자들의 사형이 집행된 날을 '사법 암흑의 날'로 선포했다.
2002년 9월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인혁당 재건위 사건을 고문과 피의자 신문조서 및 진술조서 위조 등을 통한 중정의 조작극이었다고 결론지었다. 유족들은 이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그 해 12월 법원에 재심청구를 냈다. 2005년 12월27일 법원에서 재심 결정이 내려졌다.
앞서 그 해 12월7일 국정원 과거사위는 이 사건을 "권위주의 정부 시절 중정이 자행한 권력 오용과 남용으로 인한 중대한 인권침해 사건"이라고 규정했다. 국정원 과거사위 발표에 따르면 1964년 발표된 '인혁당'은 중정 발표와는 달리 당 수준에 이르지 못한 서클 형태에 불과했다. 또 과거사위는 인혁당 재건위 관련자들은 북한 방송을 듣고 녹취한 노트를 돌려본 점 등에 대해 반공법을 엄격하게 적용해도 징역 1~2년에 불과하다고 판단을 내렸다.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는 지난해 1월23일 이 사건으로 사형이나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던 16명을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했다. 유족들은 지난해11월 국가를 상대로 340억원에 이르는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낸 상태.
양영권기자 indep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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