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1. Dr. Sam Lee/17_20세기100선

016 알베르트 카뮈(Albɛʁ Kamy, Albert Camus) 이방인(異邦人, L'Etranger, the stranger)

忍齋 黃薔 李相遠 2022. 3. 23. 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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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DgrZSzsAfOw 

016 알베르트 카뮈(Albɛʁ Kamy, Albert Camus) 이방인(異邦人, L'Etranger, the strang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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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에 발간된 우수하고 의미있는 100 열여섯번째 , ‘알베르트 카뮈(Albɛʁ Kamy, Albert Camus) 이방인(異邦人, L'Etranger, the stranger)’ 시작합니다.

전후 프랑스 문학에 있어 최대의 존재는 사르트르지만 어떤 의미에서 현대인에게 사르트르보다도 카뮈가 더욱 호소력이 있어 보이는 것은 그의 성실성 때문일 것입니다. 따라서 카뮈에게 '()없는 성인(聖人)' 또는 '현대의 증인'이라는 명예로운 칭호가 부여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우리에게 많은 아쉬움을 남기고 타계하기까지 업적을 다시 한 번 살핀다는 것은 곧 우리들 자신의 고민과 희망과 위대성을 재확인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알베르트 카뮈(Albɛʁ Kamy, Albert Camus) 이방인(異邦人, L'Etranger, the stranger)’ 속으로 빠져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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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트 카뮈(albɛʁ kamy, Albert Cam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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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 제작된 카사브랑카에서 험프리 보가트가 멋지게 담배피는 모습에 반해 고등학교때 담배를 피웠던 저는 험프리 보가트보다 한차원 승화한 알버트 카뮈의 담배피는 모습과 그의 그리고 글에서 담배의 맛을 느꼈습니다. 1913 알제리에 주둔한 프랑스 군인의 아들로 태어나 1살때 부친은 전사하고 문맹에 귀머거리인 스페인출신으로 하녀일을 하며 사는 어머니 밑에서 성장했습니다. 가난속에서도 알제리대학에 진학했지만 결국 가난은 카뮈를 온갖 돈버는 일터로 내몰았고 어렵게 대학을 마쳐야 했습니다. 이런저런 매체의 기자를 하면서도 학업의 끈을 놓칠안아 1935년에는 플로티노스(Plotinus) 논문으로 철학학사 학위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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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곤 프랑스공산당에 입당하지만 교조적인 모습에 1936 보다 독립적인 알제리공산당으로 옮깁니다. 친구들은 카뮈를 트로츠키주의자라 비난하며 갈등을 빗다가 1937 제명을 당합니다. 결혼생활은 방탕하여 1934 초혼에 1940 이혼 그리고 재혼하지만 두번째 부인의 속을 엄청 썩히며 바람둥이로 삽니다. 1941년에는 콩바(Combat)라는 레지스탕스 잡지에서 일하며 나치에 저항합니다. 그해 사상가로 이름을 날리는 '이방인' '시지프 신화' 발표합니다. 1943 파리가 해방되며 콩바(Combat) 편집인이 되지만 콩바(Combat) 상업지로 변하자 사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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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했던 장폴 사르트르와도 1949 '반항하는 인간' 통해 공산주의 사상과 완벽하게 결별하자 소원해지고 맙니다. '태양때문에' 살인을 했다는 '이방인' 통해 인간 부조리성을 철학적으로 그렸습니다. 따끈따끈하고 짭짜름한 책상물림이나 하는 학자 철학자가 절대 도달할수 없는 철학적이고 사상적인 정점은 아마도 프랑스계 알제리인으로 스페인계 문맹 귀머거리 하인 엄마와 버글거리는 집안식구들 그리고 공부는 하고 싶지만 받쳐주지 않는 가난이라는 환경이 카뮈에서 선사한 선물이었을 것이라 짐작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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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트 카뮈(Albɛʁ Kamy, Albert Camus, 1913 11 7 ~ 1960 1 4)는 주아브 보병 연대에서 복무하던 알제리계 프랑스인인 궁핍한 노동이민자 병사인 아버지 뤼시앵 카뮈와 문맹이며 청각장애를 가진 스페인계 후손인 어머니 카트린 생투아 사이에서 1913117일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알제리의 콩스탕틴 몬도비(Mondovi)에서로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알베르트 카뮈가 태어나서 돌도 되기 전에, 아버지 뤼시앵은 제1차 세계대전의 전투 중 하나인 마른 전투에서 19149월에 사망했습니다. 그후 과부가 된 어머니는 두 아들, 알베르트 카뮈와 형 뤼시앵 카뮈를 데리고 알제리의 노동 계급이 모여사는 빈민굴 벨쿠르에 있는 친정 어머니의 아파트로 이사하여 배우 출신의 오만한 늙은 외할머니와 불구자로 포도주 통 만드는 것을 직업으로 삼고 있는 외삼촌과 함께 방이 2개뿐인 아파트에서 살며 하인생활로 가족을 부양하며 살아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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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트는 스페인을 좋아했으며 어머니를 무척 사랑해 공공연하게 알제리 독립 반대의 이유가 어머니의 생활터전이기 때문이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알베르트 카뮈가 처음으로 발표한 수필집 표리(L'Envers et l'endroit, 1937)는 어린시절의 어둡고 가난한 생활과 어머니와 외할머니 및 외삼촌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2번째 수필집 결혼(Noces, 1938)’에는 알제리의 시골에 대한 서정적인 명상이 담겨 있으며, 자연의 아름다움이야말로 가난한 사람들도 누릴 수 있는 부()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알베르트 카뮈는 "내가 자유를 마르크스 속에서 배우지 않은 것은 사실입니다. 나는 가난 속에서 자유를 배웠습니다"고 술회했듯이 가난한 생활이었지만 알베르트 카뮈는 고향에 대해서 일평생 변함없는 사랑을 바쳤습니다. 2권의 수필집은 모두가 필멸의 존재인 인간의 약함과 물질 세계의 영속성을 대비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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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년에 알베르트 카뮈는 공립초등학교에 들어가 뛰어난 재능을 나타냈고, 담임교사 루이 제르맹의 가르침과 총애를 받는 행운을 얻게 됩니다. 알베르트 카뮈의 재능을 아깝게 여긴 교사 루이 제르맹이 그에게 특별히 개인지도를 해 주기까지 하였습니다. 1923년 알베르트 카뮈는 루이 제르맹의 도움으로 프랑스의 중등학교인 알제리 리세에 장학생으로 들어갔으며 축구팀에서 골기퍼로 활약하면서 운동에 열중했습니다. 34년 뒤에 알베르트 카뮈는 노벨 문학상 수상연설을 루이 제르맹에게 바쳤는데, 이것만 보더라도 스승에 대한 알베르트 카뮈의 존경심이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 있습니다. 후일 알제리 대학 철학과에 입학했으나 17세때인 1930년 폐결핵으로 운동도 그만두었고 대학생활도 많은 지장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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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생활이 건강에 좋지 않다고 하여 알베르트 카뮈는 15년 동안 살았던 그곳을 떠나야 했습니다. 재학 중에도 가정교사, 자동차의 부품 판매원 노릇도 하고, 기상청 인턴으로 남부 지방의 기압 상태 조사에 참가하기도 하고, ‘이방인의 뫼르소처럼 해운업자에게 고용되기도 하고, 현청의 사무원 노릇을 하기도 하면서 순수한 대학생활에서는 해볼 수 없는 귀중한 체험을 하며 생계를 꾸려나갔습니다. 이렇게 힘들고 바쁜 생활 가운데에서도 지드, 말로, 몽테블랑 등 많은 작가들의 작품을 탐독했습니다. 알베르트 카뮈는 잠시 푸줏간 주인이며 열렬한 볼테르주의자인 친가 쪽 아저씨 집에 얹혀 살다가 자립하여 살기로 결심하고, 이 시기 평생의 스승인 장 그르니에를 만났습니다. 그르니에는 알베르트 카뮈가 문학과 철학 사상을 계발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고, 축구에 대한 열정을 평생을 두고 나누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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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트 카뮈는 플로티노스(Plotinus)와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저술에 나타나 있는 헬레니즘과 그리스도교 사상의 관계를 다룬 우수한 논문으로 1936년에 학사학위를 받았습니다. 알베르트 카뮈는 교수자격심사에 응하려했지만, 결핵이 재발해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심사를 통과했다면 알베르트 카뮈는 대학교수로서의 인생을 살았을지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알베르트 카뮈는 건강을 되찾기 위해 프랑스 알프스 지방에 있는 휴양지로 첫 번째 유럽 방문을 떠났고, 체코슬로바키아, 이탈리아 피렌체와 피사 및 제노바를 거쳐 결국 알제리로 돌아왔습니다. 알제리 문화관에서 아마추어 연극 극단을 주관하면서 배우로 무대에 서기도 하고 연출도 했으며 말로와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을 각색하기도 했습니다. 이 때 수필집 표리(表裏)’를 쓰기 시작하면서 정치극 아스튀리의 반란을 공동집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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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년 시몬 이에(Simone Hie)와 결혼했으나 서로간의 불륜과 시몬의 모르핀 중독으로 인해 1년만에 별거했습니다. 1935년 알베르트 카뮈는 명백히 마르크스주의의 강령에 대한 지지보다는 스페인 내전의 원인이 된 스페인의 정치적 상황에 대한 관심때문에 프랑스 공산당에 가입했습니다. 1935년부터 1939년까지 운영된 '노동자의 극장'(Théâtre du Travail)을 설립했습니다. 공산당과의 결별 이후에도 이 극단은 에키프 극단으로 이름을 바꾸어 지속되었습니다. 1936년 좀 더 독립적인 성향의 알제리 공산당이 수립되자 알베르트 카뮈는 알제리 공산당에 가입하여 공산당의 회교도에 대한 선전을 맡게 되지만 곧 당의 정책 변경에 싫증을 느껴 탈당합니다. 이로 인해 그의 공산당 동료들과의 관계가 악화되었습니다. 그 결과 알베르트는 트로츠키주의자로 비난받았고 1937년 당에서 제명당했습니다. 그는 공산당의 교조적인 태도를 혐오하여 그 이후 공산당과의 관계를 끊어 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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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부터 1939년까지 알베르트 카뮈는 사회주의자를 위한 소품을 썼으며, 1938년부터는 좌익 성향의 신문 알제 뤼페블리껭(Alger-Republicain)’에서 기자로 활동하며 문화기사와 르포를 주로 썼습니다. 사르트르의 책 '구토'에 대한 서평도 알제 뤼페블리껭에 쓴 것입니다. 1938년에는 인생과 자연의 결합을 주제로 한 서정적 에세이 결혼을 발표했습니다. 여기서 그는 알제리 풍경의 강한 인상을 정열적으로 그리고, 반짝이는 대낮의 태양을 쬐며 미지근한 바닷물에 잠겨 자연과 한 덩어리가 되는 인간의 희열(喜悅)을 그렸습니다. 이 싱싱한 청춘의 노래는 그보다 한 해 전인 1937년에 나온 최초의 수필집 표리와 죽은 후에 출판된 수첩 1 ‘태양의 찬가와 함께 그의 지중해적인 사상과 감정의 형성을 보이는 중요한 문헌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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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트 카뮈는 1939년 독일에 저항하기 위해 참전을 신청했지만 폐결핵으로 프랑스 군입대를 거절당했습니다. 「알제 뤼페블리껭」에 알베르트 카뮈가 집필한 북아프리카 문제에 관한 기사가 당국의 비위를 건드려서 알베르트는 알제리에 머물러 있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후 알베르트 카뮈는 파리스와(Paris-Soir)’ 신문사에서 일하기 시작하여 1941 6월까지 근무했습니다. 2차 세계 대전 초기, 소위 포니 워(Phony war)’라고 불리는 시기에 알베르트 카뮈는 반전론자였습니다. 1940년에는 시몬 이에(Simone Hie)와 정식으로 이혼했습니다. 1940년 알베르트 카뮈는 수학자이자 피아니스트인 오랑 출신의 처녀 프랑신 포르(Francine Faure)’와 재혼했습니다. 비록 알베르트 카뮈는 프랑신 포르를 사랑했지만 알베르트 카뮈는 결혼제도에 대하여 극렬히 반대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결국 이 부부의 관계도 비끄덕 거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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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수아르」신문사에 근무하며, 알베르트 카뮈는 이방인을 탈고하고, 에세이 시지프스의 신화를 쓰기 시작했는데, 때마침 독일군의 파리 입성이 있었습니다. 알베르트 카뮈는 1941 11 15일 파리에서 베르마흐트, 독일육군이 저지른 가브리에 페리의 처형을 목격하고 독일에 대해서 저항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에세이 시지프스의 신화가 탈고되었으며 1942년 갈리마르 출판사를 통해 이방인을 출간하였습니다. 이 때 비밀리에 출간된 이방인 2차 세계대전 전후에 발표된 어떤 작가의 어떤 작품보다도 선풍적인 반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이방인은 현대사회의 메커니즘 속에 처져 있는 모순과 현대인의 생활감정 가운데에 잠긴 부조리(不條理)의 의식을 명확하게 표현한 작품이며. 고독감과 인생의 모순을 고백적 감상 형식으로 해설한 시지프스의 신화와 함께 큰 감동을 불러일으켜 광범위한 독자를 확보하여 일약 카뮈의 이름을 국제적인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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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신 포르가 1945년에 케서린과 잔이라는 쌍둥이 아이를 낳은 후에도 혼외 관계를 가졌으며 그중 널리 알려진 스페인의 배우 마리아 카자레스와의 관계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카뮈의 불륜은 프랑신에게 더 고통을 주었습니다. 그 후 알베르트 카뮈는 보르도로 이동하면서 파리스와(Paris-Soir)’ 신문사를 퇴사했습니다. 알베르트 카뮈는 1942년에 잠시 동안 알제리의 오랑으로 돌아갔습니다. 2차 세계 대전 기간 동안 알베르트 카뮈는 지하에서 같은 이름의 신문을 출판하던 레지스탕스 조직 「콩바(Combat)」에 가담하였습니다. 이 그룹은 나치에 저항하여 활동하였고 여기서 알베르트 카뮈는 뷔에샤르(Beauchard)라는 필명을 사용하였습니다. 알베르트 카뮈는 연합군이 파리를 해방한 1943년 신문의 편집자가 되어 전투 이후를 보도했습니다. 그러나 알베르트 카뮈는 프랑스 편집인으로서는 드믈게 1945 8 8일에 일어난 원폭투하 사건 직후에 히로시마 원자폭탄 사용에 대한 반대를 주장하는 논설을 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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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트 카뮈는 빈곤과 병고를 철저히 체험한 소년 시절부터 끊임없이 죽음의 관념에 위협당하며 생과 사, 자신의 세계와의 모순, 대립에 괴로워했습니다. 자연 속에 묻혀 있을 때에도 도취와 불안을 깨닫고, 사회에 있어서는 절망을 느끼면서도 종교에 의지하지 않고 이 세상에서의 행복을 추구하는 숙명적인 부조리의 의식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자기의 사색과정으로부터 인간은 생과 사의 모순사이에서 살도록 운명지어졌다고 생각하여 죽음이 있음으로써 삶에 가치가 있고 삶은 사랑스러운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삶에의 절망이 없이는 삶에의 희망도 없다는 '부조리의 철학'은 이러한 인식에 바탕하여, 인간은 싸우고 반항하면서 살아야 함을 가르치는 사상입니다. 커다란 바위를 정상을 향해 끝없이 밀어올리는 시지프스, 모든 것을 거부하고 사형대에 오르는 이방인의 뫼르소는 카뮈가 창조한 이 부조리의 인간 전형, 바로 그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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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알베르트 카뮈의 부조리의 사색은 전쟁, 점령, 수용소, 저항 운동 등 극한상황 속에서 보고 들은 것과 체험에 의해서 더욱 다듬어졌습니다. 그 이후 알베르트 카뮈는 폭력과 부정을 제거하고, 인간을 비참한 경지에 빠뜨리며, 인간성을 빼앗고, 인간의 존엄을 더럽히는 등의 사태에 의연히 맞서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사실은 그가 「콩바(Combat)」지의 파리 주재 기자로 있으면서 갈리마르 출판사의 교정위원으로 입사하고 「콩바(Combat)」지의 지하 발행을 꾀하는 한편 독일인에게 보내는 편지를 비밀 간행한 것을 보아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알베르트 카뮈는 「콩바(Combat)」가 상업적인 신문이 되자 1947년 사임했습니다. 1947년에 이르러서는 장편 페스트가 발표되었는데, 이 작품은 이방인이상으로 알베르트 카뮈의 명성을 높였습니다. 이 작품이 간행된 며칠 후에 '비평가 상'이 수여되었을 때 이 때문에 이 상도 유명해질 것이라고 사람들이 말했을 정도로 페스트에 대한 사람들의 열광은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이때부터 알베르트 카뮈는 장폴 사르트르를 알게 되었습니다. 전쟁 이후에 알베르트 카뮈는 사르트르와 함께 생제르망 가에 있는 카페 드 플로르(Café de Flore)를 자주 찾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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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트 카뮈는 프랑스적 사고에 대한 강의를 하기 위해 미국을 여행하기도 했습니다. 비록 그는 좌익의 정치학을 배웠지만 공산주의 사상에 대한 그의 강한 비난으로 인해 사르트르와 소원해지게 되었습니다. 1949년 알베르트 카뮈의 폐결핵이 재발하여 2년간 은둔상태로 살았습니다. 1951년 그는 공산주의에 대하여 명쾌하게 반대하는 반란과 반역에 관한 철학적 분석의 내용을 담은 반항하는 인간를 발표했습니다. 이 책은 프랑스에 있는 그의 많은 당시 동료들을 화나게 했고 결국 사르트르의 기분도 상하게 했습니다. 이러한 반응은 알베르트 카뮈를 화나게 했고 그는 연극들을 번역하기 시작했습니다. 철학에 대한 알베르트 카뮈의 기여 중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그가 시지프스 신화에서 설명하고 이방인패스트와 같은 많은 작품에서 설명한 아무것도 주어지지 않은 상태, 세계의 의미, 정순함에 대한 우리의 열망의 결과에 따른 부조리에 대한 알베르트 카뮈의 사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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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트 카뮈의 학문적 동반자 사르트르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어떤 이들은 알베르트 카뮈가 실존주의자들의 캠프로 굴러 떨어졌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알베르트 카뮈는 그의 에세이 에니그마와 다른 작품들을 통해 그에 대해 이념적 꼬리표를 붙여 분류하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그러나 알베르트 카뮈의 사상 중 많은 중요 부분은 실존주의와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이방인시지프의 신화로 사상가로서의 인정을 받았고, 극작가로서는 해방 후 오해, 1944’칼리귤라, 1945’로 성공을 얻었습니다. ‘계엄령(戒嚴令)’이 각색되어 상연되었고, 그 다음에는 정의의 사람들이 나왔는데, 작품 수는 얼마 안되지만 순도(純度)가 높은 고전적 문체의 실존주의 연극으로 호평을 받았습니다. 그 후에는 자작보다는 각색·번안 등에 힘을 쏟아, 라리베의 정령’, 칼데론의 십자가에의 예배’, 도스토옙스키의 악령등이 각색·번안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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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알제리 독립전쟁이 발발하자 여전히 어머니가 알제리에 살고 있었던 알베르트 카뮈는 도덕적 딜레마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그는 알제리계 프랑스인(pied-noirs)의 정체성을 택하여 프랑스 정부를 옹호하였습니다. 그는 북아프리카 식민지의 반란이 이집트주도의 신 아랍 제국주의와 소비에트 연방의 정책인“유럽둘러싸기”, “고립된 미국”, “반 서방주의”의 일부분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알베르트 카뮈는 알제리에 더욱 큰 자치권을 인정하거나 연방정부를 구성하면 알제리계 프랑스인과 아랍인들간의 공존이 이루어 질 것이라고 믿었으며, 알제리의 완전 독립에는 부정적이었습니다. 전쟁 기간 동안 그는 양측 모두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은 정전협정을 위하여 헌신했습니다. 그는 사형에 직면한 체포된 알제리인들을 구하기 위하여 비밀리에 활동하였습니다. 1957101744세의 최연소 나이로 알베르트 카뮈는 사형에 반대한 에세이, ‘단두대에 관한 성찰를 비롯한 알베르트 카뮈의 전작품에 대하여 노벨 문학상을 수상이 결정되었습니다. 겸손한 알베르트 카뮈는 자신이 심사위원이었다면 분명 앙드레 말로에게 표를 던졌을 거라 소감을 이야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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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트 카뮈는1957년 스톡홀름 대학교 학생들을 상대로 강의하며 알제리 문제에 관한 자신의 입장을 옹호하였다. 그리고 그는 아직도 알제리에 살고 있는 자신의 어머니에게 무슨 일이 벌어질지 염려된다고 성명을 발표 하였습니다. 이 성명은 프랑스의 좌익 지성으로부터 더욱 극심한 배척을 야기하였습니다. 알베르트 카뮈는 새로운 장편소설 최초의 인간의 구상을 마치고 집필을 시작했을 때, 프로방스 지방의 루르마랭에 있는 소유지에서 휴가를 마치고 돌아오다가 1960 1 4일에 불의의 자동차 사고로 사망했습니다. 알베르트 카뮈 책의 출판자이자 친한 친구 미셀 갈리마르가 운전하던 차가 파리 동남방 몽트로의 빌르블레뱅 근처 르 그랑 프로사르에서 플라타너스를 들이받았습니다. 그의 코트 주머니에서는 사용되지 않은 파리 행 비행기표가 들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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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트 카뮈는 평소 자신이 사랑하여 죽기 직전까지 거주한 프랑스 남부의 시골 마을인 루르마랭(Lourmarin)의 묘지에 매장되었습니다. 알베르트 카뮈 사후, 그의 두개의 작품이 유작으로서 출판되었습니다. 그중 첫 번째는 이방인과 흡사한 메르소(Meursault)라 불리는 인물의 특징을 그린 행복한 죽음이라 명명된 책이었는데 1970년에 출판되었습니다. 그러나 두 작품 사이의 관계에는 많은 논쟁이 있었습니다. 두 번째 유작은 미완성의 소설로 카뮈가 죽기 직전까지 지은 최초의 인간입니다. 이 소설은 알제리에서의 어린시절을 그린 자전적 작품으로 1995년에 출판되었습니다. 알베르트 카뮈는 소설가이자 극작가이며 모랄리스트이자 정치이론가로서, 2차 세계대전 후의 프랑스뿐 아니라 유럽 전체, 나아가서는 전세계에서 그의 세대의 대변가이자 다음 세대의 스승으로 추앙되었습니다. 후기 작품에서 그는 그리스도교 사상과 마르크스주의의 독단적 측면을 모두 거부하는 자유주의적·인도주의의 모습을 제시했다고 평가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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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L'Etranger, the stranger)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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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L'Etranger, the stranger) 1942년에 발표한 알베르트 카뮈의 장편소설입니다. 알제리에 사는 평범한 월급쟁이 뫼르소는 어머니가 죽은 다음 날 여자 친구와 해수욕장에 가서 해수욕을 하며, 희극 영화를 보고 웃으며 하룻밤을 같이 지냅니다. 뫼르소가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자식으로서 마땅히 가져야 할 감정을 나타내 보이고 장례식이 끝난 다음에는 어느 정도의 근신 기간을 두었다가 여자 친구와 관계를 맺어야 하며 직장에서는 승진하고 싶어한다는 시늉을 해 보이고 여자 친구에게는 빈 말로라도 사랑한다는 말을 해 줄 것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뫼르소는 시종 무감각한 태도를 보입니다. 다음 일요일에 뫼르소는 바닷가에서 아랍인과 시비를 벌이고 있으며 별로 떳떳하지 못한 직업에 종사하는 아파트의 이웃 사람 레몽이 졸라대는 바람에 그와 친구가 되고 그 친구와 말다툼하고 있는 정부의 오빠 아랍인과 마주쳐 대치하다가 대낮의 사정없이 내리쬐이는 태양 때문에 눈이 아물거려서 아랍인을 권총으로사살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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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우발사고는 일련의 비합리적 상황 때문에 일어났다는 것은 명백합니다. 재판에서는 살인이 계획적인 것인지 아닌지에 따라서 유죄 또는 무죄의 판결이 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체포되어 재판에 회부되지만 왜 죽였느냐는 재판관의 질문에 '태양 때문'이라고 대답합니다. 검사는 뫼르소가 어머니의 장례식 때 보인 감정적 반응과 장례식 직후의 뫼르소의 행동은 사회가 위험시하고 충분히 적대시할 만하다고 유죄취지로 기소합니다. 뫼르소는 재판관에게도, 검사에게도, 변호사에게도, 나아가서는 모든 일상사에 대해서까지 무관심한 태도를 보입니다. 뫼르소 자신은 전에 자기가 저지른 행동과 검사가 법정에서 재구성한 자신의 범죄 사이에 아무런 관련도 찾아낼 수 없어서 마치 방관자 같은 심정으로 사람들이 자신의 운명을 결정짓는 것을 봅니다. 배심원들은 그에게 사형판결을 내립니다. 일단 사형선고가 내리자, 뫼르소는 재판도, 세상도 얼마나 부조리하고 우스꽝스런 것인가를 느끼고 교화신부(敎化神父)도 거부한 채 고독한 이방인으로서 독방에서 사형수로서 사형날을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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뫼르소는 인간이 이 세상에서 처해 있는 상황의 부조리성을 충분히 의식하고 이에 반항을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사형집행의 전날 밤 '과거에도 행복했지만 지금도 역시 행복하다'고 말하며 '증오심을 발하여 자기의 사형 집행을 보기 위하여' 단두대 둘레에 많은 군중이 모여 줄 것을 원합니다. 그리고 독방의 창으로 내려다보이는 별빛 찬란한 하늘, 자연, 인간에 대해 무관심한 것처럼 보이고, 그것이 그의 인생에 대한 무관심과 일치한다고 생각되어 스스로 행복하다고 느낍니다. 모든 기성의 가치와 습관에 무관심하게 되어 인생에는 어떠한 의미도 없다고 생각하는 뫼르소는 그 부조리의 의식을 최후까지 굳게 지켜나갔습니다. 이 작품은 실존주의 문학의 대표작으로서 화제를 불러 일으켰습니다. 알베르트 카뮈가 이방인에서 취급한 주제는 이와 같은 부조리에 대한 가장 깊은 통찰이며 가장 신랄한 고발인 것입니다. 사르트르의 말을 빌리면 이방인 '건조하고 깨끗한 작품, 외관상으로는 무질서하게 보이지만 잘 짜인 작품이며 너무나 인간적인' 작품인 것이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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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은 그리 긴 소설은 아니지만 상당한 기간을 두고 구상되고 집필된 작품입니다. 알베르트 카뮈의 '비망록'을 보면 1935 5월부터 벌써 '여러 해를 비참하게 살고 난 다음에 아들이 어머니에게 보이는 야릇한 감정'이라는 것을 적어 놓았고, 1936 1월에는 간결하게 적혀 있는 여섯 개의 이야기 속에 사형수의 이야기가 나오며 또 한두 부분이 대칭을 이루는 형태를 갖추도록 소설이 구상된 일이 있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 있습니다. 1939년에 완성되었으나 발표를 포기하고, 1971년에야 사후 발표된 습작 행복한 죽음의 주인공은 뫼르소라는 이름이었는데 그것은 알베르트 카뮈가 항상 매혹된 우주의 두 가지 위대한 힘, 바다(mer)와 태양(solei)을 합성하여 만들었으며, 그 후신이 바로 이방인의 뫼르소인 것입니다. 1936 3월에는 '비망록'에 중요한 주제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8월의 기록에는 이방인이라는 제목까지 준비해 두었습니다. 1938 5월에는 마랑고의 양로원에 은퇴한 노파의 죽음과 장례에 관한 이야기가 있고, 1940년에는 살라마노와 그의 개 이야기가 나오며, 5월에는 '이방인은 끝났다'는 말이 적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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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트 카뮈 자신은 이방인에 대해서 '이 책의 의미는 두 부분의 대응 속에 들어 있다'고 말했는데 이 말은 똑같은 살인 이야기를 제1부에서는 그것을 저지른 사람이 이야기하고 제2부에서는 사회가 판단하는 것으로 전개해 나가려고 했습니다. 주인공 뫼르소는 여러 가지 사회적 상황이 자신에게 어떤 반응을 보여줄 것인지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이 작품이 발표된 1942년 당시는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프랑스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이 사회적·정신적으로 혼란한 기류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양차대전을 통하여 인간의 가치관은 급변하였고, 사람의 목숨이란 그렇게 귀중하지 않은 것처럼 수없이 죽어 갔습니다. ‘이방인이 발표되자 실존주의의 문학적 승리로써 세계적으로 실존주의 작품의 선풍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이방인이 현대의 대표적인 작품의 하나로 애독되는 것은 그것이 부조리에 직면한 인간의 굴욕을 잘 표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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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트 카뮈의 '부조리' '반항'의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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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트 카뮈의 소설들은 모두 현실과 비현실, 실제와 가상 사이에, 혹은 그 두 가지에 걸쳐서 구성되어 있는 독특한 경지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속에 숨은 상징적인 의미와 배면의 세계를 찾아내는 것이 그를 보다 이해할 수 있는 첩경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알베르트 카뮈 문학의 사상적 배경은 그의 수필집 시지프스의 신화반항적 인간에서 볼 수 있는데, 그것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것이 소위 '부조리' '반항'의 사상입니다. 알베르트 카뮈는 인간이라는 존재를 모순된 존재로 보고 있습니다. 인간의 세계의 존재는 인생이고, 인생은 모순에 차있습니다. 인생에서의 모순적인 것들은 '죽음에 대한 절망과 삶에 대한 기쁨', '고독과 사랑', '선과 악', '암흑과 광명', '절망과 건강', '겨울과 여름', '바다와 감옥'등입니다. 이 같은 용어를 알베르트 카뮈는 작품의 제목으로 사용하기도 하고, 작품 속에서도 무수히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알베르트 카뮈는 이성을 가진 존재인 인간이 합리적인 욕망이 있는 까닭에 모순된 세계가 지닌 의미를 알아내고자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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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인간의 이성으로서 알아볼 수 있을 만한것은 없습니다. 알베르트 카뮈는 시지프스의 신화에서 그것을 다음과 같이 고백했습니다. “나는 이 세계가 그것을 조절하는 어떤 의미를 가졌는지 어떤지 모릅니다. 그러나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내가 그 의미를 알지 못하면 나로서는 알 도리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나의 조건 밖에 있는 의미가 나에게 무슨 뜻이 있단 말인가요? 나는 인간의 용어로서밖에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이른바 합리의 욕망과 세계의 몰이해라는 두 개의 상반된 것, 그러한 이율배반으로부터 생기는 모순, 그것이 바로 알베르트 카뮈의 부조리이며 인간의 피치 못할 숙명인 '인간조건'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누구나가 언제나 느끼는 것은 아닙니다. 흔히 우리는 부조리를 느끼지 못한 채 살고 있습니다. 의식이 졸고 있는 것입니다. 그저 습관에 의하여 기계적으로 일상 생활의 쳇바퀴를 돌며 인생의 뜻이 있는지 없는지 그러한 것도 문제 삼지 않습니다. 그처럼 졸고 있는 의식은 실존자(實存者)의 의식일 수 없으므로 의식이 완전히 깨어나서 부조리를 명확히 의식할 때에야 비로소 인간은 인간다울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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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알베르트 카뮈에 의하면 부조리의 인식이야말로 인간의 존엄성이기도 한 것입니다. 알베르트 카뮈의 부조리라는 것이 해결할 수 없는 것, 재차 해결하지 말아야 할 것이라면 차라리 죽어버리는 것이 낫지 않을까? 인생의 뜻이고 뭐고 다 귀찮고 괴로우니 그저 편히 살면 그만이지 않은가? 그렇지만 그런 경우 의식으로서는 자살입니다. 바로 그것이 허망(虛妄)에 직면한 의식을 끌어당기는 또 하나의 유혹입니다. 그러나 알베르트 카뮈는 그렇지만 살아야 한다고 대답합니다. 여기에 알베르트 카뮈 문학의 열쇠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살아야 한다는 대답에는 어느 정도의 비약이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생명의 약동이 숨쉬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무엇보다도 삶의 긍정이기 때문입니다. 부조리와 직면하여 모순을 해소하려 하지 않고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삶을 긍정하는 태도, 그것이 다름아닌 알베르트 카뮈의 이른바 '반항'입니다. 그러므로 반항은 삶의 의지의 폭발인 동시에 삶에 있어서 가능한 유일한 자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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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프스의 신화의 제1부조리의 이론을 알베르트 카뮈는 '그러나 우리는 살아야 한다'는 말로 끝맺고 있으며 '산다는 것은 부조리를 살리는 것입니다. 부조리를 살린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그것을 바라보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알베르트 카뮈는 부조리의 해결을 꾀하지 않고, 부조리에 반항함으로써 가치를 창조하여 그것을 극복하려 합니다. 즉 해결될 희망이 없는 부조리에 반항할 수 있는 힘은 인간의 생명이며, 부조리의 초극을 준비하는 가치를 낳을 수 있는 것도 인간의 생명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 속에 고귀한 그 무엇이 있다는 것을 알베르트 카뮈는 믿고 있으며, 그것만이 그가 부조리와 대결하는 유일한 무기인 것입니다. 이처럼 알베르트 카뮈는 인간의 세계에 있어서의 존재를 모순적으로 보고 있는데, 그것은 그의 형이상학적 인생관일 뿐만 아니라 그의 윤리관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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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 속에서 살아야 하는 개개인은 논리적인 면에서도 숙명적으로 모순과 부닥치게 되어 있습니다. 그 같은 모순에 직면하여, 모순을 이루고 있는 상반되는 진리를 부조리한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인간 속에 있는 고귀한 그 무엇의 힘으로써 극복하려는 그의 반항적 태도는 윤리적 부조리에도 적용되고 있습니다. 그 고귀한 무엇은 정의(正義)라고 해도 좋고 넓은 의미의 사랑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알베르트 카뮈는 '인간 속에는 경멸받을 것들보다는 더 많은 찬양 받을 것들이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결국 알베르트 카뮈는 모순을 이루는 두 기본적인 인식의 어느 한쪽으로도 쏠리지 않은 긴장의 모랄, 그가 '정오(正午)의 사상'이라고 부르는 한계의 모랄을 지향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방인에서는 부조리에 페스트에서는 반항에 더욱 많은 강조를 두면서 사상의 경과를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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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황량한 페허에서 인간 정신의 위기를 간파하고 그것의 극복을 위해 알베르트 카뮈가 제시한 '부조리' '반항'의 사상은 중세의 종교 이상으로 힘을 가지고 독자들을 감동시켰고 영향을 끼쳤습니다. 혼란하고 무질서한 정신적 풍토 위에 새로운 가치관을 제시하고 확립시킨 그의 문학적 공로 외에도 자신에 대한 성실과 인간의 존엄성을 기초로 사회 정의를 실현하려는 알베르트 카뮈의 작가적 정신은 충분히 한 세대의 정신을 대표하고 지배했다는 의미를 영원히 잃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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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트 카뮈의 전체주의 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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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트 카뮈는 자신의 삶을 통틀어 독일의 파시즘이나 스탈린주의 같은 전체주의의 다양한 형태에 관하여 수많은 반대성명을 발표하고 반대행동을 실천에 옮기기도 했습니다. 젊은 시절, 2차 세계대전 중 독일의 치하에 있던 프랑스에서 유명한 레지스탕스 저널 콩바(combat)의 편집장을 하며 프랑스 레지스탕스 활동을 수행하였습니다. 나치 점령자와 프랑스의 이적자들에게 알베르트 카뮈는 다음과 같은 글을 썼습니다. “지금 유일한 도덕적 가치는 나치의 꼭두각시와 그들의 이름을 말하려 하는 척하는 수다쟁이들을 판단할 때 유용한 정의입니다.” 알베르트 카뮈의 잘 알려진 사르트르와의 결별은 이러한 전체주의에 대한 반대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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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트 카뮈는 근본주의자의 이름안에 사르트르에 의해 신봉되는 대중정책이 전체주의에 호응하는 것임을 간파했습니다. 이는 공산주의 경찰국가에 대한 맹공뿐만이 아니라 대중혁명정책에 관한 의문을 드러낸 반항하는 인간이라는 그의 작품에서 명확히 드러납니다. 알베르트 카뮈는 소비에트 연방의 가혹한 통치를 비판했으며, 1957년 감정에 사로잡혀 1956년 헝가리 혁명 일주년을 기념하는 연설에서 소련군의 잔인한 진압을 다음과 같이 강력히 비판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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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너무나도 많은 죽음이 벌판에 널부러져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것이 아닌 다른 이들의 피에 관대할 수 없습니다. 헝가리인들은 우리는 숨이 다하도록 그들을 질투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나 소중하게 유럽과 자유를 하나로 합쳤습니다. 그러나 나는 심지어 스스로를 공산주의자라고 하는 테러의 제도를 만든 누군가와 자신을 크리스쳔이라고 말하는 조사의 실행자가, 설혹 단기적일지라도, 이에 책임을 지고 사직을 하더라도 여기에 타협이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자유의 기념일에 나는 내 심장의 헝가리 인들의 소리없는 저항을 견뎌내고, 좀 더 강하게 되어, 우리가 육성 가능한 지원의 목소리를 강화하여, 만장일치로 그들로 하여금 압제를 거부하도록 권유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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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알베르트 카뮈(albɛʁ kamy, Albert Camus) 장편소설 이방인(L'Etranger, the stranger) 살펴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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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에 발간된 우수하고 의미있는 100 열일곱번째 , 조지 오웰(George Orwell) 에릭 아서 블레어(Eric Arthur Blair) 1984(Nineteen Eighty-Four, 1948)편에서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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