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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인사] 2024년 12월 24일 별세하신 강남구 도곡동 이태원 안과 원장 이태원 박사님의 상에 페이스북, 네이버 블로그 등 SNS와 직접 강남세브란스 병원 장례식장을 방문하셔서 조의를 표해주신 분들께 머리 숙여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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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벼락 같은 제 큰형님 신제 이태원(李泰遠,1955.10,29~ 2024.12.24) 박사님의 죽음에 애도를 표해주신 여러분께 유족을 대표하여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특히 국가변란으로 시국이 어수선한 와중에도 열일을 제처두고 조문장소였던 강남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을 찾아주시고 서울화장장과 용인추모공원까지 긴거름하여 주신 고인을 아끼고 사랑해주셨던 지인 친지분들께도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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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도하여 주신 여러분들 덕분으로 무사히 장례를 치르고 저희 유족들도 조금씩 안정을 되찾아가고 있습니다. 베풀어주신 과분한 온정을 생각하면 일일이 직접 찾아 뵙고 인사를 드려야 마당한 도리이지만 아직도 황망 중이라 이처럼 SNS 상으로 인사드림을 너그럽게 용서하여 주시길 바랍니다. 남은 인생동안 잊지않고 보은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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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2월 24일 새벽 2시 화장실에서 가족을 불러 어지러움을 알린 이태원 박사님은 결과적으로 치료의 골든타임을 놓치고 오후에야 근처 강남 세브란스 병원으로 후송되어 저녁 그 병원에서 운명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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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언에 의하면, 안타깝게도 제 큰형이 가족에게 남긴 마지막 말은 “119불러서 날 삼성병원으로 데려다 달라”였다고 합니다. 가족이 당황하고 갈피를 못잡아 형수님이 근무하던 시립병원으로 모시려했다가 119가 관할지역 밖이라 거절 하여 사설 엠브란스를 부르다가 시간이 지체되어 의학적으로 이야기하는 골든타임을 놓치고 혼절하신 상태로 자택근처 강남 세브란스 병원으로 모시게 되어 그곳에서 뇌경색으로 사망하셨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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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경화제를 사용할 시간을 놓쳐서 의료진이 끝까지 막힌 혈관을 뚫으려 시도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습니다. 여러분께서도 혹시라도 전조증세가 보이면 지체하지 마시고 병원응급실로 가셔서 생존의 골든타임 내에 치료받으시길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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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큰형 이태원 박사님은 음력 1955년 10월 29일 부친이 근무하던 서울 청량리 한국원예시험장 (부산본원 원장 우장춘 박사) 서울 분소 인근에 위치한 집에서 원예가 고 방원 이성찬 선생님과 전주여고 1회 졸업생으로 대한일보 수필컬럼에 수필을 기고하던 수필가 윤선 이춘연 여사님의 장남으로 출생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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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부친과 한국일보 장기영 사장님이 합작으로 시작한 서울 용산구 한남동 544번지에 소재한 원예농장에서 출생한 둘째동생 이창원, 세째동생 이희원, 네째 이상원 등 형제자매와 함께 유년시절을 보냈습니다. 장기영 사장님이 부총리로 입각하면서 부친은 단독으로 경기도 부천군 소사읍 199-2번지에 방원식물원 농장을 개설하셨습니다. 그곳에서 막내 여동생 이정현이 출생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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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인하여 제큰형 이태원, 둘째 이창원, 세째 이희원은 조부님이 계시는 용산구 청파동 3가 107-36으로 가서 효창국민학교에 진학하였습니다. 이후 오산중학교를 거처 용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에 진학하였습니다. 서울대 의과대학 시절에는 방송부와 미술부 활동을 하여 두각을 나타내기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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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유신반대 메모가 발견되어 집으로 형사들이 들이닥쳐 영장없이 집수색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때 고 조완규 박사님들을 비롯한 은사님들이 보증을 서 다시는 시국과 관련된 일에 연관되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고 학교로 돌아갈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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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대를 졸업한후 모친인 윤선 이춘연 여사님의 소원이던 안과전문의가 되고자 서울대의대병원에서 인턴 레지던트를 하며 의대 대학원에서 연구와 수련을 병행하며 무사히 전문의를 마치고 전방에서 군의관으로 군복무를 시작하여 남태령에 있는 수방사 군의관으로 전역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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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역후 서울 공릉의 원자력병원의 안과창설인원으로 초대안과 과장을 했습니다. 그당시 안구암분야의 유일한 전문의로 활동하며 전국의 안구암 환자들의 생명을 구했습니다. 그당시 세계 최초로 안구적출없이 안구암시술을 레지던트 김병희 선생님과 집도하여 미국 유니버시티 오브 펜실바니아(유펜) 의대 Wills Eye Hospital, oncology Service 교환교수로 초청되어 미국 안과의사들에게 안구적출없이 안구암시술을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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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F 국가부도 당시 원자력병원 안과도 구조조정을 통하여 안구암 연구 지원이 중단되어 이태원 박사님 혼자서라도 선진화된 한국 안구암 연구를 하고자 Lee Eye Institute라는 미국명으로 강남에 이태원 안과 (www.leeeyeinstitue.com)를 개원하여 한국 안구암 환자들에게 생명을 불어넣어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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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깝게도 주변사람들의 불이해로 인하여 논문발표를 준비하던 오래된 컴퓨터 디스크에 담긴 연구자료들이 오래된 쓰레기로 취급되어 망실되면서 이태원 박사님의 안구암 연구에 대한 꿈과 희망이 함께 망실되는 아픔을 겪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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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아들 딸 2아이의 아빠로 또 한 아내의 남편으로 더하여 부모님에 효도하는 장남으로, 2 남동생의 형으로, 2 여동생의 오빠로 뒷바라지도 마다하지 않은 삶을 살았습니다. 더하여 자신의 형편에 비하여 과할 정도로 친구들에게도 물질적 도움을 아끼지 않아 이태원 안과는 가난한 화가 친구로 부터 고가에 매입한 그림들과 친구들의 친인척을 늘 직원으로 채용하여 이태원 박사님의 보살핌이 가시지 않는 곳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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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facebook.com/reel/788507540102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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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큰형님 신제 이태원 박사님은 한산이씨 29世, 28代孫 으로 성리학을 고려에 들여온 중시조 목은 이색 선생님의 23세, 22代孫으로 세계 최고의 안과병원인 미국 유팬의 윌스 아이 하스피탈(Wills Eye Hospital)의 안구암부서 (Oncology Service)에서 연구한 의학박사(醫學博士)이고 세계 최초로 안구적출없이 안구암시술을 집도한 안과전문의(眼科專門醫)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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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초 한국에 최초로 라식기술을 도입하여 미국보다 먼저 선진의학기술을 한국인에게 제공했습니다. 독립자사 지운 김철수 선생과 한국화가 의제 허백련 화백이 합작으로 지어준 호가 신제였습니다. 서울용산 효창국민학교, 오산중학교, 용산고등학교, 서울대의대, 서울의대 대학원을 나와 안과 안구암전문의로 수방사군의관, 한국 원자력병원 (KCCH) 초대 안과과장을 역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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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후 미국 유니버시티 오브 펜실바니아(유펜) 의대 Wills Eye Hospital, oncology Service 교환교수로 세계 최초로 안구적출없이 안구암시술을 집도한바 있습니다. 최근까지 서울 강남 도곡2동 타워팰리스 안의 타워팰리스클리닉 이태원안과의 원장으로 근무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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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외에도 대한 안과의사회 부회장, LYCOMM CEO, 강남 서초 안과의사회 회장,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외래교수(안과학), 대한 검안학회 초대회장, 대한 안과학회 전산정보위원장, 대한민국 육군 군의관 대위 그리고 서울대학교 병원 안과전공의를 지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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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하여 서울고등법원 조정위원, 성균관대학교 의과대학 외래교수, 대한 미용문신의학회 부회장,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총동창회 상임이사 (운영위원), 미국안과학회 (AAO) 회원, 미국백내장굴절수술학회 (ASCRS) 회원, 대한안과의사회 라식/라섹 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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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족으로는 부인 파평윤씨 (坡平尹氏, 산부인과전문의) 윤루비 박사님과 1남 이동현과 1녀 이주현을 남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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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참전 상이용사이자 창경궁 초대식물원장과 경무대 온실장, 한국원예시험장 서울분소장을 지내고 한남동 한국일보 원예식물원과 경기도 부천군 소사읍 방원식물원을 운영하신 원예가 고 방원 이성찬 선생님과 전주여고 1회 졸업생으로 임실초등학교 교사와 대한일보의 수필컬럼을 연재하던 수필가 윤선 이춘연 여사님의 3남2녀중 장남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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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가 제 큰형 고 신제 이태원 박사님의 영전에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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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 이상원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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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벼락 같은 제 큰형님 신제 이태원(李泰遠,1955.10,29~ 2024.12.24) 박사님의 죽음에 애도를 표해주신 여러분께 유족을 대표하여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특히 국가변란으로 시국이 어수선한 와중에도 열일을 제처두고 조문장소였던 강남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을 찾아주시고 서울화장장과 용인추모공원까지 긴거름하여 주신 고인을 아끼고 사랑해주셨던 지인 친지분들께도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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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도하여 주신 여러분들 덕분으로 무사히 장례를 치르고 저희 유족들도 조금씩 안정을 되찾아가고 있습니다. 베풀어주신 과분한 온정을 생각하면 일일이 직접 찾아 뵙고 인사를 드려야 마당한 도리이지만 아직도 황망 중이라 이처럼 SNS 상으로 인사드림을 너그럽게 용서하여 주시길 바랍니다. 남은 인생동안 잊지않고 보은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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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2월 24일 새벽 2시 화장실에서 가족을 불러 어지러움을 알린 이태원 박사님은 결과적으로 치료의 골든타임을 놓치고 오후에야 근처 강남 세브란스 병원으로 후송되어 저녁 그 병원에서 운명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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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언에 의하면, 안타깝게도 제 큰형이 가족에게 남긴 마지막 말은 “119불러서 날 삼성병원으로 데려다 달라”였다고 합니다. 가족이 당황하고 갈피를 못잡아 형수님이 근무하던 시립병원으로 모시려했다가 119가 관할지역 밖이라 거절 하여 사설 엠브란스를 부르다가 시간이 지체되어 의학적으로 이야기하는 골든타임을 놓치고 혼절하신 상태로 자택근처 강남 세브란스 병원으로 모시게 되어 그곳에서 뇌경색으로 사망하셨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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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경화제를 사용할 시간을 놓쳐서 의료진이 끝까지 막힌 혈관을 뚫으려 시도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습니다. 여러분께서도 혹시라도 전조증세가 보이면 지체하지 마시고 병원응급실로 가셔서 생존의 골든타임 내에 치료받으시길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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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큰형 이태원 박사님은 음력 1955년 10월 29일 부친이 근무하던 서울 청량리 한국원예시험장 (부산본원 원장 우장춘 박사) 서울 분소 인근에 위치한 집에서 원예가 고 방원 이성찬 선생님과 전주여고 1회 졸업생으로 대한일보 수필컬럼에 수필을 기고하던 수필가 윤선 이춘연 여사님의 장남으로 출생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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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부친과 한국일보 장기영 사장님이 합작으로 시작한 서울 용산구 한남동 544번지에 소재한 원예농장에서 출생한 둘째동생 이창원, 세째동생 이희원, 네째 이상원 등 형제자매와 함께 유년시절을 보냈습니다. 장기영 사장님이 부총리로 입각하면서 부친은 단독으로 경기도 부천군 소사읍 199-2번지에 방원식물원 농장을 개설하셨습니다. 그곳에서 막내 여동생 이정현이 출생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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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인하여 제큰형 이태원, 둘째 이창원, 세째 이희원은 조부님이 계시는 용산구 청파동 3가 107-36으로 가서 효창국민학교에 진학하였습니다. 이후 오산중학교를 거처 용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에 진학하였습니다. 서울대 의과대학 시절에는 방송부와 미술부 활동을 하여 두각을 나타내기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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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유신반대 메모가 발견되어 집으로 형사들이 들이닥쳐 영장없이 집수색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때 고 조완규 박사님들을 비롯한 은사님들이 보증을 서 다시는 시국과 관련된 일에 연관되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고 학교로 돌아갈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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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대를 졸업한후 모친인 윤선 이춘연 여사님의 소원이던 안과전문의가 되고자 서울대의대병원에서 인턴 레지던트를 하며 의대 대학원에서 연구와 수련을 병행하며 무사히 전문의를 마치고 전방에서 군의관으로 군복무를 시작하여 남태령에 있는 수방사 군의관으로 전역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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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역후 서울 공릉의 원자력병원의 안과창설인원으로 초대안과 과장을 했습니다. 그당시 안구암분야의 유일한 전문의로 활동하며 전국의 안구암 환자들의 생명을 구했습니다. 그당시 세계 최초로 안구적출없이 안구암시술을 레지던트 김병희 선생님과 집도하여 미국 유니버시티 오브 펜실바니아(유펜) 의대 Wills Eye Hospital, oncology Service 교환교수로 초청되어 미국 안과의사들에게 안구적출없이 안구암시술을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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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F 국가부도 당시 원자력병원 안과도 구조조정을 통하여 안구암 연구 지원이 중단되어 이태원 박사님 혼자서라도 선진화된 한국 안구암 연구를 하고자 Lee Eye Institute라는 미국명으로 강남에 이태원 안과 (www.leeeyeinstitue.com)를 개원하여 한국 안구암 환자들에게 생명을 불어넣어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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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깝게도 주변사람들의 불이해로 인하여 논문발표를 준비하던 오래된 컴퓨터 디스크에 담긴 연구자료들이 오래된 쓰레기로 취급되어 망실되면서 이태원 박사님의 안구암 연구에 대한 꿈과 희망이 함께 망실되는 아픔을 겪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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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아들 딸 2아이의 아빠로 또 한 아내의 남편으로 더하여 부모님에 효도하는 장남으로, 2 남동생의 형으로, 2 여동생의 오빠로 뒷바라지도 마다하지 않은 삶을 살았습니다. 더하여 자신의 형편에 비하여 과할 정도로 친구들에게도 물질적 도움을 아끼지 않아 이태원 안과는 가난한 화가 친구로 부터 고가에 매입한 그림들과 친구들의 친인척을 늘 직원으로 채용하여 이태원 박사님의 보살핌이 가시지 않는 곳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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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facebook.com/reel/788507540102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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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큰형님 신제 이태원 박사님은 한산이씨 29世, 28代孫 으로 성리학을 고려에 들여온 중시조 목은 이색 선생님의 23세, 22代孫으로 세계 최고의 안과병원인 미국 유팬의 윌스 아이 하스피탈(Wills Eye Hospital)의 안구암부서 (Oncology Service)에서 연구한 의학박사(醫學博士)이고 세계 최초로 안구적출없이 안구암시술을 집도한 안과전문의(眼科專門醫)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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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초 한국에 최초로 라식기술을 도입하여 미국보다 먼저 선진의학기술을 한국인에게 제공했습니다. 독립자사 지운 김철수 선생과 한국화가 의제 허백련 화백이 합작으로 지어준 호가 신제였습니다. 서울용산 효창국민학교, 오산중학교, 용산고등학교, 서울대의대, 서울의대 대학원을 나와 안과 안구암전문의로 수방사군의관, 한국 원자력병원 (KCCH) 초대 안과과장을 역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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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후 미국 유니버시티 오브 펜실바니아(유펜) 의대 Wills Eye Hospital, oncology Service 교환교수로 세계 최초로 안구적출없이 안구암시술을 집도한바 있습니다. 최근까지 서울 강남 도곡2동 타워팰리스 안의 타워팰리스클리닉 이태원안과의 원장으로 근무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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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외에도 대한 안과의사회 부회장, LYCOMM CEO, 강남 서초 안과의사회 회장,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외래교수(안과학), 대한 검안학회 초대회장, 대한 안과학회 전산정보위원장, 대한민국 육군 군의관 대위 그리고 서울대학교 병원 안과전공의를 지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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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하여 서울고등법원 조정위원, 성균관대학교 의과대학 외래교수, 대한 미용문신의학회 부회장,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총동창회 상임이사 (운영위원), 미국안과학회 (AAO) 회원, 미국백내장굴절수술학회 (ASCRS) 회원, 대한안과의사회 라식/라섹 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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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족으로는 부인 파평윤씨 (坡平尹氏, 산부인과전문의) 윤루비 박사님과 1남 이동현과 1녀 이주현을 남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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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참전 상이용사이자 창경궁 초대식물원장과 경무대 온실장, 한국원예시험장 서울분소장을 지내고 한남동 한국일보 원예식물원과 경기도 부천군 소사읍 방원식물원을 운영하신 원예가 고 방원 이성찬 선생님과 전주여고 1회 졸업생으로 임실초등학교 교사와 대한일보의 수필컬럼을 연재하던 수필가 윤선 이춘연 여사님의 3남2녀중 장남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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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가 제 큰형 고 신제 이태원 박사님의 영전에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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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 이상원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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