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0. 韓山李氏/03_澮承旨公

金百文과 맺은 位土契約文書와 증인보증서와 허가서

忍齋 黃薔 李相遠 2015. 11. 11. 0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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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해전 우연하게 한국에 들렀다가 조부님 제사를 모시게 되었던데서 시작합니다. 막내아들로 가문이며 조상에 전혀 관심이 없다가 그때 족보며 종중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데 제가 인제공-광목공-안소공-등등에서 1993년인가 만들어진 회승지공파라고 하더군요. 그런데 그 회승지공 종재를 제 고조부님의 전답을 위토로 해서 회승지공파를 만들었다고 하여 그 족보며 위토서류 내용을 드려다보기 시작했습니다. 족보에는 분명 목숨명자에 진사시에 입격했다고 했는데 종회를 주도하는 분들 말로는 궁궐에 높은 벼슬을 하여 고양에 전답을 많이 소유하셔서 그 전답을 위토로 예전부터 사용하였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밝을 명자도 함께 쓰셨다는 이야기를 하고 위토문서에도 밝은 명과 목숨 명을 혼용하여 사용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산지기 김백문 선생을 생전에 뵌적은 없지만 위토를 관리했던 김백문이라는 분이 제 고조부를 위해 전답을 구입하고 관리했다고 하며 목숨명자도 쓰고 밝을 명자도 쓰셨다고 하셨다는 겁니다. 또 어떤 어른은 김백문이라는 분이 작고한 분들의 토지를 갈취하는 사기꾼이라 편하하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아무튼 위와 여기에 보이는 바와 같이 밝을명자와 목숨명자를 사용하여 제 고조부 작고하신 37년 후인 1952년에 4필지를 제 고조부님의 10대 선조인 회승지공의 위토로 사용한다는 서류를 만들어 위토로 허가를 받았습니다. 그걸 회승지공의 직계 후손분들이 1993년인가 특별조치법을 통해 회승지공 종회를 만들고 그 후손분이 대표등기를 하였습니다. 그때 치매끼가 있으신 제부친을 찾아가 인감을 받아다 후손동의 받았다고 회승지공을 만들었습니다. 종회를 만들어도 종회는 인격이 없기때문에 대표자가 위토를 등기할수 밖에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치매로 종회 모임에 참석할수 없는 제 부친을 종회참석을 4회이상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제명하고 도로신설등으로 나온 토지보상금을 사사로이 대부도에 토지를 사서 그 대표자분의 아들에게 상속을 시도했다고 합니다.

 

 

 

 

 

 

 

 

 

 

저도 족보에 목숨명자인데 밝을 명자가 어찌 동일인 인지 의문을 제기하였으나 그분들이 철덕같이 그리 주장하여 그런줄 알았습니다. 또 그 토지의 예전 일제시대 구토지대장을 확인하니 소유자가 목숨명자에 수원군 동탄면 석우리로 나오는 겁니다. 바로 제적대장상 제 선조들이 자리잡고 살던 곳이고 바로 제 고조부가 확실했던 것이지요. 그로인해 차마 등기조차 되지 않은 토지가 감당하기 힘든 만큼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어린시절 할아버지 따라 성묘를 갔던 곳은 기흥 신갈로 지금 삼성연구소가 자리한 곳이었지만 일가들이 자신들의 땅인양 처분하여 선조들의 묘지는 사라지고 없어 성묘할곳도 없습니다. 아무튼 회승지공에서 제 고조부의 전답을 위토로 파종회의 종제로 사용함에 따라 그 지적도를 근거로 일제시대 토지조사부를 확인할 결과 많은 전답을 확인할수 있었습니다. 많은 전답이 이런 저런 사람들의 손을 거처 소유권이 다른 사람들이 되었지만 도로에 점유해 있던 곳들은 아직도 제 고조부 성함으로 남아있어 1960년대 이전 사망하신 관계로 장자인 제 큰형이 상속받을 수 있다고 하더군요. 아무튼 그덕에 조상과 종중에 관심없는 제 형제들이 열심히 인제공 광목공 회승지공 행사에 열심히 참여 하고 있어서 아마도 조상님들이 저를 통해 조상의 숨결을 느끼게 해주신것 같습니다. 대원 일가 아우님께서 알려주신 족보는 회승지공을 만들때 만들어진것 같습니다. 밝을 명자와는 관련성이 보이지도 않고 진사시에 입격하여 주사를 지내신분이 많은 전답을 위토로 직계선조도 아닌 10대조 선조를 위해 내놓는 다는 것도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는 부분이긴 합니다. 

 

아직 등기조차 되지 않은 토지들을 제 고조부를 숭조하는 일에 쓰도록 제 형제들에게 권하고 설득하는 중이었는데 진사시에 입격하고 주사를 지내신분을 그리 모신다하면 그 역시 조롱거리가 될것이 자명하여 그 일은 이만 접도록 하겠습니다.

 

6.25 전쟁이후 토지소유에 대한 정비를 하던 시절에 묘지기 김백문이 과거를 회상하여 재 작성한 위토문서와 회승지공파 계보도이다. 

 

이 문서에서 보이는 문제점은 이명직 선생이 사가와 외직(탁지아문 주사)에서는 李命稙, 궁궐 내직에서는 李明稙을 사용했다는 소문에 근거하여 성함을 문서에 혼용하여 쓴것은 이해를 한다하여도 

 

1. 부친 이승태가 양자오기전 원기할아버지댁 근처인 성은리와 인접한 곳을 주소지로 한것이 석연하지 않고

 

2. 독립계몽운동을 하던 이명직 선생을 친일파들이 1915년 9월 7일에 암살하였는데 이미 사망하신 분과 위토계약을 1917년 3월 10일에 맺었다고 작성했다는게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일니며

 

3. 10대조 선조인 이회 선조님의 장자집안이 번성하여 있는데 일개 탁지부 주사를 지낸 이명직 선생과 위토계약를 맺었다는 것도 사리에 맞지않는다. 이는 이명직 선생의 후손이 없다고 짐작하여 종중을 매개로 전답을 갈취하려 했다는 심증이 든다.

 

아무튼 이 위토계약을 근거로 1994년에 이회 할아버지를 중심으로 회승지공파를 만들어 회승지공파의 종재로 귀속되어 장손인 이금찬이라는 분이 위토보상금으로 대부도에 사사로이 땅을 사고 과수를 심어 자식에게 물려주려 한다고 하니 통탄할 일이다. 

 

또 이 명명백백한 문제를 바로 잡고자 하는 나를 주위에서는 쉬쉬하여 좋게 좋게 넘어가자고 하니 더 분통이 터지는 바이다. 하여 이 문제를 공론화 시킬것을 주장하는 바이다.

 

 

 

 

 

 

 

 

 

 

 

 

한산이씨 15세로 호장공 이윤경 선조님의 14대손이자 중시조 한산부원군(韓山府院君) 문정공(文靖公) 목은(牧隱) 이색(李穡, 1328년 음력 5월20일~1396년 5월20일) 선생의 목은8대손, 묵은9세(牧隱9世) 회승지공(澮承旨公) 이회(李澮, 1528 중종23년 9월17일~1597년 선조30년 12월 6일) 선조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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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계흐름도상 한산이씨 호장공계 15세 선조이자 목은9세이신 회승지공(澮承旨公) 이회(李澮, 1528 중종23년 9월17일~1597년 선조30년 12월 6일) 어른의 위치를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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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李澮) 선조님은 안소공(安昭公) 이훈(李塤) 선조님의 고손자이고 공편공(恭編公) 이유청(李惟淸) 선조님의 증손자이며 집의공(執義公) 이언홍(李彦洪) 선조님의 손자이며 통훈대부(通訓大夫) 이계(李洎) 선조님의 5남 중 장남으로 한산이씨 권지호장공계 15세로 호장공 이윤경 시조님의 14대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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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李澮) 선조님의 부인은 선조.광해군.인조에 걸쳐 영의정을 지낸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 어른의 누이인 전주이씨입니다. 두분 슬하에 목천홍산현감을 지냈고 후일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반정에 성공한 인조가 18살때 능양군이던 시절에 광해군일파인 이이첨 일파로 부터 능양군(인조)의 목숨을 구하고 목숨을 잃은 공으로 인조반정후에 분충출기(奮忠出氣) 정난원종(靖難原從) 일등공신(一等功臣)에 추봉되고 강원도 관찰사에 추증된 외아드님 이덕기를 두셨습니다. 이회 선조님은 외아드님 이덕기의 공으로 통정대부(贈通政大夫) 승정원 좌승지(承政院左承旨) 겸(兼)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 춘추관수찬관(春秋館修撰官)에 추증되어 후일 후손들이 회승지공을 결성할때 승지란 직책을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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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계표상 한산이씨 호장공계 15세 선조이자 목은9세이신 회승지공(澮承旨公) 이회(李澮, 1528 중종23년 9월17일~1597년 선조30년 12월 6일) 어른의 위치를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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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李澮) 선조님의 고조, 증조, 조부, 부친은 앞서 직계흐름도에서 말씀드렸으니 옆 제 직계표상에 보이는 아들 손자 증손 고손 순으로 소개하여 드리겠습니다. 1등공신으로 강원도 관찰사를 추증받은 이덕기 어른, 안성군수 이충연 (李沖淵) 어른, 열녀 경주최씨의 부군인 이창직 (李昌稷) 어른, 그리고 병마절도사 이수해 (李秀楷) 어른이 아들, 손자, 증손자 그리고 고손자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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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를 이어, 20 상주영장 이사목 (李思牧) 어른, 21 연산군수 이규첨 (李奎瞻) 어른, 22 절충장군 이원재 (李原載) 어른, 23 첨정 이원효 어른, 24 혜민원 주사 이승태 어른, 25 궁내부 특진관 성우공 이명직 어른, 26 평안북도 동면 면장 이철규 어른, 27 만주국 미곡검사관 이성구 어른, 28 제 부친인 창경궁 식물원장 방원 이성찬 선생등으로 이어져 내려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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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李澮, 1528년9월17일~1597년 선조30년 12월6일) 선조님은 1528년, 조선(朝鮮) 중종(中宗) 23년이자 명나라 가정(嘉靖) 7년 음력 9월 17일 부친인 통훈대부(通訓大夫) 이계(李洎) 선조님과 부사를 지낸 신윤형(申胤衡)의 따님인 평산신씨(平山申氏) 사이에서 5남 중 장남으로 출생하셨습니다. 동생분들은 4살 아래로 참봉 이주(李凑, 1532~1594) 어른, 11살 아래로 어모장군(禦侮將軍) 이도(李濤, 1539~1592) 어른, 또 15살 아래로 통덕랑 이언(李漹, 1543~1622) 그리고 19살 아래로 통덕랑 이하(李河, 1547~1607) 어른이 동생분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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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李澮, 1528년9월17일~1597년 선조30년 12월6일) 선조님은 조선의 중앙군인 오위(五衛)의 충좌위(忠佐衛)에 소속된 충의위(忠義衛)의 충의(忠義)로 복무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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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의위(忠義衛)는 세종 즉위년인 1418년에 개국(開國)공신과 정사(定社)공신, 그리고 좌명(佐命)공신 등 3공신 자손들로만 구성된 임금을 호위하는 군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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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의위(忠義衛)에 일정기간 복무하면 다른 관직으로 거관(去官)하여 관직에 진출할수 있었습니다. 음관은 군대복무 없이 바로 관직에 등용하는 반면 거관은 충의위에 일정기간 복무한후 관직에 등용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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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 족보에는 이회 선조님이 충의(忠義)로 복무하신 기록은 있지만 문무관의 벼슬을 지내셨는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단지 외아드님 이덕기의 공으로 사후에 통정대부(贈通政大夫) 승정원 좌승지(承政院左承旨) 겸(兼)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 춘추관수찬관(春秋館修撰官)에 추증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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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李澮, 1528년9월17일~1597년 선조30년 12월6일) 선조님은 세수 68세의 나이로 1597년 선조30년 명 만력(萬曆) 25년 12월6일에 작고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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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아드님인 이덕기(李德沂) 어른이 목천홍산현감을 지냈고 후일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반정에 성공한 인조가 18살때 능양군이던 시절에 광해군일파인 이이첨 일파로 부터 능양군(인조)의 목숨을 구하고 목숨을 잃은 공으로 사후에 증(贈)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承政院) 좌승지(左承旨) 겸(兼)경연(經筵)참찬관(參贊官) 춘추관(春秋館) 수선관(修選官)에 추증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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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아드님의 공으로 부인인 선조.광해군.인조에 걸쳐 영의정을 지낸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 어른의 누이인 전주이씨(全州李氏) 께서도 숙부인(淑夫人)에 추증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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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승지공(澮承旨公) 분파 배경을 설명드리겠습니다. 이회 선조님의 직계 후손되시는 분이 제 고조부인 성우공 이명직 대감님의 미등록 토지 4필지를 인지하고 1990년대초 토지등록에 대한 특별법으로 토지를 등록하고 토지 소유주 성우공 이명직 대감님과 이회 선조님과 같은 후손이라는 공통점을 통해 성우공 이명직 대감님이 10대 선조인 이회 선조님을 위한 위토로 사용했다는 묘지기 김백문의 인의보증 서류를 만들어 위토로 등록하였습니다. 그리고 회승지공(澮承旨公) 어른의 후손들을 모아 회승지공 분파를 결성했습니다. 이후 회장취임을 한후 대표 등기를 하여 4필지의 등기권자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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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토지는 인격권이 없는 종파에 등기할수 없고 오로지 종파를 대표하고 종파원의 일임을 받는 종원이 등기하게됨에 따라 종원 개인의 토지로 오용될수 있음을 인지하고 이에 위토를 보호하고 회승지공 종회가 위토 취득에 이용되지 못하도록 회승지공 종회를 뜻있는 후손들이 모여 성실하게 관리하고 운영하여 회승지공 선조의 정신과 위토를 제공한 성우공 이명직 대감의 정신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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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 어른의 묘소는 고양시 도내동 인재공파 광목공 한산이씨 선영에 고조부 이축 이하 후손 어른들과 함께 안장되어 있습니다. 손자 중연과 충연의 묘소 사이에 조성되어있습니다. 이곳 선영은 인재공파 후손들이 정성을 다하여 관리하고 있어서 그 어떤 가문의 선영 못지 않게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이회 어른의 묘소는 능선에 단을 쌓고 그 위에 부인 전주이씨와 쌍분으로 조성되어 있고 봉분 가운데로 혼유석, 상석, 향로석이 차례로 놓여 있으며 좌우에는 넉넉한 인상을 가진 문인석이 한 쌍 세워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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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산이씨 인재공파 세보에 나오는 이회(李澮) 선조 어른에 대한 내용입니다. 회(澮) 자는 사회이다. 중종25년(1528) 경인 9월17일에 태어나 선조30년(1597) 정유12월6일 졸하니 세수 68세다. 아들 덕기의 공훈으로 사후에 추증(贈)되어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承政院) 좌승지(左承旨) 겸(兼)경연(經筵)참찬관(參贊官) 춘추관(春秋館) 수선관(修選官)이 제수되었다. 묘소는 고양시 덕양구 도내동 은지 첨산이다. 부부 쌍분이고 부인 전주이씨 함천군 이덕재의 딸에게 숙부인이 추증되었다. 참고로 부인 전주이씨는 선조.광해군.인조에 걸쳐 영의정을 지낸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의 누이입니다. 그로인해 오리 이원익 대감이 이회의 아들이자 생질인 이덕기가 과거에 급제하여 홍산목천현감으로 관직에 나가게되자 목민관이 행할 지침인 선각을 적어주어 후일 이덕기 어른이 목민서인 ‘선각록'을 남겨서 후일 정약용의 ‘목민심서'의 바탕이 되도록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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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18편에서는 한산이씨 16세 목은10세 이덕기 선조편에서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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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2BwvkH-Gzm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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