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2. Humanities/22_한국역사

광복 직후 조선인 27명 학살 ‘사할린 미즈호 사건’

忍齋 黃薔 李相遠 2008. 7. 21. 0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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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전쟁에서 패한 일본 국왕의 무조건 항복 선언이 라디오를 통해 울려퍼진 지 일주일 뒤인 1945년 8월23일 남부 사할린의 미즈호(瑞穗·현 러시아령 포자르스코예) 마을. 조선인과 일본인이 반반씩 나눠 살던 250여호 규모의 이 농촌마을에서 지배계층인 일본인들은 '황군'이 패배했다는 사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울분에 찬 이들 중 한 무리는 사냥용 엽총과 군도(軍刀), 나무 말뚝 등을 들고 광기에 찬 눈으로 조선인 가정을 돌아다니며 분풀이 대상을 찾았다.

 

그중 한 허름한 초가집에는 30대 어머니와 생후 6개월에서 12살 정도 된 아이들이 어깨를 나란히 붙이고 자고 있었다. 일본인 청년단에 몸담고 있던 호소가와 다케시(당시 17세) 등 2명은 초가집에 난입해 이들 일가족을 군도로 무참히 살해했다. 호소가와는 젖먹이에게까지 흉기를 휘두르면서도 패전의 원인이 조선인들의 스파이 활동 탓이었다며 스스로 '애국자'라 자위했다. 호소가와와 같이 애국주의 광기에 빠진 일본인 19명은 몇 개 조로 나뉘어 1945년 8월20일 밤부터 25일 아침까지 엿새 동안 미즈호 마을 조선인들을 무차별 습격했다. 이로 인해 아무 죄 없는 부녀자 3명과 어린이 6명을 비롯해 조선인 27명이 목숨을 잃었다.

본보가 14일 국무총리 산하 '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 진상규명위'로부터 단독 입수한 '사할린 미즈호 조선인 학살사건 진상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이 사건은 패전 후 광기에 휩싸인 일본 청년단과 재향군인회에 의해 조직적으로 자행된 만행이었다. 이 사건은 그동안 르포 작가 등 극소수 전문가 외에 일반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진상규명위가 2005년 9월부터 착수한 진상 조사에 최근 결론을 내면서 베일에 싸여 있던 조선 민간인들의 한 맺힌 죽음이 국가기관의 공식 문서에 의해 처음으로 실체가 드러나게 됐다.

보고서에 따르면 일제의 사할린 식민정책에 따라 미즈호 마을로 이주한 일본인들은 다양한 혜택을 누리며 국가에 강한 충성심을 가지고 있었다. 패전 후 소련군이 사할린 일대로 쾌속 진군하면서 퇴로인 항구가 차단되자 이들은 정신적 공황상태에 빠졌다. 결국 마을 지도층은 소련군이 점령할 경우 자신들에게 해가 될 수 있는 조선인들을 '소련 스파이'로 몰아 살해할 것을 기획하기에 이른다.

만행이 자행된 뒤 소련측 군사재판에 의해 주모자로 알려진 일본인 3∼4명은 사형에 처해졌으나, 당시 조선인들 누가 어떤 식으로 희생이 됐는지 등 자세한 내용은 나온 적이 없고 일본도 지금까지 침묵으로 일관해왔다. 조사책임자인 방일권 진상규명위 조사 1과 팀장은 "미즈호 사건 가해자들이 저지른 행동은 국가를 위해서라면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못하는 식민지 지배체제의 병든 인간성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도경 기자 yido@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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