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련꽃 필 무렵 .....
목련의 계절이 돌아오면 나는 아버지에게 말씀드리고 싶다.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그림은 아버지의 목련꽃 이라고.
그러니 저세상에서나마 환하게 웃으시라고.....
목련꽃의 계절도 지났다.
겨우내 솜털 보송보송한 움으로 지내다 어느 날 눈부신 햇살에 반짝, 흰빛으로 피어났다
뚝뚝 낱장으로 떨어져 내리는 목련꽃을 바라보자면 아버지의 우울한 모습이 생각난다.
뇌졸중으로 한쪽이 마비된 아버지는 바깥출입을 하지 않으셨다. 마비가 된 오른쪽 말고도,
그나마 움직일 수 있는 왼쪽 다리 또한 오래전에 당한 교통사고로 커다란 철심이
박혀 있는 탓에 아버지는 한 발 걸을 때마다 많이 힘들어하시곤 했다.
아버지는 그런 당신의 몸을 사람들에게 보이기 싫어 하셨다. 걷기가 힘들어서가 아니라
당신의 몸을 들키는 게 싫어 그렇게 걷기를 포기하셨던 것이다.
아버지의 유일한 낙은 의자를 창문 옆에 가져다 놓고 세상을 염탐하는 거였다.
비가 오면 비가 오는 대로,
눈이 오면 눈이 오는 대로, 날이 궂으면 궂은 대로,
화창하면 화창한 대로 낡은 아파트 이층 창문은
아버지에게 아직 살아있다는 자각과 함께 알싸한 슬픔을 가져다주었다.
그 창문은 아버지에게 있어서 세상으로 통하는 비상구이자 위안이었고, 슬픈 세상이었다.
아버지는 창문을 통해 바라다 보이는 온갖 풍경들 가운데서도
화단에 피어 있는 화사한 목련꽃을 가장 좋아하셨다.
아마도 아버지는 목련꽃이 꽃망울을 터뜨리는 순간부터
속절없이 떨어져 내리는 순간까지 함께하셨을 것이다.
맥없이 떨어져 내리는 낱장의 꽃잎들을 바라보면서
당신의 생도 목련꽃처럼 떨어질 날이 머지않았음을 짐작하셨을 것이다.
아버지는 무명 화가셨다.
아니, 엄밀히 따지자면 무명은 아니었다. 아버지 이름을 걸고 개인전을 세 번 하셨고,
그룹전에도 여러 번 참여하셨으니 완전 무명은 아니셨던 셈이다.
몸이 망가지기 전에는 좋은 그림을 얻기 위해 자주 스케치 여행을 다니시곤 했다.
들도 좋았고, 산도 좋았고, 풍광이 좋은 곳이면
어디든 마다하지 않고 채비를 차려서 떠나시곤 했다.
스케치만 하고 돌아오셨으면 좋았으련만 아버지는 꼭 만취한 상태로 대문을 들어섰다.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가 불만이셨다. 왜 술을 마시는지,
왜 남들처럼 휴일이면 단란하게 가족 소풍이라도 가지 않고 혼자만 스케치 여행을 떠나는지,
왜 남들처럼 공모전에 입상해 유명 화가의 반열에 이름을 올리지 못하는지
만취한 아버지에게 눈을 흘기며 미운 소리를 해대셨다.
하지만 어머니의 가시 돋친 잔소리보다 아버지를 더 못 견디게
만든 것은 당신의 욕심껏 따라주지 않는 그림이었다.
그림에 대한 열망이 아버지를 광포하게 만들고
열패감에 빠져들게 만들었다.
아버지의 동료들이 수상의 기쁨으로 파안대소할 때마다
아버지는 우울한 침묵의 세상으로 빠져들었다.
그렇다고 아버지가 노력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목련꽃이 피면 아버지는 카메라로 목련꽃을 찍어
슬라이드로 만드셨고,캔버스에 투영시킨 채 밑그림을
완성시키셨다. 밑그림이 끝나면 그 위에 정성들여
색을 입히고 음영을 주었다.
나 또한 가끔 아버지의 모델을 서기도 했다.
아홉 살 무렵이었던가 ......
푸른 색 원피스를 입고 머리에는 푸른 리본을 단 채 등받이가 커다란 의자에 앉아
아버지가 가리킨 지점을 응시하고 있는데, 그 일처럼 또 고역스러운 일은 없었다.
의자에 앉아 있는 내내 하품을 물고, 옆구리가 결려 자꾸만 움직이는 통에
아버지에게 야단을 맞았다. 헌데 그 푸른색 옷을 입은 소녀의 인물화는
아버지에게 수상의 영광을 가져다주지 못했고,
아버지가 좋아하는 목련꽃 또한 아버지에게 다른 기쁨을 선사하지 못했다.
아버지는 그 열패감을 새로운 도전정신으로 바꾸지 못하셨다.
당신이 그림을 접어야 했던 가장 큰 이유는 반신불수라는 신체적 장애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당신 스스로 당신 재능을 하찮게 여기는 자기 비하가 더 컸다.
그저 그림을 그리는 시간이 좋아 붓을 잡을 때도 있었겠지만 어쩔 수 없이 아버지는
사람들의 평가에 무심해지지도 못했고, 또 당당하게 대처하지도 못했다.
목련의 계절이 돌아오면
나는 아버지에게 말씀드리고 싶다.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그림은
아버지의 목련꽃이라고.
그러니 저 세상에서나마 환하게 웃으시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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