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1. Dr. Sam Lee/15_80년5월18일

[길을찾아서] ‘수배자 윤한봉’ 뒷바라지…남영동서 고초

忍齋 黃薔 李相遠 2010. 5. 7. 08:38
반응형

[길을찾아서] ‘수배자 윤한봉’ 뒷바라지…남영동서 고초

한겨레 | 입력 2010.05.06 19:10 | 수정 2010.05.06 21:30

 

[한겨레] [5·18 30돌-5월을 지켜온 여성들] ⑤ 김은경

마흔 넘어 목회자의 길"오월 노래 올해 재녹음"

또 눈물을 쏟는다. 백번 천번을 겪어도 5월 이야기만 나오면 가슴이 벌렁이고 울컥해진다. 김은경 목사는 '5월 광주와 윤한봉'의 이름이 나오자 연방 눈시울을 붉힌다. 무엇이 그를 이렇게 아프게 하는 것일까.

 

 

김은경은 전남여고 시절 < 씨알의 소리 > 에 글이 당선되면서 함석헌(1989년 작고) 선생을 만났다. 그것이 부러울 것 없이 곱게 자란 '소녀'를 거친 바다로 이끌어간 인연이 되었다. 그림도 곧잘 그렸고 공부도 잘하던 김은경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은 각별했다. 그러나 딸은 그런 아버지의 기대를 저버리고 대학 진학을 포기한 채 함석헌 선생의 수행비서를 자원하고 나섰다. 그렇게 시작된 기독교청년운동은 와이더블유시에이(YWCA)와 송백회 활동으로 이어졌고, 뒤늦게 한신대에 입학한 그는 송백회의 수배자 은신처 마련과 기금모금 등을 위해 서울과 광주를 잇는 고리 구실을 했다.

그래서 1980년 5월18일 당시 김은경은 광주에 없었다. 하지만 그는 광주와 함께하는 길을 갈 수밖에 없었다. '5·18'은 광주에서만 시작되고 광주에서 끝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김은경에게 5월항쟁은 정작 광주에서 상황이 끝난 이후부터 시작됐다. 5월23일 내란음모죄로 현상수배된 윤한봉이 81년 4월 마산부두에서 밀항선을 타고 미국으로 망명하기까지 11개월 동안 그는 윤한봉의 수호천사로 헌신했다.

5월17일 밤 계엄군의 예비검속을 피해 나주로 갔던 윤한봉은 항쟁 기간에 봉쇄된 광주로 끝내 들어오지 못한 채 도피의 길로 나섰다. 김은경은 그와 광주를 잇는 연락병이자 거처와 자금을 공급하는 지원병이었다. 수배자 뒷바라지는 당사자 못지않게 위험을 무릅써야 했다. 윤한봉을 만나러 갈 때는 몇 번씩 버스를 바꿔타고 왔던 길을 빙빙 돌아 미행이 있는지 확인해야 하는, 늘 긴장의 연속이었다.

"오빠가, 그렇게 의연하고 결연했던 오빠가 수배생활로 지쳐서… 조금씩 망가져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게 너무 맘이 아팠어…. 오빠는 매사에 철저한 사람이었어. 잠잘 때조차도 만약의 검거에 대비해 양말 속에 칼을 넣고 있었어… 자신이 체포되면 무고한 사람들이 다칠까봐 자살하겠다고 하면서. … 밀항이 결정됐을 때 오빠는 마지막까지 받아들이지 못했어… 광주로 내려간다고 난리쳐서 그때 엄청 소리지르고 싸웠던 기억이 나." "배 안에서 혼자 숨어서 먹을 수 있는, 마른안주·땅콩·멸치 같은 것들을 사서 건네주고… 멀리 어둠 속에서 술취한 사람처럼 선원들(정찬대와 최동현)의 부축을 받으며 배(레오파드호)에 오르던… 그것이 오빠의 마지막 모습이었어."

그길로 학교로 돌아온 그는 기숙사에서 밤새도록 숨죽여 울다 쓰러져 1주일을 혼절하다시피 누워 있었다.

이듬해 11월 그는 결국 윤한봉 밀항 지원 사실이 드러나 수사를 받아야 했다. 전북 군산에서 터진 이른바 '오송회 사건'에 윤한봉의 도피처를 주선해준 이광웅 선생이 연루된 것이었다. 정용화·최권행·홍의윤, 윤한봉의 두 동생 경자와 영배 등등과 함께 김은경은 악명 높은 치안본부의 남영동 대공분실에 끌려가 고초를 겪었다.

그때 도피처를 둘러대다 거짓말로 알리바이를 댔던 인연으로 그는 남편을 만났다. 당시 남편은 뒤늦게 목회자의 꿈을 안고 한신대에 다니던 '맘씨 좋은 예비역 아저씨'였다.

다행히 구속되지 않고 풀려나온 그는 결혼한 뒤 남편의 목회활동을 도왔다. 충청도의 한 교회에서 일할 때 '전라도와 광주시민들을 폭도'라고 비난하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멀리 광주로 가는 고속버스를 보면서 걷고 걸으며 하염없이 울기도 했단다.

그렇게 가끔씩 바닥 모를 깊은 절망과 우울… 눈물을 주체할 수 없어 몸부림치는 그를 위해 남편은 1년에 두세번은 광주에 데려와 위로를 받게 해주었다. 그런 남편이 갑작스런 교통사고로 먼저 세상을 떠나자 충격을 딛고 뜻을 이어 마흔 넘어 목사가 된 그는 이제 전북 익산에서 농촌 목회와 여성단체 활동을 하면서 전북통일연대 상임대표도 맡아 꿋꿋이 살고 있다.

81년 겨울 '임을 위한 행진곡', '5월의 노래'를 몰래 녹음해 전국 곳곳에 알렸던 그는 "올해 30돌 기념으로 당시 함께 노래를 했던 사람들이 모여서 공식적으로 재녹음을 한다"며 감회에 젖었다.

이제는 '5월을 희화화시키지 말고, 5월 때문에 서로 상처 주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목사 김은경. 그의 눈에는 눈물이 다시금 그렁그렁 고인다.

정리 광주전남여성단체연합

세상을 보는 정직한 눈 < 한겨레 >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