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0. 韓山李氏/01_韓山 李氏

[스크랩] 목은 이색선생의 일대기 -목은고(牧隱藁)-

忍齋 黃薔 李相遠 2010. 12. 23. 0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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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은 이색선생의 일대기 -목은고(牧隱藁)-

 

이색은 어려서부터 뛰어나게 총명하여 스스로 글을 읽을 줄 알았고, 한번 보기만 하면 다 외웠다. 지정(至正) 신사년에 이색의 나이 겨우 14세였는데, 본국의 성균시에 합격하여 우뚝하게 이미 명성이 있었다.

 

막 관례를 하고 혼인을 해야 할 시기에 한때의 고문 망족(高門望族)으로 사위를 가리는 이들이 모두 이색에게 자기 딸을 시집보내려 하여 심지어 혼인하는 날 저녁까지도 서로 다투었다. 끝내 안동권씨로 명위장군(明威將軍) 제군만호부 만호(諸軍萬戶府萬戶)에 선수(宣授)되었고 본국에서 중대광(重大匡) 화원군(花原君)에 봉해진 권중달(權仲達)의 딸이며, 원조(元朝)에서 조열대부(朝列大夫) 태자 좌찬선(太子左贊善)이 되었고, 본국에서 삼중대광(三重大匡) 도첨의 우정승(都僉議右政丞)을 지낸 권한공(權漢功)의 손녀에게 장가들었다.

 

무자년에 가정(稼亭) 선생이 원조에서 중서사 전부(中瑞司典簿)가 되었으므로, 이색은 조관(朝官)

의 자제로서 국자감 생원이 되었다. 학교에 있는 3년 동안에 중국의 연원 있는 학문을 받아서 절차탁마하고 깊이 연구하여 더욱 크게 진취되었고 성리(性理)에 관한 글에 더욱 조예가 깊였다.

신묘년 정월에 가정이 본국으로 돌아와서 작고하자, 이색이 분상하여 3년상을 마쳤다.

 

계사년 5월에 공민왕이 과거를 설치하여 선비들을 시험 보였는데, 이색이 장원하여 숙옹부 승에 제수되었다. 가을에는 장동행성의 해원(解員)에 합격하고, 곧 진봉사(進奉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충원되어 경사(京師)에 갔다.

……

 

무술년에 국사를 말한 것으로 권귀(權貴)에게 미움을 받게 되어 한때 간관(諫官)들이 모두 좌천(左遷)됨에 따라 이색은 상주(尙州)로 가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행장을 갖추고 새벽에 떠나려 하였는데, 그날 밤에 어명이 내려져 유독 그만이 통의대부(通議大夫) 추밀원우부승선 지공부사(樞密院右副承宣知工部事)에 승진 임명되었다.

 

왕이 재상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색은 재덕(才德)이 출중하여 다른 사람에 비할 바가 아니니, 용사(用舍)를 이렇게 하지 않으면 인심(人心)을 굴복시킬 수 없다.

이로 말미암아 후설(喉舌)의 자리에 가까이 있어 기밀한 일을 참여하여 관장한 지 무릇 7년 동안에 계책을 진설하고 성심으로 인도하여 국정을 보익한 것이 매우 많았다.

……

 

공민왕이 노국공주(魯國公主)를 위하여 왕륜사(王輪寺)의 동편에 그의 영전(影殿)을 짓는데, 극도로 사치스럽고 화려하게 하여 수년 동안이나 일을 완성하지 못했다. 그리고 다시 마암(馬巖)의 서쪽에 땅을 가려서 더욱 극도로 굉장하게 영전을 짓다 보니 노동력과 비용이 대단히 많이 들었다.

 

그러자 시중(侍中) 유탁(柳濯)이 동지밀직(同知密直) 안극인(安克仁), 첨서밀직(簽書密直) 정사도(鄭思道)에게 말하기를, “마암의 역사(役事)는 백성들을 괴롭히고 재물을 손상시킬 뿐만 아니라, 술사(術士)의 말에도 여기에 집을 지으면 나라에 이롭지 않다고 하니, 내가 부재(不才)한 사람으로 외람되이 백관(百官)의 대표가 되어 사직(社稷)을 걱정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차라리 죽기로써 간하겠소.”라고 하였다. 이에 상서(上書)하여 그 불가함을 극력 말하였다.

 

그러자 왕은 크게 노하여 유탁 등을 하옥시키고, 다른 일로 트집을 잡아 그를 죽이려고 이색에게 대중에게 유시(諭示)하는 글을 짓게 하였다. 이에 그가 죄명을 묻자 왕이 이렇게 답했다.

“오랫동안 수상(首相)으로 있으면서 불의(不義)한 일을 많이 행하여 큰 가뭄이 들게 한 것이 첫 번째이고, 연복사(演福寺)의 전답(田畓)을 빼앗은 것이 두 번째이고, 노국공주가 죽었을 때 3일 동안 제사에 불참한 것이 세 번째이고, 노국공주를 장사지낼 때 예()를 강등시켜 영화공주(永和公主)의 전례에 따라서 한 것이 그 네 번째이다. 불충하고 불의하기가 무엇이 이보다 더 크단 말인가?

 

이색은 이에 이렇게 대답했다.

“이것은 다 지나간 일입니다. 요즘에 유탁이 상서하여 영전의 역사를 정지하기를 청하였으니, 지금 비록 네 가지 일로 죄를 주더라도 나라 사람들은 모두 상서한 일로 죄를 받는다고 여길 것이고, 또 이 네 가지 일은 모두 죽일 만한 죄가 아니니, 다시 생각해 주시옵소서.

 

왕은 더욱 노하여 글을 지으라고만 더욱 급히 재촉하였다. 그러자 공은 엎드려서 다시 말하였다.

“신이 차라리 죄를 얻을지언정, 어찌 감히 글을 지어서 죄를 만들 수 있겠습니까? 또 상서한 일은 영도첨의(領都僉議) 또한 알고 있습니다.

 

이때 신돈(辛旽)이 영도첨의가 되어 매우 총애를 받으면서 용사(用事)하였는데, 그가 막 왕의 곁에 있다가 마지못하여 말하기를, “노신(老臣) 또한 그 사실을 알았으나, 다만 왕께서 노여워하실까 하여 감히 고하지 못했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왕이 시중 이춘부(李春富)에게 명하여 국인(國印)을 봉하게 하니, 이춘부가 엎드려서 감히 나아가지 못하였다. 신돈이 “의당 말한 사람으로 하여금 봉하게 해야 합니다.”라고 말하였다.

이에 이색에게 명하니, 그는 왕이 더욱 노할까 염려하여 이에 국인을 봉하고 거기에 “신 이색은 삼가 봉합니다.”라고 썼다. 그러자 왕이 “내가 부덕(不德)하기 때문에 내 말을 따르지 않은 것이니, 이것을 가지고 가서 덕 있는 이를 찾아서 섬기거라. 우리 태조께서도 처음에 어찌 왕손이었던가! 내가 자리를 피해 가겠다.”라고 말하였다.

 

이에 정비궁(定妃宮)으로 옮겨가 거처하면서 좋은 음식도 윤허하지 않았다. 그래서 다음날 신돈이 왕의 노여움을 풀려고 왕에게 아뢰고, 왕명을 따르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이색을 하옥시키고 책망하여 신문하였다.

 

이에 이색은 이렇게 말하였다.

“신이 포의(布衣)로부터 외람되이 주상의 알아줌을 입어 갑자기 재상 지위에 이르렀으므로, 주상의 덕에 보탬이 될 수 있는 일이 있기만 하면 죽을힘을 다해서 말하여 만분의 일이나마 보답하려고 생각하였습니다. 지금 시중 유탁이 옥에 갇혀 있는데, 신이 감히 죽을죄가 없다는 것을 남김없이 다 말한 것은 왕께서 감동을 받고 잘못을 깨달아서 대신(大臣)을 함부로 죽이지 않게 하려는 뜻에서였습니다.

 

다시 울면서 말을 이었다.

“신이 우는 것은 죽음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다만 이 한 가지 과실로 인하여 왕의 명성이 후세에 아름답지 못하게 될까 염려해서입니다.

옥관(獄官)이 이 사실을 왕께 갖춰 아뢰니, 왕이 마침내 깨달아 느끼는 바가 있어서 유탁 등을 석방시키고, 이색에게 목욕(沐浴)하고 조회하도록 하였다.

……

 

공이 집을 다스림에 있어서는 먹을 것이 있고 없음을 묻지 않았고 비록 먹을 것이 자주 떨어지는 지경에 이르러도 그것 때문에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다. 평생에 급한 말이나 당황하는 기색이 없었고, 가인(家人)이나 노복(奴僕)이 혹 과실이 있을 경우에 반드시 천천히 사리로써 깨우쳐 타일러 주었고, 성내는 말을 한 적이 없었다.

 

술자리에서는 조용하고 침착하게 처신하여 또한 취하는 경우가 없었고, 심회가 쾌활하고 언동이 조용하며 희로(喜怒)와 규각(圭角)을 드러내지 않아서 혼연한 일단(一團)의 화기(和氣)일 뿐이었다.

 

오랫동안 총록(寵祿)의 지위에 있었으나 교만한 태도를 볼 수 없었고, 만년에 험난한 시기를 만났으나 실의에 찬 모습을 볼 수 없었으며, 감옥에 갇힌 것도 욕될 것이 없었고, 높은 관작도 영화로울 것이 없었으니, 그의 마음을 잘 수양하고 지켜 실천한 데에 대하여 확고하여 흔들리지 않았다고 이를 만하다.

 

 

 

 

- 『목은고(牧隱藁)』 중에서

 

출처 : 한산이씨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후손들
글쓴이 : 매일하우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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