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닭·오리' 묻은 곳 주변 지하수 오염 심각
표본조사 15곳중 14곳 생활용수로도 못 써
가축 매몰지 전국에 1000여곳… 인근 지하수 대부분 하수도보다 더 썩어
"(지하수) 물에서 냄새가 나 양치질을 하면 구역질이 났어요."(충남 천안 주민 A씨·51)
마을 주민들은 물 걱정을 했다. 집이나 농장 부근에서 끌어다 쓰는 지하수가 언젠가부터 '이상해졌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왜 그런지는 짐작만 할 뿐이었다. A씨의 인근 마을에 사는 B씨(50)는 "정수기로 지하수를 걸러 먹다가 (정수기 사용을) 그만뒀다"고 했다. 2004년 어느 날, 정수기 회사로부터 '웬일인지 필터가 금세 더러워진다'는 말을 들은 뒤부터였다.
이들 마을엔 공통점이 있다. 고병원성 조류독감(AI)으로 살(殺)처분된 수만 마리의 닭·오리 등이 집이나 농장 옆 혹은 마을 어딘가에 파묻혀 있다는 점이다.
정부도 매몰 가축의 부실한 처리가 지하수를 오염시켰을 가능성이 큼을 인정하고 있었다. 본지가 입수한 환경관리공단의 'AI 발생 주변지역 환경영향조사' 비공개 보고서에 따르면, 공단이 전국의 조류독감 닭·오리 매몰지(埋沒地) 1000여개 지점 중 15개 지점을 표본으로 뽑아 정밀조사한 결과 14곳(93%)의 지하수가 식수로는 물론, 일반 생활용수로도 쓸 수 없을 만큼 심각하게 오염된 것으로 확인됐다. 또 15곳 중 8개(53%) 지점에선 가축 매몰지에서 오염물질이 흘러나와 주변지역의 지하수까지 오염시킨 것으로 나타났다.
보고서에 나온 수질오염 상황은 대단히 심각했다. B씨의 마을을 포함해 조사대상 매몰지 14곳의 인근 지하수가 하수돗물보다 훨씬 더 썩었고, 땅속 4~8m 깊이에서 흐르는 지하수가 산업단지 폐수 원액 농도만큼이나 썩어 있는 곳도 있었다. 또 대부분 매몰지에서 먹는 물에선 검출돼선 안 될 대장균군(群)과 일반세균이 환경기준의 수십~수천 배까지 검출됐다.
정부 관계자들은 가축을 매몰할 때 오염확산에 대비한 조치를 제대로 취하지 않아 구덩이 바닥에 깐 비닐 등이 파손되면서 오염물질이 지하수로 스며들었을 것으로 추정했다. 이 같은 조류독감 가축 매몰지는 전국 1000여곳에 달한다.
◆실체 드러낸 '2차 환경오염'
지금까지 국내에선 AI가 세 차례(①2003년 12월~2004년 3월 ②2006년 11월~2007년 3월 ③작년 4~5월) 휩쓸고 지나갔고, 닭·오리 같은 가금류와 철새 등 약 1800만 마리가 살처분돼 전국 1000여개 매몰지에 묻혔다.
환경관리공단은 환경부 의뢰로 이 중 충남 천안시(5곳)와 전북 익산(4곳)·김제(3곳)·정읍(2곳), 경기 평택(1곳)의 매몰지 15곳을 골라 그 주변지역을 대상으로 작년 6월부터 정밀 환경영향조사를 벌였다. 각각의 매몰지마다 내부에 한 개, 그곳에서 수m~수십m 떨어진 매몰지 외부에 네 개씩 모두 75개 지점에 관정을 판 뒤 19개 항목에 걸쳐 지하수 수질을 측정했다.
이 보고서는 "조사 대상 15곳 중 8곳에서 매몰지 침출수가 확산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침출수가 확산된 것으로 꼽힌 지역은 15개 매몰지 가운데 천안시 5곳, 김제시 2곳, 정읍시 1곳 등이다.
정부 관계자는 "작년에 판 매몰지는 물론 2004년 파묻은 곳에서도 침출수 유출은 계속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며 "이 침출수가 어디까지 퍼졌는지는 땅을 일일이 파봐야 할 만큼 가늠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우려돼 온 매몰지의 '2차 환경오염'이 현실로 나타난 셈이다.
◆하수도 물보다 더 오염돼
지하수의 오염 정도는 말 그대로 심각했다. 매몰지 주변지역 15곳 중 14곳의 지하수에선 먹는 물에선 전혀 검출되지 말아야 할 대장균군이 100mL당 평균 3800MPN(대장균군 측정의 최소 단위), 최고 2만MPN까지 검출됐다. 일반세균은 1mL당 100CFU(일반세균 측정 최소 단위) 이내가 먹는 물·생활용수의 수질기준이지만 14곳에서 평균 3만여CFU를 넘었고, 19만CFU를 초과한 지점도 있었다.
대표적 수질오염 지표인 생물학적산소요구량(BOD)과 화학적산소요구량(COD) 농도를 보면 오염 실태를 더 쉽게 알 수 있다. 팔당호의 수질은 BOD 기준 평균 1~1.5ppm, 하수도 물은 150ppm 정도, 가장 수질이 좋지 않은 물로 통하는 쓰레기매립장의 침출수도 400~800ppm 정도다.
하지만 조사 대상 15곳 지하수의 BOD 평균치는 563ppm이었고, 가장 심각한 곳은 무려 4767ppm에 달했다. COD 농도 역시 평균 1187ppm, 최대 9947ppm으로 고강도 정수 처리를 해야 겨우 농업용수(10ppm 이하)로 쓸만한 수준이었다.
많이 마실 경우 아이들에게 호흡곤란 등을 일으키는 질산성질소의 농도는 7곳에서 먹는 물 기준치(10ppm)를 넘어섰다. 이 밖에 염소이온과 전기전도도, 용존산소 등 매몰지 침출수의 특성을 나타내는 또 다른 지표들도 일반 지역의 지하수보다 더 높게 나왔다.
◆전체의 1~2%만 환경영향조사
문제는 이런 상황이 '빙산의 일각'일 수 있다는 점이다. 이번 환경영향조사는 전체 매몰지의 1~2%만 표본으로 뽑아 실시됐을 뿐이다. 98~99%의 매몰지 주변지역 지하수들이 얼마나, 어느 정도까지 오염됐는지는 전혀 알 수 없는 것이다.
서울시립대 김계현 교수(토양오염전공)는 "비용 문제가 있지만 미래의 더 큰 환경피해를 막으려면 전국의 모든 매몰지를 대상으로 지금이라도 환경영향평가를 실시해 대책을 마련하는 것이 원칙"이라고 했다.
AI(avian influenza)
닭·오리·칠면조·철새 등 조류에 발병하는 급성 바이러스성 전염병. 동남아에선 사람에게 전염된 사례도 보고됐다. 고병원성 AI에 걸린 조류들은 살(殺)처분해 땅에 파묻거나 소각한다. 국내에선 2003·2006·2008년 세 차례 발생해 지금까지 총 1800만마리의 조류가 전국 1000여곳에 매몰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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