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잃다
은미희
헉! 상혁은 숨이 멎는 듯했다. 아니, 처음부터 그렇게 놀라지는 않았다. 그러려니, 평소대로 똑같으려니 생각하면서 건성 지나쳤다. 그러다 불현듯 그런 사실을 알고 나서는 불을 맞은 사람처럼 화들짝 놀랐다. 아니, 더 양보해서 그런 사실을 인지하고 나서도 몇 초 동안은 자신의 의식이 빚어낸 혼란이거나 잘못 본 거라 생각했고, 그것마저도 아니라는 것이 확인되자 비로소 숨이 멎을 듯한 두려움이 찾아왔다. 찾아왔다는 표현 역시 너무 밋밋했다. 일시에 쳐들어왔다거나, 허방에 빠지는 듯 아득함을 느꼈다거나, 무언가 묵중한 둔기로 뒤통수를 한 방 되게 얻어맞은 듯한 충격이었다고 해야 옳을 표현이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이건 현실이 아닌, 공상영화 속에서나 나옴직한 일이었다. 상혁은 얼굴을 바투 거울에 가져다 댔다. 자명한 사실이었다. 분명, 자신이 잘못 보았다거나 의식이 빚어낸 환영은 아니었다. 그럼, 무언가 잘못되었음이 틀림없었다. 거울 뒷면의 수은이 벗겨져 반사작용을 제대로 못한다거나 아니면 빛의 난반사로 이런 현상이 빚어진 걸 거다. 그도 아니면 다른 원인이 있거나. 그러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상혁은 먼저 거울의 뒷면부터 살펴보았다. 하지만 거울은 단단히 벽에 부착돼 있어서 뒤를 볼 수가 없었고, 어디 한군데 얼룩진 곳이 없는 걸로 보아서는 뒷면 역시 깨끗할 터였다. 형광등 또한 평소대로 빛을 토해내면서 상을 굴절시키고 왜곡시키는 난반사 따위는 없었다. 설령 난반사가 있다 하더라도 일그러진 모습으로라도 거울에 들어 있어야 했다. 헌데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상혁은 손바닥으로 거울의 표면을 문질러보았다. 차갑고도 매끄러운 질감이 손바닥에 감지됐고, 손바닥이 지나간 자국 또한 선명하게 남았다. 그런데 왜 거울에 자신의 모습이 맺히지 않는단 말인가. 평소처럼 거울은 자신을 담아내야 했다. 흰 피부에 미끈한 이마와, 단정한 이목구비까지 거울은 있는 그대로 담아냈다가 토해내야 했다. 그러면 상혁은 자신의 모습을 흡족한 기분으로 바라보며, 나르키소스의 심정으로 하루를 살아갈 힘을 얻고, 또 열심히 살아가야 했다.
헌데 자신의 모습이 사라져 버리다니. 더 기가 막힌 일은 거울이 선택적으로 사물을 담아낸다는 사실이었다. 커다란 거울의 맞은편 벽, 타일로 마감한 벽에 걸어놓은 미로의 작은 복제 그림은 거울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고, 모서리에 붙여놓은 선반이나 타월 장 역시 거울 속에 오롯이 들어 있었다. 천장도, 빠끔히 열려 있는 욕실 문도, 수건걸이에 걸려 있는 노란 수건도 거울은 평소대로 무심하게 잡아내고 있었다. 헌데 유독 상혁의 모습만 보이지 않았다.
상혁은 황급히 목욕탕을 빠져나와 현관 앞 거울로 다가갔다. 쿵쿵쿵. 가슴이 뛰었다. 설마 현관 앞 거울까지 목욕탕 거울과 같은 이상한 마술은 부리지 않을 것이다. 상혁의 움직임을 감지한 현관 센서 등은 충실히 빛을 토해내며 여느 때와 다름없음을 보여주었다. 이건 좋은 징조였다. 아무렴. 여느 때처럼 자신의 체온을 감지한 센서 등이 불을 밝히는 것처럼, 모든 게 다 정상이고, 거울 또한 틀림없이 자신을 잡아낼 터이다.
상혁은 심호흡을 하며 현관에 부착된 거울을 쳐다보았다. 언제 닦았는지 모르게 거울에는 뿌옇게 먼지가 끼어 있었고, 한쪽 가에는 무언가 되직한 말국이 튀었는지 점점이 얼룩까지 져 있었다. 집안 초입에 있는 거울은 복을 불러들인다며 늘 깨끗이 닦아 두는 게 좋다는 인테리어 풍수지리의 글을 보고 닦아야지 마음먹었는데 지금까지 얼룩은 그대로였다.
상혁은 거울에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댔다. 그러고는 이내 한 발짝 물러나 거울을 보았다. 눈을 비비기도 하고, 손을 흔들어도 보았지만 테두리가 진갈색 원목으로 장식된 타원형의 현관 거울 어디에도 상혁은 들어 있지 않았다. 아니, 현관의 거울 역시 상혁을 거부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불이 켜짐으로써 기대를 갖게 만들던 좋은 징조는 상혁에게 해당되지 않았다. 하긴 복권당첨 같은 예기치 않은 행운은 언제나 남의 몫이었다.
욕실 거울처럼, 현관 거울 또한 주변의 잡다한 사물들은 여과 없이 그대로 담아내면서도 유독 상혁만 거부하고 있었다. 맞은 편 하얀 벽지의 요철 무늬 속에 끼인 때까지 충실하게 잡아내면서도 거울은, 아니 거울들은 상혁만 고집스럽게 거부하고 있었다. 이럴 수는 없었다.
상혁은 자신의 팔을 힘껏 꼬집어보았다. 어찌된 게 상혁의 팔은 여자들의 그것보다도 더 미끈하고 하얬다. 으읏. 자신이 의도했던 것보다 손가락에 더 많은 힘이 실렸던지 꼬집힌 자리가 이내 빨갛게 물이 들며 욱신거렸다. 얼얼한 통증으로 보건대 분명 꿈은 아니었다. 헌데 이게 무슨 조화란 말인가. 하룻밤 사이에 자신의 모습이 사라져버리다니. 현실에서 어디 가당키나 한 일이던가.
상혁은 손바닥으로 자신의 얼굴을 쓸어내렸다. 뜨듯한 체온은 물론 이목구비의 굴곡이 그대로 느껴졌고, 하룻밤 사이에 비죽이 자란 수염이 제법 억세게 손바닥을 찔러댔다. 체온이 느껴지는 것은 그나마 다행한 일이었다. 상혁은 체온이 느껴진다는 사실만으로도 눈물이 날 만큼 안도감이 들었다.
아니, 행복했다. 체온이 있다는 사실은 살아 있다는 증거였으므로. 몸속에서 빠르게 돌고 있을 식지 않은 피톨들의 온기는 간밤에 돌연사라는 그 급작스럽고도 곤혹스러운 일이 자신에게 일어나지 않았다는 증거이다. 그러니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평소에 그럴 징후는 얼마든지 있었다. 갑자기 숨이 찬다거나 가슴을 쥐어짜는 듯한 통증이 발작처럼 찾아오기도 했다.
기억이 깡그리 사라질 정도로 술에 취해 들어와 죽은 듯 자다가 극심한 두통 속에 깨어나 체머리를 흔들며 지나간 시간들의 파편을 주워 모아 재조합할 때도 많았다. 그래도 사라져버린 시간들이 있었다. 조각 그림 맞추듯, 시간의 조각들 가운데 비어 있는 조각이 문제였다. 그럴 때면 주위 사람들로부터 그 조각에 대한 정보를 얻어야 했는데, 그게 영 민망했다.
아무튼 상혁은 최근 들어 돌연사라는 걱정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죽는 일이 어디 시간과 순서 정해놓고 가는 것이던가. 홍시보다 땡감이 먼저 떨어질 수도 있는 법. 태어나는 거야 어쩔 수 없다지만 죽는 일은 순서가 없었다. 그러니 상혁은 거울에 자신의 모습이 잡히지 않는 순간, 간밤, 돌연사에 대한 의혹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어제 무슨 일이 있었던가. 상혁은 지나간 시간들의 궤적을 뒤적였다. 여느 날과 별반 다를 게 없던 날이었다. 하긴, 특별한 일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어제 출근해보니 회사 복도에 마련돼 있는 게시판에 인사위원회를 소집한다는 방이 붙어 있었고, 상혁은 당연히, 그 인사위원회가 무슨 연유로, 또 누구를 징계하기 위해 소집되는지도 알고 있었다. 블루보드에 불온전단처럼 나붙은 방이 싸하니, 상혁의 가슴을 그었다. 베인 그 자리에서 피가 뚝뚝 떨어졌다.
출근하던 동료들이 곁에서, 혹은 뒤에서, 아니면 상혁과 나란히 서서 나붙은 방을 보고는 흘금거리면서 상혁으로부터 떨어져나갔다. 귀가 먹먹해지더니 일순 모든 소음들이 거세되었다. 눈앞도 컴컴해졌다. 손에는 진땀이 고이고, 찌릇찌릇 등 쪽으로 정전기 같은 전류가 일더니, 입안이 밭았다. 오금에서 힘도 풀렸다.
누군가 자판기에서 지독히도 쓰고, 지독히도 달고, 지독히도 맛이 없는 커피 한 잔 뽑아다 주며 힘내라고 했고, 또 누군가는 내 그럴 줄 알았다, 라며 똥 묻은 개 한 마리 보듯 멀어져갔다. 상혁은 눈가에 꼿꼿이 힘을 주며 그들을 보려 했지만 자꾸만 눈가가 처져 내렸다.
그럴수록 의연히, 당당하게,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절대 그런 일은 없었다는 태도로 동료들을 대해야 했지만 그 놈의 눈가는 단 한시도 짱짱하게 버텨주지 않았다. 아마 홧홧하니, 열기도 고였을 것이다. 니네들은 안 받아 처먹었냐? 울근불근 가슴속에서 고약한 말들이 괴어올랐지만 한 마디도 입 밖으로 새나가지 않았다. 대신 자신의 자리로 돌아와 손바닥으로 얼굴만 쓸어내렸다.
순전히 재수가 없었다. 홀인원 노래방. 노래방 간판에 홀인원을 갖다 붙이다니. 홀인원이 무엇인가. 명사로, 한번 만에 구멍 속으로 공을 집어넣는다는 골프 용어인데, 그 구멍이라는 말이 자꾸만 다른 것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게다가 그 의문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 체구가 우람하고, 머리가 기형적으로 큰 홀인원 노래방 주인은 골프채 한번 쥐어보지 않은 사람이었다. 비거리가 뭔지, 싱글이 뭔지, 티샷이 뭔지도 모른 사람이 홀인원을 상호로 쓰다니. 게다가 그 노래방 주인은 구멍이라는 말을 발음할 때마다 표정과 목소리가 달라졌다.
상혁은 며칠 전 그 홀인원 노래방에서 발바닥이 뜨겁도록 놀았었다. 붉은 카펫을 깔아놓은 복도며, 금색의 테두리를 두른 입구부터 범상치 않은 그 홀인원 노래방은 물 좋기로 소문이 자자했다. 금테 두른 노래방이라는 소문을 들은 사람들은 확인 차 홀인원 노래방을 찾았고, 소문과 한 치 다름없음을 직접 목도한 사람들은 주인의 노력을 가상히 여기며 단골이 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헌데 홀인원 안에는 퀴퀴하니 이상한 냄새가 낮게 떠돌았다. 지린내도 아니고, 구린내도 아닌. 그 정체불명의 냄새를 없애기 위해 인공의 향을 뿜어댔지만 오히려 그 향이 냄새를 더 지독하게 만들면서 머리를 지끈거리게 만들었다.
하여간 방마다 금빛 테두리를 자랑스럽게 두른 방 안에서 사람들은 손가락 하나 찔러 넣을 수 없을 만큼 도우미 여자들을 꼭 부둥켜안고 춤을 추거나, 우악우악, 악을 써대며 노래를 불렀고, 혹은 디스코 메들리를 입력해놓은 채 탬버린 창창, 두들기며, 후익후익, 추임새 섞어가며 디스코를 추었다. 또 어떤 이는 반주는 나오는데 노래는 부르지 않고 딴 짓에만 열심이거나. 어쨌든 홀인원의 노래방은 요모조모 사람들에게 요긴하고도 행복하게 쓰였다.
상혁은 그 세 가지 모두였다. 옆에는 막 물이 오르기 시작한 탱글탱글한 여자애도 있었다. 지혜. 이름은 가명일 것이다. 나이가 스물이라고 했지만, 아직 단단하지 않은 살성으로 미루어보건대 스물이 아니라 열여섯 정도일 것이다. 어쨌든 상혁은 흐뭇했다. 언제 자신이 그같이 풋내 나는 여자애를 안아볼 수 있겠는가. 그곳에는 상혁 말고도 또 다른 사내가 세 명이 있었고, 지혜 말고도 세 명의 풋풋한 여자애들이 있었다.
색색의 유리조각을 붙여 만든 미러볼은 천장에서 느릿느릿 돌아가고, 사람들의 얼굴이 그 색색의 점들로 얼룩졌다. 푸르고, 노랗고, 빨간 빛의 얼룩들은 사내들의 욕망을 건들며 멀미를 일으켰다. 긴 머리에 갸름한 얼굴, 흰 낯빛의 지혜는 말 그대로 바다 속에서 막 올라온 인어였고, 자신과 또 다른 세 명의 사내들은 굶주린 늑대들이었다.
어쨌든 좋은 것은 좋은 것이었다. 주머니 속에는 모서리가 살아 있는 지폐로만 제법 두툼하게 담겨 있는 봉투가 들어 있고, 앞에는 이렇게 기름진 안주에 맛 좋은 술, 게다가 쓰다듬기만 해도 생을 출렁이게 만드는 여자애까지 있으니 사는 맛이 바로 이런 거란 기분도 들었다. 그랬다. 상혁은. 양심 운운하며 남루한 인생으로 사느니, 적당히 삶과 거래하며 풍요롭게 살고 싶었다. 사이비 기자, 날라리, 기생충, 눈치꾼, 협잡꾼, 야바위꾼, 브로커…… 그 어떤 모멸적 호칭으로 불리어도 좋았다.
자신의 귀에만 들리지 않는다면. 아니, 자신의 귀를 간지럽게 하더라도 주머니만 든든하다면야, 당장에 주어진 삶이 즐겁고 행복하다면야, 그쯤은 배포 든든하게 얼마든지 참아줄 수 있었다. 주변을 둘러봐도 그렇다. 친일파에, 악덕기업주에, 비리공무원들에, 철면피한 상인들에, 자신밖에 모르는 이기적 인간들까지. 그들은 모두 폼 나고 멋지게 살고 있지 않은가. 한때의 시련만 견디면, 깊숙이 박혀 있는 가시처럼 따끔거리게 만드는 양심에 무심해질 수만 있다면, 나머지 인생은 보장된 파라다이스 세상에서 살 수 있는 거다.
상혁은 무조건 그들 편이었다. 정의와 맞바꾼 황금으로 성채를 쌓고, 양심을 저버린 대가로 안락한 잠자리를 얻으며, 공의를 조롱한 공로로 기름진 식탁을 제공받는 사람들. 그래서 가재는 게 편이라고 했다. 언제든지 자신도 기회만 되면 그 불속으로 뛰어들 각오가 돼 있었다. 연금술이 따로 있던가. 현대의 연금술사는 바로 이런 종류의 사람들일 터.
로키산맥을 배경으로 가사가 입력된 화면을 뒤로 한 채 낙지들처럼 흐느적거리고 있는 저 인생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초등학교 동창생들. 삼십 중반에 벌써 앞머리가 훤하게 벗겨진 한 놈은 아직도 제 부모에게 손 내밀어 담배 값을 해결하고 있고, 네모난 얼굴에 눈이 일자로 찢어져 인상이 매섭게 보이는 한 놈은 제 마누라 치마폭에 싸여 연명하고 있었고, 남은 한 놈은 곱상한 외모에 호감을 주는 얼굴이었지만 아직 변변한 일자리 하나 얻어 붙박이 출근하지 못하고 닥치는 대로 아르바이트 일을 하며 하루하루를 해결해나가는 애잔한 인생들이었다.
이 세상을 탓해야 할지 아니면 녀석들의 무능을 탓해야 할지 상혁은 잣대를 어디에 들이대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어떤 때는 이 세상을 탓했고, 어떤 때는 녀석들의 무능을 탓했다. 아무리 세상이 어려워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고 했거늘. 하지만 녀석들에게 솟아날 구멍은 없어 보였다. 그들의 어깨 죽지에 빛나는 날개가 돋지 않는 이상 녀석들은 세상의 중심으로 이동해 들어갈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무슨 재주로 녀석들이 날개를 달 수 있단 말인가. 녀석들은 다만 오늘의 이 횡재를 황감해하며 게걸스럽게 놀 뿐이었다. 상혁은 그들의 몸부림이 있어 더욱 행복했다. 물위로 끌어올려진 물고기의 퍼덕거림처럼 왠지 녀석들의 몸짓에 그런 비릿함이 느껴졌고, 처절함이 배어 있는 듯했다. 있는 자의 거만함. 시혜자의 느긋함. 이래서 더 가지려고 하고,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려 하는 걸 거다. 상혁은 가진 자가 더 가지지 못해 안달하는 괴로움을 알 것 같았다.
문이 열리고, 짧게 자른 머리에 왁스를 발라 가닥가닥 뭉쳐놓은 종업원이 술과 과일안주를 가지고 들어왔다.
“사장님께서 가져다드리라고 해서.”
이 노래방 사장이 보내준 쥐약이었다. 작정을 한 모양이었다. 자칫하면 징역을 살 수도 있는데, 아니면 지금 들여보내주는 술값의 수십 배나 되는 벌금을 물어야 할 형편인데, 이 상황에서 아끼려 든다면 그 자가 더 바보일 것이다. 홀인원 노래방에서 최고품으로 친다는 지혜를 넣어줄 때부터 상혁은 짐작하고 있었다.
“이햐! 오늘은 땡잡았다. 너무 좋다, 좋아. 고맙다. 네가 아니면 언제 우리가 이런 호사를 다 누려보겠냐. 응?”
녀석들의 잇사이로 바람이 쉭쉭 새나왔다. 녀석들은 새로 들어온 술과 안주에 또다시 입이 귀에 걸렸다. 솜씨껏 깎아 내온 과일안주는 손대기가 민망할 만큼 근사했고, 새로 내온 술은 녀석들이 마음 한번 단단히 먹지 않으면 마시지 못할 고급 위스키였다. 하긴 녀석들이 언제 한번 이렇게 마셔보겠는가. 한 놈의 손이 제 몫으로 배당된 인어의 엉덩이를 주물거리고 있었다.
인어는 어지간히 남자들의 손길에 익숙해졌는지 몸을 틀지도 않았고, 함부로 몸속을 비집고 들어오는 늑대들의 터럭손을 제지하지도 않았다. 마음껏 그러라지. 펑퍼짐한 지 마누라 엉덩이 만지는 것도 이제 신물이 날 때도 됐을 테니까.
나이 오십. 이마가 번쩍이는 주인은 조금 전 따로 봉투를 상혁에게 건네주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내가 누굽니까? 마음 편하게 먹고 잊어버리십시오. 뒷일은 내가 다 책임지고 수습하겠습니다.”
상혁은 봉투를 안주머니에 찔러 넣으며 자신 있게 말했다. 헐헐헐, 바람 빠진 소리로 웃음 몇 번 흘리기도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상혁은 자신 있었다. 상혁은 그들을 잘 알았다.
공생공멸이라고, 이쪽저쪽 납득할 만한 수준에서 일을 풀면 만사오케이다. 단속을 나오는 경찰들 또한 상혁과 질펀하게 놀아온 사이였고, 세세하게 따지고 들면 구멍동서 아닌 사람 없었고, 베갯동서 아닌 사람 없었다. 알면서도 속고, 모르면서도 속는 게 이 바닥 생리이고, 요즘 세상의 이치였다. 또 그렇게 알면서도 모르는 척, 모르면서도 아는 척하면서 사는 게 잘 사는 일이었다.
짐작했겠지만 노래방의 매춘단속에서 홀인원이 본보기로 걸려들었던 것이다. 남자들과 함께 있던 도우미 여자들이 코맹맹이 소리로, 친구고, 애인이고, 삼촌이라고 우겼지만 마음먹고 덤벼든 형사들을 속일 수 없었다. 게다가 금테 둘렀다는 소문에 문전성시를 이루었던 홀인원을 시기한 주변 노래방의 제보도 있었던 터라 경찰역시 봐주고 싶어도 봐줄 수 없었을 것이다.
넌 가만히 있어, 다 내가 해줄게. 우악우악. 내 품에 둥지를 틀어 봐…….
녀석들은 군살이 덕지덕지 붙은 허리를 흔들어대며 소리들을 질러댔다. 그들이 몸을 흔들 때마다 투덕투덕 붙은 살점들이 출렁였다. 그 살점들이 불행의 병소처럼 보였다. 상혁은 한껏 느긋한 자세로 자신에게 주어진 이 바닥 모를 향연의 쾌락을 누렸다. 당장, 한 발만 내디디면 그대로 시커먼 허방 속으로 굴러 떨어진다 해도 좋았다.
사내로 태어나서 인생 까짓, 한번 폼 나게 놀다가 가면 그만이지. 오기도 창창했다. 오늘 밤 자신은 인어와 세상 끝장나도록 놀아볼 것이다. 인어의 비늘을 세고, 인어의 은밀한 곳에 깃발 꽂으며, 지뢰 찾기 게임도 하고, 인어의 입속도 뒤지고, 인어의 뱃속도 훔쳐보고, 인어의 숨겨진 발가락을 찾아 저녁 내내 탐험에 나설 것이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상혁의 영화는. 날이 새자 인생이 이상하게 꼬이기 시작했다. 가끔 단속을 나오는 경찰들과 형님아우 부르면서 이상한 족보관계를 유지해왔지만, 그때만큼은 아무런 약발도 듣질 않았다. 야비다리 같은 기자의 특권을 이용해 그들의 구린내를 눈감아주고, 때로는 은근한 협박의 재료로 이용해왔지만 그때만큼은 어떠한 회유나 협박도 듣지 않았다.
당황스러운 쪽은 상혁이었다. 그럴 수는 없었다. 마법의 지팡이가 말을 듣지 않다니. 이건 시나리오에 없었던 상황이었다. 물론 매사가 마음먹은 대로 움직여준다고는 믿지 않았지만 이번만큼은 상혁 자신이 의도했던 대로 따라주어야 했다.
상혁을 철석같이 믿고 아끼던 인어들까지 내주던 사장은 회사에 상혁을 촌지나 뜯는 비리기자로 고해 바쳤다. 하룻밤 사이에 사장은 짜잔, 변신 마술을 하는 배우처럼 얼굴색을 바꾸고 으르렁거리며 금방이라도 상혁을 물어뜯을 것처럼 굴었다. 상혁은 사장에게 자신의 마법의 지팡이가 고장이 나 할 수 없었다는 설명을 하지 못했다. 마술지팡이를 수리해서 다시 힘써 보겠노라 이야기했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삼류 잡지라는 오명에 낯 뜨거워하던 회사는 한 명쯤, 경고성 희생양을 고르고 있는 중이었다. 너도나도 먹을 것만 있으면 앞뒤 안 가리고 덤벼들어 낮게 떠다니는 똥파리들처럼 구린내 나는 주변을 선회하는 기자들에게 보란 듯이 참수형 당한 희생양의 머리를 저자거리에 매달고 본보기로 삼으려 했던 것이다. 희생양의 피가 더 붉고 선명할수록, 선혈의 이미지가 섬뜩하면 할수록 그들의 계획은 빛을 발할 것이다.
그리고 오늘이었다. 홀인원의 일과, 회사 게시판에 나붙은 방이 오늘 자신의 모습이 사라져버린 일과 무슨 연관이 있을까. 물론 평소처럼 룰루랄라 상쾌한 기분으로 하루를 시작할 수 없다는 것은 알았다. 하지만 아무래도 거울에 자신의 모습이 비치지 않는다는 사실은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자신이 사라져버렸는데, 어떻게 사람들을 만나고, 아무 일 없다는 듯 일상을 살 수 있겠는가.
게다가 어디 한 군데 땟국이 져 있지나 않는지, 이 사이에 고춧가루가 끼어 있지나 않는지, 머리에 가르마가 두세 개 생겨나 있지는 않는지, 수염은 잘 깎여 있는지, 상혁은 제 눈으로 확인해볼 수가 없어 답답했다. 특히 귀 언저리에 꼬불꼬불하게 자라난 털은 상혁을 꾀죄죄하게 만들었고, 그런 탓에 늘 세심하고 주의 깊게 귀 부근을 손질했는데, 오늘은 그것마저도 확인할 수가 없었다.
아무튼 씻지 않은 채로 출근할 수는 없었다. 상혁은 보이지는 않았지만 손으로 더듬거려 가면서 면도를 하고, 얼굴을 씻고, 머리를 다듬고 나서 작은 주머니 가방에 면도기와 빗들을 챙겨 넣었다. 무슨 조화인지 집에 있는 거울은 자신을 담아내지 못하지만 다른 거울은 평소대로 자신의 근사한 모습을 그대로 되비쳐줄 것이다. 그 사이에도 거울은 고집스럽게 다른 사물들을 담아내고 있었다. 환장할 노릇이었다.
상혁은 현관을 나서기 전에 심호흡을 했다. 과연 사람들은 어제처럼 자신을 알아보며 인사를 하고 말을 걸어 올 것인가. 표정 밑에 자신들의 속내를 숨긴 채 그렇게 터럭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고, 검불 털어내듯 그렇게 떨어져나갈 것인가. 아니, 그들의 시선이 투명인간 대하듯 자신을 투과해 지나가면 어찌할 텐가. 상혁은 살면서 이런 날이 오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땡. 엘리베이터는 상혁이 서 있는 오층에서 멈춰 서서는 스르르 은빛 문을 열어젖혔다. 그 느낌이 어디서부터 연유했는지는 기억할 수는 없지만 밀폐된 좁은 사각의 공간으로 들어설 때마다 상혁은 여자의 은밀한 신체 안으로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안온하고도 따듯한. 하지만 오늘은 그 느낌마저 찾아오지 않았다. 왜 아니겠는가. 자신이 사라져버렸는데. 안에 여고생이 한 명 타고 있었다.
흰 상의에 붉은 기가 도는 체크무늬 스커트를 엉덩이가 드러나도록 꼭 재게 고쳐 입은 교복차림의 여학생. 작은 공간에서 함께 호흡하고 있으면서도 그 여학생은 마치 저 혼자 있는 사람마냥 상혁을 무시한 채 거울을 보고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하단에 산부인과 상호가 찍혀 있는, 양쪽 벽에 부착된 거울 속에도 상혁의 모습은 들어있지 않았다. 음음, 일부러 소리도 내보았지만 여학생은 무심했다.
“이봐 학생. 학생 눈에 내가 보이나?
밑도 끝도 없는 상혁의 질문에 머리를 헐렁하게 뒤로 묶은 여학생은 불안한 표정을 지으며 뒷걸음질 쳤다.
“내가 보이느냐고 묻지 않아. 내가 보여? 말해줘.”
상혁의 음성은 성말랐고, 강압적이었으며, 가시가 박혀 있었다. 상혁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여학생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표정으로 구석에 바짝 몸을 붙이고 섰다. 상혁은 여학생 앞으로 다가섰다. 여학생의 가슴이 격하게 오르내리고 있었다. 상혁은 단지 자신이 보이느냐고 묻고 싶었을 뿐이었다. 학생의 눈에 자신이 보이냐고. 더 이상 자신을 볼 수가 없으니 보이는 대로 이야기 해달라고. 그 이상은 없었다. 정말, 맹세컨대, 그 이상은 없었다.
한데 이상한 일이었다. 교복 상의 단추가 겨우 잠겨 있는 여학생의 탱탱한 가슴을 보자 내부에서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뜨거움이 솟아올랐다. 게다가 두려움에 질려 있는 여학생의 표정을 목도하자 이해할 수 없는 흥분이 상혁을 사로잡았다. 이 여학생을, 중키에 목이 가는 이 여학생을 마음껏 유린한다 해도 아무도 보지 못할 것이다.
이미 이 지상에서 자신의 모습은 사라져 버리지 않았는가. 살 떨리게 만드는 이 흥분은 자신의 힘으로도 어떻게 제어할 수 없는 생의 근원적 에너지였고, 아비에게, 아비의 아비에게, 아비의아비의 아비에게 물려받은 이 에너지가 있었기에 상혁은 지금 이 순간 존재해 있는 것이다. 그러니 누구를 탓할 수도 없고, 이 에너지를 없앨 수도 없었다.
상혁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거칠어진 만큼 빠져나온 날숨도 뜨듯했고, 여학생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상혁의 손이 막 여학생의 가슴에 가 닿는 순간 엘리베이터는 일층에 도달해 스르륵, 문을 열어젖혔다. 그 열린 공간으로 여학생은 재빠르게 빠져나갔다. 일순 상혁의 손은 허공에서 헤맸다. 상혁은 황급히 도망가는 여학생의 뒷모습을 곤혹스럽게 바라보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려는 순간에 빠져나왔다. 상혁은 기분이 영 개운치 못했다.
젠장. 상혁은 미간을 찌푸리며 잇새로 침을 쏘아버렸다. 육십 이쪽저쪽, 한때는 대기업에서 중간 간부까지 지냈다는 아파트 관리인이 한 손에는 집게를 들고 한손에는 쓰레기가 담긴 양동이를 든 채 아파트 입구를 청소하고 있었지만 가까이서 침을 뱉는 상혁에게 언짢은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상혁은 하루 사이에 자신이 투명인간이 돼 버린 기분이었다. 누구와도 눈을 마주치지 않는다는 사실은, 마주칠 수 없다는 현실은, 꿈에도 생각지 못한 두려움이었고, 공포였다. 철저히 혼자라는 느낌이 든 것도 그 순간이었다.
그러나 세상은 하나도 달라진 게 없었다. 출근길 풍경도, 종량제 봉투를 사용하지 않았다며 몇 주일째 방치돼 있는 도로변의 쓰레기도, 그대로였다. 사람들은 어제와 다름없이 시계를 흘금거리며 초조하게 버스를 기다리거나, 허옇게 각질이 인 얼굴로 옹색하게 도로변에 주차해놓은 풍뎅이 같은 자신들의 작은 차로 종종걸음쳐갔다. 한데 왜 자신만 달라졌단 말인가. 이상한,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어떤 자연현상이 자신을 슬쩍 건드리고 간 건 아닐까?
‘해피뉴스 굿 피플’. ‘뉴스’와 ‘굿’이란 글자가 플라타너스의 커다란 잎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다. 회사 로고였다. 말 그대로 행복한 소식을 전해주는 좋은 사람들이라는 말이다. 아닌가? 행복한 소식과 좋은 사람들이라는 말인가? 그도 아니면, 좋은 사람들을 소개해주는 행복한 뉴스라는 말인가? 어쨌든 삼층의 낡은 건물에 상혁이 일하는 월간잡지사가 들어 있었다. 그러나 말이 행복한 뉴스, 좋은 사람이지, 내용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언제나 내용이 부실하면 겉치레가 요란한 법. 어쨌거나 상혁은 지금까지 자신의 이름을 올려놓고 밥 벌어먹고 사는 회사를 그런 식으로 폄하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도 해피뉴스 굿 피플이 있었기에 이만큼이나 배가 불렀고, 등이 따스했으며, 김상혁, 이름 석 자가 박힌 명함을 돌리며 사람들과 말 섞고 살았다.
인사위원회를 소집한다는 방은 아직 제거되지 않은 채 사람들에게 경고를 보내고 있었다. 비리기자의 최후를 보여주마. 상혁의 눈에 방은 그렇게 읽혀졌다. 하긴 다른 사람들 역시 그렇게 읽을 것이다.
상혁은 또다시 얼굴이 뜨듯해졌다. 이런 때일수록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어야 하는데. 업주가 오히려 자신을 음해하려고 한다며, 분개한 모습까지 보여야 하는데 자꾸만 꼬리가 사타구니 속으로 숨어들었다. 상혁은 그때 문득 자신의 모습이 사라져버린 일도 나쁘지만은 않다는 생각을 했다.
하루 일과를 앞둔 아침녘의 사무실은 산뜻한 긴장과, 일에 대한 지루함과, 간밤의 피로가 적당히 버물어진 채 뒤섞여 있었다. 누군가는 간밤의 술자리가 질겼는지 과음의 흔적이 역력했고, 누군가는 말끔했으며, 또 누군가는 뭐가 불만인지 표정이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그런 얼굴들로 어떤 이는 전화통을 붙잡고 아침부터 어디론가 길게 통화를 하고 있었고, 어떤 이는 신문을 뒤적이며 쯧쯧 혀를 찼으며, 어떤 이는 지지리도 맛이 없는 복도 자판기에서 뽑아온 커피를 홀짝이고 있었으며, 또 어떤 이는 다른 이와 간밤의 일들에 대해 낮은 목소리로 까발리며 키득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상혁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그러면 그러라지. 상혁은 명치끝에서 오기 같은 게 짱짱하니 뭉쳐짐을 느꼈다. 누가 뭐래도, 현실이 어떻든 간에, 상황이 좋든 좋지 않던, 자신은 자신의 일만 하면 되는 것이다. 타인의 일을 넘보려 해서도 안 되고, 자신의 일을 타인에게 미루어서도 안 되는 것이다.
그저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성실하게 수행 하는 것. 그것만이 최선이다. 게다가 오늘은 그 어느 때보다도 중요한 날이었다. 이런 날에 공연히 정신이 산란하면 안 되는 일이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상혁은 화장실로 갔다.
역시나 회사 화장실 거울도 자신을 거부했다. 작고 낡은 세면대 위에 보자기만한 크기의 거울이 아무런 장식 없이 붙어 있는데, 그 거울 또한 상혁의 모습을 담아내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이런 일은 있을 수 없었다. 영업부서의 김 대리가 볼일을 마치고는 바지 지퍼를 올리며 거울 앞 세면대로 다가왔다.
“이봐. 자네 말이야. 솔직하게 대답해줄 수 있나?”
상혁이 그렇게 물었지만 그가 과연 자신을 볼 수 있을지나 의문이었다.
“자네 말이야. 자네 눈에 내가 보이나?”
물으면서도 상혁은 꺼림칙한 기분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얼굴이 까맣고 키가 작은 김 대리는 상혁의 소리에 흘긋 쳐다보더니 아침부터 웬 미친 소리냐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만으로도 상혁은 얼마간 안심이 되었다. 김 대리의 눈에 상혁이 보이지 않았더라면 그는 아마 두려운 표정부터 지었을 터이다.
김 대리는 거울 속에 이리저리 자신의 얼굴을 비추어보고는 화장실을 나갔다. 잠시 그의 뒷모습을 쳐다보다 고개를 돌리니 한쪽 모서리가 나간 거울에 지린내 나는 화장실의 풍경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지잉-. 지잉-. 주머니 속에 들어 있던 핸드폰이 몸을 떨었다. 펄감이 있는 은빛 핸드폰의 모니터 창에 노친네라는 글자가 잔뜩 얼굴을 우그러뜨린 이모티콘과 함께 떴다. 육십갑자를 네 해나 넘긴 노인, 아버지였다. 상혁은 발신자를 확인하자마자 모니터 창에 나타난 이모티콘과 같은 표정을 짓고는 쩟 혀를 찼다. 지잉-. 지잉-. 핸드폰은 질기게도 울었다.
한 곳에 진득하게 눈동자를 고정시키지 못하고 자꾸만 이리저리 굴리는 통에 보는 사람마저 정서적 불안을 느끼게 만드는 노인은 왕년에 잘 나가던 도박판 기술자였다. 그 노인이 상혁에게 전화를 건 이유는 딱 한가지리라.
첨단 장비에 밀려 이제는 은퇴한 기술자의 추레한 말년을 살고 있는 노인이 자식에게 전화를 할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노인을 상대로 한 윷놀이 도박판에 끼어 잘 나가던 한때를 무용담처럼 늘어놓으며 생의 말년을 아슬아슬하게 살아가는 그 노인에게 하나밖에 없는 아들, 상혁은 알량한 전주일 뿐이었다.
전국의 도박판을 돌면서 어쩌다 집에 돌아와 씨 하나 빠뜨렸는지, 그게 차라리 더 신기하다면 신기했다. 하긴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전국 곳곳에서 상혁을 닮은 고만고만한 동생들이 살아가고 있는지도. 노인에게 여자가 딱 하나뿐이었다고 말해주는 사람은 없었으니까. 하룻밤 정사에도 예기치 않은 생명이 잉태될 수가 있거늘.
노인의 허랑한 성정으로 보자면 약속할 수도 없는 핑크빛 미래를 애잔한 여인네들에게 남발하고 다녔을 게 뻔하고, 그 여인네들 가운데 두어 명, 오매불망, 노인을 잊지 못하고 불러오는 배를 설렘으로 지켜보았을 지도 모를 일이다. 그 노인은 정작 자신은 아비의 의무는 지키지 않았으면서도 상혁에게는 자식의 의무를 내세워 주머니를 털어갔다.
상혁은 전화기를 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다. 주머니 속에서도 전화기는 멈추지 않았다. 그 진동이, 파장이, 후줄근하게 늘어져 있던 상혁의 물건을 건들었다.
인어의 비늘을 세고, 인어의 몸 구석구석에 깃발을 꽂고, 인어의 몸에서 지뢰 찾기를 한 지가 바로 엊그제인데, 상혁의 물건은 지칠 줄도 몰랐다. 그러고 보니 정희를 만난 지도 꽤 됐다. 상혁은 오늘 일정에 정희를 추가했다.
상혁은 자신의 자리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어쩔 수 없이 시내에서 정신과 병원을 운영하고 있는 선배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선배, 내 말 우습게 듣지 않겠다고 그것부터 약속해요.”
“평소 너답지 않게 왜 그래?”
“그게 그러니까 말이오. 선배, 이런 경우도 있나 모르겠는데 오늘 아침에 말이오. 그러니까 세수를 하려고 거울을 보는데, 내가 보이지 않는단 말이오. 내가 사라져 버렸어요.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일이오?”
아침부터 웬 허튼소리냐고 타박한다면 할 말이 없었다. 상혁의 음성이 하도 진중해서였는지 선배는 다행히 쓸데없는 소리로 몰아붙이지 않았다.
“글쎄, 정확한 이야기는 듣지 못해서 뭐라 단정 지어 말할 수 없지만 해리증상이라는 것이 있지. 어떤 충격이나 고통을 당했을 경우에 그 순간을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았을 때, 기억을 거부하는 거 말이야. 아무튼 시간나면 들러라. 이야기라도 더 들어보게.”
상혁은 전화를 끊고 나서 찜찜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선배의 말대로라면 상혁의 무의식은 더 이상 자신을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말이었다.
선배의 말은 거울이 자신을 거부하는 것보다 상혁을 더 불편하게 만들었다. 하긴 불편하지 않다면 오히려 그게 더 이상한 일일 것이다. 상혁은 마뜩찮았지만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간혹 자신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을 때가 있는데, 앞으로는 굳이 외면하지 않아도 될 터이므로 신간은 더 편할 것이다.
아무리 삼류 잡지사의 뒤가 구린 기자이지만 그래도 양심이라는 것이 있는데. 그 알량한 양심이라도 없었더라면 살아가기가 한결 쉬었을 텐데, 어떻게 된 게 방심하고 있는 사이에 그 놈의 양심은 슬그머니 고개를 쳐들고는 상혁을 당혹하게 만들곤 했다. 그 때마다 상혁은 제 속의 양심에 대고 빈정거렸다.
야, 양심이 밥 먹여 주냐? 배고픈 소크라테스보다 배부른 돼지가 더 낫다. 메뚜기도 한철이라고, 이때 안 뛰면 언제 뛰냐? 야,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푼돈 몇 푼에 영혼을 파냐. 신독이라고, 혼자 있을 때도 몸가짐을 바로 하라고 했거늘, 그렇게 막 싸구려로 살아도 되냐? 자존심과 양심의 대결이었다.
배고픔은 자존심을 위협했고, 배부름은 양심의 희생을 요구했다. 아니, 자존심과 양심은 한 몸이어서 배고픔은 자존심과 양심을 위협했고, 배부름은 그 두 가지를 질식하게 만들었다.
지금은 비록 명함 내밀기 부끄러운 잡지사의 뒤가 켕기는 기자로 자존심과 양심의 밀거래를 통해 목숨을 부지해나가지만 그래도 한때는 정의감에 사로잡혀 살 때가 있었다. 혈기왕성할 때, 비록 부모의 지원이야 기대해 볼 수 없었지만 그래도 젊음 하나 밑천삼아 세상의 밭을 갈러 나가기 위해 나름대로 준비하고 있을 때, 그때는 정의로운 사람이 되고자 했다.
세상의 이상한 셈들을 경멸하고, 자꾸만 은밀한 곳으로 흘러드는 물줄기를 바로잡으며, 흐린 물을 정화시키고, 저 역시 세상에 필요한 하나의 톱니로 살아가고자 했다. 헌데 그것이 여의치가 못했다. 정의로움을 배우기 이전에 먼저 이상한 셈의 배부름에 안주해 버렸고, 그 배부름이 주는 달콤함에 익숙해져서는 하루하루를 땜질하듯 살아갔다.
오늘은 있었지만, 어제와 내일은 없었다. 물론 엊그제와 모레도 없었고, 그보다 더한 과거와 미래도 없었다. 간혹 그게 부끄러울 때도 있었지만, 음지식물처럼 세상의 그늘로만 파고들며 애써 그런 생각들을 털어냈다.
어쨌든 상혁은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의 꼬투리를 알아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적이 마음이 놓였지만 한편으로는 또 그만큼 씁쓸하기도 했다. 오죽했으면 자신조차도 자신을 외면하고 싶었을까.
상혁은 카메라를 챙겨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인터뷰 자리라 사진기자를 요청할 수도 있었지만 인물사진이야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고, 게다가 공연히 군식구를 늘리고 싶지 않았다.
나천만. 이름도 별난 이 작자의 이력이 선거홍보용 명함에 열거된 항목들과 동일한지 그것은 알 수 없다. 상혁의 임무는 오로지 나천만이라는 위인의 지난 행적과 이력들을 과장하고 분칠해 세상에 내놓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가능한 한 미사여구는 다 동원할 터였다. 늘 강조하는 거지만, 좋은 게 좋은 거였다.
나천만이라는 작자가 이번 지방자치단체 기초의회 의원으로 출마한 다른 후보들에 비해 실력으로나, 경력으로나, 인품으로나 월등히 낫다면야 온갖 미사여구로 치장해 주어도 양심에 켕기는 일 따위야 없을 테지만, 속 뒤집어놓고 보면 다 거기서 거기였다.
하나같이 다 똑같은 급수들이었다. 포주노릇을 하던 전과자도 의원하겠다며 나서고, 주먹으로 뒷골목을 평정한 깍두기들도 설쳐대는 판국이니, 선거판이 개판이나 다름없었다.
나천만 또한 지역세를 등에 업고 겨우 체면 유지나 하는 당에 거액을 헌납하고 공천을 받았다는 뒷이야기들이 많았다. 이 공공연한 비밀 하나만으로도 얼마든지 나천만의 목에 올가미를 씌울 수 있었다. 잘하면 오늘 일당은 두둑하게 챙길지도 모른다.
적당히 굴레를 조이기만 하면 알아서 토해내 놓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지옥의 문처럼 버티고 있는 인사위원회 개최 공고문을 무시할 수가 없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은 나천만이 만만치 않은 액수의 광고를 회사에 주기로 약속했었고, 그럼으로 어느 정도 회사에 낯을 세울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상혁은 슬그머니 회사를 빠져나왔다. 인사위원회의 결정이 어떻게 나오든 당장에 주어진 일은 해야 했다.
나천만이 선거캠프로 사용하고 있는 사무실은 여느 후보들의 그것보다도 화려했다. 대형 천에 프린트돼 있는 사진 안에서 나천만은 이를 드러낸 채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의 코 옆에 콩알만한 크기로 돋아나 있는 검은 점은 그 확대된 사진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고, 미간에 가로로 깊이 패여 있는 세 줄의 주름도 보이지 않았다.
“어이구, 김 기자님 오셨어요?”
나천만은 입가가 움푹 패도록 환하게 웃으며 상혁을 맞았다. 상혁 역시 나천만의 웃음과 같은 웃음으로 답례를 했다.
“섭섭합니다. 저한테 먼저 기회를 주셨어야 했는데 다른 후보를 먼저 취재하시다니.”
그의 말대로 상혁은 나천만의 강력한 라이벌인 다른 후보를 먼저 인터뷰했었다. 그들은 그저 고객일 뿐이었다. 기자로서의 직업적 소명 같은 거는 처음부터 없었다. 눈앞에 알짱거리는 사람에게 먼저 눈이 가고, 봉투의 부피에 따라 마음이 가는 것은 인지상정이 아니겠는가. 독자들은 우매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현명했다. 지독한 근시나 원시를 가진 사람들이 독자들이었다.
기자가 사실을 보도해도 잘못된 정보라고 배척하거나 거짓 정보를 제공해도 그게 진실이라고 믿기도 했다. 저들끼리 정보를 제공하고, 나누고, 그것들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며, 자꾸만 거짓정보를 유통시키기도 했다. 게다가 독자들은 자신들이 믿고자 하는 것을 쉽게 수정하지 않았다. 그러니 상혁이 잘못된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그들이 피해를 보았다는 혐의에서도 어느 정도 자유로울 수 있었다.
나천만은 익히 듣던 대로, 생각한 대로, 그리고 예상한 대로, 머리에 든 게 없었다. 아니, 든 게 있기는 했다. 허황한 바람, 탐욕, 자기 과시, 그는 가장 기본적인 자신의 생각마저도 말로 표현할 줄 몰랐다. 그런 능력도 없는 위인이 의원이 되겠다니. 상혁의 질문에 그는 누군가가 작성해준 원고를 줄줄 외웠을 뿐이었다.
“금호동은 나의원님이 딱입니다. 그럼요. 이미 따 놓은 당상인데요, 뭘.”
상혁은 의원이라는 말에 힘을 주어 말했다. 벌써 의원으로 불리어지는 것이 좋았던지 나천만의 입이 귀에 걸렸다. 그가 적임자든, 아니든, 그건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거듭 말하거니와 중요한 건 자신의 손으로 건너오는 봉투였다. 봉투의 부피가 크면 클수록 상혁의 기사도 우호적일 것이다.
모종의 거래라는 것은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다. 한 쪽이 수혜를 입으면 다른 쪽은 손해를 보기 마련. 하지만 그 수혜의 법칙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었고, 모두에게 그 기회가 보장된다는 점에서 수혜의 법칙은 공평했다. 나천만은 알아서 상혁의 주머니를 채워주었다. 상혁은 이번만큼은 진심에서 우러나와 손사래까지 치며 은밀하게 건너오는 봉투를 거절했지만 이미 주는 것에 익숙해져버린 나천만은 강제집행 했다.
상혁은 자신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 참으로 다행스럽게 여겨졌다. 이럴 때는 아예 자신이 투명인간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표정 관리에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될 터이고, 아예 더 달라고 손 내밀어 이 작자의 주머니 안쪽 깊숙하게 숨겨져 있는 비상금을 훑어낼 것이다.
“잘 부탁드립니다. 제가 당선되면 그때는 크게 한턱 쓰겠습니다.”
“아믄요. 그러셔야죠.”
나천만은 문밖까지 따라 나오며 허리를 구십도 각도로 숙였다. 그 모양이 나천만의 눈에 상혁이 보이는 듯했다. 쩝. 상혁은 낮게 혀를 찼다. 결국 자신의 눈에만 자신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밖으로 나온 상혁은 잠시 망설였다. 자, 그렇다면 이제는 어디로 간다? 회사에 가서 목 내밀고 처분을 기다려야 할까? 오죽했으면 그랬겠냐고, 사람들의 동정심을 끌어낼 수만 있다면 눈물, 콧물이라도 짜내며 없는 사건도 만들어야 했다.
가령 어머니가 큰 수술을 받게 됐는데 수술비가 없어서 부득이 그랬다는 식의. 상투적이지만 하는 수 없었다. 살면서 상투적인 것이 때로는 큰 힘을 발휘할 수도 있는 것이다. 아니면 선배에게 가서 이 기막힌 상황의 연유를 떨떠름한 기분으로 들을까?
하지만 이 길만 건너면 또 다른 물주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기호 3번. 위선주. 그의 얼굴이 대형 천에 담겨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위선주의 캠프에 가면 나천만이 건네주는 봉투 못지않게 두둑한 게 나올 것이다. 선거철인 지금이 딱 대목인데, 하필 이때 노래방 건수에 걸리다니. 쯧. 상혁은 저도 모르게 혀를 찼다.
지금 챙기지 않으면 다음 선거철까지는 잘게 살아야 할 것이다. 운이 나빠도 단단히 나빴다. 잘못하면 잘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 당분간은 조심해야 할 것이다. 위험을 감지한 자라처럼 될 수 있으면 목을 깊숙이 집어넣고, 낮게 몸을 낮춰야 한다.
오늘은 그만 돌아가기로 했다. 욕심이 과하면 체하기가 십상이므로.
“여, 이게 누구십니까? 김 기자님 아니세요?”
상혁은 고개를 돌려 자신에게 아는 체를 해오는 사람을 바라보았다. 걸걸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위선주였다. 어깨에 띠를 두르고, 그의 선거운동을 돕는 사람들을 오리새끼들 마냥 졸랑졸랑 뒤에 매달고 얼굴 가득 웃음을 담은 채 다가오고 있는 그의 이마에 기호 3이라고 써넣은 띠가 결연한 모양새로 둘러져있었다. 이건 하늘의 계시였다.
“아이구. 이게 누구십니까? 위 의원님 아니세요?”
이번에도 역시 의원이다. 의원이라 부르는 말에 위선주의 얼굴이 단박 환해졌다.
“어디 다녀오시는 길예요? 혹시 저기 다녀오시는 거 아녜요?”
위선주가 턱으로 가리켜 보이는 곳에 상혁이 방금 빠져나온 나천만이 웃고 있었다. 눈치 하나는 빨랐다.
“그러게 말입니다. 위 의원님도 한번 크게 다뤄야 하는데.”
“정말 이러시깁니까? 저 서운합니다. 제가 뭐 섭섭하게 대해드린 적 있나요?”
“그럴 리가요. 스타는 나중에 등장한다. 그 말 모르십니까? 이건 위 의원님께 드리는 말씀인데, 맨 나중에 기사로 치고 나와야 투표 당일 유권자들이 기억을 제일 많이 합니다. 정치인들이 그랬잖습니까. 우리나라 사람들은 빨리 잊어 먹는다고. 그러니 위 의원님을 위해 마지막을 남겨둔 겁니다.”
“흐흐흐. 그렇군요. 역시 김 기자님밖에 없습니다.”
그의 얼굴에 흡족한 웃음이 떴다. 상혁은 자신의 임기응변이 스스로도 놀라웠다. 살아남으려면 적어도 이 정도는 돼야 하는 것이다. 그러지 않고서야 어찌 이 살벌한 바닥에서 기자행세 하며 살 수 있겠는가. 위선주는 눈짓으로 자신을 따르던 사람에게 슬쩍 눈짓을 했다.
상혁은 그 눈빛이 무얼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 곳곳에서 감시카메라가 돌아가고 있는 이 백주대낮에, 그것도 누가 볼지 모르는 대로상에서 봉투를 주지는 못할 것이다. 상혁은 의미 있는 미소를 지어보이며 느릿느릿 자신의 차를 받쳐둔 곳으로 왔다. 어쨌거나 위선주가 알은 체를 해왔다는 것은 다른 사람의 눈에는 상혁이 보인다는 증거였다.
“저녁에 집으로 술 한 병 보내드리겠습니다.”
위선주의 뒤를 따르던 남자는 위선주처럼 구십도 각도로 절을 했다. 상혁은 느긋하게 차에 올라탔다. 룸미러를 틀어 자신의 얼굴을 비쳐보았다. 역시나 거울 속에 자신은 들어 있지 않았다.
세 시 십오 분. 그나저나 인사위원회가 열리는 시간이 다가올수록 상혁은 뒤가 마려운 사람처럼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그러게 함부로 먹는 것이 아니었다. 몇 번 두드려 보고, 눈치보고 했어야 했는데, 나 죽을 줄 모르고 덥석 물더니. 그나저나 일이 웬만하게 넘어가야 할 텐데 상혁은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그냥 시말서를 쓰거나, 부서를 변경하거나, 그도 아니면 몇 달 감봉조치나, 대기발령이나 두어 달 정직선에서 끝나면 좋을 텐데. 딱히 가지고 있는 것도, 내세울 학벌도, 그렇다고 후광처럼 빛나는 부모덕도 없는 판국에 잘린다고 생각하면 아찔했다.
그 틈에도 상혁의 주머니 속에 들어 있는 핸드폰은 끊임없이 상혁을 불렀다. 노친네였다. 상혁은 핸드폰의 문자 창에 뜬 노친네의 이름을 한동안 들여다보다 다시 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다. 그의 미간이 구겨졌다.
상혁은 목을 꼭 감고 있는 넥타이의 매듭을 헐겁게 풀어냈다. 그래도 답답함은 가시지 않았다. 정희를 불러내 낮술에 취해볼까, 생각했지만 상혁은 정희를 불러내지도 않았고, 계속해서 울려대는 노친네의 전화도 받지 않았다.
상혁은 침대에 털썩 몸을 던졌다. 침대 머리맡에 해피 뉴스 굿 피플의 지난 호들이 가지런히 꽂혀 있었다. 행복한 뉴스 좋은 사람들, 아니 좋은 사람들이 만드는 행복한 뉴스, 그것도 아니면 행복한 뉴스 속의 좋은 사람들인가. 어떻게 불러도 상관없을 것이다.
상혁은 그 가운데 하나 쑥 빼들고 좌르륵, 페이지를 넘겼다. 그렇고 그런 인간들과 사건들이 빼곡히 지면을 채우고 있었다. 다들 환한 웃음을 입가에 매단 채 익명의 독자들을 향해 무언가 말하고 있었지만 상혁은 그들을 믿지 않았다. 그 안에서 낯익은 얼굴들도 보였다. 분칠되고 치장된 인간들. 그들은 상혁과 같은 사람들의 손에서 다시 재조합되고, 수정되고, 다시 태어난 인간들이었다.
의원면직. 상혁은 잘렸다. 피는 사방으로 튀었다. 참으로 붉고도 진한 피였다. 소문은 참으로 빨라서 자신이 회사에서 잘렸다는 소식을 들은 위선주는 술을 보내지 않았다. 인심은 그런 것이다. 술 한 병은 구실이었고, 그 안에 봉투를 넣어주겠다는 말이었는데 기다려도, 기다려도, 술은 오지 않았다. 잘나고, 출세해야 모든 게 옵션으로 따라오는 것이다.
언제 잠이 들었을까. 상혁은 화들짝 놀라 침대에서 일어났다. 사위가 깜깜했다. 핸드폰을 진동으로 돌려 넣은 채 주머니 속에 넣어두었던 것이 생각났다. 행여 위선주에게 전화가 왔을지도 모를 일이다. 상혁은 불을 켜고 벗어놓은 옷 주머니를 뒤졌다. 부재중 전화 24통. 노친네의 전화가 18통이었고, 나머지는 정희의 전화였다. 정희 역시 자신이 잘린 줄 알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갈 여자다.
이제 뭐하고 살아야 하나? 상혁은 또다시 이력서 따위를 쓰고 싶지 않았다. 알량하기 그지없는, 자신의 삶의 이력을 몇 줄 안 되는 칸에 써넣을 때는 어쩔 수 없이 얼굴이 뜨듯해졌다.
그렇게 몇 줄로 요약되는 자신을 목도하고 싶지도 않았고, 그런 식으로 자신을 정리하고 싶지도 않았다. 게다가 그런 자신을 들고 어딘가로 찾아가 흥정하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숨이 붙어있는 이상, 자신을 팔아야만 하리라.
사이비 기자. 그래도 제 인생에 가장 폼 나는 직업이었다. 상혁은 목이 말랐다. 젠장. 손가락 하나도 움직이기 싫은데. 상혁은 굼뜨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천천히 부엌으로 갔다. 아니 부엌이랄 것도 없었다. 그저 한쪽 벽면에 싱크대를 놓고 수도꼭지 연결해 만들어놓은 음습하고 비좁은 공간일 뿐이다. 상혁은 컵을 들고 물을 받다 식탁 위에 올려놓았던 탁상용 거울을 무심코 바라보았다. 역시나 그 안에 상혁은 없었다.
《문장 웹진/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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