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0. 韓山李氏/11_小說家殷美姬

[스크랩] 5.18 당시 부상자를 치료했던 전남대 병원

忍齋 黃薔 李相遠 2008. 4. 3. 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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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대병원


 하루에도 수없이 경광등을 밝힌 앰뷸런스가 들어오고, 일분일초의 시각에도 생사가 갈리는 곳. 살아있음을 가장 감사하게 여기게 해주며, 가장 낮은 삶의 자세를 견지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곳이 아마 병원일 것이다. 신체 한 곳 뭉텅 잘려나가거나, 미래를 담보할 수 없는 중병에 사로잡혀 하루하루가 눈물 나게 소중한 것임을 깨닫게 해주는 곳도 병원일 것이다. 그렇게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곳. 어떤 이는 운 좋게 삶의 편에 서고, 어떤 이는 운 나쁘게 죽음의 패를 집어 드는 곳. 이렇게 죽음이 흔한 곳이 바로 병원이다. 호남제일의 병원. 전남대 병원은 호남제일의 병원이고, 그만큼 5.18당시에도 많은 부상자를 치료했던 곳이다.

 어차피 죽어야 할 목숨이라면 덜 애석하다. 그렇다면 차라리 고통 없이 하루하루를 살다가 어느 날 문득 자는 듯 갈 수 있기를 기도할 뿐이다. 행여 그 나날가운데 기적이 일어날 수 있다면 그 실낱같은 희망 한 가닥이라도 붙잡고 기적을 빌리라. 하지만 죽지 않아도 될 목숨이, 앞으로 살아갈 길이 구만리나 남아있는 건강한 목숨이었다면, 어느 날 문득 그렇게 가버리는 일처럼 애통한 일이 어디 있을까. 게다가 그 구만리 길에 찬란한 나날들이 예비 돼 있었다면 또 얼마나 억울할까.

 우리가 내일을 알 수 없는 것이 어쩌면 다행일지 모른다. 삶과 죽음이 종이 한 장 차이라는 것을 깨우쳐 준 곳이 바로 80년 5월의 전대병원이었다. 아니, 쌍둥이처럼 삶과 죽음이 늘 함께 한다는 것을 일러준 곳이 바로 전대병원이었다.

 내 기억 속 80년 5월의 전대병원은 비통함과 애통함으로 가득한, 시체안치소였다. 곳곳에서 단장의 울음이 들려오고, 그 울음을 행진곡삼아 병원을 순례하며 나는 숱한 주검들을 보았다. 으깨지고, 찢어지고, 구멍이 난 그들의 육신을 보면서 나는 살아있는 것과 죽어있는 것의 차이를 느끼지 못했다. 다들 살아있으되, 죽어있는 것과 같았고, 다들 죽었으되, 살아있는 것과 같았다. 그렇게 많은 주검을 본 것도 난생 처음이었고, 주검이 무섭지 않게 여겨지던 것도 그때가 처음이었다.

 한 청년의 주검에 내 눈길이 오래도록 가 머물렀다. 피가 모두 빠져나가버려 창백해 보이는 청년의 얼굴은 아주 평안해 보였다. 얼마 전 까지만 해도 피 끓는 분노와 정의감으로 저 금남로를 펄쩍펄쩍 뛰어다녔을 그의 얼굴에는 피가 빠져나가면서 분노마저 새나갔는지, 표정이 단잠을 자고 있는 듯 편안해 보였다.

 죽어서 안식을 얻었다면 다행한 일이었다. 아니, 그 청년이 그 잠으로 안식을 찾았는지 모를 일이다. 주검들 사이를 도는 사람들의 행렬을 보면서, 청년은 자신이 미처 이승에서 하지 못하고 온 일을 대신 해주길 간절히 염원했는지 모를 일이다. 배를 덮고 있는 거적을 걷으면 구멍이 뚫린 자리가 휑하니 드러나 보일 테지만 거적 밑으로 드러난 그의 발가락은 고르고 얌전하기만 했다.

 80년 5월. 그날은 그렇게 사람들의 비통 속에 가고, 또 봄은 오고, 슬며시 가고, 그렇게 무심히 가고 오는 게 세월이지만, 우리의 시련은 아직 끝이 난 것 같지 않다. 기억은 나날이 새로운 색깔로 덧입혀지고, 그 무게 또한 생각이상으로 무겁기만 하다.

 그 청년이 자신의 몸을 제물로 바쳐 얻으려했던 세상, 그 세상의 모습이 지금일까. 그 청년이, 아니, 그때 이름도 모른 채 죽어갔던 사람들이 기다리던 세상은 과연 어떤 세상이었을까.

 당시 전남대 병원에는 끊임없이 들고나는 외래환자와 입원환자들로 북적였다. 좀 더 나은 진료를 받기 위해, 당장에 숨을 끊어 놓을 듯 육신을 괴롭히는 통증을 달래기 위해, 환자들은 너도나도 의사를 찾았지만 광주에서 총소리가 울려 퍼지자 환자들이 다투어 병원을 빠져나가는 바람에 병원은 사뭇 을씨년스럽기까지 했다. 그렇게 입원환자의 삼분의 일이상이 보다 안전한 장소를 찾아 퇴원했고, 대신 흉흉한 소리들이 불온전단처럼 날아들기 시작했다. 광주에 투입된 계엄군들의 잔혹한 행동이 듣는 사람들의 귀를 어지럽혔다. 무자비한 진압에 눈알이 튀어나오고, 진압봉에 머리를 맞은 한 학생은 머리가 벌어지는 중상을 입은 채 그들에게 끌려갔다는 소리들이었다.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이야기들이었다. 모두가 날조된 것처럼 들였다. 어디 자국의 국민을 보호해야 할 군인들이 무장하지 않은 자국의 국민들을 대상으로 그런 일을 저지를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믿을 수 없는 이야기들은, 날조된 것이라 여겼던 것들은, 아니 거짓이라 믿고 싶었던 이야기들은 이내 그 진실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 이야기 속의 참상보다도 현실로 드러난 모습은 끔찍하기 짝이 없었다. 

 환자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병원이 갑자기 바빠지기 시작한 날은 18일 오후 들어서 부터였다. 진압봉과 대검으로 무장한 군인들이 시위 군중들을 무차별 진압 한다는 소문이 들려옴과 동시에 전대병원 응급실은 몰려드는 환자들로 전쟁터의 야전병원을 방불케 했다.

 진압봉으로 인한 두개골 파열은 물론 골절과 열상, 대검에 의한 자상환자들이 정신없이 밀려들어왔다. 한 청년은 광주인근 31사단에 잡혀있다 도망쳐 나왔는데, 도망치는 과정에서 손가락이 철조망에 의해 절단돼 응급수술을 받기도 했다. 밤부터는 상황이 더 나빠졌다. 19일이 되자 조대부속 고등학생이 복부에 총을 맞고 들어왔고, 이를 신호로 총상환자들이 실려 오기 시작한 것이다. 총상환자들은 대부분 이미 사망한 상태로 들어와 간단한 검사만 마친 뒤 바로 영안실로 이송되었다. 살아있는 사람들 역시, 사나흘 후에 뇌부종으로 사망했다. 간호사들은 그들의 눈빛을 보는 것이 괴로웠다. 의식은 명료하니 모든 상황을 인지했고, 그들은 그렇게 자신의 죽음을 맞이했던 것이다. 그들의 눈동자 속에 들어있는 죽음의 그림자는 역설적이게도 무구 그 자체였다. 그저 동그랗게 눈을 뜬 채 현실을 쳐다보는 그들의 눈은 깊은 우물처럼 고요했다. 그 속에는 더 이상의 분노도, 살고자 하는 욕망도, 원망도 담겨있지 않았다. 모든 게 다 공허한 듯 했다. 처음에는 학생들 위주로 부상자들이 실려 왔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신분과, 성별과, 나이가 다양해졌다. 남녀노소 가릴 것이 없었다. 초등학생은 물론, 장년층까지, 아주머니, 아저씨, 심지어는 초등학생들 까지 실려 왔다.

 M16총을 맞고 한쪽 팔이 없어져버린 어린 환자, 담양방면의 검문 속에서 통과시켜 주지 않자 뒤돌아서 가는 일가족에게 집중사격을 함으로써 척추가 마비돼버린 어린 래향이, 심장에 총을 맞고 트럭에 실려 오는 도중 응급처치로 심장을 누르면서 도착했지만 결국 사망해버린 한 남자, 총을 맞아 하지가 절단돼 버린 남자, 서울에서 내려오다 검문에 걸려 군화발로 머리를 뒤에서 찍히는 바람에 눈알이 터져버렸던 환자. 그 환자는 눈알이 터진데다 눈썹부터 눈이 밀려 끔찍하기까지 했다. 또 어떤 이는 총을 들고 장성 비아 쪽으로 가다 유탄에 눈을 맞았는데 한쪽 눈에는 총알이 박혀있고, 또 한쪽 눈은 총알이 지나가 있었다. 그 환자는 총알이 박혀있다며 빼주라고 부탁했고, 한쪽 눈에 박힌 총알을 빼는 수술을 받았다. 한때는 얼마나 부상자가 많았던지 트럭 위에 환자들을 쟁여갖고 오기도 했다.

 피투성이가 된 채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환자들로 전대병원은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침상이 부족해 들어오는 대로 복도에 매트리스를 깔고 환자들을 눕혔다.

 대부분 의식이 없는 환자들이라 인적사항도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그들은 특징적 외모로 불렀다. 청색 추리닝 하의를 입은 환자는 ‘청추하’로 불렀고, 자개 공장에서 일하던 사람이면 ‘자개 남’으로 불렀다. 그렇게 불린 사람들은 많았다. ‘흰색 남' '청색 남’ 등등. 딱히 부를 수 있는 특징적 외모가 없다면 ‘모모녀’, ‘모모남’으로 부르기도 했다. 다행히 신분증이 들어있다면 그들은 이름을 찾을 수 있었지만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 그들은 그렇게 이름도 없이 별명이 적힌 반창고를 이마나 팔에 두른 채 사경을 헤매야 했다.

 한 노인은 진저리를 치며 말했다. 6.25때보다도 더 한다고. 6.25때도 이러지는 않았다고.

 처음에는 들어오는 환자를 모두 살리기 위해 수술을 했지만 수술도구와 인원과 약품이 턱없이 부족했다. 하는 수 없이 의사들은 환자의 우선순위를 정하기 시작했다. 수술을 하면 살 수 있는 사람부터 수술에 들어가는 것, 그리고 위급한 순서부터 수술하는 것. 그 과정에서 골절을 입거나 가벼운 열상 환자는 나중에 수술을 받아야만 했다. 하지만 아무도 자신의 순서가 밀리는 것에 있어서 문제제기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문제는 약품이었다. 피는 시민들의 자발적인 헌혈로 남아돌았지만 수술기구나 드레싱 장비, 수술할 때 필요한 산소와 약품들이 바닥이 나버렸던 것이다. 그렇다고 수술기구와 약품이 공급될 때까지 기다릴 수는 없었다. 생명이 경각에 달렸는데 손 놓고 있을 수마는 없었다. 의료진들은 수술기구나 드레싱 장비를 소독할 시간도 없이 반복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부족한 것은 그것뿐이 아니었다. 의사들도 턱없이 부족했다. 인턴, 레지던트는 물론, 의과대학 4학년 학생들까지 수술에 합류했고, 일주일간, 잠이라고는 한숨도 잘 수 없었다. 이 과정에서 옷을 갈아입으러 집으로 갔다가 급한 수술 연락을 받고 병원으로 오던 2년차 레지던트는 계엄군에게 끌려갔다가 도망쳐 나오기도 했다.

 이들은 쪽잠도 자지 못한 채 일반외과는 물론 정형외과와, 흉부외과, 비뇨기과 등 모든 수술실에서 그렇게 밤낮을 종종거리며 환자를 수술하고 돌봤지만 차디찬 병원복도에 누워 생과 사를 넘나드는 부상자를 모두 다 돌볼 수는 없었다.

 그렇게 전대병원 응급실을 찾은 부상자는 약 300여명. 나중에 군부로부터 받을 박해가 두려워 차트도 작성하지 않은 채 치료만 받고 집으로 돌아간 부상자는 포함되지 않은 숫자였다. 

 의료진들은 이 기막힌 광경을 믿을 수 없었다. 이들이 과연 누구를 위해 죽어나가는지. 무엇을 위해 이렇게 사람들의 목숨을 버렸는지. 누구의 손에 이렇게 무참히 죽어나가는지. 자신들의 손에 피를 묻혀가며 죽어가는 환자를 돌보고 있는데 언론에서는 연일 광주사람을 폭도로 내몰고, 사상자는 없다고 발표하고 있었다. 아니, 사상자가 있긴 했다. 언론은 무장한 폭도들에 의해 군인과 경찰 다수가 부상을 입었다고 발표했다.

 헌데 19일 밤이었다. 계엄군들은 도망간 학생들을 찾는다며 전대병원으로 쳐들어와서는 병원 응급실에 최루탄을 발사했다. 순간 응급실은 지옥이 따로 없었다. 수술을 하던 의료진들은 눈물을 쏟아내며 발작처럼 기침을 해대야 했지만 하던 수술을 멈출 수는 없었다. 무고한 시민들의 목숨을 위협하는 그들은 이미 적이었다. 같은 민족끼리 아군적군 나누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며, 있어서도 안 되는 불행한 일이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대한민국 국군이 적군이었다. 하지만 의료진들은, 병원을 찾은 사람들은, 무력하기만 했다. 그들을 향해 총부리를 겨누는 대신 그 순간에도 생과 사와 힘겹게 거래를 하는 환자들을 돌보야 했고, 최루탄을 씻어내야 했다. 계엄군들이 시내를 장악하고 있는 동안 총알은 무시로 날아왔고, 날아오는 총알을 피해 지그재그로 돌아다니며 수술실과 환자들이 누워 있는 복도로 이동해 다녀야만 했다.

 광주시민들이 죽어야 하는 이유는 한 가지였다. 군부가 다시 정권을 잡기 위해서는 그들이 죽어야 했다. 정권에 눈이 먼 일당들은 빛나는 제단 앞에 바쳐질 피의 제물이 필요했다. 그 제단 앞에 도시 하나쯤 바쳐도 좋다고 생각했다. 당시 전남대 병원 옥상에는 시민군들이 기관총(LMG)을 2대 설치해 놓았는데, 그 때문에 21일, 계엄군이 광주를 빠져나가면서 병원을 향해 M16을 난사했다. 말 그대로 무차별 난사였다. 총알은 수술 중이던 수술실까지 날아왔다. 의료진들은 날아오는 총알을 피해 잠시 몸을 낮추고 있다가 그들의 총질이 멈추면 다시 하던 수술을 계속했다. 나중에는 날아오는 총알을 막기 위해 창문마다 매트리스로 가려야 했다.

 눈앞에서 젊디젊은 목숨들이 맥없이 죽어 나갔지만, 그들의 죽음을 슬퍼할 겨를도 없었다. 다른 생명을 살리기 위해, 그들은 부지런히 환자와 환자사이를 오가야만 했던 것이다. 계엄군이 후퇴하고, 시민군들은 여기저기서 암매장된 주검들을 파오고, 부상당한 시민들을 실어 날랐다. 아주머니들은 손수 싼 주먹밥과 빵들을 가져와 입원환자와 의료진들에게 나누어주었고, 한쪽 영안실에서는 자식을 잃은 어머니들의 곡성이 이어졌다. 관이 부족해 그대로 방치된 주검들이 부패해가면서 나는 냄새들이 병원을 뒤덮어도 사람들은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했다. 아니, 살아있는 것 자체가 고통이었다고 했다. 동료들과 함께 죽지 못하고, 살아있는 것이 오히려 죽은 자들에게 죄를 짓는 것만 같다고 했다. 

 광주는 철저히 고립된 도시였고, 버려진 도시였다. 아무도 광주를 구하러 오지도 않았고, 죽음에 직면해 신음하는 사람들의 아픔도 알지 못했다. 고립의 시간이 길어지면서 그나마 부족하던 약품이 동이 나기 시작했다. 시민군들은 급하게 나가서 시내 약국을 돌며 병원의 어려운 사정을 알리기 시작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헌혈을 하러 오듯, 시내의 약국들이 필요한 약품들을 내놓기 시작했다. 솜이며 거즈, 많은 종류의 약들이 모여들었다.

 의료진들은 잠을 자지 못해 눈이 충혈 되고 몸이 고단했지만 그래도 그때만큼 살아있다는 존재감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그것은 개인적인 행복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살아 당신들을 돌볼 수 있다는 존재의 책무감. 그것은 잠시도 쉬지 않고 손을 움직여 고귀한 생명을 살려내야 한다는 소명의식과 같은 것이었다.

   


  

  

  

출처 : 5.18 민주화운동 - 80518
글쓴이 : 곰낭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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