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0. 韓山李氏/11_小說家殷美姬

봄날은 온다/문화일보

忍齋 黃薔 李相遠 2008. 3. 28. 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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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은미희


<푸른광장>
봄날은 온다

일 때문에 미국을 다녀왔다. 한 사람을 취재하는 일이었는데, 문득 산다는 게 무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저런 경험과 추체험들로 삶에 대한 비의를 눈곱만큼이나마 깨우쳤다고는 하나 여전히 종잡을 수 없고, 속내를 잘 보여주지 않는 삶의 어지러운 운행에는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다. 체스게임을 보는 듯 사람의 삶이 참으로 변화무쌍하다.

어쨌든 이제 쉰을 바라보는 나이가 된 문제의 그 사람은 저 엄혹했던 지난 시절에 고문으로 으깨진 몸을 이끌고 황급히 이 나라를 도망쳤다. 너무 무서워 한동안 사람을 만나는 것도 피했단다.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해 밤마다 몸을 웅크리며 악몽에 시달려야 했고, 급기야 병원에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ost-traumatic stress disorder)라는 병명을 진단받기도 했다.

그때 의사는 같은 인간으로서 그가 당한 정신적 상처와 육체적 테러에 함께 분노했다고 하던가. 당시 그는 신체에 가해지는 물리적인 체형이나 고통에 차라리 죽기를 원했노라고 기억해냈다. 그 지옥 같은 상황은 그의 마음속으로 깊이깊이 숨어들어 무의식 속에서 그를 조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역설적이게도 그를 살린 것은 특정인에 대한 증오심이었다.

한데, 20여년이 지난 지금의 그는 그때의 상처에서 많이 벗어난 듯 보였다. 미국에서 다시 공부해 최고 학위도 받고, 직장도 잡아 지금은 한국인으로서는 드물게 고위 공무원으로 근무하면서 나름대로 실력을 인정받고 있었다.

그에게는 살아가야 할 분명한 목표가 있었다. 증오심이든, 복수심이든 아니면 숨기 위해서든 그날의 끔찍했던 기억에서 벗어나기 위해 오로지 공부에만 몰두했었단다. 그 상처를 잊기 위한 몸부림이 오늘의 위치에 다다르게 만든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정말, 그 증오심이 없었더라면, 그 끔찍한 고문이 없었더라면, 그는 지금쯤 한국에서 평범한 중년 남자로 살아가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처럼 평범한 삶도 좋지 않겠느냐고 말할 때는 어쩔 수 없이 그는 코맹맹이 소리를 냈다. 그리고 한국에 대한 기억과 정서는 아직 20대에 머물러 있다고 고백했다.

그를 남겨두고 돌아오면서 나는 우울했다. 왜 자신이 태어난 땅에서 가족들과 함께 오순도순 살지 못하고 남의 땅에서 남의 말을 쓰면서 그렇게 살아가야 할까. 알게 모르게 가해지는 차별의 그늘 속에서 마음 졸이며 살아야 할까. 무시로 떠오르는 생각들 가운데 어느 한 가지도 명쾌한 답을 내릴 수 없었다. 그리고 홀로 남겨진 그를 생각하니 참으로 짠한 마음이 들었다. 내가 생각하기에 그는 정의로운 사람이었다. 나쁜 것을 나쁘다 말하고, 좋은 것을 좋다 말하는 아주 상식적인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는 무사한 삶을 보장받지 못했다.

비행기를 타고 오는 내내 사는 것에 대해, 살아가는 것에 대해, 사람에 대해 생각했다. 당장에라도 죽임을 당할 것처럼 자신을 괴롭히는 일이 세상에는 너무 많다. 그 힘듦에 매몰돼 감히 내일을 생각할 수도 없다. 아무도 자신의 미래를 알지 못한다. 다만 관성처럼, 습관의 힘으로 어쩔 수 없이 살아가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나 또한 그렇다. 죽음을 떠올릴 만큼 힘든 삶이, 그 고통이, 훗날 자신을 밝고 희망찬 내일로 인도해줄 지팡이가 된다면, 자신의 삶의 물줄기를 더 큰 줄기로 바꾸어 놓는다고 생각한다면, 기꺼이 그 아픔을 받아들이고 견뎌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찌 그 고통 속에서 고난 끝에 낙이 온다는 진리를 욀 수 있을까.

주변을 둘러보면 불안한 현실과 암울한 미래로 불만을 터트리는 사람이 많다. 당장에 세상이 끝장날 것처럼 도무지 참을성이라고는 없어 보인다. 나 역시 예측할 수 없는 미래 때문에 몹시 불안하다. 하지만 전망 부재의 시간 속에서도 하루가 가고, 내일은 온다. 그의 삶이 증거하듯 다가올 미래의 시간들 속에 예상치 못한 기쁨이 마련돼 있을지도 모를 일. 다만 살아가야 할 분명한 목표 하나쯤 붙잡고 있으면 당장에 견디기가 쉬울지도 모른다.

이 흉흉한 소문의 세상 속에서도 살아갈 수 있는 이유는 밝은 내일을 믿기 때문이다. 그러니 기다려 보련다. 봄날은 온다.

[[은미희 / 소설가]]

기사 게재 일자 2008-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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