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할아버지가 졸업한 태장공립보통학교와 수원고등농림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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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누나가 할아버지(滿洲國 興農部 米穀檢査官을 지낸 이성구 검사관)의 수원 태장공립보통학교(台章公立普通學校) 1924년(대정14년)졸업증서를 발견했다고 또 사진을 찍어 보내왔다. 이 졸업증서를 살펴보면, 이성구 조부님은 7살인 1915년 할아버지 이명직 선생이 일제에 독살당하고 이어 11살때인 1919년 아버지 이철규 기수가 일본헌병에 참살 당한뒤, 13살때인 1921년 경기도 수원군 영통에 개교한 태장공립보통학교(현재의 수원 태장초등학교)에 입학하여 16살인 1924년에 1회로 졸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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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수원고등농림학교(水原高等農林學校)에 진학하여 부설 실업보습학교 4기 교원양성소에서 교원교육을 았받다. 수원고등농림학교에 재학중이던 1926년에는 순종의 인산을 당하여 자진 휴학을 결정하고 6월 10일 상경, 순종의 인산에 참여했으며, 1926년 6월 21일에는 처우개선 등을 요구하며 동맹휴학을 단행하였다. 이일로 전교생이 정학을 당했다 (『동아일보』, 1926년 6월 28일, 「수원고농고 전교생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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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설 실업보습학교를 졸업한 후, 수원고등농림학교 후배들인 농학과 김찬도·우종휘·고재천·권영선·김봉일·김익수 등과 임학과의 백세기·육동백 등을 도와 수양단(修養團)·건아단(健兒團)·조선개척사(朝鮮開拓社)·계림흥농사(鷄林興農社)·조선농민사(朝鮮農民社) 등 이들이 비밀결사 운동을 전개하여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기소되는 등 수원고등농림학교는 항일학생운동의 진원지이자 핵심적인 곳이 되도록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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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26세되던 1934년(대동 3년) 3월 만주 독립군을 지원하기 위해 만주국 문관시험에 응시하여 만주국 실업부(총장 장얀칭-張燕卿, 차장 다카하시 야스노리-高橋康順) 산하 농림국의 미곡검사관으로 근무를 시작하여 1937년 산업부로 이름이 바뀌고 1940년 흥농부로 바뀌어 1945년(강덕12년, 대신 황푸준-黄富俊, 차장 시마자키 요이치-島崎庸一) 일본이 패망하여 만주국이 붕괴할때까지 근무하며 조선과 만주, 러시아를 오가던 독립군의 안전한 여정를 보살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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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할아버지가 나온 수원고등농림학교(水原高等農林學校)는 1904년 9월 한성부 수진동에 대한제국 학부소속으로 시작한 농상공학교(農商工學校)의 농과가 시초이다. 1906년 9월 농과를 독립시켜 농상공부가 산하의 농림학교(農林學校)로 바꿔 1907년 1월 수원군에 교사를 신축하여 이전했다. 1908년에 수의학 속성과를 증설했고, 1922년 3월에 수원고등농림학교(水原高等農林學校)로 개칭하여 고등보통학교 졸업생에게도 입학을 허가했다. 내 할아버지는 수원고등농림학교(水原高等農林學校)시절이던 1924년에 입학하여 27년에 졸업했다. 수원고등농림학교(水原高等農林學校)는 1944년 4월 수원농림전문학교(水原農林專門學校)로 개칭되었다. 1946년 8월 서울농대로 병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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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할아버지가 나온 수원고등농림학교(水原高等農林學校)를 수원농업고등학교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다. 수원농고는 내 할아버지가 만주국 미곡검사관으로 근무하던 1936년 7월 수원공립농업학교로 개교한 5년제 고등학교로 해방후 서울농대로 병합된 수원농림전문학교(水原農林專門學校)로 개칭되었던 수원고등농림학교와는 전혀 다른 학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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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고등농림학교 관련 기사(『동아일보』, 1923년 5월 6일)
나의 조부 이성구(재)(李成求(宰)) - 한산군 목은 이색의 둘째아들 인재공파로 牧隱20代孫(호장공27世, 호장공26代孫, 목은21세)
참고: 일본은 1919년 3.1운동을 기점으로 헌병이 치안을 담당하는 무단정치에서 민심을 다독이겠다는 방침으로 1920년 부터 일반경찰 치안으로 치안행정을 바꾸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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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농대 전신인 수원농림학교를 나와 만주국 흥농부 미곡검사관을 지낸 내 조부 이성구 선생의 빛바랜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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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까지 각종 자료를 통해 만주국에서 고등 관료로 근무했던 조선인은 201명이 확인된다. 당시 조선인이 만주국 고등관료로 진출할 수 있는 경로는 5가지였다.
첫째, 일본 고등문관시험 합격자의 만주국 진출,
둘째, 조선총독부에서 만주국으로의 인사 이동을 통한 진출,
셋째, 만주국 고등고시 합격을 통한 진출,
넷째, 만주국 자체에서의 승진,
다섯째, 대동학원 졸업을 통한 진출 등 5가지이다.
이 5가지 경로 가운데 30% 이상의 조선인이 만주국 고등고시를 통해 고위 관료로 진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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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조선인 고등 관료는 일반 행정 부분에 종사했으며 사법, 교육, 경찰 분야에서도 일부가 확인된다. 당시 젊은 조선인들의 만주국 고등 관료를 선택한 동기는 만주국이 내세운 `오족협화` 등과 같은 피상적 구호에 근거해 있었지만, 내 조부처럼 호구지책으로 조선에서 일제의 주구 노릇을 하느니 차선책으로 만주국을 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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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점에서 만주국 고등 관료를 선택한 조선인들은 조선에서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한 이들과는 다른 관점에서 보아야 할것이다. 만주국 조선인 고등 관료들의 최종 출신학교를 보면, 제국대학 대 비제국대학 비율이 2:8 정도였고, 사범학교 출신자들이 많은 것이 특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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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국에서 조선인 고등 관료들 중에는 조선에서 만주와 중국 그리고 러시아를 오가는 독립운동가들의 신변을 보호하고 노자를 지급하고 군자금을 조달하는 역활을 했다. 당시 조선인 관료들을 하나로 묶는 핵심 고리는 대동학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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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경 일본의 패전 징후가 농후해지면서 만주국 조선인 관료는, 만주국에서 잔류와 조선으로의 귀환 그리고 남과 북으로의 선택에 직면했다. 당시 대부분의 만주국 조선인 관료는 남한으로의 귀환을 선택했고, 이후 남한에서 전문 관료로 성장하기도 했지만 내 조부처럼 평범한 삶을 살다간 이들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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