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으로 보는 역사 – 정약현,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1)
역사를 살펴보면 사람이 살면서
외부에 드러나는 건축물을 지어 남기거나
글, 음악, 미술, 조각 등 예술로 삶의 자취를 남기거나
만든 업적을 기록한 역사로 남기기도 한다.
정약현, 정약전, 정약종, 장약용 형제처럼
업적을 기록한 역사와 글과 삶으로
후세에 지표를 남긴 이들도 많지 않지만
특히 형제 모두의 삶이 수백년간
영향을 남기는 예는 참 드물다.
이들 형제 중 역사와 저서와 정치로
가장 유명한 이는 막내인 정약용이다.
그래서 정약용을 중심으로 대부분 쓰고 있으나
여기서는 이들 형제들 가계에 얽힌 모두를 보고
그들의 삶이 남긴 역사를 살피기로 한다.
사람의 삶이 역사이고
역사가 곧 삶이라는 명제를
이들의 가계가
참으로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먼저 이들 형제의 가계도를 보자.
의령남씨 -- 정재원 -- 해남윤씨 – 조카 – 윤지충
| | (첫순교 복자)
1남 정약현 -- 이벽누이 1녀 – 이승훈 (첫영세자)
| 2남 정약전 (흑산도 유배)
1녀 정명련--황사영 3남 정약종 (순교 복자)
3녀 정난수--홍재영 |
| 정하상 (순교 성인)
홍봉주(순교) 4남 정약용 (배교-재입교)
가계도에 나오는 이름들을 보면
역사책에 그 이름이 오르는 이들이 줄줄이니
한 가정의 한 아버지로서
아버지 정재원은 정말 부러운 사람이다.
자식농사 하나는 우리 역사상 최고라고 할 만하다.
먼저 첫번째 부인으로부터 태어난
맏아들 정약현은 과거에 합격하고도
맏아들로써 집안을 지키며 조상들의 제사를 받들었다.
그러나 그는 조선 후기 실학의 길을 바꾼
이벽의 누이를 그의 부인으로 맞이하고
조선 후기 천주교의 중요 인물들과 인척을 맺게 된다.
그는 천주교에 입교하지 않았으나
맏딸 정명련은 황사영의 부인이 되어
순조1년 황사영이 국사범으로 사지가 찢겨 죽으면서
제주도 노비로 살다 죽는다.
셋째딸 정난수 또한 천주교 집안으로 시집가서
대원군의 병인박해 때 도숭지였던남종삼과 함께
순교한 홍봉주가 그녀의 아들이고,
시아버지부터 손자에 이르기까지 모두 순교했다.
정재원의 2번째 부인은 해남 윤씨로
딸과 아들 3형제를 두었는데
세 아들이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이다.
큰 사위가 이벽의 권유로 북경에 가서 영세를 받아
한국 천주교의 문을 연 이승훈이다.
1777년부터 이벽, 권철신, 권일신이 중심이 되어
경기도 광주의 천진암에서 천주학을 연구하였다.
이승훈의 아버지가 동지사로 북경으로 떠나게 되자
이벽이 이승훈을 설득해 북경에 가서 세례를 받고
천주교 관련 서적을 가져오게 한다.
강학회가 시작된 지5년만이었다.
1784년 2월에 27살의 이승훈이 북경에서
천주교 교리를 공부하고 그라몽 신부로부터
베드로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으니
영세를 받아야 천주교 신자로 인정하는 천주교는
이 날을 한국 천주교가 시작된 날로 정하고 있다.
귀국한 이승훈에게서 세례명을 세례자 요한으로 하고
세례를 받은 이벽은 수표교에 있는 자기 집에서
선비와 중인을 대상으로 천주교를 전파한다.
이 모임을 통해 역관 김범우를 입교시키고
김범우의 명례방 집을 집회장소로 이용하게 된다.
이곳이 오늘날 명동성당이다.
1785년 이들의 명례방 천주교 집회가 발각되어
장소를 제공한 김범우는 혹독한 고문을 받고
밀양으로 유배되어 고문 후유증으로 2년만에 죽으니
한국 천주교의 최초 희생자가 된다.
정약현과 이벽의 인연은
그의 이복동생들에게 이어져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형제들이 모두
이벽이 주도한 천진암 강학회를 통해 천주학을 배웠고
후에 모두 이승훈으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순조가 즉위하면서 노론 벽파가 득세하면서
천주교 신자인 남인을 제거하는 기해박해가 일어나고
이때 정약전과 정약용은 죽음을 피하기 위해
천주교회를 떠나 죽음 대신 유배를 가게 된다.
이들 형제들이 왜 배교했는지는 자세히 모르겠으나
이들이 정치에 입문한 과정을 보면
종교보다는 자신들의 앞날을 지키고 싶었던 마음을
더 깊게 가졌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정약전은 본래 과거에 생각이 없다가
뒤늦게 32살 때 과거를 보고 병조좌랑까지 올랐으나
천주교 신자로 과거 답안에 서양학설을 주장했다고
탄핵을 받아 낙향 하기도 했었다.
정약용은 성균관 유생시절 수재로 이름을 날리고
각종 시험에서 장원을 했으나
정작 과거 시험은 계속 낙방을 했다
모의고사는 잘 보면서 본고사 성적이 나쁜 것이다.
뒤늦게 27살 때 급제한 후 등용되었으나
그도 천주교 신자라는 이유로 탄핵을 받아
해미로 유배를 가기도 하는 등 순탄치 못했다.
이와 같이 이들 형제들은 천주교로 인해
험난한 정치 행로를 겪었기에
더 이상의 불행을 막으려고 배교를 택했는지 모르겠다.
유배지 흑산도에서 죽을 때가지 살은 정약전은
조선시대 유일한 해양생물서인 자산어보를 짓고
어부 문순득이 필리핀까지 표류했다가 돌아온
표류기록인 '표류시말'을 작성해 남기기도 해서
조선의 어류와 뱃길 자료를 후세에 전하고 있고
흑산도에 천주교를 전파한 이로 기억되고 있다.
정약용은 황사영 백서 사건으로 박해가 시작될 때
천주교 신자들을 관가에 고변하는 등
적극적인 배교행위를 펼쳐
1,000명의 포졸보다 1명의 정약용이 더 무섭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1870년대 조선에서 활동한 샤를르 달레 신부가 쓴
전래 초기의 천주교 활동을 적은 ‘조선천주교회사’에서
정약용이 말년에 자신의 배교를 후회하고
스스로 몸에 고통을 주면서 죄를 씻으려 하였다 하고
죽기 전 천주교 신자로 죄를 고백하는
병자성사를 받은 기록이 있고
이장 시 그의 관에서 십자고상이 발견되어
죽기 전 천주교로 다시 돌아온 것으로 보인다.
(민병일 글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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