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1. Dr. Sam Lee/18_FaceBook_Twitter

2013년 8월6일 Facebook 이야기

忍齋 黃薔 李相遠 2013. 8. 6. 23:59
반응형
  • profile
    [간헐적 단식, 의사로선 ‘비추’입니다]
    한겨레 사회.의료.건강 등록 : 2013.04.15 19:41

    [사진] 명승권 국립암센터 암정보교육과장 가정의학과 전문의

    <명승권의 건강강좌>

    최근 방송에서 ‘간헐적 단식’이 소개된 뒤 관련 서적이 쏟아지는 등 사회적인 논란거리가 됐다. 우선 간헐적 단식이란 평소대로 먹다가 일주일에 한두 번 이상 16~24시간 동안 먹는 것을 중단해 배고픈 상태를 지속하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완전히 아무것도 먹지 않을 수 있지만 보통 물이나 열량이 낮은 커피는 마시기도 한다. 옹호론자들은 이런 단식을 통해 암이나 당뇨 등을 예방하고 잠자는 시간을 길게 해 건강에 도움이 된다고 주장한다.

    간헐적 단식이 건강에 도움이 되는 주요 이유는 ‘아이지에프-원’(IGF-1)이라는 인슐린 유사 성장인자와 관련이 있다. 이 성분은 단백질로 구성돼 있으며, 혈당을 조절하는 인슐린과 구조가 유사하면서 성장호르몬에 자극을 받아 만들어진다. 이 때문에 아이지에프-원은 여러 장기에 있는 세포를 성장하게 만들면서 동시에 노화 및 암세포의 성장을 촉진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결국 일정 시간 간헐적 단식을 하면 아이지에프-원의 농도가 떨어져 노화, 암, 당뇨 등의 발생을 줄일 수 있다는 것이다. 간헐적 단식이 건강에 좋은 또다른 이유는 열량 섭취가 줄기 때문에 건강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간헐적 단식의 효과에 대한 연구는 몇몇 동물실험이 오래전부터 알려져 있다. 대표적으로 미국 시카고대학의 칼슨 박사와 호엘젤 박사가 1946년에 <영양 저널>이라는 학술지에 발표한 동물실험 결과가 있다. 당시 실험은 쥐를 30여 마리씩 총 네 집단으로 나눠 한 집단은 아무 때나 음식을 먹게 하고, 나머지 세 집단은 각각 2, 3, 4일마다 하루씩 단식을 시키면서 6주 동안 관찰했다. 그 결과 사흘마다 하루씩 단식을 시킨 쥐들은 수명이 20% 연장됐다. 그 뒤로도 몇몇 동물실험을 통해 단식이 혈당을 떨어뜨리거나, 심장 및 혈관질환의 발생을 줄이거나, 인지 기능을 향상시킨다거나, 수명이 연장됐다는 연구 결과가 여러 편 발표됐다.

    하지만 필자가 의학데이터베이스를 검색해 본 결과 지금까지 발표된 연구 결과 가운데 사람을 대상으로 간헐적 단식과 일반적인 식사법의 효과를 비교한 임상시험은 없었다. 비슷한 연구로는 2012년 <영양과 대사>라는 학술지에 발표된 임상시험이 있다. 54명의 여성을 대상으로 두 집단으로 나눈 뒤 둘 다 6일은 저칼로리 다이어트를 하게 하고, 하루는 금식을 하게 했다. 다만 한 집단은 액체 형태의 음식을, 다른 집단은 일반 음식을 먹게 했다. 8주 뒤 액체 음식을 먹은 집단에서 4㎏, 일반 음식을 먹은 집단에서는 3㎏의 몸무게 감소가 있었다. 하지만 두 집단 모두 간헐적 단식을 하게 했고 기본적으로 저칼로리 다이어트를 시켰기 때문에, 몸무게 감소 효과가 간헐적 단식 때문인지 아니면 저칼로리 다이어트 때문인지는 결론을 내릴 수 없다.

    보통 공복일 때에는 식욕을 늘리는 호르몬이 증가하고, 음식을 섭취한 뒤에는 식욕을 줄이는 호르몬의 농도가 증가한다. 하지만 간헐적 단식을 하면 이 두 호르몬의 균형이 깨지면서 자칫 폭식을 하게 만들 수 있다. 또 식사를 건너뛰거나 불규칙적으로 하면 위산이나 소화액 때문에 속쓰림, 복통 등을 주요 증상으로 하는 기능성 위장장애가 생길 수 있다. 지금까지 연구 결과로는 다이어트나 건강을 위해 간헐적 단식을 권장하기는 힘들다.

    [사진] 명승권 국립암센터 암정보교육과장 가정의학과 전문의

    +++
  • profile
    [비타민제 찾지 말고 채소·과일 섭취를]

    한겨레 사회.의료.건강 등록 : 2012.01.16 20:05

    [사진] 명승권 국립암센터 암역학연구과 선임연구원 가정의학과 전문의

    <명승권의 건강강좌>

    외래 진료를 하다 보면 대다수 환자들이 건강을 위해 합성비타민제를 먹고 있다고 말한다. 담배는 피우고 술은 많이 마시나 운동은 할 시간이 없으니 비타민제를 먹으면서 건강을 유지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비타민제나 이를 포함한 종합영양제는 전체 인구의 약 20%가 먹고 있는 것으로 조사된 바 있고, 미국은 약 50%가 이를 먹고 있다고 한다. 이처럼 비타민이 건강에 좋다고 알려지게 된 근거는 무엇일까? 최근 수십년 동안 발표된 200편 이상의 연구 결과를 보면 각종 비타민, 항산화제, 영양물질이 풍부한 과일과 채소를 많이 섭취하는 경우 심장 및 혈관질환과 소화기암의 발생이 낮아지는 것으로 나온다.

    하지만 화학적으로 합성한 비타민제나 항산화보충제도 과연 건강에 이로울까? 세계적인 의학학술지인 <미국의사협회지>에 발표된 47편의 임상시험들을 종합분석한 연구 결과가 2007년 2월에 발표됐는데, 이를 보면 놀랍게도 비타민 에이(A), 비타민 시(C), 비타민 이(E), 셀레늄, 베타카로틴 보충제를 먹는 사람들은 이를 전혀 먹지 않는 사람들보다 오히려 사망률이 5% 높았다. 필자도 2009년에 국제종양학술지인 <종양학연보>에 22편의 임상시험을 종합해 분석한 논문을 발표했는데, 비타민 A, 비타민 E, 셀레늄, 베타카로틴 보충제를 먹은 집단과 그렇지 않은 집단 사이에 암 발생에 차이가 없었다. 오히려 먹은 집단에서 방광암 발생이 52% 높았다. 29편의 임상시험을 종합 분석해 2010년 발표된 논문에서도 비타민 C 보충제를 하루에 200㎎ 이상 먹는 집단과 그렇지 않은 집단 사이에 감기 발생에는 차이가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1970년대 노벨상 수상자인 라이너스 폴링이 주장했던 고용량 비타민 C 요법은 우리나라에서도 10여년 전부터 일부 의대 교수 등에 의해 공공연하게 선전돼 왔다. 현재 성인 하루 비타민 C 권장섭취량은 영국의 경우 40㎎, 세계보건기구는 45㎎, 미국은 90㎎, 우리나라는 100㎎이다. 이 요법은 최적의 건강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표준 권장량보다 10~200배 되는 양을 섭취하는 것을 말한다. 이 요법의 옹호자인 한 의대 교수는 일반인들의 경우 1000㎎의 비타민 C를 2알씩 하루 3회, 즉 6000㎎을 먹으라고 권고하고 있다.

    하지만 고용량 비타민 C 요법은 가설에 지나지 않으며 미국에서도 임상시험 단계에 있다. 오히려 비타민 C를 하루 1000㎎ 이상 먹으면 설사와 같은 위장장애, 결석, 용혈 등의 부작용이 생길 수 있기 때문에 세계보건기구에서도 권장하지 않는다. 이뿐만이 아니다. 미국암연구협회와 미국 질병예방서비스위원회(USPSTF)에서는 흡연자가 베타카로틴제를 먹으면 폐암의 발생을 높이기 때문에 먹지 말라고 권고하고 있다. 또 질병예방서비스위원회에서는 비타민 A, C, E, 종합비타민제 또는 항산화보충제를 먹어도 암이나 심장 및 혈관질환을 예방한다는 근거가 불충분하다고 분류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비타민을 과일과 채소가 아닌 약으로 먹는 것은 오히려 조기 사망 가능성을 높일 수 있고, 암 예방의 효과도 없다. 일부 의사나 연구자의 주장에 휩쓸리지 말고, 비타민은 하루 권장량을 섭취하되 약이 아닌 음식을 통해서 섭취하도록 하자.

    명승권 국립암센터 암역학연구과 선임연구원 가정의학과 전문의

    +++
  • profile
    → Samuel Lee 아래 '간헐적 단식'이 않좋다는 것은 잘 모르겠지만, 비타민제재가 발암물질이라는 내용은 몇년전 부터 권위적인 의학저널에 발표되는것을 읽고 있어서 신뢰가 가는 글이다. 페친분들! 암걸리 싫으면 비타민 제재를 먹지 마시오. 과일 체소 많이 드시고 ...
  • profile
    → Samuel Lee 한국에도 비타민회사 두려워 하지 않고 바른말은 하는 의사가 있다는게 정말 기득하다 :)
  • profile
    [스템셀 버그? 먹어도 별탈없는걸까? 정말 이런거 먹으며 살아되는걸까?] Tasters: Stem cell burgers a bit 'dry' http://t.co/FMdKZJ4LLQ #cnn
    cnn.com  
    Scientists are serving up the first test tube grown beef burger made from stem cells. CNN's Dan Rivers reports. 
    image
  • profile
    → Samuel Lee 언제나처럼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 뭐든 자연에서 얻는 것 그대로가 제일 좋은 것 같아요 ㅎ
  • profile
    → Samuel Lee 음 그렇군요... 저도 간헐적 단식이 몸의 독소를 빼주기 때문에 좋다는 내용을 읽은 적이 있는데, 막상 직접 해본 적은 없어서... 평소에 균형적인 식단, 지나친 고칼로리 음식 섭취 제한 등이 일단은 가장 안전해 보이는군요. 너무 당연한 이야기를 ㅎㅎㅎ
  • profile
    → Samuel Lee ㅎㅎ 자연이 옛날 그대로의 자연이라면요. 비타민 회사가 질이 모두 하향평준화로 동일하다면요. 아줌마들 아픈거 하나 예처방 못해줘 이거 떼내고, 저거 떼내고, 그 통증은 우리로선 알 수가 없네요. 운동 열심히 하시고, 몸에 좋은 거 잘 챙겨드시면 나아질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어떻게든 되겠죠(그러니 딴데로 가든가 얼렁 꺼지쇼) 해쌌는 의사를 믿느니 울엄마 살려준 비타민을 믿을랍니다. 송구스런 말씀이지만 견강부회에 춤출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 profile
    → Samuel Lee 뉴잉글랜드 저널 같은 학술지는 신뢰할만 합니다. 물론 극도로 비타민 C가 부족하다면 과일 배터지게 먹는것 보다는 비타민 C제재를 먹는게 효과가 클겁니다. 다른 비타민도 마찬가지 일테고요. 비타민제재는 비타민이 극도로 부족한 병에 복용하는 약이겠지요. 평범한 인간들까지 비타민 약을 먹을 필요는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 profile
    → Samuel Lee 자연이 옛날 그대로의 자연이 아니라는 말씀에는 동의합니다. ㅎㅎ
  • profile
    → Samuel Lee 하물며 유전자 변형된 옥수수나 콩등을 FDA에서 인체에 해로울수 있다고 식용금지를 한지 오래되었습니다. 화학적으로 만든 비타민제재는 만수무강에 지장이 많다는데 동의합니다.
  • profile
    → Samuel Lee 저도 이런 저런 얘기를 통해 불안해 하면서 먹고있는데요.. 이번에 먹고 끊을지. 아니면 하루 한번을 이일이나 삼일에 한번으로 할지 생각중이었습니다. ㅡㅡㅋ 아직도 고민되네요.
  • profile

    한국군도 '위안부' 운용했다

    한국군도 '위안부' 운용했다

    [창간 2주년 발굴특종 ①] 일본군 종군 경험의 유산

    02.02.22 15:16l최종 업데이트 02.02.26 21:51l

    김당(dangk)

     

     

    한국전쟁 기간[1951∼1954년] 3∼4개 중대 규모 운영…연간 최소 20여만 병력 '위안'

     

    흔히 전쟁이 나면 여성들은 남성들에 비해 고통을 한 가지 더 겪는 것이 보통이다. 이는 다름아닌 '성적 유린'인데, 피아 군인을 가릴 것 없이 자행되는 것이 보통이다. 이같은 여성들의 피해사례는 동서고금의 전쟁사 곳곳에 기록돼 있다.

     

    흔히 '위안부'라면 일제하 구 일본군들이 조선(한국)여성들을 강제로 끌고가 중국, 남양군도 등에서 성적 노리개로 부린 것으로만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한국전쟁 당시 한국군도 병사들의 사기진작 차원에서 '위안부'를 운용했다는 주장이 제기돼 충격을 던지고 있다.

     

    당시 서울, 강릉 등지의 군부대에서는 중대단위로 '위안부대'를 편성, 운용했는데 병사들은 '위안 대가'로 티킷이나 현금을 사용한 것으로 드러났다. 

     

    는 우리 현대사에서 묻혀진 역사의 진실을 밝힌다는 차원에서 전문학자의 연구결과와 김당 편집위원의 취재를 토대로 4회 정도의 관련기획물을 실을 예정이다.-  

     

    ▲ 위안소 앞에 줄지어 선 일본군 병사들. 예비역 장성들의 회고록에 따르면 한국전쟁 당시 국군 장병들도 24인용 야전막사니 분대천막 앞에서 이처럼 줄을 서서 위안대를 이용했다. 한국전쟁 당시 국군이 군 위안소를 두고 위안부 제도를 운영했다는 주장이 학계에서 처음으로 공식 제기되었다. 6·25 전쟁 당시 국군이 위안소를 두고 장병들이 이용케 했다는 주장은 그 동안 몇몇 예비역 장군의 회고록과 참전자들의 증언에 의해서도 뒷받침되어 왔다. 

     

    그러나 군 당국이 편찬한 공식기록(전사) 등을 근거로 한국군이 위안대를 설치·운영했다는 주장이 제기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또 이를 계기로 당시 위안부 피해자들의 증언과 진상 규명운동이 전개될 경우, 지난 90년대 일본군 종군위안부 문제가 처음 제기된 때와 유사한 파문도 예상된다. 

     

    김귀옥 박사(경남대 북한전문대학원 객원교수·사회학)는 2월23일 일본 교토 리츠메이칸(立命館)대학에서 열리는 제5회 '동아시아 평화와 인권 국제심포지움'에서 이런 내용을 담은 '한국전쟁과 여성ː군 위안부와 군 위안소를 중심으로'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한다(관련 인터뷰 기사 송고 예정). 

     

    김박사의 논문은 한국군(한국전쟁) 위안부 문제라는 사안의 특성상 일본 언론들과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총련)계 언론의 큰 관심을 끌 것으로 보여 귀추가 주목된다.

     

     

    "사기 앙양과 전투력 손실 방지를 위한 필요악"

     

    현재까지 발굴된 한국전쟁 당시 군 위안부 제도의 실체를 보여주는 유일한 공식자료는 육군본부가 지난 1956년에 편찬한 에 실린 군 위안대 관련 기록이다. 

     

    김박사는 기록과 예비역 장성들의 회고록, 그리고 관계자 증언 등을 토대로 당시 국군은 직접 설치한 고정식 위안소와 이동식 위안소 그리고 사창(私娼)의 직업여성들을 이용하는 세 가지 방식으로 위안부 제도를 운영했다고 주장한다. 우선 의 '제3장 1절 3항 특수위안활동 사항' 기록을 보면 군 위안대 설치 목적은 다음과 같다. 

     

    "표면화한 사리(事理)만을 가지고 간단히 국가시책에 역행하는 모순된 활동이라고 단안(斷案)하면 별문제이겠지만 실질적으로 사기앙양은 물론 전쟁사실에 따르는 피할 수 없는 폐단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장기간 교대 없는 전투로 인하여 후방 내왕(來往)이 없으니만치 이성에 대한 동경에서 야기되는 생리작용으로 인한 성격의 변화 등으로 우울증 및 기타 지장을 초래함을 예방하기 위하여 본(本) 특수위안대를 설치하게 되었다." 

     

    당시 군은 위안부들을 '특수위안대(特殊慰安隊)'라는 부대 형식으로 편제해 운영했음을 알 수 있다. 제3장의 '특수위안활동 사항'에는 흔히 '딴따라'라고 부르는 군예대(軍藝隊) 활동도 포함된다. 

     

    따라서 '특수위안대'는 군예대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냐는 이론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는 군예대의 활동을 '위문 공연(慰問 公演)'이라고 표현하는 반면에 특수위안대의 활동은 '위안(慰安)'이라고 용어를 구분해 사용하고 있다. 결국 여기서 '특수위안'은 여성의 성(性)적 서비스를 뜻함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흥미로운 사실은 전사(戰史)에서 위안대 운영이 "국가시책에 역행하는 모순된 활동"임을 인정한 대목이다. 이는 일제시대에 설치된 공창(公娼)이 1948년 2월 미군정청의 공창폐지령 발효로 폐쇄되었음에도 국가를 수호하는 군이 자체적으로 사실상의 공창(군 위안대)을 운영하는 모순된 활동, 즉 범법행위를 자행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는 군이 한국전쟁 당시 위안부 제도를 전쟁의 장기화에 따른 전투력 손실 방지와 사기 앙양을 위해 불가피한 일종의 '필요악'으로 간주했음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결국 한국군 위안대는 그 동원방식이나 운영기간 및 규모 면에서 일본군 종군위안부 제도와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설치 목적이나 운영 방식 면에서는 비슷함을 보여준다. 이는 또 당시 한국군 수뇌부의 상당수가 일본군 출신이었음을 감안할 때 시사하는 바 크다. 일본군에서 위안부 제도를 경험한 군 수뇌부가 한국전쟁 기간에 위안부 제도를 주도적으로 도입한 것은 어쩌면 자연스런 경험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에 따르면 위안대를 설치한 시기는 불분명하다. 다만 "동란(動亂)중 (위안대) 활동상황을 연도별로 보면 큰 차이가 없었으며 전쟁행위와 더불어 불가분의 관계를 가진 것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고 돼 있어 전쟁 이후 설치된 것임을 짐작케 한다. 

     

    김귀옥 박사는 관련 자료와 관계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설치 시기를 1951년으로 추정한다. 반면에 는 "휴전에 따라 이러한 시설의 설치목적이 해소됨에 이르러 공창(公娼) 폐지의 조류에 순명(順命)하여 단기 4287(서기 1954)년 3월 이를 일제히 폐쇄하였다"고 그 폐쇄 시기를 분명히 밝히고 있다. 

     

     

    서울 강릉 춘천 원주 속초 등 7개소 설치 운영

     

    한편 기록에 따르면 위안대가 설치된 장소는 △서울지구 3개 소대 △강릉지구 1개 소대 △기타 춘천 원주 속초 등지로 총 7개소에 이른다. 그러나 위안대 규모에 대해서는 내에서도 앞뒤의 기록이 달라 정확한 그 규모를 산정하기가 어렵다. 

     

    이를테면 의 일부 기록(148쪽)에는 위안대 규모가 △서울지구 제1소대 19명 △강릉 제2소대 31명 △제8소대 8명 △강릉 제1소대 21명 등 총 79명으로 돼 있다.

     

    그러나 같은 책의 '특수위안대 실적통계표'(150쪽)에는 위안부 수가 △서울 제1소대 19명 △서울 제2소대 27명 △서울 제3소대 13명 △강릉 제1소대 30명 등 총 89명으로 돼 있다. 

     

    따라서 전후 맥락으로 볼 때 전자의 기록은 오기(誤記)이고 후자의 '실적 통계표'가 정확한 것으로 추정된다. 물론 이 통계도 기타(춘천 원주 속초 등지) 지역 위안대는 포함하지 않고 있다. 아무튼 기록을 토대로 당시 위안소 소재지와 규모를 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한국군 위안대 설치 장소와 규모 군에 위안대를 설치한 주체가 누구인지는 에서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군이 위안대 설치 및 운영을 주도한 사실은 의 다음과 같은 대목이나 예비역 장성들의 회고록에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일선 부대의 요청에 의하여 출동위안(出動慰安)을 행하며 소재지에서도 출입하는 장병에 대하여 위안행위에 당하였다.(……) 한편 위안부는 1주에 2회 군무관(軍務官)의 협조로 군의관의 엄격한 검진을 받고 성병에 대하여는 철저한 대책을 강구하였다."()

     

    이는 당시 군이 군인들이 위안소를 찾아와 이용하는 고정식 위안소뿐 아니라 위안대가 위안을 위해 부대를 찾아가는 이동식 위안소도 운영했음을 입증하는 대목이다. 또 군의(軍醫)가 직접 위안부를 상대로 주 1회 성병검진을 실시한 점이나 장교를 상대하는 여성과 병사를 상대하는 여성이 따로 있었다는 점 등은 한국군 위안부 제도가 과거 일본군 종군위안부 운영방식을 그대로 답습했음을 의미한다.

     

    주월(駐越) 한국군 사령관을 지낸 채명신 장군(예비역 육군 중장)은 자신의 회고록 (1994년)에서 의 기록과는 달리 소대 규모가 아닌 중대 규모로 위안대를 운용했다고 적고 있다. 이는 채명신 장군이 서울지구의 3개 소대 위안부 인력을 1개 중대 규모로 계산한 결과일 수 있다. 어쨌건 채장군에 따르면 당시 위안부 규모는 180∼240명으로 추정된다.

     

    "당시 우리 육군은 사기 진작을 위해 60여명을 1개 중대로 하는 위안부대를 서너 개 운용하고 있었다. 때문에 예비부대로 빠지기만 하면 사단 요청에 의해 모든 부대는 위안부대를 이용할 수 있었다. 그러니 5연대도 예외는 아니었고, 예비대로 빠지기도 전부터 장병들의 화제는 모두 위안부대 건이었다."(이하 밑줄은 필자 강조)

     

    ▲ 에 실려있는 단기 4285년(서기 1952년)의 '특수위안대 실적통계표'. 89명의 위안부가 연간 20여만명의 군인을 '위안'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한국전쟁 기간에 군이 설치한 이 '특수위안대'의 '위안' 활동 실적은 얼마나 될까. 그것을 가늠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자료는 바로 (150쪽)에 실린 '특수위안부 실적통계표'이다. 단기 4285년도이니 곧 1952년도 1년간의 '위안' 실적이다. 다른 해의 실적도 이와 비슷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아무튼 이 통계표에 따르면, 1952년 당시 '특수위안대'에 편성된 위안부는 89명이고, 이들로부터 '위안'을 받은 군인은 연간 20만명이 넘는 것으로 집계되었다. 다만 이 실적이 실적통계표에 적시한 4곳(서울 제1, 2, 3소대·강릉 제1소대)에 출입한 군인들의 통계인지, 위안대가 현지부대로 '출동위안'한 군인들의 통계까지 포함한 것인지는 불명확하다.

     

    ▲ 김귀옥 박사가 수정한 1952년 특수위안대 실적통계표

     

    '위안대'는 예비대 병력의 '제5종 보급품'

     

    전선에서 전투를 마치고 후방으로 교대된 예비부대 병력이 위안부를 이용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다른 장군들의 회고록에서도 일치하는 대목이다. 차규헌 장군(예비역 육군 대장) 또한 자신의 회고록 (1985년)에서 예비대 시절에 겪은 이동식 군 위안소 제도를 이렇게 회상하고 있다.

     

    "(1952년) 3월 중순의 기후는 봄을 시샘할 듯 쌀쌀했다.(……) 잔적을 완전히 소탕한 후 예비대가 되어 부대정비를 실시하고 있을 때 사단 휼병부(恤兵部)로부터 장병을 위문하러 여자위안대가 부대 숙영지 부근에 도착하였다는 통보가 있었다. 중대 인사계 보고에 의하면 이들은 24인용 야전천막에 합판과 우의로 칸막이를 한 야전침실에 수용되었다고 하며 다른 중대병사들은 열을 서면서까지 많이 이용했다고 하였다." 

     

    ▲ 김희오 장군(예비역 소장)의 회고록 . 34년간의 군 생활에서 한국전쟁 당시 처음 본 공개적 군 위안소 운영 사례에 대해 '영원히 찜찜한 기억'으로 기록하고 있다. 한편 김희오 장군(예비역 육군 소장) 또한 '이동식'이긴 하지만 이와는 조금 다른 각도에서 위안부 제도를 기억하고 있다. 

     

    김장군은 군에서 직접 위안소를 설치 운영한 것이라기보다는 연대 간부들이 당시 사창가였던 '종3'(종로3가)에서 거금을 주고 위안부로 데려온 것으로 기억한다. 김장군은 자신의 자서전 (2000년)에서 그 대목을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중부전선) 수도고지 전투도 잊혀지고 도망병 발생도 진정되어 갔다. 이제 FTX(야전훈련)에 본격 돌입하기 위해 소화기 및 장비 점검, 보급품 정비 등이 한창 진행되는 어느 날 아침이었다. 연대1과에서 중대별 제5종 보급품(군 보급품은 1∼4종밖에 없었음) 수령지시가 있어 가 보았더니 우리 중대에도 주간 8시간 제한으로 6명의 위안부가 배정되어 왔다.(……) 그러나 나는 백주에 많은 사람이 오가는 가운데 줄을 서서 분대천막을 이용하는 것이라던가 또 도덕적으로나 양심상 어정쩡하기도 해서 썩 내키지가 않았다. 먼저 소대에 2명이 할당되고 그중 1명이 먼저 소대장 천막으로 배정되어 왔다. 나는 출신환경 등 몇 마디 대화만 나누고 별로 도와줄 방법이 없어 그 동안 모아 놓았던 건빵 한 보따리를 싸서 선임하사관에게 인계하였다."

     

    ▲ 김희오 장군 두 장군의 증언에 따르면 군 부대에 소위 '제5종 보급품'이라는 이름으로 위안부들이 배정되어 왔고 24인용 야전천막이 위안소로 가설(차규헌 장군)되거나 분대 막사를 위안소로 대용(김희오 장군)하였다. 

     

    위안대가 '제5종 보급품' 취급을 받은 것은 일본군 종군위안부가 '천황의 하사품'이나 '군수품'으로 취급받은 점과 일맥상통한다. 또 병사들이 줄을 서면서까지 많이 이용한 것이나 소대장 천막으로 먼저 배정된 후에 병사들에게 배정된 점 등도 일본군 종군위안부 피해자들이 증언하는 위안소의 풍경과 닮은꼴이다.

     

    운영 방식은 증언에 따라 조금 다르다. 채명신 장군에 따르면 전선에서의 위안부대 출입은 '티켓제'로 운용토록 하였다. 그런데 아무에게나 티켓이 주어지는 것 아니었다. 전쟁터에서 용감하게 싸워 공을 세운 순서대로 나눠주었다. 또 공훈의 정도에 따라 티켓의 숫자가 달라졌다고 한다. 이는 군인들이 군표나 현금을 주고 이용했던 일본군 위안소와는 차이가 있다. 

     

    오히려 이것은 홋카이도나 사할린 지역에 강제 연행한 조선인 노동자와 일본인 노동자들을 상대로 회사에서 마련한 위안시설에서 일한 '산업위안부' 제도와 닮은꼴이다. 일본이 저지른 대표적인 전쟁범죄인 종군위안부 문제에 가려 산업위안부 문제는 잘 드러나지 않았다. 

     

    그러나 일본 군수기업들은 노동자들에게 일종의 '성과급'으로 위안소를 이용할 수 있는 티켓을 제공하는 등 노동자를 통제하는 데 위안소 제도를 이용한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결국 이런 사실들을 종합하면 한국전쟁 기간의 군 위안부 제도는 '일본군 종군위안부 제도의 잔재'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부끄러운 일본군 위안부 제도의 잔재"

     

    그 때문인지 회고록에 군 위안부 제도를 기록한 장군들은 하나같이 위안소 운영의 타당성에 대한 의문과 함께 전쟁의 아픔, 그리고 절대빈곤의 참상을 지적한다. 

     

    ▲ 한국전쟁 당시 연대장으로 복무한 채명신 장군(주월 한국군사령관)은 "군 위안부 제도는 장병들의 사기 진작과 성병 예방을 위해 도입한 '군부의 치부'이지만 당시 사회에 만연한 사창(私娼)을 군에 흡수해 인권을 보호한 측면도 있다"고 주장했다. 채명신 장군은 자신이 회고록에 기록한 한국전쟁 당시 겪은 군 위안부 제도에 대해 "드러내고 싶지 않은 군부의 치부이지만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을 기록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채장군은 당시의 암울한 현실과 시대상황을 예로 들어 불가피성을 역설했다.

     

    "당시는 전쟁이 장기화함에 따라 많은 젊은 여자들이 생계를 위해 미군 부대에서 몸을 팔고 전선 근처에까지 밀려드는 시절이었다. 당연히 사창에는 성병이 만연했고 사창을 방치할 경우 성병으로 인한 전투력 손실도 우려되었다. 따라서 군에서 장병들의 사기 진작과 전투력 손실 예방을 위해서 위안대를 편성해 군의관의 성병검진을 거쳐 장병들이 이용케 한 것이다. 그러나 어찌 보면 (창녀들을 군의 위안대에 흡수함으로써) 당시 사회의 필요악으로서 인권 사각지대에 방치된 많은 사창가 여자들의 인권을 보호한 측면도 있다."

     

    그러나 당시 연대장이었던 채장군은 군 위안부 제도를 기획한 군 수뇌부의 주체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고 답했다. 또 채장군은 위안대의 규모에 대해서도 "명칭 상으로는 부대(특수위안대)이지만 부대 편제표에 의해 편성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위안부나 사창의 사정(수요공급)에 따라 위안대 규모가 그때그때 달라 정확한 인원을 산출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고 지적했다.

     

    "소대장님 티킷 한 장 더 얻을 수 없나요?" ....우리 5연대에서는 '위안부대'를 이용하는 데 몇 가지 규칙을 만들었다. 위안부대 출입은 티킷제로 운용토록 하였다. 그런데 아무에게나 티킷이 주어지는 건 아니다. 전쟁터에서 용감하게 싸워 공을 세운 순서대로 나눠준다. 물론 훈장을 받았다면 당연히 우선권이 있어 부러움의 대상이다.

     

    "5연대는 무조건 계급에 관계없이 훈장을 많이 탄 사람부터 순서대로 위안부를 상대할 수 있다."

     

    내가 이런 규칙을 만들자 부대 내에선 한바탕 입씨름이 벌어졌다.

     

    "이제 너희는 모두 내 동생이다. 알았나?"

     

    "잠시만 기다려라. 곧 내가 너희들에게 등정기를 발표할테니…. 기대하시라."

     

    모든 입과 귀가 위안부대로 쏠려 있었다. 용감한 박판도 중사도 규정대로 두 장의 티킷을 받게 되었고, 첫 번째로 위안소에 가게 되었다.

     

    난 당시 연대장이었으니 이 얘긴 후일 대대장을 통해 전해 들었다. 그런데 박중사는 숫총각이라 위안부 상대하는 것을 완강히 거부했다 한다. 그리곤 티킷도 다른 전우에게 주려 하는 걸 규칙이라 안된다며, 분대원들이 억지로 떠메곤 위안부대의 천막 속에다 집어넣었다 한다. 

     

    모든 분대원들은 천막 안을 들여다보면서 역사적 사태(?)를 지켜보았는데, 아뿔싸 순진한 박판도 총각은 여자가 바지를 벗기려 하자 "싫다"며 도망가질 않나, 억지로 벗기곤 강행하려 하자 결사적으로 피하질 않나, 밖에서 지켜보는 분대원들에게 한바탕 웃음만 안겨주고 있었다.

     

    그러나 워낙 좁은 곳이라 결국은 여자한테 붙잡혔는데 상대가 숫총각이란 걸 안 여자가 장난삼아 그의 물건을 만지면서 "애걔, 요만한 걸 가지고 왔어?"하며 놀리자, 끝끝내 그는 총(?) 한방 못쏴보고 얼굴만 빨개가지곤 도망쳐 나왔다는 거였다.

     

    분대원들은 자신의 분대장에게 치욕의 여름(夏)을 남기지 않으려, 그날 밤 철저한 강의와 사례를 들려주어 결국 박판도 중사를 설득시켰다. 다음날 재시도 끝에 박판도 중사는 결국 성공한다. 

     

    그런데 문제는 다음부터다. 한번 위안부대를 다녀온 박중사가 완전히 맛을 들인 것이다.

     

    "저…, 소대장님. 저…, 티킷 한 장 더 얻을 수 없나요?"

     

    이 지경까지 되어 내게 보고가 올라오니 난 웃음을 터뜨리지 않을 수 없었다.

     

    "허, 그놈 참. 그래 대대장이 알아서 두어 장 더 집어줘…. 하하하…."

     

    그때부터 난 왠지 마음에 걸렸다. 순진한 녀석이 전투만 알다가 어느날 갑자기 인생의 어떤 새로운 면을 알게 되었다면….

     

    (267~269쪽에서 인용)

     

    육군본부의 공식기록인 의 '특수위안대 실적통계표'(1952년)에 따르더라도 당시 위안대를 이용한 장병은 적게 잡아도 연간 20만명을 넘는다. 또 "위안대를 이용할 수 있는 예비대로 빠지기도 전부터 장병들의 화제는 모두 위안부대 건이었다"는 채장군의 증언에서 보듯, 당시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모든 군인들은 군이 설치·운용한 '특수위안대'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바로 그 '공공연한 비밀'이 50년만에 뒤늦게 불거진 것은, 이 드러내고 싶지 않은 군부의 치부가 일본군 위안부 제도의 찌꺼기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물론 한국군 위안대는 동원방식이나 기간 그리고 규모 등에서 일본군 종군위안부 제도와 본질적인 차이점이 있다. 그러나 상당 부분 일본군 종군위안부 제도와 유사한 방식으로 운용된 것 또한 사실이다(아래 참조). 

     

    일본군·한국군 위안부 제도의 유사점과 차이점 우선 사기 앙양과 전투력 손실 예방을 내세운 설치 목적부터가 유사하다. 또 병사들이 군대천막 앞에서 줄을 서서 이용하고 군의관이 성병검진을 하는 이용·관리 풍경도 흡사하다. 또 일본군의 군표 대신에 티켓과 같은 대가가 지불된 거래형식으로 운용되기도 했다. 

     

    이는 목격자들의 증언으로도 뒷받침된다. 한국전쟁 당시 이 희한한 제도를 처음 겪은 김희오 장군은 처음 위안대를 목격한 순간에 직감적으로 "이는 과거 일본군 내 종군 경험이 있는 일부 간부들이 부하 사기앙양을 위한 발상에서 비롯된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김장군은 34년간 군 생활에서 처음 본 공개적인 군 위안소 운영 사례에 대해 그 당위성을 떠나 영원히 찜찜한 기억으로 각인되어 있다고 기억한다.

     

    이 '찜찜한 기억'은 바로 8·15 해방과 48년 정부 수립 이후 초기 국가 및 군부 형성에 깊은 영향을 준 친일파 청산문제와 맞닿아 있는 것이다. 이를테면 합참의장은 1대 이형근 의장부터 14대 노재현 의장까지, 육군 참모총장은 1대 이응준 총장부터 21대 이세호 총장에 이르기까지 일제 군경력자들이 독식했다는 점을 미루어볼 때, 한국전쟁 당시 위안부 문제는 미청산된 친일파 문제와 직결되어 있음을 직감할 수 있는 것이다. 

     

    김귀옥 박사는 "한국전쟁 군 위안부 문제는 일본군 위안부 제도의 불행한 자식이라고 할 수 있다"면서 "이 문제도 (일본군 위안부 문제처럼) 피해 여성과 사회 단체 그리고 학계가 연대하여 풀어내야 할 우리의 과거 청산 문제의 하나"임을 강조했다.

     

    +++


  • profile
    → Samuel Lee 맞아요 안 먹었다 먹으면 전 정말 폭풍흡입 대표적 폭식가가 되더군요 ㅎㅎ
  • profile
    → Samuel Lee 한국전 당시 한국군 부대에 이승만의 지시로 운영한 사모님부대를 포함한 위안부대가 있습니다. 우리의 역사를 진실되이 반성하고 일제의 위안부를 규탄하고 탓하여야 떳떳하지 않을까요?
  • profile
    → Samuel Lee 맞습니다. 친일파들이나 일본의 범죄를 두둔하는 이들이 흔히 하는 이야기가 한국군도 위한부 운용하였다 입니다. 우리의 위안부, 우리가 베트남전에서 저지른 잘못 등 우리의 잘못을 먼저 뉘우치고 사과하지 않고는 남에게 용서를 요구할 수 없습니다. 그러지 않으면 정당한 사과를 요구하면서도 그냥 이기적인 투정으로 취급당하기 쉽상입니다.
  • profile
    → Samuel Lee 일본군 출신의 장교들 밑에 있는 한국군 출신이라도 위안부의 설치에 정당성을 주장했을 겁니다..즉 그 줄기가 일본군에서 시작이 되었다고 해도 우리 스스로 만들었다면 이점에 대해 우리스스로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의 절차도 밟아야 합니다
  • profile
    → Samuel Lee 음....., 먹어도 괜찮은지 걱정 이전에, 가격표를 먼저 보셔야 될 겁니다. 몇 억원인데요, 하하하
  • profile
    → Samuel Lee 처음듣는 이야기인데 놀랍군요. 그런데 뭐~ 광복후 경찰, 군대 대부분 친일파로 채웠으니 그럼직도 해 보입니다.
  • profile
    → Samuel Lee 뭐든 맞는 사람이 있구 아닌 사람이 있구 그런 것 아닐가 싶어요.
  • profile
    → Samuel Lee 이 내용이 앞으로 어떻게 바뀔런지 더 두고봐야한다고 생각합니다.
  • profile
    → Samuel Lee 한 회사에서 현대의 바다와 땅의 오염과 지력상실, 과다한 화학비료 사용으로 인한 과다생장 및 조기수확,각종 가공식품,등으로 현대인들이 먹는 식단과 과일과 야채만으론 턱없이 부족한 비타민과 미네랄,항산화제를 자발적으로 NSF, 의약품GMP 및 FDA승인을 거치고, 이스라엘 코셔마크까지 얻는 노력으로 믿을 수 있는 우수한 원재료를 사용하여,비타민과 미네랄,항산화제를 20년 전부터 제공했다면,저는 기꺼이 이것을 매일같이 복용하는것이 낫다고 생각합니다.물론 이를 통해, 얻은 지식으로 보다 덜 가공된 음식을 먹고, 정기적인 운동으로 체력을 유지하는 것은 기본중의 기본이 되었습니다.
  • profile
    → Samuel Lee 잔인한 한국놈들 ... 같은 동족에게 ... 5.18학살이 그냥 일어난게 아니구먼 ...
  • profile
    → Samuel Lee 모든 회사가 동일한 기술을 가진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어떤 회사의 (모형)비타민은 멕시칸들이 담배 피우고 쉬하던 손으로 유전자 조작 곡물을 반죽해 만들기도 할 것이고, 어떤 회사 비타민은 FDA사전 승인, 의약품 제조 설비 인증, 논더트 무인 시스템 하 유전자 손대지 않은 착한 곡물로 만든다는 거죠. Nutritonal supplements 비교가이드만 살펴봐도 비타민 회사별 격차가 천태만상입니다.
  • profile
    → Samuel Lee 최근들어 비타민의 치료 효용가치가 새로 조명받고 있지만, 애초에 비타미네랄은 신체공장이 고장나기 전에 미리미리 넣어줘야하는 윤활유 역할이죠. 인체에선 vitD를 빼곤 합성이 되지 않고, 나이를 먹을수록 보유량과 합성량이 크게 떨어집니다. 그래서 젊고 건강할 때부터 미리미리 챙기는 필수 성분인거지, 간신히 권장영양학만 배운 의사들이 주류라 해서 그들 말을 중심 삼을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ㅎ
  • profile
    → Samuel Lee 그냥잘먹고.잘싸고.잘자면도는거아니가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