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이 온 뒤 반세기,미국에 문 연 심훈기념관
-심훈기념관 탐방기-아직 그날은 오지 않았다
▲ 미국의 심재호씨네 집에 만든 심훈기념관 |
창 밖을 내다보던 영신은 다시금 콧마루가 시큰해졌다. 예배당을 두른 야트막한 담에는 쫓겨나간 아이들이 머리만 내밀고 쭈욱 매달려서, 담 안을 넘어다보고 있지 않는가! 고목이 된 뽕나무 가지에 닥지닥지 열린 것은 틀림없는 사람의 열매다. 그 중에도 키가 작은 계집애들은 나무에도 기어오르지 못하고 땅바닥에 주저앉아서 홀짝거리고 울기만 한다.
영신은 창문을 열어 젖혔다. 그리고 청년들과 함께 칠판을 떼어, 담 밖에서도 볼 수 있는 창 앞턱에다 버티어 놓고, 아래와 같이 커다랗게 썼다.
"배우고야 무슨 일이든지 한다."
나무에 오르고 담에 매달린 아이들은 일제히 입을 열어, 목구멍이 찢어져라고, 그 독본의 구절을 바라보고 읽는다. 바락바락 지르는 그 소리는 글을 외는 것이 아니라, 어찌 들으면 누구에게 발악하는 것 같다.
중학교 때 배운 심훈의 시와 소설로 용기를 얻었다
이 글은 중학교 2학년 국어교과서에 실려있는 심훈의 <상록수>의 한 부분이다. 주인공 영신이 예배당을 빌려서 농촌아이들에게 한글 강습을 시키는 가운데 일제 주재소 주임의 방해로, 130명이나 되는 아이들 가운데 80명만 예배당에 두고 나머지 학생은 예배당 밖으로 쫓고 아이들을 가르치는 대목이다.
이밖에도 '옥중에서 어머니께 올리는 글월' 시 '그날이 오면' 등 이들 작품도 오래 전부터 지금까지 중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려 있다. 그래서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심훈'이라는 인물과 그의 작품을 대하지 않는 이가 없을 것이다.
어머니!
어머니께서는 조금도 저를 위하여 근심하지 마십시오. 지금 조선에는 우리 어머니 같으신 어머니가 몇천 분이요, 또 몇만 분이나 계시지 않습니까? 그리고 어머니께서도 이 땅의 이슬을 받고 자라나신 공로 많고 소중한 따님의 한 분이시고, 저는 어머니보다도 더 크신 어머니를 위하여 한 몸을 바치려는 영광스러운 이 땅의 사나이외다.
콩밥을 먹는다고 끼니 때마다 눈물겨워 하지도 마십시오. 어머니께서 마당에서 절구에 메주를 찧으실 때면 그 곁에서 한 주먹씩 주워 먹고 배탈이 나던, 그렇게도 삶은 콩을 좋아하던 제가 아닙니까? 한 알만 마루 위에 떨어져도 흘금흘금 쳐다보고 다른 사람이 먹을세라 주워 먹기가 한 버릇이 되었습니다.
나는 중1 때 이 글을 배우면서, 글의 소재가 바로 생활 속에 있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나도 글을 쓸 수 있을 것 같다는 용기를 가졌다. 그런데 이 주옥같은 글들을 쓴 심훈 선생의 육필 원고는 우리나라에 없고, 유감스럽게 미국 버지니아 주 센터빌이라는 마을에 있다.
애초에는 심훈 선생의 고향인 충남 당진에 심훈기념관을 세워 이 육필원고를 소장하려 했으나 기념관 건립이 지지부진 좌초되자 원고 유실을 염려한 아들 심재호(71)씨가 그 원고들을 당신이 거주하고 있는 미국으로 가져갔기 때문이다.
심훈 기념관에 온 첫번째 '고국 손님'
▲ 살아 생전에 남긴 장편소설 '상록수' 원본 |
미국의 경기 불황도 깊은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나 보다. 나는 지난 2월 하순 한국전쟁 사진자료를 수집코자 세 번째 미국 방문 길에 올랐다. 낯익은 메릴랜드 주 칼리지파크에 있는 미국 국립문서기록보관청(NARA)을 다시 찾았는데 그 새 큰 변화가 있었다.
미 정부의 예산 절감으로 이곳 아키비스트(학예사)들이 상당수 구조 조정을 당해 NARA의 개관시간과 날짜가 대폭 줄어들었다. 2차 방문 때까지만 해도 주중 3일은 밤 9시까지 열람할 수 있었고, 토요일도 오후 4시까지 열림이 가능했는데, 올해부터는 주중에는 오후 5시까지만 문을 열었고, 토요일은 아예 문을 열지 않았다.
이런 사실을 모르고 갔던 나로서 애초 계획에 차질을 빚게 되었다. 짧은 예산과 여행 피로도를 감안하여 2주 동안만 머물기로 했기에 절대 시간 부족이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주말을 숙소에서 쉬어야 했다.
이국의 숙소에서 이틀을 우두커니 보내자니 좀이 쑤셨다. 미국이라는 나라는 대중교통이 발달치 않아서 자기 차가 없으면 꼼짝할 수도 없다. 내 차는커녕 여태 운전 면허증도 없는 강원도 산골 서생이 잘 알아듣지도 못하는 TV만 쳐다보려니 몸부림이 났다.
수첩을 펼쳤다. 10여 명의 지인 전화번호 중 가장 연세가 많으신 심재호씨 댁으로 다이얼을 눌렀다. 전화를 받는 분은 생면부지의 심재호씨 부인이었다. 내 이름을 대자 매우 반갑게 인사를 하면서 심재호씨에게 연결시켜 주었다.
심재호씨는 마침 2007년 3월 1일, 당신 집에 '심훈 기념관'을 열었다면서, 내가 고국에서 온 첫번째 손님이 되겠다고 곧장 초대했다.
박은식과 심훈, 그리고 그 후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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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 나를 도와주시는 박유종 선생 차로 버지니아주 센터빌을 찾았다.
495번 워싱턴 DC 순환도로와 95번 남북 고속도로를 1시간 남짓 달린 끝에 버지니아 센터빌 조용한 주택가에 이르렀다. 미국의 주택들은 집 앞에 일정한 규격의 글씨로 번지를 붙여놓았기에 한번 묻지 않고도 쉽게 집을 찾았다. 아담한 2층 집이었다. 집 안에서 차소리를 듣고 내외가 현관문을 열고서 영접했다. 일흔을 넘긴 부부는 나이에 맞게 곱게 늙어 있었다.
동행 박유종씨가 백암 박은식 선생 손자라고 하자 심재호씨는 더 없이 반가워했다. 심훈 선생도 독립운동가로서 한 때 북경의 우당 이회영 댁에 기숙하면서 단재 선생과 교유하기도 하고, 상해 임시정부를 드나들면서 백암 선생을 사사하기도 했다고 선대의 인연을 말했다.
'심훈 기념관'답게 거실에는 온통 심훈 선생의 사진과 관련 사진 원고 책자들로 꽉 찼다. 그 동안의 사정을 어슴프레 아는 나에게 심재호씨가 입을 뗐다.
"책장과 원고함, 가방 속에서 잠자고 있던 아버님의 유품들을 모두 꺼냈어요. '심훈 기념관'이 꼭 클 필요는 없지요.”
곁을 지키던 부인 설도섬(70)씨가 보충 설명을 했다.
"아버님이 남긴 작품의 원고가 거의 다 남아 있어요. 그 까닭은 복사기도 없던 그 시절, 아버님이 원고를 쓴 뒤 후일을 대비해서 신문사나 잡지사로 보내기 전에 한 벌 따로 써두셨습니다. 그렇게 철저히 사셨기에 젊은 날 일찍 돌아가셨나 봐요."
▲ 심훈씨 유족들. 왼쪽부터 손녀 영민씨, 셋째아들 심재호씨, 자부 설도섬씨. |
하지만 그렇게 쓴 원고도 해방과 한국전쟁을 거치며 흩어져 버렸다. 심재호씨가 <동아일보> 기자가 된 이후 그런 사실을 알고는 십수 년 동안 수소문해서 다 찾았다고 했다.
내가 벽에 걸린 낯익은 글('그날이 오면')과 글씨에 눈길을 주자 그 액자에 담긴 사연을 얘기했다.
"저 시 '그날이 오면'은 이철경·이갑경 두 자매가 각기 썼습니다. 한 분(이철경)은 남쪽에서 여성 서예가의 제1인자였고, 또 다른 한 분(이각경)은 북녘에서 제1인자였지요. 이각경씨가 쓴 액자는 큰 딸(심영주)이 소장하고 있어요."
두 분과 심훈 선생은 인척 관계로 잘 아는 사이라고 했다. 곧 가까이 산다는 둘째 따님 심영민씨가 우리를 접대하기 위해 일부러 왔다. 거실에서 둥글레차를 한 잔 마시고 2층 서재로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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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라한 '심훈 기념관(Shim Hun Memorial H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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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재호씨의 안내로 2층 서재에 이르자 출입문에 종이로 만든, 컴퓨터 자판으로 새긴 '심훈 기념관(Shim Hun Memorial Hall)'이라는 직사각형 표찰이 눈에 띄어 내 가슴을 후볐다. 일제 강점하 대문호의 기념관이 이렇게 초라할 수야.
서너 평 되는 서재는 온통 심훈 선생의 흔적으로 가득 찼다. 정면 벽에는 낡은 사진과 유고, 훈장으로 도배되었다. 심재호 씨는 흰 장갑을 끼고서 궤짝 문을 열었다. 그리고는 빛바랜 원고뭉치를 꺼냈다.
'治安妨害 削除(치안방해 삭제)'라는 붉은 잉크의 스탬프와 '삭제'하라는 붉은 선이 매 쪽마다 시뻘건 '沈熏詩歌集(심훈시가집)' '감옥에서 어머님께 올린 글월' '痛哭(통곡) 속에서' 시와 산문의 원고와 장편소설 원고들이 쏟아졌다.
또 마라톤에 우승한 손기정 선수를 기리는 '오오, 조선의 남아여!'라는 마지막 절명의 원고까지 나왔다. 심훈 선생이 1936년에 운명하셨으니 모두 70~80여 년 전의 원고들이다.
심재호씨는 이들 원고를 하나하나 펼치면서 원고에 얽힌 유래담을 들려줬다. 당진의 필경사에서 동아일보 발간 15주년기념 현상모집에 당선된 <상록수>를 연재할 때는 날마다 이웃에 살았던 지인실 씨가 원고를 받아 읍내 우체국에 가서 부쳤다면서 그분의 사진까지 벽면에 걸어 두고 기렸다. 이 모두가 우리 겨레의 귀중한 문화자산으로 국보급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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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이 함몰한 나라
한 역사학자는 지금 우리 사회가 국민소득은 올라갔지만, 오히려 인문이 죽어버렸다고 개탄한다. 온통 나라 전체가 경제에 함몰된 느낌이다. 인문이 빛을 잃어버리자 온갖 사이비들이 판을 치고 있다. '돈'에 관해서는 지위고하도 염치도 없다.
인문이 죽어버린 사회는 대통령을 하고도 백성 앞에 눈물 흘리며 부끄러워한다. 국민소득만 올라간다고 선진국이라고 할 수 없다. 물질적인 삶의 질과 문화적인 삶의 질이 함께 향상되어야 진정한 선진국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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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영박물관 전시물, 이들은 남의 나라 파괴된 조각물도 가져다가 관람객에게 보여주고 있다. | |
ⓒ 박도 |
대영 박물관은 영국 문화의 상징이다. '대영'이란 이름에 걸맞은 세계 최고, 최대의 박물관으로 의사요 고고학자였던 한스 스로운 경이 수집한 문화재를 토대로 1753년에 기초가 마련되고 1759년에 일반에게 공개됐다는데, 인류 문화사적으로 가치 있는 최고의 유물들을 소장하고 있다.
이집트의 로제타스톤(Roseta Stone)을 프랑스 세력을 물리치고 옮겨다 놓았고, 터키가 그리스를 통치하고 있을 때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을 그대로 싣고 와서 박물관에다 재현시켜 놓았다. 이집트의 미라, 그리스와 로마에서 약탈해 온 토기, 조각품, 오스만 터키족에 의해 파괴된 그리스의 찬란한 유물들도 영국인들은 예사롭게 보지 않고 수집해 놓았다.
그밖에 시리아, 바빌로니아, 아시리아, 페르시아, 터키의 찬란했던 문명 등 남의 귀중한 문화재도 정갈스럽게 전시장을 메우고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기를 죽인다.
고대 문명의 발상지인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인도, 중국의 유물들을 듬뿍 소장하고 있어서 세계 문화사의 변천을 시대별, 지역별로 분류 전시하여 지구인의 문화적 발자취를 일목요연하게 살필 수 있게 진열해 놓았다.
또 박물관 1층 도서관(British Library)에는 1215년에 발행된 대헌장(Magna Carta) 원본과 1453년에 처음 활판 인쇄된 구텐베르크의 성서, 셰익스피어의 작품 초판본, 모차르트, 베토벤의 육필 악보, 저명인들의 원고, 지도, 신문, 잡지, 우표 컬렉션까지 전시되었고 1000만 권이 넘는 장서에는 동서양의 희귀본들이 부지기수다.
이 대영 박물관은 영국인들의 정신문화의 주춧돌로, 남의 나라 문화재까지 약탈해다가 그들에게 자긍심을 불어 주고 정신 교육의 장(場)을 만들어 놓았다.
영국의 스트래트퍼드는 인구 2만의 자그마한 도시지만 연 100만 명의 셰익스피어 순례자들이 찾고 있는 문화의 도시다. 단테의 고향 피렌체의 거리에는 <신곡>의 구절들이 석판에 새겨져 문화를 사랑하는 순례자들을 불러 모으고 있다.
우리문화의 현주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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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칭 국민소득 2만 불에 이른다고 자랑하는 우리의 문화수준은 아직도 요원하기만 하다. 나라의 문화를 총괄하는 문화관광부 수장만은 우리 나라 최고의 문화인으로 메워야 할 터인즉, 지난날에는 정권의 나팔수나 하수인으로 메워져 문화의 진흥은커녕 온 나라를 도박의 열풍에 휩싸이게
(옆 사진은 이효석 생가.생전에 생산도 안 된 플라스틱 지붕으로 덮어져 있다.)
했다. 아직도 문화인 대부분의 월수입이 기초 생계비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
지난해 봄 내가 사는 이웃 마을 봉평 이효석 생가를 찾았더니 지붕이 플라스틱 기와로 덮여 있었다. 그날 여러 신도와 함께 온 한 목사님이 실소를 금치 못하면서 이래놓고도 올림픽 유치에 열을 올린다고 통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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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 앞에서 멀리서 찾아온 나그네를 환송하는 심재호씨 내외와 박유종씨(오른쪽). | |
ⓒ 박도 |
생가의 지붕을 원래 기와로 올리면 얼마나 돈이 더 든다고 그 당시 있지도 않은 플라스틱 기와로 지붕을 올리고 참배객들을 우롱할까? 이처럼 유명 문인의 생가 지붕마저 가짜로 치장하여 눈가림을 하니 우리 사회에 온통 가짜들이 판을 치고 있다. 온통 껍질문화만 요란하다.
"이 원고들은 겨레의 자산으로, 언젠가는 겨레의 품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심재호씨는 아버님의 유고들을 다시 보관함에 차곡차곡 넣으면서 말했다. 그러면서 어떻게 알고서 미국 시카고 대학과 일본 도쿄대학에서 이 유고들을 기증해 달라고 백지수표로 제의하지만 어찌 넘길 수 있느냐고 반문했다.
이제 당신도 일흔이 넘었다. 그래서 이번에 '심훈 기념관'을 열면서 이 유고 관리를 모두 자녀들에게 넘겼다고 서류까지 보여주는데, 그 서류만은 당신 가족들의 사사로운 일이라고 사양하여 카메라에 담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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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훈 선생 절명 원고 '오오, 조선의 남아여!'와 당시 소설 '상록수' 원고를 우체국으로 배달한 지인실씨 모습 ⓒ 박도 |
두어 시간 '심훈 기념관'에서 머문 뒤 석별의 정을 나누고는 귀로에 올랐다. 실내에서 작별인사를 나누고도 아쉬웠는지 내외분이 바깥까지 나와 전송했다. 나는 굳은 악수를 나누고, 기약 없는 약속을 한 뒤 메릴랜드 숙소로 돌아왔다. (박도씨의 블로그에서 옮겨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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