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0. 韓山李氏/00_直系譜

한산이씨 시조 호장공 이윤경 선조님 묘소의 주소

忍齋 黃薔 李相遠 2016. 3. 19. 16:58
반응형

한산이씨는 충청남도 서천을 본관으로 한다. '한산'은 서천의 옛 지명이다.

 

시조는 고려의 호장() 윤경()이며, 중시조는 목은() 색()의 아버지 곡()이다.

곡은 이제현()의 문인으로 당대의 대문장이며 경학()의 대가이다. 그는 충숙왕 때 문과에 급제, 원()나라 제과()에도 급제하여 정당문학을 거쳐 도첨의찬성사에 이르렀다. 그의 아들 색도 역시 이제현의 문인으로 고려 말의 석학이며 대유로서 원나라 제과에 급제, 공민왕 때 문하시중에 이르렀고, 그의 문하에서 권근()·변계량() 등의 학자와 명신이 배출되어 성리학의 주류를 이루었다.

이밖에도 사육신()의 한 사람인 개(), 선조 때의 대문장인 산해() 등을 들 수 있다. 한산이씨는 조선에서 문과 급제자 195명, 상신 4명, 대제학 2명, 청백리 5명, 공신 12명을 배출하였다.

시조 이 윤경의 묘는 서천군 한산면 지현리 산 2-1에 위치한다.

충청남도 서천군 한산면 지현리 산2-1

인천공항에서 자동차로 이동하면 2시간 30분정도 걸리는 것으로 네이버 길찾기에 나온다.

 

시조 이 윤경의 묘 뒤편에는 건지산이 있다. 묘는 건지산을 지난 후룡이 멀리서 구불구불 지현으로 달려온 자리에 위치해 있다. 

묘 바로 뒤 나지막한 건지산을 지나면 기린 뿔 같은 쌍봉이 튀어나온 기린봉을 만나고, 더 올라가면 청등산(261m)과 노고단(229m)을 거친다. 거기를 지나면 원진산(270m)의 호서정맥을 만난다. 호서정맥은 속리산(1058m)에서 백두대간을 만난다.

 

1925년 조선사편수회가 황제칙령의 독립기관으로 확대개편하는 문서에 단국환국을 위조하여 단군환인으로 변조하여 사실의 역사를 신화로 둔갑시킨 이마니시 류가 호장공 이윤경 묘소의 기행문을 작성하여 조선의 대표적인 가문인 한산이씨를 예를 들어 "앞으로 조선사편수회의 할일은 기록문서가 존재하는 조선의 역사는 물론 조선의 가문조차도 전설 등으로 그 격을 떨어뜨려 조선인의 자존감을 상실케하는 그 본보기로 호장공 이윤경의 전설을 사용하라"는 조선사편수회 내부 회의 지침을 내렸다. 그 조작된 기행문에는 "고려 중엽, 당초에는 관아였었다. 하루는 군수가 계란 3개를 주며 관아 대청마루밑에 묻어두면 계란이 병아리로 부화되어 나온다고 했다. 이 때 호장공이 속이 고른 것과 바꾸어 넣었다고 한다. 이십 여일 후에 꺼내보니 계란이 썩어 있었다. 이를 본 군수는 자신의 부족함을 탄식하고 임기를 마친 후 가버렸다. 이에 호장공이 기회를 봐서 자신의 선고 유골을 대청 마루 밑에 모셨다고 한다. 세월이 흘러 조선 고종 13년(1876)에 관아가 퇴락하자 종중에서 지금의 한산면사무소로 이전시켜주고 묘를 복원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어 이 내용을 사용함에 신중해야 한다.

 

한산이씨 시조 묘 바로 앞에는 세 기의 고분이 있다. 전설은 금계포란형의 알봉이라 한다. 

눈에 띈 것은 예쁘게 다듬은 고분이다. 옛날 누군지 세력가 였을 것이다. 고대 부족국가의 왕릉이 아닌지...

이처럼 평지에 고분 만들기를 좋아한 곳은 경주의 왕들이 대표적이다. 김해의 수로왕릉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모두 흉노족의 후손들이다. 마찬가지로 여기도 중국에서 건너온 도래인이 아닌지? 싶다.

 

알봉이 정혈이라는 것은 청룡이 낮고 길게 내려오기 때문이다. 마을 뒤를 두르는 낮은 청룡은 집들로 가려져 있어 언듯 보아서는 보이지 않는다. 청룡이 낮다는 것은 혈자리도 낮다는 의미가 된다. 외 백호도 점점이 낮은 봉우리를 이루며 멀리서 감싸고 있다. 

금계포란혈이라 진기는 끝으로 내려온 곳이다. 

옆에는 한산면 행정복지센터가 있다. 면사무소 쯤 될듯 ...

면사무소 건너편 파출소 주차장에는 가건물 자율 순찰대가 있다.

한산면 파출소

서천 지현리3층석탑 건지산성을 품은 건지산 동쪽 자락에 지현리 3층석탑이 있다. 

길 건너편은 공덕비가 즐비하다. 공덕비 중에는 김병시의 것도 보인다. 안동김씨의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 영의정을 지낸 인물이다. 또 한 명의 안동김씨도 보인다. 김응근. 그는 사마시만 거친 채 형조판서까지 지낸 인물이다. 아마도 이 지역이 한양의 금수저들이 단골로 선택한 외직이었나 보다.  비석 바로 뒤는 제법 유명한 한산 소곡주 양조장의 하나다.

 

한산이씨 시조 호장공 이윤경의 묘지

 

저는 호장공 이윤경 시조의 묘지에 얽힌 이야기가 그저 풍수와 관련되어 있겠거니 했습니다. 그런데 시조 호장공 선조의 묘지에 대한 전설을 접하고 보니 이게 뜬금없고 족보에 기록된 내용과도 너무 상관관계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출처를 찾아보니 이 전설이 조선서편수회의 충청남도 서천군 한산면 한산이씨 고적답사보고서 형식으로 이마니시 류가 1925년에 총독부에 보고한 날조된 내용입니다. 1925년 조선사편수회가 황제칙령의 독립기관으로 확대개편하는 문서에 단국환국을 위조하여 단군환인으로 변조한 이마니시 류가 호장공 이윤경 묘소의 기행문을 작성하여 첨부하며 '앞으로 조선사편수회의 할일은 기록문서가 존재하는 조선의 역사는 물론 조선의 가문조차도 전설 등으로 그 격을 떨어뜨려 조선인의 자존감을 상실케하는 그 본보기로 호장공 이윤경의 전설을 사용하라'는 조선총독 명의의 조선사편수회 내부 회의 명령지침를 내렸습니다. 이어 조선에는 풍수를 아주 중요하게 여기는 풍습이 있으니 풍수쟁이들을 활용하여 조선인과 한산이씨 후손들에게 이 전설을 마치 사실인양 느끼게 하라는 지침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 당시 식민사관의 선봉자인 친일사학자 이병도는 이마니시 류의 수사관보를 지냈습니다.

 

 

제헌국회사에 의하면, 일제강점기 초대 총독 데라우치(寺內正毅)는 조선의 기록문화에 두려움을 느끼고 1910년 11월부터 모든 행정력과 군경을 동원하여 전국 방방곡곡에서 근 1년 2개월 동안 종로 일대의 서점을 비롯한 지방의 대, 소 서점, 향교, 서원, 구가(舊家), 양반 사대부가를 수색하여 단군조선에 관련 사료와 민족정신을 일깨우는 내용의 서적을 압수하거나 불태우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총독부 관보에 기록된바, 무려 20여만 권 달하는 서책을 압수하고, 그중에 조선의 역사를 왜곡하고 조작하는 데 유리한 것만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태워버렸습니다. 그리고는 독일 실증사학의 거두 랑케(Ranke)의 제자 리스(Riess)를 초빙하여 조선사학회 회원 40명에게 실증사학을 가르치게 하고는 사실의 고증 없이는 한 줄의 역사도 기술할 수 없다는 방침을 정합니다.
 
조선역사의 왜곡, 조작을 목적으로 1922년 12월에는 조선총독부 훈령 제64호로 "조선사편찬위원회"가 설립되었는데 고문에 이완용, 박영효, 권중현을 임명하고 위원에는 어윤적, 이능화, 정만조, 유맹, 이마니시, 이나바, 마쓰이, 가시하라 등을 임명하였습니다.
 
그리고 1925년 6월 6일에는 일제 천황 칙령 제28호로 "조선사편수회"가 독립관청으로 설치된 것을 보면 일제가 조선의 기록역사에 대해 병적인 열등감이 있음을 여실하게 보여줍니다. 이때 조선사편수회의 말단 직원인 수사관보에 후일 대표적인 친일사학자로 활동하는 이병도가 임명되었습니다.

 

단군조선을 조작한 이마니시 류(今西龍)와 대표적 친일사학자 이병도(李丙燾)

 

이들이 저지른 가장 큰 만행은 이마니시 류(今西龍, 금서룡, 1875년 ~ 1932년)가 삼국유사의 桓國(환국)을 桓因(환인)으로, 口자 안의 玉자를 긁어서 大자처럼 보이게 개작하여 조선 상고사 단군환국의 역사를 단군환인의 신화로 조작함으로써 환국과 단군의 실체를 부정하게 만든 일입니다.
 
여기까지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한산이씨 호장공파의 시조 이윤경(李允卿)의 묘소와 묘비

 

그런데 제가 제 한산이씨 집안의 족보공부를 시작하여 처음 접하게 된 시조 호장공 이윤경 할아버지에 대한 전설을 접하게 되었는데 이게 뜬금없고 족보에 기록된 내용과 너무 상관관계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출처를 찾아보니 그게 조선사편수회의 답사보고서 형식으로 이마니시 류가 1925년에 총독부에 보고한 겁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고려시대에 한산이씨 시조 이윤경(李允卿)은 몹시 가난하여 고을의 관청에서 심부름을 하며 근근히 살았다. 이윤경(李允卿)은 어느날 관가의 현감이 앉아있는 마루에 널빤지가 매년 조금씩 썩어내려가는 것을 발견하고 습기도 없는 집에 마룻바닥이 녹아내리는 것은 분명히 명당의 지기(地氣)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아들 이인간에게 자기가 죽으면 그곳에 몰래 묻어달라고 유언을 했다. 유언에따라 어둠을 틈다 관가의 마룻방 밑으로 뻗쳐맺힌 혈장에다 그의 시신을 암장했다. 그 명당에 발복으로 이곡(李穀), 이색(李穡)과 같은 명인을냈다. 이곡(李穀)과 이색(李穡)이 고려말 원나라에서 치르는 과거시험에 장원급제했다.
 
이곡(李穀)이 득세할 무렵 관가의 마루방밑에 그의 선조 이윤경(李允卿)이 암장된 사실이 알려졌다. 당시의 법에는 관가영역은 금장지역으로 되어있어 이곡(李穀)은 처벌을 받아야 할 형편이었으나 그곳에 암장하고 그 명당의 효험으로 자신과 같은 인재가 나와 나라에 공헌하고 있는터라 임금은 선조의 무덤을 옮기는것보다 차라리 관가를 옮겨 달라는 이곡(李穀)의 상소를 받아들였다.
 
자신의 뜻이 받아들여지자 이곡(李穀)은 자비를 들여 관가를 옮겼다. 그것이 지금의 한산면사무소 자리라고 한다. 현재 옛 관가 자리에 잘모셔져 있는 이윤경(李允卿)의 묘 비석에는 (고려호장 이공지묘 高麗戶長 李公之墓)라고 새겨져 있다."
 

호장공 이윤경 묘소에 관한 전설의 허구성을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고려시대의 행정조직상으로 한산은 지방관을 파견하지 못하는 곳으로 그곳의 유력가문의 장으로 지방관인 호장을 대신하도록 하는 제도를 적용받는 곳이었습니다. 호장공 이윤경에 이어 2세 정조호장 이인간, 3세 봉헌대부비서랑 이효진, 4세 봉익대부판도판서 이창세, 5세 광정대부 도첨의 찬성사로 전북정읍감무를 지낸 이자성까지 5대에 걸처 호장직을 세습했습니다. 하여 전설 속 “고을의 관청에서 심부름”을 했다는 것은 근거없는 소설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고려호장(高麗戶長)은 마을의 우두머리로 그 마을의 대지주의 역할을 하는 자리인데 “매우 가난하여 근근이 살아간다”는 가설 부터 잘못된 기술입니다. 이는 단군조선의 사실 역사를 허구의 단군신화로 변조한 이마니시 류의 수법을 한산이씨 가문에 적용한 것입니다.

 
다른 집안 분들도 선조에 대한 그럴듯한 전설이 있다면 누가 작성하고 언급했는지 꼼꼼하게 살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