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2. Humanities/22_한국역사

강혜림(姜惠霖·장후이린/지앙훼이린) 열사

忍齋 黃薔 李相遠 2016. 4. 1. 13:38
반응형





○ 강혜림(姜惠霖·장후이린/지앙훼이린) 열사
.
강혜림 열사는 중국 산동성 서하현(山東省 棲霞縣) 출신 화교로서 평양에 음식점을 하며 거주하여 오던 중 1950년 11월 중공군이 6.25전쟁에 개입하자 자진하여 우리 육군 1사단 15연대 '중국인특별수색대' 부대장으로 종군하여 적정 수색과 포로 심문 등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
그는 성미가 매우 팔팔하고 용감한 최고의 병사였다. 1950년 11월1일 전투에서 그는 종횡무진 돌격하여 수차례 큰 공을 세워 화랑무공훈장을 받았다.
.
51년 초 정보참모이던 김안일(金安一) 중령이 대령으로 진급, 15연대장이 되면서 이들을 자기부대로 데려간 것이다. 따라서 명칭도 15연대 '중국인특별수색대'로 불리게됐다. 15연대는 또 미(美)1군단 25사단 예하에 배치돼 전투에 임하고 있었다.
.
51년 1월말, 아군은 안성(安城)에서 다시 서울탈환을 목표로 반격에 나서 과천(果川)까지 밀고 올라갔다. 과천(果川)에서 중공군은 관악산(冠岳山)의 한 봉우리에 배수진을 치고서 15연대를 저지하고 있었다.
.
봉우리 위의 적은 1개대대 병력이었다. 병력은 많지 않았지만 전술적 위치가 워낙 유리한데다 중공군 최우수 정예부대였기 때문에 고지점령을 위한 아군의 시도는 번번이 많은 희생자만 낸채 실패로 끝났다.
.
결국 15연대는 중국인수색대를 최대한 활용키로 했다. 이들을 중공군으로 위장시켜 총공격때 측면으로 침투시킨다는 것이었다.
.
중공군으로 위장한 강혜림 열사가 이끄는 수색대는 밤 11시쯤 아군의 엄호사격을 받으며 적진을 향해 산을 타고 올라갔다. 아직 녹지 않은 눈에 정강이까지 푹푹 빠졌다. 대원들은 무사히 적진 앞에 다다를 수 있었다.
.
중공군들은 특유의 은폐전술로 개인 참호 속에 숨었기 때문에 좀처럼 노출이 안돼 공격은 쉽지 않았다. 그러나 강혜림 열사는 국부군(國府軍)시절의 경험을 살려 저들을 공격했다.
.
아군의 총공격에 맞춰 참호와 참호사이를 포복으로 기면서 수류탄을 던져넣어 폭파시킨 후 기관단총으로 갈겨댔다. 이런 식으로 8개의 참호와 진지를 쑥밭으로 만들었다. 중공군 생포수도 15명이나 됐다.
.
강혜림(姜惠冧) 열사는 바로 이 경기도 과천지구 전투에서 1951년 2월 2일 전사하였다.
.
마지막 장면은 이러하였다. 측면에서 적진을 향해 올라 갈 때는 강혜림 열사는 적군을 피해 잠깐 숨어 휴식하도록 명령했었다. 이들이 쉬고 있는 동안 아군의 총공격이 시작됐다.
.
총공격으로 탄환이 빗발치자 적은 늘 하는 전술대로 참호 속에 쏙 들어가 보이지도 않았다. 이를 지켜보던 강혜림 열사는 벌떡 일어나 蘇製 기관 단총을 들고 적진 앞으로 달려들었다. 동료들이 불렀으나 막무가내였다.
.
기관단총을 갈겨대면서 적 참호 바로 앞까지 돌진한 순간 공교롭게도 실탄이 바닥나고 말았다. 이때 중공군(中共軍)들이 참호에서 머리를 내밀고 응사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강혜림 열사는 피할 생각을 안했다.
.
총의 개머리판으로 적을 후려치며 단신 윽박전을 벌인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순식간, 적의 총탄에 강혜림 열사는 장렬하게 전사하고 말았다. 이 때 그의 나이 27세, 전사날짜는 51년 2월 2일이었다.
.
뒤따라 공격해 들어온 동료들은 이 광경을 빤히 지켜보면서도 어쩔 수 없었다. 워낙 치열한 싸움이었기에 시신도 전투가 다 끝난 다음에야 수습할 수 있었다.
.
그러나 강혜림 열사의 죽음은 보람이 있었다. 이 전투에서 결국 아군은 고지를 점령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점령하고 보니 적은 중공인민위(中共人民委)에서 내린 최우수 부대기까지 가진 정예부대였다.
.
어찌나 억척스러웠는지, 한사람도 퇴각을 안하고 버텨 거의 전부가 전사했다. 개인참호 하나에 한명씩 죽어있을 정도였다. 15연대 측의 손실도 적지 않았다. 미군(美軍)지휘관들은 이때 아군피해가 너무 크다며 연대장 김안일 대령까지 호출해 조사했었다. 그러나 현지 조사에서 적의 우수부대 깃발과 무수한 시체들보고는 오히려 노고를 치하했다.
.
강혜림 열사의 유해는 동지들에 의해 부산 화교 소학교에 임시 안치되어 있었는데 자유중국 대사관과 전우 화교들로부터 국립묘지에 안장하여 줄 것을 요청받고 정부에서는 1964년 11월 13일 제110회 국무회의에서 국립묘지에 안장할 것을 의결, 1964년 12월 12일 국립묘지 제24묘역에 안장하였다.
.
그 후, 외국인으로써 6.25전쟁에 참전하여 전공을 세운 유공자의 희생정신을 기리고 널리 홍보하기 위해 2012년 5월 15일 12번 묘역으로 묘소를 이전하고 위서방(魏緖舫·웨이쉬팡/웨이시팡) 열사와 함께 별도로 묘소 조성하게 되었다.
.
강혜림 열사는 생전의 공적으로 1959년 6월 1일 은성 화랑 무공훈장을 추서받았으며 화교의 사기 앙양과 우방국과의 유대 강화를 위하여 우리 전몰 용사와 같은 대우로 국립묘지에 안장하게 된 것이다.
.
+++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