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0. 韓山李氏/02_麟齋遺稿年譜

8.인재유고 발(麟齋遺稿 跋) 이 자(李耔)선조께서 쓰시다.

忍齋 黃薔 李相遠 2015. 10. 24. 0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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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자(李 耔):1480(성종 11)∼1533(중종28).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차야(次野), 호는 음애(陰崖)·몽옹(夢翁)·계옹(溪翁). 이색(李穡)의 후손으로, 대사간 예견(禮堅)의 아들이다.1501년(연산군 7)진사가 되었고, 1504년 식년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사헌부감찰을 지내고 천추사(千秋使)의 서장관으로 북경에 다녀온 뒤 이조좌랑에 승진하였으나, 연산군 난정하의 관직생활에 환멸을 느껴 술로 세월을 보내다가 자청하여 의성현령으로 나갔다.1506년 중종반정 후에 발탁되어 홍문관수찬·교리 등을 지내다가 1510년(중종 5)아버지의 상으로 관직을 떠났다.1513년 복직하여 부교리·부응교·사간원사간을 역임하고, 이듬해 어머니의 상으로 사직하였다가 1514년 사간(司諫)으로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1517년부터 홍문관전한·직제학을 거쳐 부제학에 승진하였다. 이어 좌승지로 옮겼다가 다음해에 대사헌이 되었다.


이 무렵 조광조(趙光祖)·김정(金淨) 등의 신진사류들과 일파를 이루어 도학정치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하였으나 그들의 급진적 개혁정책을 완화하고자 노력하였다.1518년 종계변무주청사(宗系辨誣奏請使)의 부사로 북경에 파견되었다.


이때 정사로 갔던 남곤(南袞)이 병들어 거의 죽게 된 것을 지성으로 간호하여 회복하게 하였는데, 이 때문에 그는 기묘사화 후 큰 화를 면할 수 있었다.1519년 귀국하여 한성판윤·형조판서·우참찬 등에 임명되었다. 그는 사림파의 한 사람이었으나 성품이 온유하고 교제가 넓어 남곤·김안로(金安老) 등의 훈구세력과도 원만하게 지냈다. 양파의 중간에서 반목과 대립을 해소하고 온건한 정책으로 유도하고자 하였으나 급진사림파의 반발로 실패하였다.1519년 기묘사화가 일어나 사림파가 참화를 입게 되자 그도 여기에 연좌되어 파직, 숙청되었다.그뒤 음성·충주 등지에 은거하여 세상을 등지고 독서와 시문으로 소일하고, 이연경(李延慶)·김세필(金世弼)·이약빙(李若氷) 등과 학문을 토론하며 여생을 마쳤다.


효도와 우애가 돈독하였고 학문과 수양에 정력을 기울였다. 많은 사평(史評)을 썼으나 일찍 죽어 정리되지 못하였다. 《주자가례》를 독신하였으며 자손들에게 그 실천을 유언하였다.《기묘명현록》에 올랐고, 충주의 팔봉서원(八峰書院)에 배향되었다.저서로는 《음애일기》와 시문집인 《음애집》이 있다. 시호는 문의(文懿)이다.








출처: 옥광천 순복 숙부님 블로그 http://blog.daum.net/sunbok504/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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