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키운 어린 인재, 일본이 빼간다
'외국 유학생 30만' 목표 장학금·생활비 내걸고 전국 고교 돌면서 유치…취업·창업까지 지원
정주현(여·19)양은 올 2월 경기도 안산 동산고를 졸업하고 일본 명문대인 와세다(早稻田)대에 곧바로 진학했다. 작년 한 해 동안 정양을 포함해 이 학교 학생 7명이 일본 대학에서 입학 통지서를 받았다. 동산고는 별도의 유학반도 없는 학교다.
이 학교 김재영(55) 교감은 "3년전부터 매년 와세다대 관계자들이 직접 학교로 찾아와 입학 설명회를 열고 있다"며 "2000년 1명이 진학한 이후 일본 대학으로 진학하는 학생이 매년 늘고 있다"고 했다.
와세다대는 2007년 해마다 학생 2명을 추천할 수 있는 권한을 동산고에 주는 협정까지 맺었다. 김 교감은 "한국 사무소도 없는 와세다대 직원들이 일본과 한국을 오가면서 국내 우수 고교생들을 모집하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고 했다. 학령인구는 줄고 고령화가 심화되면서 해외 우수 인재를 확보하기 위한 국가들의 전쟁이 본격화되고 있다. 연구원이나 기술자뿐만 아니라 이제 막 고등학교를 졸업한 인재들까지도 공략대상이다. 가장 적극적인 나라는 우리의 이웃인 일본이다.
2008년 일본 정부는 '외국인 유학생 30만명 양성' 계획을 발표했다. 문부과학성, 외무성, 경제산업성, 후생노동성 등이 공동으로 발표한 이 계획의 핵심은 현재 11만8000명 수준인 일본 내 외국인 유학생을 2020년까지 30만명으로 늘린다는 것이다.
출산율이 낮아져 취학연령대 인구가 줄어들자, 해외에서 엘리트 인재를 유치해 '늙은 나라' 일본의 경제를 살리는 활력소로 삼겠다는 계산이다. 이 계획에는 ▲외국인 유학생들이 일본에 입국하지 않고도 미리 입학 수속을 밟을 수 있게 출입국 제도를 뜯어고치고 ▲입국 후 1년간 이들이 머물 숙소를 제공하며 ▲외국인 유학생들이 학업을 마친 뒤 일본 기업에 취업하거나 창업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방안도 포함됐다.
- ▲ 지난 4일 서울 역삼동에 있는 리쓰메이칸아시아태평양대학 서울사무소 직원들이 가을학기 입학신청서를 정리하고 있다./이태경 기자 ecaro@chosun.com
현대경제연구원 이부영(40) 실물경제실장은 "1990년대 '잃어버린 10년' 동안 경기 침체와 임금동결로 심각한 인재 유출 사태를 경험한 일본이 재도약을 위해 해외 인재를 빨아들이고 있다"며 "극심한 이공계 기피와 학령인구 감소를 겪고 있는 일본 입장에서 수학, 물리, 화학 등에서 일본에 비해 학력이 높은 한국 인재는 매력적"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교육과학기술부의 자료에 따르면 어학연수를 포함해 일본 대학에서 공부하는 한국인 유학생은 2006년 1만5158명에서 2008년 1만7274명으로 늘어났다. 한국인 대학생이 유학 중인 국가 순위에서 일본은 2006년 미국, 중국, 영국, 호주에 이어 5위였지만 2008년에는 영국, 호주를 제치고 미국, 중국에 이어 3위로 올라섰다.
일본 정부 뿐 아니라 민간의 노력도 두드러진다. 일본 대학들은 우수한 한국 학생을 확보하기 위해 한국 대학들 뺨치게 적극적으로 뛰고 있다.
'제주외국어고·대정여고(6일), 부산외국어고(7일), 포항제철고(8일), 대구외국어고(14일), 부산국제외국어고, 부산국제고(15일), 여수 충무고(18일)….' 서울 강남역 근처 한 빌딩에 있는 일본 리쓰메이칸아시아태평양대학(APU) 서울사무소 한쪽에는 제주에서 수원까지 전국 고등학교 이름 14개가 빼곡히 적힌 '5월 일정표'가 걸려 있다. APU 서울사무소 윤창범(40) 팀장은 "우수한 한국 학생을 뽑기 위해 전국 고등학교를 돌며 설명회를 열고 있다"며 "지난달에는 20곳을 돌았고, 1년이면 200개 학교를 다닌다"고 말했다.
APU는 일본 교토에 있는 명문 사립 리쓰메이칸(立命館)대가 벳푸(別府)시에 세운 국제화 대학이다. 서울사무소를 낸 것은 1998년이지만 입학 문의가 크게 늘어난 것은 최근 수년간의 일이다. 일본 대학이 한국 학생을 흡인하는 가장 큰 힘은 장학금에서 나온다. 일본 문부과학성은 2007년부터 경제산업성, 14개 일본 기업, 지방자치단체와 함께 '글로벌 비즈니스 리더 육성 프로그램(GBL)'을 운영하고 있다. 일본 기업에서 일하려는 외국인 유학생들에게 학비를 면제해 주고 생활비를 매월 12만6000엔(161만4000원)씩 지급하는 프로그램이다. APU는 GBL프로그램이 운영되는 12개 일본 대학 가운데 하나다.
윤 팀장은 "이 같은 교내외 장학금을 통해 일본 대학에 진학하는 한국 학생은 65%가 장학금을 받는다"며 "자연히 일본 대학에 직행하려는 학생들의 수준도 매년 높아져서, 원서를 내는 학생들의 평균 토익(TOEIC) 성적이 850점에 도달했다"고 말했다. 그는 "올해 APU를 졸업한 한국인 졸업생 100여명 가운데 대학원에 진학한 학생(40여명)을 제외하고, 나머지 60명 가운데 57명이 파나소닉, 후지쓰 같은 대기업에 취직했다"고 했다.
주한일본대사관에 따르면, APU 이외에도 현재 일본 대학 4곳이 서울과 부산에 사무소를 내고 있다. 이들은 일본 정부, 대학과 협력해 한국어 홈페이지를 개설하고 일본어 교육, 장학금 안내뿐만 아니라 일본 내 취업까지 지원하고 있다.
서울대 입학관리본부 김경범(44) 연구교수는 "지난해 일본 와세다대를 방문했다가 한국인 재학생이 500명이 넘는다는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랐다"고 했다. 김 교수는 "이들이 졸업 후 한국에 돌아와 한국 경제에 활력소가 될 수도 있는 만큼 일방적으로 '해외 진학은 인재 유출'이라고 비판할 수는 없다"며 "각국이 우수한 인재를 더 많이 확보하려고 경쟁하는 만큼, 우리도 해외의 우수 인재를 유치하는 방식으로 대응해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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