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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광장>가족의 힘 / 문화일보

忍齋 黃薔 李相遠 2008. 11. 26. 0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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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게재 일자 2008-11-06

 

<푸른광장>
가족의 힘

 

얼마 전 기차를 탈 일이 있어 밤늦은 시간에 영등포역으로 갔다. 택시에서 내려 역사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나는 음산한 풍경에 움찔했다. 그 넓디넓은 역사 안은 신산한 삶을 잠시 부려놓은 노숙인들의 세상이었다. 돌아갈 집이 없는 사람들이 칼바람을 피해 그나마 훈훈한 온기가 남아 있는 역사 안에 고단한 잠자리를 마련하는 일이야 비단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었지만 동행한 사람은 최근 들어 숫자가 부쩍 늘었다고 걱정했다.


겹겹이 옷을 껴입고, 어디선가 구해온 이불로 찬 바닥에서 올라오는 냉기를 가린 채 옹색하게 잠을 청하고 있던 사람들의 표정에는 생의 결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다만 동병상련의 옆 사람이 있어 그나마 위안이 된다는 듯 무표정했다. 한데 왜 그 모습이 남의 일 같지가 않았을까. 그 사람들에게도 지나간 시절 어느 길목엔가는 찬란한 시간들이 들어 있을 터. 어찌 바람 속에 몸을 내맡기며 사람들의 발 아래 잠자리를 펴는 오늘이 있으리라 짐작이나 했을까.


하긴 내일이 불안한 사람들이 저들뿐일까. 찬 바닥에 웅크리고 누운 이들을 보면서 내심으로 한숨을 내쉬는 이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그들을 보면서 나는 오빠를 생각했다. 10년 전, 외환위기 때 사업을 하던 오빠가 부도를 냈다. 어떻게든 부도만은 막아보려고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녔지만 결국 두 손을 들고 말았다. 오빠는 그때 하나씩 돌아오는 어음을 두고 이번만 막으면 사정이 나아질 거라며 가족들에게 군색한 소리를 했다. 오빠의 믿음에 가족들은 한명씩 차례로 은행에 따라가 미심쩍은 표정을 지으면서도 모른 체하지 못하고 가리키는 곳에 도장을 꾹꾹 눌러 찍어주었다. 하지만 오빠는 줄줄이 돌아오는 어음을 막지 못하고 결국 부도를 내고 말았다.


나 역시,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유산으로 남겨주신 아파트를 오빠의 채무 변제에 밀어넣어야 했고 다른 가족들 역시 일정 정도 오빠의 채무를 떠안았다. 왜 그렇게 바보 같은지, 형편이 어려우면 가족들이라도 힘들게 만들지 않고 일찌감치 접을 일이지, 어쩌자고 고집스럽게 붙들고 있다가 그렇게 바닥까지 내려가야 했는지…. 가족들에게 적잖은 피해를 보였으니 오빠는 더 도와달라는 말도 하지 못한 채 그렇게 혼자 힘들어했던 모양이다.


한데 어느 날 택시를 모는 오빠를 보았다. 처음에는 긴가민가했다. 참 닮은 사람도 있다고만 생각했는데 허름한 옷차림에 깊숙이 모자를 눌러쓴 그 택시기사가 나를 불러 세우고는 씩 웃었다. 박박 깎은 머리에 하얀 운동모를 쓴 오빠는 그간 내가 알던 피붙이가 아니었다. 늘 호기롭고 멋쟁이였는데. 어딘지 철심 하나가 쑥 빠져나간 듯 허전했고, 그런 오빠가 안쓰러웠다. 금세 코끝이 매워 왔다. 그 순간 먼저 든 생각이 그거였다. 그래, 이 흉흉한 세상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이 많은데, 저렇게나마 살아주어서 고맙다고. 가족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겨주지 않아서 감사하다고. 하지만 오빠는 그마저도 힘들다며 여섯 달을 넘기지 못했다.


어쨌거나 오빠는 어찌어찌하여 어둠의 터널을 빠져나왔다. 크게 내놓을 것은 없지만 그래도 삶을 위협하는 시퍼런 칼날 위에서는 내려온 듯하다. 지금은 옛날 일은 회상하기도 싫다는 듯 말을 아끼지만, 언젠가 한번은 어려움을 함께해 준 아내가 있었기에 그 힘든 시간을 이겨낼 수 있었노라고 쑥스럽게 올케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아마도 그 노숙인들이 남 같지 않았던 이유는 오빠의 그 실패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들에게도 가족이 있을 터. 함께 힘을 모은다면 어떻게든 오빠처럼 살아갈 힘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이 힘든 시기에 하루하루 불안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가족 간의 애정일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따듯한 말 한마디가 다시 살아갈 용기를 줄 것이다. 한번 부여받은 생, 억척스레 꾸려 가보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저 추운 계절의 차디찬 땅바닥은 지친 몸을 누이고 잘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늘 당장 힘든 사람들에게 빛나는 내일이 예비돼 있을진저.


[[은미희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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