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2. Humanities/23_생각해볼글

할머니, 공부가 재미 있어요?

忍齋 黃薔 李相遠 2007. 5. 15. 1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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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은 시공을 초월하여 30여년전의 어린시절 천둥 벌거숭이 불알 친구들과도 마치 옆에 있듯 친교를 나누게 하고 또 근황을 전하기도 합니다. 복숭아꽃이 만발하던 부천군 소사읍이 제가 부천북초등학교(당시 소사북국민학교) 어린시절을 보낸 곳입니다. 그곳에서 울고 웃던 어린시절 친구 김동섭(송내역앞에 김동섭 변호사 사무실을 운영)군의 자랑스런 어머님의 자서전을 칠순잔치 선물로 발간을 하여드렸다고 합니다. 제 어린시절과도 겹치는 부분도 있고 우리네 어머님의 자랑스런 모습이기도 하여 이곳에 소개합니다. 후속편도 계속 소개하겠습니다. (퍼온이 주)

--------- 친구 김동섭 변호사의 변 ---------------------------------

이달 18일 하는 부모님 희수, 칠순에 어머니 자서전을 내려고 준비중이다.
그때까지 가능할지 몰라도 노력해보겠다.
맛뵈기로 글을 좀 올려보려는데, 자유게시판이 번잡해질 것 같아서 다음부터는 익명게시판에 올리겠다.
물론 열화와 같은 성원이 있다면 전문을 올릴 수도 있지롱

상원아, 정식으로 출판하기는 어렵다.
지금 글도 뼈대만 있고, 서술이 부족하거든 희연이가 새로 성원에 참석하였으니, 그 성원에 힘입어 조금 더 올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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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지]                 


  할머니, 공부가 재미있어요?



                                        김  영  숙


        당신이 가난하다고 ······


        넋 놓고 있으면 남은 쌀 한 톨까지 다 뺏기고


        극복하려고 노력하면 꼭 도와주는 사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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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릿말]


      - 작은 책을 내면서 -


  저는 전남 장성의 농촌에서 태어나 가정 형편상 초등학교만 마치고, 결혼하여 남편과 10여년 농사를 짓다가 상경하여 부천에서 20여년 속옷 장사를 하면서 살아온 평범한 사람입니다.


  나이 쉰 일곱에 자녀들이 결혼하고 사업을 시작하면서, 장사를 그만 두고 쉬게 되자, 어려서 포기했던 공부를 다시 하고 싶어서 고려학원 초등부에 등록하였습니다. 어린 학생처럼 책가방을 등에 지고 전철타고 학원에 가서 공부하는 재미에 빠지다 보니, 어느새 중학교 검정고시부터 대입 검정고시까지 차례로 통과하고, 환갑에 방송통신대학교 유아교육과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9년이 지난 금년 2월 일흔 살에 졸업하였습니다.   


  졸업할 때가 되니, 학교 조교나 동급생, 자녀들까지 ‘자서전을 써보라’고 권했습니다. 대단한 일을 한 것도 없고, 남들과 똑같이 굶지 않으려고, 자녀들 공부시키려고 아등바등 했고, ‘못 배운 한’을 늘그막에 풀었던 뿐입니다. 잘난 것도 없고 너무 힘들었던 옛날을 생각해보기도 싫어서 글쓰기를 거절하였습니다.


  자녀들이 얼마 후에 ‘아버지 희수와 어머니 고희 잔치를 한다’고 해서, 늙었다고 유세하는 것도 싫어서 금혼식 때나 보자며 거절했습니다. 자녀들은 “우리가 신세진  사람들에게 식사 한 끼 대접하는 것”이라며 잔치를 예약하여 버렸습니다. 엎질러진 물이다 싶어서 이왕 벌어진 잔치상에 인생을 고백하는 글이나 올려보기로 생각을 고쳐 먹었습니다.



  글을 쓰면서 중학교 진학이 좌절된 일, 밥굶기를 밥먹듯 했던 신혼시절, 다 죽은 남편을 살려놓고 어렵게 마련한 논을 나라에 뺏기고 고향을 떠난 일, 이리저리 쫒겨가며 행상하던 일, 이러저러한 어려운 시절이 생각나서 많이 울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다하면 주위 사람들 마음도 아플 것 같아서 줄거리만 적당히 썼더니, 큰 아들이 보고나서 “좋은 일이건 섭섭한 일이건 다 속마음까지 쓰세요. 인생을  정리해보는 뜻도 있고, 솔직히 써야 다른 사람들이 용기를 얻을 수 있어요”라고 했습니다.


  남편에게도 말하지 않던 속마음까지 쓰다보니 주위 사람들을 다 몹쓸 사람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착한 남편을 무능한 사람으로 만들고, 먹고 살기 바빴던 사람들을 냉정하게 보이게 하고, 신혼시절 이야기를 하려면 돌아가신 시아버님 이야기를 빼놓을 수가 없는데, 찢어지게 가난했던 분을 욕보이고, 저도 그런 사람들을 원망이나 하는 사람이 되어 버렸습니다.


  옛날 어려웠던 시절에는 원망했던 사람도 있었지만 지금은 다 잊었고, 이승에서건 저승에서건 잘 있기만을 바랍니다. 이 작은 글 때문에 마음이 언짢은 분이 있더라도, 노망든 할머니 혼자 생각이니 이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부족함이 없는 집안에서 친정 아버님의 귀여움을 독차지하고 자랐지만 초등학교 6학년 때 친정 아버님이 돌아가시고부터 딴 세상에 살게 되었습니다. 중학교 진학을 못해서 그 한 때문에 반 미쳐서 5년이란 세월을 그냥 보내고, 시집와서도 남편이 10년 넘은 지병을 고칠 생각도 않고, 저는 매일 굶으면서도 어떻게든지 살아보겠다고 생각도 못했습니다. 철없는 새댁에게 세상은 냉정했습니다. 도와주는 사람은 하나 없고, 없는 것마저 다 뺏어가는 원망스런 사람뿐이었습니다.


  ‘이렇게 살다가 남편은 병들어 죽고 나는 굶어주겠다’ 하는 생각에 마음을 고쳐먹고, 남편의 병을 고치고 먹고 살겠다고 죽을 힘을 다 하니, 이번에는 저를 도와주려는 사람이 줄을 섰습니다. 


  처지를 원망만하고 있을 때나 살려고 노력할 때나 곁에 있는 사람은 다 같은 사람입니다. 똑같은 사람이 아무 노력도 않고 포기하고 있을 때는 뒤주에 남은 쌀 한 톨마저 딱딱 긁어서 뺏어가고, 먹고 살려고 노력하니 쌀가마를 보태 주었습니다. 저도 주위 사람들이 먹고 살려고 하면 도와주려고 애썼지만, 노력도 않고 남의 것이나 탐하는 사람들은 상대하기도 싫었습니다. 그러니, 저나 제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나 다 같은 사람들입니다.  


  노력만 한다고 다 되는 건 아니고, 미련한 노력은 안하느니만 못할 때도 있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될 때는 잠깐이라도 멈춰 곰곰이 생각해보고, 다른 사람 말을 듣거나 하다 못해 잘하는 사람 유심히 쳐다보기라도 해야 합니다.


  나이 70이나 살면서 터득한 인생을 한 마디로 말한다면 이렇습니다.


  “신세 한탄만 하고 있으면 그나마 있는 것마저 다 뺏깁니다. 내 처지가 어떠한지, 그 해결 방법이 뭔지 궁리하고 실천하면 꼭 옆에서 도와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서전은 유명한 사람, 잘난 사람만 쓰는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평범한 할머니의 인생 이야기가 보통 사람들에게 ‘내 이야기’ 같아서 공감이 갈 수 있고, 힘든 세상에서 살아갈 지혜와 용기를 줄 수 있다면 다행입니다.


             -- 차     례 --




* 작은 책을 내면서



제1장 성장기(1938년 ~ 1958년)


  1. 우리 집안


  2. 행복했던 장성중앙초등학교 시절


  3. 친정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가세가 기울다


  4. 꿈 속에서 5년간 다닌 중학교


  5. 성실한 동네 총각과 결혼을 하다



제2장 결혼 후 장성생활(1959년 ~ 1971년)


  1. 시댁에서 신혼생활


  2. 분가를 하다


  3. 남편의 병을 고치다


  4. 벽돌공장에서의 새로운 출발


  5. 큰 딸이 세상을 떠나다


  6. 농사를 시작하다


  7. 남댕이로 이사를 가다


  8. 남댕이 할머니 집으로 들어가다


  9. 아이들 학교 입학


  10. 야당 선거운동을 하다


  11. 고향을 떠나다



제3장 노점, 행상 생활 (1972년 ~ 1976년)


  1. 생선, 야채 행상을 시작하다


  2. 자유시장으로 이사가서 자리잡다


  3. 우리 가게를 하기 시작하다


  4. 덧버선으로 대박이 나다


  5. 경인약국 앞에서 마지막 노점 생활



제4장 영광스런 영광상회 (1977년 ~ 1993년)


  1. 부천에서 처음 마련한 우리집


  2. 영광상회를 열다


  3. 우리 가게를 사게 되다


  4. 종업원 관리 요령


  5. 장사하는 요령


  6. 아이들 중고교, 대학 진학


  7. 평생 은사이자 은인인 형부


  8. 수영과 노래를 배우다



제5장 내 인생을 찾아서(1994년 ~ 2006년)


  1. 자녀들이 취직하고 결혼하다


  2. 중검, 고검, 대검을 차례로 합격하다


  3. 방송대학교에 들어가고, 영감이 대수술을 6번이나 받다


  4. 다시 일하면서 공부하다



* 독후감 ----- 어머님에 대한 생각 ----------  차남 김의섭


* 칠순과 자서전 발간을 함께 축하드립니다 ------  딸 김선희


* 독후감 ------ 어머니의 품 ---------------- 삼남 김정섭


* 편집후기 ---- 어머님의 힘 = 자존심 --------- 장남 김동섭   



  제 1 장 성장기


                      [1938년  ~ 1958년]


    1. 우리 집안 


  저는 전남 장성군 장성읍 청운동에서 3남 3녀 중 4째로 태어났습니다. 친정 집은 장성역에서 도보로 2분 거리에 있고, 장성에서 제일 큰 황룡장(황룡면 월평리)도 1km밖에 떨어지지 않은 읍내 한복판에 있었습니다. 친정은 논 11마지기, 밭 3마지기에, 집도 읍내에 2채나 있어서 먹고 살만한 형편이었습니다.


  친정 아버지는 한량기가 있어서 농사는 주로 친정 어머니가 짓고, 아버지는 읍내 가게에 돈을 대주고 이익을 나누어 받기나 하셨습니다. 


  2. 행복했던 장성 중앙초등학교 시절


  친정 어머니는 교육에 관심이 많아 시골에서는 드물게 오빠들과 언니를 모두 8살에 학교에 보냈습니다.


  올캐 언니가 “학교에 가면 손바닥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회초리로 때린다”고 겁을 주어서 학교에 가지 않으려고 하였는데, 언니가 “야이 무식쟁이야” 하면서 꼬집고 학교 가라고 졸라댔습니다. 9살이 되어 입학 원서를 사러 장성 중앙초등학교(당시는 장성 영천공립국민학교 1945. 12. 개교)에 가니, 선생님은 “네가 학교 가는거냐? 언니가 가는거냐?”하고 물을 정도로 키가 작았습니다.


  [영천초등학교는 호남 제일의 약수라는 방울샘이 있는 영천리(鈴泉里)에 자리 잡고 있는데, 바닥에서 물이 방울처럼 솟구쳐서 얻은 이름입니다. 방울샘은 전쟁기에는 붉은 물이, 전염병기에는 흑빛 물이, 국가 경사시에는 하얀 뜨물 같은 물이 솟구친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현재 보해양조 공장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초등학교 시절 내내 아버지와 선생님의 사랑을 듬뿍 받아 여자 반장이 드문 시절에, 1학년 2학기부터 5학년까지 계속 반장을 하여 즐겁고 행복한 시절을 보냈습니다.


  학교에는 원래 둘씩 짝을 지어 앉는데, 저는 2학년 때부터 4학년 때까지는 교유꾸 마마들이 청탁해서 양쪽에 급우를 거느리고 앉았습니다. 3학년 때 정권조 선생님이 칠판 가득하게 내놓은 수학 문제를 급우들이 나가서 풀었는데, 제가 나가서 급우들이 못 푼 문제를 다 풀고, 틀린 것까지 고치자, 정선생님은 남학생들 고추를 따서 영숙이한테 붙여준다고 하고, 급우들은 도망다니는 우스운 일도 있었습니다. 그 날부터 정선생님이 붙여준 ‘똑똑이’는 내 별명이 되었습니다.


  다른 학교와 운동 경기를 하면 응원단장을 하고, 학교 합창단의 지휘자도 하고, 웅변대회에 단골로 나가서 학우들을 약속된 수신호로 지휘하기도 하고, 국군위문 공연 연극에도 나가는 등 과외 활동도 활발히 하였습니다. 친정 아버지는 둘째 딸이 연극에 경찰로 출연한다고 하자, 수소문하여 가장 작은 경찰복을 얻어 와서 몸에 맞게 줄여주었습니다.


  아버지는 다른 자녀와는 거의 대화가 없고, 둘째 딸인 저하고만 말씀을 나누고 즐거워 하셨습니다. 벌어진 앞니를 드러내고 히죽 웃으며 “아버지, 시집갈 때 옷 한 벌 덜 해입을 터이니 금이빨하여 줄꺼지”하고 어리광을 부리면 아버지는 “그러마”하고 껄껄 웃곤 하였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다보니 게으름도 많이 피웠습니다. 8살 많은 올케 언니, 6살 많은 친언니가 “설거지 하라, 불 때라”하고 일을 시키면 아버지 방으로 도망 가버려, 언니들이 일을 시킬 엄두를 못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창고에 몰래 숨어서 잠을 더 자다가 식사 준비가 끝나면 슬그머니 아버지 밥상에 같이 앉아 식사를 하여도 아무도 나무랄 생각을 못했습니다. 제가 하는 일이야 고작해야 감자를 찌거나, 부침개를 만들거나, 빵 만드는 정도였고, 남동생이 숙제를 대신해 달라고 조르면 방 벽에 ‘불 때 줄게, 숙제해 줘’라고 각서를 쓰게 하고서야, 숙제를 해주었습니다. 어려서 실컷 농땡이 부린 벌을 받아 결혼한 후에 온갖 고생을 다 하고, 지금까지 일을 놓지 못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재미 삼아 황룡장에서 연필과 공책을 사다가 급우들에게 팔아 학비를 보탰습니다. 다른 반 담임인 박내춘 선생님까지 조회시간에 “김영숙이가 연필과 공책을 팔고 있으니 사세요”하고 광고도 하여 주셨습니다.


  4학년 때는 중국집에 가서 국화빵 17개를 100원에 사서 급우들에게 1개에 10원씩 팔아 저와 동생 학비까지 조달하였습니다.


  4학년 때, 학교에 처음 발령받아 담임을 맡았던 선생님은 언니와 결혼하여 형부가 되었습니다. 형부는 “영숙이가 공부를 잘해서 그 언니랑 결혼했다”고 하셨는데, 평생 잊지 못할 은사이고 보디가드입니다. 학교 친구들이 전근 온 선생님에게 집을 세로 주기만 해도 부러워했는데, 담임 선생님을 ‘형부’라고 부르니 친구들에게 뽐을 낼만 했습니다. 형부는 처음 제자였던 저에게 “영숙아”하고 부르더니, 언니와 결혼하고도 어색해서인지 “처제”라고 부르지 않고, 제가 결혼하고나자 그나마 조금 높힌 말이 “영숙이”하고 부르는 것입니다.


    3. 친정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가세가 기울다


  아버지는 화병으로 제가 6학년 1학기였던 52세에 돌아가셨습니다. 친정 어머니는 40대 후반에 홀로 되어 빚 뒤처리를 하느라 그 많던 재산을 다 팔아서 제가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에는 집 한 채 밖에 가진 것이 없었습니다.


  6학년에 올라 2반에 배정되었는데, 5학년 때 담임이고, 6학년 1반을 맡으신 손창문 선생님이 찾아와서 “우리 반으로 오너라(반을 바꾸어라)”하셔서, 새 담임 선생님 기분이 상하실까봐 못 간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쉬는 시간에 1반 아이들이 몰려와서, 선생님이 “김영숙이가 우리 반에 왔으면 좋겠다는 사람 손들어 봐라” 해서 전부 손들었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6학년 2반 담임 선생님은 완고한 분이라서 “여자들 말이 울 너머로 넘어가면 그 집안은 망한다”면서 여자들은 손을 들어도 대답을 시키지도 않고, 치마 바람을 날리는 학부모 아이들만 시켰습니다. 저는 아버지를 잃은 슬픔도 있어서, 수업시간 내내 교실 바닥만 쳐다보고 학교에 흥미를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6학년 2학기가 되자 도저히 견딜 수 없어서 손선생님을 찾아가 반을 바꾸어 달라고 하여 1반으로 옮겼습니다. 손선생님은 홀어머님과 단 둘이서 어렵게 생활하고 있었는데, 학부모 2명이 과외공부를 부탁하자 “2명만 따로 가르치면 남은 더 많은 학생들은 어떻게 하냐”면서 바로 거절하여버린 양심 있는 교육자이셨습니다.


  당시 중학교 입시는 전국적으로 동시에 실시되었습니다. ‘미국 대통령 이름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 자신 있게 ‘아이젠하워’라고 쓰고, O-X형 문제도 금방 다 풀어서 ‘중학교 입시 별 것도 아니네’ 하는 생각에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시험관 선생님이 등을 툭 치면서 “자세히 봐” 하시길래, ‘왜 그러시나’ 하고 다시 시험지를 살펴보아도 틀린 게 없어서 가슴을 펴고 시험장을 나왔습니다.


  다음날, 손 선생님이 저를 껴안고 “너 좋고 나 좋고”만 연발하시며 눈물을 쏟았습니다. O-X형 문제에서 맞는 것에만 O를 표기하고 틀린 것에 X를 표기하지 않아 만점을 놓쳤다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별안간 돌아가시고, 논밭을 다 팔아버리자, 친정 어머니는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작은 딸이 중학교에 진학하지 않기를 바랐고, 그래서 저도 모르게 실수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3형제를 먹여 살리기도 어려운 어머니에게 입학금을 달라고 말할 수 없어서 중학교 등록을 못하고 말았습니다.


4. 꿈 속에서 5년간 다닌 중학교


  중학교에 등록을 못했지만 아침마다 중학교에 진학한 동네 친구들이 집 앞에 와서 “영숙아, 학교 가자”하며 기다리자, 친구들을 따라 장성중학교에 등교하였습니다. 선배 졸업생에게 빌린 큼지막한 교복을 입고 4개월 가까이 출석도 부르지 않는 학교를 다녔지만 학교에 나오지 말라는 선생님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나자, ‘벼룩도 낯짝이 있지’하는 생각에 아침 일찍 집을 나가서 친구들을 피해 한동안 학교에 가지 않았습니다. 친구들은 그래도 하교 후에 집에 찾아와서 그날 학교에서 배운 것을 알려주곤 하였습니다.


  생각다 못해 한 번은 30리나 되는 길을 걸어서 자녀가 없는 고모를 찾아갔습니다. “딸을 한 사람 낳았다고 생각하고 중학교 입학금만 좀 내 주세요” 하고 철없는 말을 하니, “아들이 있어야지, 딸은 필요 없다”고 거절하셨습니다. 또, 이모에게도 찾아가서 “딸이 하나 더 있다고 생각하고 입학금만 내주세요”하니, “내 자식을 가르쳐야지, 조카를 가르쳐서 뭐하느냐”면서 거절하였습니다. 


  친구들에게 미안한 생각에 여름방학을 얼마 앞두고 아예 이모집에 식모살이겸 피신해서 2년간 있었습니다. 이모네 딸은 1살 많은 언니로서 중학교에 다니고 있었는데, 언니 교복을 빨아주면서 부러워서 눈물을 흘리곤 하였습니다.


  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한 친구가 “서울에 올라가자”며, 제 차비까지 마련하여 왔지만 끝내 따라가지 못하였습니다. 홀어머니 딸이 집을 나가면, 어머니가 집안 어른들에게 “딸 잘못 키웠다”는 꾸지람을 들을까 하는 걱정이 들어서, 중학교도 보내주지 못하는 집을 나가고도 싶었지만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모네서 식모살이를 할 때, 집에서 키우는 돼지 2마리가 한꺼번에 임신을 하였습니다. 어느 날 큰 돼지가 작은 돼지막에 들어가서 다리를 물어, 작은 돼지 다리가 부러졌습니다. 돼지는 한 번 다리가 부러지면 이을 수가 없습니다. 이모는 인심이라도 쓰듯이 “작은 돼지가 낳은 새끼 한 마리를 1년 새경으로 주마” 하셨습니다. 그런데, 큰 돼지가 먼저 새끼를 13마리나 낳았지만 모두 잡아먹고, 보름 후에 작은 돼지도 새끼 11마리를 낳았는데, 10마리를 잡아먹고 딱 1마리만 남았습니다. ‘돼지도 내 맘을 알아 영숙이 몫 1마리는 남겨 두었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작은 돼지가 낳은 새끼는 큰 돼지막, 작은 돼지막을 오가면서 두 어미의 젖을 얻어 먹어 돼지 새끼 1마리에 1,600원 하던 때에 4,700원이나 받았습니다. 그 때에 중학교 입학금과 교재비가 2,500원이었는데, 이모는 1,500원만 주었습니다. 원망스러웠지만 돈을 받아 동생의 3개월치 중학교 등록금을 내주었습니다.


  이모집을 나와 친정에 들어가서도 한 2년은 교복 입은 여학생만 보면 꼭 미친 사람처럼 마음이 안절부절하여, 집에 와서 울면서 ‘중학교에 보내 주세요’라고 시위라도 하는 듯이 영어로 된 노래를 부르곤 하였습니다. 어쩌다 집에 들러서 그런 딸을 보는 친정 어머니 속은 또 얼마나 상하셨을런지.....


  친정 집에서 수놓는 일과 바느질로 생계를 도왔는데, 열아홉이 되도록 매년 봄만 되면 학교가고 싶어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마음만 찢어질 지경이었습니다.   


  5. 성실한 동네 총각과 결혼을 하다 


  친정 어머니는 논밭을 다 잃고 제가 열 일곱이 되던 해에 구읍의 성산으로 이사를 와서 그 때부터 각처로 대나무 바구니를 팔러 다니고, 집에는 2, 3달만에 한 번씩 들어왔습니다.


  제일 큰 언니라서 두 남매들 가장 노릇을 하였는데, 작은 오빠가 수시로 찾아와  행패를 부려 도저히 살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남동생은 서울로 보내고, 여동생은 시집간 언니네로 보내고 저는 시집가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시집가겠다고 하니 손창문 선생님이 누이를 시켜서 당시 대학생이던 처남과 결혼을 청해오셨습니다. 그러나, 배움이 없는 자격지심에다가 그 집에 시집가면 근처에 사는 작은 오빠가  또, 행패를 부릴 것 같아 거절하였습니다.


  이모 집에서 일할 때 보았던 성실하고 심성이 고와 보이던 총각에게 호감이 있었는데 양조장에서 서기로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총각의 아버지는 양반 출신이라고 하는데, 매일 낚시만 하고 집안 살림을 전혀 돌보지 않았지만, 어머니는 그런 남편을 원망하지 않고 식사 때에 아이들을 불러 모아 찬물을 한 사발씩 떠다 놓고 마시게 하였다고 합니다. 총각은 장성 성산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가난 때문에 중학교에 입학을 못했다가, 홍수에 떠내려오는 중톳(중간 크기의 돼지)을 건져 팔아 입학금과 한학기 등록금을 마련하였습니다. 고등공민학교에 교복만 간신히 얻어 입고 모자도 신발도 없이 등교를 하였는데, 반장에 당선되어 “용의가 단정치 못하여 반장을 할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가 동네 친구들에게 “너 때문에 우리 동네에서 반장이 나지 못했다”며 몰매를 맞았답니다. 2학기 때에는 등록금을 마련하지 못하여 수시로 “공납금을 마련해오라”면서 집으로 쫒겨나면서도 수석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총각이 머리도 좋고, 공납금도 없이 1학기나 학교에 다닐 배짱이라면 끈기도 있는 사람이라고 보아 집안 사람을 통하여 청혼을 넣었습니다. 총각 집안에서도 1주만에 바로 날을 정하여 와서 7주만에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결혼한 후에야 알게 되었지만 남편이 열 다섯 살 때부터 13년이나 신경통을 앓고, 6·25 전쟁에 참전하였다가 늑막염까지 얻어 힘든 일을 못해서 양조장 서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남편 집안에서는 혼사말이 나오자마자 결혼을 서둘렀던 것입니다. 


  남편 집안에서는 결혼 말이 나올 때에는 ‘금반지를 하네, 장롱을 하네’ 하였는데, 결혼식 날이 닥치도록 아무 소식이 없어서, 언니가 매파에게 야단을 치니, 마지 못해 오동나무 장을 사왔습니다.

제 2 장 결혼 후 장성 생활


                 [1959년 ~ 1971년]


    1. 시댁에서 신혼 생활


  남편은 양조장에서 번 돈을 모두 집에다 바쳤는데도 결혼할 때 도와준 집안 어른은 양단 옷 한 벌 마련해 준 먼 친척 밖에 없었습니다. 남편은 빚을 얻어 양단 옷 한 벌과 오동나무 장을 샀는데, 급히 장농을 맞추어 채 마르지도 않은 장농이 첫날 밤부터 ‘뚝딱 뚝딱’ 소리를 내더니 조각이 떨어지는 엉터리 물건이었습니다.


  남편은 결혼하고도 양조장에 1년 정도 더 일을 했는데, 숙직실에 살면서 1주일에 한 두 번 낮에만 집에 오고 월급도 주지 않았습니다. 남편은 그 때 몸이 많이 상하여 힘든 일을 할 수도 없고, 잠잘 때는 죽은 사람처럼 몸을 꼼짝도 못했습니다. 친정 어머니는 남편에게 지병이 있는 것을 알고 “시집 와서 생긴 병도 아니니 네 잘못이 아니다. 오래 살지 못한다고 하니 동거하지 마라”고 하였고, 남편도 몸이 아파서 동거를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시댁은 방이 2개 있었는데, 큰 방에서 큰 시숙네 식구들과 시누이가 살았고, 시아버지가 쓰던 작은 방을 우리 부부가 쓰게 되었습니다.


  시아버지는 따로 나가 살면서도, 매일 새벽이면 신혼 방에 와서 식사부터 모든 것을 해결하고 저녁 늦게야 갔습니다. 새댁이 시아버지가 계시는 방에 같이 있을 수가 없어서 4개월여를 하루 종일 밖에서 지내야 했습니다.


  남편은 지병을 고치려는 의지도 없고, 월급도 시아버지에게 다 드려, 삶이나 생활에 의욕이 없는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2. 분가를 하다


  시댁의 불편함은 견딜 수 있지만 신랑이 시댁에 얽매여 월급도 못 갖다주는 무기력함에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동네 최종옥 언니에게 작은 방을 내달라고 부탁하여 보증금도 없이 남자 품삯 3일치만 주고 이사를 갔습니다. 이 때에 큰 시숙이 어려운 형편에도 쌀 1말, 솥 1개, 밥그릇 2개, 대접 2개, 짚단 10다발을 마련하여 주었으니 고마울 따름입니다.


  남편은 이사하고도 직장에서 자고 며칠에 한 번씩 낮에 잠깐 집에 들렀지만 생활비를 전혀 주지 않았습니다. 남편이 미안해서인지 “서모가 빈 자루를 들고 와서 쌀이 다 떨어졌다고 해서 주었다”고 말했지만, ‘나는 왜 생활비도 안 줘요’하는 말이 입에서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한 말 쌀이 다 떨어져 굶고 있으니, 주인 집에서 ‘임신해서 입맛이 없나보다’ 생각하고 불러서 밥을 주고, 다음날 동네에 임신하였다는 소문이 났습니다. ‘하늘을 보아야 별을 따지’, 남편하고 동숙하지도 않는데, 얼토당토 않은 말이 돈 것입니다.     굶어 죽더라도 남의 집 밥 빌어먹기는 싫어서 밥하는 것처럼 빈 솥에 물을 붓고 불을 땠는데, 시아버지가 연기를 보고 식사하러 왔다가 허탕을 치고 잔소리를 하여,


주인 집에서도 제가 굶고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주인집 딸인 종옥이 언니가 “굶지 말고 식량이라도 팔아오라”면서 저고리 4감을 주어서 그것을 팔아 쌀 1가마를 샀고, 친구 심영자가 “결혼할 때에 찾아가지 못해 미안하다”면서 옷 1벌을 주어서, 이것도 팔아서 간장을 담았습니다. 종옥이 언니나 영자 같은 좋은 사람들 덕분에  굶어죽지 않고 지금까지 살아 남았습니다.


  3. 남편의 병을 고치다


  큰 언니가 성수암이라는 절에 있는 보살이 사주를 잘 본다며 가보자고 하여, 세 자매가 같이 갔습니다. 보살은 제게 “소가 새 풀을 만난 격이요. 이 병은 수술하지 말고 약으로 다스리면 꼭 병을 이각하겠소. 큰 자식을 2명 둘 것이오”하고는 눈을 꼭 감았습니다. 보살은 동생에게는 “자유 결혼을 하겠소”하여, 자매들이 모두 웃었습니다. 여동생은 세상에 둘도 없이 착하고 누구와 이야기도 못하고 땅만 보고 다니는 조신한 사람인데, 자유결혼을 한다니 우스웠습니다. 보살은 형부 사주를 보고는 “평생에 큰 재물이 두 번 있겠소”라고 하였습니다. 성수암을 나와 다른 집에 가서 또 사주를 보았는데, 같은 말을 들었습니다.


  며칠 후에 두 언니는 생각도 못하였는데, 동생이 당시에 흔치 않던 여군에 입대하였습니다. ‘보살님 말씀대로 동생이 진짜 자유 결혼하겠구나’하는 생각이 들고, 못 배운 것이 한이 되었는데, 큰 자식을 둘이 아니라 하나만 둔다고 하더라도 다행이다 싶어서 남편의 병부터 고치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남편은 총각 때 번 돈으로 논 3마지기를 사 두었는데, 우선 그걸 팔아 병원비로 쓰려고 하였습니다. 시아버지가 그 소식을 듣고 남편을 불러 “네 병은 죽을 병이다. 그 돈을 나를 달라. 고무신 가게를 차려서 먹고 살아야겠다”고 하였습니다. 남편이 바로 언니네 집에 있는 저를 찾아 왔는데, 혀가 굳어서 말을 못하였습니다. 친정 어머니가 따뜻한 물을 주니 받아 마시고 나서 시아버지 말을 전하였습니다. 저는 속으로 ‘해도 너무 한다’ 싶었지만 논을 팔아 받은 30만원 중에서 시아버지에게 10만원을 드리고, 2만원으로 시아버지 빚잔치를 하였습니다.


  남은 돈 18만원을 가지고 남편과 전남 도립병원에 가서 진단을 받아보니 신경통, 늑막염에 폐도 좋지 않다며 15일치 약을 받았는데도, 돈이 5천원이나 부족하였습니다. 병원 인근 식당에 가서 남편이 “국밥 2개요”하고 주문을 해서, ‘국과 밥을 함께 먹으면 비싸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어 “나는 백반 먹을께요”하니, 남편이 국밥을 취소하고 백반 2개를 주문하였습니다. 나중에 계산할 때 보니까, 국밥은 15원인데, 백반은 30원이라서 계산을 잘못한 것 같아서 “왜 곱으로 주어요” 하고 물으니, 남편은 “국에다 밥 한 술 말아먹는 것과 조기, 불고기가 다 나오는 백반의 가치가 어찌 같단 말이오”하였습니다. 그 때까지 국밥과 백반도 구별할 줄 모르는 왕쑥맥이었습니다.



  남편의 병을 고치려고 빚을 내도 약을 살 돈이 부족하여 몸에 좋다는 이런 저런 비방을 만들었습니다.


  태어나다가 죽은 새끼 돼지는 시장에 내다 팔 수 없고 먹기도 힘들어서, 그냥 땅에다 묻어 버립니다. 돼지가 새끼 낳는 집을 미리 알아보아 빨래비누를 몇 장씩 갖다 주고 죽은 돼지 새끼를 얻어다가 깨끗이 씻어 솥에 물을 붓고 솥 가운데에 옹기를 뒤집어서 놓고, 그 위에 놓은 바구니에 새끼를 놓고 중탕을 하여 나온 물을 남편에게 먹게 하고, 젓가락으로 고기는 따로 골라 주었습니다.


  또, 개가 낳다가 죽은 새끼나 개머리뼈를 얻어다가 칠나무(옻나무) 껍질과 함께 24시간 동안 푹 고아서 마포 보자기에 싸서 짜내어 국물을 내서 마시게 하기도 하였습니다(개칠개). 이때에 옻을 많이 만져서 지금도 옻이 옮지 않는 것 같습니다.


  한 1년을 병수발 하다보니 남편의 몸이 많이 좋아졌습니다.


  저는 그 때 경험으로 사람들을 이런 생각으로 대해 왔습니다.


     o 미운 아이 떡 하나 더 주자


     o 남에게 의존하여서만 살려는 사람은 인간 좀벌레이니 상대하지 말자


     o 참는 자에게 복이 온다


  어린 조카가 진학을 원하는 것을 알면서도 꿈을 앗아가버린 이모나 셋째 아들 병에도 아랑곳 않고 맨날 쌀 달라고 찾아오는 시아버지 태도에 섭섭하였지만 달라는대로 다 주었으니, 제 속마음을 몰랐을 것입니다. 오래 전에 돌아가신 이모나 시아버지를 욕보이려고 이 글을 쓰는 것이 아닙니다. 어려운 시절에 제게 고통을 주었던 사람들은 두 분 말고도 훨씬 더 많지만 다 빼고 안 썼습니다. 그 시절에는 없는 집에 그나마 남아 있는 쌀 한 톨까지 찾아내서 긁어가려는 사람들만 주위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어려서 친정 아버지로부터 평생 다해도 갚지 못할 사랑을 받아 게을러 터졌고,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한으로 결혼해서도 한동안 내 생각에만 빠져 있어서 다른 사람 마음을 모르는 바보 쑥맥이었습니다. 현실적으로 냉정하게 대하였던 이런 어른들은 자나깨나 학교밖에 몰랐던 철없는 새댁에게 세상을 가르쳐준 선생들입니다.   


  우리 가족이 부천으로 이사가고 4년 남짓만에 시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맏동서는 임종을 할 때에 “부천 셋째네도 연락을 해야지요” 하니, 시아버지는 “게네들도 먹고 살아야지”하였다고 합니다. ‘시아버님도 돌아가실 때가 되니 셋째 아들에게 얼마나 심하게 하셨는지 아셨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4. 벽돌공장에서의 새로운 출발




  남편은 몸이 조금 나아지자 양조장 사장이 함께 운영하던 흙벽돌공장에 서기로 취직하였습니다. 동네에서 외따로 떨어진 방 3개 있는 사택의 한 방에 들어가 살면서 여기서도 개칠개 등을 계속 만들었습니다. 남편은 사장이 시켜서 양조장에 갔다가 며칠이고 집에 들어오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옆방에 사는 아저씨가 “김서기, 집에 들어오지 않습니까”하고 물으면 “아니요. 양조장이 많이 바쁜 모양이에요. 밤늦게 들어왔다가 새벽이면 양조장에 또 나가요”하고 거짓말을 하고, 늦은 밤까지 남편이 들어오지 않으면 남편 신발을 뜰 앞에 내놓고 방문을 안으로 잠그고 쇠망치를 머리맡에 놓고서야 잠들 수가 있었습니다.


  저녁에 직원들이 퇴근하고 나면 벽돌공장안에 들어가서 구워진 벽돌을 14장씩 지고 나와 종고를 쌓아 두곤 하였습니다. 사람들이 점차 흙벽돌을 쓰지 않으면서 벽돌공장도 문을 닫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살면서 큰 딸 옥희를 낳았습니다. 벽돌공장에서 먹고 사는 법도 배우고, 남편 병도 완전히 고치고 첫 아이를 보았으니 지금도 벽돌공장 시절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5. 큰 딸이 세상을 떠나다



  우리 가족은 시댁 식구들과 친정 어머님이 살던 구읍 수산리 김인수씨 집(돼지장사)에 월세로 이사가서 한 1년을 살다가 친정에 들어갔습니다.



  남편 병을 치료하느라 빚도 많이 지고 있고, 논밭도 없어서 하루 하루 품팔이를 하여 쌀이 없는 보리밥이라도 먹게 되면 감사했습니다. 냉수만 마시며 굶는 한이 있어도 누구한테 도와달라고 말해본 적도 없지만 부탁할 사람도 없었습니다. 어느 날 남편이 이발소를 하는 친구(딸 이름이 박명숙)가 우리 밥상을 보고는 아이를 업은 보태기(보자기) 속에 남편에게 들킬 새라 쌀을 조금씩 숨겨 가져다 주었습니다. 저는 이 글을 쓰면서도 동기간처럼 잘 해준 명숙이 엄마 생각에 눈물이 납니다.


  한 번은 식량이 다 떨어졌는데, 남편이 죽을 끓여달라고 해서 마침 친정 어머니가 돼지 먹이려고 사온 밀대가 낀 껍질을 끓여주었더니, 남편은 3일간을 설사를 하고 복통을 앓았습니다. 언니가 그 꼴을 보더니, 보리쌀을 1학(큰 되로 20되)이나 주었고, 그 후 굶는 일은 없었습니다.




  이렇게 힘들게 사는데도 시아버지는 매일 와서 쌀을 달라 돈을 달라 졸랐습니다. 하루는 이모 집에서 5일간 일하기로 하고 좁쌀 5되를 가져 왔는데, 시아버지가 집에 와서 “내가 아침에 밥을 먹었으면 성이 박(밥)씨다”고 소리를 질러서 “그럼 시동생을 보내세요”하였습니다. 시동생들에게 자루에 좁쌀을 담아주고 있는데, 친정에 같이 세들어 살던 요진이 색씨가 “야, 너희들 아침 밥 먹었냐”고 물으니, 시동생들이 “예”하고 대답하자, 저에게 “이 병신아, 왜 다 줘”하더니 “너희 형수는 어제 저녁밥도 못먹었다”며 자루를 뺐었습니다. 저는 그런 아버지 밑에서 사는 시동생들이 불쌍해서 “크는 얘들은 먹게 해야 한다”며 자루를 내주었습니다.


  큰 딸 옥희는 태어날 때부터 남들보다 크고, 조숙하여 얘 어른 같았습니다. 남편은 작은 벌이마저 아버지에게 다 주고 장성에 사는 동안 단 한 번도 월급을 준 적이 없습니다. 다섯이나 되는 다른 자식을 다 놔두고, 꼭 병들고 빚많고 굶주리는 셋째 아들네서만 얻어가는 시아버지가 원망스럽지 않았다면 거짓말입니다.


  하루라도 일을 하지 않으면 우리 식구가 당장 굶을 판이라서, 옥희의 허리를 띠로 묶고 띠의 한 끝을 앞다지(장롱) 고리에 묶어두고 일을 다녔습니다. 하루는 어떤 사람이 우리 집에 갔다가 옥희가 띠가 목에 걸려 죽기 직전이었다고 하는 말을 듣고, 그 때부터는 밖에서 문을 걸고 일을 다녔습니다. 옥희는 엄마가 밖에 나가 문 잠그는 ‘똑’ 소리를 들으면 ‘이제 나가는구나’ 싶어서인지 울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차마 발이 떨어지지 않아 몰래 숨어서 울음 소리가 그치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일하러 갔습니다.  



  큰 아들 동섭이를 낳고나서, 품팔이로 빚을 갚기는커녕 먹고 살기도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아이 낳고 3개월만에 아이들을 친정 어머니에게 맡기고 내복, 양은 그릇을 머리에 이고 나가 팔았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고생하는 새댁이 불쌍해서인지 값이 쌀 5되라고 하면 쌀 5되 반을 주는 등 너무 잘해 주었습니다. 나중에 미안한 마음에 동네 사람들에게 팔지 않고 멀리 다니며 팔았지만 동네 사람들이 물건을 사러 집에까지 찾아오곤 하였으니 사람 복은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갓난얘에게 먹일 젖이 없어서 쌀을 갈아서 설탕이나 당원을 타서 먹이는 고생을 하셨습니다.


  옥희는 새침때기라서 다른 얘들하고 노는 것도 말하는 것도 싫어하였지만 동생은 잘 봐주었습니다. 옥희가 세살 때부터 배가 불러와서 뱃속에 자래든 줄 알고 침과 뜸으로 1년 넘어 치료를 하였지만 낫지 않아 다섯 살에 광주 제중병원에 가보니 신장암이라면서 콩팥이 2개이니 하나를 떼어 내도 괜찮다고 하여 수술을 받았습니다. 옥희를 가두어 키우다보니 스트레스로 암이 걸린 것 같았습니다.


  퇴원하고 3개월만에 암이 재발하여 다시 옥희를 업고 병원에 가서 500원짜리 진찰권을 끊었다가 ‘콩팥이 하나 밖에 없는데 마저 떼어내면 어떡하나’하는 생각에 진찰도 받지 않고 되돌아와 버렸습니다. 저는 그 때에 전남 잠업시험장에서 뽕나무 접목 기술자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기술자가 뽕나무를 째서 눈을 넣어주면 보조가  잘 붙게 짬매고(묶어주고), 다른 보조가 다시 25개씩 묶어주는데, 봄철 접목하는 때가 되면 몹시 바쁘고 기술자가 없으면 보조 2명도 놀아야 합니다.    



  제중병원에서 돌아온지 3일만에 접목을 하러 나갔다가 점심 먹으러 집에 오면서 반달 떡을 두 개 살 돈도 없어서 한 개만 사왔습니다. 집에 들어가 옥희를 보니 턱 한 쪽이 축 늘어져 있어서, 떡을 주면서 “아이고 우리 딸 죽겠네” 했더니 눈물만 주르르 흘렸습니다. 딸의 불쌍한 몰골을 보고도 접목이 바쁜 때라서 차마 떨어지지 않는 걸음으로 오후에 일하러 나갔습니다. 옥희는 달떡을 동생과 나누어 먹고 외할머니에게 목욕을 시켜 달라고 하고, 평소 동네 얘들하고 어울리는 걸 좋아하지 않았는데, 마당에 놀던 동네 친구들을 불러 달라고 하여 방에서 외할머니와 동생과 동네 친구들이 보는 가운데 저 세상으로 갔습니다.




  남편이 옥희를 담요에 싸서 묻고 담요를 가져왔습니다. 저는 착한 딸이 어미를 잘못 만나서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난 것이 너무 슬프고 미안해서 그 담요를 보관하면서 아이들한테는 그 담요가 무엇인지 말도 안하고 가끔 담요를 보면서 옥희 생각을 했는데, 작년에 달라는 사람에게 줘버렸습니다. 옥희가 항상 제 부모와 동생들을 지켜 주었는지 그 후로 우리 집에서는 모든 일이 잘 풀려 나갔습니다.



  6. 농사를 시작하다



  2년간 장사를 하여 돈이 좀 모여서 무논 3마지기를 샀습니다. 무논은 보리 농사를 지을 수 없는 일모작 논을 말합니다. 첫 해에는 그전 논 주인처럼 벼 7섬(14가마)을 수확하였습니다.


  그런데, 다음 해 장마에 거름 흙이 논에 들어와서 벼가 다 떠내려가고 조금 남은 것도 벼 끝만 보여서 발을 동동 구르며 울었습니다. ‘올해 벼농사는 틀렸구나’하고 밭으로 가다가 어떤 두엄간에 뿌리에 싹이 나고 누렇게 뜬 반쯤 썩은 모를 보았습니다. 주인을 찾아 가서 “저 모를 주세요”하니, “어차피 버린 것이니 가져가라”고 하였습니다. 썩은 모라도 혹시 다른 사람이 가져갈까봐 그 때까지 한 번도 져본 적이 없었던 지게까지 빌려서 모를 집으로 나르고, 남편을 불러 모두 다섯 지게의 모를 논으로 날랐습니다.


  모를 심을 때, 보통은 4, 5폭(포기)을 심는데, 모가 부족하여 1, 2폭씩만 심었습니다. 그런데, 그 해 가을에 벼를 11섬이나 수확하여 남편은 농업박사란 별명을 갖게 되었습니다.


  언니네 밭 600평을 소작하여 고추를 심었는데, 보통 한 고랑에 5줄씩 심는데 남편은 3줄만 심으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하니, 통풍이 잘되어 썩지도 않고 좋은 품질의 고추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남편은 몸은 약하여 농사를 지어본 적이 거의 없고 회사에서 서기만 하였지만 머리가 좋아 어떻게 농사를 지으면 잘 되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이 때부터 새끼틀(새끼짜는 기계)를 집에 들여놓고 겨울철이 아니라도 짬만 나면 새끼를 꼬았습니다.   


  아이만 두고 일하러 다니고 밤에는 남편과 교대로 밤이 새도록 새끼를 꼬아 남당 마을로 이사갈 무렵에는 빚을 다 갚게 되었습니다. 남에게 빌린 돈을 한자리씩 갚아 빚이 줄어드는 것을 계산할 때가 세상에 태어나서 제일로 기뻤습니다.




7. 남댕이로 이사를 가다



  어머니, 남동생과 함께 친정에 살면서도 형편이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남동생이 결혼하게 되자, 고생했던 시댁 시절이 생각나서 남동생 부부에게 방을 쓰라고 하고 친정을 나와 벼 6섬 반(13가마)을 빚내어 7섬을 주고 남당 마을(남댕이라고 합니다)에 있는 방 2개 있는 작은 초가집을 사서 이사를 갔습니다. 작은 방에는 새끼틀을 놓아서 방이 1개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 집에는 우물도 텃밭도 없고 달랑 건물만 있는데, 옆집에서 고맙게도 담장을 터주어 그 우물을 같이 쓸 수가 있었습니다.



  여기서, 둘째 아들 의섭이를 낳았습니다. 다른 얘들은 전부 겨울에 낳았는데, 의섭이만 한 여름에 낳았습니다. 농사일로 한창 바쁜 때라서 아이 낳고 3일만에 일을 나가야 했습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다른 얘들 생일은 모르고 지나갈 때도 있지만 의섭이가 장가가고 10년이 다 되었지만 지금도 의섭이 생일 때만 되면 한 3일은 꼼짝 못하고 들어 누워 ‘둘째 생일이구나’ 하고 알게 됩니다.


  둘째가 갓난아기 때는 방에 두고, 큰 얘는 대문 밖에 나가지 말고 동생 잘 보라고 하고 일을 다녔습니다. 어느 날 동네 처녀가 큰 얘가 학교에 가는 형한테 “부집아, 학교가면 얘기 안보냐”고 말하는 것을 보았다고 하여 제가 잘못했다 싶어서 그냥 밖에 나가 놀라고 했습니다. 의섭이는 기어 다니게 되자 방문을 다 찢어버려서 밤에 모기가 들어와서 옥희처럼 방에 가둘 수가 없었습니다. 남편은 일하러 가면서 의섭이를 지게에 지고 가서 논밭에 내려놓고 일을 했습니다.


  의섭이는 입이 까다로운 형, 누나와 달리 어려서부터 아무거나 잘 먹고 살이 통통해서 ‘먹새과장’이라고 불렀습니다. 옥희와 동섭이는 젖꼭지에 종이만 붙여서 쉽게 젖을 떼었는데, 의섭이는 쓴 약을 발라도 빨아서 ‘퉤 퉤’하고 뱉어내고 젖을 빨았습니다. 둘째가 태어나고부터 우리 식구는 한 끼도 굶어본 적도 없고, 꽁보리밥만 먹은 적도 없으니 그것도 제 복인 모양입니다. 그래도, 엄마가 먹는 것이 워낙 부실하여 젖이 잘 나오지 않자 젖에 박치기를 하면서 울어대곤 했습니다.



  먹고 살기도 바쁘고 학교 가기 전에 너무 많이 알면 공부에 흥미를 잃을까봐 얘들에게는 학교에 들어갈 때까지 이름 석자만 가르쳐 주고, 숫자도 가르쳐주지 않았습니다. 하루는 들에서 돌아오는데, 동네 사람들이 삥 둘러서서 뭘 구경하고 있었습니다. 뭔가하고 기웃하니 다섯 살짜리 큰 얘가 그 한 가운데에서 1부터 1000까지 세고 있었습니다. 교회 주일학교에 다니며 배운 모양인데, 시골 사람들은 구경거리가 없어서 아이가 1000까지 세는 것도 신기했던 모양입니다.


 


  8. 남댕이 할머니 집으로 들어가다


  집 앞에는 시댁 집안 어른인 할머니(김창호씨 댁)가 홀로 살고 있었습니다. 할머니는 아들이 서울역장(김용중)을 하고, 손자들도 전북대 의대 교수(김공수), 약사들을 하여 동네에서 존경을 받는 어르신입니다.


  둘째 아들을 낳자 할머니는 몸조리하라고 쌀을 2되나 갖다 주셨습니다. 고마운 마음에 산에 심었던 수박을 수확하여 할머니에게 가져다 드리자, 할머니는 쌀을 대승(큰 됫박) 2되나 주셨습니다. 그 수박은 읍내 시장에 이고 가서 팔면 소승(작은 됫박) 1되나 받을 정도였습니다. 미안한 마음에 다음에는 일부러 시장에 팔기 어려운 작은 수박을 몇 개 골라서 갖다 드리자, 그래도 쌀 2되를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수박을 갖다 드릴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하루는 비가 올듯하여 비설거지를 하러 할머니 집에 갔더니, 인부들이 비오기 전에 고추를 따려고 서둘러 밭으로 나가고 있었습니다. 인부들을 뒤따라서 밭일을 하고 돌아오니 할머니는 우리 얘들 둘을 데려다가 깨끗이 씻기고 저녁까지 먹이고 있었습니다. 할머니는 “수고 했다”면서 쌀 대승 2되를 주었습니다. 제가 “할머님, 하루 품삯이 남자는 대승 1되, 여자는 소승 1되인데, 잠깐 밭일을 봐준 것 뿐입니다”고 항의하니, 할머니는 웃으며 “니가 따온 고추가 제일로 좋다. 너는 1시간을 일하나 하루 종일 일하나 무조건 대승 2되이니 그렇게 알아라”고 하였습니다. (동섭이 말이 비슷한 내용이 성서에 나와 있다고 합니다)


  할머니는 객지로 떠난 자녀들 대신에 저를 손녀딸처럼 귀여워하여 친정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정말 오랜만에 어른의 따듯한 사랑을 듬뿍 받았습니다. 저녁마다 일찍 식사를 치우고 나서 할머니 댁에 가서 고추 꼬뚜리 정리, 이불 호창 꿰메기, 청소 등등 집안일을 닥치는대로 하였습니다. 할머니는 밭일이 있을 때면 항상 불러서 일을 시키고 꼭 쌀 대승 2되를 주었습니다.



  할머니 연세가 8순이 지나 거동이 어려워 광주 아들네 집으로 이사를 간다며 집을 벼 30석에 내놓았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할머니가 어느날 “애비가 3년만 있으면 이 집을 살 수 있다고 하더라”면서 넌지시 집을 사라고 권하였습니다. 제가 “애비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 겁니다. 지금 집도 7섬에 샀는데, 우리 것은 1가마이고 다 빚인데, 3년만에 30석을 어떻게 벌어요” 하니, 할머니는 “애비가 한 번 산다고 했으면 3년이 아니라 30년이 걸려서라도 틀림없이 살 것이다”면서 집값도 받지 않고 방2개, 광1개, 앞에 화단도 있고 뒤에 텃밭도 있는 그 동네에서 손꼽히는 좋은 집을 우리 부부에게 내주고 광주로 이사를 갔습니다. 이 집에서 외딸 선희와 막내 아들 정섭이가 태어났습니다.



  선희가 태어나자 시집와서 처음으로 호강하였습니다. 친정 어머니가 산후조리를 해주시면서 7 x 7 = 49일 동안 산모를 꼼짝도 못하게 하고 1주일마다 한 번씩 떡을 해주셨습니다. 제가 어머니 힘들까봐 떡을 못하게 하니까 어머니는 몰래 떡을 하느라 학독(보리쌀을 물에 불려 가는데 쓰이는 돌로 만든 조리도구)에 찹쌀을 갈아서 채로 쳐서 떡을 했습니다. “엄니, 제발 그러지 마쇼”하고 말려도, 어머니는 “그런 말 마라. 딸은 친정에서 잘해 줘야 시집가서도 대접받는다. 니가 딸 때문에 몸이 편해야 너도 딸을 위하지 않겠냐”고 하셨습니다. 어머니는 남편이 세상을 뜨고 객지로 광주리 장사를 다니며 오랫동안 고생을 하여서 잘난 딸자식이 이제 밥굶지 않고 좋은 집에 사는 것이 대견하고 기분이 좋았던 것 같습니다.


  어머니는 고생을 많이 해서 그 때에 벌써 3번째 중풍이 와서 잘 움직이지 못하더니 우리가 부천으로 이사갈 때는 바닥에 비닐 비료 부대를 깔고 대소변을 받아내야 했습니다. 평생 고생만 하시다가 노년에는 중풍으로 자식들에게 욕보인 어머니를 생각하면 너무 불쌍하고 잘 해드리지 못해 죄송할 뿐입니다.



  광에 새끼틀을 설치하였는데, 남편이 병이 도졌는지 ‘힘든 일은 못하겠다’고 하여, 제가 새끼를 꼬는 일이 더 많았습니다. 


  집 뒤 너른 텃밭에는 오이, 가지, 머우 온갖 것을 다 심었지만 제일 넓은 데에 마늘을 심어 수확하고 나면 깨를 심어 수확하였고, 텃밭에 빙 둘러서 감나무도 많았습니다. 매년 가을에 텃밭에서 거둔 마늘과 참깨, 기름, 감을 챙겨서 광주 할머니에게 인사를 가면 그 댁 숙모는 시장금보다 더 많은 돈을 주어 사람을 난처하게 하였습니다. 숙부 집은 광주에서 유명한 부잣집으로 ‘임동 오동나무집’이라고 하면 택시 기사들도 다 알았습니다.


  할머니나 숙모나 어렵게 사는 사람들의 인격을 존중하고 베풀기를 좋아하니 복을 받아 자녀들도 모두 잘되고 건강하고 사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9. 아이들 학교 입학




  큰 얘는 일곱 살에 성산초등학교에 입학하여 급우들보다 한 살 어립니다. 틈틈이 정채석 담임 선생님을 만나 급우들과 잘 지내는지, 공부는 열심히 하는지 상담하고 자모회에도 가입하였습니다. 치마바람 덕분인지 시험 때마다 1등을 도맡아서인지 1학년 때부터 반장을 맡아 부천에 이사올 때까지 계속 반장을 하였습니다.


  큰 얘는 자기보다 힘 센 친구에게는 지는 것을 유독 싫어했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 때에 아랫집에 사는 철승이가 돌맹이를 던져 이마를 깨고 도망을 갔는데, 동생과 함께 세수대야에 돌맹이를 하나 가득 담아 철승이네 집 앞에 가서 양철문에 계속 돌을 던지면서 “철승이 나와라”하고 떠드는 통에 할머니가 나오셔서 “문 다 망가지겠다. 동섭아 미안하다. 내가 철승이를 두들겨 주마”하고는 이마에 된장을 발라주고 달래서 보냈다고 합니다.



  둘째는 학교 들어갈 때까지 숫자를 몰랐습니다. 다섯 살 때, 부천에서 언니네 조카들이 와서 나이를 알려 주었는데, 다음 해에 동네 아줌마가 “몇 살이냐”하고 물어보면 “작년에 다섯 살이었는데, 설 1개 지냈으니까···· 우리 엄마한테 물어 보세요”하고 대답을 했답니다. 그래서, 일곱 살이 되어서도 학교 보낼 생각을 안했습니다. 입학식이 끝나고 1주일쯤 지나 남편이 아침을 먹다가 “여보, 의섭이 왜 입학 안 시켜요”해서 숫자 안 가르친 것은 생각도 않고 “제 나이도 모르는 녀석을 어떻게 입학시켜요”하고 대꾸했습니다. 마침 문화방송에서 프로그램 안내가 나오고 있었는데, 남편이 “다음에 뭐냐”고 물으니 의섭이가 앞질러서 줄줄 프로그램을 외는 걸 보고 놀랐습니다.


  바로 아이를 데리고 학교에 가서 교무 선생님에게 입학을 시키겠다고 하니, 4학년 자모회장 끝발이 ?였쩝?, “1반은 아빠 선생, 2반은 엄마 선생, 3반은 처음으로 담임을 맡은 처녀 선생인데, 회장님 맘대로 고르세요” 했습니다. 막 발령 받은 선생이 의욕이 더 좋지 않을까 해서 3반에 넣어달라고 했습니다. 의섭이는 학교에 들어가자마자 곧바로 글도 익히고 무용도 잘하여 담임 선생님이 의섭이를 반장 시키겠다고 연락하여 왔습니다. 학교에 가서 “의섭이는 아직 나이가 어려 통솔력이 부족하니, 사촌 형(큰 시숙네 막내 아들)을 반장 시켜달라”고 했습니다. 그 때 반장을 했던 정열이는 시골인 장성에서는 수재급이나 입학할 수 있는 교대를 졸업하고 지금 학교 선생님을 하고 있습니다.


  둘째가 학교에 적응은 잘 하지만 어려서 먹새과장인데다가 자기 나이도 몰랐으니 남들 따라가기만 해도 황송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의섭이가 입학하여 처음 일제고사에서 1학년 전체에서 1등을 해서 깜짝 놀라 남편에게 자랑하니, “당신이 열성 자모고 시험관 선생님이 동섭이 담임 선생이라 힌트 준 것 아니요”해서 저도 생각해보니 믿기지가 않아 아무 말도 못했습니다. 당시에 일제고사를 볼 때면 전교생들이 한꺼번에 운동장에서 시험을 치르고, 다른 반 담임 선생님들이 시험 감독을 하였습니다. 다음 일제고사에서도 의섭이가 1등을 해서, 남편에게 “이번에도 시험관이 동섭이 담임이었답니까, 모르면 잠자코 계세요”하고 큰 소리를 쳤습니다.


  공부 잘 하는 아이들이 항상 자랑이었고, 아무리 힘들어도 힘든 줄 몰랐습니다.


  아이들 유치원에 보낼 형편도 아니고, 유치원도 흔치 않던 시절이라서 부천에 이사 와서 셋째, 넷째까지 모두 일곱 살에 초등학교에 입학시켰습니다. 요즈음은 아이들을 늦게 입학시키는게 유행이라는데, 일찍 입학하면 형, 언니들과 어울리면서 더 빨리 깨치는 장점도 있는 것 같습니다.       


  아이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아무리 먹고살기 힘들어도 1년에 2번 이상은 아이들 담임 선생님을 만났지만 아이들에게는 어른이 될 때까지도 비밀로 하였습니다. 학부모가 선생님을 만나 자녀의 학교 생활을 물어보고 부족한 점을 알려주고 부탁하는 것은 어린 아이 교육에는 꼭 필요합니다. 그렇지만 엄마가 학교에 가면 다른 급우들에게 놀림을 당할 수도 있고, 아이가 선생님을 존경하지 않을 수 있으므로 비밀로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매년 초파일에는 아이들 이름을 쓴 연등을 달아주었습니다. 초파일에만 절에 가고, 스님이 가게에 찾아와 목탁을 두드리면서 시주를 구하면 ‘(예수) 믿습니다’ 하고 ?i아내니 양심껏 말해서 불교신자라고 할 수 없지만 어쨌든 아이들 잘 되라고 부처님께 빌고 싶었습니다.



  10. 야당 선거운동을 하다



  우리 부부는 열심히 돈을 모아 1970년에 장성댐 하류에 있는 비옥한 논 800평을 사고, 야외 전축을 사서 문화생활도 누리게 되었습니다. 


  1971년에는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총선이 있어서 전국이 선거 바람으로 들썩하였지만 남편이나 저는 정치에 무관심하였습니다. 하루는 몸이 아파 누워 있는데, 미장원에서 오라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성산초등학교 4학년 자모회장을 맡고 있었는데, 마침 학교 신축공사가 있어서 부르나 싶어서 억지로 몸을 일으켜 학교에 낼 돈봉투를 마련하여 미장원에 갔습니다. 미장원장은 ‘형님’하면서 머리를 손질하고 화장까지 시켜주더니 읍장 사택으로 데려갔습니다. 거기에 가보니 읍장 부인, 군수 부인, 경찰서장 부인 등 지역 유지 부인이 총 출동하여 잔치를 벌이고 저를 포함한 동네 사람 3, 4명이 거기에 끼었습니다. 전라도에서 제대로 된 잔치상에는 홍어가 반드시 나오지만 미나리 같은 야채로 버무리고 홍어는 보일동 말동 넣기 마련인데, 그 날 홍어무침은 미나리는 보일동 말동하고 비싼 홍어만 보였습니다. 저는 그 뱃속이 뻔히 보여서 “이런 홍어는 처음 먹어 보네” 한마디를 하였습니다. 사택을 나오면서 나이롱(나일론) 바구니와 책 3권을 주길래, 돌아가는 길에 같이 갔던 동네 사람들에게 “이렇게 두꺼운 책을 언제 다 읽어보란 거야. 정정당당하게 출마하면 안되나. 없는 사람은 어디 국회의원에 나올 수나 있겠나” 하고 한 마디 했습니다.



  며칠 후에 일터로 가면서 막내를 맡겨두는 가게에 들렀더니, 가게 주인이 김대중 대통령 후보 사진을 보여주면서 “잘 생겼지요” 하길래, 얼굴도 자세히 보지 않고 인사말로 “예, 잘 생겼네요”하였습니다. 장성에서는 신민당 국회의원 후보로 김상복씨가 출마하였는데, 가게 주인이 야당 당원인지도 몰랐습니다. 다음날 야당 사람이 찾아와서 “저희들에게 협조를 해주세요”하고 부탁하길래, “여보세요, 그런 시간이 어디 있어요”하고 딱 잘라 거절하였습니다. 바로 그 다음날 경찰이 찾아와서 “아주머니, 그러면 안되지요. 왜 야당 운동을 합니까?” 하여서, “여당이고 야당이고 선거에 관심 없어요”하고 대꾸하였습니다. 경찰관 2명이 그 후에도 매일 같이 대문 앞을 지키면서 무슨 말을 주고받고, 집을 나서면 졸졸 따라다니며 ‘학교 자모회장이니 여당 입당원서에 도장을 찍으라’고 졸랐습니다. 계속 거절하는데도 귀찮게 따라다녀서 한 번은 화가 나서 “경찰관님, 여당은 공무원도 하고 민간인도 하는데, 야당은 야당증이 없으면 못한다면서요. 야당증 하러 갈랍니다”하고는 10리를 걸어서 백운장에 있는 야당 당사로 찾아가서 신민당 당원증을 만들었습니다. 그 때에 야당 당원 일당이 1,000원(농사일 품삯이 150원)이었는데, 목숨 걸고 독립운동하듯이 선거운동을 하였습니다. 경찰관들이 여당에 입당하라고 하도 귀찮게 하길래 야당 당원증을 만들면 따라다니지 않을 줄로 알았던 것이지 그 때까지만도 목숨을 거는 일을 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하루는 종기가 난 막내 아들을 데리고 광주의 병원에서 수술을 하고 집에 오니,  맏동서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맏동서는 “예이 몹쓸 사람. 지서장님이 자네하고 가게 주인이 야당 선전하러 북상(면)으로 갔다고 자전거로 30리나 갔다가 허탕치고 오셨다네” 하길래, 부아가 나서 “그래서, 왜, 못잡았다는대요”하고 물었습니다. 맏동서가 “자네가 장성으로 가는 것을 보고 누가 신고하였다데. 자네가 머리가 좋은 사람이라 북상(북쪽)으로 가면서 일부러 장성(남쪽)으로 갔다고 생각하고 지서장이 북상까지 쫓아갔다가 놓친거네” 했습니다. “형님, 얘가 아파서 (장성보다 더 남쪽인 광주에 있는) 병원에 갔다온 것을 보고도 그런 말씀을 하세요. 경찰관이 헛고생을 하였으니 야당에서 일당을 받아서 술사준다고 하세요” 하고 말했습니다. 저는 이미 맏동서를 무서워하는 철부지 새색씨가 아니었습니다.


  다음날도 맏동서가 경찰의 부탁을 받고 찾아왔길래, 경찰들 미운 생각에 야당 사람을 찾아 갔습니다. 야당 사람들을 만나보니 말도 잘 통하고 지하운동을 하는 것이 재미도 있어서 선거운동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남편은 원래 말수가 적은데다가 자녀들에게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싫은 소리를 해본 적이 없습니다. 자녀들이 아무리 잘한다고 하여도 부모 입장에서는 부족한 점이 한 둘이 아니지만 남편은 저에게만 자녀들에 대한 불만을 말해줍니다. 남편은 제가 말을 걸어도 필요한 대답만 하고, 때로는 제 생각과 반대로 움직이길 더 좋아하는 사람 같습니다. 남편에게 그간 있었던 일을 말하고 “야당 선거운동을 해야겠어요”하였습니다. 남편이 얼마 후에 여당에 가입하였는데, 남편만이 아니라 동네 사람들 대부분이 여당 당원이었습니다. 남편은 여당에 열성인 사람과 야당에 조금이라도 호감이 있는 사람을 파악하여 저에게 알려주고, 공화당에서 받은 돈 봉투를 사람들에게 나눠주면서 넌지시 손가락 2개를 펴고(기호 2번 신민당) “잘 부탁합니다”하고 몰래 야당 선거운동을 하였습니다.



  총선 전날 대문을 닫으려니 경찰관 2명이 그곳을 지키다가 “저 여자가 나가려다가 우리가 있으니까 들어갔다”고 소곤대는 말이 들렸습니다. 곧바로 집에 불을 끄고 뒷담을 넘어가서 야당에서 받은 일당과 활동비(차비)를 모아 놓은 돈 20,000원을 이름을 써놓은 봉투 100개에 나누어 넣고, 10개씩 묶어 동네에서 몰래 야당을 하던 박씨 집에 찾아 갔습니다. 박씨에게 봉투 묶음을 주면서 “맨 앞 봉투에 있는 사람에게 갖다 주시고 9집씩 나눠달라고 하세요.”하고 다시 뒷담을 넘어 집에 들어와서 아무 일도 없는 듯이 잠을 잤습니다.


  다음날 새벽, 대문을 열면서 보니 경찰관 2명이 앉아 있길래, “밤새 우리 집을 지켜주느라 고생하신 줄 알았으면 대통령 될 아들이나 하나 만들 걸 안타깝네요”하고 놀려주었습니다. 총선에서 공화당 후보가 표를 70%나 얻어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지만 제가 맡았던 성산과 남당 마을은 집집마다 공화당원인데도 신민당 후보가 70%나 되는 표를 얻어 야당 마을로 찍히게 되었습니다. 총선이 끝나고 제 구역에서 돈 봉투를 받은 사람과 금액을 정리하여 야당 사람에게 전해주었습니다.


  김상복 후보는 선거가 끝나고 술과 고기를 사서 우리 집을 찾아와서 열심히 운동을 해주어 고맙다며 낙선인사를 하였습니다. 그 후에도 야당 사람들을 종종 만났는데, 어느 날 “당신 집에서 동아일보 보시죠. 야당신문을 본다고 지서에 명부가 찍혀 있어요. 그래서 경찰이 당신을 항상 감시하는 것입니다”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없이 살고 무식해도 세상 돌아가는 소식은 알게 신문 하나는 봐야 한다고 생각해서 유명한 동아일보를 보았을 뿐인데, 신문에도 여당신문, 야당신문이 있다는 것은 그 때에 처음 알았습니다. 신민당 사람들은 말끝마다 “자식을 도시에서 교육시켜야 훌륭하게 키울 수 있다”고 권하곤 하였습니다.


   


  11. 고향을 떠나다


  정부에서는 1971년경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호남고속도로 공사를 한다고 발표하였는데, 하필이면 우리가 10년 동안 아이들 방에 가둬두고 큰 딸이 죽기까지 하는 피눈물을 흘려가며 마련한 논이 수용되었습니다. 논을 살 때에는 흉년이라서 1섬에 13만원이나 하여 쌀 100섬 값인 1300만원을 주었는데, 수용될 때는 생수가 나는 땅 70평을 제외하고, 좌우의 자투리 땅을 제하여 보상 받을 쌀이 40섬도 채 안되었습니다. 또, 그 해가 풍년이라서 벼 1섬에 7만원 밖에 안되어 보상비가 총270만원이고, 그것도 3년에 걸쳐서 나누어 준다고 했습니다. 10년간 번 돈이 1년 만에 5분지 1로 줄어들다니 세상에 이런 날벼락이 다 없었습니다. 10년 넘게 번 돈을 다 뺏기게 되니 더 이상 살 의욕이 없어서 아이들하고 쥐약이나 먹고 죽으려고 했는데, 철승이 엄마가 ?i아다니며 감시하고 말려서 죽을 수도 없었습니다. 


  고향에 정이라고는 하나도 없고, 야당 사람들 말이 아니라도 아이들 교육 문제도 있어서 고향을 떠나기로 하였는데, 믿고 따르던 할머님이 계시는 광주로 떠날 생각이었습니다.


  그 때, 동네 어느 집에 사주쟁이가 왔으니 가보자는 동네 아줌마를 따라 구경을 갔습니다. 그 집에 가자마자 점쟁이가 “지금 온 아줌마 이리 들어와 앉아요” 하길래, 얼떨결에 방 한가운데 들어가 앉으니, “당신 지금 남쪽(광주)으로 이사갈려고 하지. 남쪽으로 가면 지금보다 더 빌어먹어. 북쪽으로 가”하는 것이었습니다. 사주쟁이는 다른 아줌마를 보고서 묻지도 않는데 “딴 남편 얻어서 딸을 낳았네” 하였습니다. 그 아줌마는 동네에서 평소 얌전한 사람으로 다들 알고 있었습니다. 그 아줌마와 같이 집으로 오는 길에 “사주쟁이가 얼토당토 않은 소리를 하네요. 아줌마 세상에 그런 말이 어디 있어요” 하니, 그 아줌마는 “맞아요. 우리 딸이 최00 딸이에요”라고 깜짝 놀랄 고백을 하였습니다. 지난 20여년 세월도 지긋지긋한데 더 빌어먹을 곳으로 이사갈 용기가 나지 않아 소사읍에 사는 언니에게 이사를 가겠다고 연락하였습니다.


  중요한 인생 대목에서 두 번이나 점쟁이 말을 들었으니, 점이나 보러 다니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점쟁이들은 손님의 표정과 입성, 말하는 것을 보고 대충 맞추는 눈치 빠른 사람이 대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혼자 점보러 나선 적도, 누구더러 먼저 점보러 가자고 한 적도 없습니다. 아이들 결혼할 때에 궁합은 보았지만 유명한 곳을 찾아 다닌게 아니라 잘 모르는 남의 식구가 어떤지 궁금해서 재미로 보았습니다. 세상에 진짜 점쟁이도 없지 않겠지만, 어려운 처지에 빠져서 갈피를 못 잡을 때에 우연히 듣는 말이 마음 속 생각과 같아 힘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집에서 돼지, 닭을 키웠는데, 세 번째 임신하여 출산을 1주일 앞 둔 어미 돼지가 짚단을 갈아주는 과정에서 그만 배를 다치고 말았습니다. 돼지가 곧 진통이 오더니 새끼를 13마리나 낳고 죽고 말았습니다. 어미 돼지는 고기로 팔고, 어미 없는 새끼들을 키울 수가 없어서 남편에게 약을 하여 주고, 돼지 머리와 내장을 삶아서 동네 부부들을 불러다 마당에서 잔치를 벌이고 고향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이런 작은 잔치 하나도 없던 가난한 동네인지라 나중에 동네 사람들을 다시 만났을 때에 두고두고 이야기거리가 되었습니다.




제3장 노점, 행상 생활



                     [1972년 ~ 1976년]



1. 생선, 야채 행상을 시작하다




  남편에게 서울로 이사가자고 하니 “농사지을 논도 없으니 나는 생선장사하고 당신은 채소장사해서 먹고 삽시다”해서, 아이들 봄방학을 맞자마자 옷보따리만 싸서  밤새 열차를 타고 새벽에 영등포에 도착하여 소사읍으로 이사를 오게 되었습니다.


  형부는 옛날 성수암 보살님 점이 맞았는지 사업에 성공해서 소명여고 앞에 큰 집을 가지고 대여섯 집에 세를 주고 있었습니다. 형부네 방 한 칸에 세들었는데, 돈도 없고 객지에서 무얼 해야 하는지 몰라서 두 달을 아무 것도 않고 보냈습니다. 하루는 형부가 우리 부부를 부르더니 “아이가 넷씩이나 있는 사람 둘이서 어떻게 맨날 방구석에만 않아 있냐”면서 눈물을 흘리며 장사라도 해보라고 권했습니다.


  남편이 생선장사를 하겠다며 자전거 살 돈을 달라더니 새 자전거를 사란 말을 안 듣고 중고 자전거를 사서, 허구한 날 고장이 나서 세워놓은 날이 더 많고 고치는 삯이 새 자전거 값보다 더 들었습니다. 남편은 6개월만에 생선은 팔아보지도 못하고 자전거를 팔아버렸습니다. 남편은 공무원이나 하면 어울리지 ‘내 간 쏙 빼놓고 하는’ 장사에는 소질이 없었습니다. 남편은 신혼 때에는 매일 낚시나 하고 술자리나 찾아다니는 아버지한테 질려서인지 술을 안마셨습니다. 그러나, 건강을 회복하고 남당 마을에 와서 자리를 잡자 겨울에 한가할 때면 두부집에 다니며 노름도 하고 술도 마셨지만 심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소사에 올라와서 소질도 없는 장사를 하려니 속상해서인지 막걸리에 빠져 살았습니다.




  사는 꼴이 얼마나 한심하게 보였던지 조숙했던 인천 수산고등학교에 수석으로 입학한 언니네 큰 조카가 “이모, 소사역(지금의 부천역)에 가보세요. 아줌마들이 함지박을 가지고 인천에서 생선을 사다 파니까 장사를 해보세요.”하고 말하였습니다. 바로 함지박을 사서 다음날 새벽 소사역에 가서 보니 함지박을 든 아줌마들이 하인천(지금의 인천역) 차표를 들고 있길래 같은 표를 사서 그 아줌마들을 뒤따라 갔습니다. 임신을 하고나서부터 소변을 잘 참지 못하여 한 번 마려우면 5분, 10분도 참기가 힘듭니다. 아줌마들을 놓칠까봐 소사역에서부터 소변이 마려운데도 참고 하인천 생선 도매하는 곳까지 따라가서 동태 1상자를 산 후에야 소변을 보았습니다. 지금도 그 때 소변 참던 생각을 하면 골치가 다 지끈지끈 합니다. 생선은 냄새가 나서 하인천에서 생선을 사올 때에는 객실에 들어가지 못하고 기차칸 사이에 서서 생선을 지키고 있어야 했습니다.


  그 날부터 오전에는 부천 자유시장 시장통 한 가운데에서 생선을 팔았는데, 시장통 양쪽 가게 주인들이 생선 냄새를 싫어해서 손님이 많은 오후에는 남은 생선을 머리에 이고 8킬로미터까지 걸어 상리(상동)나 중리(중동)의 외딴 동네를 찾아가서 팔았습니다. 동네에서 생선을 팔면 돈보다 쌀로 받는 일이 많아서 집에 올 때는 생선 대신에 쌀을 머리에 이고 옵니다.  


  한 번은 생선을 잔뜩 이고 가는데, 반대편 가게에서 여자들 2명이 ?i아나와 유리창이 넘어져 깨졌으니 돈을 내라고 하여, “그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 바람에 넘어진 것 아니냐”고 하였지만 “본 사람이 있다”며 막무가네로 나오고 외딴 곳이라 도와줄 사람도 없어서 할 수 없이 동태 3마리 주기로 했는데, “생선 머리에 이는 것 좀 도와달라”고 하고 일어서서 돌아보니 빼놓은 생선이 5마리나 되는 것을 보았지만 어쩔 수 없어서 그냥 갔습니다.


  또 한 번은 대문을 몸으로 밀고 들어가면서 “생선 사세요” 하는데, 개가 치마를 물어뜯어 버렸습니다. 집 주인은 미안하다고 하기는커녕 “개가 새끼를 낳았는데, 왜, 들어왔냐”고 호통을 쳤습니다. ‘개조심’이라고 써붙이지도 않았는데, 새끼를 낳았는지 어찌 알겠는가? 남의 집에 들어가 생선 파는 사람이 따질 수도 없어서 다음 집에 가서 실바늘을 빌려 찢어진 치마를 꿰매면서 그 집 주인과 함께 울었습니다.

  어느 날은 평소보다 생선을 일찍 팔아 해가 뉘엿뉘엿 할 때에 밭을 지나다가 상추가 좋아 보여 사다가 그대로 쌓아놓고 팔아보니 저울도 없고 씻지도 않았지만 금방 다 팔렸습니다. 다른 상인들은 상추에 뭍은 흙을 씻고 물을 주지만, 사람들 말이 바로 밭에서 가져온 상추라 싱싱하고 물을 줘서 근종(무게)을 올리지 않아 좋다고 하였습니다. 그 때부터 낮에는 생선 장사, 저녁에는 상추 장사를 하여 돈을 두 배로 벌었습니다.

  노점을 할 때건 가게를 할 때건 도매상에 가면 그냥 물건만 사오는 게 아니라 새로 나온 물건을 유심히 보았기에 다른 상인들보다 항상 앞서서 새 물건을 시작했고, 파는 방법도 달리 하려고 궁리했습니다. 동태철이 지나 준치를 파는데, 지나가던 사람이 농담 삼아 “썩어도 준치”라고 하길래, 바로 흉내 내서 “썩어도 준치 왔어요” 하니 금새 다 팔렸습니다. 이민수(임연수, 이면수)를 팔 때에는 “뼈도 없고 맛있는 이민수씨가 찾아 왔어요”하고 팔았습니다.

  장사는 품종을 많이 한다고 좋은 것이 아니고 잘되는 한 품종만 집중해서 팔아야 하고, 여러 가지로 아이디어를 써야 팔린다는 것을 터득하였습니다. 시장통 한가운데에서 양쪽 가게 주인 눈치를 보면서 자리를 비켜주어야 하는 처지에 여러 가지 품종을 취급하는 것은 쉽지도 않습니다. 노점상들은 물건 욕심에 이것 저것 많이 가져다 놓고, 가게 주인이 잔소리하면 커피, 박카스 같은 걸 사주며 아쉬운 소리도 하고 싸우기도 하지만, 저는 가게 주인이 가라고 하면 부탁하기도 싸우기도 싫어 함지박을 머리에 이고 다른 곳에 가서 팔았습니다.

  아이들이 시골에서는 용이었지만, 도시에 와서는 공부건, 학우 관계이건 적응하는데 쉽지 않고 시간이 걸릴 것이 뻔했습니다. 그렇지만, 먹고 살길도 막막한 터에 장성에서처럼 자모회장으로 치마바람은 고사하고 아이들이 가난한 집이라고 멸시를 받을까봐 걱정만 하였습니다.


  다행히 첫째는 5학년에 전학 와서 첫 시험부터 전교 일등을 했습니다. 곽 근 담임 선생님이 우리가 살던 언니네 집으로 가정방문을 온다고 했지만 시장에서 생선을 파느라 가보질 못했습니다. 곽선생님은 집에 와보고 형편을 짐작했는지 다음날 선생님 댁의 헌 옷을 싸서 동섭이에게 보내 주었습니다.  


  둘째는 공부의 틀도 잡히지 않고 전학와서 학교 적응에 시간이 걸렸습니다. 어려서부터 혼자 있기 싫어하고 응석도 잘 부렸는데, 엄마, 아빠가 행상, 노점을 하느라 밤늦게 들어오니 한동안 공부가 뒷걸음질치다가 4학년 때 우등상을 타면서 점차 공부를 더 잘하기 시작했습니다.

  선희는 딸이라서 그런지 아빠한테 붙임성이 있어서 다섯 살 때부터 곧잘 용돈을 얻어 썼습니다. 선희가 아빠한테 “아빠 돈 하나만 줘”하고 조르면, 남편은 “없다”고 잡아뗍니다. 선희는 “그러면, 뛰어봐”해서 ‘짤랑 짤랑’하는 동전 소리를 듣고 기어코 동전 1, 2개를 얻어서 막내를 데리고 멀리 가서 오빠들 몰래 과자를 사먹고 오곤 했습니다.  


  2. 자유시장으로 이사가서 자리잡다

  생선 장사를 하면서 밥 굶지 않게 되었지만 생선은 상하기 쉽고 냄새가 납니다. 행상을 나갔다가 길거리에서 소변을 참기 힘들어도 화장실이 있는 곳을 찾아서 생선을 이고 택시나 버스를 탈 수 없습니다. 정해진 노점 자리 없이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기로는 생선, 채소만큼 좋은 것이 없지만 평생 ?i겨 다니는 노점 생활을 면할 수 없습니다.


  자유시장 바로 지나서 있는 소사극장 앞에 야채 깡시장이 있습니다. 거기서 옷가지나 그릇 같은 걸 팔면 되겠다 싶었지만 이런 물건은 구색도 갖추어야 하고 양도 많아 소명학교 앞에서 깡시장까지 보따리를 가지고 다니기도 어렵습니다.      

  시장 동네로 이사가려고 알아보니 아이들이 많다고 다들 세를 주지 않아, 자유시장 끝에 있는 철도 건널목 바로 아래에 있는 집에 가서 네 식구라고 거짓말하고 6만원에 전세로 얻고, 큰 얘들 둘만 데리고 이사를 가고, 아래 두 아이는 언니네 맡겨 놓았습니다. 집주인에게 부침개도 해주고 잘 보이려고 하면서 1주일 있다가 셋째, 또 1주일 있다가 막내를 데려가니 집 주인도 그나마 정이 들었는지 나가란 말을 못했습니다.


  부천 시장통을 흘러온 하숫물이 철도 건널목 옆 개울에 모여 흘러가는데, 그 바로 옆에 있던 집은 개울 바닥만큼이나 집바닥이 낮아 비가 좀 왔다 싶으면 물이 부엌과 방에까지 들어왔습니다. 물만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온갖 쓰레기며 똥덩어리까지 방안에 들어와서 그 때마다 피신을 가야하고, 물이 빠지면 옷이고 그릇이고 씻고 말리느라 난리가 나지만 식구가 많아서 이사 갈 곳도 없었습니다. 생각다 못해 남편이 장롱 한 짝을 얻어다가 방 한쪽에 커다란 선반을 만들어(얘들이 올라가서 놀아도 될만큼 튼튼했습니다), 장사를 하다가도 비가 올 것 같으면 얼른 집에 달려가서 이불, 옷보따리, 식량 등을 선반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그 때부터 남편 별명이 ‘치깐 목수’입니다. 치깐은 화장실의 사투리로서 야외 화장실 만들 정도의 솜씨는 된다는 뜻입니다.

  아무리 그런 집이라도 얘들 때문에 ?i겨날까봐 집주인이 싫은 소리라도 할라치면 무조건 잘 보이려고 노력했습니다. 하루는 주인 아줌마가 “얘들이 수도꼭지를 만진다”고 하여, 수도세가 얼마 나오냐고 물어보니 기본요금이 150원이라고 해서 “150원 넘게 나온 건 다 우리가 낼께요” 했습니다. 집 주인 아저씨는 마당에서 소가죽에 붙은 살을 벗겨내는 일을 하였는데, 그 때문에 마당에 수도꼭지가 하나 있었습니다. 얘들한테 미안한 것 중 하나가 장난감 하나 사 준 적이 없고, 남편이 세발 자전거를 주워 칠을 해서 준 것이 유일할 겁니다. 장난감도 없는 얘들이 수도 있는 집에 처음으로 이사가서 신기해서 수도 몇 번 만진 걸 가지고 아이들 기가 죽을까봐 기본요금 이상은 다 낸다고 했던 것입니다. 한 달이 지나서 주인 아줌마에게 수도세가 얼마 나왔냐고 물어보니 150원이 나왔다고 해서 그냥 150원을 주고 “얘들이 수도 가지고 놀아도 이해 좀 해주세요”하였습니다. 


  주인 집에는 거실, 방 2개, 부엌, 돼지울까지 형광등이 5개나 되었는데, 우리 집에는 방과 부엌을 뚫어서 그 사이에 둔 형광등 1개밖에 없고, 전자제품은 하나도 없었지만 집주인하고 전기세도 반씩 냈습니다.


  제 돈 아까운 줄은 누구나 잘 아는 것이지만 주인에게 무조건 양보를 하니까 집주인도 2년 사는 동안에 아무 잔소리를 안하고, 나중에 이사간다니까 “계속 살지 왜 이사를 가려느냐”며 몇 번을 말렸습니다.

  새벽같이 깡시장에 가서 노점 자리를 확보하였다가, 사람들이 하나 둘 모이면 티셔츠, 그릇, 속옷, 양말 등등을 팔기 시작했습니다. 부끄럽다는 생각도 없이 무조건 물건 팔 욕심에 남자 뽀뿌링(포풀린, 면 종류의 겉옷감) 주르스(사각팬티)를 머리에 거꾸로 뒤집어쓰고, 메리야쓰(속옷)와 주르스를 착착 털면서 ‘무조건 100원씩’ 하고 외치면 손님들이 빙 둘러싸고 구경을 하다가 물건을 사갔습니다. 깡시장은 오전에 장사가 끝나는지라 오후에는 생선을 팔았습니다.

  첫째의 6학년 담임이었던 20대 후반의 김웅재 선생님은 가장 기억이 남는 싹싹하고 솔직한 선생님입니다. 졸업할 때가 되어서 중학교 입학 상담을 하러가니 김선생님이 “집안 형편이 어려우니 인천공업중학교 보내세요. 거기도 철도고처럼 다 공짜에요” 했지만, 큰 얘는 공업중학교는 앞날이 없고 손재주도 없다고 인문계인 부천중학교에 가겠다고 했습니다. 부천에 올라올 때에는 가난한 수재들이 모인다는 철도고등학교에 보내는 것이 꿈이었는데, 큰 얘 말을 듣고 보니 맞는 것 같았습니다. 졸업식에서 전교 1등에게 주는 교육감상을 주지 않아서 김선생님에게 따지니, “실업계 갔으면 교육감상인데, 인문계로 갔으니 대신 중학교 입학금 전액(8,848원)을 장학금으로 준 거에요” 했습니다. 장성에서 어떤 사람이 아들이 수석 졸업을 한다고 해서 혹시 쌀이나 주나 해서 솥을 깨끗이 씻어놨더니 상으로 사전을 받아와서 엉엉 울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만 그건 자식 덕에 팔자 고치려는 무식한 부모 이야기일 뿐입니다. 아무리 부모가 노점을 하기로서 돈 몇 푼 때문에 평생 명예를 놓쳤다는 생각에 적잖이 섭섭했습니다. 김선생님은 정이 많은 사람이라서 그 일이 마음에 걸렸는지 큰 얘가 졸업한 후에도 부천에 근무하던 7, 8년여 동안 노점이나 가게에 찾아와서 “엄마, 힘내세요. 동섭이 공부 잘하지요” 하고 물어 보곤 했습니다.


  선희가 7살이 되어 자유시장 바로 옆에 있는 부천남초등학교에 데려갔더니 나이(학령)가 모자란다며 “우리 학교는 교직원 가족도 안됩니다”며 접수를 거절했습니다. 어쩌나 하는 마음에 고민하다가 집에서 멀리 떨어진 부천북초등학교에 가서 큰 얘 담임 선생님들을 뵈었습니다. 곽근 선생님은 “예비소집일에 그냥 데려 오세요. 제가 다 해드릴께요”하고, 김웅재 선생님은 “몇 살 먹었냐고 물어보면 8살이고, 7월에 태어났다고 하세요. 호적은 전라도까지 가서 떼어 와야 하는데 안가져 왔다고 하세요”하고 자세히 방법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선희가 미리 교육받은대로 여덟 살이라고 대답을 하고 다른 질문도 대답을 잘 해서 입학 허가를 받았습니다. 김웅재 선생님은 담당 선생도 아닌데, 옆에서 구경하다가 밖에 따라 나와서 선희를 얼싸안아 올리고 “그 오빠에 그 동생이다. 앞으로 공부 잘하겠다”고 좋아했습니다. 나중에 막내가 남초등학교에 입학하고 선희도 남초등학교로 전학을 했습니다. 저는 바쁘지만 아침마다 2년간 선희를 자전거로 태우고 학교까지 데려다 주었습니다.



 

3. 우리 가게를 하기 시작하다


   한 1년 남짓 노점을 하다가 가게 하나가 전세 25만원에 싸게 나왔다고 하여 들어 갔습니다. 주인 할머니가 성격이 괄괄해서 우리보다 먼저 살던 사람들은 3개월을 못 넘겼다는 말을 들었지만 우리는 거기서 30개월을 살았습니다.

   가게는 시장통에서 벗어난 철도 건널목(땡땡이 골목) 바로 앞에 있어서 목이 좋지 않아 지나다니는 사람도 많지 않고 장사도 잘 되지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거기서 장사를 하다가 곧 비가 오거나 저녁에만 가게에서 장사를 하고 평소에는 깡시장에 나가서 노점을 계속하였습니다.

   가게 안쪽에 2평쯤 되는 방이 있고, 부엌은 주인집과 같이 썼는데, 방은 절반이 온돌이지만 나머지는 개울 위에 철골을 세우고 그 위에 판자를 걸쳐 지은 방이라서 개울에서 냄새도 많이 나지만 특히 겨울에는 춥기가 말도 못했습니다.


   막내가 동갑내기인 주인집 손주와 한 번씩 싸우는데, 네 살 밖에 안되지만 세들어 사는 걸 아는지 몇 대 맞아주다가 참다 못해 한 대만 때리면 손주가 ‘으왕’하고 울면서 할머니에게 달려갔습니다. 주인 할머니가 집을 비우라고 성화를 해서 막내를 언니에게 맡겼습니다. 언니는 처음에 막내가 엄마가 가고 나니 하도 울어대서 나무에다 묶어 놓았더니 그 다음부터 울지 않더라고 말해주었습니다. 매일 새벽 동대문시장에서 물건을 해오고 나서 아이들 밥먹이고 선희를 자전거에 태워 등교시켜주고 언니네로 가서 막내에게 군것질거리를 주고 왔습니다. 지금도 그 때 일을 생각하면 막내한테 미안한 마음뿐입니다.

   주인집 아들이 우리 가게 옆에서 의상실을 하다가 동양방송 연말 노래자랑에서 금상을 받아 가수를 하게 되면서 주인 할아버지가 의상실을 만화방으로 바꾸었습니다. 아이들이 주인 눈치를 보면서 그 집 텔레비전을 한 번씩 가서 보는 것도 못마땅했는데 만화방이 생기니, 아이들이 마음씨 좋은 주인 할아버지 눈치를 보고 공짜로 만화를 보러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이래서는 얘들 망치겠다 싶어서 다시 이사를 가게 되었습니다.

  

   4. 덧버선으로 대박이 나다


   우리 식구는 전세 25만원에 공장(중앙공업사)에 붙어 있는 직원 숙소로 이사를 갔는데, 낮에는 공장에서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시끄럽습니다. 창고 같은 가게나마 그만 두고 다시 노점을 하게 되었지만 막내를 데려와 식구들이 합쳐 살게 되고, 주인 집과 떨어진 곳에 살게 되어 간섭도 안 받고 아이들도 활개칠 수 있게 되어 마음은 편했습니다. 집주인들은 시골에서건 소사에서건 왜들 그러는지 부엌에 와서 뭘 먹는지, 아이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시시콜콜이 간섭을 하여 참 귀찮았습니다.

   어느 날 영등포에서 생선을 사오다가 구로동 입구에서 어떤 아줌마가 덧버선을 한 바구니 사서 버스를 타려고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급히 아줌마를 붙잡고 덧버선 두 컬레를 50원에 사고 “이거 어디서 사옵니까” 하고 물어보니, “나 차 와서 타야 하는데” 하면서 가버렸습니다. 부천에 와서 생선을 팔다가 해떨어지기 전에 덧버선 공장 위치라도 확인해야겠다 싶어서 남은 생선을 큰 아들에게 팔라고 맡겨 놓고 구로동 입구에 버스를 타고 가서 거기서 내려 문래동까지 걸어가면서 여기저기 살펴보았지만 덧버선 공장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다리가 아파서 한참을 길에 서 있다보니 연탄 배달 다니는 집에서 알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연탄집에 가서 물어보니 바로 덧버선 공장을 알려 주었습니다. 기리바시 덧버선은 옷쪼가리로 만드는지라 덧버선 공장도 문래동, 구로3동, 신도림동처럼 옷 공장 근처에 한 두 개 있지만 미싱 몇 대 있는 작은 공장을 찾아내기는 힘들었습니다.

   덧버선을 어른 것 15원, 아이 것 10원에 사다가 ‘무조건 두 컬레 50원’하고 파니 장사가 정말 잘 되었습니다. 매일 짊어지기도 힘든 덧버선 자루를 몇 개씩 들고, 이고 나가도 밤이면 다 팔려서 돈이 수북히 든 자루를 머리에 이고 왔습니다. 평생에 그 때보다 돈을 많이 번 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자유시장 상인들은 “덧버선을 어디서 해 오냐”고 물어보고, 선물 공세도 폈지만 가르쳐 줄 수 없었습니다. 남편은 심성이 착해서 누가 어려운 사정을 말하면 거절을 못하는 성격인지라 남편에게까지 덧버선 공장을 가르쳐주지 않았습니다. 뒤를 밟는 상인들을 따돌리려고 밀짚모자를 눌러 쓰고 변장도 하고 엉뚱한 곳으로 택시타고 도망가기도 하면서 옛날 야당운동하면서 경찰을 따돌리던 솜씨로 사람들을 피했습니다. 하도 덧버선을 많이 사가니까 공장에서 택시로 물건을 실어다 주기도 하고, 땡처리하는 것은 어른 것 10원, 아이 것 5원에도 주었습니다. 매일 밤 돈 세는 재미에 빠져 커다란 가게 주인이 하나도 부럽지 않았습니다.

 

   큰 얘가 부천중학교에 입학하여 2학년 때, 반 친구들이 하교 길에 노점에 찾아와서 담임 선생님이 학교에 쌀자루하고 도장을 가져오라고 한다고 하였습니다. ‘쌀을 주려나보다’ 하는 생각이 들어, 가고 싶지 않았지만 일부러 시간을 내서라도 찾아갈 판에 부르는데 안 갈 수 없어서 자루도 도장도 없이 빈 손으로 찾아갔습니다. 담임인 여선생님이 불우이웃돕기로 모았다면서 쌀과 보리를 섞어 놓은 것을 가져가라고 해서 “노점을 해도 먹고 살만하니까 더 어려운 학생 주세요”하니, 선생님은 눈물을 글썽이면서 “그 엄마에 그 아들이네요. 어제 동섭이한테 가져가라고 하니 ‘저는 수업료를 잘 내 잖아요. 다른 어려운 친구 주세요’ 하대요. 그래서, 친구들 시킨건데. 아무튼 이건 동섭이 몫으로 나온 것이니 가져 가세요” 하고 권했습니다. 제가 ‘아들도 나하고 생각이 똑같구나’ 하는 생각에 뿌리치고 학교를 나오는데, 선생님이 기어코 학교 소사를 시켜서 정문까지 자루를 가져와서 미안한 마음에 받아 왔습니다. 다음날, 아침 큰 얘한테 학교에 도장 가져가라고 했다가 어미인 제가 혼났습니다.

 

   남편은 원래 말수가 없고, 저도 큰 얘나 둘째는 열 살 때부터 ‘이거 해라, 저거 해라. 왜 공부를 안하냐’ 하는 간섭을 않고 어른처럼 키웠습니다. 얘들이 중학생이 되면 일주일에 얼마씩 용돈을 주고 그걸로 학용품을 사건 만화를 보건 일체 간섭을 안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아이들도 어려서부터 부모에게 할 말은 하고, 금전 관리도 잘하는 편입니다.

      

   5. 경인약국 앞에서 마지막 노점 생활


    덧버선으로 재미를 보다가 6개월 정도 지나니 덧버선을 파는 사람이 하나 둘 생기기 시작하여 1년 지나서는 집집마다 덧버선을 팔았습니다. 다른 걸 해야 되겠다 싶어서 경인약국 앞에 노점 자리를 얻어 업종을 바꾸어 메리야쓰, 양말 등을 팔기 시작하였습니다.


   노점도 급수가 있습니다. 정해진 자리도 없이 아무데서나 하다가 가게 주인, 시장 경비, 시청 직원에게 쫒겨다니는 사람도 있고, 시장통 한가운데나 거리에서 일찍 자리잡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가게 주인에게 돈을 주고 안정적으로 장사하는 노점이 제일입니다. 가게 주인들은 앞에 노점이 있으면 몇 푼 자릿세를 받을 수 있지만  장사에 방해가 되서 더 손해라고 생각하여 노점을 잘 안 줍니다.

   경인약국 주인은 사람이 좋아 약국 앞에 노점을 세 개나 주었는데, 그 중 가운데에 있는 우리 노점 자리의 뒤쪽에 우체통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편지를 넣으려고 하면 좌판 때문에 불편할 것 같아 도와주었습니다. 1976년 겨울에 부천우체국장이 좌판이 우체통을 가리우니 노점을 중단하라고 통보하였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장사가 너무 잘 되어서 다른 장사꾼들이 우체국에 투서했던 것 같습니다. 그 후로 한 20여일은 낮에는 딴 데 가서 장사하고 밤에 덧버선을 담은 바구니만 들고 가서 몰래 팔았습니다.

   그 때 마침, 중3인 큰 아들이 인천 고입 연합고사에서 공동 수석을 하였습니다. 기자가 큰 아들에게 “나중에 뭐가 되고 싶으냐”고 물으니, “내무부장관이 되고 싶습니다.”하여, 기자가 “왜 하필 내무장관이냐”고 묻자, “부모님이 노점을 하는데, 우체통에 편지 넣기가 불편하다고 못하게 했습니다. 없는 사람들을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정일섭 교장선생님이 바로 부천우체국장에게 전화하고 기자도 우체국에 찾아가서 부탁하여 경인약국 앞에서 계속 노점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계속될수 있습니다. 김동섭 변호사가 올리는 즉시 퍼오겠습니다^^)

 

[독후감]                    어머님에 대한 생각

                                                                                     차남 김 의 섭  

   어머님이 쓰신 자서전을 보니 어머님의 인생이 주마등처럼 지나가는 느낌입니다.

   내가 알고 있는 어머님의 고생하신 모습 외에도 내가 알지 못했던 많은 인생의 역경을 이겨내신 어머님이 자랑스럽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린 마음에도 어머님이 늘 고생하시는 것이 죄송스러워 삐뚜로 나가지 않고 성실하게 살았던 것 같습니다. 어머님은 절대로 힘든 장사는 시키지 않으시려고 공부에 전념할 수 있도록 저희들을 독려해주셨습니다. 어머님은 노점을 하는 어려운 형편에도 ‘책을 산다’고 하면 언제나 돈을 주셔서 책은 원없이 보았던 것 같습니다. 

  

   인생의 진로에 대해서도 스스로 판단하게 해주셨고 아낌없이 뒷바라지를 해주셨습니다. 의대가 적성에 맞지 않는다고 인문계로 전환하여 다시 재수할 때도 지원을 해주셨고, 입시에 실패하여 다시 의대에 복학하고, 치열한 이념의 80년대에 학생운동으로 학교에서 제적된 후에 다시 공부해서 대학에 재입학하기까지 언제나 어머님은 제 편이었고 몸을 아끼지 않고 헌신적으로 뒷바라지를 하셨습니다. 

 

   아버님의 병수발과 손주들 시중으로 많은 고생을 하신 어머님께서, 이제 당신이 몸소 공부를 시작하여 검정고시로 3년 만에 12년 과정을 마치고, 고령에도 불구하고 젊은 사람들과 어깨를 같이하며, 방통대 유아교육과를 졸업하신 일은 너무나도 감격스럽고 자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머님의 인생이 담긴 이 책이 후손들에게 길이 사표로 남기를 바라며, 어머님이 언제나 지금처럼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시기를 불효자가 두 손 모아 빕니다.

 

[독후감]                      칠순과 자서전 발간을 축하드립니다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딸 (김 선 희)

 

   어머니의 칠순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어려서는 굉장히 어렵고 무서운 엄마였습니다. 엄마의 눈을 똑바로 쳐다본 적이 별로 없었던 것 같습니다. 엄마라고 부르며 응석을 부려본 기억도 별로 없습니다. 대학에 다닐 때 제가 ‘어머니’하고 부르는 것을 보고 어떤 아주머니께서 며느님이냐고 해서 그 때부터 엄마라고 불렀던 것 같습니다.


   어머님은 자식에 대한 욕심이 많으신 분이십니다.

   중학교에 다닐 때 반에서 1등을 하고 자랑스럽게 집에 갔더니 어머니는 반에서 1등을 할 수 있는 얘가 왜 전교에서 1등을 못하냐고 야단을 치셨습니다. 국어, 수학을 100점 맞아도 영어를 95점 받아오면, ‘왜 영어는 국어, 수학처럼 못하냐’며 야단 치시고 ‘너는 욕심이 너무 없어서 발전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 당시에는 왜 칭찬에 그렇게 인색한지 서운하기만 하였습니다만 지금 생각해보면 자식들에 대한 믿음이 커서 더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저를 보고 ‘열심히 산다, 힘이 넘친다’고 하지만 저는 한 번도 어머니 반에 반도 따라간다고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자서전의 내용은 제가 모르는 부분이 더 많습니다.

   그만큼 어머니의 힘들었던 삶을 제가 외면했거나, 혹은 철저히 저를 공주로 키웠거나 둘 중 하나겠지요. 물론 후자에 더 가까운 것 같습니다.

   나름대로 서운했던 점도 많았지만 그래도 남녀 차별이 있던 그 시절에 아들, 딸 구별하지 않고 공평하게 키우셨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제가 두 아들을 키우고 있습니다. 너무나 사랑스러운 아들이지요.

   그러나 이 사랑을 어떻게 애들에게 표현해야하는지는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과연 제가 우리 부모님처럼 잘 키울 수 있을지 자신이 없습니다.


   어머니에게는 가끔 ‘자식들이 공부 잘 해줘서 고맙지’ 하고 유세한 적도 있지만, 어머니의 높은 교육열과 정성이 없었더라면 지금의 저는 없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나이 40이 되니 세상살이 특별한 것이 없는 것 같습니다.

   평범한 삶 속에 진리가 있음을 깨닫는 나이인 듯합니다.


   70세가 되도록 건강하게 스스로 인생을 개척하며 사시는 어머니가 존경스럽습니다.

  나도 70세가 되어도 새로운 것에 도전 하면서 자식들에게 의존하지 않으며 즐겁게 살 수 있을지 아직은 자신이 없습니다.

  하지만 어머니의 딸이니 그래도 반은 따라가지 않을까요?


   어머니의 또 다른 모습을 기대합니다.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십시오.


[독후감]                                 어머니의 품

                                                                                                   넷째  김 정 섭

 

    아버지, 어머니라는 이름은 누구에게나 특별하고 소중합니다.

    부모님도 원래 이름이 있지만 자식에게는 아버지, 어머니라는 이름으로만 기억됩니다. 어떤 힘든 순간에도 미약하지만 기억이 날 듯 안날 듯 어머니의 품을 기억하고 젖 냄새를 느끼고 살아갑니다. 

   저 역시 부모가 되어 아들로부터 아버지라는 이름을 얻었습니다.

  이 글을 통해 아버지, 어머니의 일생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제 자신이 자식들에게 어떤 모습의 부모인가도 생각해 보았습니다.


   어머니는 여느 어머니처럼 당신께서 이루지 못한 꿈을 자식들이 이루었으면 하는 소망을 갖고 살아오셨습니다. 자식에게 헌신하는 모습만이 아니라 스스로 노력하고 이루어 나가는 과정을 통해 자식들에게 더 큰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어머니는 소망을 이루었을 때의 성취감 못지 않게 그것을 이루는 과정의 즐거움을 알고 누리는 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삶의 여정이 힘들 때도 있었지만 과정을 즐기셨습니다. 


    어머니께서 보여주신 삶에 대한 열정과 도전 의식은 우리 자식들에게 살아가는 힘으로 주어졌고 가장 소중한 자산이 되었습니다.

   어머니가 이루신 많은 소망들, 그리고 지금도 노력하시는 모습을 본받아 저의 아들들(하민, 민우)에게도 그런 부모의 모습으로 살아가고자 합니다. 


    훗날 어머니가 백세가 되고 저는 지금 어머니 나이가 되었을 때 저의 모습은 어떠할까, 어머니의 모습은 어떠할까를 생각하며 즐거운 상상을 합니다. 어머니의 열정이 그때에도 식지 않았으면 좋겠고, 저와 형제들도 어머니처럼 이웃과 자식들에게 귀감이 되는 부모의 모습으로 살고 있기를 소망합니다.


   아버지 어머니와 우리 가족들에게 주어진 축복이 앞으로 우리 사회와 이웃들에게 전해져서 모든 이들에게 소망을 나누어 주는 집안이 되었으면 합니다.

 

 


[편집 후기]                      어머님의 힘 = 자존심 

                                                                             장남  김 동 섭

 

   어린 시절 기억 속의 고향 장성 풍경은 주로 남당 마을 할머님 댁에 살던 시절인데, 다른 집보다 크고 앞마당에 갖가지 꽃나무, 뒤 텃밭에 감나무가 10그루가 넘고, 어머님이 소풍 때마다 한복을 곱게 입고 따라와서 부자는 아니라도 가난하다고 생각해 본 적도 없다. 부천에 이사 와서 다른 친구들처럼 축구공도 장난감도 없고, 운동화 대신 고무신을 신고, 친구들 집에 자주 놀러가면서도 친구들을 우리 집에 부를 수 없어서 비로소 가난하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 때문에 기죽지 않았다.

   어머님은 특히 장남인 나를 어려서부터 어른처럼 대우하고 “장사꾼 자식이라고 욕하니 옷을 항상 깨끗이 입고, 남에게 얻어먹지 마라”고 하는 정도가 잔소리의 전부였다. 우리 형제들이 가난에 움츠려들지 않았던 것은 어머님의 자존심이 우리를 감쌌기 때문인 것 같다.

   어머님은 어려서 게으르고 아무 것도 모르는 쑥맥이었다고 고백하시는데, 그 게으름의 열렬한 후원자였던 외할아버지의 사랑이 바로 자존심을 키워주고, 그 때 받은 가없는 사랑이 세상 풍파에 쓰러지지 않는 힘과 용기를 준 것이라고 본다.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 으레 그렇듯이 어머님은 누구에게 부탁을 하지 못했다.

  여러 가지 어려움을 주변의 물질적 도움 없이 당신 스스로 해결을 하다보니 강하게 사는 법을 저절로 터득하신 것 같다. 어머님은 속 좁게 내 자존심만 내세우는 사람은 아니었다. 당신처럼 자존심이 강한 사람들을 무척이나 좋아하고, 독립심이 부족하거나 시기심이 많은 사람들에게도 은근히 깨닫도록 기회를 주고, 그래도 깨닫지 못하면 내버려 두고 마음 깊이 상대하지 않았다.       

 

    어머님의 독특한 면은 사업가와 교육자로서의 모습이라고 본다. 

   사업가로서의 어머님은 비록 잘 되었을 때에도 시장 가게 1칸에서 장사한 정도지만 노점·행상을 할 때부터 품목 선택, 진열, 고객 및 종업원 관리 모든 면에서 혁신을 거듭하여, 요즘 말로 ‘블루오션’을 개척하였다. 자녀 교육 때문에 제조업 등 다른 분야에서 더 큰 능력을 보여주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교육자로서의 어머님은 자녀들을 믿고 간섭하지 않는 자유방임형이었으나, 장사에 바쁜 와중에도 잠시라도 짬을 내어 우리 형제들을 관찰하고 잘 · 잘못을 스스로 깨닫게 하였다. 중학생이 되어, “용돈이 1주일에 얼마면 되겠냐”고 묻길래, ‘하루 100원씩 700원’을 달라고 했다. 그 돈으로 학용품, 책, 차비까지 다 해결하고, 남아서 빵을 사먹건, 전자오락을 하건 잔소리를 듣지 않았다. 교회 중등부에 올라가서 용돈만으로 성경책과 찬송가를 살 수가 없어서 어렵사리 ‘찬송가 좀 사주세요’하고 한 마디 했지만 들은 척도 안해서 단식투쟁(?)을 한 적이 있다. 어머님은 찰밥을 맛있게 지어서 “맛있는 것을 못 먹으면 눈이 뒤집혀 죽는다는데 니 형은 어떡하냐”고 놀리셨다. 이런 경험들이 쌓여 부족한 용돈을 계획적으로 쓰고 남겨 저축까지 하는 방법을 터득하였다.     

 

  나도 이제 부모가 되고나니 의욕이 앞서서 아이들을 내 뜻대로 재단하려는 충동을 느낀다. 그래도, 이런 충동을 억제하지 못하면 아이가 어른이 되어서도 부모에게 의존하고 세상을 스스로 헤쳐나갈 힘과 용기를 갖추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머님이 사람을 좋아하여 장사를 그만 둔 지 오랜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과  좋은 인연을 가지고 있는데, ‘영광 아줌마가 왜 내 이야기를 한 줄도 안 썼을까’하고 의아하고 섭섭한 분도 있을 것이다. 원래 원고는 A4 용지에 연필로 또박또박 써서 90장이 넘었지만 편집하면서 정리하였다. 시시콜콜한 인생살이를 밝히는 것보다는 어머님의 공부에 대한 열정 등 인생관, 장사의 지혜, 자녀 교육 방침 등 공감할만한 부분만 남기고 다 삭제해달라고 부탁드렸다.

 

   여기에 미처 싣지 못한 재미있는 이야기도 꽤 많다. 도둑을 잘 잡기로 유명하였는데 그런 내용이 없어서 우선 몇 개라도 써달라고 하였다. 잔치에 맞추어 급히 책을 내다보니 아쉬운 점이 한 두가지가 아니고, 70세 인생을 90여쪽의 소책자에 집어넣다 보니 빠진 이야기도 많다. 다음에 보완할 기회가 있었으면 한다.    


   이 책을 얼핏 보면 어머님이 억척스런 승부사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어머님은 항상 지는 쪽, 손해보는 쪽을 택하고 때밀이 이야기처럼 남보다 항상 더 주었다. 당장은 지고, 손해보는 것이 나중에 진짜 이기는 길임을 번번히 보면서 감탄했다. 인생의 지혜로서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되지만 여기서 크게 부각되지 않았다.   

 

   부끄럽게도 어머님이 젊어서 만났다는 보살의 점괘처럼 우리 형제 중에 ‘큰 자식’이 아직은 없는 것 같다. 모름지기 ‘큰 사람’이라면 여름철 느티나무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어야 하는데, 다들 제 앞가림에 쩔쩔매고 있다.  


   끝으로, 이 자리를 빌어 부모님과 우리 자녀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보살펴 주신 모든 분들에게 깊이 감사드립니다.

 

 

제4장 영광스런 영광상회

                    [1977년 ~ 1993년]


    1. 부천에서 처음 마련한 우리집


   경인약국 앞에서 노점을 할 때에 이순영씨라는 계주를 알게 되어 일수계를 들었습니다. 제가 계에 드니 시장 상인들이 따라서 계에 들어 이순영씨는 항상 “영광 아줌마 때문에 먹고 산다”고 고마워하고, 돈이 필요하다고 하면 언제든지 돈을 빌려 주었습니다. 곗돈과 이순영씨에게 빌린 돈으로 185만원에 땡땡이 골목에 있는 무허가 기와집을 샀습니다. 남당마을에 살 때도 방 2개 짜리 집에 살았지만 작은 방을 광으로 썼고, 여기서 처음으로 두 아들한테 자기들 방을 주었습니다.

    처음으로 집에 세탁기도 들여놓고, 냉장고도 샀지만, 세탁기보다 더 흔했던 텔레비전은 사지 않았습니다. 어른들이 장사가 끝나고 밤 11시나 되어야 집에 들어가는데, 집에 텔레비전이 있으면 아무리 공부와 독서가 취미인 얘들이라도 텔레비전을 안 볼래야 안 볼 수가 없지 않습니까?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방에 가두어 두고 일하러 다녔지만 학교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그럴 수 없었습니다. 아이들은 아무리 순둥이라도 잠깐만 방심하면 사고를 당하고, 자칫 못된 친구라도 사귀면 영영 바로잡기가 어렵습니다. 부천에 이사 와서 막내가 군대 제대할 때까지 아이들과 시장에서 살았습니다.

   맹자 어머니는 시장에 살아보니 자식 교육에 좋지 않아 학교 옆으로 이사를 갔다고 합니다. 시장에는 술집도 있고 여인숙도 있어서 술취한 남녀들 못된 꼴도 보고, 낡은 집들 뿐이고, 골목도 더럽고, 하루가 멀다하고 이 가게 저 가게에서 싸워 대서 못 볼 것이 훨씬 많으니 맹자 어머니 생각도 맞습니다. 그렇지만, 한 번 생각해 보세요. 맹자 어머니가 맹자와 함께 학교 동네로 이사를 간 거지, 맹자 어머니는 시장에서 장사하고 맹자만 학교 옆으로 이사를 간 것은 아닙니다.

   자유시장에서 가게를 가지고 장사하는 사람들은 부자라서 대개 시장 바깥에 번듯한 양옥집도 있고 식모도 두고 하였지만 자식 교육에 성공한 사람이 별로 없었습니다. 시장 동네가 더럽지만 우리 부부는 항상 아이들과 같이 살거나 5분 거리의 가까운 곳에 아이들 방을 얻어 주었습니다. 일이 바빠 아이들 방에 잠깐 들러 볼 수밖에 없지만 조금만 관심을 보여도 아이들은 잘 비뚤어지지 않습니다. 

   교육을 생각한다면 백해무익한 텔레비전을 집에 두어서는 안됩니다. 가게에는 오래 있다가는 단골 손님들이 많아서 텔레비전이 필요했지만, 집에는 안방이건 아이들 방이건 막내가 대학에 들어갈 때까지 텔레비전을 두지 않았습니다.


   땡땡이 골목 집은 남당마을의 할머니 집보다 훨씬 작았지만 방은 더 많아서 외딴 방은 세를 내주었습니다. 남편 사업이 잘 안되어 힘들어하던 이희정이네 식구들이 세를 들어왔습니다. 아이들 밥도 해주고 돌봐달라고 부탁하고 무상으로 세를 주었습니다. 셋방 생활 내내 지긋지긋하게 주인들한테 시달렸던 터라 세들어 사는 사람들한테 싫은 소리 한마디 안했습니다. 셋방살이 기억 때문이 아니더라도 잘 때나 집에 들어오니 잔소리를 할 수도 없었습니다. 

   

   2. 영광상회를 열다


   부천에 올라온 지 6년만에 자유시장에 가게를 전세 550만원에 얻어서 ‘영광상회’를 개업하였는데, 장사가 잘되자 주인이 1년만에 전세를 1,000만원으로 올렸습니다. 동대문 평화시장에 단골로 다니던 경상도 출신 이광해 사장이 하는 가게가 ‘영광사’라서 우리도 가게 이름을 ‘영광상회’라고 했습니다.


   영광사 이광해 사장은 우연히 알게 되었습니다. 노점을 하면서 영광사에 내복을 사러 갔는데, 2,700원 어치 물건을 사고, 그 때 새로 나온 5천원짜리를 내놓았는데, 여점원이 물건을 싸주고 나서 7,300원이나 주었습니다. 2,700원 어치 물건만해도 머리에 간신히 올릴 정도였으니 5천원은 큰 돈이었습니다. 종업원이 바쁘다보니까 역시 새로 나왔던 1만원과 착각했던 것입니다. 5천원을 내주면서 “아가씨, 아까 5천원 냈어요. 다음부터는 실수하지 마세요”하니, 사장이 “이런 사람 처음 봤다”며 어쩔 줄 몰라 했습니다. 한 번은 돈이 없어서 영광사에 가서 금반지를 내놓고 외상으로 물건을 달라고 하니 이사장이 “장사를 안하실라면 몰라도 하실 것이면 그냥 가져가고 다음에 돈을 갖다 주세요”하고, 다음부터 무시로 외상거래를 했습니다.      

   영광상회를 개업하고, 매일 아침 평화시장으로 물건을 도매하러 다니는 것은 남편 책임이고, 저 혼자서 가게를 보았습니다. 남편도 물건을 사오고 나서 가게를 같이 봐주지만 손님이 농담을 하거나 뭘 물어봐도 대꾸도 잘 않고 가격도 딱 받을 금만 부르고 손님이 깎아달라고 해도 깎아주질 않았습니다.

   장사에 이력이 붙다보니 손님 얼굴만 보아도 뜬골(드문드문 오는 손님)인지, 단골이 될 사람인지 금방 알 수 있었습니다. 뜬골에게 많이 남기고 단골이 될만하면 조금 남겨야 합니다. 이 손님이 깎겠다 싶으면 1000원 받을 것도 1200원 불러서 100원이나 200원을 깎아 팔았는데, 첫 인상이 틀린 적이 거의 없습니다.

 

  가게 손님이 늘자, 많으면 하루 4명까지 좀도둑을 잡았습니다. 가게마다 도둑이 없는 데는 없습니다. 여러 손님이 오면 한 손님을 상대할 수밖에 없는데, 그 틈을 이용하여 옷이나 가방, 아이를 업은 포대기 속에까지 물건을 감추어버립니다. 장사를 오래하다보니 얼굴만 보고도 손님이 구경만 하러 왔는지, 물건 사러 왔는지, 도둑질 하러 왔는지 짐작이 되었습니다. 손님 눈빛이 이상하면 다른 손님을 상대하면서 몰래 살펴보다 보면 훔치는 현장을 보게 되거나 미처 못 보았더라도 행동거지가 어색합니다. 팔을 허리에 꽉 붙이거나, 이상하게 튀어나온 부분이 있거나, 하다 못해 주둥이가 열린 가방이라도 있습니다.


   한 번은 어떤 아가씨가 구경하다가 나가는데, 분명히 훔쳤다고 생각되지만 어디 감췄는지 알 수가 없는데, 팔을 몸에 붙이고 걸어나가는 것이 이상해서 뒤에서 팔을 잡아당기며 “아가씨가 어깨를 쫙 펴고 다녀야지요” 하니, 옷 속에서 우리 가게와 다른 가게 2군데에서 훔친 물건까지 한꺼번에 바닥에 떨어졌습니다.

   또, 한 번은 손님이 여럿 있는데, 여중학생이 들어와서 모르는 척 살펴보니 브라자 속에 물건을 집어넣는 것을 보았습니다. 다른 손님한테 “도둑질하다가 나한테 걸린 사람이 한 둘이 아니에요. 여자가 창피한 줄도 모르고 브라자에까지 물건을 감추는 사람도 있대요. 그냥 조용히 내놓고 가면 모른 척하지만 가지고 나가면 다시는 도둑질 못하게 망신을 줘버려요”하고 말하였습니다. 그 여학생은 자기 이야기라는 것을 알고 몰래 물건을 놓고 나갔습니다. 얼마 후에 단골 아줌마가 딸을 데리고 와서 “얘가 우리 딸이요. 사람 많은 데서 면박을 안주고 빙빙 돌려서 말하고 보내줘서 정말 고맙소”하고 인사를 했습니다.

    언젠가는 아침에 가게를 열고 있는데, 자매가 와서 잠시 구경을 하다가, 어떤 물건을 있는지 묻지도 않고 “물건 살 것이 없네요”하고 그냥 나갔습니다. 틀림 없이 도둑이다 싶어서 돈통(가게 천장에 매달아 놓은 플라스틱 쓰레기통)을 보니 아침에 장사하려고 넣어둔 돈묶음이 없었습니다. 바로 자매를 ?i아가서 “돈 내놔라”고 하니, 그 중 언니가 “이 아줌마가 생사람 잡네. 경찰서 가서 확인하자”고 큰 소리를 쳐서, “장사해야 되니 파출소에 못 간다”면서 언니 가방을 무조건 나꿔채고 뒤져보니 고무밴드로 묶어 돈통에 넣어 두었던 돈뭉치가 묶인 그대로 나왔습니다.


   우리 가게는 폭이 3미터밖에 안되지만 노점을 하면서 시장 경비, 보건소, 소방서, 시청, 파출소 등 많은 사람들한테 ?i겨 다니고, 파출서로, 부평경찰서로 잡혀 들어가 구류까지 살던 생각이 나서 가게 앞 한쪽은 노점을 주었습니다. 노점 아저씨는 매일 도둑을 잡는 걸 보고 ‘여형사’라고 감탄 했고, 앞 가게 아저씨는 “도둑 들 때가 장사가 잘 되는 것이다”고 위로 했습니다.


   맨 처음 도둑을 잡았을 때에는 “왜, 도둑질을 하냐”고 하니, “돈은 없고 갖고 싶어 그랬어요” 하면서 울길래 불쌍한 생각도 들고 해서 물건을 주고 “그럼, 그냥 달라고 하지. 다음부터는 절대 이런 짓 하지 마라”고 하고 보냈습니다.

   다른 가게 물건까지 훔친 도둑을 잡아 그 가게 주인에게 알려주니(어느 집이나 다루는 물건에 특징이 있어서 물건만 봐도 어느 가게 물건인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 가게에서 파출소에 신고를 하였습니다. 파출소에서 오라가라 하고 오빠라는 사람이 찾아와서 “메리야쓰 한 개 집어 넣었다고 젊은 아가씨 신세를 망치고, 아줌마 어디 두고 봅시다”하고 눈을 부라리니 그것도 못할 짓이었습니다.

   도둑이 잡히면 물건을 뺏고 등이건 손이건 닥치는대로 한 대 때리고 내쫓기도 하였는데, 큰 아들이 ‘도둑질도 잘못이지만 사람 때리는 것도 잘못’이라고 하고, 다른 가게 주인들이 도둑을 때리는 것을 옆에서 보기에도 좋지 않고 도둑도 줄지 않았습니다. 


    매일 도둑을 잡아도 도둑이 좀 채 줄지 않았습니다. 도둑질 하는 사람이 거의 젊은 아가씨나 새댁이라서 ‘도둑들끼리 서로 통하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도둑은 못 잡아도 손해지만 잡아도 손해입니다. 한 번 잡히면 다시는 그 가게에 오지 않게 됩니다. 어떻게 하면 도둑을 막을까 곰곰 생각해보니 이익 보려고 하는 짓이니 손해를 주어야겠다고 생각하고, 도둑을 잡으면 정가대로 쳐서 돈을 다 받고 물건을 주어 보냈습니다. 그렇게 하니, ‘도둑’들 사이에 영광상회가 소문났는지 어쩐지 모르겠지만 도둑이 금새 사라졌습니다.

     

   3. 우리 가게를 사게 되다


   영광상회에서 한 3년 장사하면서, 구색을 늘리다보니 가게 좌판이 옆 가게 앞까지 둘러싸게 되었는데, 옆 가게는 주인네 동생이 하고 있었습니다. 동생이 불평해서인지 가게 주인이 자신이 장사한다면서 가게를 비워달라고 하여, 단골 생각도 해서 가까운 데에 가게를 알아보니 5천만원이나 달라고 하였습니다. 1980년 당시에 돈 5천만원은 큰 돈으로서, 지방 소도시였던 부천 어느 곳이라도 그 돈으로 논밭을 사두거나 나중에 번화가가 된 땡땡이 골목에 제대로 된 집이라도 사두었다면 갑부까지는 아니라도 큰 부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도, 가게에서 번 돈으로 얘들을 전부 대학까지 보내었으니 가게를 산 것이 백 번 잘한 일입니다.

   가게 뒤에는 방이 하나 있고, 2층에는 판자 바닥으로 만든 창고가 있었는데, 40년이 넘은 낡은 건물이라 비만 오면 여기저기 비가 새서 가게에 누전사고가 나기까지 했습니다.


   가게 계약을 하고 나니, 남편은 “안집(무허가 주택) 날라 간다”고 화를 냈습니다. 땡땡이골목에 있는 집을 700만원에 팔고, 가게 보증금 1000만원을 받고, 여기 저기 빌려준 돈을 받고 하여 2,700만원이 되었습니다. 나머지는 은행에서 대출받으려고 생각했는데, 점포는 저당대출이 안된다고 하여 깜짝 놀랐습니다. 고민하다가  ‘영광사’ 이광해 사장을 찾아가서 2천만원만 빌려달라고 하니, 이 사장은 선선히  “천만원만 주는 걸로 합시다”해서 1,000만원을 2부 이자로 빌리고, 양말가게인 공주상회에서 300만원을 빌렸습니다. 나중에 영광사 종업원 말을 들어보니 이 사장이 부천시청 앞에 새로 지은 집을 저당 잡히고 2부 5리로 쳐서 돈을 빌렸다고 합니다. 이 사장은 2년 후에 영광사 문을 닫았습니다. 장사를 그만 둘 생각이면서 손해를 무릅쓰고 돈을 빌려준 것을 보면 세상에 이 사장 같은 분은 둘도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가게 물건마다 일일이 가격을 크게 써붙이고(그 때에는 이런 모습이 보기 힘들었습니다), 재고 떨이를 하여 잔금 1,000만원을 마련하였습니다.

   잔금은 간신히 치렀지만 새 가게에 물건을 채울 돈이 없었습니다. 또, 영광사에 찾아가서 ‘물건을 1천만원 한도로 채워 달라’고 부탁해서 받았습니다. 이 사장이 개업식에 오셔서 마침 가지고 있는 돈을 드리니, 이 사장은 “이 돈은 이자로 합시다” 해서, 아무리 염치 없는 사람이지만 “이자 나가는 것은 이자로 따로 쳐드리고, 이거는 물건 외상값입니다”라고 했습니다.

   몇 달 장사를 하다가 추석을 맞았는데, 물건이 없어서 영광사에서 다시 천만원어치 물건을 외상으로 가져다가 영광사가 문을 닫고도 분할로 갚았습니다. 이렇게 한 번 맺은 작은 인연으로 저를 끝까지 믿고 밀어준 이광해 사장의 은혜는 영원히 잊지 못할 것입니다.


   평화시장에 도매 거래하던 가게 중에 영광사나 공주상회 말고도 대명상사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대명상사는 이대근 사장이 하던 타월집이었는데, 남편을 아버지처럼 생각하고 우리가 빚이 많은 것을 알고 장사하는 내내 외상으로 물건을 주고, 주는대로 돈을 받지 외상값 독촉을 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큰 아들이 대학에 입학하자 이사장은 아들에게 양복 한 벌을 해주기도 하였습니다. 

    4. 종업원 관리 요령


   가게를 사고 나서 점원을 두기 시작하여 많을 때에는 식모까지 5명이나 되는 종업원을 두기도 하였으니 시골 여자가 참 출세했습니다. 작은 가게에 점원을 아무리 많이 두어도 제 밥벌이는 다들 했습니다.

   종업원들은 출퇴근 하는 사람 빼고는 낮에는 가게를 지키고 밤에도 가게 쪽마루나 딸과 같이 잠을 자니 24시간 내내 우리 식구들과 같이 삽니다. 어려서부터 누구에게도 굽히지 않고 살았는데, 점원은 무서워 했습니다. 점원들이 성심껏 손님을 대해서 돈을 벌어주어야 우리도 먹고 살기 때문입니다.

   자유시장은 매달 셋째 주 화요일에 정기휴일이고, 추석·설 명절 당일이나 그 다음날은 대부분 쉬는데, 정기휴일이건 명절이건 쉬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도 주인은 내 가게이니까 돈 버는 재미에 그렇게 하겠지만 종업원은 다릅니다. 가난한 시골 출신으로 중고등학교를 어렵게 졸업하거나 그것도 마치지 못한 처녀들이 가게에만 갇혀 있는 것을 보면 불쌍하기도 하고, 일에 재미가 없으면 손님한테도 정성껏 하지 않습니다. 자유시장 가게 주인들은 종업원들에게 한 달에 2일, 평일에 쉬게 합니다. 처음에는 평일날 쉬게 하였는데, 평일날 마땅히 갈 데가 없고 회사 다니는 친구 만나기도 어렵다고 하길래, 자유시장에서 처음으로 종업원들에게 1달에 4번 토, 일요일 중에 휴일을 주었습니다.

   다른 가게 주인들이 어느 날 저를 부르더니 “영광상회는 왜 직원들을 매주, 그것도 하필이면 장사가 잘되는 토요일, 일요일 날 쉬게 하냐”고 공격하였습니다. 제가 “하나만 알지 둘은 모르네요. 직장 다니는 남녀들이 토요일, 일요일 쉬는데, 그 때 같이 쉬어야 연애도 하고 친구도 만날 것 아니에요”하고 대꾸해 주었습니다.

   보통 가게 주인들은 종업원에게 계 가입을 권하는데, 계는 은행보다 이자가 많지만 잘못하면 목돈을 날립니다. 종업원들한테 계를 권하지 않았고, 계를 들어주지도 않았습니다. 그 대신에 종업원이 들어오면 종업원 이름으로 3년짜리 100만원 은행 적금을 들어주어 1년을 못 넘기면 한 푼도 안주고, 1년을 넘기면 중도해지 해서 돈을 주었습니다. 모든 것을 회사하고 똑같이는 못해도 퇴직금 비슷한 것을 흉내라도 내고 싶었습니다.

  

   오래 장사를 하다보니 눈치로 아줌마인지 아가씨인지 다 맞출 수 있지만 총각을 아저씨라고 부르거나 아가씨를 아줌마라고 부르면 듣는 입장에서 기분 좋을 수 없습니다. 반대로, 아저씨한테 총각이라고 불러도 듣는 사람이 꼭 기분 좋은 것은 아니고, 입에 발린 말을 하는 장사꾼이라고 불신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종업원들에게는 잘 아는 사람이 아니면 무조건 ‘손님’이라고 부르라고 교육했습니다. 또, 종업원들에게 손님이 물건을 바꾸러 오면 우리 가게 물건이 아니더라도 교환해주라고 시켰습니다.

    

   종업원들을 우리 딸처럼 대했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온 식구가 종업원들과 한 상에서 식사하고, 종업원과 딸이 같은 방을 쓰게 하였습니다. 객지에서 돈벌겠다고 고생하는 것이 안쓰럽고, 옛날 다 못한 공부에 대한 한이 있어서 손님 없을 때 단어 공부하면 칭찬하고, 교재비, 학원비를 챙겨주기도 했습니다.


   자유시장에서 영광상회 종업원들은 가게에 오래 있고, 손님하고 싸움 안하고(절대 싸우지 못하게 했습니다), 장사 잘하기로 소문났습니다.

  

   5. 장사하는 요령

     

   가게는 전기세가 많이 나오더라도 무조건 밝고 깨끗해야 합니다. 손님은 꼭 불나방 같아서 같은 가게라도 불을 밝게 켠 곳으로 몰리게 마련입니다.


   장사는 손님을 편하게 해주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가게 주인은 너무 말을 많이 하거나 손님에게 자꾸 말을 시켜도 안되고, 손님이 어떤 물건을 찾고 있는지 잘 살펴 봐야 합니다.


   아무리 손님이 화를 나게 해도 싸우면 가게 주인이 무조건 손해입니다. 가게에서 싸우면 다른 손님이 들어오지 못하고, 혹시 단골이 지나가다가 싸우는 모습을 보면 손님과 싸우는 가게 주인을 좋게 볼 리가 없습니다.

   그래도 어거지를 쓰면서 물건을 바꾸려는 손님하고는 싸울 수밖에 없을 때가 있습니다. 한 번은 어떤 손님이 다른 가게에서 산 물건을 바꾸러 와서 더 비싼 물건으로 바꾸어 나머지 돈을 받았는데, 얼마 후에 그 손님이 다시 와서 우리가 비싸게 받았다면서 깎아 달라고 했습니다. 제가 “우리 물건 주세요”하고, 아까 받았던 다른 가게 물건과 차액을 내주고 “물건 안 팔아도 되니 가세요” 하니까 우리 가게 물건을 다시 내놓으라고 하면서 어거지를 부리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상대도 하지 않자 “우리 아들이 연대 법대를 다닌다. 가만 안 두겠다”고 악을 써서, “서울법대도 있고  고대법대도 있는데, 왜 연대법대에 다닌대요?”하고 약올렸습니다.

       

   손님이 물건을 안사고 구경만 하고 또, 귀찮게 이것 저것 물어보더라도 내보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손님들은 주인 혼자 있는 가게는 잘 안들어오는데, 그 이유는 장사가 잘 안되는 가게로 보이고, 물건을 찬찬히 살펴보려고 해도 주인이 귀찮게 할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속옷 가게는 수백 가지 품목을 취급합니다. 면티, 팬티, 브라자, 내복, 양말, 스타킹은 기본이고, 잠옷, 저고리, 치마, 모자, 수건, 엑서사리 등등 끝도 없지만 5평 밖에 안되는 가게에 물건 넣을 욕심만 부리다보면 나중에 재고 때문에 골치 아프게 됩니다. 여러 품목 중에도 유행에 따라 잘 팔리는 품목이 한 두가지 있고, 이문(이윤)이 많이 남는 것, 적게 남는 것도 있기 마련이지만 장사하는 사람들끼리도 비밀입니다.

   평화시장에 물건을 하러 다니는 것은 남편 책임이었지만, 저도 유행을 알려고 새벽에 자주 평화 시장에 갔습니다. 유행 품목 중에도 부천에서 팔릴 만한 것만 골라 사오지만 가게에는 진열하지 않고 다른 물건과 섞어 놓았다가 손님이 물건을 찾으면 내줍니다. 잘 팔린다고 잘 보이는 곳에 진열하면 금방 다른 가게에서 따라합니다. 보통 철(계절)이나 유행이 지나면 도매시장에 반품이 쏟아지는데, 영광상회는 반품이 없는 가게로 평화시장에서 유명하였습니다. 부천 자유시장에서 처음 시작했던 품목은 메이커(쌍방울, 백양) 메리야쓰, 잠옷, 모자, 기념타월 등등 셀 수 없이 많았습니다.


   한 번은 어떤 중년 부인이 모자를 사러 왔었는데, 찾는 물건이 없다고 하여, 다른 가게를 소개해주었습니다. 며칠 지나서 그 손님이 그 가게에서 산 모자를 들고 우리 가게에 찾아와서 “하자가 있는데 안 바꿔준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소개한 잘못이 있으니까 우리 물건으로 바꿔가세요”하고 바꿔주었습니다. 그 후, 그 손님은 연세 지긋한 점잔은 남편과 부부 동반으로 가게에 와서 한 번에 2, 3개씩 모자를 사간 것만도 여러차례 였습니다. 어느 날 “모자를 참 좋아하시나 봐요”고 물어보니, 사모님이 “이 이가 대학 교수님인데, 다른 교수님들이 교수님 모자를 보고 참 멋지다면서 사달라고들 한대요”하고, 그 교수는 “영광상회에 와서 구경도 하고 이야기도 하면 생활에 활력이 생겨서 자주 찾아옵니다”고 하였습니다. 다른 사람 부탁으로 물건을 사다 주는 것도 고마웠고, 초등학교 나온 장돌뱅이가 대학 교수님에게 활력소가 되다니 영광이었습니다.

 

   6. 아이들 중고교, 대학 진학


   돈 많은 사람이나 집 좋은 사람은 부럽지 않고, 공부 잘하는 자식 둔 사람들만 부러웠습니다. 크게 돈벌어야겠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고, 먹고 살고 얘들 공부를 잘하도록 여건을 조성해주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들들은 다 재수하여 대학을 가고, 고시공부도 하고 하여 뒷바라지를 하다보니 저축을 하려고 해도 할 수가 없었고 장사를 쉴 수도 없었습니다.

   가게를 하는 동안에 자식들과 어디 구경 한 번 가 본 적도 없고, 자유시장이 쉬는 매달 셋째주 화요일에도 단속하는 시장 경비들과 숨바꼭질 하듯이 가게 셔터를 반쯤 올렸다 내렸다 하면서 장사를 하였습니다. 딱 한 번 박대통령이 돌아가셔서 발인할 때는 가게 앞에 검정 리본을 단 태극기를 세우고 가게 문을 닫았습니다. 야당 선거운동을 해봐서 김대중이 빨갱이가 아니고 똑똑하고 훌륭한 사람이란 것은 잘 알고 있었지만 박대통령이 논 값만 제대로 쳐주었으면 우리 식구가 부천에 올라왔겠습니까? 논을 뺏다시피 하여 농촌에서 ?i아낸 덕분에 얘들이 공부 잘하고 있으니 진심으로 애도하는 마음으로 평생 딱 하루 문을 닫았습니다.  

  

   내가 공부를 열심히 해서 서울대 가는 것보다 자식을 서울대 보내는 것이 훨씬 어렵습니다. 공부 습관은 초등학교에서 다 만들어집니다. 어려서부터 책읽기를 좋아하고 스스로 공부하는 습관을 들이지 않으면 중고등학교 때, 부모가 야단치고 눈물을 흘리고 해봐야 힘만 들고 부모 생각과 달리 더 비뚤어지기도 합니다. 얘들이 중학교에 올라가고부터는 어떻게 학교 다니는지도 잘 몰랐지만 초중고 12년을 모두 개근하였습니다.


   첫째는 어려서부터 수재 소리를 듣고 자랐고 초등학교 3학년 때 아이큐 검사에서 성산초등학교에서 아이큐 검사를 한 이래로 최고 점수가 나왔다고 하여 더욱 조심스럽게 어른처럼 대우해주었습니다. 대학입시에 실패해서 재수를 하고 학력고사에서 전국 문과 수험생 중 100등을 해서 서울대 법대에 진학을 했습니다.

   둘째도 착실하고 공부도 잘 했지만 고3때 독서실 생활을 할 때부터 건강이 나빠져서 재수했지만 서울대 생물학과에 실패하고 후기로 한림대 의대에 전 장학생으로 입학하였습니다.

   셋째는 통솔력이 있어서 초등학교 3학년 때 전학 와서 바로 반장을 했고, 중학교에서도 3년간 내리 반장을 했습니다. 셋째가 부천여고에 진학하자, “이제는 공부해야 하니 반장 그만 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권했습니다. 고등학교 졸업할 때에 전체 1등상(장미대상)을 받았지만, 학력고사에서 실수를 많이 하였습니다. 담임선생님은 그래도 선희는 무조건 서울대 가야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선희는 “오빠들 재수하는 것 옆에서 보는 것만 해도 지쳤다”며 연대도 위험하다고 경희대 치대에 원서를 넣었습니다. 

   막내는 어려서 언니네 집에 떼어놓았다가, 우리 집에서 초등학교에 입학했지만 영광상회 개업, 가게 구입 등으로 정신이 없는데다가 형들 입시까지 겹쳐서 신경을  거의 못 썼습니다. 막내는 손재주가 좋아 혼자 라디오나 로봇을 조립하기를 좋아하고, 벽시계나 라디오 같은 가전제품이 고장 나면 형들보다 더 잘 고쳐서 ‘공박사’라고 불렀습니다. 공구를 잘 만진다는 말이지만 공부박사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었습니다. 

    막내가 중학교 3학년이 되니 공부하러 간다며 독서실비를 받아가곤 하였지만 성적이 제자리 걸음이라 이상한 생각에 하루는 몰래 뒤를 따라가 봤습니다. 자꾸 뒤를 돌아보길래 저도 몰래 숨으며 따라가다가 어느 골목 앞에서 놓쳤는데, 거기에  오락실이 있어서 들어가 보니 막내가 정신없이 게임을 하고 있었습니다. 뒤에 한참을 서있어도 모르길래 등을 툭 치니 놀라서 일어났습니다. 형들한테 물어보니 막내는 50원만 넣으면 1시간이고 2시간이고 게임을 해서 오락실 주인이 사람이 없을 때는 놔두고, 사람이 많으면 돈을 줘서 내보낸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걸 알고도 부모에게 말을 안해 준 형들만 야단쳤습니다.

   고등학교에 진학할 때에 인문계나 갔으면 좋겠는데, 막내는 전국적으로 이름난  명문인 부천고가 아니면 안간다고 했습니다. 학교 성적상 좀 부족하여 형들까지 나서서 말리는데도 막내 고집을 꺾을 수가 없어서 ‘고등학교 재수하는 자식까지 나오겠구나’ 하고, 선생님을 9번이나 찾아가 졸라서 간신히 원서를 썼는데, 그만 합격하였습니다. 큰 얘가 공업중학교에 안 간다고 할 때부터 ‘나는 시대를 잘 모르나보다’ 싶어서 상급학교 진학은 전적으로 아이들 뜻에 맡겼습니다.

   막내는 명문고 진학에 성공했지만 고등학교에서도 요령만 부렸습니다. 형이나 누나는 “5만원 주세요” 하더라도 아껴쓰는 것을 알기 때문에 10만원도 주었지만, 막내는 몰래 오락실이나 다닐까봐 달라는 만큼 주지 않았습니다. 막내는 가게 돈통이 수북해지는 저녁 때면 무릎을 꿇고 손을 얌전히 무릎 위에 올리고 “어머님, 요새 장사가 어떠십니까”하고 눈치를 봅니다. 그 뱃속을 다 아는지라 “전두환 대통령 때가 장사가 제일 잘 됐고, 요새는 장사가 잘 안돼. 내일 물건도 많이 사와야 한다.”고 대답을 합니다. 막내가 “어머님, 어려우시더라도 5만원만 주세요” 하면 3만원만 주고 “장사도 안되니, 너도 좀 도와줘라”고 해도 일어날 줄을 모릅니다. 1만원을 더 주면서 “아껴 써야한다”고 하면, 막내는 부스스 일어납니다. 

   막내는 암기과목 성적은 부족했지만 수학만큼은 부천고에서도 알아주는 최상위권이었습니다. 막내는 고3이 되서야 공부를 시작하여 고등학교 2년을 허송세월하고도 광운대학교 컴퓨터공학과에 진학하였습니다.

     

   아들들은 야당운동을 한 우리 부부를 닮았는지 모두 학생운동을 했습니다.

   첫째는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미제 청바지 양 무릎이 다 찢어져 집에 왔길래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어보니 데모하다가 경찰에 ?i겨서 길도 없는 산을 3개인지 4개인지 손으로 발로 기어서 도망가다가 찢어졌다고 했습니다. 말린다고 안할 위인도 아니라 “다음에 데모할 때는 맨 앞에도 맨 뒤에도 서지 말고 가운데에만 있어라”하고 부탁했습니다. 가운데에서는 잘 잡혀가지 않는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큰 아들은 집 앞 와이엠씨에이(부천 YMCA)에 가서 살고 고시공부를 안해서, 창피한 마음에 사람들이 ‘큰 아들 뭐하냐’고 물어봐도 못들은 척 했습니다.

   둘째는 운동권의 골수분자였습니다. 한림 의대에 장학생으로 들어가고 기숙사에서 생활하게 되어 어려서부터 착실한 성격이니 잘 하겠거니 하고 믿었습니다.

1학년을 마치고 휴학하고 대학 입시를 다시 본다더니 매일 친구 만나고 딴 짓만 하다가 복학하였습니다. 기숙사가 불편에서 방을 얻어 나가겠다고 해서 그러라고 했는데, 하숙집, 자취집이 자주 바뀌고 전화도 잘 되지 않았습니다. 의섭이가 등록금을 보내달라고 해서 보내 주고, 얼마 후에 학교에서 제적통지서가 날라왔습니다. 깜짝 놀라서 언니, 동섭이와 함께 춘천의 자취집에 찾아갔지만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 학교에 가보니 대의원회 의장이라고 하여 제법 의장실도 있는데, 거기에도 없고 학생들이 의섭이를 못 만나게 막는 것 같았습니다. 포기하고 학교를 나오다가 우연히 반대편에서 올라오던 의섭이를 발견하여 “하고 있는 일이 있으니 한 달 안에 정리하고 틀림없이 집에 오겠다”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한 3개월만에 집에 왔지만 밖으로만 돌고 거의 집에 없어서 억지로 군대에 보내 버렸습니다. 의섭이는 입대하고 다시 시험보아 성균관대 경제학과에 입학하여 자식들 중에 대학 학번으로는 꼴찌입니다. 나중에 한림대에서 복학통지가 왔지만 의사 적성이 아니라면서 복학을 하지 않았습니다.

   막내는 용돈 받을 때만이 아니라 학생운동도 요령 있게 했습니다. 형들 말을 들어보니 탈춤 동아리 대표를 맡고 있다고 했습니다. 세브란스 병원에 문병갔다가 학생들이 데모하는 걸 봤는데, 돌던지기가 1진이고, 꽹과리, 북, 장고하고 탈춤 추는 학생들이 2진이고, 어깨 걸고 뛰어가며 소리치는 부대가 3진이던데, 2진은 경찰이 잡아가지 않았습니다. 방학 때 작은 시숙네 막내딸이 우리 집에 왔는데, 동생네 딸들하고 셋이서 막내한테 탈춤을 가르쳐 달라고 졸라서 저도 탈춤추는 걸 보게 되었는데 혼자보기 정말 아까운 걸 조카들이랑 같이 보니 다행이다 싶었습니다. 혹시 데모에 휩쓸릴까봐 2학년 1학기가 끝나고 “아파트 당첨되어 집안 형편이 어렵다”고 해서 군대에 보내 버렸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학과 친구들처럼 대기업에 입사를 못하고 고민하다가 학생운동을 하면서 알고 지낸 학과장 교수의 주선으로 ‘어드반테스트’라는 일본 회사에 들어가서 일본 본사에서 2년 근무하고, 지금도 회사에서 유능한 엔지니어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아들들은 학생운동을 하였지만 끝까지 운동권에 남지 않고 대학을 다 졸업하고 취직하였습니다. 부모가 학업에 대한 열정이 절실하고, 아픈 몸을 끌고 일하느라 고생하는 것을 옆에서 보고 자란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7. 평생 은사이자 은인인 형부


   우리 가족이 소사읍으로 이사온 것은 형부, 언니가 소사읍에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힘들거나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형부와 언니에게 가장 많이 의지하고 묻고 하였습니다.

   형부는 근검절약이 몸에 밴 사람이라서 ‘쪼쪼 전씨’(쪼잖한 전씨)라고 놀림을 받을 만큼 돈을 아끼는 사람이었습니다. 쪼쪼전씨도 우리 얘들에게는 돈을 아끼지 않고 바쁜 우리 부부 대신에 부모 노릇까지 해주었습니다. 막내를 오랫동안 봐주었고, 얘들을 놀이공원도 데려가고 비싼 과자도 사주고, 우리 부부가 사준 적이 없는 냉면을 사주기도 했습니다. 큰 얘가 고등학교 입학할 때에는 값비싼 전축을 사주고, 대학교 입학할 때는 자녀들 몰래 캐비넷에 감춰 두고 쓰던 일제 카메라를 선물로 주었습니다. 둘째가 재수할 때는 ‘너도 술을 알아야 한다’면서, 싸롱에 데려가 맥주를 사 주며 위로해 준 적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영광상회 가게를 구입하려고 계약을 했는데, 가게 담보로 돈을 빌릴 수 없다는 말을 듣고 형부에게 부탁 했습니다. 형부는 마침 소명학교 정문 앞에 큰 집과 상가를 새로 지어 돈이 없다면서 집을 담보로 쓰라고 했습니다. 염치불구하고 고맙게 쓰려고 하였는데, 언니가 “너라서 들어준거지, 영감은 평생 단 한 번도 집 담보로 돈을 빌려 쓴 적이 없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언니가 형부 볼 면목이 얼마나 없을까’하는 생각에 ‘영광사’ 이광해 사장에게 매달렸는데, 지금 생각해봐도 잘한 일입니다. 돈 거래 잘못하면 돈도 잃고 사람도 잃는다는 말이 있지만 친구나 친척을 상대로 이자를 받는 것도 못할 짓 입니다. 돈 때문에 어려워하는 친척, 친구에게는 한 달 굶지 않을 정도의 돈만 주고 그냥 잊어버리는 것이 좋습니다. 


   형부가 1990년경부터 잘 움직이지 못하더니 당뇨가 걸렸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당뇨에 쥐고기(말린 물고기가 아니라)가 좋다는 말을 듣고, 쥐덫으로 쥐를 잡아 바닥에 패대기쳐서(쥐약 먹은 쥐는 사람이 먹을 수가 없지요) 머리와 털, 내장을 정리해서 프라이팬에 구워 한 1년 동안을 매일 같이 언니에게 보냈습니다. 언니는 ‘새 고기’라고 형부에게 주니, 건넌방에 살던 형부가 건강이 좋아져서 밤에 안방에 들어오기도 한다고 좋아했습니다. 매일 그 모습을 보던 동네 아줌마가 “큰 아들이 고시공부하는데, 살생을 하면 안 좋을 수 있지 않냐”고 걱정하는 말을 해서 바로 중단했습니다. 아무리 세상에 좋은 형부지만 자식보다 크지 않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형부는 건강이 회복되었다가 쥐고기를 못 해드리고 얼마 후에 다시 건강이 나빠지더니 간암까지 왔습니다. 우리 가게 옆에서 건물을 새로 짓는다고 하여, 남편에게 이번에 같이 짓자고 해도 돈 걱정을 해서인지 대꾸도 안 해서 형부와 상의했습니다. 형부는 아픈 몸을 이끌고 건축 경험이 없는 우리 부부 대신에 설계도 봐주고 건축 감독도 해주었습니다.

   형부는 1996년 초여름 병원에 입원하였다가 혼수상태에서 집으로 모셔왔는데, 저녁에 집에 찾아가니 ‘영숙이’를 기다렸다는 듯이 정신이 없으면서도 웃는 얼굴로 눈을 감으셨습니다. 세상을 떠나며 웃는 사람을 그 때 처음 보았습니다. 

   

   8. 수영과 노래를 배우다


   장성에서부터 밤마다 새끼를 꼬아서인지 부천에서 무거운 생선을 이고 다녀서인지, 나이 40도 안 되어 팔이 저리고 밤에는 죽어버리곤 했습니다. 늘 무릎도 쑤시고 어지러워서 뇌신, 사리돈을 하루 2, 3개 먹어가며 버텨야 간신히 장사를 할 수 있었습니다. 평화시장에 물건을 하러 가면 계단을 수도 없이 오르내려야 하는데, 다리도 아프고 어지러워서 남편 손을 잡고서야 간신히 움직일 수 있었습니다. 몸이 안 아픈 데 없다보니 양방, 한방 병원을 찾아 부천으로 서울로 안 다녀본 곳이 없습니다. 충청도에 용한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듣고 괴산 박통장을 찾아갔더니 아픈 데에다 직접 넣으라며 가루약을 주었습니다. 한 1년을 어깨, 팔꿈치, 무릎 같은 데를 칼로 째고 약을 넣었지만 그 때 뿐이고 낫지를 않았습니다.


   목욕을 하면 그 날은 효과가 있어서 하루 걸러 목욕탕을 다니기도 하였습니다. 없이 사는 설움을 알아서 때밀이 아줌마에게 다른 손님이 7,000원 줄 때에 15,000원이나 주고 우유도 사주니, 서로 때밀이를 맡으려고 하였습니다. 목욕탕에 자주 다니고 한 번 갔다 하면 2시간이 기본이니 남편이 한 번은 “무슨 목욕을 1주일에 세 번이나 다니냐”고 심하게 역정을 냈습니다. 동생에게 하소연을 하니까 동생도 “맞아, 언니는 목욕에 병적이야”하고, 오히려 형부 편을 들었습니다.

   한동안 부천남초등학교 앞에 있는 한의원을 다녔는데 “침을 아무리 놔도 낫지를 않네요. 수영을 해보세요” 하고 권했습니다.

   손님들한테 ‘현대수영장’이 있다는 말을 듣고 나이 50에 수영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샤워를 하면 목욕하는 셈이고, 수영이 끝나면 같은 반 사람들하고 나훈아 노래도 같이 부르고 재미있게 다녀서 별명이 ‘무시로 형님’ 이었습니다. 나이 들어 처음 수영을 배워서 선생님이 시키는 동작을 따라 하기 힘들었지만, 잘하는 사람의 동작을 유심히 보고 흉내 내니 힘도 덜 들고 얼마 지나니 수영하는 모양이 예쁘다고 다들 손뼉치고 좋아 했습니다. 자유영부터 접영, 다이빙, 잠수까지 다 배우고 나니 6개월만에 잠수로 25미터를 가는 사람은 선생님과 저 둘 뿐이었고, 젊은 여자들도 따라올 생각을 못했습니다.

    수영을 하니 열 달만에 살이 13킬로나 빠지고, 어지러움증, 팔, 다리 저리는 것이 다 나았습니다. 제가 건강해진 것을 보고 수영장에 따라 나오는 시장상인들, 단골들이 많아져서 처음 수영장에 갈 때에는 총 5라인에 1라인당 수강생이 10명 정도 있었는데, 1년여만에 1라인당 30명까지 늘어났습니다. 자랑 같지만 장사를 하건 수영을 하건 노래를 하건 공부를 하건 뭘 하더라도 사람들을 몰고 다니는 재주가 있는 것 같습니다. 1년이 지나자 현대수영장에서 수영대회를 열어서 감사패도 주고, 1달 무료 수강증도 주고 떡과 음료수로 잔치도 해주었습니다.

    현대수영장에 3년을 다니다가 시장 앞에 삼영수영장이 있는 것을 알게 되어 수영장을 옮겼습니다. 장사에만 신경을 쓰느라 바로 집 앞에 다른 수영장이 있는 것을 그 때까지도 몰랐습니다. 여기서는 처음부터 연수반에 들어갔는데, 나이는 제일 많아도 선생님이 수영할 때마다 맨 먼저 나가라고 시켰습니다.

   

    막내까지 대학에 입학하자, 다시 공부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에 얘들에게 물어보니 다들 찬성했지만 반 할머니가 되어 공부한다는게 창피하기도 하고 어려운 공부를 할 자신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한 번 머리를 테스트 해보자’ 하는 생각으로 노래교실을 찾아가서 가사를 암기하려고 애썼습니다. 처음 갔을 때에는 수강생이 52명이었는데, 수영장 식구들이 저를 따라 와서 3, 4달 지나니 118명이나 되었습니다. 어느 날 고인이 된 김현식의 ‘내 사랑 내 곁에’를 배우고 있는데, 선생님이 제 자리에 와서 마이크를 들이대고 “한 번 불러보세요” 해서, 부르기 시작하니 선생님이 마이크 줄을 점차 당겨서 마침내 단상에서 부르게 되었습니다. 선생님은 “자, 도전자 있으면 나와 보세요” 하고는 잠시 기다리다가 “없는게 당연하지요. 다들 노래하시는 것 보니까 몇 번을 불러도 악보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데, 김영숙씨만 다 외웠어요” 했습니다. 그 때에 ‘나도 공부하면 되겠구나’ 하는 용기를 얻었습니다.

 

 

 제 5 장 내 인생을 찾아서

                        [1994년 ~ 2006년]


   1. 자녀들이 취직하고 결혼하다


    선희는 태어났을 때 친정 어머니가 산후조리를 잘 해주어서인지 커가면서도 아픈 적도 없고 제 할 일을 알아서 잘 해서 있는지 없는지 모르고 키웠습니다. 고등학교까지 학비는 대줬지만, 대학교는 장학금과 아르바이트로 다니고, 취직도 오빠들을 재끼고 제일 먼저 했습니다. 부평 성모병원에서 1년간 임상강사로 있다가 봉천동에 페이닥터로 들어갔는데, 고용한 의사가 나이가 많아 아들이 사장 노릇을 다하고 기공소, 제약회사에 선희 이름으로 계약한 것이 많아서 그만 둘 수도 없다고 몹시 힘들어 했습니다. 

   큰 얘는 대학을 졸업하고 고시 공부를 시작하더니 2차 필기시험에 실패해서 군에 갔다가 나이 스물 아홉에야 제대했습니다. 해년마다 한 겨울부터 초여름까지 고시원에서 골방 생활을 하면서 1차 시험은 매번 합격하는데, 필기시험에서 번번히 낙방하였습니다. 주위 친구들이 취직하고 장가가서 얘 낳았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고시를 포기하고 아무 직장이라도 들어갔으면 하는 생각이었지만 본인이 하겠다는 걸 말릴 수도 없었습니다. 큰 얘가 서른 두 살 가을에 아침에 합격자 발표를 보러간다고 나가더니 저녁 늦게까지 전화도 없어서 ‘또 안됐나 보다’하고 생각하는데 마침 비까지 내려 가슴이 답답하고 정신이 없었습니다. 기력이 하나도 없어서 평소보다 일찍 가게 문을 닫으려고 물건을 정리하고 있는데, 큰 얘가 들어왔습니다. 큰 얘는 아무 말도 않고 가게 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넙죽 절을 하면서 “오랫동안 고생하셨습니다”고 했습니다. 신문지를 깔 때에는 ‘얘가 왜 그러나’ 했는데, 절하는 걸 보자마자 ‘아’ 하는 마음에 너무 놀라서 얼굴이 굳어버려 뭔 말을 해야겠는데, 입밖으로 말이 안 나오고 웃을 수도 울 수도 없었습니다. 다음날 동대문 시장에 가서도 말을 할 수 없어서 글씨를 써서 주문을 했고, 24시간이 지나니 얼굴이 제 자리로 돌아 왔습니다. 애미 얼굴이 마비된 것도 모르고 나중에 큰 얘가 “고시에 합격했다고 하면 좋아할 줄 알았는데, 얼굴만 쳐다보고 아무 말도 안해서 좀 서운했다”고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아무리 효자라도 부모 진짜 속은 모르는 법입니다.


   큰 얘는 시험에 합격하자마자 여기저기 선을 부탁했습니다. 장인, 장모 자리가 최하 고등학교 졸업이고, 대학원까지 있어서 마담뚜들이 부모 학력을 물어보면 “본인이 중요하지 그런 것까지 왜 물어보냐”고 대답하면서도 자존심이 상했습니다. 학교 선생인 큰 며느리는 마음에도 들고, 엄마가 시부모와 친정 엄마까지 모시고 있다고 하여 층층시하 어른들에게 배운 게 많겠다 싶었습니다.


   큰 얘만이 아니라 얘들이 ‘이 사람과 결혼하겠다’고 데려오면 아무 군소리 없이 받아들였습니다. 결혼할 때에 결혼자금도 자녀들에게 “니들 공부시켜준 돈만해도 엄청나다. 니들이 골랐으니 돈도 알아서 해결하라”고 내버려 두었고, 제일 많이 지원해준 것도 4천만원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도, 아들들은 모두 결혼한지 10년도 안되어 자기들이 번 돈으로 30평형대 아파트를 한 채씩 가지고 있습니다. 딸은 남편을 잘 만나 아들들보다 훨씬 더 큰 아파트에 삽니다.

      

   큰 며느리를 보고나서 얼마 후에 선희가 눈이 많이 온 다음날 봉천동 치과 앞의 언덕에 차를 주차하다가 언덕에서 미끄러진 차에 1차 사고를 당하고, 차에서 나와 이야기하다가, 얼어붙은 눈에 미끄러진 다른 차에 다시 허리를 부딪치는 이중 사고를 당했지만 그리 다치지는 않았습니다. 선희가 봉천동 치과를 그만 둘 생각으로 나이롱 환자로 한 달을 병원에 입원해서 버티니 봉천동 치과에서도 그만 두게 했습니다. 선희는 연수동에 개업하겠다고 하는데, 저축해 놓은 돈이 없었습니다.


   동섭이 결혼 비용과 선희 개업 비용을 마련하려고 장사를 그만두고 가게 보증금으로 돈을 만들기로 했습니다. 우리 가게를 달라고 여러 사람이 왔는데, 영광상회 점원으로 있다가 원종동 시장에서 장사하던 김영미도 달라고 했습니다. 영미는 보증금 5천만원이 부족하다고 해서 장사를 잘하니 월세는 잘 줄 것 같아서 3천만원에 가게를 세놨습니다.


   2. 중검, 고검, 대검을 차례로 합격하다


   장사 할 때는 남편이 벌어오는 돈으로 집에서 살림하면서 얘 키우는 여자들이 세상에서 제일로 부러웠습니다. 쉰 일곱에야 소원대로 집에 들어 앉았지만 아파트를 청소하고, 영감과 얘들 식사 준비, 빨래 같은 것은 오전이면 다 끝나고 오후에는

하염 없이 밖을 바라보자니 물건 팔려고 애쓰던 것이 까마득한 옛날 같고, 환갑도 안 되어 죽을 날만 기다리는 사람 같아서 밤에 잠도 오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영감한테, “여보, 공부나 시작해볼까요” 하니까, 영감도 안 되어 보였는지 그러라고 했습니다.

    영감 허락은 받았지만 노인대학을 갈까, 양원주부학교에 다닐까 하는 생각도 해봤지만 이왕 공부를 시작하면 검정고시를 보아 고등학교 과정까지 마치는 것이 좋을 것 같았습니다. 얘들한테 물어서 종각의 고려학원에 가서 알아보니, 중등과정은 신설동에 있고, 종각에는 초등과정만 있다고 하였습니다. ‘초등학교는 나왔으니 신설동에 가봐야지’ 하고 나오다가 초등학교 졸업한지도 40년이 넘었는데, 중등과정에 바로 가면 공부에 적응하기 어려울 것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 자리에서 초등학교 3학년 과정에 등록을 하였습니다.

   책가방을 등에 지고 아파트에서 중동역까지 걸어가서 종각까지 전철을 타고 학원에 가니 등교에만 한시간 반이나 걸리지만 진짜 학생이나 된 것 같아 어깨가 으쓱하고, 전철에서 누가 보건 말건 자랑스럽게 초등학교 교과서를 공부했습니다. 학원에서 강사의 말을 다 녹음해서 설거지하면서 녹음기를 크게 틀어놓고 복습을 했습니다. 초등학교 과정은 별로 어렵지 않아 1년 만에 중검에 합격하였습니다.


   학원다니는 것이 소문나면 그 동안 “중학교 밖에 못나왔어요”하고 거짓말 한 것이 탄로나고, 시험에 떨어지면 망신일 것 같아서 아이들한테 검정고시 공부하는 것을 비밀로 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러나, 노인이 매일 책가방을 메고 다니니 사람들 눈에 안 뜨일 리 없습니다. 큰 아들은 “할머니가 무슨 책가방을 매고 다니냐”고 물어보면 “어머니가 검정고시를 준비하는데, 틀림없이 대검까지 될 겁니다”하고 장담을 했습니다. 얼마 지나 주위에 가까운 사람들은 공부하는 것을 다 알게 되어, 공부가 머리에 들어가지 않아 그만 두려고 해도 중단할 수 없었습니다.

    중학교 과정에 들어가서는 영어를 새로 배우니 한 단어를 100번, 200번을 읊어도 머리에 입력이 안되었습니다. 싱크대에 놓은 한문, 영어 단어장을 놓고 눈으로는 그릇을 보고 설거지하면서 곁눈질로 하나 쳐다보고 외우곤 했습니다.


    공부하다가 답답해 하면 온 식구들이 다 가정교사를 하겠다고 나섰습니다.

    수학은 큰 아들과 막내에게 배웠습니다. 큰 아들한테 물어보면 기초부터 차근차근 설명하는데 너무 어려워서 잘 모르겠고, 공박사한테 가르쳐 달라고 하면 머리에 쏙 들어오게 설명하는 것이 엄마 눈치보고 오락실이나 다니던 그 아들이 진짜 맞는가 싶었습니다. 둘째는 영어 발음이 좋았습니다. “이(의) 선생님 영어 좀 가르쳐 주세요”하면, 설명을 해주고 나서 “학생은 옛날에 공부 잘했다고 하더니 왜 이모보다 아는 게 없어요” 하였습니다. 여동생은 중학교를 나왔지만 저는 중학교에 겨우 4개월 다니다 그만 둔 ‘불량 소녀’입니다. 큰 아들이 학교에서 가정환경 조사서에 ‘어머니 국졸’이라고 쓰길래, “중학교에 다니다 가난해서 그만 두었다” 라고 말하니까 ‘중퇴’라고 고쳐 쓰는 것이었습니다. 큰 아들은 국졸보다는 중퇴가 높다고 생각했겠지만 등록도 못했던 중학교를 퇴학당한 불량 학생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우리 집에서 유일하게 저보다 학력이 낮은 영감마저 부피를 이해하지 못하고 헤매니까 답답했던지 그릇을 몇 개 가져와서 작은 그릇에 물을 담아 큰 그릇에 옮겨 부으며 설명해주고, 영어를 잘 모를텐데도 “핸드볼이 손으로 공을 던지는 거지요? 핸드가 손이고 볼이 공이니까”하고 몇 개 아는 영어로 애써 설명해주었습니다.

   온 가족이 가르친다 해도 집안 일을 잊고 학원에서 정신을 집중하고 배우는 것만은 못합니다. 학원을 하루만 빠져도 따라가기가 어려웠습니다. 얘들이 아무리 아파도 학교에 개근을 해서 공부를 잘 한 것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고려학원 다니는 동안에 선희가 공인회계사로 있는 사위를 만나 결혼하고, 의섭이는 현대전자에 취직하고, 막내는 반도체 테스트 회사인 어드반테스트에 취직했습니다. 자녀들이 좋은 직장에 취직하고 결혼하고, 저까지 공부를 하고 있으니 매일 구름 위를 걷는 것 같아 대통령이건 갑부건 하나도 부럽지 않고 공부도 더 잘되었습니다.

   3년을 밤낮으로 공부하다보니 나이 예순에 대검까지 합격하였고, 연합뉴스에서 취재를 해가더니 할머니가 검정고시 3개를 3년만에 합격했다고 일간신문에 다 나가고, KBS, MBC, SBS의 9시, 8시 뉴스에도 나오고, SBS 방송에도 출연했습니다.

 

   3. 방송대학교에 들어가고, 영감이 대수술을 6번이나 받다


   검정고시는 합격했지만 이왕 시작했으니 대학까지 갈 욕심이 생겨서 수능시험 준비는 어떻게 해야 하나 하고 고민하는데, 검정고시만 해도 방송대에 갈 수 있다는 말을 듣고, 굳이 일반대학교에 가서 뭐하냐 싶어서 방송통신대 유아교육과에 등록하였습니다. 큰 며느리가 대학교 입학 기념으로 동남아 여행을 보내주겠다고 해서 나이가 드니 눈꺼풀이 쳐져서 책이 잘 안보이니 쌍까풀 수술을 해달라고 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눈이 쳐져서 수술한 걸 가지고 우습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던데, 저는 이해하고도 남습니다.


   방송대에 입학하고 둘째와 막내도 결혼하였습니다.

   둘째는 우리 부부 친목계원의 딸인 중고등학교 선생님하고 결혼했고, 막내는 ‘예수쟁이’라서 교회에서 만난 색시랑 결혼했습니다. 시어머니가 유세하느라 집 가까이 사는 둘째와 막내 며느리에게 논문과 레포트를 마무리를 해달라고 졸라대곤 했습니다. 사위는 제가 봐도 알아보기 힘들게 연필로 써놓은 것을 컴퓨터 타자로 깔끔하게 정리해주곤 하였습니다.


   심장 부정맥이 그렇게 무서운 병인 줄 몰랐습니다. 대검 공부를 하고 있을 때, 막내가 건강진단을 받게 하여 부부가 받아보니 영감이 부정맥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 후 몇 차례 몸이 안 좋아질 때마다 대학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았는데, 검사를 받기 위하여 주사를 맞았다가 정신을 잃어 중환자실에 실려가기도 하였습니다.

   대학병원을 3년간 다녀도 병도 낫지 않고 부정맥의 원인을 설명해주지 않아서 심장수술로 유명한 세종병원으로 갔습니다. 의사가 검사하고나서 혈관 사진을 컴퓨터로 보여주는데 꼭 수도 파이프 옆구리가 터진 것처럼 동맥이 찢어져서 피가 옆으로 흐르고 있었습니다. 영감은 전신마취만 6차례나 하고 심장 대동맥, 혈관 이식 수술, 스텐스 등 크고 작은 수술을 홍석근 박사에게 수도 없이 받았습니다. 홍박사님은 그 후에도 지금까지 여러 차례 고비를 넘겨준 영감의 생명의 은인입니다.

   여러차례 수술을 받고 이제 고비는 넘겼나보다 했는데, 어느 날 집에 온 막내 아들이 “아버지 왼쪽 새끼 발가락 색깔이 파래요” 했습니다. 발가락이 썩어들어가면 몹시 아플텐데, 영감이 수술받을까봐 겁나서인지 아무 말을 안해서 같이 사는 저도 몰랐습니다. 영감이 병원에 가자고 해도 말을 안 듣더니 얼마 후에는 오른쪽 새끼 발가락도 파랗게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세종병원에 가서 보여주니 발가락을 살릴 수가 없다면서 매직펜으로 발가락부터 종아리까지 선을 쓱쓱 4, 5개 그었습니다. 의사는 검사를 해보고 수술 경과를 봐야 하지만 운이 좋으면 발가락 1, 2개부터 운이 나쁘면 무릎 아래까지 다 잘라야 한다고 했습니다.

   다리를 자른다는 말에 너무 놀라서 혹시 살릴 길이 있을까 싶어서 선희 사돈의 도움으로 서울대병원으로 옮겨 응급실에서 1주일 넘어 지체하다가 병이 악화하여 두 다리 모두 무릎 바로 아래까지 절단하고 말았습니다.


   방송대에 입학하고나서 삼정복지회관 독서실에서 공부하였습니다. 복지관에서 독서실 관리 봉사자를 구해서 제가 나서서 5년간 아들, 손주같은 사람들 관리를 해주었습니다. 감사장, 메달, 뺏지도 여러 번 받고 농수산물, 화장품 등등 선물도 많이 받았지만, 무엇보다도 수영장 수강증을 2년치나 받아 무료로 수영을 할 수 있었던 것이 제일 좋았습니다.

   

   자녀들은 서로 약속이나 했는지 손주들을 딱 두 명씩 낳아 총 8명입니다.

  자식은 내리 사랑, 손주는 치사랑이라는 말이 딱 맞습니다. 아이들 중에는 막내가 제일로 편하고 좋고 지금도 우리 노인 부부에게 너무 잘 해줍니다. 장손주를 낳았다는 전화를 받고 너무 기뻐서 병원 영아실 창문 너머로 얼굴만 볼 수 있으니 퇴원한 다음에 오라는 데도 단숨에 대구까지 내려갔습니다. 손주가 집에 오면 칙사라도 되는 듯이 영감이랑 저랑 손주만 끼고 돕니다. 그런데, 자꾸 손주가 늘어가고 자녀들이 한 번씩 짧게는 몇 시간부터 길게는 6개월까지 손주를 맡기니 중간에 공부의 맥이 끊겨서 수업을 따라가기 어려웠습니다.

   손주들이 집에 오면 재우고 밖에 나가 가로등 불빛에 비추어 공부를 했습니다. 영감이 가게를 그만두면서부터 텔레비전을 좋아하는데다가 장애인이 되고나서는 잠을 잘 때도 텔레비전을 크게 틀어놓고 자서 소리 때문에 정신이 산란하고, 방에서 공부하면 너무 졸렸습니다.


   방송대는 한학기에 8시간 출석 수업이 있는데, 책으로만 공부할 때는 아리송하던 것이 교수님 강의를 직접 들으면 수업 내용은 물론이고 제스처까지 머리에 쏙 입력이 됩니다. 영감은 꼭 출석 수업에 맞춰서 병원에 입원을 하는 것 같아서 아픈 사람한테 화를 낼 수도 없고 정말 답답하였습니다.

    어느 날 병원에서 본 책자에 어느 간호사가 쓴 빨간색 옷을 입고 퇴원하면 다시 입원하지 않더라는 우스개 같은 글이 있었습니다. 영감이 퇴원할 때 빨간 티셔쓰를 두 개 가져가서 질색을 하는 영감에게 억지로 입히고 퇴원하였습니다. 그 후 지금까지 5년이 되도록 딱 2번 1주일, 2주일 밖에 입원하지 않았으니 그 간호사 말이 틀린 것도 아닌 듯합니다.


   영감이 아파서 병원 입퇴원을 반복하고, 여러 손주들을 교대로 맡다보니 방송대에 입학하고 5년이 되도록 받은 학점이 졸업에 필요한 학점의 절반도 안 되어, 실습도 하고 졸업논문까지 쓰려면 앞으로도 한 10년은 더 걸려야 할 것 같았습니다. 갈 길은 먼데, 나이는 들어가니 마음은 불안하고 몸도 다시 아프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보니 사실은 그 때문이 아니라 검정고시 학원과는 전혀 분위기가 다른 대학, 특히 방송대학을 다니려면 꼭 필요한 시간과 공간을 관리하는 요령을 터득하지 못한 때문이었습니다.

     

   4. 다시 일하면서 공부하다

  

   아이들이 시집, 장가가서 다 떠나자 한신아파트를 팔고 평수를 줄여서 예순 다섯 살이 되던 해에 신안아파트로 이사를 했습니다. 영감이 장애인이라서 화장실, 현관, 가스렌지 등등 집안의 절반을 장애인이 이용하기 편하게 개조하였습니다.


   영감이 집에서 혼자 필요한 것을 다 해결할 수 있게 되니, 밖으로 돌아다니고 돈도 벌고 싶어서 ‘벼룩시장’에서 청소부 모집 광고를 찾아 보았습니다. 원래 아이들을 좋아하는지라 지에스백화점 근처의 소아전문치과인 ‘즐거운 아이 치과’에 가서 면접을 보았습니다. 원장이 “연세가 몇이에요?”하고 묻길래, ‘나이가 문제겠구나’ 싶어서 “나이는 묻지 마시고 한 달만 일하는 것을 두고 보세요. 언제든지 그만두라고 말만 하면 그만 두겠습니다”고 하여 취직이 되었습니다.

   선희가 나중에 “왜 하필이면 치과에 갔어요. 치과 의사끼리는 한 다리만 걸치면 다 아는데. 돈이 필요하면 제가 드리고 일을 하고 싶으면 우리 병원에 와서 일하세요” 했지만 공돈 받을 일도 없고 딸네 치과에 가면 서로 불편할 것 같았습니다.

   방송대에 다니는 것이나 자녀들에 대해서 병원에서 알면 나가라고 할까봐 일체 비밀로 하고 일만 열심히 했습니다. 치과 병원하면 깨끗한 줄로 아는 사람도 있지만 갖가지 의료 쓰레기가 나오고, 가운에 피가 튀고, 아이들 전문 병원이다보니 아이들이 쇼파나 책자 등을 지저분하게 만들곤 하여 제가 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그래도 결혼하고 처음으로 ‘아줌마’가 아니라 ‘실장님’이라고 불리우니 기분이 좋았습니다. 물론 학급실장이 아니라 청소실장이란 뜻이겠지요.


    지난 4년간 주중에는 매일 이렇게 살았습니다. 아침 7시 반에 병원에 도착하여 오후 2시까지 일하고, 집에 와서 설거지, 청소, 빨래 등 집안 일을 하고 5시나 6시면 독서실에 가서 밤 10시까지 공부하고 나와서, 집이나 가로등 밑에서 1, 2시까지 공부하고, 그 후에 1시간 정도 인터넷으로 동영상 강의를 듣고 2, 3시간 새우잠을 자고나서 5시 반에 일어나 영감 아침을 차려놓고 삼정회관 수영장에 가서 1시간 수영을 하고 병원으로 갑니다.

    오전, 오후는 일과 건강을 챙기는 시간입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수영을 하니 정신이 번쩍 들고 혈액순환을 돕는 마사지까지 겸하고, 청소를 하면 돈을 벌어 좋고 운동도 되고, 원장님, 간호사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마음이 밝아지고, 집안 일을 하면서 영감 건강을 확인합니다.

    저녁은 공부하는 시간입니다. 독서실, 집과 가로등, 인터넷 등 장소와 도구를 바꾸어 공부하면 집중력을 잃지 않습니다.

    시간과 공간 관리가 좋아지면서 일을 안할 때보다 학점을 따는 속도가 2배 가까이 빨라졌으니 역시 방송대는 직장과 병행하면서 공부해야 하는 곳인 모양입니다. 일을 하게 되니 자녀들도 주말을 빼고 손주들을 맡기지 않아서 공부시간은 오히려 더 늘었습니다.


   유아교육과에서는 피아노 실기시험을 보는데 평생 처음 피아노를 만지는지라 막막했습니다. 동생한테 조카딸들이 어려서 쓰던 피아노를 달라고 하여 집에 들여 놓고 매일 연습을 하다보니 어느새 간단한 동요라도 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전에 실기시험을 볼 때에는 4곡, 5곡을 쳤다고 하여 간신히 5곡을 준비해서 시험장에 갔더니 6곡을 쳐야 한다고 했습니다. 준비가 부족해서 다음 주에 다시 오겠다고 집에 왔는데, 저녁에 영감이 혼수상태가 되었습니다. 나머지 1곡을 연습할 시간도 없고, 내일 또 병원에 가야 하니 ‘나는 공부할 팔자가 못 되나보다’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영감 상태가 조금 나아져서 다음 날 아침 막내 며느리에게 시아버지를 부탁하고 학교에 갔습니다. 제 시험 순서까지 기다리려면 한참 걸리고 그 사이에 영감에게 뭔 일이 있을까봐 과대표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먼저 치게 해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거기서 나머지 한 곡을 한 15분 연습하고 있으니 교수님이 오셔서 아침에 연습한 것까지 차례로 6곡을 치고, 마지막 곡을 칠 때는 기분이 좋아서 쏘프라노로 노래까지 부르자 교수님이 박수를 치면서 “처음 보았어요”하고 좋아했습니다. 제가 잘했다는 말이 아니라 할머니가 피아노 시험보면서 겁을 먹지 않고 노래까지 부르니 배짱이 좋다는 칭찬이었습니다.


    재작년에는 병원에 일하러 가다가 팔이 승용차 뒷바퀴에 깔려 2달간 입원하는 교통사고를 당하고, 작년에는 영감이 개인 병원에서 대장검사를 받다가 의사가 혈관 수술 환자인지 모르고 용종을 떼어버려 피가 멈추지 않아 세종병원에 장기 입원하였습니다. 저는 저대로 영감 간호를 하러 세종병원에 다니다가 개한테 심하게 물려 무릎 살점이 뜯겨나가고 또, 올해는 식초에 발을 데어 잘 걷지 못합니다.

    인생이 끝날 때까지 사서하는 이 고생도 끝날 것 같지 않습니다. 방송대 교우들은 어린이들 ‘예절선생’ 이나 주부학교 강사로 나가라고 합니다만 그런 재주도 없고 욕심도 없습니다. 젊어서 경험으로 미루어 보니 공연히 여기저기 돌아다녀봐야 배울 점은 하나도 없고 남들에게 원숭이 같은 할머니나 될 뿐입니다. 정체가 탄로난 병원에서 청소 잘하는 할머니 실장으로 인정받고, 노래와 피아노를 배울 수 있다는 것만도 다행입니다. 

    o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노력하는 사람은 돕자

    o 손발을 못 움직일 때까지 쉬지 말고 일하자

    o 이왕 해야 할 일, 즐겁게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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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동안 재미없는 가족사를 읽느라 고생한 친구들에게 고마움을 전하며, 연재를 마친다.

곁에서 40여년 지켜본 사람으로서의 소회는 편집후기에 대부분 썼지만.......

한가지 빠진 부분은 어머님의 목표의식이 투철하다는 점이다.

 

 우리는 인생의 앞날을 계획하기도 하고 현재에 있어서 우선순위가 무엇인지 판단하여

다른 것을 포기하기도 한다. 

 그러나, 미래 계획이란 으레 사정 변화로 무의미해지거나 불가능해지기 십상이고,

 오늘의 우선 순위가 내일도 우선 순위가 되리라는 보장도 없다.

 불확실한 미래에도 불구하고 한가지 목표를 잡으면 그것을 향해 달려간다는 것....

 쉬운 일이기도 하고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많은 사람들이 부자되는 법은 복잡한 투자이론에 있지 아니하고 절약에 있다고 한다.

 버핏은 손해보지 않아야 한다고 강조 했다.

 부자되기 정말 쉽다.

 목표를 이루는 것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우선 지금 내 목표가 무엇인지 생각해보고, 그 목표 달성에 적합한 내가 가진 자원을 투자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쉬운 일이다.

 부자되기가 쉬운 것처럼 인생 목표를 달성하는 것 역시 어렵지 않다.

 마음을 먹고 실천만 한다면...

 

 자서전에서 어머님의 목표를 정리해 보면

 (1) 중학교 진학 --- 동생들 돌보기 등으로 결국 실패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실패 요인은 어머님이 현실을 타개하기 위한 구체적 목표, 실천방안이 없었다는 것이다. 결혼으로서 목표를 도피한다

 (2) 남편 병고치기 --- 유일한 재산인 논을 처분한다, 병을 정확히 확인한다, 병의 치료방법으로 빚을 내서 약을 사거나 민간요법을 동원한다... 등으로 결국은 목적을 이룬다.

 (3) 논 마련하기 --- 남편이 공장에서 일해서는 월급을 시아버지에게 뺏길 뿐이다. 공장을 그만 두게 하고 품팔이, 장사를 나선다, 틈만 나면 새끼를 꼰다(자서전에는 자세히 안나와 있지만 새끼꼬는 광은 바쁜 농사철에도 밤새 불이 켜 있었다), 남보다 앞선 영농방법을 실천한다...등으로 목적을 이룬다

 (4) 가게 마련하기

 (5) 공부 다시 하기 --- 노래교실에서 악보 외우기로 공부에 필요한 자신감을 얻는다는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검정고시를 공부할 때는 온 식구들을 적절히 가정교사로 활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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