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0. 韓山李氏/02_麟齋遺稿年譜

2016년 11월 6일 고양 광목공 시제

忍齋 黃薔 李相遠 2016. 11. 11. 2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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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11월 초에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도내동 828번지에 있는 한산이씨 인재공 광목공 망월암공 안소공 사당에서 가을시제를 거행합니다. 광목공 이숙야 선조님은 한산이씨 시조 호장공 이윤경의 8대손이며 중시조 목은 이색 선생의 2대손(손자)입니다. 특이한 점은 광목공 선조께서 강화봉씨 장인의 제사를 모신것을 이어 아직도 광목공 선조의 장인.장모 시제를 함께 모시고 있습니다.


한산이씨의 시조는 고려 숙종 때 권지호장(權知戶長)에 오른 호장공(戶長公) 이윤경(李允卿)입니다. 이윤경은 한산 지방에 토착하여 세거해온 호족(豪族)의 후예로 고려 중엽에 향리(鄕吏)의 우두머리인 호장(戶長)을 역임했고, 5대에 걸쳐 호장직을 세습하여 오면서 명문의 기틀을 다졌습니다. 한편 한산이씨의 중시조는 목은(牧隱) 이색(李穡)이며 그의 아버지가 바로 가정(稼亭) 이곡입니다. 이곡은 이윤경의 6대손으로 당대의 대문장가이며, 우탁(禹倬) 이동(易東), 아들 목은(牧隱) 색(穡)과 더불어 경학(經學)의 대가였습니다. 이곡은 1320년(충숙왕 7) 문과에 급제하고 원나라 제과(制科)에도 급제하였는데 원의 벼슬로는 중서성좌우사원외랑 (中書省左右史員外郞)을, 고려에서는 벼슬이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에 올라 한산군(韓山君)에 봉해졌습니다. 이곡의 아들 이색이 1362년 홍건적의 난 때 왕을 호종(扈從)한 공으로 세워 한산부원군(韓山府院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본관을 한산으로 하였습니다.


호장공(戶長公) 이윤경(李允卿) (8) 7孫 (목은2세,牧隱1代孫인재(麟齋이종학 (李鍾學, 1361년 공민왕10~1392 태조1, 진천 백원서원, 서천 문헌서원)의 자는 중문(仲文)이고 호는 인재(麟齋)입니다. 13세때인 1374년(공민왕 23) 성균시에 합격하고, 1376년(우왕 2) 문과에 동진사(同進士)로 급제하여 장흥고사(長興庫使)에 제수되었습니다.  관직이 밀직사지신사(密直司知申事)에 이르렀습니다. 1388년에는 우대언(右代言)으로 요동정벌군이 출정하기 전 조병육정신(助兵六丁神:군사를 陰助하는 6정신)에게 초례(醮禮)를 행하였습니다. 창왕 즉위 직후 성균시 관장, 첨서밀직사사(簽書密直司事)가 되었습니다.  1392년 정몽주(鄭夢周)가 살해된 뒤 이숭인(李崇仁) 등과 함께 탄핵을 받아 함창으로 유배를 당하였고, 조선창업후 정도전(鄭道傳), 손흥종(孫興宗) 등이 장사현(長沙縣)으로 옮기는 도중 무촌역(茂村驛)에서 인재공을 살해하였습니다. 저서로는 《인재유고》가 있습니다.  부인은 양성이씨(陽城李氏)이고, 목은(牧隱) 색(穡)의 3남중 차남입니다. 후손들이 인재선생 년보고를 발간했습니다.


호장공(戶長公) 이윤경(李允卿) (9) 8孫 (목은3세,牧隱2代孫광목공(光牧公) 이숙야 (李叔野 묘소: 고양시 덕양구 성사동 월하능마을) 인재공의 6남1녀중 장남입니다. 부인 강화봉씨(江華奉氏)로 광목공의 후손들은 강화봉씨 장인부부의 시제도 함께 모십니다,광목공은 광주목사(光州牧使, 정3품)를 지냈습니다. 우암 송시열이 지은 [광주 목사공 휘 숙야묘표]에 의하면 '승정 횡예엄무년 (1862년) 중춘에 은진 송시열 지음. "우리나라가 개국하고 나서 고려조의 대가댁 자손 중에 어질고 뛰어난 자를 뽑아 등용하니, 공이 문보에 적을 두지 않고 사헌부, 사간원을 차례로 거처 광주 목사의 벼슬에 이르렀다. 부인은 봉씨이니, 합장 하였다. 지금 10대손인 안사 수언이 추모하여 묘석을 세웠으나 워낙 먼 조상이라 자세한 사적을 얻지 못하였다. 공은 본관이 한산이니 위로 가정, 목은, 인재 세분이 증조부, 조부, 부 이고 아래로 감사인 축, 참찬인 훈, 의정인 유청이 아들, 손자, 증손자이다. 그후로는 더욱 번창하여 명공, 현재가 이어 나왔으니 선조를 받들어 후손에게 물려준 공의 덕을 징험할수 있으리라. 공은 인재공의 유언에 따라 벼슬을 추구하지 않았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선대의 업적을 이어받아 능히 왕자(王者)의 길을 빛냈을 것인데, 겨우 한 고을의 목사로 국한되었으니 애석한 일이다. 그러나 화관을 출입함에 이미 명성을 아루어 더욱 빛남이 있었으니 사람들이 한산이씨에 어진 사람이 많다고 말하는 것은 결코 헛말이 아니다. 아아! 여기에 있으나 저기에 있으나 언제나 기리는것은 진실로 공의 어짐이요, 나라가 망함에도 온전하여 간택에 나가서 관직에 있는 것은 성조의 충후함에더욱 느낌이 있으리라."


호장공(戶長公) 이윤경(李允卿) (10) 9孫 (은4세,牧隱3代孫) 망월암공(望越庵公) 이축(李蓄, 1402년 태종2년~1473 성종4, 묘소: 고양시 덕양구 도내동 은지)은 이숙야의 1남2녀중 외아들입니다. 자는 윤보(甫)이고, 1417년, 16세에 계성전직 제수되어 사선주부를 거쳐 광주판관, 사헌부감찰, 호조좌랑 및 정랑, 전농시소윤, 사헌부장령, 지사간원사, 판선공감사, 봉상시사, 첨지중추부사 겸 지병조사, 이조참의를 거처 1453년(단종1) 황해도 관찰사를 지냈습니다. 계유정난을 일으킨 수양대군이 정권을 잡으며 정세가 혼란해지자, 이 해 9월에 벼슬을 사직하고 경기도 고양으로 낙향하였습니다. 3년 후인 1456(세조4)년 6월 전 집현전 학자들인 성삼문, 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성원, 유응부가 주동이 된 단종복위운동이  실패(사육신의 난)하자, 이 때 주동인물인 6촌동생 이개 백옥헌공, 그리고 그와 뜻을 함께 했던 6촌동생 이유기 도총진무공이 비참하게 죽음을 당하고, 그 가족들이 멸문의 화를 당하였습니다. 이 후로는 공은 벼슬에 완전 뜻을 버리고 고양에서 여생을 보냅니다. 고양에 낙향해 내려 왔을 때에 연못을 파고 숨어 살아 그 연못을 은지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공은 1473년(성종4) 72세의 나이로 서거히였습니다. 공의 후손들이 그 후 경기도 고양시 도내동에 주거하며 맥을 잇고 집성촌을 이루었습니다. 공의 아드님 이훈 안소공, 손자 이유청 공편공, 증손자 이언호 감사공이 모두 크게 출세하는데, 안소공은 효령대군의 사위로서 벼슬은 오위도총부도총관을 거쳐 의정부 좌참찬에 이르렀고, 공편공은 벼슬이 좌의정에 이르러 기로소에 들어갔으며, 감사공은 홍문관 직제학-대사간을 거쳐 전라감사에 이르렀습니다. 이후 축은 공주(公州) 동학사 숙모전(肅慕殿) 에 생육신(生六臣) 과 더불어 배향 되었습니다. 【태백산사고본】 1책 2권 16장 B면【영인본】 6책 524면【분류】 *외교-명(明) / *외교-야(野) / *무역(貿易) / *왕실(王室) / *어문학(語文學)


호장공(戶長公) 이윤경(李允卿) (11) 10孫 (목은5세,牧隱4代孫안소공(安昭) 이훈 (李塤, 1429 세종11~1481 성종12, 은지 불천위 사당)은 이축의 외아들입니다. 공은 청백리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초명은 서(墅)이고 자는 화백(和伯)과 도옹(賭翁)입니다. 효령대군(孝寧大君)의 사위입니다. 1439년(세종21) 11세나이로 관직에 나가 정3품 제용감•군자감의 판사를 거쳐 판전농시사가 되고, 1460년 공조참의, 1462년 한성부윤•형조참의를 역임하고. 1467년(세조 13) 이시애(李施愛)가 함경도에서 난을 일으키자 토평대장이 되어 적의 진로을 차단하였습니다. 1468년(세조14) 경기관찰사, 한성판윤 역임하고. 1471년(성종 2) 성종 즉위에 공이 크다고 하여 좌리공신(佐理功臣)4등에 책록되고 한성군(韓城君)에 봉하여졌습니다. 오위도총부도총관을 거쳐 의정부좌참찬에 이르렀습니다. 시호는 안소(安昭)입니다. 


호장공(戶長公) 이윤경(李允卿) (12) 11孫 (목은6세,牧隱5代孫공편공(恭編) 이유청 (李惟淸, 1459세조5~1531중종26)은 이훈의 2남3녀중 장남입니다. 자는 직재(直哉)이고 1486년(성종 17)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표연말(表沿沫), 유숭조(柳崇祖) 등과 사유(師儒)로 선발되었습니다. 1491년 지평이 되고 1493년 장령에 승진하였습니다. 1494년 연산군이 즉위한 뒤 다시 지평으로 강등되었다가 1497년(연산군 3)집의에 올랐습니다. 1498년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온건하게 처리하려다가 배척되어 영서도찰방(迎曙道察訪)으로 좌천되었습니다. 1504년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다시 연루되어 장(杖)100을 받고 직첩이 환수되었으며 관노(官奴)가 되었습니다. 중종반정으로 정권이 바뀌자 1506년(중종 1) 사헌부집의로 복직되고, 정난공신(定難功臣)2등에 책록되었습니다. 이듬해 대사헌 한성부좌윤을 역임하고, 1511년 황해도 관찰사, 이어서 1513년에 경기도 관찰사가 되어 선정을 폈습니다. 1517년 다시 대사헌이 되었는데, 1519년 남곤(南袞), 심정(沈貞) 등이 기묘사화를 일으켜 조광조(趙光祖) 등을 몰아내는 데 가담하여 공을 세워 우의정이 되고 한원군(韓原君)에 봉하여졌습니다. 1521년 등극사(登極使)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뒤에 좌의정이 되었다가 기로소에 들어갔습니다. 시호는 공편(恭編)입니다. 한산이문이 조선조에 배출한 상신 4인(14세-이산해 李山海 영의정 아성부원군, 21세-이사관 李思觀 좌의정 효정공, 23세-이경재 李景在 영의정 문간공)중 1명입니다.  연산군때에 노비 까지 되었다가 중종 반정으로 회생되어 고급 관직에 올라 조선조 4대 명신 중의 한분으로 오른 편공 이유청의 이야기는 홍명희의 임걱정이라는 소설 시작부에 나오는 중심 인물 이교리의 이야기를 만들어 내게된 인물입니다.



광목공 시제 (인제공-광목공-망월암공-안소공-공편공)

인재공 종회건물

아래 지형사진지도는 옥광천 순복 숙부님이 제작하신걸 댓글을 남기고 이미지 캡처해 왔습니다. 

참고: http://blog.daum.net/sunbok504/881

노란색 동글뱅이가 지계선조입니다. 참고: http://blog.daum.net/enature/15852867



1. 인재공.안소공 부조지묘 - 인재공, 안소공 시제 - 할아버지와 장증손자

도내동(道乃洞) 미등록 사적중에서
1) 이훈(李塤) 부조지묘(不祧之廟)
은못이 근처에 있다. 고려 말 학자 목은 이색(李穡)의 아들인 인재(麟齋) 이종학(李種學)과 이훈(李塤)을 봉안한 사당이다. 1858년(철종 9)에 신축되었으나, 그 후 1957년과 1978년 두 차례 중건된 이 사당은 그 규모가 정면 3칸, 측면 1.5칸으로 된 조선 기와로 단청을 하였다. 사당 내의 배치는 이훈(李塤)을 주벽으로 하고, 이종학을 추배(追配)하였다. 한편 같은 도내동에는 이종학의 묘가, 또 성사동에는 이훈(李塤)의 묘가 있다. (제2권 문화재, 인물편 참조) 부조지묘 안에는 안서공묘 중수기(1978)를 새긴 비문과, 원래 안서공 묘 앞에 묘갈 두 기가 있다. 이 묘갈은 중국남경의 청옥으로 만든 것으로 도난 방지를 위해 부조지묘 경내로 옮겨온 것이다.

아래 사진은 옥광천 순복 숙부님이 제작하신걸 댓글을 남기고 이미지 캡처해 왔습니다. 

참고: http://blog.daum.net/sunbok504/881


종손 세준 조카님 인사말

불천지위 안소공 사당에 함께 모신 인재공

사진촬영 봉사를 하시는 옥광천 순복 숙부님의 환한 웃음



경은제 - 광목공(9세), 광목공장인, 망월암공(10세), 공편공(12세), 언호.언홍(13세), 뢰.계(14세), 오.회(15세), 덕연.덕순.덕형.덕기(16세), 성원.홍원.광원.중연.충현(17세), 재항(18세), 완(19세), 이연(20세), 재희(21세), 기화(22세), 우명(23세), 제운(24세) 시제 -

아래 설명은 옥광천 순복 숙부님이 제작한것을 이미지 캡처하여 온것입니다. 

참고: http://blog.daum.net/sunbok504/880






















회 선조님의 승지공파가 성우공 이명직 대감님의 4필지 전답을 위토로 하여 1990년대 특조법으로 금찬 총무에 의해 만들어진것을 승지공 총무에게 설명하고 연락도 없이 승지공 회장 총무를 선임한것의 잘못을 지적하고 있다.



도내동(道乃洞) 미등록 사적중에서
1) 이훈(李塤) 부조지묘(不祧之廟)
은못이 근처에 있다. 고려 말 학자 목은 이색(李穡)의 아들인 인재(麟齋) 이종학(李種學)과 이훈(李塤)을 봉안한 사당이다. 1858년(철종 9)에 신축되었으나, 그 후 1957년과 1978년 두 차례 중건된 이 사당은 그 규모가 정면 3칸, 측면 1.5칸으로 된 조선 기와로 단청을 하였다. 사당 내의 배치는 이훈(李塤)을 주벽으로 하고, 이종학을 추배(追配)하였다. 한편 같은 도내동에는 이종학의 묘가, 또 성사동에는 이훈(李塤)의 묘가 있다. (제2권 문화재, 인물편 참조) 부조지묘 안에는 안서공묘 중수기(1978)를 새긴 비문과, 원래 안서공 묘 앞에 묘갈 두 기가 있다. 이 묘갈은 중국남경의 청옥으로 만든 것으로 도난 방지를 위해 부조지묘 경내로 옮겨온 것이다.
2) 이유청(李惟淸) 묘
고양시청에서 이어진 69번 지방도로 도내동 은못이 마을에 있으며 배 정경부인 경주 이씨의 묘와 합부되어 있다. 묘에는 상석, 고석, 혼유석, 향로석, 장명등이 배치되었고 문인석 4구가 세워져 있다. 상석은 원래 두 기였으나 하나로 대치하였다. 장명등은 총 높이 190cm, 옥개석 89cm, 화창은 4개이며 크게 3단계로 되어 있다. 문인석은 봉분 앞쪽에 작은 것을 배치했는데 규모는 높이 173cm, 허리 높이 둘레가 168cm이며 뒤쪽 것은 크기가 232cm, 허리 높이 둘레는 233cm의 규모이다. 화강암으로 된 상석 뒤에는 2기의 묘비가 세워져 있는데 구비의 크기는 폭 45cm, 두께 20cm, 높이 176cm이며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 좌의정 겸영경연감 춘추관사 세자부 한원군 이공지묘 배 정경부인 경주이씨부좌(韓原君 李公之墓 配 貞敬夫人 慶州李氏祔左)”라 기록되어 있다. 신비는 1957년 4월에 새로 건립된 것으로 폭 48cm, 두께 23cm, 높이 120cm이다. (제 2권 문화유산, 인물편 참조)
3) 도내동 은지(隱池) 및 이축(李蓄) 선생 묘(제2권 문화유산, 고양시 향토유적편 참조)
4) 이신의(李愼儀) 선생묘 및 신도비 (제2권 문화유산, 고양시 향토유적편 참조)
5) 이석탄 장대(李石灘將臺) (제2권 문화유산, 고양시 향토유적편 및 제7권 자료집 금석문편 참조)
도내동 흥도초등학교에서 창릉천(昌陵川)으로 연결된 도라산 기슭에 있다. 현재 장대의 주위에는 다른 묘나 비는 보이지 않으며 산을 깎아 터를 만들어 잘 보존하고 있다. 장대는 높이 90㎝, 넓이 50㎝, 두께 20㎝의 화강석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앞면에는 ‘이석탄장대’라 표기되어 있으며 뒷면에는 ‘선생이 임진년에 의병을 일으켜 대를 설치한 후 149년 경신년에 마을 사람이 세움(先生壬辰起義兵設臺後百四十九年庚申洞人立)’이라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을 보아 이 장대가 세워진 곳이 석탄 이신의(李愼儀) 선생이 의병을 일으켜 왜군과 접전을 벌인 장소임을 알 수 있다. 비문의 내용은 이 장대가 1740년에 마을 주민들에 의해 건립된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또 1755년 영조 연간의 이석희 편 『고양군지』에도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으로서 왜병을 소탕했으며 그가 살던 곳에 장대가 있다”란 기록이 있다. 장대는 5cm의 기단과 비신이 합쳐진 1기이며 옥개석과 비두는 만들지 않고 윗부분이 아랫부분보다 약간 넓은 모양을 하고 있다.
6) 경은재(景隱齋)
가정(稼亭) 이곡(李穀)과 목은(牧隱) 이색(李穡)을 모신 재실이다. 재실은 도내동 은못이 동네에 있다. 한산 이씨 인재공 22대 종손 이세준 등이 1997년 12월에 재건하였다.
7) 망월암공 이축 유적비(望越庵公 李蓄 遺跡碑)
위의 한산 이씨 묘역으로 들어가는 초입에 있다. 유적비는 2002년 10원 13일에 건립되었다.
8) 김호(金灝) 묘 및 신도비
이 묘와 신도비는 옛 화전과 능곡을 연결하던 도로 도내동 서재동(書齋洞) 마을에 배 해평 윤씨와 합부되어 있다.
봉분 앞에는 흰 대리석 재질의 묘비가 있으며 이밖에 상석, 혼유석, 향로석, 망주석 등이 있는데 망주석 윗부분의 석수가 특이하며 조각수법이 뛰어난 문인석도 있다. 또 묘소 앞에는 옥개석, 기단이 갖추어진 화강석 재질의 신도비가 세워져 있다. 작은 담장 안에 세워져 있는 신도비는 1726년 8월에 건립한 것으로 정호(鄭澔)가 짓고 이관명(李觀命)이 썼으며 민진원(閔鎭遠)이 전자(篆字)를 썼다.
김호(1651:효종 2~1695:숙종 21)는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연안, 자는 여습(汝習), 호는 심락재(尋樂齋)이다. 김인개(金仁漑)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김연(金涎)이고, 아버지는 부사 김수오(金粹五)이며, 어머니는 유경원(柳慶元)의 딸이다.
1663년(현종 4) 충청도 유생으로서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을 문묘에 종사하도록 건의하였으며 1678년(숙종 4) 통사로서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전적․지평․사간 등을 역임하였다. 1687년 장령이 되어서 지평 이정익(李禎翊)․김만중(金萬重) 등을 구하려는 소(疏)를 올렸으나 거절당하였다. 1694년 갑술환국 이후에 장령으로 있다가 울산 군수 재직 중 병사했다. 성격이 강직하여 간관의 풍채를 지니고 있었으며, 대각에서 그 직분에 능한 사람을 추천할 때 반드시 제일로 꼽았다.
9) 이덕형(李德泂) 묘
묘는 도내동에 배 있다. 묘비는 1990년 5월에 신비를 세웠다. 고령 신씨의 묘와 쌍분으로 되어 있으며, 봉분의 주위에는 망주석 2기, 상석 1기가 세워져 있고 정두경(鄭斗卿)이 지은 폭 50cm, 두께 12cm, 높이 110cm의 묘표가 있다. 묘비는 1990년 5월에 신비를 세웠다.
이덕형(1566:명종 21-1645:인조 23)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한산, 자는 원백(遠伯), 호는 죽천(竹泉), 관찰사 이언식(李彦湜)의 증손으로, 아버지는 호군 이오(李澳)이며, 어머니는 민원종(閔元宗)의 딸이다.
1590년(선조 23) 진사가 되고, 1596년 정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 예문관 검열이 되었다. 이어 1597년에서 1608년까지 봉교․정언․지평․수찬․부교리․헌납․전적․문학․집의․교리․부응교․사간․사예․사섬시 부정․응교․시강원 보덕․사도시정 등을 거쳤다. 광해군 때에도 응교․동부승지․승지․대사간․좌부승지․부제학․이조 참의․우승지․병조참판․도승지 등의 경관직과 나주 목사․전라 감사․황해 감사 등의 외관직을 지냈다.
특히, 광해군이 영창대군을 해치고 인목대비를 유폐시킬 때에 직접 반대의 입장에 서지 않고 왕의 뜻에 따르거나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광해군 말년에 도승지로 있을 때 세태가 어지럽자 병을 이유로 사직소를 올렸으나 허락받지 못하였다. 인조반정 때 광해군을 죽이지 말 것을 주장했으며 이를 본 능양군[인조]이 충신이라고 판단해 반정 후 인목대비를 맞이하는 의식에서 그를 앞세워 반정을 보고했고, 능양군에게 어보를 내리게 하는 데 공을 세웠다.
인조 때는 한성부 판윤이 되어 이괄(李适)의 난을 진압한 공으로 품계가 숭정대부로 오르고, 주문사로서 명나라에 다녀왔다. 1627년 정묘호란 때에는 왕을 강화에 호종하고, 1636년 병자호란 때에는 남한산성에 호종하였다. 환도 후 숭록대부로 품계가 올라 예조 판서․판의금부사․지돈녕부사․우찬성 등을 지냈으며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죽창한화』․『송도기이』등이 있다. 시호는 충숙(忠肅).
10) 이언홍(李彦洪) 묘
이유청 묘 바로 아래에 있다. 쌍분으로 된 봉분의 주위에는 상석 1 기와 문인석 4구가 있다. 화강암 묘비는 두부가 용두로 되어있고 크기는 폭 60cm, 두께 18cm, 높이 125cm이다. 비문은 박충원(朴忠元)이 지었다.
이언홍(李彦洪)은 조선시대 문신으로 본관은 한산이며 좌의정 이유청(李惟淸)의 차자(次子)이다.
11) 이계(李洎) 묘 - 이언홍 묘 아래에 있다.
12) 이덕기(李德沂) 묘 - 이계 묘 아래에 있다.
13) 이중연(李重淵) 묘 - 이덕기 묘 아래에 있다.
14) 이회(李澮) 묘 - 이덕기 묘 아래에 있다.
15) 이충연(李沖淵) 묘 - 이회 묘 아래에 있다.
16) 정경부인 이천 서씨(貞敬夫人 利川 徐氏) 묘
망월암 이축의 부인이다. 도내동 내 이축의 묘와 떨어진 곳에 따로 자리 잡고 있다. 묘 주위 둘레석은 6각형으로 되어 있으며 묘 앞에는 상석, 향로석, 혼유석, 문인석 2기가 있다. 묘비는 1957년에 다시 세웠다.
17) 이축(李蓄) 묘
은지의 서남쪽 200m 부근에 배 이천 서씨의 묘와 합부되어 있다. 묘비, 망주 상석 등이 배치되어 있다. 묘소는 조선조 전기의 양식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으며 특히 사후 곧 세워진 것으로 보이는 묘비와 문인석은 석물적 가치가 높은 것으로 보인다. 도내동 은지는 홍도동 사무소에서 화전 방향으로 이어진 도로상의 은못이 마을 입구에 있다. 이 연못은 약 2500평 정도의 규모로 조선조 초기의 문신이었던 망월암 이축이 벼슬을 버리고 이곳에 은거하면서 파 놓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연못은 1456년에 만들어졌으며 지금의 540년 동안 샘물에 의해 유지되어 오고 있는 드문 연못이다.
이축은 이곳에서 계유정란 때 쫓겨난 단종을 그리워하며 그에 대한 일편단심의 충의를 다짐하였다. 은못[일명 은무시]이라는 이름은 목은 이색의 증손자인 이축이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숨어 지내면서 판 연못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제2권 문화유산, 인물편 참조)
18) 김승(金昇) 묘
본관은 연안으로 배 정부인 전주 이씨를 부좌하였다. 3기의 묘비, 상석, 고석, 향로석, 문인석 등이 배치되어 있다. 봉정대부, 성균관 직강, 증자헌대부, 예조 판서를 지냈다.
19) 김석철(金錫哲) 신도비
연산~중종 시대 무장으로 본관은 연안이다. 가선대부, 병조참판, 수지훈련원사(守知訓鍊院事)를 지냈으며, 신도비 구비와 신비가 있다. 그 뒤로는 사당 ‘영모재’와 수십 기의 묘가 집단으로 안치되어 있다.
20) 김수오(金粹五) 묘
본관은 연안이며 정부인 홍양 유씨와 쌍분으로 화강석의 묘비, 상석, 향로석 74cm의 문인석 망주 등이 있다. 증가선대부, 이조 참판, 행통정대부, 종성 부사(鍾城府使)를 지냈다.
21) 심익현(沈益賢)․숙명공주(淑明公主) 묘
심익현(1641:인조 19~1683:숙종 9)은 조선 후기의 문신․서예가로서 본관은 청송이며 자는 가회(可晦), 호는 죽오(竹塢)이다. 순천 부사 심종침(沈宗甚)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심율(沈律)이고, 아버지는 영의정 심지원(沈之源)이며, 어머니는 부사 윤종지(尹宗之)의 딸이다.
10세 때 효종의 부마로 뽑혀서 1652년(효종 3)에 효종의 둘째딸 숙명공주에게 장가들어 청평위에 봉해졌다. 그 뒤 궁중에 자주 출입하여 왕의 총애를 받았으며 오위도총부 도총관을 여러 차례 역임하였고, 만년에는 내섬시 제조를 지냈다.
1666년에 사은사로, 1674년과 1680년 주청사로 세 차례에 걸쳐 청나라에 다녀왔는데 그 때 받은 금과 비단 등의 하사품을 모두 수행원들에게 나누어줌으로써 청렴하다는 칭송을 받았다. 서예에 뛰어나서 산릉지․옥책문․교명의 글을 많이 썼는데, 특히 촉체(蜀體)에 능하였다. 서예작품으로는『우의정장유비(右議政張維碑)』,『영의정이경여비(領議政李敬輿碑)』,『경림군이정표(慶林君李淀表)』,『인경왕후익릉표(仁敬王后翼陵表)』,『효종영릉표(孝宗寧陵表)』, 『좌승지송시철비(左承旨宋時喆碑)』등이 있다
숙명공주는 효종의 셋째 딸로 어머니는 인선왕후 장씨이다. 1650년(효종 1) 청평위 심익현(沈益顯)에게 출가하였다.
22) 김상옥(金相玉) 묘
이 묘는 옛 화전과 능곡을 잇는 구도로의 주변인 도내동 서재동 마을에 위치하고 있는데 정부인 신씨(申氏)의 묘와 합장되어 있다. 묘는 하나의 봉분으로 병풍석이나 묘비는 보이지 않으며 봉분 앞쪽의 상석에 ‘대사헌 김공묘 정부인 신씨부좌(大司憲 金公墓 貞夫人 申氏祔左)’라 새겨져 있다. 봉분의 정면에는 혼유석, 상석, 고석, 향로석이 있는데 봉분의 좌우측으로는 문인석과 망주석이 각각 배치되어 있다. 이 중 문인석은 높이 189cm, 폭 142cm의 규모인데 부근에서는 보기 드문 양식을 갖추고 있다. 관의에 보이는 꽃무늬에는 모두 19개의 원형모양이 조작되어 화려한 모습이다. 또한 관모에는 구름무늬가 새겨져 있고 허리에는 꽃무늬 조각이 새겨 있다. 측면에서 보이는 문인석의 얼굴 모양은 목이 앞쪽으로 나와 있는 모습으로 홀을 쥔 손가락의 모습이 뚜렷하고 신발의 모습 또한 그 윤곽이 완연하게 보이고 있다. 이러한 석물(石物)의 특징으로 보아 조선조 후기 석물 모습의 과도기적 상황을 반영하여 주고 있다.
묘소 입구에는 1765년에 건립된 신도비가 있는데 높이 212cm, 폭 78cm, 두께 36cm의 규모이며, 비문은 유척기(兪拓基)가 짓고 전(篆)하였으며 윤급(尹汲)이 썼다.
김상옥(1683~1739)은 조선조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연안, 자는 언장(彦章) 호(號)는 소와(疎窩)이다. 한성부 우윤, 도승지, 대사헌을 거쳐 함경남도 병마절도사 등을 역임하였다.


참고: http://blog.daum.net/enature/1585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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