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군통합병원
‘통합병원은 천국, 보안대는 지옥’
이 말은 당시 국군통합병원에 입원해 있던 부상자들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 이들은 부상으로 인한 고통은 인내할 수 있었지만 보안대에서의 고문은 참을 수 없었노라 증언했다. 인간이 자신이 나약하고, 비겁하다고 깨닫는 때는, 어떤 것에 대한 두려움을 지니는 순간일 것이다. 오금을 저리게 하고, 오줌을 지리게 하는 그악스런 두려움. 그 두려움을 목도하는 일처럼 사람에게 큰 고문은 없을 것이다. 총살당하는 순간 보다 형장으로 끌려가는 그 순간이 더 두렵고, 한없이 작아지듯, 육신에 가해지는 폭력보다 정신적인 두려움이 사람을 더 비겁하게 만드는 것이다.
통합병원에 입원해있던 부상자들은 어떻게 해서든 보안대로 가는 일만큼은 피하고 싶어 했다. 그곳에 가면 계엄군들의 무자비한 고문이 기다리고 있었으므로. 피고름이 번지고, 살이 썩어 문드러져도 통합병원의 침상이 보안대의 영창보다는 편안했다. 비록 병실 밖으로 나갈 수 없는 영어의 몸이었지만, 치료해주는 손길만큼은 따듯했고, 알게 모르게 같은 편이라는 믿음까지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근무했던 통합병원 의료진들 또한 부상자들의 희망을 모르지는 않았다. 누군들 죽음 앞에 서있는 사람들에게 연민과 자비의 감정이 들지 않겠는가. 핏발선 눈으로 쥐를 쫓듯 사람들을 유린하던 계엄군이 아니고서야 다들 죽음 앞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따듯한 손길을 내밀어 구원해주고, 살 자리를 찾아 주리라.
당시 광주를 죽음의 도시로 만들었던 계엄군들 또한 평소에는 착한 아들, 상냥한 친구, 자상한 오빠였고, 듬직한 동생이었을 것이다. 이 세상의 희망을 이어갈 든든한 주자였고, 세상을 떠받쳐줄 버팀목이었으며, 세상에 사랑과 평화를 전파해 줄 메신저였을 것이다. 단지 그들의 이성은, 그들의 자비는, 그들의 연민은, 인성을 말살사키는 훈련을 통해 깨끗이 소거돼 버렸겠지만 타인의 죽음 앞에서 누군들 자유로울 수가 있을까.
아니, 변명이라면 좋다. 그들 또한 죽음과 삶의 경계에 서있었기 때문이었노라 항변한다면, 좋다, 그들도 살기 위해 몸부림쳤다고 말해줄 수 있다. 하지만 누가 그들을 그렇듯 절박한 몸부림을 치게 만들었을까?
그 대답에 답을 할 수 있는 자, 그 사람은 역사에 무어라 증언할까. 군인으로서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선택했었노라, 붉게 물든 얼굴로 목소리를 높일까. 그렇다면 한나라에서 군인의 존재는 무엇인가. 국민에 우선하는 군인. 정권을 찬탈하기 위해 수백 명의 무고한 목숨쯤은 희생양으로 삼아도 된다는 위험한 산술방식.
그런데 왜 또 하필 광주였을까. 끝까지 통일신라에 대항하고 고려에 대항했던 백제인의 투쟁의식이 염려되었을까? 부패한 탐관오리의 학정을 참다못해 봉기했던 동학혁명과, 학생독립운동의 시발점이 된 이쪽의 반골의 싹이 걱정 됐을까? 때문에, 애당초 그 뿌리를 뽑고자 마음먹고 덤벼들었을까? 그랬다. 그들은 광주를 선택했다. 광주를 치는 것. 광주를 본보기로 삼는 것. 광주를 짓밟는 것.
민주주의가 오리라던 기대에 부풀었던 서울의 봄은, 따듯한 햇살아래 몸을 풀고 있던 광주의 봄은, 그렇게 짓밟혔다.
광주가 계엄군의 총칼에 무참히 짓밟히던 날, 광주가 철저히 고립되었던 날, 그 날들은 시계가 일제히 고장 나 버린 것처럼 광주는 모든 게 멈춰버렸다. 전화는 물론 교통과, 행정시스템 까지 마비됐고, 상점은 철시했으며, 모든 경제활동도 정지되었다. 일상의 생활들이 멈춰버리고, 막혀버렸을 때. 국군통합병원만은 위태롭게나마 그 일상의 활동들이 유지되고 있었다. 광주가 우왕좌왕하고, 철저히 고립돼 있을 때 국군 통합병원은 광주의 배수구 역할을 하고 있었다. 연못은 어느 한 곳 물줄기가 흘러야만 물이 썩지 않는다고 했는데, 국군통합병원이 바로 그 역할을 했던 것이다.
그 당시 광주국군통합병원은 광주의 사태를 외부에 알릴 수 있는 유일한 제도적 창구였다. 군이든, 행정기관이든, 국군통합병원을 통해 광주의 긴박한 상황들을 상급기관에 보고하고, 지휘를 받았다.
하지만 이들 국군통합병원역시 애로사항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당시 통합병원에 근무했던 군의관은 약 100여명. 머리가 짧았던 이들은 출근하는 길에 군인이라는 이유로 신변의 위협을 느껴야 했다. 어떤 이는 운동권 학생들과 잘 아는 동생을 데리고 출근했고, 어떤 이는 광주에서 광주로 출근하는데도 이틀이 걸려야 했다. 하지만 결근하는 직원은 한 사람도 없었다.
첫 환자가 들어오기 시작한 날은 18일. 한 의대생은 금남로에서 시위를 지켜보다 계엄군의 군화발에 췌장이 파열돼 이송돼 오기도 했다. 그는 18일 금남로에서 시위를 지켜보다 공수부대원에게 쫓겨 골목길로 도망가다 붙잡혀 세 명의 공수부대원들에게 군화발로 복부를 무자비하게 구타당했다. 그리고는 연행되어 머리를 땅에 박은 채 있다가 밤이 되자 군용트럭에 실려 상무대 감방에 투옥되었다. 하지만 그는 19일 밤이 되자 심한 복통과 구토에 시달려야 했고, 급기야는 쇼크 상태에 빠져 국군통합병원으로 이송되었던 것이다. 췌장파열에 의한 혈복증. 당시 의료기술과 장비로는 꽤 어려운 수술이었지만 다행히 의대생은 목숨을 건져 현재 광주시내에서 병원을 운영 중이다. 그 환자를 담당했던 의사는 그 의대생의 선배였다.
“살아줘서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당시는 수술기구나 기술이 그렇게 발달하지 못한 상황이라 참 많이 걱정했는데, 후배는 살아줬습니다. 그게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더라구요.”
수술을 담당했던 선배 의사는 이렇게 그때를 회고했다. 그 선배의사의 얼굴에는 제법 세월의 무게가 내려앉아 있었고, 음성 또한 예전의 가팔랐을 감정으로부터 많이 무뎌져 있었다.
18일 첫 환자가 실려 오고 난 뒤, 통합병원 역시 다른 병원과 마찬가지로 21일 되자 총상환자들이 정신없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부상정도도 다들 위급한 환자들이었다. 그 누구도 가볍게 지나칠 수 없었다. 자신들의 손길에 환자들의 목숨이 달려있다는 생각에 의사들은 피곤했지만 함부로 할 수 없었다. 그들을 치료하느라 의료진들은 열흘 동안 제대로 잠 한 번 자지 못했다고 토로했다. 당시 전하는 말에 의하면 국군통합병원에 가장 많은 중상자들이 실려 갔다고 했지만 군 기밀 누설 금지 조건 때문에 정확한 통계는 집계할 수 없었다.
더욱이 통합병원은 다른 민간병원과 달리 부상을 입은 군인들도 많았다. 이들은 대부분 광주 외곽 지역에 주둔하고 있다가 광주를 빠져 나가려는 다른 부대원들을 시민군으로 오인하고, 서로 총격전을 벌여 생긴 사상자들이었다.
한 방에 칠팔십 명의 환자가 있었지만 그런 방이 몇 개 운영되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고, 당시 병원에 입원했던 부상자는 증언 했다. 부상자는 병실 안에서는 자유로웠지만 병실 밖으로는 나갈 수 없었고, 가족들의 면회 또한 제한되었다고 했다. 하지만 다른 것은 의료진들의 보호아래 별 불편함이 없었다.
의료진들은 환자의 상태가 퇴원해도 될 만큼 양호했지만 이들이 보안대로 끌려가 당할 고초를 감안해 병원에 붙잡아 놓기도 했다. 일주일에 한 번씩 보안대 관계자들에게 환자들의 상태를 보고해야 했는데, 병원 측은 가짜 병상일지를 통해 이들이 보안대로 끌려가는 것을 막아주었던 것이다. 이런 경우는 거의 모든 부상자들에게 해당됐다. 특히 당시 교수협의회 의장을 맡고 있던 이모 전남대 국문과 교수가 보안대에 의해 병원으로 강제 연행돼오자 당시 국군통합병원의 진료부장이었던 이정륭 씨는 서둘러 차트를 꾸몄다. 그 교수는 자신이 잘 아는 교수였던 것이다. 그리고는 교수에게 이렇게 당부했다.
“교수님. 이 시간 이후부터는 교수님과 저는 모르는 사이입니다. 회진 때도 아는 체를 하지 않을 테니 너무 서운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제가 아는 체를 하는 순간, 교수님은 강제 퇴원당해 보안대로 끌려갈 것이고, 저도 그만큼 입장이 난처하게 됩니다. 그러니 그렇게 아십시오.”
그가 교수에게 없는 병을 만들어 입원시켜 버린 것이다. 그러자 수사전담반을 맡고 있던 대공과장은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다. 하지만 진료부장은 보안대의 살벌한 위협에도 굴하지 않았다.
통합병원의 활동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병원의 성격 상 계엄군의 통제에 있던 통합 병원은 다른 민간 병원과는 달리 의료 장비는 물론 수술할 때 필요한 산소통이며, 의약품의 반입이 비교적 원활했었다. 그런 사실을 시민군들과 다른 민간병원들도 알고 있었다.
하루는 총을 든 시민군 두 명이 지프와 버스, 두 대에 나눠 타고 통합병원 약품실로 쳐들어왔다. 황급히 이 사실을 전해 받은 진료부장과 행정부장은 아무도 따라오지 말라고 명령하고, 둘이서 총을 든 두 명의 시민군을 만났다. 그들의 요구는 전남대병원에서 수술할 때 필요한 산소를 달라는 것이었다.
통합병원 측은 이들에게 필요한 만큼의 산소통과 의약품을 나눠주고, 이들이 안전하게 빠져나갈 수 있도록 길안내를 돕기도 했다. 헌데 며칠 후 이 시민군이 부상을 입고 통합병원으로 실려 왔다. 이들의 얼굴을 알아본 통합병원 진료부장은 직원들에게 그때의 일에 대해 함구하도록 지시를 내렸다. 보안대 사람들이 그 사실을 아는 순간 그 시민군에 대한 박해가 시작될 게 불 보듯 뻔했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한번은 합수부장이 광주의 비극을 보고받고 벌건 얼굴로 국군통합병원을 찾아왔다. 언론에서는 연일 광주가 북한의 사주를 받은 간첩들에 의해 폭동이 일어났고, 무정부상태에다 폭도들이 설친다는 내용을 되풀이해 내보내고 있었고, 합수부장 역시 그런 내용을 보고 받았던 것이다.
그는 국군통합병원 측의 사태에 대한 브리핑을 받고 난 후 부마사태를 들먹이며 공공연하게 폭도 7천명은 잡아야 한다고 했다. 그래야 나라의 기강을 잡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합수부장과 독대한 진료부장은 그의 마음을 돌려세웠다. 계엄군의 무자비한 진압에 광주 시민들이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설명하고, 그들의 행동을 옹호한 것이다. 합수부장은 진료부장의 말에 화를 벌컥 내며 군화발로 탁자를 걷어차 버렸다. 그 바람에 탁자위의 유리깔개가 깨졌다.
이들의 역할은 의사이자, 연락관이자, 환자들의 보호자였으며, 광주의 대변자이기도 했다. 열흘 동안 잠 한 숨도 자지 못한 채 이들은 일인다역의 역할을 수행해낸 것이다. 헌병대에 잡혀온 700여명의 중고등학생들을 신문한 결과 그들이 무기를 들고 저항했다는 사실을 순순히 자백 받았지만 700명이 넘는 중고등학생을 한꺼번에 처벌하는 것 또한 무리수가 따랐던지 합수부장은 이들을 처벌하지 않고 그대로 방면한다. 진료부장과의 독대가 힘을 발휘한 순간이었다.
27일, 광주가 계엄군에 의해 진압이 되고, 도청에 남아 끝까지 항전을 계속하던 시민군들이 무더기로 잡혀 병원으로 들어왔다. 죽음과 대면한 이들의 눈에는 공포만이 가득했다. 그 공포가 블랙홀처럼 그들의 몸에서 모든 감정들을 빨아들였다. 여기저기 깨지고 다쳤지만, 자신들의 몸에 난 상처의 고통마저 그 블랙홀이 빨아들이는 듯 통증도 호소하지 않았다. 그들은 단지 보이지 않는 동료들의 안부를 묻는 질문에 동지들의 죽음을 숨기거나 서로를 격려하며 공포의 시간 시간들을 힘겹게 버텨냈다. 특히 이들은 보안대에서 조사를 받을 때 동료들의 활동을 끝까지 감추어 주거나 말을 하지 않는 끈끈한 동지애를 발휘, 사선을 함께 넘었던 동지들을 감동시키기도 했다.
한사람이라도 더 보호하고, 지키기 위한 통합병원 의료진들의 노력이 있었기에 이들은 끝까지 보안대로 끌려가지 않은 채 나중에 민간병원으로 후송되거나 보안대 영창이 아닌, 형무소로 수감되고, 군인들은 국군수도병원으로 이송돼 치료를 계속할 수 있었다.
국군통합병원. 이들은 숨어있는 광주의 수호천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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