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맨십도 리더십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정치에 갓 입문한 1990년대 초 김동길 교수, 박찬종 의원과 좌담을 하는 자리에 갔다. 이 대통령은 가장 과묵한 쪽이었다. 다른 두 참석자가 장안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울 달변가인 데다 좌담 참여 경력으로 봐도 '선수'들이라 이 대통령에겐 좀처럼 말할 기회가 오지 않았다.
그로부터 15년쯤 지난 후 이 대통령이 서울시장 임기를 마치기 직전 인터뷰를 하게 됐다. 그땐 한 시간 반 동안 얼마나 빠른 속도로 이야기를 쏟아냈는지 손이 저리도록 받아써야 했다. 차기 대선 후보의 말이라 흥미진진했다.
며칠 전엔 이 대통령이 지난주 뉴질랜드·호주·인도네시아 순방을 마치고 귀국하는 비행기 안에서 녹음한 주례 라디오 연설을 들어봤다. 이 대통령은 "비행기 안에서 녹음해 소음이 많으니 양해해달라"면서 연설을 시작한다. 그러고는 피곤한 목소리로 연설문을 읽어나간다. 내용이 재미있는 것도 아니고 놀랄 만큼 중요한 정보가 있는 것도 아니다. 조금 듣다 보면 지루해져서 금방 딴생각을 하게 된다.
대통령과 국민들 간의 원활한 소통엔 '장치'가 필요하다. 민주당 전당대회 연설 한번으로 전국적인 스타 정치인이 됐던 오바마도 대통령 취임 후엔 연설의 마법이 서서히 풀리고 있다. 백악관 웹사이트와 유튜브에 올린다고 해서 화제였던 주례 라디오 연설 동영상도 요즘엔 인기가 시들하다. 처음엔 일주일 만에 60만명이 봤다고 하더니 이젠 수백명이 볼 뿐이다.
단순히 정기적인 소통 창구를 열어놓는 것만으론 부족하다는 걸 소통의 달인이라는 레이건 대통령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주말에 데이트하는 연인들이 화제로 삼을 수 있는 내용이 한 가지쯤은 들어 있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주례 라디오 연설을 했다고 한다. 또 대통령 자신의 이야기가 아니라 국민들의 이야기를 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그러나 레이건은 또 한편으론 '멍청한' 실수를 잘하기로 유명했다. 연설문을 읽다가 '다음 페이지로'라고 쓰인 지문까지 읽어 청중이 폭소를 터뜨리게 만들었다. 주례 라디오 연설을 할 땐 방송이 시작된 것도 모르고 소련에 폭격을 할 계획이라고 엉뚱한 이야기를 해서 참모들을 기절초풍하게 만들기도 했다. 당연히 '머리가 나쁘고 뭘 잘 몰라서 저런 실수까지 한다'는 평이 따라붙었다.
훗날 평가는 좀 달라졌다. 대본을 보는 데 익숙한 배우 출신이 지문까지 읽는 실수를 했을 리는 없다는 것이다. 영화배우 출신이라고 해서 '딴따라 대통령'이라 불렸던 레이건이지만 그는 '쇼맨십'이 얼마나 효과적인 정치적 재능인지를 보여주었다.
귀국행 비행기 안에서 연설을 마치며 이 대통령은 "어렵지만 우리 모두 희망을 가집시다"라고 말한다. 인터넷에 올려 있다 뿐 발상은 1930년대 식인 이 일방적인 연설을 듣다 보면 대통령과 그 참모들이 정말로 소통의 중요성을 이해하는 것인지 의문이 든다. 리더십의 핵심은 국민들의 어려움에 공감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는' 능력이라는 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
- 강인선 기획취재부 차장대우
'4. ETIC > 41_스크랩' 카테고리의 다른 글
AIG의 보너스 파티 (0) | 2009.03.19 |
---|---|
아버지의 '유창하지 못한' 영어 (0) | 2009.03.17 |
[스크랩] 고속도로 무료 견인....... (0) | 2009.03.13 |
세상이 당신을 배신하거든 (0) | 2009.03.11 |
보수적인 사람들이 포르노 많이 봐 (0) | 2009.03.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