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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 가서 증명서류 가져오세요"…'철렁'

忍齋 黃薔 李相遠 2009. 2. 14.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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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 가서 증명서류 가져오세요"…'철렁'

노컷뉴스 | 기사입력 2009.02.14 07:03

[노컷뉴스 장문영 대학생 인턴 기자]

"합격 문자 메시지 받고 그냥 주저 앉아 울었어요"

북한에서 한의사로 활동하던 여성 탈북자가 한의사 국가고시에 합격해 잔잔한 화제가 되고 있다. 지난 2002년 탈북한 한의사 김지은(43)씨. 김 씨에게 한의사 국가고시(64회) 합격은 '지난 시간들을 다 용서할 수 있을만큼' 값진 결실이다.

"지난달 30일 예정보다 빠르게 합격자 발표가 났어요. 인터넷 할 수 있는 곳으로 무작정 달려가는데 국시원(한국보건의료인 국가시험원)과 학과장님으로부터 합격축하 문자를 받았죠. 그냥 풍덩 주저앉아 울었어요 복도에서…. 지나간 시간들에 대해 다 용서가 되더라구요"

김 씨는 북한의 청진의학대학 동의학부(7년과정)를 졸업하고 8년간 한의사로 활동하다 탈북, 지난 2002년 입국했다. 이후 2005년 세명대학교 한의대 본과 1학년에 편입해 4년간 정규과정을 밟았다.

김 씨의 '남쪽 인생' 제1막인 지난 6년의 기간은 이렇게 단 두 문장으로 간추릴 수 있다. 하지만 행간에 압축된 사연을 풀어놓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2002년 12월 김 씨는 통일부와 교육인적자원부로부터 '한국 한의대 6년을 졸업한 자와 동등한' 학력을 인정 받았다. 그러나 한의사 자격시험 신청을 하러 들른 보건복지부에서는 졸업증명서가 없다는 이유로 학력을 인정하지 않았다. 당시 김 씨에게 공무원이 무심코 던진 한마디는 '그럼 북한에 다시 가서 증명서류 가져오세요'

생사를 넘나드는 탈북과정과 철저한 신분조사를 받는 입국과정을 거쳐 힘겹게 남한 사회에 진입한 그녀에게 그 한 마디는 가슴 속에 상처로 남았다.

"처음 남한의 민원창구를 방문했을 때는 참 민주적이라고 느꼈어요. 그렇지만 이 일을 겪으면서 정부 각 부처간 업무가 통합적으로 관리되지 않고 공무원들이 민원의 특수성을 고려하지 않은 채 자기 관할이 아니면 책임성 없이 행동하는 모습을 보게 됐어요. 그 때 느꼈죠. '저기서(민원창구에서) 민원을 해결하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학연이나 지연이 끈끈한 한국 사회에서 부탁할 데 없는 사람들이 오는 곳이 민원창구일텐데 여기서 이렇게 하면 이 사람들은 또 어디로 갈 수 있을까'하고 많이 생각했어요"

결국 김 씨는 한의사 자격시험에 응시하지 못했다. 그러나 지인의 소개로 2004년 7월 한의사 자격시험 응시권한을 요구하는 국회청원을 냈고 언론을 통해 이 문제가 공론화되면서 사정은 달라졌다. 여러 한의대들이 김 씨에게 입학을 권유했고 2005년 김 씨는 한의대 편입학 시험을 거쳐 다시 한번 한의대생이 됐다.

"남한의 한의대는 전국에서 내로라 하는 수재들이 가는 곳이잖아요. 처음에는 제가 나이도 많고 하니까 '왕따 당하지는 않을까' 정말 걱정 많이 했어요. 조금이라도 잘못 말하면 교수님들에게 찍힐까봐 걱정도 됐죠.북한에서 이미 임상실험 과정까지 거쳤지만 교수님들이 물어보셔도 무조건 모른다고 대답하고 처음부터 다시 배웠어요"

'동생뻘 동급생'들과 무조건 똑같이 뒹구려고 애썼던 덕분인지 한의대 동기들은 현재 그녀의 든든한 지원군이 됐다. 성적이 낮아서 유급당하지는 않을까 하루하루 가슴 졸이며 보냈던 첫 학기. "누나를 유급시키면 우리가 데모할거에요"라고 말하는 동기들의 우스갯소리는 말 그대로 우스갯소리지만 그녀에게는 큰 힘이 돼주었다.

2007년 관련법이 개정돼 탈북자 출신 의사나 한의사들도 심의를 거쳐 국가고시를 볼 수 있게 됐다. 김 씨 역시 지난해 한의사 자격시험 응시가 가능했다. 하지만 그녀는 시험을 치르지 않았다. 1년만 더 공부하면 대학 졸업장도 받고 응시 권한도 부여받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보면 자격증만 빨리 따면 되는 것이 내 상황이죠. 하지만 대학을 포기하면서까지 자격시험을 치고 싶지는 않았어요"

남한 사람이 된 후 힘든 일도 많았지만 좋은 사람도 많이 만나고 진정으로 자기 삶을 즐길 줄 알게 되었다는 김 씨. 현재 그녀는 고향인 청진과 자신의 이름을 딴 한의원 개업을 준비하며 남한에서의 인생 제 2막을 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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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중심언론 CBS 뉴스FM98.1 / 음악FM93.9 / TV CH 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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