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요世評]길 위에서 오월을 묻다
입력: 2012.05.22 00:00
박진영<박진영스피치문화연구소 대표>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보스턴은 미국 독립운동이 시작된 곳이기도 합니다. 보스턴 대학살은 영국으로부터 자유와 독립을 쟁취하고 싶은 주민들에게 독립운동의 도화선이 된 매우 의미 있는 사건입니다. 그들은 주요 유적지를 연결해서 볼 수 있도록 역사 산책 코스를 만들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보스턴의 프리덤 트레일, ‘자유의 길’입니다.
프리덤 트레일에는 빨간 색의 굵은 선이 그려져 있고, 그 길을 따라가다 보면 꼬박 4시간이 걸린다고 합니다. 약 4㎞의 길에 독립운동 당시 많은 집회가 열렸던 건물 등 열여섯 군데의 역사적인 장소가 모여 있어 많은 관광객들이 역사를 체험하고 기억할 수 있게 만든 것입니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입니다. 무엇인가를 망각해야만 살 수 있습니다. 자신에게 불리한 기억이나 충격적인 과거의 일을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뇌의 깊은 곳으로 이동시켜서 거의 망각하게 만듭니다. 만약에 고통스러운 기억을 계속 가지고 살아간다면 결국 미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에는 의식적인 노력을 통해서라도 기억하게 해야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점점 잊혀져가는 정신과 의미를 되새겨보는 것은 그래서 중요합니다. 역사의 현장을 체험하게 하거나 사진과 영상물, 조형물 등을 특정한 곳에 만들어 두고 보게 하는 것은 장기기억으로 만들기 위해 필요한 작업인 셈입니다. 특히 여행객들에게 역사적인 장소들을 이어주는 길을 걷게 하는 것도 그 길 위에 축적된 역사와 문화의 흐름에 대해 느껴보면서 과거의 기억에 대해 현실감을 갖게 하는 아주 소중한 일입니다.
광주에는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뜨거웠던 현장을 잇는 오월길이 있습니다. 지난 주말에는 5·18 32주년을 맞아 전국에서 모인 518명의 참가자들이 무박 2일 동안 이 오월길을 걷는 행사가 있었습니다. 전남대 정문에서 출발해 5·18유적지 26군데를 거쳐 그 다음날 새벽 4시에 국립 5·18 민주묘지에 도착해 로드콘서트 ‘새벽’을 본 다음 묘지 참배로 마무리하는 일정이었습니다.
참가자 가운데는 임용시험을 앞두고 참가한 예비 교사도 있었고, 아빠와 어린 딸이 손을 잡고 함께 도보하는 모습도 볼 수 있었습니다. 특히 경기도 의정부에서 단체로 참석한 여중생들은 힘든 일정 중에도 서로의 땀을 닦아주며 재잘거리는 모습이 참 예뻐 보였습니다. 무슨 생각으로 오월길을 걷겠다고 마음먹었는지 궁금해서 걷는 소감을 물었습니다. “그 당시의 영상물을 봤는데요. 우리나라에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정말 믿어지지 않아요.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어요?”라며 되묻는 학생이 있는가 하면 “지금 너무 덥고 힘들어요. 그래도 살 빠지겠다는 희망이 하나 보여요” 라고 씩 웃으며 대답하는 학생도 있었습니다.
해맑은 표정을 한 그들의 얼굴에는 오월의 햇살이 따뜻하게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비록 기억할 게 없어서 시대적인 공간적인 공감이 떨어지지만 사람과 사람, 그리고 역사의 발자취를 느끼게 해줄 이러한 경험이 헛되지 않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참가자들은 계엄군의 무자비한 집단 발포로 희생된 사람들의 주검을 안치하고 빈소를 차렸던 상무관과 5·18 민주성당으로 불리기도 하는 남동성당 등을 찾았습니다. 해설사는 금남로 일대를 걸으며 학생에서 시민으로 시위가 번졌던 과정을 다소 격양된 마음을 애써 억눌러가며 생생하게 설명했습니다.
오월길을 따라가면서 저도 이런저런 생각을 했습니다. 우선 대량 희생의 비극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우리들이 어떤 노력을 했을까? 또 우리 사회가 자신과 정치적 견해가 다른 사람들의 자유와 인권을 얼마나 잘 보호하고 있는지를 돌이켜보게 했습니다.
광주의 오월길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습니다. 보스턴의 프리덤 트레일처럼 오월길을 많은 사람들이 걸었으면 좋겠습니다. 광주를 찾는 사람들이 정말 걷고 싶은 길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게 바로 오월 대동의 길이 아닐까요? 저도 5월이 가기 전에 5개 주제의 18개 길 가운데 이제 두 번째 길을 걸어봐야겠습니다.
http://www.namdonews.com/?xmode=contents&uid=319560§ion=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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