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념 음반', 기념비적 음반이 되다
1. Legend 1971년 말에 발표된 이 음반은 이듬해 1972년 3월 서울대 문리대 '신입생 환영 공연' 이후 전량 수거되어 폐기되었다. 이렇게 거의 발매되자마자 '불온' 딱지를 붙인 뒤 이 음반은 '전설'이 되었다. 이후 몇 가지 버전의 음반들이 나돌면서 '컬트'의 대상이 되었다. 공식적인 재발매는 두 번 있었는데 한번은 1987년 9월5일, 다른 한번은 1990년 1월5일이다. 첫 번째 재발매는 보랏빛의 변형된 표지와 수록곡의 일부를 뺀 뒤 "아! 대한민국"(!)이라는 '건전가요'를 추가하여 발표되었고, 두 번째 재발매는 초판과 동일한 포맷(표지과 수록곡)으로 발표되었다. 물론 두 경우 모두 저작자의 허락을 충분히 얻어서 발매한 것은 아니었고 원본(마스터 테이프)이 보존되어있지 않은 상황에서 만족할 만한 음질을 보장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김민기는 1969년 대학교에 입학하여 친구 김영세와 함께 '도비두'(도깨비 두 마리라는 뜻)라는 이름으로 서울 YMCA '청개구리' 무대에서 활동했고 방송에도 이따금 모습을 드러냈다. 도비두는 초희귀판이 되어버린 음반에 세 곡의 레코딩을 남겼고, 모 유명 음악인이 심사를 보는 앞에서 오디션을 보았다는 전설도 함께 전해진다. 김영세가 군에 입대한 후 김민기의 재능을 아끼던 기독교방송국(CBS)의 한 음악 프로그램의 PD와 DJ였던 김진성과 최경식의 주선으로 김민기는 '마장동 스튜디오'에서 하루만에 이 음반을 녹음한다.
2. Personnel 500장이라는 작은 수량을 발매한 것이나, 음반의 대부분이 자작곡이라는 것은 이 음반이 상업적인 고려를 전혀 하지 않은 음반임을 알 수 있다.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곡을 다시 불러 싣지도 않았고, 유행하던 팝의 번안곡도 없으며, 심지어 알려진 작곡가의 곡조차 들어있지 않은 것은 마음씨 좋은 형들이 재능 있는 동생을 위해 잘 아는 친구들의 도움을 얻어 '기념음반'을 하나 만들어 주었다는 가정을 가능하게 한다.
그렇지만 이런 가정이 올바르기 위해서는 음반 제작에 참여한 인물들의 면면이 만만하지 않다. 음반을 기획한 최경식과 김진성같은 인물은 라디오 방송국의 음악 프로그램를 제작하고 있는 PD와 DJ였으며, 이들 방송계의 '실력자'가 개입한 것은 이 음반이 기념음반의 성격을 넘어선다는 점을 말해준다. 또한 정성조 쿼텟의 연주도 마찬가지다. 미 8군 무대에서 연주한 경력을 가진 정성조는 이 시기 쿼텟을 이끌고 일반무대와 방송에서 활약했으며, 직업적 작·편곡자 경력도 시작하고 있었다.
3. Text (1): 김민기 클래식 ≠ 클래식 김민기 우선 표지의 이미지가 독특하다. 마치 컴퓨터 그래픽 작업을 거친 것 같다(물론 아니다). '김민기'라는 문자 밑으로 옆 모습의 '초상화'가 실려 있다. 점을 찍어 표현한 그림, 이른바 점묘화에 가깝다. 김민기가 '미술학도'라는 것을 새삼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물론 멀리서 보면 그의 형상이 점점 또렷해진다. 음반에 담긴 음악도 비슷하다. 반복해서 새겨서 들을수록 묘미가 살아나고 색다른 뉘앙스로 다가온다.
음반에 수록된 곡들은 크게 두 범주로 나눌 수 있다. 한 부분은 어쿠스틱 기타(클래식 기타) 중심으로 연주하는 "친구", "저 부는 바람", "꽃 피우는 아이", "그 날" 등이고, 다른 하나는 정성조 쿼텟과 함께 연주한 "아하 누가 그렇게", "바람과 나", "길", "종이연" 등이다. 물론 이는 편의적 구분일 뿐이다. 먼저 전자의 범주에 속하는 곡들을 들어 보자.
김광희의 키보드와 어쿠스틱 기타의 아르페지오가 수놓는 "친구"는 처음 듣기에는 다소 밋밋한 멜로디를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처음 3마디의 멜로디는 '미'음으로 일관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렇게 단순해 보이는 멜로디는 메이저 세븐쓰 코드와 (도미넌트) 세븐쓰 코드로 이어지는 화성의 진행을 통해 '시각적'이라고까지 말할 만한 변화무쌍한 효과를 주고 있다. 그 뒤의 코드 진행은 Gm6 코드와 A코드까지 동원되면서 '클래시컬'한 향기를 풍긴다. 고뇌와 자의식 가득한 가사와 다른 사람이 불러서는 좀처럼 맛을 내기 힘든 노래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평을 삼가겠다. 한편 번안곡인 "저 부는 바람"의 경우 사용되는 코드는 단순하지만 이번에는 '주법'이 특이하다. 클래식 기타의 반주법을 차용한 듯 하이 포지션의 코드와 ' / '의 아르페지오 패턴을 통해 동시대의 '포크송 반주'와는 격이 다른 느낌을 만들어 내고 있다. 넓게 보아 비슷한 주법에 속하는 반주가 등장하는 "꽃 피우는 아이"는 '금지곡'의 대명사이므로 여기서도 평을 '금지'하도록 하겠다. 이런 '클래시컬'한 느낌은 (양희은의 음성으로 더 많이 알려진) 피아노와 현악이 합주되는 "아침이슬"에서 클라이맥스를 이룬다. '취향'에 따라 '논란'이 있는 편곡이지만 이후 이 곡에 대해 이루어진 어떤 편곡보다도 특이하다(이때 편곡은 '음반' 뿐만 아니라 '공연'을 포함한다). 굳이 오케스트라로 편곡하여 우아한 공연장에서 김민기의 곡들을 연주하지 않더라도 그의 음악은 그때부터 이미 '클래시컬'했고 지금 '한국 대중음악의 클래식'으로 남아 있다. 그렇다고 이런 곡들과 조금 다른 스타일의 곡들이 고전이 아닌 것은 아니다.
4. Text (2): 김민기 + 정성조 + ... = ??? 첫 번째 범주가 '클래시컬'하다면, 두 번째 범주는 '재지'하다? 이런 표현은 너무 진부하다. 전자의 범주가 잘 짜여지고 절제된 구성미를 가지고 있다면, 후자의 범주는 즉흥연주의 묘미를 더하고 있다고 말한다면? 이런 말도 맥빠지기는 마찬가지다. 음악이나 들어 보자. "아하 누가 그렇게"에서는 기타의 짤막한 인트로에 이어 경쾌한 터치의 피아노, 림(rim)을 때리는 드러밍 등이 연이어 등장하고 나직이 푸념하는 김민기 특유의 목소리가 나온 뒤 음반에서는 처음으로 예의 그 '정성조의 플루트'가 등장한다. 플루트 소리는 간주부에서 솔로까지 담당하면서 '욕구불만'에 차 있는 가사에 화답하면서 화자를 다른 세계로 인도해 간다. 뒷면의 첫 트랙인 "길"은 보다 활기찬 분위기를 가진 이 트랙의 쌍둥이다. 한편 플루트 소리는 "바람과 나"에서는 아예 외계에서 흘러나온 소리처럼 청자의 정신을 홀려 댄다. 그럴 만도 하다. 이 곡은 스스로 '외계인'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만든 곡이니까...('한'자 '대'자 '수'자 쓰시는 분이다).
한편 "종이연"(원제: 혼혈아)에서는 정성조의 '부전공'인 색서폰이 등장한다. 한국 민요로부터 영향받은 것인지 ('미국 민요'에 속하는) 블루스로부터 영향받은 것인지 3박자의 리듬 위에 5음계의 멜로디가 등장한다. 멜로디는 "라라라(혹은 아하하).."로 이루어진 여흥구에서는 단조로, 가사를 담은 부분에서는 장조로 조성을 바꾸는데, 1분 20초쯤 지나서 2절의 장조의 멜로디가 등장하는 시점에서 색서폰 소리가 울려 나온다. 그건 마치 파주나 동두천의 미군 클럽의 창고에서 '하우스 밴드'의 악사(樂士)가 연습하는 소리처럼 들린다. '실력'이 그렇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느낌'이 그렇다는 이야기다. 아무튼 종이연이 하늘 끝까지 날아가면서, 색서폰 소리는 자유분방하면서 그로테스크해진 뒤 진한 여운을 남기며 사라진다. 워킹 베이스의 잔향과 더불어... 종이연은 하늘 끝까지 자유롭게 날아가지만 그 하늘은 먹구름이 잔뜩 끼어 있는 듯하다. 이런 음악에 장르와 스타일을 논하는 것이 무슨 가치가 있을까.
5. After... 이 음반에 수록된 곡들은 '대중가요'일까. 그렇다고 말하기에는 품격이 높다. 그렇다면 '운동권 가요'일까. 이건 조금 더 복잡하다. 어쨌든 이 음반이 발표된 뒤로 김민기는 같은 시기 활동했던 포크 싱어들과는 다른 길을 걸었다. 당시의 미디어에서도 그는 "언더그라운드"로 분류되었고,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실력 있는 싱어송라이터"로 평가받았다. 밥 딜런(Bob Dylan)에 비유되기도 했고, "프로와 아마를 통틀어 가장 실력 있는 기타리스트"라는 찬사를 듣기도 했다. 이러한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처음부터 김민기는 당시의 대중음악의 일반적인 지형과는 다른 곳에 위치했고, 유신 정권의 '철망'만 아니었다면 한국 대중음악을 풍성하게 번영시킬 새로운 재목이 틀림 없었던 모양이다.
그 후 그의 경력이 통상적인 '대중음악인'의 경력과 달라지면서 그에 대한 신화는 더욱 공고화되었다(지금도 그의 직업은 '음악인'이 아니라 '연극인'이다). 그런데 지금은? 그의 노래는 'IMF의 국난을 극복하는 국민가요'("거치른 들판에 푸르른 솔잎처럼")가 되기도 하고, '북한동포도 애창하는 곡'("아침이슬")이 되기도 한다. 신화가 생활이 되어 가고 있는 지금 '부처를 만나면 그를 죽이라'는 선(禪)불교의 금언을 떠올려야 할까. 하지만 지금 현재 생산되는 음악 가운데 이 음반에 담긴 음악을 넘어선 한국산 음악은 찾아볼 수 없다. 그저 '필적하는' 음악만 간간이 나오고 있을 뿐이다. 대단히 유감스럽게도. 20021015
* 신효동이 쓰고, 신현준이 확대·수정함. ** '김민기 노래모음'이라는 부제는 음반 표지에 적혀 있지 않고 LP의 '라벨'에 수록곡과 함께 쓰여 있다. 재발매된 음반에는 쓰여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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