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광장> |
지금처럼 앞이 보이지 않았던 적이 없었다. 가난한 소설가의 지갑이야 어제나 오늘이나 별로 달라진 게 없지만 그래도 예전에는 그 두께가 얇은 지갑에도 불구하고 마음만은 늘 풍요로웠다. 하여 몸이 고단해도 즐거웠고, 상대적 결핍감에도 청빈함의 맑음으로 ‘없음’을 즐길 수 있었다. 왜 아니겠는가? 사람들은 나름 저마다 열심히 일을 하고, 그 일 속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찾으며 내일을 꿈꾸었기 때문에 나 역시 그러면 되었다. 걱정은 각자의 몫으로 돌리고 내 일만 열심히 하면 되었다.
그때의 바람은 오로지 한가지였다. 좋은 글을 쓰는 것. 부끄럽지 않은 글을 쓰는 것. 그거면 되었다. 내 최고의 가치는 좋은 글에 있었으므로 그 빛나는 물질의 도구들이 부럽지 않았다. 이 때문에 그것들로 인해 기죽지 않았으며 그것을 얻기 위해 내 알량한 영혼을 밀거래하지도 않았다. 그럴수록 내 속에는 언젠가는 정말 좋은 글을 쓰리라는 의욕이 옹골지게 들어찼다. 또 그렇게 되리라는 믿음도 있었다. 우리 사회의 건강함이 있었기에 그런 믿음이 가능했다.
사람들에게도 그런 믿음이 있었다. 경제가 어렵다며 시름에 겨운 표정으로 투정을 부려도 희망을 잃지 않은 채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해 하루하루를 알뜰히 살았다. 예측 가능한 미래가 있었기에 그에 따른 계획을 세우고, 하루하루 성실하게 살아가면 되는 일이었다. 게다가 사회에는 대의와 공의와 정의가 존재하고 있었고, 개인의 이익이 곧 국가의 이익과 부합하곤 했다.
10년 전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시대를 잊지 못한다. 어려운 나라를 돕기 위해 장롱 속에 깊숙이 넣어둔 금붙이들을 들고 나와 차례를 기다리며 서 있던 모습은 정말 눈물나는 풍경이었고, 경험이었다. 어디 그뿐일까. 한·일월드컵 축구대회 당시 거리를 가득 메운 촛불의 행렬과 함성은 아름답다 못해 무섭기까지 했다. 그 응집된 힘, 그 가공할 만한 폭발력. 그 힘이라면 못할 게 없었다. 하지만 그 촛불의 강을 보면서 나는 내심 무서웠다. 저 힘의 칼끝이 우리 내부로 향한다면…, 염려되었다. 어쨌든 위기 앞에서 언제나 빛나던 우리들의 힘과 개인의 희생은 우리의 내일을 희망으로 이끌었다.
한데 지금은 모르겠다. 불과 10년 전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모습에 이제 내일이 두렵다. 10년 전에 보여주었던 신뢰와 자신감은 불신과 냉소와 열패감으로 바뀐 채 사회 전반에 도저하게 흐르고 있다는 생각이다. 확인되지 않은 소문과 온갖 설들이 난무하고 그 속에서 사람들은 길을 잃은 느낌이다. 어디에도 구원병은 없다.
그저 모두 다 내일이 두려운 모양이다. 벌써 주변에는 명예퇴직을 한 친구들이 늘어나고, 사원 감축을 골자로 구조조정 중인 회사도 있으며, 자신과 가족의 꿈을 묻은 가게와 공장의 문을 닫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에게 내일이란 단어는 불안과 두려움의 이음동의어이다. 또 무엇보다 그 어렵다는 시기에도 좋은 작품에 대한 열망으로 꿋꿋하게 버티던 소설가 친구들이 하나둘 생활인을 표명하고 나섰다. 타인이 알아주든 말든, 묵묵히 자신이 쓰고자 하는 글을 쓰던 동료들이 이제는 생활인이 되기로 했다는 것이다. 달리 말해 그동안 거북해하던 글들도 이젠 쓰기로 했다는 것이다. 나 역시 최근 들어 그런 각오를 한 터였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당연한 이야기지만 왜 그게 슬프게 들렸는지. 왜 그들이 자신들이 쓰고 싶은 글을 쓰지 못하고 대중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분칠을 해야만 하는지.
하지만 언제나 위기 속에 기회가 온다고 했다. 나 역시 지금, 내가 달라져야 할 때라는 것을 안다. 살아남기 위해, 좀 더 오래 글을 쓰기 위해 지금까지와는 다른 모습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것을 안다. 남은 삶을 위해, 어떤 삶이든 살아 있음은 숭고한 일이므로, 그 숭고한 삶을 위해 남은 생을 헌신할 필요가 있다. 절망은 금물. 다만 지금 아쉬운 것은 10년 전 그때처럼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신뢰의 회복이 아닐까. 왜냐하면 10년 뒤에도 우리는 이 땅에서 살아가야 하므로. 그날을 위해. 당장에 오늘 하루를 현명하게 살아야 할 것이다.
[[은미희 / 소설가]]
기사 게재 일자 2008-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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