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2. Humanities/22_한국역사

김무성의 부친 - 해촌 김용주 선생

忍齋 黃薔 李相遠 2015. 9. 18. 0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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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무성 대표는 질문에 아무 답도 하지 않았다.

민족문제연구소는 “김용주 평전 <강을 건너는 산>에 대한 검증 결과, 기초적인 사실 관계도 틀린 부분이 많고, 객관적 자료로 확인이 불가능한 근거없는 이야기나 과장된 이야기들이 다수 포함돼 있다. 또 불리한 친일 행적은 감추고, 일부 친일 행적은 마치 민족의식을 바탕으로 한 것처럼 미화 왜곡하고 있다”며 오류가 많아 사실로 인정하기 어려운 평전이라고 설명했다.

민족문제연구소의 조세열 사무총장은 “김용주에 대해 친일파냐, 애국자냐란 논란이 있었지만 이는 논쟁의 여지가 없다. 친일인데 어떤 친일이냐가 문제인데 검증 결과 경북지역의 가장 대표적인 친일인사로서 명백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해야 한다”고 했다.

Published on Sep 16, 2015
친일 의혹을 받고 있는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의 부친 김용주 씨가 일제 강점기 때 ‘군용기 헌납’과 ‘징병’을 독려하는 기명 광고를 아사히 신문에 게재한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또 각종 공문서와 신문 등 문헌을 통해 김용주 씨가 1940년 이후 지속적이고 뚜렷한 친일 행적을 보인 사실도 추가로 발견됐습니다.

???[불쏘시개 서적] 강을 건너는 산 : 김용주 평전 ??? 1


오해와 왜곡 속에 감춰진 어느 애국자의 진실
역사의 질풍노도를 헤치고 국가의 기둥을 세운 해촌 김용주 선생의 일대기


김용주 회고록 『풍설시대 80년』을 바탕으로 그를 되짚어본 『강을 건너는 산』은, 일제 강점기에 삼일상회를 시작으로 일제에 맞서고, 6·25 전쟁 속에서 경복궁 폭격을 저지하는 등 우리의 얼을 지키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던 김용주의 삶을 실증 자료를 통해 구체적으로 다루었다. 또한 이 책은 한국의 발전을 위해 온갖 희생을 마다하지 않고 나선 그의 행적을 통해 전후 한국이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부축한 숨은 일꾼을 뒤늦게나마 밝히는 데 의의가 있다.


일제시대 김무성 부친은 이렇게 말했다 "정벌하라! 반도의 청소년"
한겨레 | 작성자 허승 기자
2015년 09월 17일

민족문제연구소가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의 선친 김용주씨의 친일 행적 논란과 관련해 추가 사료를 공개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17일 서울 동대문구의 민족문제연구소 5층에서 기자간담회를 열고 “친일파냐, 애국자냐는 논쟁이 있었던 김용주에 대해 기초 사료로 검증한 결과 명백한 친일반민족행위자라고 결론을 내렸다”고 밝혔다. 민족문제연구소는 “기본적으로 연좌제에 반대하지만 김무성 대표 쪽에서 부친의 친일행적을 애국으로 미화하는 내용으로 구성된 평전을 발간하는 등 역사를 왜곡하고 있어 검증에 나섰다”고 배경을 설명했다.

<한겨레>를 통해 김 대표 부친의 친일 행적 의혹이 제기된 뒤 일각에서는 ‘친일파가 아니라 오히려 민족교육에 헌신한 애국자였다’고 주장하는 등 논란이 계속됐고, 지난달 15일에는 광복 70주년을 맞아 김용주 평전 <강을 건너는 산>이 출간되기도 했다. 이 책은 ‘극일을 이겨낸 망국의 한’이란 부제를 달고 김용주를 애국적인 민족주의자로 묘사했다.


그러나 민족문제연구소가 이날 공개한 자료들에는 김용주의 친일 행적이 여럿 나온다. 연구소가 정리한 김용주의 대표적인 친일 행적으로는 △식민통치기구인 도회의 의원으로서 일제의 식민통치에 협력 △친일단체 간부로서 침략전쟁에 협력 △징병제 실시를 찬양하고 전쟁동원을 선동한 점 등이다. 특히 일제의 침략전쟁을 위한 국방헌납운동의 하나인 애국기(국방헌금으로 생산한 군용 비행기) 헌납 운동을 전국에서 가장 활발히 했다고 민족문제연구는 밝혔다.

1943년 9월8일 <조일신문> 4면에 징병제를 찬양하고 조선인의 참여를 선동하는 광고가 김용주의 이름으로 실렸다. 민족문제연구소 제공

당시에는 영일군 소속이었던 포항 출신의 재력가 김용주는 1937년부터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경북 도회의원으로 활동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도회는 오늘날의 지방의회와 달리 지방자치기구로서의 기능과 권한은 없었으며, 일제의 식민지배에 협조적인 인물들로 구성된 식민통치 기구였다”고 설명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공개한 당시 <매일신보> 기사 등을 보면 김용주는 도회 의원으로서 조선인에 대한 강제노역을 정당화한 국민개로운동을 독려하는 등 일제의 식민통치에 적극적으로 협력한 정황이 나온다.

또 1941년에는 일제의 침략전쟁에 협력하기 위해 만들어진 최대의 민간 친일단체인 임전보국단에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임전보국단 경북지부 상임이사에 선정돼 결성식에서 ‘황군장병에게 감사의 전보를 보낼 것’을 긴급 제안하는 등 민·관을 가리지 않고 경북 지역에서 매우 영향력있는 친일인사로 전방위적으로 활동한 것으로 확인됐다고 민족문제연구소는 밝혔다.

민족문제연구소는 또 김용주가 징병제 실시와 애국기 헌납 등 일제의 침략전쟁에 대한 조선의 인적·물적 자원을 동원하는 데도 적극적이었다고 했다. 1943년 <아사히신문>(9월8일)에는 ‘대망의 징병제 실시, 지금이야말로 정벌하라, 반도의 청소년들이여’라는 징병제에 찬성하는 광고가 김용주의 이름으로 실렸다.

1944년 7월9일 <조일신문> 4면에는 애국기 헌납운동을 독려하는 김용주 이름의 광고가 실렸다. 민족문제연구소 제공

민족문제연구소에 따르면 김용주는 1944년 1월 열린 전선공직자대회에서는 “가장 급한 일은 반도 민중에게 고루고루 일본정신문화의 진수를 확실히 통하게 하고, 진정한 정신적 내선일체화를 꾀하여 충실한 황국신민이 될 것”이라며 “앞으로 징병을 보낼 반도의 부모로서 자식을 나라의 창조신께 기뻐하며 바치는 마음가짐과 귀여운 자식이 호국의 신으로 야스쿠니 신사에 신으로 받으러 모시어질 그 영광을 충분히 인식”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특히 김용주는 경북지역에서 애국기 헌납운동을 주도하기도 했다고 민족문제연구소는 밝혔다. 애국기란 기업이나 단체, 개인이 낸 국방헌금으로 생산한 군용 비행기다. 일제의 만주침략 이후 대대적으로 전개된 국방헌납운동의 하나다. 김용주는 <조일신문> 등에 자신의 이름을 걸고 애국기 헌납운동을 독려하는 기명 광고를 싣는 등 적극적으로 활동했다고 한다. 김용주가 활동한 영일군은 모두 14기의 애국기를 헌납해 전국에서 가장 많은 애국기를 헌납했다.

김무성 대표는 질문에 아무 답도 하지 않았다.

민족문제연구소는 “김용주 평전 <강을 건너는 산>에 대한 검증 결과, 기초적인 사실 관계도 틀린 부분이 많고, 객관적 자료로 확인이 불가능한 근거없는 이야기나 과장된 이야기들이 다수 포함돼 있다. 또 불리한 친일 행적은 감추고, 일부 친일 행적은 마치 민족의식을 바탕으로 한 것처럼 미화 왜곡하고 있다”며 오류가 많아 사실로 인정하기 어려운 평전이라고 설명했다.

민족문제연구소의 조세열 사무총장은 “김용주에 대해 친일파냐, 애국자냐란 논란이 있었지만 이는 논쟁의 여지가 없다. 친일인데 어떤 친일이냐가 문제인데 검증 결과 경북지역의 가장 대표적인 친일인사로서 명백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해야 한다”고 했다.


민족문제硏 "김무성 부친 일제군용기 헌납 독려 광고"(종합)
1940년대 애국기 헌납운동·징병제 독려 관련 아사히신문 광고 제시
연합뉴스 | 2015.09.17.

1940년대 애국기 헌납운동·징병제 독려 관련 아사히신문 광고 제시

(서울=연합뉴스) 이효석 기자 = 역사연구단체 민족문제연구소(민문연)는 17일 기자회견을 열고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의 부친 김용주 씨는 명백히 친일반민족행위자"라고 주장하며 새로운 자료를 공개했다.

민문연에 따르면 김용주 전 전남방직 회장은 1937년 경상북도 도의원으로 당선된 후 국민총력경상북도수산연맹 이사, 국민총력경상북도연맹 평의원, 조선임전보국단의 발기인 및 경상북도지부 상임이사 등 경북 지역 고위직을 역임했다.



'김용주 과연 애국자였나?' (서울=연합뉴스) 박동주 기자 = 17일 오전 서울 동대문구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열린 '김용주 과연 애국자였나?' 기자간담회에서 박수현 연구실장이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의 부친인 김용주 전 전남방직 회장의 친일행적과 근거자료를 공개하기에 앞서 공개검증의 배경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2015.9.17 pdj6635@yna.co.kr

민문연은 김 전 회장이 고위직에 있는 동안 애국기 헌납운동을 선전했다면서 일본 아사히신문 국내판 1944년 7월 9일자에 실린 일본어 광고를 공개했다.

애국기 헌납운동이란 1940년대 일제가 군용기 생산을 할 요량으로 한국인들에게 돈을 반강제적으로 걷었던 운동이다. 이 운동을 독려한 측이 광고를 아사히신문에 실은 이유는 당시 국내 신문은 대부분 폐간된 상태였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해당 광고에는 일본어로 "결전은 하늘이다! 보내자 비행기를!"이라는 제목 하에 "시국은 확실히 승리냐 죽음이냐의 결전의 한 가운데로 돌입하고 있다"고 군용기 헌납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내용이 이어지며 맨 끝에 김 전 회장의 이름이 적혀있다.

민문연은 매일신보 등 당시 국내 일간지 기사와 광고도 제시하며 김 전 회장이 다양한 방법으로 애국기 헌납운동을 찬양하고 독려했다고 주장했다.

이 자료에 따르면 김 전 회장은 1942년 대구부민호와 조선임전보국단 경상북도지부 등이 군용기 헌납운동을 추진할 당시 경북 지역 주민 독려활동에 적극 참여했다.

김 전 회장은 아사히신문 국내판 1943년 9월 8일자에 "대망의 징병제 실시, 지금이야말로 정벌하라! 반도의 청소년…"이라는 내용의 일본어 기명 광고를 실어 조선 청년들의 징병제 참여를 촉구하기도 했다고 민문연은 전했다.

민문연은 와세다대학 소장자료인 '징병제 시행 감사 적미영 격멸 결의선양전선 공직자대회' 기록문 복사본을 공개하면서 김 전 회장이 이 대회에 참석해 "가장 급한 일은 반도 민중에게 고루 일본정신문화의 진수를 확실히 통하게 하는 것"이라는 등 일제를 찬미하는 발언을 쏟아냈다고 밝혔다.

조세열 민문연 사무총장은 "김무성 대표 측은 부친의 평전 '강을 건너는 산'을 출간하는 등 부친의 친일 행적을 애국으로 미화하고 있다"면서 "민문연은 연좌제에 반대하지만 김 대표처럼 연고자의 친일행적을 왜곡하는 경우에는 예외로 둔다"고 자료 공개 이유를 밝혔다.

이어 김 전 회장이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지 않았던 이유에 대해 "2009년 출간 당시에는 재원과 자료의 부족으로 해외 및 지방의 전면 조사가 불가했다"면서 "경북 지역과 일본의 협조로 추가자료를 확보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hyo@yna.co.kr



???[불쏘시개 서적] 강을 건너는 산 : 김용주 평전 ??? 2


해촌 김용주 선생의 발자취

- 3.1운동의 계승을 위해 ‘삼일상회’라는 상호로 사업
20대 초반에 3.1정신을 담은 삼일상회(三一商會)를 개업해 당당하게 극일(剋日)의 길을 걸음. (‘본문 중에서’ 참고)

- 총살 대상 1호
1945년 일본이 패색이 짙어갈 무렵, 조선총독부는 미군이 조선에 상륙하면 조선의 민족주의자들이 미군에 협조해, 일본에 항거하여 내란을 일으키는 등 조선독립운동이 치열해지는 동시에 중국에 있는 대한광복군이 대거 침투해 올 것이라 예측했음. 따라서 이에 대한 대비책으로 조선 전국에 걸쳐 조선의 민족주의운동에 나설 수 있는 주요 인물들을 사전에 모두 살해해서 제거한다는 방침을 세웠음. 
이와 때를 맞추어 일본군 사령부는 조선을 여러 군관부로 나누어 각기 지구경비사령부를 설치했음. 미군이 조선의 어느 곳에든 상륙하면 즉각 전 조선에 계엄령을 선포하여 군정을 펴기 위한 사전준비이며, 총살 대상들을 제거하기 위함이었음. 
그 조선인 제거 명단 중에 포항 지역 총살 대상 1호가 바로 김용주였음. 

- 6.25 전쟁 시 최초 한국은행권 화폐를 일본에서 찍어와
인민군에 밀려 정부가 급히 서울을 떠나는 바람에 한국은행 본점 보유의 현찰을 후방으로 이송하지 못함. 전비(戰費)인 화폐는 무기의 1호로서, 미군 군용물자를 하역해야 하는데 인부들 노임을 지불하지 못하는 등 돈이 없어 전쟁을 치룰 수 없는 상황이 되자 주일대표부 특명전권공사로서 일본에서 최초의 한국은행권 화폐를 찍어옴.

- 페니실린 없으면 국군 부상병이 다 죽는다
6.25 전쟁으로 국군 부상병이 날로 늘어나고 있는데 의료약품과 특히 페니실린이 부족해 죽어가고 있다는 연락을 받고 일본에서 트럭 10대분의 각종 의약품과 페니실린을 구입해 배로 보내 죽음에 직면했던 수많은 국군 부상병들을 살려냄.

- 서울수복작전과 문화재 수호 
김용주와 맥아더 사령관과의 담판으로 유엔군의 서울 수복 폭격을 전면 폭격에서 부분 폭격으로 수정하여 소중한 우리 문화재가 온전히 살아남게 했음. (아래 ‘본문 중에서’ 참고)

- 인천상륙작전 시 통역과 길 안내에 필요한 재일교포 의용군 모집
일본 내의 민단과 대한청년단과 한국학생동맹 등과 협의해 일본 유학생 수백 명을 모집, 유엔군의 반격작전에 혁혁한 전공을 세움. 의용군 전사자는 50여 명에 달했고, 당시 의용군 모집 비용 약 2만 달러를 개인이 부담함.

- 포항 영흥초등학교 설립
포항 읍내 취학연령 아동들의 입학난이 8:1 정도로 심각한 것을 알고, 영흥국민(초등)학교를 설립하고, 야학도 개설해 배우지 못한 배움이 부족한 가정부인들에게 한글을 가르치며 민족의 자긍심을 일깨우고 민족의식도 일깨움. 이 일로 도 경찰부 고등과와 대구헌병대 등에 불려가 온갖 고초를 겪고 ‘요시찰인(要視察人)’으로 낙인찍힘. 이후 해방을 맞아 보다 차원 높은 운영과 지도를 위해 학교재단을 정부에 헌납함. 

- 전남중,고등학교 설립과 무상 헌납
전남 광주에 전남중학교(1958)와 전남고등학교(1966)를 설립해 국가에 무상으로 헌납하고, 전남방직 부설학교인 여자고등학교를 운영해 배움에 대한 갈증을 안고 있던 직원들을 배려함.

- 전라남도 화순군, 장흥군에 1천만 주 조림사업
1965년 헐벗은 산하를 녹화하기 위해 화순군과 장흥군과 국가로부터 국유림을 빌려 전남방직 부대사업으로 직원들과 직접 나무심기에 참여해 1천만 주 조림사업을 시작함.

- 광주 무등경기장 부지 무상 기부 
1954년 전라남도 광주에 무등경기장을 지을 때, 전남방직 땅을 무상으로 기부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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