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딸이 바라보는 아빠의 상
아빠~~^^제가 2년 동안 거의 매일 가는 인터넷 커뮤니티가 있어요. 모두들 부모님에 대한 이야기들로 분위기가 무르익을 무렵..저도 조심스레 아빠 이야기를 올려놓은 적이 있지요. 반응 요? 좋~~앗지요!! ^^이 글에서처럼... 정말 아빠를 사랑하구요. 아주 많이 존경한답니다. 아시고 계셨죠? 쑥스럽네요. 고민하다가... 큰 딸이 아빠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려드리고 싶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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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아버지 세대는 참... 힘든 시절을 보내신 것 같다. 가난한 시절에 태어나, 너나 할 것 없이 정도의 차이일 뿐.. 힘들지 않았을까 싶으니... 아래 제인 언니께서 우리 집을 유복한 가정이라 표현하셨는데..글쎄?? 우리나라 중산층의 개념이 어느 범위에서 정해지는지 불명확하지만, 우리 친정은 대략 중산층이라 생각하며 사는 정도인 것 같다. 적어도 현재는.... 한국에선 돈이 많은 사람도, 그리고 돈이 없어서 너무 힘든 사람도 둘 다 많다.
중간층이 두터워야 안정된 사회인데, 갈수록 빈부의 격차가 심해지니.. 여하간 우리 집은 그럭저럭 아버지가 회사 다니시며 남의 집에 돈 꾸러 다니지 않을 정도로 살았던 것 같다. 그래도 맏딸인 내 기억엔 엄마가 돈 걱정 하시며 꿍 시렁 거리시던 목소리가 귀에 쟁쟁하기도 하고... 공부와 연구소 일 밖에 모르셨던 아빠는 세상 물정에 어두웠고... 돈 관계는 더더욱 잼병이셨다.
집값이 얼마인지, 어느 동네에 가야 학교는 좋고 살기는 좋은지 도통 관심이 없던 아빠 덕분(?)에 엄마는 지극히 현실적인 분이 되어야 했고, 알뜰살뜰 살림하며 옷 한 벌 안 사 입고 저축을 하셔서 내가 초등학교 6학년이던 해에 강남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아마도 그 이후로는 그런대로 살기에 문제가 없었던 것 같으나.. 빚 갚고 3남매 키우느라 왜 힘이 들지 않았을까?! 아이쿠.. 자꾸 글이 이상한 쪽으로 흘러가네.. ;;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작년에 아빠는 회고록을 출판했다. 평소에 글 쓰기를 좋아하셔서 이미 책을 내고도 남을 분량의 글들이 모아져 있었지만, 다시 정리하고 간추리셔서 무려 400 쪽짜리 책을 내신 것이다.
제목은 순서만 봐도 어떤 글들이 있는지, 어떤 삶을 사셨는지 대략 짐작이 되는데..
첫째 묶음: 흐르는 인생사
1. 어린 시절
2. 학창 시절
3. 군대 생활
4. 가족 이야기
5. 이런 저런 이야기(처남, 친구, 할머니, 올림픽과 월드컵, 전라도 음식예찬, 위기에 선 우리 등)
둘째 묶음: 과거 속의 미래
1. 평범한 월급쟁이
2. 한국 표준원전 원자로 설계기술 자립
3. 월성원전 설계 사업 및 기술 자립
4. 원전 건전성 평가 사업
5. 방사성 폐기물 관리사업 추진
6. 사업이관
셋째 묶음: 또 하나의 목표
1. 인생은 마라톤
2. 직장봉사인의 로타리 클럽
넷째 묶음: 하느님과의 만남
1. 기도
2. 사목 활동
3. 하느님과 함께
다섯째 묶음: 글 모음, 성지 방문
평소에 아빠와 대화가 많은 편이라 아빠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도 막상 이 책을 읽고 나니 작은 충격을 받았다. 아하!! 아빠는 이런 생각으로 이렇게 인생을 사셨구나. 이런 상황에서는 이렇게 대처하시며 최선을 다하셨구나. 이럴 때엔 뼈저리게 후회도 하시고 반성도 하셨구나... 그래서 감사한 마음부터 들었다..두고두고 아빠를 더 잘 기억할 수 있게 해 주셔서...
아빠는 경상도 진주 근교의 시골에서 7남매의 막내로 태어나셔서7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그야말로 시골의 가난한 집안의 홀어머니 밑에서 힘들게 자라셨다. 그나마 있던 전답도 6.25 때 북한군에게 모두 뺏기고 할머니는 바느질과 길쌈으로 끼니를 해결해야 했다.
그 당시 중학생이던 큰 아버지는 학업을 중단하셔야 했고 그 아래 둘째, 셋째, 큰아버지들도 고등학교를 마치자 생업에 뛰어드셔야 했다.당연히 딸들인 고모들은 그보다도 더 공부를 할 수 없었고...아빠는 초등학교도 일년 늦게 8살 때 들어갈 수 있었고..중학교는 장학금을 받고 낮에는 일을 해야 했으므로 마산에 있는 어느 야간 중학교로 가게 되셨다.
바로 위의 큰 아버지와 둘이서 짐을 싸 들고.. 산 모롱이 너머 손을 흔드는 할머니를 뒤로 한 채.. 큰 아버지는 낮에는 버스 차장도 하셨다 한다.. 지금은 부산에서 제법 큰 무역회사의 사장님으로 실업인 협회 회장까지 하시는데....진정한 자수성가의 표본이시다..
아빠는 그렇게 야간 중학교를 조금 다니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장학금을 주겠다는 마산공고 부설 중학교로 진학하셔서 남의 집에 입주 과외선생이 되어 이 집 저 집을 전전하며... 고등학생이 고등학생을 가르치는 웃지 못할 과외선생을 몇 년간 하며 대학에 들어가게 되었다.
돈이 없어 야간 중학교로, 다시 공고로 진학하면서도 공부에의 꿈을 버리지 못하고.. 매진하셔서 결국은 그 당시에 새로 소개되었던 학문인 원자력 공학을 공부하게 되셨다. 우리 나라에선 거의 초창기 멤버이신데...
여하간.. 끊임없이 도전하는 그 정신으로 나중엔 미국에서도 학업을 계속하셨다... 대학 때는 차비가 없어서 왕복 세시간 거리를 매일 걸어 다니고, 옷이 없어서 군복을 염색해서 입고 다니셨다니... 겨울에는 코트 살 돈도 없었다는데.. ㅜ.ㅜ 대학 시절 사진을 보니 친구분들은 제법 근사한 겨울 옷들을 입고 계시던데 유독 아빠만 허름한 옷차림으로 추워 보이셨다.
대학원생이던 아빠는 엄마랑 갑자기 연애를 하시면서 집안의 반대 속에 결혼을 하셨고..단칸 월셋방에서 나를 낳아 키우셨다고 한다. 거짓말 조금 보태면 셋이 누우면 더 이상 공간이 없다는 둥, 아빠 키가 작은데도 방문이 잘 안 닫혔다는 둥..그런 추억들을 웃으면서 말씀 하시곤 하셨다.
어린 내가 눈치가 없어 주인집 방에서 들리던 티브이 소리에 몰래 구경하다 구박(?)을 받곤 해서 속절없이 눈물을 흘렸다는 얘기, 찬장이 없어서 사과궤짝을 놓고 그릇 얹어놓고 살림을 시작했다는 얘기..학생 뒷바라지 한다고 엄마는 돌쟁이 나를 업고 양말을 팔러 행상도 하셨다 한다.. 도저히 믿기지 않는 얘기들뿐이었다.
그때 그 고생을 함께 나누셔서 인지.. 두 분의 금실은 하늘을 찌른다. 엄마를 공주님 모시듯 하는 아빠.. 이제서야 조금 이해가 될 것도 같고.. 아빠의 글을 읽으면서.. 예전에 고생하시며 힘들에 살았단 얘긴 대충 들었었지만 이렇게 피눈물 나는 과정이었나.. 새삼 존경스럽기도 하고 하려고 마음 먹으면 안 되는 게 없구나 싶은.. 교훈도 얻게 되었다.
흔히들 사람들은 얘기한다. 고생을 너무 많이 하고 힘들게 산 사람들은 꼬이기 쉽다고.. 매사에 부정적이기도, 비관적이기도 쉽다고 말이다. 그러나 난 아빠의 선하고 환한 미소를 볼 때면 그 말도 맞는 것 같지는 않다.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살아오신 아빠지만, 언제나 밝고 긍정적이며 희망적이시다. 아마도 내 성격의 대부분이 아빠의 이런 점을 닮지 않았나 싶은데...아무리 힘든 상황에서도 더 힘을 내야겠다는 생각..그래서 이래저래 많이 한다.
우리가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고생을 했지만, 고생이라고 여기지 않는 그 마음가짐을 배워야겠다는 다짐... 불현듯 떠오르는 아빠 생각.. 꼭 퇴근하시고 오시면 어렸던 우리들을 목욕 시키시고(지금도 기억이 난다 ^^) 센베 과자나 귤 몇 개가 들어있는 봉지를 들고**야~!! 하고 크게 부르시며 들어오시곤 했다.
아빠 손엔 하루도 빠짐없이 우리들 간식거리가 들려 있었는데..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도 큰 정성이셨던 것 같다. 싱글벙글 님처럼 나도 아빠 구두를 닦아드리고 100원씩 받았던 기억도 나고..^^ 어렸을 땐 아빠가 머리도 땋아주시고, 등에 업혀 말 타기 놀이도 하고, 아빠도 찌찌 있다고 먹어보라고 장난도 치신.. ㅋㅋ 아빠는 나를 늘 “우리 예쁜씨!”라고 불렀다..
그런데 며칠 전 나도 모르게 딸애 서영이를 보고 꼭 끌어안는데 그 말이 튀어나오는 거였다."아유 우리 예쁜씨~!!"굴렁쇠님(남편 상하씨예요)은 무슨 소리 하나 싶어 쳐다보고.. ㅎㅎ 정말... 사람은 사랑을 받은 만큼 돌려줄 수도 있게 되나 보다. 나도 모르게 내 무의식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던 아빠가 나를 불러주던 그 호칭을 다시 내가 내 아이에게 불러주고 있으니... 참으로 묘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아빠에게 감사한다. 그 분께서 주신 사랑이 자양분이 되어 내 삶을 다져가게 하였고, 내가 다시 그 사랑의 일부라도 내 아이에게 나누어 줄 수 있게 되어서 말이다. 평생을 가족, 일, 하느님.. 이렇게 세 개의 트라이앵글 속에서 살아 오신 분.. 나도,, 그렇게 살고 싶다, 아빠를 닮아가면서...
지난 성탄절에도 아빠는 전화를 하셨다."지금 막 자정 미사 다녀와서 식구들과 와인 한 잔 하면서네 생각나서 전화했다.. 메리 크리스마스! 아빠가 방금 성탄 카드 보냈으니 읽어봐라.."늘 이런 식이다. 나는 뒷북만 친다..
마음은 있는데 아빠의 실천력에는 따라가질 못한다. 어느덧 시댁에 더 신경을 쓰고 살아서일까? 친정은 그저 맘 편한 보물 주머니 같다. 내가 풀러 보고 싶을 땐 언제든지 풀면 뭔가가 날 기쁘게 해주는.. 내년엔 사업 준비로 고민이 많은 우리들에게 미리 선수를 치신다.
사업계획서를 제출하면 투자를 할 수도 있다고.. 시집간 딸이 친정에 돈 빌려 달라는 말, 죽어도 못하는 거 아시고 미리 손을 내미신다. 그러면서 이러신다. 절대 주는 거 아니라고.. 은행 이자 받으실 거라고.. ^^설령 투자 안 하시다고 맘이 바뀌었다 해도 상관 없다. ㅎㅎ 그렇게 우릴 걱정해주시는 부모님이 계신 것만으로도 감사하니까...
작년 다르고, 올 해 다르고.. 이상하다. 부모님을 생각하면 눈물이 날려고 하고.. 마음이 찡하다. 그리고 어느덧 늙어가시는, 자식 앞에서만 강하신 그 분들이 너무나 고마울 뿐이다. 부모님에게도 가질 수 있는 서운한 마음들..생각해 보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 그 분들이 없으면 우리가 이 세상에 있기나 하나?? 아무래도 밖에 비가 오는 탓인가 보다.
아이들도 모두 잠이 든.. 오후에 오랜만에 속 깊은 얘기를 털어놓으니.. 쑥스럽고,,, 무안하고,,, 아무래도 하루와는 늪이다 늪!! 한 번 빠지면 도저히 헤어나올 수도 없고 마음에 있는 말들 줄줄이 불어버리게 되는 하여튼 이상한 곳이다...
*쓰면서 또 드는 걱정 하나.. 자영님처럼, 니나님처럼 아빠가 일찍 돌아가신 분들께 미안한 맘이 들어요. 그렇지만... 그냥 이런 사랑.. 우리가 또 여러 사람에게 나눠주면 되지 않을까 해서요..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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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한번 읽었는데요.. 또 눈물이 나네.. 이상하다.. 그쵸?? 아빠가 우리 아빠인 게 정말... 좋아요~~!! 엄마가 샘 난다고 하시면요.. 담에는 엄마 순서라고 말씀해 주세요.
2007.05.03 원본: http://blog.kosen21.org/blog/bin/blog/index.jsp?sCmd=post_view&postIndex=56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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