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1. Dr. Sam Lee/17_20세기100선

[V] 예술,기타 2. 아돌프 히틀러/ 나의 투쟁/ 1926

忍齋 黃薔 李相遠 2015. 7. 11. 1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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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 예술,기타 


나의 투쟁(Mein Kampf)은 독일의 독재자 아돌프 히틀러가 뮌헨 폭동을 일으킨 뒤 수감된 이후에 감옥에서 쓴 자서전입니다. 1권이 1925년 7월 18일,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NSDAP)의 선전강령인 2권은 1926년 12월 11일에 출판되었고 1930년에는 2권을 통합해서 단행본으로 출판되었습니다. 슈트레제만의 대외정책에서 출발한 이책은 국가 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나치당) 당원의 필독서로 널리 읽혔습니다. 반볼세비즘에서 출발한 반유태주의를 도입과정이 파악되는 책입니다. 통일된 세계 체제와 민족 중심의 국가사회주의에 대한 최고의 저서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독일 제3제국의 2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 사회적 금서로 낙인찍혔습니다. 1945년 아돌프 히틀러가 자살한 뒤부터 독일 바이에른 주 정부가 이 책의 저작권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히틀러의 공식적인 거주지가 뮌헨이었기 때문입니다. 독일의 저작권법에서는 저작권자가 사망한지 70년이 지난 해부터 퍼블릭 도메인이 된다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2015년까지는 출판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또한, 독일 정부는 2016년 이후에도 출판 금지를 지속하도록 법률 개정을 추진하기로 했습니다. 루돌프 헤스는 히틀러가 구술한 내용을 받아적었는데 이는 히틀러가 '나의 투쟁'이라는 책을 엮어내는데 크게 기여했다고 전해집니다.

히틀러의 총통의 기원은 1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에서 군주정의 붕괴와 의회민주주의가 도입되었으나 의회민주주의는 이전의 군주정과 같은 정치적 정통성을 창출하는 데 실패했습니다. 그래서 독일에서는 군소정당이 난립했고 연립정권이 형성되어 정치적으로 매우 불안정한 상태였습니다. 일반 대중들에게 새로운 정치체제와 생활양식을 히틀러가 제시했던 것입니다. 마치 4.19혁명이후 민주당정권이 제 몫을 못하고 군소정당이 난무하여 사욕에 물든 정치군인들에게 빌미를 주어 5.16 군사쿠테다가 발생했던 한국의 역사와 유사한 부분이 있기도 합니다.


2. 아돌프 히틀러/ 나의 투쟁/ 1926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 1889년 4월 20일 ~ 1945년 4월 30일)는 독일의 나치의 지도자 이자 정치가이다. 뛰어난 웅변술과 감각의 소유자인 히틀러는 제1차 세계 대전의 패전국으로 베르사유 체제 이후 피폐해진 독일을 경제 발전으로 이끌었다. 이후 독일 민족 생존권 수립 정책을 주장하며 자를란트의 영유권 회복과 오스트리아 병합, 체코슬로바키아 점령, 폴란드 침공 등을 일으키며 제2차 세계 대전을 일으켰다. 전쟁 중 그의 유대인 말살 정책으로 인해 수많은 유대인들이 아우슈비츠 수용소와 같은 나치 강제 수용소의 가스실에서 학살당했다. 또한 히틀러는 상당수의 폴란드 사람들에게까지도 유태인이라 모함하여 유태인과 마찬가지로 강제수용소의 가스실에서 같이 학살했다. 나치 독일에 의해 학살된 사람들 가운데에는 집시와 장애인도 있었다. 승승장구하며 전세를 확장하던 독일은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패배하였고 히틀러는 1945년 4월 29일 소련군에 포위된 베를린에서 에바 브라운과 결혼한 뒤 이튿날 베를린의 총통관저 지하 벙커에서 시안화칼륨 캡슐을 삼키고 권총으로 자신을 쏘아 자살했다. 그러나 독약 캡슐을 쓰지 않고 권총 자살을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히틀러의 어머니인 클라라와 결혼하기 전 이미 부친 알로이스 히틀러에게는 장남 알로이스 2세와 딸 앙겔라를 두고 있었고, 결혼 후 아돌프를 갖기 전 낳은 클라라의 아들 두 명과 딸 한 명은 모두 일찍 죽었다. 양봉일에 열중한 아버지와 아돌프의 관계는 소원했던 반면 이미 자신의 친자식을 셋이나 잃은 클라라는 아돌프마저 일찍 죽게될까 두려웠고 그를 애지중지하며 키워 아돌프는 클라라의 응석받이가 되었다. 이어 1893년 남동생 에드문트가 태어났고, 1896년 여동생 파울라가 태어났으나 에드문트는 일찍 죽게 되고 결국 아돌프와 파울라만이 클라라의 친자식으로 살아남게 되었다. 또한 아돌프가 7세 되던 해 당시 14세였던 형 알로이스 2세는 아버지 알로이스와의 마찰로 가출하게 된다. 독일 출신이라는 설이 한때 돌기도 했지만 히틀러는 오스트리아 출신이었다. 한편 히틀러는 1939년 노벨 평화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나의 투쟁(Mein Kampf) / 1926]의 내용 - 아돌프 히틀러의 자서전이다. 뮌헨 폭동을 일으킨 아돌프 히틀러가 수감된 이후에 감옥에서 쓴 책이며 국가 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나치당) 당원의 필독서로 널리 읽혔다. 통일된 세계 체제와 민족 중심의 국가사회주의에 대한 최고의 저서이다. 하지만 독일 제3제국의 2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 사회적 금서로 낙인찍혔다. 1945년 아돌프 히틀러가 자살한 뒤부터 독일 바이에른 주 정부가 이 책의 저작권을 소유하게 되었다. 히틀러의 공식적인 거주지가 뮌헨이었기 때문이다. 독일의 저작권법에서는 저작권자가 사망한지 70년이 지난 해부터 퍼블릭 도메인이 된다고 명시되어 있다. 따라서 2015년까지는 출판이 금지되어 있다. 또한, 독일 정부는 2016년 이후에도 출판 금지를 지속하도록 법률 개정을 추진하기로 했다. 루돌프 헤스는 히틀러가 구술한 내용을 받아적었는데 이는 히틀러가 '나의 투쟁'이라는 책을 엮어내는데 크게 기여했다고 전해진다.


(정상수 서평) 히틀러의 『나의 투쟁』은 처음에 2권으로 출간되었다. 1권은 1925년 7월 18일, 2권은 1926년 12월 11일에 출판되었다. 1930년에는 2권을 통합해서 단행본으로 출판되었다. 히틀러가 정권을 장악했던 1933년 12월까지 1500만 부가 팔렸다. 판매량은 2차 세계대전이 발생했던 1939년에 500만부를 돌파했고 나치 정권의 전성기였던 1943년까지 1천만 부 이상이 보급되었다. 나치즘 대두를 근심스럽게 지켜보던 윈스턴 처칠은 히틀러의 『나의 투쟁』을 “신앙과 전쟁의 새로운 코란”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히틀러의 사상과 정책의 기본 골자를 파악하는 데는 2권보다 1권이 중요하다. 1권의 내용은 국가사회주의 대내정책에 중심이 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 대외정책에 놓여 있었다. 1918년의 패배를 인정할 수 없었던 당시 독일인들에게 1914년 이전의 국경선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히틀러의 주장은 상당한 타당성을 보유하고 있었다. 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은 자국의 국경선이 침범당한 적이 없음에도 베르사유 조약에서 너무 가혹한 처분을 받게 되었고 이러한 베르사유 체제를 인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는 히틀러만의 주장은 아니었고 당시 정치가들도 베르사유체제를 수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대표적인 정치가가 1923년 수상이 되어 독일의 외교정책을 주도했던 구스타프 슈트레제만(Stresemann)이었다. 슈트레제만은 패전의 굴레에서 벗어나서 다시 강대국의 서열에 복귀하는 것을 대외정책의 기본 골자로 삼았다. 히틀러의 『나의 투쟁』은 이러한 슈트레제만의 대외정책에서 출발한다. 히틀러는 독일의 강대국 지위의 회복을 넘어서 유럽의 패권장악으로 나갔다. 그 과정에서 영토획득 전쟁과 복수전을 내세워서 러시아에 대한 전쟁과 프랑스의 점령을 주장했다. 히틀러는 러시아에 대한 전쟁의 명분을 반볼세비즘에서 찾았다. 그리고 반볼세비즘은 마르크스주의와 러시아 볼세비키 혁명의 원로들이 대부분 유태인이라는 사실에 착안해서 반유태주의를 도입했다. 이리하여 히틀러는 『나의 투쟁』 1권에서 사회주의를 국가사회주의로 변질시켰고 계급투쟁 대신에 인종투쟁을 주장했다. 그리고 인종투쟁에서 독일 노동자 계층의 승리를 역설했다. 19세기 후반 이래로 고리대금업 등을 통해서 이윤을 얻고 있었던 유대인들에 대한 유럽인들의 적개심은 반유태주의로 나타나 있었다.


 막스 베버 조차도 이러한 고리대금업을 천민자본주의라고 부를 정도였다. 당시 독일 여론에 나타난 반유태주의를 히틀러가 이용한 것이다. 또한, 히틀러의 사회주의는 당시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채택되고 있었던 의회주의를 부정하는 것이었다. 이는 체제 전복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서구 의회민주주의에 대한 대안으로 신화적 요소들을 도입해서 독일적 국가체제인 게르만적 총통국가력의 창설을 주장했다. 러시아에 대한 영토획득 전쟁이라는 대외정책은 대내정치적인 측면에서 새로운 생활공간(neue Lebensraum)의 창설을 제시했다. 프랑스에 대한 전쟁과 지배는 1차 세계대전의 패배에 대한 보복이었고 1923년 초 프랑스의 루르 지역 점령에 항의했던 독일 국민의 여론을 대변했다. 이를 위해서 히틀러는 영국과 파시즘을 성립시킨 이탈리아와 동맹을 주장했다. 히틀러의 대외정책의 최종적인 목표는 독일의 유럽 지배였다. 『나의 투쟁』 2권은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NSDAP)의 선전강령이다. 이 책에서는 1924년까지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의 역사를 언급했고 대중심리학을 동원해서 총통력신화를 강조했다. 히틀러는 고대 게르만의 오딘(Odin) 신화에서 총통의 기원을 도출했다. 『나의 투쟁』 의 사상적 기반을 형성하는 것은 먼저 정치적, 경제적 측면에서 나타났었던 도덕적 허무주의이다. 1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에서 군주정의 붕괴와 의회민주주의가 도입되었다. 그러나 의회민주주의는 이전의 군주정과 같은 정치적 정통성을 창출하는 데 실패했다. 그래서 독일에서는 군소정당이 난립했고 연립정권이 형성되어 정치적으로 매우 불안정한 상태였다. 그리고 서구 자본주의 발전을 통한 황금만능주의의 유행은 일반 대중들에게 도덕적 허무주의를 자아냈다. 이러한 허무주의에 빠져 있었던 일반 대중들에게 새로운 정치체제와 생활양식을 히틀러가 제시했던 것이다. 두 번째 사상적 기반으로는 역사진화론(Geschichts darwinsm)을 꼽을 수 있다. 이는 19세기 말 제국주의 시대에 유행했던 생존경쟁과 약육강식을 기본적 사고로 해서 강한 민족이 약한 민족을 지배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논리이다. 세 번째는 1차 세계대전 이후 부르주아적 시민사회의 붕괴와 대중사회의 등장을 통해서 나타난 대중심리학이다. 이는 히틀러의 선전을 담당했던 괴벨스에 의해서 계승되고 총통신화를 선전하는 데 이용되었다.(정상수, 동국대학원신문, 152호, 2008년 12월 15일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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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틀러의 체육사상.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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