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열서 (自列書)
민족의 일원으로서 반민족의 지목을 받음은 종세 (終世)에 씻기 어려운 대치욕이다 내 이제 그지탄을 받고 또거기 이유가없지 아니하니 마땅히 공구(恐懼;몹시 두려움)이 성(省)하기에 겨를치 못하려든 다시무슨 구설을 놀려감히 문과식비(文過飾非;)의 죄를 거듭하랴
해방이래로 중방(衆謗)이 하늘을 찌르고 구무(構誣)가 반(半)에 지나되 이를 인수(忍受) 하고결코 탄하지 아니함은 진실로 어떠한 매라도 맞는것이 자회자책의 성의를 나타내는 일단이 될까 하는 생각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법의 규명에 맞서서 사실의 진실을 밝히려 하시는 상의(上意)를 거스르지 못할 자리가 되니 진실로 들기 어려운 일필을 들기는 하되 망연히 조사(措辭)할 바를 모르겠다 .이왕 이때에 범과수오(犯過受汚)의 시말을 조열(條列)하여 심리상의 일조나 되기를 기하며 힘써 논설과 석명을 피하려 한다
나의 상활이 약간 사회적 교섭을 가지기는 12,3세의 문필장난에 시(始) 하지만은 그때로부터 3.1운동을 지내고 신문사업에 부침을 하기까지 이 논제에 관계될 사실이 없다 문제는 세간에 이르는바 변절로 부터 시하여 변절의 상은 조선편수위원회의 수임에 있다 무슨 까닭에 이러한 방향 전환을 했는가 이에 대하여는 일생의 목적으로 정한 학연(學硏) 사업이절대절명의 위기에 빠지고 그 봉록과 그로써 얻은 학구상의 편익을 필요로 하였다는 이외의 다른 말을 하고 싶지 않다
이래 10수년간 에 걸쳐 박물관 설비위원 ,고적보물,천연기념물 보존위원, 역사교과서 편정(編 訂)위원 등을 수촉(受囑)하여 문화사업의 진행을 참관하여왔는데 이길이라고 반드시 평순하지 아니하여 역사교과서 같은 것은 제 1회 회합에서 의견 충돌이되어 즉시탈퇴하고 조선사 편수같은것은 최후까지 참섭(參涉)하여 조선사 37권의 완성과 기다(機多)사료의 보존시설을 보기도 하였다 이 조선사는 다만 고래의 자료를 수집배차(排次) 한것이요 아무 창의와 학설이 개입하지 아니한 것인 만치 그 내용에 금일 반민족 행위추구의 대상될 것은 1건 1행이 들어 있지 않을 것이다
조선사편수가 끝나매 그 임직자들이 이리저리 구처(區處)되는중에 내게는 어느 틈에 중추원 참의라는 직함이 돌아 왔다 그런지 1년여에 중추원 대문에도 투족(投足)한 일이 없고 소위 만주 국립건국대학교 교수의 초빙을 받아서 감에 중추원 참의는 자연 해소 되었다 만주대학으로 갈 당초에는 인도에서는 간디 노국(露國)에서는 트로츠키, 중국에서는 호적(胡適)을 민족 대표교수로 데려온다 하는 가운데 나는 조선민족의 대표로 가는 셈이었지만은 조선의 일본관리는 민족대표라는것이 싫다 하여백방으로 이를 방해하고일본의 관동군은 그럴수록 대표의 자격이 된다 하여 더욱 잡아 끌어가는 형편 이였다
저희들 사이의 이상파와 현실파의 갈등은 건국대학의 최초 정안(定案)을 귀허(歸虛)하게 하였지마는 난는 그대로 유임 하여서 조선학생의 훈도와 만몽(滿蒙)문화사의강좌 기타를 담당 하고서 조강(祖彊)의 답사와 민족투쟁의 실제를 구경하는 흥미를 가졌었다 건국대학의 조선학생은 어떻게 훈도 하였는가는 당시의 건대학생에게 알아봄이 공평한 길일 것이다
소위대동아 전쟁의 발발에 신경이 날카로와진 일본인은 나를 건국 대학으로 부터 구축하였다
고토에 돌아온뒤의 궁악한 정세는 나를 도외로부터 향촌으로 내몰았다 이제는 정수내관(靜修內觀)의 기(機)를 얻는가 하였더니 이사에 짐을 운반 하는 도중에서 붙들려서 소위 학병권유의 길을 떠나게 되었다. 국내에서도 공개 강연은 나서지 않았던내가 일반의 촉축하는 문제로서 멀리까지 나감에는 자작지빈얼(自作之貧孼: 빈곤하여 스스로 만든 재앙)에서 나온 1동기가 있었다
처음 학병문제가 일어났을 때 나는 독자(獨自)의 관점에서 조선청년이 다수히 나가기를 기대 하는 의(意)를 가지고 그것을 언약한 일이 있더니그것이 일본인의 가거(可居)할 기화가 되어서 그럴진대 동경행을 하라는 강박을 받게 된 것이다
당시 나의 권유론자는 차차(此次)의 전쟁은 세계역사의 약속으로 일어난 것이매 결국에는 전세계 전민족이 여기 참가하는것이요 다만 행복한 국민은 순록(順祿)으로 참가하되 불복한 민족은 역록(逆祿)으로 참가함 이 도한 무가내하(無可奈何)한 일임을 전제로 하여 우리는 이기회를 가지고 이상과 정열과 역량을 가진 학생청년층이 조직, 전투, 사회중핵체 결성에 대한 능력의 취위성(取爲性)을 양성하여 임박해오는 신운명에 대비하자 함에 있었다
이것은 공개 비공개를 통하여 누천(累千)학생과 대론(對論)한 것이며 내가 이런 말을 아니했다고도 못하는 동시에 이 듣지 않았다할리 없으매 그 상세한것 또한 그런 이의 입을 빌었으면 한다
태평양전쟁은 애기보담 일찍 끝나고우리의 소기(所期)는 죽도 밥도 다 되지않고 말았으매 남은것은 나의 시세에 암우함이요 학생청년들에게 무의무수(無義無受) 하였음이요 도 반민지탄의 1조 첨가뿐으로 되었다
이상의 밖에 나에게 총집(叢集)하는 일죄백(一罪百)은 국조단군을 속여 드디어 일본인의 소위 내선일체론에 보강재료를 주었다 함이다 상래(上來)의 몇 낱 항왈(項曰)은 일이 다만 일신의 명절(名節)에 관계될 뿐이매 그 동기 경과 내지 사실 상태에 설사 진번할 말 이 있을지라도 나느 대개 인묵(忍默) 하고 만다 그러나 이 국조문제는 그것이 국민정신의 근본에 저촉되는 만큼 일언의 변파(辯破)를 답왈(答曰)치 못할 것이 있는 가 한다 대제 반세기에 걸치는 나의 일관된 고행이 국사연구 ,국민문화발향에 있어옴은 아마 일반의 승인을 받은것이요 또 연구의 중심이 경망한 학도의 손에 말소 발각(撥閣)되려 한 국조 단군의 학리적 부활과 및 그를 중핵으로 한 국민 정신의 천명에 있었음은 줄잡아도 내학구과정을 보고 아시는 분이 부인치 아니할 바이다 설사 용루 천식(淺識)이 제법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었다는 점만은 필시 대방(大方) 의 공인을 얻었다고 생각해도 불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나의 국조연구에 대한 실적도 진의가 일반으로 얼마나 인식 되었을까 하고 실제에는 내가 단군을 일본의 조신(祖神)에 결탁 하려 했다는 말이 쾌 유행 하는 정도밖에 되지 아니함으로 보면 학설 중 보급의 어려움과 및 그 대중 평가의 어떻게 허무맹랑함에 다시금 호탄(浩嘆)을 금치 못할 것이다
학리론을 여기 번제(煩提)합은 물론 올친 않거니와 이제 다만 속류설(俗流說)이 무엇에 근거되고 도 그것이 어떻게 곡해인 것을 삽적(揷摘) 하건데 내가 왕년에 불함문화론(不咸文化論) 이란것을 발표하여 동양릐 문화는 남북 양계(兩系)에 구분되고 그 북구(北區)의 문화는 단군의 고도(古道)를 중심으로 발전한 것이요 단군문화는 실로 인류문화의 중요한 일부를 형성 하는것을 주장한 일이다
그중에도 자연히 일본도 단군중심문화의 일익임을 언급 하였다 이는 물론 학문적 견지이지마는 일변으로 일본에 대한 정신상 장기전에 대비하자는 의도도 포함한 것이다 이 논을 악평하여 나를 악평하는 자가 있고 이것이 전전하여 소위 "내선일체"의 주장자라는 간언(奸言)을 유포하는 도배를 보게 되었다
그러나 이논설은 내용은 누구든지 바로읽어 보면 알 바로서 실은 단군문화로서 일본은 물론이요 전인류문화의 일반(一半)을 포섭하자 한 당돌한 제론(提論)에 불외(不外) 하는것이다
또 하나는 당시의 한일관계를 장시간 계속 할것으로 보고 약간 불결한 경로을 밟고 서라도 국조신앙을 우리의 정신적 지주로 확립하기를 기도하여 이러면 될까 저러면 될까 한 끝에 단군신전을 백악산(白岳山) 상에 굉대히 건설하여 소위 조선신궁을 압도할 책(策) 을 만든 일이 있었다 이것을 일본인에게 개설(開說)할때에 인본의 신도(神道) 원리로 보아도 조선의 국토주신을 모르는 체할 수 없음을 이유로 하는 것이 나의 주된 논리였다 오늘에 와서 보면 이것이 심히 위테한 행정(行程)이라 할것 이지만 이렇게라도 하여서 국조단군을 담배감념원천(膽拜感念源泉)으로 번듯하게 신앙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었으면 한것이 당시 나의 관념이었었다 이 계획은 상당히 희망이 있다가 마침 실현되지 못하고 결과로 얻은 바는 일본의 신사내용을 한번더 주시한 것뿐이였다 이 사실은 아는이는 알고 모르는이는 모르되 실로 당시의 내가 고심 하면서 저지른 죄과이다
나를 내선일체론자로 횡언(橫言)하려는 이에 이유를 삼을것이 양단에 있겠지만 전자는 심히 곡해니까 더말할것도 없고 후자는 견해여하로서 시비가 다를수 있을 것이다 다만 시거나 비거나 그것이 내선일체를 위한 행동이 아닌 것만은 나의 양심으로 질언(質言) 하는 바이다 그러나 이로 말미암아 실제로 악영향을 사회 인심에 전급(傳及) 한것이 있다고 보면 나는 그책임을 회피하지 않는다 내가할 수 있는 반민 행당조건은 대강 이상과 같은 듯하나 남이 보기에는 얼마나 많은 죄목이 있을지 모른다 혹시 테평양전쟁 말기에 나의 명자(名字)를 도용한 위조담화와 내지 마음대로 변조개작한 신문원고 강연필기 중에 또 어떠한 것이 있을지 모르되 이러한것에 대한 책임 까지도 내가 질 수 는없으며 또 설사 그러한 것들이라도 내가 당시에 기회가 있는 대로 강조하기를 마지 아니한 "해방의 시대""희망의 접근" 이라는 양대 안목을 끝까지 음폐하지 못했으리라고 나는 생각 한다 또 혹 전쟁말기의 모종단체 참가같은 것을 선전하는 이가 있으되평생에 문화단체에 열명하기도 싫어 함을 아는이는 아는 바이며 다시 운위 할 것은 없는 일이다 나의 반생행정을 돌아 볼대 토막토막이 실패. 죄다 암우함에서 온 것을 얼른 사과한다
조국의 역사와 문화를 혼자 맡은 것 처럼 걱정 하여서 신분명예의 어떻게 됨을 관념 하지 않고 그때그때의 가능한 이것저것을 하겠다고 날뛰는것이 이미 세간일류(世間一流)의 총명한 사람들의 몸을 사리고 가만가만히 있음에 비하여 확실이 암우 그것이 였다 전후 50년에 온갖 환경의 제약을 무릅쓰고서 조국의 역사와 문화 하나를 목표로 매진할 뿐이고 그 노정이 가시덤불이거나 구정물이거나를 판별 할줄 모르는 것이 암우가 아니면 무엇이냐 .그만하면 일본이 패도(敗倒)하고 조국이 광복하여 지사.인인(仁人).학자.능력자가 저절로 수용산출(水湧山出) 하게될것을 예견치 못하고서 의중으로부터 잘혈 ,장혈(壯血)로 부터 백발까지 일관하여 아무것을 희생 하여 서라도 이 일은 내가 해야 한다고 고집하여 나온 암우상은 제가 상각하여도 우스우며 남이 보기에야 오죽민망할 것이냐 그 험란한 애로를 겨우 뚫고 나오니까 거기 기다리고있는것이 내반역의 영상을 그려내는 대명경(大明鏡)일 줄을 암우한 내가 어찌 염도(念倒) 하였을까
나는 분명히 일평생 일조로(一條路) 를 일심으로 매진한것을 자신 하는 자이다 중간에 간랄(艱辣)한 환경 유약한 성격의 내외원인이 서로 합병 하여서 내외상에 흙을 바르고 내 행리(行履)에 가미를 씌웠을 지라도 이는 그때그때의 외적 변모일 따름이요 결코 심흥행(心興行)의 반전변환은 아니였다이 점을 밝히겠다 하여 이 이상의 강변스러운 말을 더하지 않거니와 다만 조선사편수 위원 ,중추원 참의, 건국대학 교수,이것 저것 구중중한 옷을 연방 갈아 입으면서도 나의 일한 실제는 언제고 시종일관 하게 민족정신의 검토 조국역사의 건설 그것밖에 벗어진 일 없었음은 천일(天日) 이 저기 있는 아래 감연히 명언하기를 꺼리지 않겠다
그러나 또 나는 분명히 조선대중이 나에게 기대 하는 점은 어떤 경우에서고 청고한 지조와 강렬한 기백을 지켜서 늠호(凜乎)한 의사의 형범(型範)이 되어 달라는 상식적 기대에 위반하였나 내가 변절한 대목 즉 왕년에 신변의 핍박한 사정이 지조냐 학식이냐의 양자중 그 일을 골라 잡아야 하게 된때 에 대중은 나에게 지조를 붙잡으라 하거늘 나는 그뜻을 휘뿌리고 학업을 붙잡는다면서 다른것을 버렸다
대중의 나에 대한 분노가 여기서 시작하여 나오는것을 내가 잘알며 그것이 또한 나를 사랑 함에서 나온것임도 내가 잘안다 그러나 나의 암우가 저의 걷고 싶은 길을 걸어서 수사(修史)위원 이하의 많은 오점을 몸에 찍었다 그런데 그것이 금일 반민법 저촉의 조건임이 명백 한바 이 법의 처단을 받기에 무슨 비겁한 체를 할것 이냐 도리어 준엄한 수형 하나에 저의 책임의 경감을 기함이 당연할 것이다
반민법의 무론 그 법 그것으로도 존중 해야 할것이다 그러나 나는 다만 위력을 가진 법이기 때문에 이를 무서워 함이 아니다 이 법의 뒤에 국민대중이 있음을 알며 그네의 비판과 요구가 이 법을 통하여 표현되는것 임을 알기 때문에 이 법에 그법문 이상의 절대한 권위를 감념(感念)하는 자이다 까마득하던 조국의 광복이 뜻밖에 얼른 실현하여 이제 민족정기의 호령이 굉굉히 이 강산을 뒤흔드니 누가 이앞에 숙연히정금(正襟)치 않을 것이냐 하물며 몸에 소범(所犯)이 있어 송연(悚然)이 무부자축(撫膚自縮)할 자야 오직 공손이 이 법의 처단에 모든것을 맡기고 그가 질편초(叱鞭楚)를 감수함으로써 조금만치라도 국민 대중에 대한 공구참사의 충정표시를 삼는것 이외에 다른것이 있을 수 없다 삼가 전후 과루(過淚)를 자열(自列) 하여 엄정한 재단을 기다린다
4282년 2 월 12일
마포 형무소 구치중 에서 최 남 선
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장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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