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1. Dr. Sam Lee/15_80년5월18일

[스크랩] 광주518민주화운동 이번에는언론이 무심하군요

忍齋 黃薔 李相遠 2007. 5. 13. 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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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광주 민주화운동 일이 다가옴니다 민주화를열망하며 목숨을아끼지않고 바치신 민주열사를 생각하는 한주가되었으면합니다 몇칠남지않았어요 근데 아쉬운것은 언론이 6월항쟁에만신경쓰고 광주의 민주화운동은 다루지않는듯합니다 ..참아쉽기만합니다 ,,,,어린이와함께 계시다면 한번 5.18 민주화운동을 알려주시고 ,,,가족끼리 조금한과일이라도 놓고 먹으면서 토론하는것은 어떨까요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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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 5월의 하늘을 붉게 물들이며 거칠게 타오르던 광주민중항쟁의 불꽃은 27일 새벽 계엄군의 '충정작전'과 함께 쓰러져 버렸다. 그러나 그 뜨거운 불씨마저 짓밟혀 버린 것은 아니었다. 그 불씨는 혹독한 시절에도 꺼지지 않고 더욱 빛을 발하면서 그날 이후 살아남은 모든 사람들의 가슴을 결코 꺼지지 않는 불길로 지켜주고 있다.

'그것은 부끄러움이 아니라 자랑스러움이었으며, 오욕의 역사가 아니라 긍지의 역사였다. 광주시민들의 자랑과 긍지는 단순한 향토애나 반항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항쟁기간을 가장 뜨겁게 살았던 시민들의 절실한 체험에서 우러나온 것이며, 따라서 권력의 탄압이나 각종 언론의 왜곡선전에도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남기고 있다.

광주시민들이 체험한 '광주의 진실'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었다.
당시의 상황에서 항쟁에 참여한다는 것은 자신의 생명까지 포함한 모든 것을 버릴 각오가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주시민들은 한 두 명의 영웅적인 항쟁이 아닌, 시민 전체의 이름으로 하나가 되어 그에 저항했으며, 결국은 승리하였다. 당국에 의해 불순분자와 폭도들의 난동으로 매도되면서도 광주시민들은 비인간적인 폭력에 저항하는 것이 자신들의 생존권을 지키는 길이고, 정의에 부합하는 것이라는 신념을 갖고 그 길을 걸었던 것이다.

'다음으로는 항쟁의 전 기간 동안 광주시는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하며, 위기를 가장 인간다운 삶의 협동으로 대처했다는 점이다. 광주시가 계엄군에 포위된 채 완전히 고립된 상황에서, 대중매체와 군 정보요원을 통한 교란작전이 난무하는 상황에서, 그리고 그러한 상황이 얼마나 지속될 지 아무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광주시민들은 각자가 갖고 있는 것을 서로 나누며, 서로 의지하고 격려하면서 살았다. 먹을 것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음식을 나누어 주었고, 피가 부족한 부상자에게는 피를 나누어 주었으며, 일손이 필요할 때는 시민들 누구나가 달려들어 그 일을 해주었다. 항쟁지도부가 수습의 방법을 두고 고심할 때 일반 시민들은 하나가 되어 어려움을 이겨나갔던 것이다.
그 기간 동안 광주시는 공식적인 치안체계가 완전히 붕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완벽한 치안체계를 유지하였다. 그토록 많은 총기류가 시민들의 수중에 있었지만, 그로 인한 불상사는 단 한 건도 발생하지 않았다. 금융기관이나 금은방 등 평소 범죄자들이 노릴만한 곳에서도 이 기간중에는 아무 일도 발생하지 않았다. 이런 사실은 세계민중항쟁 역사상 유래를 찾을 수 없는 것으로 광주시민들은 성숙한 민주의식과 공동체 의식을 견지하였다는 점에서 5·18광주민중항쟁이 오로지 민주주의의 구현을 위한 시민봉기였다는 점을 증명하고 있다. 시민들에게 공격을 받은 곳은 그들을 억압하는 국가권력을 상징하는 곳이거나 사실보도를 제대로 하지 않았던 방송국과 같은 보도매체들이었다.
외부의 지원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구식 개인화기만으로 무장한 시민군이 온갖 최신식 무기로 무장한 계엄군을 이길 수는 없었다. 결국 시민군은 항쟁기간 쌓아왔던 모든 기대가 무너지며 패배하였다. 그러나 전투에서 승리한 계엄군도 광주시민들 마음 속에 이미 뿌리깊게 자리잡은 자랑스러움과 긍지만은 지울 수 없었다. 그리고 이것은 언젠가 다시 우리들 주변에서 살아나리라는 것을 암시해주고 있다.

1980년 5월 광주를 중심으로 전남지방에서 일어난 민주주의를 위한 싸움은 엄청난 물리력을 앞세운 군부의 진압작전으로 일단은 좌절되었지만 그것은 실패한 역사로만 기억될 수는 없다. 오히려 그것은 생생하게 살아있는 과거로서 오늘의 우리에게 그 교훈과 의미를 되새기도록 요구하고 있다.
한국전쟁 이후 '80년에 이르기까지 소수의 사회운동 진영을 제외하고 대다수의 국민들은 한국과 미국의 관계를 혈맹관계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광주항쟁'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미국이 신군부를 직·간접으로 지원하였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그러한 인식은 급속하게 깨져버렸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의 변화는 '80년 광주항쟁 이후 반미운동의 고양을 가져온 원인이 되었다.
'80년 5월의 광주를, 나아가 '80년 봄의 민주화운동을 부정하고 들어선 제5공화국은 자신의 허약한 정당성을 강화하기 위해 억압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체제로 일관하였다. 그때마다 민주주의를 향한 국민들의 열망이 모아진 것은 이른바 '5월투쟁'이었다. '80년 이후 해마다 5월이 되면 광주에서, 그리고 전국의 모든 대도시에서 그날의 의미를 되새기고 억압적인 체제를 타파하기 위한 국민들의 단합된 움직임이 일어났던 것이다. 그 결과 우리 사회에 팽배해 있던 독재체재가 어느정도 불식되었으며, 정부도 체제유지를 위하여 어느 정도 양보를 하여 미진한 수준에서나마 일반민주주의의 진전이 이루어지고 있다.
광주항쟁은 한국현대사의 흐름을 뒤바꾼 전대미문의 시민무장봉기였다. 전두환의 신군부는 '80년 5월, 광주시민의 선혈을 발판으로 권좌를 차지했다. 그러나 20년이 채 지나기도 전에 5. 6공화국의 집권층이 보여준 광주양민학살만행과 천문학적인 부정부패가 온천하에 드러나게 되었고 결국은 '역사와 정의와 법'에 의한 단죄의 행로를 걸었다.

그간 광주민중항쟁의 역사적 진실을 규명하는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신군부가 권력을 송두리째 흔들던 5공화국 7년동안, 광주항쟁의 실체를 밝혀 줄 각종 군 자료와 증거들은 소리 없이 사라져 갔다. 그러나 6공화국의 여소야대라는 정국속에서 열렸던 광주특위 청문회를 통해 광주민중항쟁의 진상이 상당부분 밝혀졌다.
문민정부의 초기에는 검찰이 '성공한 쿠데타'에 대한 단죄보다는 역사에 의한 처벌을 강조하였다. 이로써 이 나라의 '헌정을 유린하고 국민을 살육한 부도덕한 신군부 집단'에 대한 전국민적 처벌 요구가 자칫 영원한 역사적 과제로 미루어질 위기에 봉착하였다.

그러나 거세지는 "광주민중항쟁 책임자 처벌"이라는 국민적 요구에 검찰은 다시 전면 재수사에 나섰고 그들은 '역사에 의한 단죄'가 아닌 '헌법에 명시된 국민의 기본권과 생존권, 저항권을 말살한 헌정 초유의 내란집단'으로 규정되어 전세계의 관심속에 "법과 정의의 심판"을 받게 된 것이다.

반면에 전국민의 이름으로 진행되고 있는 '세기의 재판'에도 불구하고 진상은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다. 그 이유는 아직도 과거의 역사적 잔재와 의식의 소유자들이 여전히 우리 사회의 각 분야에서 은밀하게 움직이며 저항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아무리 광주항쟁의 진상을 왜곡하고 은폐하려 해도 반드시 국민과 정의의 힘에 의해 낱낱히 밝혀질 것이다.
현 정부가 광주항쟁을 세계사에 유래없는 초이성적 초도덕적 투쟁이라고 규정한 만큼 이제 새로운 도약을 위한 준비를 시작해야 한다. 과거보다는 미래를 생각하고 준비하는 5·18광주민중항쟁의 정신계승 방안을 위해 광주시민과 더불어 전국민이 함께 고민하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다가오는 21세기는 무한경쟁시대라고 말한다. 이 21세기를 준비하고 기약하기 위해서는 한 시대의 아픔과 절규에서 스스로 벗어나 우리 사회의 가능성과 역동성을 하나로 묶는 공동체의 실현, 바로 이것이다. 서로 돕고 신뢰하고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의 실현을 통해 광주민중항쟁 정신은 더욱 더 찬란한 역사속의 빛으로 승화될 것이다.
5.18이 있기까지 과정을 간추려서 그려본다. 이승만정권부터 그칠줄 모르는 독재청지..
12년간 이승만은 정권을 잡았지만 국민들의 민주화 물결에 부딛치고 곧 4.19의거에 의해 무너지고 만다. 이에 다급한 이승만은 하와이로 망명을 하였고 이어 윤보선의 제 2공화국이 탄생했지만 정말 무능하기 짝이 없었다. 정부의 부정부패, 2공화국의 무능함.. 이 모든게 5.16 군사쿠데타를 일이키게 했다고 볼수 있다.
박정희(당시계급 소장)는 1961. 5. 16 오후 3시를 기해 군사들을 동원하여 국가를 위기로부터 구하고 부정부패를 추방한다는 명분하에 쿠데타를 일이킨다.

이어 18년간의 긴 유신정권이 시작된다. 박정희는 자신의 독재를 위해 제 7차 헌법개정을 통해 유신정권을 자리매김하게 된다 술자리에서 마음대로 말도 못하고 그저 소리죽여 살아야 했던 시대.. 영문도 모른체 끌려가서 옥사를 치루는 사람들..

국민들은 박정희 정권의 독재정치, 유신정권에 맞서 부마항쟁이라는 대민족 민주화 물결을 일으킨다.
이는 단순한 유신체제의 저항운동을 넘어 대한민국 최초의 신자유주의의 저항운동이라고 역사가들은 해석한다.

국민들의 민주화 갈망은 더욱 간절했다.
이에 결말은 박정희의 피살로 이어진다. 부마항쟁에 연이은 박정희의 피살... 당시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재규가 중앙정보부식당 만찬에서 1979. 10. 26 박정희를 시해한다. (김재규는 박정희가 5.16 쿠데타를 일으킬때 김종필과 함께 앞장 섰던 인물이다.) 이에 게엄령이 선포되고 익일 최규화가 대통령 권한대행을 하게된다.

이에 전두환은 몹시 분노하였다. 평소 아버지처럼 모시던 박정희가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제일먼저 김재규를 족치기 시작한다.

박정희 시해 사건으로 인해 국민들은 오랫동안 갈망해온 민주화를 실현할수 있겠다며 모두 기대했다.
그러나..
머지않아 전두환과 노태우를 중심으로 12.12 사태가 일어난다. 당시 전두환은 보안사령관이었으며 12.12 사태를 일으키기 위해 중앙정보부장까지 겸직함으로써 만반의 준비를 갖춘것이다.

12.12 사태가 끝나고 한참이 지난후..
게엄령은 해지되지 않았다.
오히려 1980년 5월 17일 게엄령이 확대되면서 김대중을 구속하고 평소 눈에 가시처럼 두었던 호남지역을 무차별하게 밀기 시작한다.

이후 전두환이 집권하게 되고 눈물어린 5.18의 비극이 채 가시지도 않은 87년 6월 다시한번 6월 항쟁이라는 거센 민주화 물결이 일어난다. 국민들의 민주화 운동은 끊임없이 계속되어왔으며 그때마다 국민들은 혹독한 시련을 겪어야만 했다.

국민들이 깨어 있어야 나라가 바로선다. 오늘날이 있기까지 우리는 민주화를 위해 얼마나 많은날을 부르짖으며 울분을 토했던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최루탄 앞에서 목숨을 잃었던가...

 

0시 비상 계엄령 확대실시
5·17계엄확대는 대다수 국민의 민주화에 대한 절실한 요구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었고 계엄포고 10호를 통하여 ① 모든 정치활동의 중지 ② 대학 휴교 ③ 옥내외 집회·시위 및 전·현직 국가원수 비방금지 ④ 직장이탈 및 파업 불허 ⑤ 언론 사전검열 등의 조치를 취하는 한편 김대중씨를 비롯한 정치인 수백명을 강제 연행하였다. 더불어 신군부는 서울 부산 대구 광주 전국 대도시에 신속히 군을 투입했으며 특히 서울과 광주가 주요 공격의목표였다. 서울에는 1. 3. 5. 9. 11. 13. 공수여단이 배치되었고 광주 7공수여단33대대 35대대로 전남대 조선대에 배치되었다. 이들은 시위 진합 훈련을 수련한 최강의 전투력을 가진 정예부대가 무력으로 진압을 함으로써 5. 18의 비극은 시작되었다.

전남대 정문에서 학생 공수부대원간 최초충돌
5월 18일 오전에 전날 비상계엄의 전국확대 실시 및 전국대학의휴교조치가 취해진 것을 모르고 일상적으로 학교에 나온 학생들이 교문에서 계엄군에 의해 제지되었다. 이때 학교 수위실 옆에는 계엄군에게 심하게 구타당한 학생들 2, 3명이 꿇어 앉혀져 있었다. 갑작스런 휴교조치와 교문 옆에 구타당한 학생들을 보고학생들은 교문 근처에서 서성이고 있었는데, 오전 10시경 학교에 들어가지 못하고 운집한 학생들의 수는 100여 명으로 불어났다. 이들 학생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자연스럽게 '계엄군 물러가라'는 등의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고, 일부 학생들은 닫혀진 교문 안에 있는 공수부 대원에게 학생들의 구타와 학교출입금지 조치에 대해서 항의하기도 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학생들의 숫자가 불어나며 군중심리에 의한자연발생적 시위가 시작되었다. 학생들은 교문과 일정한 거리를두고 '계엄군 물러가라'는 등의 구호를 계속 외쳤다. 이때까지는 돌을 던지거나 어떤 물리적 방법도 동원되지 않은 평화적이고 지극히 자연발생적인 시위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교문 안에 있던 공수부대는 두어 차례 해산을 종용하는 선무 방송을 한후, 갑자기 함성을 지르며 학생들을 향해 돌진해 와서 잡히는 학생들마다 곤봉으로 머리와 어깨 등을 구타하고 군화발로 걷어차거나 짓밟고 연행하였다.
당시 외친 구호는 '비상계엄 해제하라 계엄군은 물러가라 김대중씨 석방하라 휴교령을 철회하라 '등 이였다. 7공수여단은 주둔지 전남대학교를 나와 강력한 시위 진압을실시하였다. 시위가담 여부와 상관없이 남녀를 불문하고 무조건쫓아가 무차별 때리고 짖 밟았으며 쓰러진 사람은질질 끌고가 트럭에 실었다. 이러한 행위는 광주시민을상대로 한 학살 극이라 할 만큼 무자비하고 난폭했으며 진압봉과 대검으로 때리고 찔렀으며 도주하는 학생과 청년들을 뒤 쫒아 민가에까지 들어가 젊은 남자들을 끌어내어 무자비하게 구타한 후 옷을 벗기고 팬티만 입혀 포박 연행했다. 이때 연행자는대학생 114명, 전문대생35명, 고교생6명, 재수생66명, 일반시민184명 등 합계 405명이었으며 이중 68명이 두부외상, 타박상, 자상(대검)등을 입었고 12명은 중태였다고 2군 사령부 계엄상황 일지에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 연행자와 부상자는 이보다 훨씬 많다고 전해진다.

작전명령 "화려한 휴가를 즐겨라"
공포와 불안으로 하루를 보낸 다음날인 19일 광주지역은 대학을 제외한 초·중·고등학교는 정상수업을 계속했고, 관공서나 기업체, 공장 등은 대체로 정상근무를 하였지만 일손을 거의 놓고 18일의 공수부대 만행에 대해 이야기를 주고받았다.시내 중심가의 상가들은 대부분 철시한 상태였으며, 이른 새벽부터 군인과 경찰들이 시내 전지역에 걸쳐서 삼엄한 경비를 서며 공포분위기를조성하고 있었고, 금남로는 일체의 차량이 통행할수 없었다. 이런 와중에서 시민들은 그냥 이렇게 있을 것이 아니라 시내로 나가 사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살펴보자며 몇 명씩짝을 지어 금남로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오전 10시경 금남로에 모여든 군중은 2,000∼3,000명으로 불어났으며, 자연스럽게 군경의 저지선과 대치하고 있었다. 이들 중에는 이미 학생들은 별로 없었고, 일반 시민들이 대부분이었다. 10시 40분부터 경찰과 공수부대는 최루탄을 쏘며 적극적인 해산에나서기 시작했다. 그러나 어제의 잔인한 진압에 분노하고 있던시민들은 그냥 쫓겨가지 않고 야유를 보내고 돌을 던지며 항의했다.
군경과 시민의 충돌이 시작된 지 30분 정도 지나서 군용 트럭 30여 대에 분승한 공수부대가 도청 앞과 금남로 사거리에 진출하여 시위군중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19일 새벽 4시경 모든 이동을 마친 11공수여단 병력 1,140여명이 시위진압에 나선 것이다.
11시 30분경 다시 공수부대의 시위진압이 시작되면서 어제와 마찬가지로 잔인한 살육전이 전개되었다. 그들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다. 항의하던 할아버지와 아주머니, 도망가던 여학생, 버스기사, 고시학원에서 공부하던 어린 학원생들 그 모두가 그들의 진압대상이었다.
공수부대원들은 3∼4명이 한 조가 되어 시위현장 주변의 건물이나 집들을 샅샅이 뒤졌으며, 그 안에서 젊은 사람이 발견되면 무작정 구타 한뒤 연행하였다. 붙잡힌 시민들은 팬티만 남기고 발가벗겨진 채 군 트럭에 실려갔다. 당시 광주지역에 투입된 공수부대는 그들의 작전명칭이 그러했듯 '화려한 휴가'를 마음껏 즐기고 있었다. 이러한 폭력은 시내 중심가에 한정된 것만이 아니라 시가지 전역에 걸쳐서 자행되고 있었다.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잔인한 만행이 백주대로에서 자행된 것이다.

병원에는 부상자들이 줄이어...
이런 상태에서 19일 오후로 접어들면서 시위의 양상은 수세에서공세로 바뀌는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시위의 중심세력이 대학생에서 시민대중으로 서서히 바뀌고 있었는데 바로 공수부대의 무자비한 시위진압행위를 더 이상 보고 있을 수 없었던 시민들이 시위대열에 합세하기 시작한 것이다.
한편 이날 낮부터 광주 시내 종합병원과 개인병원에는 부상자들이 줄을 이어 입원하기 시작했다. 계엄군의 트럭에 실려가지 않고 중상을 당한 채 달아났거나 주위의 도움으로 계엄군의 무자비한 손길을 벗어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중경상을 입은 많은 부상자와 죽어 가는 사람 수에 비해 광주 시내 병원시설로는 이들을 모두 수용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시민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항거
19일 오후부터 전 남북에 걸쳐 내리던 비가 20일 오전에 멈추었다. 일부 시민들은 가족 친지 이웃의 생사 확인을 위하여 각 신문사, 방송국, 경찰서 찾아 다녔고 금남로 2가에서 3가까지 약 2천명의 시민을 주축으로 한 시위대가 금남로 입구까지 행진하며 "공수부대원 물러가라', '우리를 죽여라', '계엄을 해제하라', '전두환 물러가라' 고 외치며 시위에 참여하였다.
그 무렵 이곳 금남로에는 공수부 대원 대신 1천여 명의 경찰이나타났다.
학생과 시민들은 어디서 가져왔는지 연막탄을 터뜨리며 경찰을 향하여 서서히 다가갔다. 또한 갖가지 구호와 함께 애국가를 부르며 보도 블럭을 깨서 던졌다. 경찰은 최루탄과 페퍼포그를 쏘며 대항했으나 조금씩 뒤로 밀리고 있었다.그러자 1가 쪽으로 3개 소대 병력쯤 되는 공수부대가 다시 투입되어 진압에 나서는 바람에 군중들은 뒤로 후퇴하면서 밀려났다. 이 군중들은 충장로 쪽으로 빠져나가 구시청 부근인 우미여관 앞에 모였다. 이들 가운데는 고등학생들도 끼어 있었다. 삽시간에 3천여 명이 넘는 숫자로 불어났다. 이들은 도청 광장 쪽으로 밀고 들어갈 기세였고, 일부는 도청 광장까지 진출했으나 수가 적어 금방 쫓겨나기도 하였다.

민주 기사들의 봉기
버스와 택시를 세워놓고 젊은이들을 무작정 끌고 가는 과정에서기사들이 구타, 연행당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이에 분노한 기사들이 광주역과 무등 경기장에서 모여 대형버스와 트럭을 앞세우고 일시에 금남로로 몰려왔다. 금남로를 가득 메운 이들의 경적과 헤드라이트 불빛은 시위대에게 새로운 활력을 불어 넣어주었다. 가공할 무력으로 인한 패배감이 강한 연대의식과 자신감으로 전환되어 계엄군을 몰아내고 광주를 해방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시위대는 도청을 지키는 군경을 포위하고 접전을 계속했으며 시위는 밤까지 계속되었고 그 과정에서 21:40분 MBC 방송국, 21일새벽 00:45분 세무서 그리고 05:00분 KBS 방송국 등이 차례대로시위대에 의해 불탔다. 도청주변과 광주역 앞에서 치열한 접전을 벌인 시위대와 선무방송차를 따라 곳곳을 돌아다니는 시위대는 밤이 깊은 줄 몰랐다. 도청과 광주역을 제외한 전지역이 시민의 손에 장악되었고 이날 밤부터 모든 시외전화가 두절되었다.
도청과 광주역 양쪽으로 몰린 공수부대는 급기야는 시위군중을향해 집단 발포하기에 이른다. 광주역 앞의 시위대는 날이 밝자이때 사망한 두 구의 시체를 리어커에 싣고 도청으로 도청으로 분노에 찬 발걸음을 재촉하였다.

시위에서 무력항쟁으로
광주역에서 옮겨온 시위대와 이른 아침부터 모여든 시민들로 금남로 일대는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많은 희생자를 냈던 지난밤의 충돌로 시민들은 무장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껴 아세아자동차 공장으로 달려가 장갑차와 군용트럭등 많은 차량을 끌고 왔다.
이렇게 동원된 차들은 외곽지역을 돌며 시민들을 중심가로수송해 오기도 하고, 시외로 진출해 광주의 소식을 알리는 등 기동성을 발휘하기도 하였다 이때부터 본격적인 차량시위가 전개된다. 시위소식은 더욱 빠르게 퍼져나갔고 시민들 사이에는 이미강한 연대의식이 형성되어 가는 곳마다 주먹밥과 음료수 등을 제공해 주었다. 한편 도청앞에서 계엄군과 팽팽히 맞선 시위군중은 자신들의 대표를 선정해 계엄군의 철수를 요구하는 협상을 벌였다.
그러나 도지사를 내세워 기만적인 협상을 벌이던 바로 그시각, 도청에서는 헬기를 이용해 시체와 기밀문서를 빼돌리는 한편, 실탄이 지급되는 등 본격적인 학살준비가 진행되고 있었다.
한편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아래와 같은 담화문을 21일 오전 발표하였다.

<<    담 화 문    >>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 본인은 오늘의 국가적 위기에 처하여 국가 민족의 안전과 생존권을 보유하고 사회 안녕질서를 유지해야 할 중대한 책임을 지고 있는 계엄사령관으로서 현 광주시 일원에서 벌어지고 있는 작금의 비극적인 사태를 냉철한 이성과 자제로써 슬기롭게 극복해 줄 것을 광주시민 여러분의 전통적인애국심에 호소하여 간곡히 당부코자 합니다.
지난 18일 수백 명의 대학생들에 의해 재개된 것은 상당수의 타지역 불순인물 및 고정간첩들이 사태를 극한적인 상태로 유도하기 위하여 여러분의 고장에 잠입, 터무니없는 악성 유언비어의 유포와 공공시설 파괴, 방화, 장비 및 재산약탈 행위 등을 통하여 계획적으로 지역감정을 자극, 선동하고 난동행위를 선도한데 기인된 것입니다.
이들은 대부분이 이번 사태를 악화시키기 위한 불순분자 및 이에 동조하는 깡패 등 불량배들로서 급기야는 예비군 및 경찰의 무기와 폭약을 탈취하여 난동을 자행하기에 이르렀으며 이들의 극한적인 목표는 너무나도 자명하며 사태의 악화는 국가 민족의 운명에 파국적인 결과를 초래할 것이 명약관화한 것이 사실입니다.
본인은 순수한 여러분의 애국충정과 애향심이 이들의 책동에 현혹되거나 본의 아니게 말려들어 돌이킬 수 없는 국가적 파탄을 자초하는 일이 없도록 조속히 이성을 회복하고 질서유지에 앞장서 주시기 바라며 가정과 지역의 평화적 번영을 위하여 맡은 바 생업에 전념해 주시기를 충심으로 당부하는 바이며 다음과 같이 경고합니다.
1. 지난 18일에 발생한 광주지역 난동은 치안유지를 매우 어지럽게 하고 있으며 계엄군은 폭력으로 국내치안을 어지럽히는 행위에 대하여는 부득이 자위를 위해 필요한 조치를 취할 수 있는 권한을 보유하고 있음을 경고합니다.
2. 지금 광주지역에서 야기되고 있는 상황을 볼 때 법을 어기고난동을 부리는 폭도는 소수에 지나지 않고 대다수의 주민 여러분은 애국심을 가진 선한 국민임을 잘 알고 있읍니다. 선량한 시민 여러분께서는 가능한 한 난폭한 폭도들로 인해 불의의 피해를 입지 않도록 거리로 나오지 말고 집안에 꼭 계실 것을 권고합니다.
3. 또한 여러분이 아끼는 고장이 황폐화되어 여러분의 생업과 가정이 파탄되지 않도록 자중하고 판단성 있는 태도로 폭도와 분리될 수 있도록 함으로써 계엄군의 치안회복을 위한 노력에 최대의 협조 있기를 기대합니다.
1980년 5월 21일
계엄사령관 육군대장 이희성

계엄군 도청앞 집단 발포
12시까지 퇴각하겠다던 계엄군이 약속을 지키지 않자 분노한 시민들은 차량을 앞세우고 한 발 한 발 도청을 향해 나아갔다. 그때 장갑차 한 대가 전속력으로 시위대를 앞질러 분수대를 돌아질주, 전남대 쪽으로 빠져나갔고, 트럭에 실은 기름통을 불질러 밀어붙이는 일을 여러 차례 반복하자 전일빌딩으로 가로질러 포진해 있던 공수들이 분수대까지 밀려났다. 시민들이 이렇게 서서히 계엄군을 도청 쪽으로 밀어붙이고 있을 때였다. 오후 1시 정각, 도청 건물 옥상에 설치된 스피커를 통해 애국가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바로 그 애국가에 때맞춰 일제히 요란한 총성이 터져 나왔다. 공수부대원들이 '엎드려 쏴' 자세로 시민들을 향해 무차별 집단발포를 시작한 것이다. 전일빌딩, 상무관, 도청, 수협 전남도지부 건물 옥상에서 저격병들이 시위대열의 선두에 있는 시민들을 겨냥하여 사격을 실시했다. 사격은 메가폰으로 '사격중지 명령'을 내릴 때까지 약 10분간 계속되었다. 이로써 광주시민들이 간절하게 품고 있던 소박한 '사태의 평화적 해결에의 기대'는 물거품처럼 사라져 버렸다.
금남로는 피바다를 이루었고 시민들로 가득찼던 거리는 적막에 빠졌다 죽은 이들의 피와 부상자들의 신음만이 금남로를 울리고 있을 뿐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져 갔고,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사태앞에 시민들은 넋을 잃고 분노와 공포감으로 치를 떨어야만 했다.
이 집단발포로 몇 명의 시민이 살상 당했는지 아직도 정확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군의 발표와 1988년 이후 피해자 신고서 내용을 종합해볼 때 이곳에서 최소한 54명 이상이 숨지고 500명 이상이 총상을 입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시민군 탄생과 공수부대 철수
시민들은 무장을 서둘렀다. 계엄군의 총격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시민들도 총이 필요했다. 총을 확보하기 위하여 시위대중 일부는 광주 근교의 화순, 나주, 영산포, 장성, 영광, 담양 등지로 달려갔다.
화순 탄광에서는 광부들의 도움으로 다량의 다이나마이트와 뇌관이 확보되었고, 그 외 각 지역의 지서와 예비군 무기고에서는 카빈 소총 등이 획득되었다. 획득된 무기들은 즉시 광주시내로 반입되어 청년들에게 분배되었다. 이들 무장시위대는 광주시민들에 의해 자연스럽게 '시민군'으로 불렸고, 계엄군에 맞서 싸우는 '아군'으로 간주되었다. 무장한 시민군은 주로 광주 공원에 있는 시민회관을 본부로 삼았다. 무장한 시민들이 도청으로 끊임없이 압박해 들어가자 계엄군은 오후 5시 30분 총 퇴각이 결정되었다. 시민군 들에게 완전히 포위 당한 계엄군은 길 양옆에다 M60 기관총을 난사하면서 퇴각하기 시작하였다. 계엄군은 도청 뒷담을 넘어 철수했으므로 철수한지 한참이 지나도록 시민군들은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러다가 저녁 8시경 시민군 일부가 총을 쏘면서 도청 안으로 뛰어들면서 드디어 시민군은 교도소를 제외한 광주시의 전지역에서 계엄군을 몰아내고 승리를 쟁취하게 되었다

시민군 도청 장악 작전 상황실로
항쟁 5일째 되는 날이 밝았다. 지난 저녁에 그토록 날뛰던 계엄군들이 물러나고 시민군들이 도청을 장악하자 시민들은 그러한 현실을 눈으로 확인하고자 도청앞 광장으로 몰려들었다. 광주시민의 계엄군에 대한 초기저항은 수세적이고 자연발생적인 것이었으며, 생존권이 위협받는 상황에서 그에 대한 자기방어였으나, 실제로 그들의 항전이 담고 있는 역사적인 내용은 훨씬 깊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었다. 시민들은 모두 승리감을 만끽하며 높은시민정신을 보여주었다. 그들은 그동안의 혼란 속에서 길거리에 흩어져 있는 잔해들을 치워내고 시내를 깨끗이 청소하였다. 광주공원에는 지난밤의 지역방어전투에 참가했던 '시민군'들이 모여들어 시민군의 재편성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제부터 '시민군'이 해야 할 일은 자체조직과 병력을 통제하여 계엄군의 반격에 대비하면서 시내의 치안을 유지해야 하는 일이었다.
아침 일찍 다시 도청을 접수한 '시민군'은 우선 계엄군이 버리고 간 물건들로 어수선한 구내를 정돈한 다음, 도청을 본부로 정하고 1층 서무과를 작전상황실로 사용했다.

시민들의 질서회복과 공동체 실현
시민들이 광주시 전역을 장악한지 이틀째인 23일, 시 외곽지역에서는 간헐적으로 총성이 들려왔지만, 아직 시내는 승리의 여운이 채 가시지 않은 분위기였다. 시민들은 이날도 자발적으로 길거리를 청소했으며, 시장 주변 길가에서는 아침 일찍부터 길가에 솥을 걸고 밥을 지었다 그리고 밤새워 경계근무를 하던 시민군 들에게 앞다투어 식사를 제공했다. 이날부터는 상가들도 띄엄띄엄 문을 열기 시작하였고 오전 10시경 모여든 시민들로 도청앞 광장은 거의 5만여 명의 인파가 운집해 있었다. 도청앞 광장 맞은편 상무관에는 시체를 담은 관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으며, 관이 부족하여 아직 입관하지 못한 시체들도 무명 천에 덮여 있었다. 입구에는 분향대가 설치되어 향이 피워졌고, 수많은 시민들이 줄을 지어 분향하고 있었다.

시민들의 갈등은 점점 더 심화되고
도청 앞 광장에 모인 시민들은 23일 오후부터 매일 오후 2시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를 열었다. 노동자, 시민, 학생, 가정주부 등 각계각층 사람들이 분수대 위로 올라가 계엄군의 만행을 성토하고 앞으로의 수습대책을 토론했다. 또한 그때 파악된 피해 상황이 보고되었으며 장례준비를 위한 모금운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도청의 '수습대책위원회'는 시민들의 의사를 수렴하지 못하고 미온적인 태도로 계엄사와 협상을 벌이고 있었다. 일방적인 무기반납만을 주장함에 따라 수습위에 대한 시민들의 불만과 갈등은 점점 더 심화되어 갔다. 시민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불안해 하였으며 도청 내부에서도 함께 일하는 사람들을 믿지 못하고 경계하는 등 분위기가 살벌하였다. 시민군 중에도 무기를 반납하는 사람이 차츰 늘어만 갔다.

특전부대 미니버스를 향해 무차별 사격
도청에서 주둔하고 있던 제 7특전여단 35대대, 제 11특전여단 63,62, 61대대는 차례로 도청을 빠져나가 조선대학교에 철수하여 광주공원에서 작전하고 있던 33 대대와 함께 조선대 뒷산, 학동, 지원동을 거쳐 5월 22일 06:00까지 주남마을 뒷산에 집결하였다.
주남마을 뒷산에 집결한 부대는 대대별로 주둔비 사수방어에 용이한 주변의 주요 고지를 점령하여 지형적 잇점을 최대로 활용하면서 광주로부터 화순방향으로 나가는 외곽도로를 차단하였다.
제 7특전여단 33대대, 35대대와 제 11특전여단 61대대, 62대대,63대대 는 5. 22 - 5. 24 동안 주남마을에 주둔하여 외곽봉쇄 작전을 수행하였다. 특전부 대가 외곽봉쇄작전을 수행하고 있던 5. 23 07:00경 광주에서 화순방향으로 향하던 미니버스 1대가 도로차단 및 매복지역인 녹동마을 입구에 이르자 도로변 야산과 화약고 건물에 매복해 있던 특전부대는 무차별 사격을 가했다.
미니버스를 향해 사격을 가하는 과정에서 미니버스 탑승객 11명 전원이 학살되었으며 인근지역인 월남동, 소태동, 지원동 주민 10명이 부상을 당하였다. 또한 동일 13시경 동일지점을 통과하던 미니버스 1대에도 무차별 사격을 가해 미니버스 탑승객 중 15명이 학살되었으며 홍금숙 등 3명과 인근지역 주민이 부상을 당하였다.
부상당한 채 특전부대에게 생포된 홍금숙과 교련복을 입은 학생 청년 3명의 탑승객은 강제로 주남마을 뒷산 특전부대 주둔지로 끌려가 홍금숙만 헬기로 후송되고 2명의 남자부상자들은특전부대소령의 지시에 의해 현장에서 즉결 사살되었다.

5·18수습대책위원회 구성과 역할
도청 도지사실에서 일반수습위원회는 당초 15명 중 5명이 사퇴하고 전남대생 10명, 조선대생 10명을 추가해 30명으로 늘리는 한편, 수습대책위원장에는 윤공희 대주교를 추대하였다. 이때 수습위원으로는 고광표, 서정수, 조비오, 윤성원, 이홍길, 심홍순, 한완석, 박찬일, 문행두, 최한영 등이었다.
한편 금남로와 도청 주변에 모여든 수많은 시민들은 도청앞에 모여 무엇인가 만족할만한 조치가 발표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낮 12시 30분경 신부, 목사, 변호사, 교수, 정치인 등 20여명으로 5·18 수습대책위원회가 결성되었다.
이어서 오후 9시경 학생들을 중심으로 [학생수습대책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유지급 인사들의 일반수습위는 주로 계엄사 측과의협상활동을 했으며 학생수습위는 실질적인 대민업무를 맡아 보게되었다.
학생수습위는 장례반, 홍보반, 차량통제반, 무기 수거반으로 나누어 당일 계엄사에 요구한 7개항의 요구조건을 홍보하고 무질서하게 돌아다니는 차량을 통제했으며 엉겁결에 총을 들었다가 버린 총이나 총을 놓고자 하는 사람들한테서 총을 받아 300여정을 수거했다.
수습위는 이날까지는 혼연일체가 되어 활동했으나 계엄사가 요구 조건을 수락하지 않고 무장해제를 요구하는 데서부터 두 수습위 모두 강온파로 나뉘어 대립하기 시작하였다.
시민 수습위의 온건파(사실상 투항파)는 축출되고 학생수습위는 24일부터 강경파(투쟁파)가 주도권을 장악했다.

 

도청앞 5만여 군중 전두환 화형식
비가 내리는 가운데 아침부터 운집한 5만여 군중이 도청앞에서 전두환 화형식을 비롯한 성토를 시작하며 대대적인 시가행진을 벌였다.
이 궐기대회에서 어느 한 서점에서 제작한 전두환 화형식을 하기도 하였으며 또한 이 대회에는 계층을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많은 시민이 참가하였다. 대회가 한창 진행중인 16:30분 경부터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졌다. 시민들은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미쳐 우산을 준비하지 못했음에도 자리에서 이탈하지 않고 계속 비를 맞으면서 대회를 지켜보았다.
한편 계엄분소에 다녀온 수습위는 계엄사측으로부터 약속 받은 8개 사항을 인쇄한 '계엄분소 방문협의 결과보고'라는 전단을 배포하였다. 이날도 도청내에서는 화염방사기로 그을린 시체가 여러 구 발견되었으며 시내 외곽에서는 계엄군과 시위대가 서로 바리케이드를 쳐놓고 대치하며 산발적인 교전이 있었다. 광주 시가지에 수습대책위와 계엄군의 협상내용을 전단지로 인쇄한 유인물로 발표하였다. '계엄군의 과잉진압을 인정하며, 연행자 9백27명을 제외하고 모두 석방했으며 보상계획 수립과 치료대책 완비, 사실보도에 대한 노력, 폭도나 불순분자라는 용어사용 중지, 비무장 민간인의 시외통행, 사태수습 후 보복금지 등을 약속하였다.
계엄분소장은 이날 오전, 전날 오후 6시 개통된 광주 KBS방송을통해 특별담화를 발표하였다. '무기 소지자 중 광주시내 거주자는 국군통합병원에 반납토록 하고 기타 지역은 군부대와 경찰서에 반납하라'는 내용과 이 담화는 계속 '무기를 반납하면 일체 불문에 부치겠으며 만약 시한까지 반납하지 않아 중대결심을 하는 괴로움을 없게 하도록 해달라'는 것이었다. 대부분의 시민들도 무기반납을 원했으며 시위대들도 전일빌딩에 자진 '무기회수반'을 설치 운영하였다.
한편 시민대책위원인 신부, 변호사, 목사 등이 화정동에서 무기를 휴대하고 군과 대치중이던 시민군 38명과 지원동에서 13명 등을 도청으로 데리고 와 울면서 설득. 1시간 만에 무장 해제 시키는데 성공하였고 그러나 화정동 등 시외로 빠지는 6개 외곽도로에서는 아직도 일부가 무장, 대치하고 있었고 특히 화정동 공단입구에서는 인근 서광제재소에서 옮겨온 대형 원목 1백여개와 버스, 트럭, 지프차 등으로 바리케이드를 치고 20여 무장대원이 지키고 있었으며 시내로 들어오거나 밖으로 나가는 시민을 신분 확인후 통과시키고 있었다.
낮 12시가 지나면서 사태수습은 급진전 선회하여 총을 들고 도청을 경비하던학생들이 총기를 회수반에 내주었고, 학생, 시민들이 착용하고 있는 헬멧, 방석복 등 군경복장 및 장비도 폭도로오인 받을 것을 우려하여 모두 반납하였다.

제 2차 민주수호 범시민궐기대회
시민수습대책위원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학생, 청년들에 의해 '제2차 민주수호 범 시민궐기대회'가 열렸다. 이 대회 이름을 궐기대회라는 딱딱한 용어를 피해 '자유성토대회'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 대회는 도청 광장과 금남로 그리고 인근 도로를 꽉 메운 10만에 가까운 시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이 대회가 진행되는 동안 스피커 소리가 끊기기도 했는데, 주최측은 도청에서 방해한다고 비난하기도 하였다.
궐기대회 도중 마이크가 자꾸 꺼져버렸다. 그때는 앰프시설이 좋지 않아서 그런 줄 알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궐기대회가 한참 진행되고 있을 때 정보원이 도청으로 들어가 방송시설을 분해해서 들리지 않도록 한 것이다.

시민군 등장과 민주시민 강령
광주시의 표정은 점차 안정을 되 찾아가는 듯했으나, 시 외곽 지역에서 들려오는 간헐적인 총성 때문에 여전히 긴장감을 씻어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이날 날이 밝기가 무섭게 새벽 6시부터 남녀 고교생 7백여 명(여학생 50명)은 시내 전역의 청소작업에 앞장섰다. 이에 대해 수많은 시민들이 호응, 청소를 함께 했으며 대다수의 상가들도 문을 열기 시작했다. 도청을 중심으로 한빌딩 앞에는 전날보다 더 많은 대자보가 나붙기 시작했다. 이날 처음으로 전일빌딩 앞에 '민주시민 강령'을 공고하면서 '시민군'이란 말이 등장하였고 4개항으로 된 강령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었다.

1) 시민은 시민군을 믿고 적극 협조합시다.
2) 시민군은 위장된 계엄군 및 불순분자를 주의합시다.
3) 질서회복에 힘씁시다.
4) 평소 생활로 복귀합시다.

학생, 청년수습위 민주인사들과 만남
5월25일 오전 11시경 학생, 청년 수습위는 민주인사들의 의견을 모으기 위해 광주시내 YWCA 2층에서 회의를 개최하였다 당시 참석했던 민주인사 를 보면 홍남순(변호사), 이기홍(변호사), 이성학(장로), 송기숙(전남대 교수), 명노근(전남대 교수), 장두석(신협 이사), 윤영규(장로), 조아라(YWCA 회장), 이애신(YWCA 총무), 박석무(대동고 교사), 윤광장(교수) 등이 참석했고, 학생.청년 대표로는 정상용과 윤상원이 참석하였다. 명노근 교수는 '더 이상의 시민희생을 막기 위해 무기를 회수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박석무는 '그것은 너무나 굴욕적인 협상이다. 최소한 김대중을 비롯한 구속인사들이 석방되고 폭도라는 말도 취소해야 협상이 되지 않겠느냐'고 발언을 하고, 이기홍은 '강경파 학생들이 도청으로 들어가서 학생위원회와 경비원을 장악하고 김대중 석방 할 때까지 투쟁을 해야 한다 우리 재야인사들도 도청 수습대책위원회를 장악할 것이니 염려말고 투쟁하라. 다른 것은 몰라도 김대중 석방은 관철되어야 한다'고 말하자, 홍남순도 이를 적극 지지하며 반복하여 이를 강조하고 시민대표를 장악하겠다'고 말하여 정상용, 윤상원으로 하여금 도청 폭도조직을 장악하도록 하고 최종적으로 '김대중 석방', '계엄령 해제', '정치일정 단축'을 정부에 요구하여 관철될 때까지 강력하게 계엄군과 대치하여 투쟁하기로 결의하였으며 학생. 청년측은 '민주화를 앞당기고 지금까지의 투쟁을 무의미하지 않게 하기 위해 계속 싸워야 하며 무기반납은 할 수 없다'고 반대하고 나섰다. 특히 학생.청년들은 '싸움은 우리가 할테니 어른들은 새로운 도청 수습위에 합류하여 우리들을 지원해 달라'고 호소하였다.

제3차 민주수호 범시민궐기대회
무기반납 식을 도청 앞 광장에서 갖기로 했던 것이 백지화되고 다시 도청앞에서 제3차 시민궐기대회가 약 5만명의 인파가 운집한 가운데 개최된 궐기대회에서 애국가를 부른 후 사망자에 대한 묵념과 상황보고에 이어 우리의 결의, 우리는 왜 총을 들 수밖에 없었는가, 껍데기 정부와 계엄당국을 규탄한다, 희생자 가족에게 드리는 글, 전국 종교인에게 보내는 글, 전국 민주학생에게 보내는 글을 순서대로 낭독하였다. 제3차 시민궐기대회 마친 후 시민과 학생들은 검정 리본 달고 가두시위에 참가하였고 '계엄 철폐하라'는 등 플래카드와 구호를 외치며 도청앞을 출발, 금남로, 광주역, 광주고속버스터미널, MBC 등을 돌아 도청 앞 광장에 집결하였다.

수습대책위 시민생활 정상화에 노력
새로 구성된 항쟁지도부는 그 명칭을 수습대책위원회에서 민주시민투쟁위원로 바꾸고 무장투쟁을 준비해 가는 한편, 시민들의 민원사항 등을 처리하기 위해 행정체계를 정립해 갔다. 아침 일찍부터 각 부서별로 업무를 분담하여 시민생활 정상화에 노력했으며, 기동타격대로 재조직된 무장병력은 시내순찰과 계엄군의 동태 파악, 치안유지 등의 임무를 부여받았다. 26일 새벽 계엄군이 탱크를 앞세우고 농성동 한전 앞까지 진입했다는 소식이 도청 상황실에 보고되자 전 시민군에 비상령이 떨어졌다.
계엄군은 세 차례에 걸쳐 계속해서 최후통첩을 보내왔으며, 계엄군의 광주시내 진입은 기정 사실화되어 갔다. 이날은 오전과 오후 두 차례에 걸쳐 시민궐기대회를 개최했다. 시민들은 심한 고립감과 불안 속에 밤을 맞았고 도청에 남은 사람들은 끝까지 광주를 지키겠다는 비장한 각오로 최후의 항전을 대비했다. 기동타격대 요원과 투쟁위원회, 그리고 마지막까지 남은 예비군, 학생 등으로 조를 편성하여 도청 방어작전에 돌입했다. 계엄군이 들어오는 길목에도 병력을 배치하였으며, 이미 지역방위군이 편성 운영되는 곳도 있었다.

시민수습대책 위원들의 죽음의 행진
계엄군이 농성동에서 탱크를 앞세우고 시내로 바짝 압축해 들어오고 있다는 제보를 접수한 수습위는 도지사실에서 긴급회의를 열고, 계엄군이 진입하면 광주는 피바다가 될 것이 자명하다며 '17명이 총알받이로 나가 계엄군의 시내진입을 일시적이나 막자'고 결의 수습위원을 중심으로 농촌진흥원 앞까지 죽음의 행진을 벌였다. 진입현장을 목격한 이들은 탱크 앞에 드러누워 '우리 먼저 깔아뭉개고 지나가라'며 목숨을 걸고 계엄군의 시내진입을 저지하였다.

제 4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
계엄군의 진입 소식이 전해지자 궁금한 시민들이 이른 아침부터 도청 앞 광장으로 모여들어 '제4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가 임시로 개최되었다. 계엄군측의 협상을 위반한 사실, 그들의 시민 이간 책동을 성토하였으며 16일부터 26일까지의 시민군의 투쟁보고와 계엄군과 허수아비 최규하 과도정부에 대한 성명서 낭독, 계엄군에게 보내는 글 향토예비군에게 알리는 글 고등학생에게 알리는 글 전 언론인에게 보내는 글대한민국 국군에게 보내는 글이 채택되었다. 3만여 군중이 모인 이날 궐기대회는 엄태주의 사회로 실시되었다.

5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
오후 3시 제5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가 도청 앞 광장에서 개최되었다. 이 대회에서는 계엄군에 대항하여 끝까지 싸워야 한다는 시민 5천여 명이 화정동 대치지점까지 시위를 한 후 도청으로 돌아왔다. 이날 궐기대회 집행부는 성명서를 낭독하던 종전의 대회와는 양상을 달리하여 시민행동강령을 채택하여 발표했다.
5차 대회 때는 굉장히 많은 시민들이 연단에 올라가 계엄군의 만행에 대한 체험담과 목격담을 토로했다. 또 해방 후 현재까지의 정치, 경제적인 문제점 등을 성토하기도 했다. 한 아주머니는 연단에 올라가서 교도소 부근에서 공수들에 의해 가족이 몰살당한 얘기를 하면서 말을 제대로 잇지도 못하고 통곡을 하였다.
어떤 여교사는 현 상황에서 자신이 해야 될 일이 무엇이냐고 진지하게 물었고 또 시민궐기대회에 처음으로 참가했다는 아주머니는 폭도와 깡패들이 난동을 부린다는 TV 보도를 듣고 무서워서 나오지 않았는데 직접 와보니 전혀 다르다는 말을 하면서 시외지역이나 변두리에 와서도 홍보를 해달라는 부탁의 말까지 하고 연단을 내려갔다. 3:00에 시작된 제5차 궐기대회가 거의 끝나갈 5시 30분 무렵, 30대 초반의 한 고교교사가 연단에 올라와, '나는 학생수습위의 한 사람으로 고생하는 후배들을 옆에서 보고 있을 수만은 없어 주책없이 끼어 들었습니다. 내일이면 여러분을 만날 수 없을지 모르기 때문에 신분을 밝히겠습니다' 하고 말하기도 하였다.
궐기대회가 거의 끝날 무렵, 상무대에 근무하는 방위병으로부터 내일 계엄군이 쳐들어온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군병력 증강 소식과 계엄군의 사기앙양을 위한 돼지고기 파티가 예정되어 있다는 말을 들었다. 또 상무대에 근무하는 장교 부인이 남편으로부터 며칠 동안 집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말과 함께 위험하니까 절대 집 밖에 나오지 말라는 말을 통해서 짐작한 것이다.
우리는 왜총을 들 수밖에 없는가 등의 성명서를 낭독하고, 이 대회가 끝나자 목숨을 걸고 끝까지 싸워서 광주를 지켜야 한다고 결의하였다.

계엄군의 충정작전과 최후의 항쟁
외곽지역의 시민들로부터 계엄군이 쳐들어온다는 제보가 속속 들어오고 도청 행정전화가 끊기자 도청 상황실은 술렁거리기 시작 하였으며 홍보부 에서는 시민들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 한다고 결정하고 광주시내 전지역을 돌면서 마지막 가두방송을 하였다"시민 여러분, 지금 계엄군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형제자매들이 계엄군의 총칼에 숨져가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일어나서 계엄군과 끝까지 싸웁시다." 애절한 여자의 목소리가 정적을 가르고 울려 퍼졌다.
공수부대의 특공조는 26일 오후 6시에 도청의 항쟁지도부를 '소탕'하기 위한 예행연습을 완료했다. 이들은 밤 11시경 이동을 시작, 27일 새벽 1시 30분을 전후하여 조선대 뒷산에 집결, 작전계획을 최종 점검한 후 3시와 3시 30분경에 각기 도청, YWCA, 전일빌딩, 관광호텔 등 목표지점을 향해 은밀히 침투해 들어갔다.
새벽 4시가 지나면서 총성이 울리기 시작하였다. 도청의 시민군은 도청 전면과 측면에 2∼3명씩 1개조로 담장을 따라 배치되었고 도청 안에는 1층부터 3층까지 유리창 옆에서 광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여단 특공조는 4개조로 나뉘어 도청을 포위했다. 도청 뒷담을 뛰어 넘어온 특공조는 4개조로 나뉘어 도청을 포위하였다. 도청 뒷담을 뛰어 넘어온 특공조가 맹렬히 총을 쏘아대자 곧이어 사방에서 총탄이 쏟아졌다.
특공조는 도청 내부로 돌격하여 각 방의 문을 걷어차면서 닥치는 대로 총을 쏘았고 도청은 삽시간에 아비규환을 이루었다. 총소리와 비명이 난무한 가운데 인기척이 나는곳에 무조건 총격을 가했다. 그야말로 '폭도소탕작전', 바로 그것이었다.
동이 터오기 사작하는 오전 5시 10분경 이미 계엄군에 의해 완전히 진압 당했고 도청을 마지막으로 최후의 항전은 끝났다. 완전히 소탕했음을 확인한 3공수 특공조는 20사단에게 도청을 인계한 후 광주비행장으로 돌아갔다.
한편 라디오 방송에서는 폭도들은 투항하라', '도청과 광주공원도 군이 장악했다', '너희들은 포위됐다', '총을 버리고 투항하면 생명은 보장한다', KBS 광주 방송은 군이 시내에 진입했음을 알리는 이 같은 방송을 되풀이하였고 간간이 행진곡도 들려줬다.
항쟁의 피로 물든 아침이 밝아 왔다. 생존자는 '총기 소지자' '특수폭도' 등으로 분류되어 군부대로 이송되었다. 계엄군은 작전을 개시한지 약 1시간 30분만에 모든 것을 마무리짓고 항쟁을 진압하였다.
그리고 '80년 5월 광주민중의 무장투쟁도 열흘간에 걸친 역사의 막을 내렸다.

피로 물든 아침은 밝아오고
80년 5월의 광주 하늘을 붉게 물들이며 거칠게 타오르던 5·18민중항쟁의 불꽃은 27일 새벽 계엄군의 '충정작전'과 함께 쓰러져버렸다.
그러나 그 뜨거운 불씨마저 짓밟혀 버린 것은 아니었다. 그 불씨는 혹독한 시절에도 꺼지지 않고 더욱 빛을 발하면서 그 날 이후 살아남은 모든 사람들의 가슴에 결코 꺼지지 않는 영원한 민주화의 횃불로 지켜주고 있다.

-- 5.18민주항쟁 부상자회 홍보국장 박영섭 씀 --
홈 > 5·18역사 > 피해자현황
구분 신청(명) 취하(명) 기각(명) 인정(명) 지급액(백만원) 비고(중복인원)
7,189 120 2,063 5,006 228,369 (694)
사망 218 14 50 154 17,042
행불 363 16 277 70 9,048
상이 5,088 47 1,620 3,193 172,388 (22)
기타 1,520 43 116 1,589 29,891 (671)
※ 중복지급자 694명을 제외할 경우 실제 인정인원수는 4,312명임
구 분 신청(명) 취하(명) 기각(명) 인정(명) 지급액(백만원) 비고(중복인원)
2,693명 21 448 2,224명 142,792
사망 190 12 24 154 17,042
행불 148 2 108 38 4,914
상이 2,290 4 315 1,971 120,332
기타 65 3 1 61 504
구 분 신청(명) 취하(명) 기각(명) 인정(명) 지급액(백만원) 비고(중복인원)
2,791 83 865 1,843 39,226 (649)
사망 15 2 13 - -
행불 117 9 99 9 1,129
상이 1,483 36 682 765 28,410
기타 1,176 36 71 1,069 9,687 (649)
※ ( )은 90년에 상이로 인정받고 93년에 기타(수형·연행훈방)로 인정받은 자
구 분 신청(명) 취하(명) 기각(명) 인정(명) 지급액(백만원) 비고(중복인원)
837 9 358 470 28,047 (28)
사망 10 - 10 - -
행불 54 2 35 17 2,208
상이 494 3 269 222 12,798 (12)
기타 279 4 44 231 13,041 (16)
구 분 신청(명) 취하(명) 기각(명) 인정(명) 지급액(백만원) 비고(중복인원)
868 7 392 469 18,304 (17)
사망 3 - 3 - -
행불 44 3 35 6 797
상이 821 4 354 235 10,848 (10)
기타 - - 0 228 6,659 (7)
※( )은 90,93,98년에 상이 또는 기타로 인정받고 2000년에 기타 또는 상이로 인정받은 자
구분 서울 대전 대구 부산 광주
사망자 207 23 2 - 3 179
부상자 2,392 453 44 38 62 1,795
기타희생 987명 316명 26 30 33 582
小 計 3,586명 792명 72명 68명 98명 2,556명
※ 서울(북부, 남부, 수원, 인천, 의정부, 춘천, 강릉) / 대전(홍성, 충주, 청주)
    부산(울산, 마산, 진주, 제주) / 광주(익산, 전주, 목포, 순천)
구분 본인 유족
사망·행불자 207명 - 207명
부상자 2,392명 2,252명 140명
기타희생자 987명 966명 21명
3,586 3,218 368
1급 33명 2급 13명 3급 19명 4급 18명 5급 43명
6급 18명 7급 67명 8급 63명 9급 122명 10급 111명
11급 108명 12급 450명 13급 88명 14급 1,099명
합계 2,252명

출처 : 5.18 민중항쟁 80518
글쓴이 : 새벽이슬 근창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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