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1. Dr. Sam Lee/15_80년5월18일

[스크랩] ebs 시대의 초상에서 민주화 운동 관련 방송을 합니다.

忍齋 黃薔 李相遠 2007. 5. 27. 0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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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저는 EBS 작가 김미정이라고 합니다.

민주화 운동 관련 다큐멘터리의 홍보차 이렇게 허락도 없이 글을 남기게 되었습니다.^^



70-80년대를 뜨겁게 달궜던 민주화 운동.

그 한 가운데서, 누구보다 깊숙한 곳에서 활동하시던 분이 시대의 초상 13회 주인공이십니다.

대학생 시절, 한번쯤 몸담아 봐던 운동권.

아니면 넥타이를 매고 6월 항쟁에 참여하셨던 분들이라면,

나라와 조국의 현실에 비분강개해보신 적이 있으시다면

이번 프로그램에서 많은 것을 얻어가실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프로그램 : EBS [시대의 초상]
부 제 : 제 13 회 ‘민주화의 숨은 얼굴- 김정남’
방송일시 : 2007. 5. 29. 화. 22:50 - 23:40 (50분간)
담당 PD : 김영상 (조 연 출 : 이연미)
작 가 : 고혜미 (서브작가 : 김미정)


군인이 이 땅을 통치하던 시절..
그들은 하나같이 ‘국가안보’라는 이름으로 국민의 민주화요구를 탄압하고, 생명을 유린했다. 반대자들은 모두 소리 없이 암살되거나 제명, 추방, 체포, 처형되었다.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것조차 금기였으며 정부와 관련된 그 어떤 반대도 할 수 없었다. 민주화 요구는 국가 변란을 획책하는 계략이었고 민주화를 요구하는 자는 모두 간첩이 되었다. 그러나 엄혹했던 그 시절도 결국 국민들의 민주화 열망을 억누를 수 없었다.

61년 - 92년 31년의 군사정부
93년 - 2007년 14년의 민간인정부

길고 긴 민주화의 노정 속에 지금 이 땅에는 국민이 뽑은 대통령이 통치하는 민주 정부가 들어섰다. 지난 93년 이래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를 거쳐 참여정부로 이어지는 민주주의 국가 대한민국..
이 땅에 민주주의가 실현된 것이 몇 년인가?
우리는 민주주의에 떳떳한가?
과연 우리의 대한민국은 민주주의 국가인가?
그것이 궁금하다면 이 사람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보기를 권한다.


죽은 자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

여기!
산 자와 죽은 자가 있다.
죽은 자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고, 가치 있는 것으로 환원시킨 사람..
죽임에 처한 자를 있는 힘껏 도와 생명을 살린 사람..
가려있던 진실을 세상 밖으로 나오게 한 사람..
압제와 폭력의 그늘 속에 숨죽여 우는 이의 통곡을 들어준 사람..
그가 누구인지 궁금하지 않은가?
그의 이야기가 궁금하지 않은가?


이야기 하나,


2007년 5월 18일 명동성당에서는 20년 전 오늘과 똑같은 사제단이 집전하는 미사가 열렸다.
87년 5월 18일 명동성당 광주민주항쟁 6주기 기념식 2부 미사에서 김승훈 신부는 떨리는 목소리로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의 은폐조작을 폭로하는 성명서를 낭독한다. 이미 지학순 주교마저 감옥으로 보냈던 서슬 시퍼런 전두환 정권 하에서였다.
당초 단순쇼크사로 발표된 이 사건은 부검의의 증언으로 닷새 만에 물고문 사실을 공식 시인하고 수사경관 강진규, 조한경 두 명의 경찰을 구속수감하는 것으로 마무리 지어지던 때였다.
그러나 천주교정의사제구현단에서 발표한 조작은폐축소의혹발표로 치안감 박처원과 경정 유정방,방원택 등 대공간부 3명이 이 사건을 축소 조작했고 고문가담 경찰이 5명이었음을 밝혀져 정부의 도덕성에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고 추모집회와 규탄대회는 개헌논의와 이어지면서 결국 87년 민주화 운동의 촉발제가 되었다.
그런데....
사제단의 발표 내용을 보면 박종철의 죽음에 가담했던 주범들의 정확한 이름도 거명된다.

도대체 사제단은 밀실에서 벌어진 고문조작사실을 어떻게 알았을까?

“이부영은 감옥가고 저는 수배생활을 하는데. 87년 3월 중순경이었을 겁니다.
그 때 전병용이가 저한테 아주 그 굉장한 편지를 가지고 왔어요.”

우촌..(생략) 모든 것은 잘되어가는 줄 아네. 오늘은 아주 중요한 이야기가
있어 급히 몇 자 적어 보내네. 박군 건으로 구속된 .. 은 완전 조작극이야.

“세상에 전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그때 생각으로 군사정권이라도 하지만 이거는 너무 하지 않느냐.
이런 부도덕한 정권임이 드러난다면 아마 이 정권은 유지하기 굉장히 어려울 게 아니냐.”

전두환 정권의 고문은폐축소조작의혹사건이 민주화까지 이어지게 된 것은 한 통의 편지 때문이었다.
당시 수감 중이었던 고문경관들이 심경의 변화를 일으키면서 알려지게 된 진실을 적은 편지를 받은 수신자! 그리고 받은 편지의 내용을 주도면밀한 계획 끝에 직접 성명서를 작성해 천주교 측에 전달. 세상에 알리게 한 장본인!
그는 지난 61년 서울대 정치학과를 입학한 이해 그때까지 민주화 운동의 길고 긴 여정 속에
민주화의 숨은 얼굴로 일해 온 김정남이었다.
그가 받았던 편지는 시대의 초상을 통해 최초로 세상에 공개되어 당시의 급박한 상황을 생생하게 전달하게 된다.


이야기 둘,

2007년 1월 소위 북한의 지령을 받고 국가변란을 획책했다는 죄목으로 사형에 처한 인민혁명당 8명의 죽음이 무죄로 판정 났다. 재판정은 울음바다가 되었고 30년이 넘는 숱한 세월동안 빨갱이의 자식, 빨갱이의 아내로 고통을 겪었던 가족들에게서는 피울음이 터져나왔다. 인혁당 그들은 왜 국가로부터 죽임을 당해야 했을까?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 ‘인혁당’ 사건이 조작되었음을 최초로 밝힌 것은 김지하 시인..
그는 감옥에서 만난 인혁당 하재완을 만나 인혁당 사건이 조작되었음을 알고 그와의 대화 내용을 세상에 알렸다가 오히려 인혁당의 조종을 받은 인물로 조작 지목되어 사형을 선고받는다. 그러나 그는 장문의 옥중 양심선언을 발표하고 그것으로 전 세계 지식인의 지지를 얻어 사형을 면하게 된다.

나는 지금 접견도, 통신도, 집필도 금지되고 운동과 기타 모든 권리가 제약된 채로
심지어 서적까지, 성경까지도 금지된 상태에서 1.27평의 어두움 속에 밀폐되어 있다. - 김지하의 ‘양심선언’- 중에서 발췌

옥중의 김지하는 어떻게 양심선언을 전 세계에 공표할 수 있었을까?


감옥에 있던 김지하는 어떻게 장문의 옥중 양심선언을 쓸 수 있었으며 그것은 어떻게 전 세계에 알려지게 된 것일까?

김지하는 70년대 초 5적 사건으로 구속 된 적도 있고 바로 전 해에 민청학련사건으로 구속된 데다 당시에는 가족 면회는 물론 불가능한 철저한 감시체제에 놓인 상황이었다.

“누범의 경우에는 조항 중에 ‘똑같은 범죄 반공법 위반사항을 여러 번에 걸쳐서
범했을 때에는 사형에 처할 수 있다.’ 라는 고 규정 하나를 더 첨가한 거예요.”

설상가상으로 재판을 맡게 된 재판장은 바로 전 해 인혁당 사건의 심판관으로 파견된 판사였다.

“저 생각으로는 김지하 재판을 최대한 연장하는 것이 김지하를 구하는 구명운동의
제 1보가 되어야 되지 않겠냐.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김지하를 살리기 위한 움직임이 소리 없이 진행되었고 그 과정에서 형사소송법에는 있으나 사문화된 것이나 다름없었던 국민의 권리가 하나 둘 찾아지게 되었다.
재판기피신청! 재판속기록 ! 모두진술권!

올림픽이 한창이던 88년에도 당시 국회의원이었던 김근태를 비롯한 숱한 사람들이 고문기술자 이근안에 의해 처절하고도 극악한 고문을 받았고, 그 진실이 밝혀진 것 역시 사문화 되었던 모두진술권을 찾아냈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보면 이 나라 재판사 형사소송법의 재판부 기피신청이라든지 지금 우리가 재판기록을 전부 철저히 기록하는 것이라든지 이런 것들이 전부다 민주화 과정에서 알게 모르게 하나씩 쌓여진 인권운동의 일대 승리과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야기 셋,

“82년3월30일 이였을 것입니다. 그날 함세웅 신부가 급히 좀 보자 그래서 갔는데, 그해 3월 18일 날 부산에서 미문화원 방화사건이 있었어요. “

1982년 3월 18일 부산 지역의 대학생들은 광주민주화운동 유혈 진압 및 독재정권 비호에 대한 미국 측의 책임을 묻기 위해 부산미국문화원에 불을 질렀다. 이 사건은 미국에 대한 첫 반미감정을 표출한 사건으로 기록되었으며 이후 우리 대한민국이 주권국가로서 대등한 관계에서 미국을 대할 것을 정부 측에 줄기차게 요구하게 된다.

그러나 당시 전두환 정권은 미국과의 관계 악화를 우려, 이들을 인혁당사건 때와 마찬가지로 간첩 등 불순분자의 소행으로 조작하였으며 부산미문화원방화사건의 주범으로 지목되었던 문부식, 김현장은 사형이 언도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결국 감형되었고 죽임을 면하게 된다.
이들이 재판을 받는 재판정에 참석해 재판과정과 진술내용을 꼼꼼하게 기록해 부산미문화원방화사건의 진실을 세상에 알렸던 것 역시 김정남이었다.

“나는 재판정에 가가지고 어쨌든 이 기록을 철저히 했습니다. 내가 속기는 못하지만 어쨌든 피고인들이 하는 얘기들을 가급적 적고 이래서..”


이야기 넷,

민주화의 과정 중에 숱하게 드러났던 군사정권의 만행과 비도덕성.
그것은 민주화를 열망하는 사람들의 의지와 하늘의 뜻을 거스르지는 못했다.
우리는 87년 6월 항쟁으로 민주화를 이루었고 김영삼의 문민정부 김대중 국민의 정부를 거쳐 노무현의 참여정부 시대를 맞이했다. 그리고 또 다른 민주정부를 향해 가고 있다.
우리의 민주주의는 숱한 죽음을 딛고 쟁취한 피맺힌 한의 민주주의가 아니던가?
그런 민주주의의 지금은 어떤 모습인가?


진실을 알리는 파수꾼을 자처할 수 밖에 없었던 김정남
그것은 커다란 정치적 야심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저는 일생에 수배는 꽤 여러 번 당했습니다. 그리고 사실상 수배가 공식적으로 되지 않았을 뿐 수배들 당한 것과 마찬가지 삶을 살아야 했는데 사실은 수배를 당했을 때 내 몸을 누일 한 평의 땅이 없어서 오늘 저녁이 막막했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61년 서울대 정치학과에 입학한 이후 조국의 현실에 비분강개했던 젊은 혈기의 그는 당대 최고의 엘리트임을 자처하기 이전에 생활고에 시달리는 소시민이었고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가장이었다.
수배와 사찰로 평생 번듯한 직업을 가질 수 없었던 현실적인 고통이 그를 민주화의 숨은 일꾼으로 내몬 것일까? 이 땅의 민주화에 그가 맡을 역할을 미리 점지해둔 하늘의 뜻일까?
때문에 그는 지금의 민주화에 대해서 할 말이 있다.


“역대 정부가 실패했다고 해서 역사가 거꾸로 반민주의 시대로, 개발 연대로, 거꾸로 돌아갈 수는 없는 거 아니냐. 적어도 역사의 방향의 정의 방향으로 흐르게 해야 되지 않느냐. 이 말은 있는 힘을 다해서 한 번 말씀드리고 싶은 거죠.”
출처 : 5.18 민중항쟁 80518
글쓴이 : ebs작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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