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1. Dr. Sam Lee/15_80년5월18일

인도, 네팔 연수 여행기(2007.9.3~9.11)

忍齋 黃薔 李相遠 2007. 10. 13. 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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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네팔 연수 여행기(2007.9.3~9.11)

- 김난수


<9월3일, 첫째 날>

님에게 잘 다녀온다는 소식 전하고 짐을 싸들고 일찍 집을 나선다. 집 앞 1000원 김밥 가게에 들어가 아침을 때우고 나머지 8줄을 들고 택시를 이용 인천공항 행 버스를 탄다. 대전에서 선발된 임나리씨와 박은영씨가 반갑게 맞이해준다.


차창가의 경치를 즐기며 어느덧 인천공항에 도착, 오전 11시다. 대전에서 3시간 걸렸다. 공항에 미리 도착한 일행과 합류, 반가운 인사를 나눈다. 싸가지고 간 김밥을 나눠먹었다. 다들 고마워한다. 잠시 후 함께 연수에 참여 할 27명의 인원을 확인한 뒤에 수하물 접수 및 표 확인 후 출국장에 들어간다. 앞으로 비행기 출발시간은 2시간 정도 남았다. 끼리끼리 ,조별로 상의한 후 선호하는 식당에 들어간다. 햄버거로 점심을 해결하고 면세점에 들른다.


고향 친구가 부탁한 화장품을 사기위해 가게에 들어간다. '컴팩트 패드'를 사는데 괜히 우리 님이 걸린다. 추가로 주문 구입한다. 기분이 좋다.


오후 2시쯤 인도 행 비행기에 탑승한다. 창가에 자리가 배정되는 행운(?)을 누린다. 인도항공기로 승무 안내원들의 피부가 예상보다 까맣다. 기대했던 것만큼 예쁘지 않다. 어쨌든 항공기의 이륙, 창밖의 풍경을 내려다본다. 날씨가 아주 맑다. 바다와 섬들이 뚜렷이 보인다. 서너 시간이 지나 홍콩공항 도착, 경유 안내 멘트가 나온다. 창밖을 내려다보니 고층빌딩들이 질서정연하게 정리되었다. 해안가를 따라 아름답게 발달 되었다. 한 시간 정도 기다리다 다시 인도를 향해 출발하였다.


날씨가 너무 좋아 창밖의 바다와 구름과 햇살과 계속해서 애기를 나눈다. 일행들이 단장님이 너무 체면도 없이 좋아하신다고 흉보는 느낌도 든다. 맛있는 기내식과 위스키 한잔은 편안한 낮잠을 즐기게 했다.

어느덧 인도 델리공항에 도착 방송이 나온다. 인천에서 10시간 넘게 걸린 것 같다. 우리나라와 시차는 3시간 30분 정도다. 공항에서 내리자 후덥지근한 더운 공기가 몸을 감싼다. 출국장에는 전철민 학생과 가이드 산토스씨가 우리를 반갑게 맞이한다.


숙소까지 가는 버스에서 인도의 델리는 수도이며 인구는 약 2천5백만의 대도시,날 씨와 기후 등 자세한 설명을 듣고 숙소에 도착 여장을 풀었다. 나의 룸메이트는 철민인데 전남대3학년 학생으로 공부하러 인도에 와 있었다. 이 학생은 나의 궁금한 질문에 밤늦도록 성의껏 대답해 주었다. 인도에서 첫 날 밤이 깊어간다.




<9월4일, 둘째 날>

숙소에서 제공하는 식사(빵, 계란, 과일 등)를 마치고 델리 남동쪽으로 300km 아그라라는 도시로 출발, 버스 창가에 비치는 모습들이 신기하다. 우리와 차량 진행 방향이 다른 좌측통행이다. 운전석도 오른 쪽에 있다. 도로 전체가 복잡하다. 사람, 소, 개들이 함께 어울려 있다. 차량이 소를 피해간다. 도로 중앙에 소들이 어슬렁거리며  볼 일을 다 본다. 사람들은 바쁘게 움직이는데 동물들은 정말 느긋한 모습이다. 먼지투성이 도로는 무척 지저분하다. 무질서 속에 질서? 혼돈 속에 정리? 로 표현해 본다. 벼가 한창 자라고 있다. 우리의 5월정도의 풍경이다.


몇 시간의 차량 이동 후에 목적지 아그라의 타지마할에 도착한다. 

    


타지마할은 인도의 대표적 이슬람 건축이다. 인도는 오랫동안 서북부에서 세를 확장시키려는 이슬람(페르시아)족과 전쟁을 치뤘다. 근래에 파키스탄도 종교문제로 인도에서 분리된 것이다. 타지마할이란 '마할의 왕관'이란 뜻으로 1600년쯤, 황제가 둘째 왕비가 죽자, 이를 위해 건축한 묘이다. 국가의 재정이 기울어질 정도로 20년에 걸쳐 거액을 들여 완성했다 한다. 정말 우유빛깔의 대리석으로 된 돔, 건축물 앞의 풀장이 조화를 이룬다. 특히 달밤의 타지마할의 아름다움은 형언할 수 없을 정도란다.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우리 일행은 신발을 벗고 내부를 관람할 수 있었다. 그 왕비가 15번째 아이를 낳다 죽었다는 가이드의 설명을 듣던 여자회원이 중얼거린다, "참, 복도 많다, 죽어서까지"


다시 사적지 아그라성을 향해 출발한다. 날씨가 무척 덥다. 땀이 줄줄 흐른다. 유독 땀이 많은 나에겐 여간 곤욕이 아니다. 그런데 이곳 사람들은 덥다는 모습을 볼 수 없다. 40도를 오르내리는 게 보통이고 지금처럼 30도는 선선한 날씨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붉은색의 아그라성이 등장한다. 유럽 중세의 영화에서 보는 크고 웅장하다. 붉은색은 사암으로 이루어졌다. 성안으로 들어가니 반지의 제왕에서 본 그런 성의 구조다. 돌로 건축되어있어 우리의 문화유산보다 잘 보존되어 있었다. 한편 죽은 왕비를 위해 타지마할을 건축했던 황제는 이곳 성에 연금이 된다.


전용차량으로 이동 바리나시(베나레스)행 기차를 탄다. 목적지까지는 10시간 넘게 밤기차다. 우리가 탄 침대칸은 전체 수 십 량의 열차 칸 중 2량에 불과하다고 한다. 우리의 60연대의 완행열차를 연상해본다. 또한 10시간정도의 승차시간은 아무 것도 아니란다. 인도는 땅이 넓어 어느 곳은 며칠씩 걸린다고 한다. 역 역시 지저분하다. 여기에도 개들이 어슬렁  거리며 돌아다닌다. 그야 말로 개 팔자가 상팔자? 침대칸은 좌우로 3층으로 6명이 사용할 수 있다. 열차시간은 출발지 역만 정확하지 도중 경유하는 역은 예정시간을 잘 지켜지지 않는다고 한다. 다행히 우리가 타는 열차는 30분정도 지연되어 승차했다. 밤늦도록 준비해간 소주를 꺼내 마셨다. 오혜란 씨의 조용한 노래는 우리의 흥을 돋우어주었다. 또한 이분이 직접 제작한 시디 한 장을 선물로 받았다. "오혜란씨 가수네요." 하자 부끄러워하는 모습이 예쁘다. 밤 열차와 함께 이틀째의 밤이 깊어간다.         




<9월5일, 셋째날>


열차 창가의 여명이 눈을 뜨게 했다. 일행들은 아직 곤하게 잠을 잔다. 나도 나이 들었나? 새벽잠이 없으니. 하여튼 창가에 비치는 인도의 새벽 모습은 새롭고 신비한 영상 이었다. 바리나시는 갠지스강 연안에 위치하며, 힌두교의 대표성지로 꼽힌다.


숙소에서 아침식사를 하고 옷을 갈아입고, 바리나시 북쪽 사르나트성지 녹야원을 찾았다. 녹야원을 들어가기 전에 먼저 박물관에 들렀다. 아소카와 석주를 비롯하여, 특히 입구에 4 마리의사자상은 인도미술의 최고의 걸작품이라 한다. 입구에서 양쪽으로 나누어진 전시장에는 불교 및 힌두교의 신들의 복합된 예술을 보았다. 인도에서는 다신, 다인종, 다언어를 사용한다. 그중에서 힌두교가 대부분이며 불교도 약간, 상호간에 적대감이 없이 나름의 신을 숭배한다.

그 다음에 들른 사르나트 성지는 불교 유적지로 석가가 35세에 깨달음을 얻어 최초로 설법을 개시한 곳이다. 여러 곳에 제단처럼 야외학습장 흔적이 다양한 모습으로 남아있다. 불교에 관심이 많은 나는 부처의 가르침에 귀 기울이는 제자들의 모습을 연상했다. 나오는 길에 호객하는 아이로부터 부처상을 구입했다. 아쉬움을 남기고 다시 출발한다.   


 

 


점심을 먹고 우리일행은 PVCHR(people's vigilance committee on human rights) 국민인권감시위원회를 방문 하였습니다. 이곳 책임자인 레닌 라흐바나쉬 박사는 우리를 반갑게 맞이하였고 협소한 사무실 여기저기 안내 해주었습니다. 레닌씨는 활동을 통해 카스트제도에 도전하며 5개의 북부주에서 50,000명의 회원들의 참여 속에 고문 희생자들의 지원과 45개지역을 대상으로 교육센터를 운영하여 수많은 어린이들을 교육시키고 있으며 이 위원회는 법률전문가, 언론인, 인권단체 등 국가적이고 세계적인 네트워크로 발전하였다. 또한 3500명이상의 채무노동 아동들과  카스트제도로 인해 인권침해를 입고 있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가져다주었고 , 특히 불가촉천민(untouchable), 달리트 들에게 희망을 주고 있었다.


 

5.18기념재단에서 준비한 선물을 전하며 통역으로 담소했다. 나는 그에게 마하트마 간디와, 영국으로 부터 독립하는 애기, '샤타그라하'(비폭력무저항운동)얘기를 하며 간디를 많이 닮았다하자, 활짝 웃으며, 간디가 자기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라고 답했다.


2007년 광주인권상수상자는 앞서 소개한 레닌씨와 이롬 샤밀라와 공동수상했는데 샤밀라(여)는 지난 6년간 인도에서 군사특별한법(우리로 애기하면 계엄법, 국가보안법)폐지를 가속화하기위해 활동하다가 현재 연금되어있다.


지난 2000년에 제정된 광주인권상은 5.18 민중항쟁의 보편적 가치인 민주주의와 인권, 평화를 위해 공헌한 국내외 개인이나 단체에 수여하고 있다. 수상자에게는 미화 5만 달러와 금장메달을 수여한다. 참고로 역대 수상자로는 제1회 사나나 구스마오 동티모르 대통령, 제2회 바실페르난도 아시아 인권위원회 위원장, 제3회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제4회 단데니아 G 쟈얀티 스리랑카 실종자 기념회대표, 제5회 아웅산 수지 버마민족민주동맹 사무총장, 제6회 와르다 하피즈인도네시아 도시빈민협의회 사무총장. 제7회 공동수상 말라라이 조아 아프가니스탄 국회의원과 앙카나 닐라파이짓 태국인권 운동가가 수상했다.


간담회를 마치고 장소가 협소해 VJC(인권, 교육 영상 및 예술단체)로 이동 방문하였다. 마침 귀여운 어린이들이 교육을 받고 있었다. 낯선 손님들에게 호기심어린 눈빛이 예쁘게 반짝인다. 직원들은 우리 일행에게 인도 고유의 차와, 과자를 제공하며 정성을 다한다.


상호간의 인사를 간단히 마치고 우리가 준비한 5.18다큐 영상물을 상영한다. 영상소개를 마치고 나는 통역과 함께 5.18 민중항쟁의 의의를 소개합니다.  



'장기 군사독재 정권이라는 무서운 탄압 속에 오랫동안 숨죽이고 살았던 한국의 민중들은 1980년 5월 광주민중항쟁을 통해서 일부사람들만 외쳐왔던 민주, 자주, 인권, 통일은 민중 모두의 가슴속에 깊이 자리메김하게 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민주주의'나 '인권사상'이 마침내 민중과 함께하는 시민민주주의를 획득한 것입니다.


진정한 인권에 눈을 뜨게 되었으며, 부당한 권력에는 정당한 저항권이 있다는 민주주의 기본원리를 깨달았고, 민주주의는 남이 지켜주는 게 아니라 자신이 지키고 창조한다는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지난 어두운 시절을 뒤로하고 이제 광주는 민주항쟁의 대명사를 넘어 한반도를 포함한 제3세계의 민중, 인권운동에 강력한 변혁의지를 심어주었습니다.


5.18 민중항쟁은 부당한 국가권력에 대한 시민저항으로 출발, 자치공동체의 형성 및 정의를 위한 자기희생과 반인륜적 학살에 저항하는 세계적인 인권운동으로 발전 할 것입니다.


우리는 인도를 사랑합니다. 인도의 국민을 사랑합니다. 인도의 문화유산을 사랑합니다. 특히 PVCHR과 VJC를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이어서 5.18항쟁 당시에 고등학생으로 직접참여 총상을 입은 이순노씨의 생생한 증언을 듣고 모두 숙연 해졌다. 그의 가슴속 깊이 우러나오는 한마디 한마디는 우리를 다시 한번 감동시켰다.


이어서 그들의 소개를 들었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 자신감 있게 최선을 다하는 이들의 모습 속에서 우리일행은 어떤 걸 느꼈을까?


저녁이 되자, 인근 호텔에서 PVCHR의 레닌씨와 직원들과 환영만찬의 시간을 가졌다. 인도식 뷔페음식이었다. 나는 5.18과 PVCHR은 많은 공통점이 있으며 동질감을 느낀다는 간단한 인사와 "우리의 우정을 위하여" 다함께 건배제의를 하였다.

3일째의 밤이 깊어간다.




<9 월 6 일, 넷째 날>


새벽 4시쯤 일어났다. 갠지스강의 일출을 보기위해서다. 오래된 미로의 도심을 지나 강가에 도착한다. 넓은 갠지스강이 펼쳐진다. 히말리아산맥에서 발원하여 2460km 흘러 인도북부의 곡창지대를 이루며 인도 역사의 중요한 힌두문화의 중심지를 이룬다. 힌두교도들은 이 강을 '강가'라고하며 성스런 강으로 숭앙하고 있다. 우리는 2개의 조그만 나룻배를 빌려 타고 강변을 따라 오르며 주위를 살펴본다. 구름이 끼어 일출은 볼 수 없지만 누런 황금물결의 장엄한 모습에 감탄한다. 강변에 오래된 건물과 시바신의 모습이 보인다. 또한 강물에 몸을 씻는 많은 순례자들을 본다. 또한 쌓아놓은 나무에 시신을 화장하는 모습과 타오르는 연기가 우리를 감싸는 듯하다. 힌두교도들은 이 강물에 목욕재계하면 모든 죄를 면할 수 있으며, 죽은 뒤에 이 강물에 뼈가루를 흘려보내면 극락에 갈 수 있다고 믿고 있다. 나는 배 측면에 앉아 손을 강으로 뻗어 강물에 손을 씻어본다. 또한 꽃에 불을 붙여 강물에 띄어 보낸다.


숙소에 돌아와 아침식사를 마치고 우리 연수 일정 중 가장 중요한 불가촉천민(달리트)지역의 방문 및 체험을 떠난다. 레닌 박사가 이들을 위해 인권과 교육 사업을 시행하는 곳이다. 변두리 시골을 지나 집단으로 거주하는 이들의 마을에 도착했다. 레닌씨와 마을 주민들이 호기심으로 우리를 맞이한다. 흙벽돌로 지은 조그만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지붕은 나뭇잎으로 덮여있고 부엌이랄 것이 없이 처마 밑에 냄비 하나뿐. 방안은 어두웠으며 깔판 하나가 장식의 전부였다. 참으로 열악한 생활이었다. 이런 곳의 달리트의 권익을(임금, 교육,선거권) 위해 뛰는 PVCHR 노력에 우리는 감동을 받았다. 또 일정부분 성과를 얻어내고 있었다.

마침 이날은 이곳 시장과 우리의 방문이 동시에 계획되어 있었다. 성과물의 하나인 마을 회관과 교육부속건물 준공식이 있었다. 나는 이곳 여자 시장과 함께 준공 테이프를 자르고 현판식을 하였다. 그런데 뜻밖에도 이 현판에는 시장의 이름과 5.18기념재단 김난수의 이름이 새겨있었다. 이들은 또 우리에게 감사의 선물로 샤린(두루마기,목도리?) 한개씩 일행 모두 선물을 받았다. 정성껏 마련한 이분들의 환영행사를 다음 일정에 쫓겨 나오는데 인도방송기자가 인터뷰를 요청한다.


달리트를 방문한 느낌을 묻는 질문이다. 나의 답변 내용의 요지는 '상당히 열악한 조건에서 생활하고 있다. 이미 인도헌법에는 카스트제도 철폐를 명문화 하고있지 않느냐. 우리는 기본적으로 사람 밑에 사람 없고 사람 위에 사람 없다고 생각한다. 이들에게도 능력에 따라 신분상승의 기회를 줘야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인도의 오랜 역사와 전통을 존중한다." 통역에 어려움이 있었다. 내 말이 전달이 잘되었으려나? 아쉬움을 뒤로 하고 버스에 올라탄다.         


버스는 네팔 남부 룸비니를 향한다. 10시간 이상 소요될 것이다.  차창가를 바라보며 며칠간 인도여행을 돌이켜 본다. 그동안 많은 인도 여행객들은 한결 같이 인도의 신비로움과 경외를 애기했다. 물론, 인류 문명의 발상지로 부터 시작해서 종교, 명상, 철학, 큰 땅, 12억의 인구 등에 기가 죽는 것은 사실이다. 내가 소양이 너무 짧아서 인가? 여행기간이 짧은 상태에서 결론 내려는 욕심 때문일까? 여튼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연수가 아닌 여행자로서 다시 찾아와 보고 싶다.



그야 말로 곡예 운전이다. 좁은 도로, 많은 사람, 소들의 안하무인, 경적소리, 아슬아슬한 교차주행, 잠시, 우리는 도로가에 정차, 시장에서 사과와 바나나를 사와 나눠 먹었다. 야채 노점에는 우리시장과 별 차이가 없이, 양배추, 오이, 감자, 가지 등이 놓여있다. 잠시 후 준비한 도시락을 버스에서 먹었다. 장시간  먼 길을 가는 동안 도로에는 사람 행렬이 끊임이 없다. 지구 면적의 2.4%를 차지하지만 인구는 지구 전체의 16%를 넘는다는 말이 생각난다. 국경이 가까워 오는데 버스가 고장이 났다. 한 밤 중이다. 결국 자정이 넘어서야 인도 네팔 국경을 넘어 룸비니 숙소에 도착했다. 별이 총총히 빛나고 있었다.  




<9월 7일, 다섯째날>



룸비니는 네팔 남부의 한촌으로 불교의 시조, 석가가 탄생한 곳이다. 숙소에서 얼마 지나지 않아 사적지에 도착한다. 아, 여기가 부처님이 탄생한 곳이라 생각하니 절로 감회롭다. 커다란 보리수 나무에 깃발이 나부낀다. 승려 한 분이 가부좌로 앉아있다. 다가가 그분의 염주를 만지며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 아소카왕이 부처를 찬미하는 돌기둥을 세웠는데, 이 기둥에 샤카족의 성자 부처(불타)의 탄생을 연유하여 부처의 출생지를 확인하며 또한 룸비니 마을은 감세의 혜택을 주는 내용의 글이 새겨있다고 한다. 곳곳에 부처의 탄생과 연관된 오랜 유적들이 잘 보존되어있다. 이곳 또한 유네스코에서 1997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한편 멀리 큰 규모로 높이 신축 중인 사찰 하나가 보인다. 확인해보니, 한국 어느 절에서 건축 하는 것 이란다. 이런 곳에 꼭 그렇게 과시하고 싶을까? 부처의 가르침이 진정 그런 것일까? 씁쓸한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여튼 이곳은 석가 탄생 이후 수많은 순례자들이 찾아오는 곳이다.



룸비니 공항으로 이동 카트만두행 비행기를 탄다. 30-40인승 소형비행기다. 이륙 후 아래에 펼쳐지는 산하의 모습이 장관이다. 누런 강줄기가 굽이굽이 흘러내린다. 이 강물은 히말리아에서 시작 숲과 새들과 동물을 먹여 살리고  흘러 흘러 또 곡창지대를 만들어 인간의 문명을 탄생시킨  신의 선물이 아닌가?  갠지스강을 만들고 제 할 일을 다 하고 바다로 흘러간다.     

  

카투만두 공항에 도착한다. 이곳에서 공부하는 강동훈 학생이 반갑게 맞이한다. 그의 안내로 숙소에 여장을 풀고 잠시 휴식을 취한다. 잠시 후 일정에 따라 네팔의 인권단체인 INSEC(Infdmal Sector Sector Center)을 방문한다. 인권과 사회정의를 실현하는 국내외 지원을 받아 활동하는 단체다. 그곳 책임자인 쿤단 아얄씨와 직원들이 반갑게 맞이한다. 사무실은 그 규모나 시설이 인도의 PVCHR보다 한수 위다. 우리 일행과  인사를 나누고 5.18에 관한 간단한 소개와 인섹의 영상을 통한 활동내용을 관람하고 상호 질의응답 토의에 들어간다.


네팔이 지난 수년간 정치적 불안이 계속 되면서 많은 사람이 희생되었고 시골에서는 아직도 인권침해사례가 발생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왕정에 반대한 마오이스트와 레닌 스탈린 사회주의와 친 왕정세력간의 싸움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미국은 중국과의 지리적 전략의 우위를 점하기 위해 친미 정권 수립의 음모를 읽을 수 있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민간인의 감금, 폭행, 고문 ,살해가 발생된다. 이러한 사실을 국내외에 알리고 도움을 받아 피해자들을 위해 열심히 일하고 있었다.


저녁엔 이곳에서 준비한 환영 만찬에 참석한다. 네팔 전통의 음식과 가무를 보며 흥겨운 시간을 갖았다.




<9월 8일, 여섯째날>

새벽 4시 기상, 드디어 우리 일행 모두가 가고 싶은 곳 , 히말리아로 가는 날이다. 나가르코트로 출발, 카트만두에서 동쪽으로 32km, 해발고도 2190m에 히말리아 전경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 이란다. 우리 집 근처 덕유산, 대둔산, 계룡산에서 1천미터 내외에서 놀다가, 이건 차원이 다르다? 설레는 마음으로 버스를 타고 산에 오른다. 산길은 좁고 아슬아슬 하다. 우리 지리산의 노고단 성삼재 길은 양반이다. 마주치는 차량이 있으면 어떡하나 하며 가슴 졸이며 우리가 탄 버스가 새벽안개를 뚫고 산에 오른다.



드디어 목적지 도착, 저기가 8천미터의 에베레스트, 저기가 7천미터의 안나프르나, 저 봉우리 이름은 뭐지?  햇살에 반짝이는 먼 곳에 설산이 보인다. 카페 테라스에 셀프커피 한잔을 마신다. 흘러나오는 음악을 듣는다. 아, 구름이 가리기 시작한다. 산 아래에서 비안개가 올라온다. 아쉬움이 크다. 멋있는 일출을 보고 싶었는데...  안내자의 얘기에 따르면 날씨가 맑을 때는 전망대 주변으로 320km가량 펼쳐지는 아름다운 경관도 좋고 일출이나 일몰시에는 오렌지색이나 핑크빛으로 물드는 장관을 볼 수 있다 한다. 이런 기회는 다음으로 미루기로 하고 일행 모두 주변 산길을 따라 산책한다. 이곳에서 자전거 트레킹 하는 사람들이 지나간다. 예쁜 꽃잎하나를 따 책갈피에 넣는다.


아쉬움을 남기고 하산, 네팔 문화체험에 나선다. 네팔의 번성했던 왕조중 하나인 박타푸르 유적지를 관람한다. 섬세하고, 또한 웅장한 건축을 자랑한다. 힌두교의 대표적인 문화유적지이며, 힌두교도의 방문이 이어지고 있다. 나는 이곳에서 나가르코트에서 들었던 네팔의 전통 음악 시디를 여러 개 구입한다. 당시 느꼈던 감흥을 선물로 전하려 한다.



그 곳에서 점심을 먹으며 맥주 한잔을 마셨다. 우리 일행은 다들 내일 모레 돌아가는데 아쉬움을 표한다. '천재지변이 났으면, 여권을 분실 할까?' 등 묘안을 꺼내본다. 돌아가면 할 일이 많아서 일까, 보고 싶은 사람 없다고 애기하는 일행도 있다.ㅎㅎㅎ.   


숙소에 돌아와 내일 행사를 준비한다. 우리가 발표할 문장을 다듬고 통역을 준비한다. 한글을 영어로 영어를 다시 네팔어로 번역 하는 것이 만만치 않다. 인도에서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에 사전에 준비하는 것이다.  임재근씨가 문장 작성에, 강동훈군이 번역을 준비했다. 특히 6.15 남북공동선언을 무리 없이 번역한 동훈이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내일 일정 역시 매우 중요하다. 국가인권위원회와, 3개 대표 정당 방문 간담회가 있다. 저녁에는 INSEC 관계자에 답례하는 한국음식 만찬이 있고 제4기 5.18아카데미 기장 선출과 뒤풀이가 있다.




<9월 9일 일곱째 날>



네팔의 국가인권위원회를 방문한다. 우리 일행과 관계자들과 상견례를 마치고 먼저 준비한 원고와 통역으로 5.18민중항쟁의 의의를 설명하고 외세에 의한 우리 조국의 분단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으며 이를 극복하기위한 노력은 우리 민족끼리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이루어내기로 하였다. 통일을 향한 분단 60년의 고통의 긴 터널이 막바지에 와있다. 지난 2000년 남북정상들이 6.15 남북공동선언을 하였으며 오는 2007년 10월 2일부터 2차 남북 정상회담이 예정되었다. 우리민족의 통일노력에 귀 국가에서 많은 관심과 협조를 부탁드린다며 6.15 남북공동선언문을 낭독하였다.


 이어서 네팔 쪽 실무자와 대표가 NHRC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있었다. 이들의 주장과 비정부기구인 INSEC의 설명을 종합해보면  부정부패와 정치불안은 1996년부터 내전이 시작되어 2003년 말까지 약 8000명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희생자들의 1/3은 마오이스트(모택동주의자)들에 살해되었고 2/3는 국가군에 죽임을 당했다. 극심한 빈곤으로 인한 게릴라봉기, 부정부패와 허울 좋은 의회민주주의, 14년 동안 정부가 바뀐 것만도 13번, 일반 시민들은 나라라면 신물이 난다.


이런 상황에서 네팔 국가인권위원회의 활동을 추측해 볼 수 있다. 인권침해 및 차별행위 등에 대한 진정 접수, 관계기관에 시정권고, 인권 교육프로그램 개발 등 우리나라와 별 차이가 없다. 설명 후 질의 응답시간에서 활발한 토의가 있었다. 이곳 언론들이 관심을 같고 취재에 열을 올렸다. 권고사항에 그치는 것인가? 실질적인 법 집행력이 있는가?에 질문이 쏟아졌다.


상호간의 기념품 전달식이 이었으며 우리 일행과 기념사진을 찍고 다음 행선지로 옮긴다.        

 

마오이스트(모택동주의 공산당)를 만난다. 전 과 같이 우리를 소개하고 이들의 설명을 듣는 순서다.

그들의 네팔을 위한 자기들의 정당성을 주장한다. 부정부패와, 빈부격차, 카스트제도의 폐해를 극복하기위한 노력이라 주장한다.



이어서 레닌 막스 공산당 사무실을 방문 설명을 듣는다. 이들 또한 네팔을 위한 당위성과 진정성을 주장한다.


끝으로 소위 여당을 방문한다. 이곳 역시 비슷한 주장을 한다.



네팔의 주요 3개 정당을 방문하며 나의 입장은 정치적 미묘한 시기임을 감안하여 밝히지 않았다. 다만 이들 대표자들은 한결같이 평화를 원하고 네팔의 발전을 기원하고 있으며,  이를 위해 오는 11월 22일 제헌의회 설립을 통해 피의 내전을 종식시키기를 공통적으로 강력히 기대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이들 대표자들 모두에게 11월 22일은 네팔을 위한 축제의 날이 되기를 약속 받는 "네팔 평화 선언"을 만들었으며.  또한 이들로 부터 10월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되길 기원한다는 답사를 이끌어냈다.


숙소에 들어 왔다. 안도의 한숨을 쉰다. 이제는 잃어버린 지갑이 걱정이다. 한국으로 연락해서 카드 분실 신고를 마친다. 집으로 어떻게 가지, 걸어가게 생겼네? 그것 참.



이날 밤, 우리는 INSEC과 국가인권위원회의 관계자들을 초청해서 한국식 음식을 대접했다. 이들과 헤어진 후 우리일행 모두 뒤풀이를 즐겼다. 5.18 아카데미 기장으로 마산에 사는 윤 원철씨가 만장일치로 선출 되었다. 앞으로 우리 4기를 위해 수고해주길 바란다.


이제 공식 행사는 모두 끝났고 내일 떠날 준비를 위해 짐 정리한다. 그런데 이런 행운이 있을 줄, 침대 밑 바닥에 지갑 발견, 내용물 이상 없음.




<9월 10일 , 여드레째날>

아침식사을 위해 식당에 들르는데 동훈이가 네팔신문을 가지고 와서 우리에 관한 기사내용을 설명해준다. "네팔의 인권운동가. 한국에서 네팔을 방문한 5.18기념재단은..... 중략, 그 들은 NHRC를 방문하여 인권, 평화, 민주주의를 이야기하며, 제헌의회 선거의 성공적인 수행을 기원하였다. 중략 이들은 9월 7일에 도착하였고 30명이었다. 중략,  NHRC의 최고 이사인 Murari Psad Kalel씨는 현재 네팔의 인권 상황을 자세히 설명하였고, 역할, 계획, 조직,등...중략, 한국의 사절들은 몇 가지 질문을 던졌는데, 언론의 자유, 4월혁명 이후의 인권사항, 역할 등..중략  안나프르나 포스트 20007. 9. 10" 네팔어를 영어로 영어를 다시 한국어로 번역한 동훈이에게 다시 한번 고마움을 전한다. 또한 인도에서 수고한 철민이에게도. 우리 일행이 남은 일용품 및 음식류를 모아 자취하는 이들에게 전한다.


네팔의 카트만두 공항에서 동훈이와 석별의 정을 나누고 인도 델리를 향해 비행기에 탑승한다.


 비행기가 이륙 다시 한번 히말리아에서 발원한 강물이 짙푸른 산과 평야를 돌아 생명을 살리며 굽이굽이 흘러가는 모습에 감탄을 자아낸다.


인도 델리공항에 도착, 인도시간 밤 11시 넘어 인천행 비행기에 탑승한다.




<9월 11일, 아흐레날>


오후 2시 넘어 인천 공항에 도착, 무사히 도착했다. 미술을 하시는 김재영씨의 카메라 분실과 제주도 여민회 고의경씨 눈 질환으로 쪼금고생? 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헤어짐이 아니고 다시 만남을 약속하며 안내 현수막을 펼치고 다 함께 사진을 찍는다.


엇그제 뒤풀이 날. 현수막에 낙서한 글을 다시한번 생각하며 마칠까 한다.


'홀로 있다고 외로워 했다. 함께 있으면 귀찮아 했다. 이제는 홀로 있어도 외로워 하지 않고 함께 있어도 귀찮아 하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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